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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주일 (행 2:1-4) – mission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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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12/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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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중앙교회 / 예배와 말씀 / 목양칼럼

자, 오늘은 성령감림절기의 첫 주일인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기는 주님 부활하신 후, 처음 성령을 받았던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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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jm.or.kr

Date Published: 2/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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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설교 메시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 크리스천투데이

이영훈 목사 2017년 설교 “모두 성령 충만 받고 복음의 증인 되시길” · 1. 보혜사로 오신 성령님. 첫째로, 성령께서 보혜사로 오실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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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8/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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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강림 주일, 그때와 지금: 표적과 기사에 신학적 …

2022년 6월 5일은 성령강림주일이다. … 12:8-10의 모든 영적인 은사가 오늘날에도 교회의 복음 전파에 유효하다고 설교한 Martyn Lloyd-Jones의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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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scoramdeo.com

Date Published: 8/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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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설교모음 – 다음블로그

성령강림절설교 15편 모음 ▷ 1.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5-18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15절에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가 될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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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7/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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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주일 – 경동교회

오늘은 교회가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 3대 축일이지요.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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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dchurch.or.kr

Date Published: 3/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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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도행전 1:4-8] 성령강림주일 설교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예수님을 하늘로 들어 올리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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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kumc.org

Date Published: 8/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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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25 성령 강림 주일 설교 Best 286 Answer

절기 설교 – mission – 성령강림주일 (행 2:1-4); 강남중앙교회 / 예배와 말씀 / 목양칼럼;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 그때와 지금: 표적과 기사에 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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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odaithanhmai.com.vn

Date Published: 9/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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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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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주일 (행 2:1-4)

성령강림주일 (행 2:1-4)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첫째는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하는 사건과 둘째는 내가 그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사건일 것입니다. 성령님이 초대교회에 임하신 사건은 지구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것이 인류 최대의 사건이냐 하면 비로소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절을 교회의 생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 받기 전까지는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야 했는지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으로는 도무지 풀지 못하는 문제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풀리지 않던 사건을 풀리도록 한 날이 성령님의 강림일 입니다. 이 날은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후 오십 일째 되는 날이기에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이 보혜사란 영어로는 돕는 자,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슬픔을 당하고 있을 때 몹쓸 병에 걸려 있을 때 하나님이 언제나 동고동락하시면서 우리의 주인으로 함께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주의 일을 한다는 것처럼 고문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목회 한다는 것처럼 저주는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되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고,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이고, 사람이 거듭나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며, 능력과 기적도 성령의 역사로! 열매 맺는 신앙생활, 능력 있는 신앙생활도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함께 행1:4, 5절을 읽겠습니다. “4)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10일이 지난 후 성령님은 강림하셨고 모여서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사람들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이 약속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때로부터 약 830년 전에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진 약속이기도 합니다. 욜2:28,29절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고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누구에게 주십니까? 행2:3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만이 아니라 어떤 제한된 숫자나 특별한 사람에게만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먼데 사람! 즉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들 속에 저와 여러분이 들어 있는 줄 믿습니다. 이 약속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부어준다는 약속입니다.

특별히 38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무슨 말씀입니까? “회개한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모든 먼데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러니 이 약속은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받은 여러분들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행1:8절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권능을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여러분의 일생을 드리기를 원합니까? 어느 정도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 이 질문에 “아멘”을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령을 대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행1:15절에는 이 사람들의 수가 120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는 열두 사도가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도 그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중에 있었고, 예수님의 동생들이었던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누이동생들(마13:55-56, 막6:3),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던 여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집 안의 장남 아닙니까? 장남이 집 안을 책임져야 하는데, 매일 밖으로만 나돌고 집 안 일은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에게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지요? 요한은 아예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7:3-5)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했던 이 형제들이 120명중에 있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 성령 강림 역사를 소개하면서 중요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은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같이 기도를 해도 서로 다른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들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어 “주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역사하십니다.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대선의 모든 식구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고 서로 사랑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리워하는 오순절의 모습입니다.

2.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임하셨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임하셨습니다. 어떤 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습니까?

첫째는 약속을 붙잡고 기다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인 장소는 “다락방”(행1:13)이었습니다. 일명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 승천의 광경을 바라본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오순절 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승천 할 때 예수님의 분부하심을 들은 사람은 500여명 정도였지만 10여일 동안 그 약속을 변함 없이 믿고 기다린 사람의 수는 120명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1:14)

어떤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붙잡고 기도에 전무 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디 약속의 말씀을 강하게 붙잡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관심이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남아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성령 받는 일보다 더 관심 있는 일이 있는 사람들은 그 곳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정말 관심을 많이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는 성도들을 볼 때에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더욱 주님과 교회에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일과 주님의 교회에 대한 관심이 그 외의 어떤 것에 대한 관심보다 더 크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먼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들은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소리가 많습니다. 많은 소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소리가 있습니다. 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습니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전에는 없었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방언을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오순절에 주신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요20:19-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이 성령을 주신 목적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내 보내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심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확신하시고 이 고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인하여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령강림절에 이것을 기대합니다.

1)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불신자가 신자로, 전에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들이 하나님으로 채워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2) 인격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을 장악하기 시작하니 인격이 변화됩니다. 삶이 변화됩니다. 언어가 변화됩니다. 생활이 달라집니다. 열매가 없었던 사람이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3) 능력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들의 몸을 통해서 나타나니 그들이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결심해도 되지 않던 일이! 마음을 먹어도 되지 않던 일이! 그렇게 몸부림치고 안타까워 울어도 되지 않던 일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립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심령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행2:26) 즉 마음의 기쁨과 육체가 희망이 나타났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다윗의 예언이지만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이와 같이 썩을 수밖에 없는 육체이지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말하기를 “마음이 즐거우면 종일 걸어가도 피곤치 않지만, 마음이 괴로우면 십리길만 가도 지친다.”고 했습니다. 스펄젼은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는 웃는 은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만이 참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적인 사건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신실하게 기도하고 성령을 대망 하는 성도들과 교회들에게서 오순절 적인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는 줄 믿습니다.

모쪼록 성령강림절에 우리 모두 성령을 대망 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존재의 변화, 인격의 변화, 능력의 변화, 심령의 변화를 맛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강림주일에 물어보는 세 가지 질문’

‘ 성령강림주일에 물어보는 세 가지 질문’

자 , 오늘은 성령감림절기의 첫 주일인 [ 성령강림주일 ] 입니다 . 성령강림절기는 주님 부활하신 후 , 처음 성령을 받았던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한 곳에 모였더니 ”( 행 2:1)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이 유월절이었고 이후 50 일째 되는 절기가 오순절이었는데 ,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예배할 때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 그래서 이에 대해 세 가지 질문으로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자 , 1) 먼저 , 하나님은 왜 성령을 ‘ 오순절 ’ 에 내리셨을까 ? 하는 질문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순절은 어떤 의미 이길래 ? 그것은 바로 이 날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날 ’ 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이 50 일 후인 3 월 첫날에 시내산에 도착한 것입니다 .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부릅니다 . “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 출 19:1)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친히 ‘ 말씀 ’ 하신 것입니다 . “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 출 20:1) 즉 , 오순절은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2) 두 번째 질문은 , 그럼 이 오순절에 내린 성령을 통해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 입니다 .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성령에 대한 오해에서 나오는 힌트가 될 수 있습니다 . 성령이 오순절에 내린 것과 또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탄생일이기 때문입니다 .

즉 ,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이 땅에 세워졌는데 , 그 성령이 바로 ‘ 말씀하시는 영 ’ 이라는 것입니다 . 그래서 당시 성령임재의 첫 장면이 이렇게 씌여진 것입니다 .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행 2:4) 여기 ‘ 다른 언어들로 ’ 는 지금의 방언이 아닌 당시에 상용되던 언어로 , 모든 사람들에게 ‘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통해 ’ 구원의 경륜이 전파된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이것을 신기하게 여겼던 사람들은 제자들을 향해 “ 새 술에 취하였다 ”( 행 2:13) 고 하였지만 , 베드로와 열 한 사도가 함께 소리를 높여 그것이 아님을 , 선지자 요엘과 다윗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합니다 .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 행 2:37) 즉 , 그들이 ‘ 성령의 말하게 하시는 말씀 ’ 을 듣고 그 영이 움직여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성령에 대한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 먼저 , “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 의에 대하여 ,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요 16:8) 입니다 . 즉 , 성령이 우리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 말씀 ’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 또한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 요 16:13) 입니다 . 여기서 ‘ 진리 ’ 란 세상이 말하는 진리가 아니라 ‘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 ’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이것이 우리교회가 말씀에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 교회가 세워진 오늘 ,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계 2:11) 의 말씀을 다시 새겨봅니다 . 이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한 차례입니다 . 바로 3) 세 번째 질문은 , 나는 어떻게 성령과 동행하고 있는가 ? 입니다 .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 그때와 지금: 표적과 기사에 신학적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가?

홍성철 교수(코닷 사설위원, 죠지뮬러 바이블 칼리지 교수, 칼빈대학 대우교수)

2022년 6월 5일은 성령강림주일이다. 이 주일은 하나님이 종말론적 선물인 성령 하나님을 부어주어 선교와 사역에 능력을 주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기여하도록 하신 위대한 사건을 기념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 현상이 교회 역사상 유일하고 그 강도는 현대의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논의의 초점은 이것이다. 성령 하나님에 의한 표적과 기사가 주의 말씀을 거스르는가? 필자는 “표적과 기사”와 고린도전서 12:8-10의 모든 영적인 은사가 오늘날에도 교회의 복음 전파에 유효하다고 설교한 Martyn Lloyd-Jones의 말에 동의한다.

신약 시대에 복음이 다양한 인물 묘사와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표적과 기사가 초대교회에만 해당하는 말인가?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다 – 결코! 그런 발언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Martyn Lloyd-Jones, The Sovereign Spirit, pp. 31-32)

여기에서 어떤 현대적 사역 패턴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성경적 이유와 몇 가지 반대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말하고 싶다. 이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계시된 말씀의 최상권, 즉 하나님 중심적, 성경적 근거, 그리고 칼빈주의적 헌신에서 나온다. 표적과 기사의 경험이 성경과 설교의 중심에 해로운가? 다시 말해, 하나님의 기록되고 전파된 말씀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폄하하는 것인가?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의 충분성과 모순되는가? 표적을 찾는 것은 십자가의 말씀에 대한 확신의 상실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성경 본문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16절은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표적과 기사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다.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고전 1:22-23 ). “십자가의 도는 … 하나님의 능력이요”(고전 1:18). 표적을 구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자신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셨다( 마 12:39, 16:4 ).

그러나 표적과 기사에 대한 모든 갈망에 대해 이 본문을 가져오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것은 너무 많은 것을 증명할 것이다. 표적과 기사를 원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을 희석한다면, 초대 그리스도인들과 사도들 자체가 사악하고 간음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강력한 설교와 함께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기를 그토록 열렬히 원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은 사도행전 4장 29~30절에서 “주여 그들의 위협함을 돌보시고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병을 고치시려고 손을 내밀어 표적을 보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주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기사를 행하옵소서.” 여기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누가는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표적과 기사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그들을 복음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하지 않고 복음에 대한 증인으로 묘사한다. 사도행전 4장 29~30절에서 교회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기적이 개종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적어도 17번이었다. 가장 명확한 예는 사도행전 9:34-35 및 9:40, 42절이다.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고치자 누가는 “룻다의 주민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더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니 누가가 이르되 이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곧 표적과 기사와 같은 기적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이 누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이유이다.

하나의 질문, 즉 왜 표적과 기사가 복음의 능력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는가에 대한 대답은 기사와 말씀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누가의 설명에서 나온다. 사도행전 14장 3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시니”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다. 그들은 말씀과 경쟁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씀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설교의 말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씀의 가치와 진리,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신성한 증인이다(히 2:4; 막 16:20 참조). 표적과 기사는 구원의 은혜 말씀이 아니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은혜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의 이차적 증거다. 그것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다. 그것들은 복음에 수반되는 음악이나 예술이나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표적과 기사는 사탄이 모방할 수 있지만(살후 2:9 ; 마태복음 24:24), 복음은 사탄의 본성과 완전히 반대된다. 마음을 변화시키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자기를 증명하는 영광이다(고후 3:18-4:6).

그러나 표적과 기사가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무관심의 껍질을 깨뜨릴 수 있다. 표적과 기사가 냉소주의의 껍질을 깨뜨릴 수 있다. 그들은 거짓 종교의 껍질을 깨뜨릴 수 있다. 은혜의 말씀에 대한 다른 모든 선한 증인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타락한 마음이 영혼을 구원하고 자기를 인정하는 주님의 영광이 빛나는 복음에 시선을 고정하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사모했다. 그러므로 필자는 말씀의 중심에 대한 우리의 열정에서 십자가의 말씀을 대적하는 표적과 기사를 만들어서 말씀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바울만큼 말씀의 능력을 질투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명을 그리스도께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롬 15:19 ) 자신을 통해 일하신다고 설명했다. 이것들은 독특한 “사도의 표징”이었고 따라서 우리에게 유효하지 않은가?

표적과 기사가 초기 기독교의 그것과 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 자체는 오늘날도 유효하고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성령강림주일을 맞아 표적과 기사에 대한 신학적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성령강림절설교 15편 모음

▶ 1.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5-18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15절에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

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이겠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인

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첫째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상인은 어떤 상인입니까?

물건을 사들일 때와 물건을 내어다 팔 때를 잘 아

는 상인이 지혜로운 상인일 것입니다.

지혜로운 상인은 제 값 받고 팔아야 할 때와 싸게 팔

아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잘 분별하여 압니다.

요즘 천안에 이마트가 오픈 되어 많은 사람

들이 찾는다고 합니다. 한번은 저녁 늦게 찾았더니

물건을 훨씬 싸게 파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일까지 두어 상품의 가치가 손상될 것이라면 헐값에라도

빨리 처분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

사일 것입니다. 이마트 뿐이겠습니까?

지혜로운 상인들은 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농부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밭을 갈아야 할

때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할 때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거두어야 할 때를 알아 잘 거두어

들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학생은 자기가 지금 어떻게 공부해야

할 때인지를 잘 압니다. 열심히 해야

할 때와 조금 쉬어도 될 때를

잘 알아 지혜롭게 공부를 잘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잘 깨

달아 압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고,

성경을 배워야 할 때 성경을 배우고, 전도해야 할

때 전도합니다. 그리고 봉사해야 할 때를 알아

자기의 달란트를 따라 충성하며 봉사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 모든 성도가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중요한 사실

을 언급합니다. 16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말세에 지혜로운 성도는 어떤 성도입니까?

세월을 아끼는 성도입니다. 세월을 아

끼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말씀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지난주일 저녁에 TV에서 잠깐 보니까 함석헌 선

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 중, 선생은 일생은 날로 계산하지

않고 시간으로 계산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하루를 살았다 하지 않고 24시간을 살았다

고 하고, 1년을 살았다고 하지 않고 8,760시간을 살았다고

계산하는 식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우리의 일생이

얼마 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0년이면 한 8만 8천시간, 100년이라야 88만 시간 정도

사는 것입니다. 한 80세를 산다고 하면, 70만 시

간 정도 사는 것입니다. 그 중에 잠자는 시간을 빼면

우리가 산다고 하는 시간은 더 짧아집니다.

쇠털같이 많은 날들이라고 생각해서 어영부영 하다가는

아무 것도 해놓은 일이 없이 우리

일생이 다 날라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금년도 벌써

5월이 다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제대로 찾아 진정으로 시간을 잘 관리하

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는가 하면,

17절에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되 어떤 쪽으로 아껴 써야

지혜로운 자가 되는가 하면 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쪽으로 세월을 아끼는 자가 지혜로운 자가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잠 많이 안자고 시간을 아끼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시간을 아끼는 것 이상

으로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맞춰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 참으

로 지혜로운 성도들이 할 일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어떻게 사는 것이 주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이어

지는 18절 말씀에 그 답이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은 술 취하지 말

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에베소>는 번화한 도시로 방탕의 중

심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술취함이 그 사회의 자랑이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에베소>가 우리 나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네마다 골목골목마다 술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TV

드라마는 술 취하는 것을 미화하고 툭하면

술 취한 장면을 방영합니다. 대학생들의 신입생

환영회는 술에 취하는 파티가 된지 오래고,

술을 권하고 술에 취하는 것이 일상인 사회가

오늘 우리가 속하여 있는 사회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마시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몇 잔씩 마시는 것은 아무

렇지도 않은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술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술은 취하라고 마시는

것이 아니냐면서 결국 취하는 단계로

나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술 취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방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술은 우리의 이성을 혼돈시킵니다.

그래서 술에서 깬 사람은 자기가 술 취해서

한 실수 때문에 크게 낭패를 보

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술에 취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을 술 취했기 때문

에 하게 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술집이 기생집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그만 큼 술과 성적 타락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술 취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술에 취해서는 절대로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

다. 술에 취하는 순간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상실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과 술에 취하는

것은 전혀 상반된 일이기에 같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술에 취할 수 없고,

술에 취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해졌는데,

어디 기분 좋게 한잔하고 멋지게 놀아보자는 생

각이 듭니까? 은혜 받고도 그런 생각이 드셨던 분이

계시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구해 보게요. 반대로 술에 취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드디어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이 있습니

까? 성령은 알콜의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성령과 알콜은 같이 하지 않습

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한다면 알콜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 주님이 주문하시는 내용입니다.

<오직>이라는 것은 다른 것의 여지를 두지 않은 것입

니다. 우리가 충만해져야 하는 내용은 <오직>

성령 밖에 없다는 강한 표현인 것입니다. 우

리는 오직 성령으로만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성령 충만>이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성령 충만이 무엇이기에

모든 교회마다 성령 충만,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을 부르짖고 있습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내 심령이 충만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우

리가 충만해지면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게 되고, 내 속에 가득찬 예수 그

리스도를 통해, 그의 인격이 나타나게 되어 변화된

삶을 살게 되고, 내 속에 가득찬 예수 그

리스도를 통해, 그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여러 가지 이적과 기적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갈라디아서 2:20의 고백과

로마서 14:8의 고백이야말로 성령 충만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

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항상 이 고백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게

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삶을 살게 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

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

리스도를 닮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같은 성령의 열매로 같이 가야 하는 것

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그 교회 성도 가운데

한 사람은 1년 365일 매일 열심히 전

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열매가 없다고 합니다.

그 생활을 들여야 보니까 영 덕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었더랍니다. 예수님 닮은

성령의 열매가 전혀 없이 증거의 열매만 맺

으려고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 두 열매는 같은

성령의 열매이기에 같이 나타나야 정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도 나왔듯이 성령의 충만은 <받는 것>입니다.

능동태가 아니고 수동태입니다. 내가 만들어 낼 수 없고 내가 쟁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동태인데 명령형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

이 아니지만 받기를 강력히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에 이르는 길은 사모하

고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고넬료의 집에 모인 성도들

에베소교회 성도들

성령의 충만을 왜 사모해야 합니까?

성령의 충만이 왜 필요합니까?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령의 충만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 2.성령충만한 자의 담력

/행4:13-22

어느 교회에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질

아니해서 아내로서

그 남편을 위해서 늘 기도하며 꾸준히 권면을 하고

늘 교회에

함께 나가기를 독려했습니다만은

그렇게 쉽게 따라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주일날 아침에 남편이 느닷없이 하시는 말씀이

“나 오늘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려는데”라고 하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보다 하고 서둘러서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게 됩니다.

가면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늘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시나?

모처럼 가는데 좋은 목사님이 설교하셔야겠고

무슨 제목으로 하실까?

어떤 본문을 보실까? 이 첫 번 교회에 나가서 바로

은혜를 받아야 하겠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며

교회에 나갔는데 주보를

딱 받아보니까 본문이 뭐냐하면 창세기 5장이더라구요.

찾아보려고는 하지 마세요.

창세기 5장에는 사람의 이름만 나옵니다.

이 계보라고 하는 족보가 쭉 나오는데 사람의 이름만 나와요.

아, 이거 큰일났거든요. ‘어떡하나 이거’ 거기에 보면

대체로 요약하면 그래요.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다. 셋은 912세,

에노스는 905세, 게난은 910세,

마할랄렐은 895세, 야렛은 960세,

그리고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고 죽었다,

뭐 그런 얘기예요. 이 집사님은 깜짝 놀랐어요.

이거 어떡하나?

모처럼 제 남편이 교회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좀 낙심이 되지만은

여호수아 6장 1절을 생각했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면서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마치고 나올 때에 남편이 “여보 등록합시다” 그러더랍니다.

그리고 가서 등록용지를 찾아서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겠다고

등록을 했어요. 참 이거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래 집에 돌아가서

음식을 잘 차려서 남편에게 대접을 하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 특별한 말씀을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말씀을

들었기에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남편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이거 대체로 많이 살기는 했드만.”

그러나 죽었더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너도 죽어’ 그러더랍니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질 않다.

내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믿기로 했노라 그러더랍니다.

참 용기의 근본이 어디에 있습니까? 심리학자들이

심층분석해서 연구해 보면

사람은 두 가지 걱정밖에는 없답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죽음이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이 내게 다가오고 있어요.

그게 첫째고,

두 번째는 죄 문제입니다. 죄에 대한 가책이올시다.

사업이 안돼서

고민하는 게 아니에요. 죄가 생각나서 그래요.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할 때도 자녀를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내 죄 때문에 얘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 고민이에요. 감기만 걸려도 벌벌 떠는 것이

다 죄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에요.

비가 안 오는 것도 뭐 여러 가지로

얘기하지만은 이것도 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늘이

문을 닫지 않았나, 그래 고민이에요. 죄 문제, 죽음과 죄 문제,

이것이 근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가치관을 배우고

세계관을 배우고 많은 귀한 교훈을

예수로부터 배우겠다 하고 예수를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복도 받고,

출세도 되고, 성공도 얻고, 무엇인가 예수로부터 권력도 얻고,

예수로 인해서

무언가 내 소원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십 년을 교회에 나왔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게 되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이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설교말씀을 들을 때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중생하여 순간순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한 단 더 나아가서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 이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올시다.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 존재의 참 비결은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아는 데 있는 것이다.’

성령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올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의 속성을 아주 단면적으로

확실하게 말해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

대표적인 그리스도 인이 지금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라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 나라의 종교정치를 통합한

그런 귀한 국회와 같은 공회입니다. 여기서 생사를 결정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까지 여기서 재판을 해버립니다.

예수님도 사실은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고 빌라도의 손을 의지해서

빌라도를 통해서 사형집행을 한 것뿐입니다.

사형판결은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재판 받으실 때, 베드로가 저 뒷전에서 벌벌 떨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습니다.

오늘 그들의 특징은 담대합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돈은 있으나 용기가 없어요.

지식은 있으나 용기가 없어요. 여건도 그만하면

괜찮은데 용기가 없어요.

왜 이렇게 쫄아들고 있느냐? 왜 이렇게 비겁해졌느냐?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의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눈 앞에는 지금 공회의 회원들 71명이 즐비하게 앉아서 아주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아주 저 사람들을 아예

다 말살해 버리려고 하는 그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를 또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하나님을 본 거예요.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의식을 가진 거예요.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건, 어떤 말,

어떤 일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의식이 더 충만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 옛날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 라고 하는 의회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역시 생사권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현장에 서서 스튜트가르트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요만한 표식이 있는데,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이건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있습니다.’ 딱 한마디입니다.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섰습니다. 바로 이 의식, 그 정체 의식,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스데반이 순교할 때만 해도 헬라파 유대인들,

왕년의 동료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를 갈며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거기에 보좌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내가 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에 저 사람들이 돌을 던지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항상 초점을 하늘에 두고 삽니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 의식이 그 충만함이올시다.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이라고 하는 분이 ‘생명의 샘’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개인의 모든 삶은 카리스마적 체험이 된다.’ 성령에 사는 사람의 경험,

지식, 모든 사건이 전부 카리스마적 의미를 가지게 되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문제가 되요. 카리스마적 체험으로 의미가

바꾸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요. 모든 일에 하나님과

나와의 은사적 관계, 카리스마적 관계가 되더라는 얘기입니다.

또한 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그대로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역사적인 예수,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고 멀리 가버린 분이 아니에요.

이제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셔요.

Exalted Christ라고 그럽니다.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Living Christ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했어요. 그런고로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 성전 문에 앉아있는 사람,

하루 이틀 본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 성전에 올라가면서

딱 만나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감동해서

‘넌 왜 보고 지나가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 40세 된 이 사람을 향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했더니 벌떡 일어났어요. 모든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우러러보며 하고 있지만은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나와 함께 있다고 하는 증거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거예요.

그것 뿐이요.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이 자리에 나타나셨느니라”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충만함입니다. 내 손으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다 주님이 직접 나를 통해 역사하는 것뿐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 역사하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고 그렇게 순종하게 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제 나를 지명했다는 데 대한 감격으로 삽니다.

하필이면 왜 나 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나 같은 사람입니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고용하시고 나를 사용하시고

나와 함께 역사하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필이면 허물 많은 나 같은 사람, 나약한 나 같은 사람,

어지러운 과거를 가지고 사는 왜 나 같은 사람입니까?

사도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했고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다.

죄인의 괴수다. 그러나 내가 직분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나를 사로잡고 나를 포로해서

나를 통해 역사한다는 거죠. 너무 감격스러운 거예요. 어찌해서

주는 나를 사용하시는 겁니까?

그런고로 이런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는데 누구를 용서 못합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는데

바울의 고백대로 보면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그는 나를 사랑하셨는데

이제 내가 누구를 미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올시다.

저는 좀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게 되고 자기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아마 이 문제에 더 신경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베드로의 용기가 가상해요. 왜냐하면, 보세요.

베드로의 과거를 다 알고 있잖아요. 이게 오래 전 된 얘기도 아니고

불과 몇 일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베드로가

도망갔던 사람 아닙니까?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사람 아닙니까?

다 알고있어요. 모두가 알고 있어요. “저 사람이 수제자라고 하면서

도망갔댔다며?” 다 아는 그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가 지금 담대하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그것이, 그것이 알고 싶어요.

보통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게.

그의 어두운 과거를 다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

불학 무식한 것까지 알고 있고 그가 갈릴리 물고기 잡던

어부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어요. 형편없는 인간이다 이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나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을 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는 거예요. 과거가 아무리 그의 발목을 잡아도 상관없습니다.

지난날에 내가 누구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오직 주의 사람으로 주님이나를 쓰신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거만 가지고 역사합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일 입니까?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자기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다는 게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더구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찬송가 20장을 보면 “다 감사드리세” 하는 가사입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마다 자주 부르는 찬송입니다. “다함께 감사드리세”

하는 찬송인데 이 찬송가의 역사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 작사자인 마르틴 린카르트라고 하는 분은 독일의 목사님입니다.

17세기에 독일과 그 모든 구라파에 흑사병이 유행했습니다.

참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좌우간 기록에 보는 대로

이 목사님에게도 하루에 수십 명씩 죽고요,

하루에 오십번 장례식을 했답니다.

자기 아들도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기록대로 보면은 이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이

흑사병 걸린 사람들을 돕는다고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돕는다고 하다가 다 전염 되가지고 수도원에 거미줄을 치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으로 막 죽어갈 때입니다. 거기에 대한 얘기가 많이 있잖아요.

영화도 많고. 이때에 자기 아들도 죽었는데요

목사님은 “다 감사드리세” 라고 하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몸과 정성 다하여 다 감사드리세. 본 회퍼 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는 말합니다.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은

간단하게 구별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하는 것은 세상사람이요 오로지 감사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세계를 전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저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부활, 머지 않아서 곧 나 자신이 부활이라고 믿고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해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은

만족한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초월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두 가지 걱정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또 하나는 ‘벌 받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두 가지 걱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충만합니다. 충만한 체험. 그리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충만한 감성, 충만한 의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런고로 만족합니다.

여기에 충만함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올시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학무식했다고 합니다. 아그람마타,

글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용기는 지식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지탄 없이 말하더라. 용기는

환경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충만한 가운데,

오직 충만함이 사랑으로 향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로마를 가면 한 번씩 다 보게 되는 원형극장이라고 있지요.

원형경기장.

그 옛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기서 수십만 죽어갔습니다.

거기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기록 속에 이러한 유작이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나는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으십시오.

나는 사랑의 숨결을 불어낼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버리십시오.

나는 사랑의 재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워 주십시오.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로 가득한 마음을 녹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웃으면서 그들은 죽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함입니다. 근심, 걱정, 모호함과 두려움,

다 사라집니다. 깨끗한 영혼, 밝은 미래, 오직 사랑으로.

그래서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담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진실한 용기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으로 인한

이 위대한 용기와 담력이 오늘 우리가운데

또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넉넉한 가운데 살면서도 근심이 많고,

좋은 여건을 바라고 살면서도 용기가 없습니다.

어느 사이 이렇게 비굴해졌고 비겁해졌고 초라해졌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 이 모든 정욕과 우리를 얽매이는 시험으로부터

벗어나서 성령 충만한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이 담력과

위대한 용기 속에서 승리 생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성령강림

/요1:32-34

우리 교회의 표어 가운데 하나는

<인간성의 회복(人間性 回復)>의 주체(主體)가 되는

“성령의 불을 던지자”(눅12:49)입니다.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形像,Imago Dei)대로 지음받았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靈),

성령이 부어져 인간은 영(靈)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관계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세 가지 형상 즉, 하나님의 불멸성(不滅性),

지력(智力),자유의지(自由意志),

기타 여러 가지 정서를 포함하는

자연적 형상과 인간외에 다른 생물을 주관하는

정치적 형상,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순결성,

진실성 등이 인각(印刻)되어 있는 도덕

적 형상 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웨슬레).

인간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나 범죄

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성육(成肉)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한 인간의 죄를 십자가로

해결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이 인간의

영에 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잃어버렸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밝히며 의지와 감정을 바로 잡으며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영과 육을 아울러 정결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희열을 맛보게 하며 우리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연합을 실현시켜주며 우리로 하여금 양자로서의 확신을 가지게 하며 창조주의 모습을 본받게 합니다.> (웨슬레).

진정한 인간성 회복은 성령이 몸과 혼, 그리고 영을

온전히 지배할 때 이루어집니다.(The

Spirit has more of me!) 누가복음 12:49의 “불”은 성령의

불로서 복음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처분하시는 그의 성역(聖役)을 가리키며 소멸시키며

정결케하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말합니다.

증거되는 말씀에 성령의 불을 던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성(尊嚴性)을 회복시킵시다!”

요한 복음4:24,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이 말씀은 ‘성령은 곧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그의 작용에 있어서 말씀(성경)보다

휠씬 더 넓은 영역(領域)을 가집니다.

성령의 경험들은 언어의 말들 속에서만 나타날 뿐 아니라

감각적(感覺的) 현실 자체만큼

매우 다양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령의 형식(形式)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신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은

우리 안에 있는 의식(意識)의 계층(階層)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감각들을 깨우며,

무의식적인 것과 육체 속에 꿰뚫고

들어가며 육체를 생동 케 합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

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삶을 위한 새 에너지(energy)가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현대

적 병을 앓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참된 성령의 체험은

<삶에의 사랑의 회복, 생동력의 회 복>을 가져다줍니다.’삶에 대한 단호한 긍정’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단호한 사랑’은 하나

님의 영, 곧 성령의 첫 경험들인 것입니다.

성령의 경험을 통한 <삶에의 사랑>은 삶의 병(病)들과

장애(障碍)들과 연약성에도 불구하

고 삶을 긍정하며 ‘죽음에 대항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예수를 슈퍼맨(super man)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의 인간적 고난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 인간적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

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역동적(力動的)인 사랑(요3:16)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십

자가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역동적인

사랑의 삶을 살게 하는 원천(源泉)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 일서4:8)

유명한 현대 신학자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활동들의 리듬과, 눈들의 광채와,포옹

들과,느낌들과,냄새들과,

형형색색의 이 창조의 소리들을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을 내가 사랑할 때,

나는 모든 것을 껴안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피조

물 속에서 나는 나의 모든 감각들을 가지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나를 기다립니다.

오랫동안 나는 당신을 내 안에서 찾

았고, 내 영혼의 달팽이 집 속으로 기어 들어갔으며,

접근할 수 없는 장갑차를 가지고 나를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바깥에 계셨으며,

내 마음의 좁은 데로부터 나를 삶에 대한 사랑의

넓은 영역 속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 밖으로 나왔으며, 나의 영혼을 나의

감각들 속에서 발견하였고,

내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의 경험들을 더 깊게 하였고

그것을 위축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나는 더욱 더 여기에 있고 싶습니다.

내가 보다 더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여기에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더욱 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삶의 무한한 원천을,

삶의 영원을 느낍니다.”

인간의 삶에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과 지혜가,

그리고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성령은 이와 같이 역사(役事)하십니다.

미가서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성령)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

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스겔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또 내 신(성령)을

네 속에 두어…”

위의 말씀들을 보면 성령은 무엇보다도

선지자들을 이끌어주고 그들에게 영감(靈感)을 주

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때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일을 행하십니다.

첫째로,

성령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진리를 가져다주십니다.

둘째로,

성령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보게 되었을 때 그 진리를 인식(認識)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셋째로,

성령은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주십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경험들은 대개 잠시 머물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신,

예수께서 경험한 성령은 순간적인 영감(靈感)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임하신 방법과는 아주 다른 독특한 방법으로,

그리고 독자적(獨子的)으로 영구(永久)히 정착(定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본문33절).

<세례(baptism)>라는 말은

‘물에 담그다’,혹은 ‘물에 잠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 습니다.

요한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가

성령에 깊이 잠겨 삶이 거기에 스며들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몰입(沒入)되고 우리

의 마음과, 생활과, 존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충만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들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사람들에게 묻어 있는 불결한 것들을 씻어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

고 옛 사람은 물 속에 장사(葬事)지내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종전과 다른 새로운 삶으로

나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례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우리가 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첫째,

우리의 인생이 계발(啓發)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

의 뜻이 명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도(意圖)하심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의 의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빛의 일부가

우리에게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이 강하게 됩니다.

능력 없는 지식은 마음만 괴롭히고 좌절 의식만 주는 것 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들에게 올바른 것을

아는 지식만 줄 뿐 아니라 올바른 것을

행할 힘과 능력까지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인생에 대처하여

이기고 나갈 수 있는 적응력을 주십니다.

셋째로,

우리의 삶이 정화(淨化)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베푸는 세례는 불세례입니다(마3:11,눅3:16).

여러 가지 악한 쓰레기나 저급한 혼합물이 정결하게 되고

불태워 없애 버린 후

에야 비로소 인간은 정결하고 순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삶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과 자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삶의 기쁨만 아니라 삶

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매일 세례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향한 사랑의 역동성(力動性)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세례가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 4.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행2:1-4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더불어 끝까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겨우 120명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예루살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그 말씀을 믿고,

성령을 받기 위해 열흘 동안 한 곳에서 합심기도를 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해서 부흥회를 한 것입니다.

하루, 이틀, 성령강림이 있을 때까지

그들의 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열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오직 성령, 오직 예수가 그들의 기도 목표였습니다.

드디어 오순절날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 눈에 보였습니다.

그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렸습니다.

동시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1단계 약속이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난 중에 초대교회가 탄생된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충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면 누구나 꼭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적극적인 명령이기 때문입니다(엡 5:18).

우리가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구약시대는 성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때였고,

그 후에는 성자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셔서 다스리셨고,

예수님 승천 이후에는 바로 성령께서 다스리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직접 따라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복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잡히시게 되니, 그렇게 큰소리를 치던 베드로가

아주 하찮은 비자에게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고 난 후,

베드로의 마음은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큰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붙들어서 이단자로

처형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가 메시야시며,

당신들이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가 죽은 지 3일 만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으며, 당신들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우리도 성령충만을 받아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을 때, 비로소 오직 예수, 오직 성령 하고

기쁨으로 전도를 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알게 하고, 또한 전하게 하며,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허락하신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말세에 하나님께서 남녀 종에게 성령을 물붓듯이

충만히 부어 주시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지금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그 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어떤 특별한 선지자들이 왕에게만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셨습니다. 또 성령이 오셨다가 가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세시대, 믿는 자가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충만을 주십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성령충만한 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난 뒤부터 언제나

혼자서는 일하시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베드로를 통해서 큰 일을 하셨습니다.

회개운동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루에 3,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으니 얼마나 큰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성령충만을 주셔서 합작으로 한 일입니다.

또 성전 문앞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

이 사람의 직업은 거지입니다. 장애자요, 거지니까,

최고 불쌍한 자입니다.

이 사람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서 건강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사도 요한과

베드로, 두 사람이 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했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이 이런 큰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뿐만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빌립 집사도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광야로 가 이디오피아 간리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전도해 그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만 믿고 예수를 이단자로 생각하여

예수 믿는 자를 크게 핍박하고 없애고자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그의 잘못을 깨닫고 즉시 회개한 뒤부터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어 이방의 여러 곳을 다니며 갖은

고생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전도에 성공하고,

신약성경을 그의 손으로 반이나 기록하기까지,

이러한 큰 일을 하게 된 것은 오직 그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바울 사도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령충만한 자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성령충만은 우리 한국 교인이 받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한 기독교가 유럽으로 가서

유럽인을 문화인으로 만들었고, 아주 잘사는 민족으로 만들었습니다.

잘산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건전한 생활, 삶의 질을 말합니다.

그 다음, 기독교가 동아시아로 와서,

극동인 한국으로 와서 아주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한국은 비록 기독교가 전래된 역사가

일세기를 겨우 넘겼지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받는 교회에서 지금은 주는 교회로 바뀌어졌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수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또 선교지에 많은 학교를 세우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여러 나라는 우수한 우리의 선교사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사계절이 있기 때문에 더운 나라, 추운 나라,

어떤 나라에 가서도 선교가 가능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은 먹지 못하는 음식이 없습니다.

징그러운 뱀까지 몸 보신한다고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뱀을 식용으로 먹는 아프리카 원시족,

어떤 종족에 가서도 그들과 같이 먹고, 자고,

선교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한국 사람은 양순한 민족이어서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과거 19세기에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복음을 전한 서구인들과는 다릅니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라도 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교권 나라에 가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니,

이런 곳에 가서는 전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회교권에 속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회교국인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지금 우리 나라에 노무자로 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적은 숫자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외국인 노무자

선교회에서는 그들에게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많은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또한 머잖아 남북이 통일될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세계 사람들이 지금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북한에 들어가서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하는데

성령충만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북한을 복음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북한 전도는 외국 선교사들의 몫이 아니고 우리의 몫입니다.

여러분,

이 민족을 복음화시킬 사명을 지금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결 론

지금 세계는 이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북한을 제외한 모든 나라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물건들이 국경없이 팔려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발전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복음 전도입니다.

우리 민족의 살 길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민족을 문화민족으로,

세계의 자랑거리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직 이 나라에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남북한

합쳐서 4천만 명이나 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오순절 교인들처럼 오직 예수, 오직 성령충만을 목표로

기도함으로 성령충만을 받아 남북한 뿐만 아니라,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못한 수십 억이나 되는

세계 여러 나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동참합시다.

이것이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 5.오순절 성령강림

/행2:1-13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 성령세례를 받으리라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약속하셨던 성령님,

제자들이 목마르게 기다렸던 성령님이

임하신 모습과 반응이 본문입니다.

1.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오신 성령님(1, 2)

성령님이 120명의 성도님들에게 오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인간의 노력이나 지혜,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2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했으니 전혀 예상도

기대도 못한 때에 갑자기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처럼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입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감을 보며 느낍니다.

1.1.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함(14)

2 : 1에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는 1 : 14이

보여 주는 것 같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함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약속과 명령이 있었으므로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10일째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마땅히 할 일이지 기도했으므로

성령님이 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성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온 땅을 두루 살피시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기다리는

성도와 교회를 찾으시사 능력을 베푸십니다.

1.2.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

오순(五旬)절은 제50의 뜻이며 유월절의 제2일 무교병

먹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칠칠절이라고 하며 보리 추수 때라고 ‘맥추절’, 이때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첫 열매의 날’이라고도 하는데 추수하게 됨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또한 부활도 주일이요,

오순절도 주일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며 감사하는 날에

성령님이 오셨으니 더욱 뜻이 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성도들에게

기쁨과 감사를 주시려고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2. 바람같이 임하신 성령님(2)

2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집에 가득하며”로 성령님이 임하심을 묘사하셨습니다.

성령님을 나타내는 단어는 ‘바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바람은 아니고 바람에 비유되는 것은

바람의 작용이 성령님의 작용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볼수는 없으나 현상으로 알고 바람소리를 들음같이 청각적으로

느끼도록 오신 성령님입니다. 그리고 온 집에 가득하여

성령님은 참석한 성도들에게 희한하고 독특한 체험을 하도록

하셔서 사람들을 확 바꾸어 놓았습니다.

3. 불같이 임하신 성령님(3)

3절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로 묘사하였습니다.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임하신

성령님의 모습이지 불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성령님을 이같이 ‘바람’, ‘불’, ‘비둘기’ ‘기름’,

‘생수’, ‘인'(도장)(엡1 : 13) 등으로 비유하는데

바람과 불을 들고 볼 수 있는 대표적 비유입니다.

출 3장에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에게서도 볼 수 있고,

왕상 18, 38에 엘리야가 기도할때 내린 여호와의 불로도

나타났으며 이사야 등 구약에서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심을 볼 수 있으나 신약시대에는

성령님이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2, 3절에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람같은 성령님, 불같은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120명의 성도들은 변화를 받았고 특별히

12명의 사도들은 담대하여져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능력있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창립한 것을 봅니다. 성

령님은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4. 모두 성령충만함을 받음(4)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성도들은 모두 성령충만함을 받아 성령님의 인도따라

방언을 말하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4.1. 성령충만함이란?

성도들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통치와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 세례란 한번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요 충만은 반복되는 것으로

계속 충만을 받아야 능력있게 일할 수 있으며

주위를 변화시킵니다.

성령충만에 방해가 되는 것은 범죄와 불순종입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며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곧 성령 충만은 성도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쓰임 받는 은사의 역사로 담대히 시련을 극복하며

말씀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4.2. 방언을 말함(4, 6, 8, 11)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였던 여러나라 사람들이

모두 자기 난곳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을 듣는 일시적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말을 성령님이

통역하신 것이며 제자들이 계속하여 방언을 한 것이 아님은

베드로가 노년에 로마에서 전도할 때는

마가의 통역이 필요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방언은 바벨탑(창11) 사건으로 혼잡해진 언어가

성령안에서 하나됨과 복음이 만방에 전파될 것의 상징과

막16 : 17, ‘새 방언’함에 대한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큰 일'(11) 곧 십자가와 부활을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힘있게 전파했습니다.

4.3. 놀람과 조롱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일을 난 곳 방언으로 들을 때

소동하며 놀라며 감탄했으나 일부는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13)

하는 악령의 역사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염려와 고통은 내 자신이

나를 의지하고 다스리는데서 시작됩니다.

염려 많고 삶의 고통에 시달려 물고기 잡으러 가던

제자들이 사자처럼

담대한 전도자가 된 것은 성령충만에 있습니다.

담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겠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충만하면 모두가 능력자가 됩니다. 아멘

▶ 6.성령강림과 그리스도인의 삶

/행2:1-13

오늘은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함께 지키는 성령강림절입니다.

이 성령강림절은 구약시대의 맥추절이

예표하던 것은 성취된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맥추절을 “맥추감사절”이라는 이름으로

6월경에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맥추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전의 일입니다만 우리 교단신문인

「기독교보」의 사설에

맥추절에 대한 기사가 이렇게 실려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구약성도들에게만 해당되고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신약성경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신구약 성경이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근래 어떤 교인들이 맥추절을

농사하는 시골 사람들에게나 해당되지 도시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한다.

어리석기 한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이해한 것은 맥추절의 의미를 신약의 성령강림절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추수에 대한 감사절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교회가 맥추절과 성령강림절을 따로 지키고 있는데

이것은 이 날들이 서로 다른 날로 오해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단지 형식에 얽매여서 봄 추수의 결과로 드리는 전반기 감사와

가을 추수의 결과로 드리는 후반기 감사의 날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이 날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맥추절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고,

성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절기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맥추절은 신약의 성령강림절입니다.

이 성령강림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성탄절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과 더불어 구속역사적인 면에서 동일선상에

두어야 할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기념하면서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성령이 강림하셨던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사건을 연구하면서 첫 번째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

두 번째로는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 번째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

오순절에 성령이 주님의 약속대로 강림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주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이후에 성령을 보내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들은 사도행전 1장과 요한복음 14-16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설교하신 내용이 기록된 요한복음 14-16장에서는

성령의 이름을 언급하시고, 그 성령님이 하실 일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요14:16, 26, 15:26; 16:7).

이러한 약속이 역사 가운데

실제로 성취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주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취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본문에 가시적으로 나타난

세 가지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가시적 현상은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내려와

그 소리가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게 되었고(2절),

두 번째 가시적 현상은

혀가 불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3절).

이 3절은 특히 우리 한국교회에 잘못 이해되어져서

우리 개역한글판에 있는 것처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혀들이 불같이 갈라지는 것”

(tongues as of fire distributing NASB)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될 때

세 번째 가시적 현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가시적 현상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방언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당시의 세계의 사람들이 다 모여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라의 말로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시적인 현상은 성령이 약속대로 임하셨다고 하는 것을

증거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오순절에

특별한 방법인 세 가지 특이한 현상을 보여주면서 성령님이

오신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 현상들은 각 사람이 성령을 받을 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에 약속대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임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언제 임하셨는지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강림이 일어난 때에 대하여 말하기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하였습니다.

오순절은 구약의 맥추절입니다.

출애굽기 23:14-17절 보면 유월절과 맥추절

그리고 장막절이라고 하는 세 절기를 매년 지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 절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된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긴 설명이 없어도 다 알고 있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은 구속사의 시대사적인 전환기에 따라

신약에서 어린양의 예표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예표하는 날로 보기 때문에

구약에서의 유월절은 신약에서의 부활절로 전이(轉移)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신자들은 구약의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고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맥추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에 지켰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 날을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절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기념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바로 이 날에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면 대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칠칠절은 유월절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

백성들이 기업으로 얻은 가나안에서

누리는 즐거운 삶을 기념하여 지켰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면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게 된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칠절절이 유월절의 결과로 구원을 얻은

백성들이 기업으로 얻은 가나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기념하는 절기가 예표하고 있는 대로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사는 역사세계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구원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구원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사건입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이 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이 이제 그 분의 백성들로

그의 몸을 구성하시고(교회를 이루시고),

그 분이 그들을 위하여 이루신 것을 그들 안에서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의 성령을 보내셨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은 되풀이될 수 없다.

성탄절이나 고난, 부활, 승천,

성령강림절은 매년 돌아오는 것이지만,

그 절기들이 기념하는 예수님의 탄생, 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을 주시는 사건은 역사상 단 한번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성령님의 오심에 대한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구원의 사역을 실제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하고 계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여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행하신 구속역사의 객관적인 사실을 신자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구원적용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성령강림과 그리스도인의 삶

그러면 성령강림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성령님이 교회에

임재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과의

관련성에 대하여서는 신약성경 전체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쓴 요한1서 3:24에 보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요한1서 4:13에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분명한 몇몇 구절들을 볼 때 성령은

계속하여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 임하시는 것은 역사상

단 한번 특이한 방법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는 항상 교회 가운데 계시며

복음을 믿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적용시켜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복음을 전파하게 하여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행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복음을 믿게 하고,

동시에 증거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방법

그러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누가복음 11:13에서 답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국교회에 잘 알려진 박성수 사장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 랜드”라는 조그만 옷 가게로 시작하여

지금은 “이 랜드 그룹”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 분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근육무기력증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 분은 한국적인 상황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일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성령을 의지하여 많이

기도하면서 정도를 걸었습니다. 그럴 때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하여 환경을 인도하시고

사람들을 변화시켜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신앙간증은 한국적인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믿음의 가족들도 말씀을 순종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방법을

아주 폭넓게 적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는 경건의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기도의 실천, 성경의 묵상,

우리에게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믿음의 사람들과의

교제와 주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는 데서,

그리고 성찬과 공예배의 출석 등이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방법이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한 방법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도하고,

순종하며, 부지런히 예배에 참여하여 성도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 속에 항상 내주해 계시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들을 잘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

오늘 어떻게 우리 개인의 삶에 역사하시는 지를

배워서 성령의 다양하고

풍성한 역사를 경험하면 좋겠습니다

▶ 7.오순절 성령강림

/행2:1-4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성령강림은 기독교 역사상

대 분수령에 해당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성령 강림은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약속하신 성령께서 임하시는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성령론은 조직신학에서도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구원론을 다루면서 성령의 사역을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잘못된 성령론이

한국교회에 많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령론을 다루기가 조심스럽기까지 한 실정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하여 알아야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고 역사 하시는 이 성령을 모르고는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습니다.

2:1절을 보면 성령이 임하신 날이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을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래 오순절은 성령강림절은 아닙니다. 지금도 반복되는

성령강림을 주장하는 소위 오순절파들은 성령의 역사를 많이 강조하는데,

오순절과 성령강림절을 같은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성령강림절은 지킬 수 있어도 구약적 의미의

오순절은 이제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순절은 구약이스라엘이 지키던 삼대절기 중에 하나입니다.

삼대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을 기준해서 오십일 되는 날입니다.

원래 칠일이 칠 주간 지난 날이라고 칠칠절이라고 합니다.

오순절은 오십일 째날입니다. 유월절부터 계산해서 칠 주간,

즉 사십구일 그 다음날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또 오순절은 맥추절이라고도 하는데,

처음 익은 보리 곡식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서

맥추절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수고하여 얻은

곡식의 처음 것을 드린다고 초실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도 몇 날이

못되어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그

날이 바로 승천하신 후 10일 째 되는

오순절 절기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돌아가신 것이나,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의

역사가 일어난 것도 이 절기 때에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서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절기 때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며, 절기 때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유월절 전날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다음날 유월절에는

무덤에 계셨고, 유월절 다음날,

곧 오늘로 말하면 주일날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유월절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느냐면,

요 18:28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들이 곧 유월절 명절이요,

안식일에는 사형집행을 하지 말자고 하여 안식일 되기

하루 전 금요일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일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유월절이 안식일이고, 그후 50일 후면 바로 주일 아닙니까?

이 주일에 성령 강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일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신약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과

성령강림의 날이 다 주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요,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신 날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양의 피로

구원받은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오순절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지 50일되는 날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입니다.

유월절 날 어린 양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피 흘려 죽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유월절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출애굽

오십일에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 오십일 만에 구원받은 우리들의 삶을 인도할

보혜사로 성령을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 때는 아직 다 나타나지 않아서 희미하게 보여주시면서

이스라엘에게 대대로 유월절,

오순절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는 다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오순절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성령을 보내주신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성령의 강림을 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순절에 한번 이 땅에 임하신 성령께서 떠나지 않고

땅에 충만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들이 구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초대교회에 약속하신 것은 성령 강림하심이라면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성령 충만함입니다.

성령충만을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믿는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성령은 역사하시는 영입니다.

잠잠히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감화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대로 행하도록 우리에게 증거하시며, 위로하고 권면하며,

또한 모든 현실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여서 우리에게 담대와 용기를 주십니다.

이를 위해서 탄식하기까지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기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또 친히 우리들의 성화를 위해서 간구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성령은 성화, 성결의 영일 뿐 아니라 또한 선교의 영이십니다.

우리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충만을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피동하고,

그 지배를 받는 것을 성령충만이라 합니다.

또한 그 성령은 능력의 영이신데,

이 능력을 받아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생각하면 성령충만은 은혜충만입니다.

은혜가 있을 때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즐겁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피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을 때는 모든 영적인 일에는 관심도 없고

자꾸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전도도,

희생도 하게 되고 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으면 모든 일에 불만 불평, 원망 낙망뿐입니다.

이 은혜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하느냐는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은

그 이유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게 됩니다. 권능은 받아서 무엇합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능력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서 경배를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계집 아이 앞에서도

부인했던 비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후에

그가 설교했을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베드로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복음을 담대히 전하므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2절부터의 말씀은 성령은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면서 성령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49보면 “위에서부터

능력이 너희에게 입히울 때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누구에서 일어나는 능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잘못하면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쉽습니다. 오직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

병도 낫게 하시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

영광을 받으실 분이 누구입니까? 이는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입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나면서 앉은 뱅이 된 사람을 일어나

걷게 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베드로를 숭배하려고

할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행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일입니다.

제자운동이 좋은 영향을 끼치면서

또한 위험하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훈련되고 만들어진 제자가 주님의 제자여야 하는데 훈련을 하다보면

자신의 제자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이 무서운 함정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령의 능력사역을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이 미혹에 빠지지 말아야합니다.

침으로 성령의 능력은 놀랄만한 기적과 능력입니다.

그러나 단지 기적을 일으키게 하고,

사람을 뒤로 자빠지게 만들고,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론을 알아야하지만 잘못 배우면 크게 잘못됩니다.

성령을 주시는 목적은 성령이 오면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권능은 어떤 능력의 종이라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의 권능을 입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나타난 특징이 있습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체가 없습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능력도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능력의 역사로 일어나는 결과를 보고 알 뿐입니다.

2절에 보면 성령이 임할 때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였고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바람으로 표현한 것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 같이 성령이 일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따라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물체를 보고서 바람의 방향과 바람의 존재를 아는 것 같이

성령께서 하신 일의 결과를 보고서 그 능력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급하고 강한 바람’이라고 한 것은

성령의 역사의 긴급성과

그 성령의 능력의 강하심을 보입니다.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긴급하게 또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성령의 능력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주님 승천하시고, 50년만에 이 복음은 유럽 각지를 흔들고,

로마를 점령할 뿐 아니라,

지금은 세계를 복음으로 정령하고 있습니다.

급한 바람, 강한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는 지금도 급하게 강하게 역사 하십니다.

구약시대 애굽사람들이나 블레셋이나 그렇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았지만,

그들이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대는 더 악하고 강퍅한데,

우리들이 어떻게 복음을 들었습니까?

성령의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역사로 우리들이 복음을 들을 때에

강권적으로 듣게 하시고 믿어 구원 얻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성령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붙들고,

강하게 급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전도를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며, 회개시키겠습니까?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로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믿고 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를 해야합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바람으로 상징했습니다.

바람은 운동을 말합니다. 오늘 신약시대는 성령의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부는 때입니다. 이 때에 우리가 복음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고, 또 성령의 급하고 강한 바람 운동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할 때에 우리들이 바람을 타면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할 때에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주일이 태신자전도, 총동원주일인데, 이 때에 이 바람을 타고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성령이 기도하고 있는 제자들과 그 온 집에 충만하여서 거기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감동이 되어 능력을 받고, 곧 나가서 역동적이고

위대한 복음의 증인이 된 것 같이,

오늘 우리에게 역사 하시는 성령도

급하고 강한 바람이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또 성령의 임하심을 불의 혀 같이 갈라진 것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렸고, 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불의 혀 같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습니다.

성령은 불 같이 임하십니다.

‘불의 혀’라고 하는 표현은 성령이 나타나시는 능력을 말하는데,

불은 바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신 성령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불의 역할이 그러하듯이 성령이 임할 때에 모든 인간들의 죄악들이

다 불태워 없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눅3:16에는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은 태우는 것입니다.

녹이는 것입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태워 없애버리는 불처럼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모든 더럽고

추한 죄악들이 다 태워집니다. 어떤 바로와 같은 완고한 마음이라도

녹이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 영혼이 경건하고 헌신적인 열정으로 뜨겁게 합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혀가 갈라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이 무슨 뜻인지

현상적으로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혀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복음 진리를 선포하는 때에

역사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갈라진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말씀 가운데 임하면

갈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에 그 앞에서 죄와 의가 갈라지고,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고, 신본과 인본이 갈라집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구별됩니다.

하늘의 운동과 땅의 운동이 갈라집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나타나는데

그 때에 모든 죄악과 인본과 멸망 받을 것들과 의와 생명과

거룩한 것들이 갈라지듯이 드러나게 되면서 모든 잘못된 죄악들은

불같은 성령에 의해서 태워지고, 의와 경건으로 불 같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불과 같고 혀와 같은

성령으로만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불과 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8.오순절 성령강림절 메시지

/행2:1-21

새 천년을 맞고 있는 우리는 이제 21세기에 걸맞은 새 국가건설에

노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남북정상회담은 해방 이후 첫만남으로

냉전극복에 대한 통일염원의 실천이며

새 천년 화해와 협력의 전기가 되는

6.13 남북 정상회담과 그 민족사적 의의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6.15 남북공동선언”을 적극 찬성하고,

화해 정착을 위해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제는 분열과 대결의 지난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을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것을 다짐해야 한다.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는 성서의 말씀 아래

김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먼저 제의하고 화해의 사도로서 먼저 찾아가고 민족화합, 상호불가침,

교류협력의 3대 남북 기본합의서 원칙을 재확인하는 등 북조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열렬한 환영과 북한 인민들의 눈물과 신들린 환영인파는

한 민족 반세기의 한을 풀어주기에 넉넉했고, 남한 온 겨레의 피솟는

감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화해의 움직임은 7천만 민족의 화해 일치의

실천자가 되어 냉전 체제를 종식시키는 계기가 될 것을 믿는다.

하나의 민족이 전쟁을 일으켜 동족상잔의 피를 흘린 지 반세기(50년),

그 희년의 역사를 계획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남과 북의

정상이 서로 만나기 전 비행기 트랩 위에서 잠시 기도하는

대통령의 모습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 하심을 생방송으로 세계와 함께 볼 수 있었다.

또한 ‘내가 해방되었다’고

고백하는 북조선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고백 속에서

그동안 우리 모두가 감옥을 만들고 스스로 갇혀 살았던

냉전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는 성령의 은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은 과거 역사로부터의 단절이며 미래의

새 역사에 돌입하는 하나의 기회이다.

희년 정신의 중요성은 공동체성의 회복,

곧 일치에 있다. 한반도에 있어

공동체성의 회복과 일치는 민족의 통일과 민족의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한편 교회력의 새 천년

첫 성령강림절에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한 사건으로

이어지고 평화정착의 전기를 마련한 점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한 민족을

역사(役事)하심이라 생각하고

이것은 우연한 예사로움이 아닌 것을 깨닫게 한다.

성령강림주일을 지내면서 성령강림절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두 종류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오순절날 모인 제자들에게 임한 불같은

성령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하심으로서 그 곳에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인데 요한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고요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자제하는

듯한 역사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행 2:1~21, 요한20:19~23).

우리는 요한복음 쪽이 바른 것이고

다른 한편은 초대교회 당시 제자들의 지나친

열성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바르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둘 다

성경에 속하는 것이요, 신앙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수세기에 걸쳐 교회들은 이들의 특성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성과는

명확히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가장 좋은 길은 한편을

틀린 것으로 하여 제거하기보다는

둘 다 진실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강림하시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성령강림절에만 역사한 것이 아니고

창세기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리라”와 같이 처음부터

영원까지 계속적으로 역사

하는 것이다. 성령강림절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다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오셨는가를

이해하는데 제일 쉬운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역사 할 때가 있다.

우리 인생의

긴 여정에는 높은 산꼭대기도 있고 깊은 계곡도 있다.

모든 것이 다 잘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때도 있으나 어둡고 절망적인 순간이

닥쳐오는 때도 있는 것이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위해 적절한

방법을 택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임재한 것처럼 때에 따라서는

고요하게 거의 알 수 없게 마치 숨결처럼 우리에게

임재 하신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부활절 저녁에

예수는 성령을 그 제자들에게 불어넣었으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체험이다.

죽어 가는 자의 숨결이다. 세미한 음성을 들은 엘리야처럼

고요한 성령의 숨결을 통해

우리의 사명을 깨닫고 마음에 참된 평화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동분서주하며 돌아다니는

일상생활 중에서라도 고요히 묵상하며 성령의

임재 하심으로 내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크신 힘을 의지하여 이 사명을 다하는

충성된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으며 성령의 역사(役事)

안에서 또 그 역사를 통해 역사 안에 계속 참여 하셨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내용이지만 이 복음을 ‘사회에 변화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실재’로 만들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이 없었다면 세상에는

아무런 교회도 없었을 것이다.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며(계2:7,11,17,29),

교회를 세상에 보내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는 분도 성령이시며(행13:1~4)

교회가 모든 환경 하에서 복음을

충성되게 증거 할 수 있도록 능력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오순(50)절 성령강림사건과 6.25한국전쟁 발발 50년 되는 해에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화해정착의 전기가 마련되게 된 것은 온갖 죄와

죽음의 세력에 예속되어 속박 당하고

있으면서 분열과 적대와 갈등의 현실에 매여 있는

인간의 해방, 화해, 평화, 통일(일치)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 사건은

둘이 하나되는 사건임을 고백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발전은 교회성장이라는 명분으로 양적인

팽창만을 도모해 오면서 교회는

서로를 경쟁상대로 이해하게 되어 교파간의 협력 없이

교회지상주의와 성서절대주의로

교회를 역사와 사회로부터 유리시키고 신비주의와

기복신앙으로 그릇된 한국형 교회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 한국교회의 면면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모습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 아래 지나온 55년 간 지속된 분단상황에서

이념적인 대립과 맞물려 철저하게 반공을 앞세운 교회는

역사와 미래에 대하여 문을

굳게 닫아걸고 살아왔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상과의 사이에

쳐 놓은 담을 헐어야 한다.

인간이 무덤 속에 설정해 놓고 모든 절대적인 권위로

군림하고 있는 교리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세를 낮추고 세상 속으로

진실하게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교회와 국가,

신앙과 정치, 또는 이념의 담을

헐어야 하며, 교파 사이에 쳐놓은 담도 헐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역사의 현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선교에 용기 있게 동참하여 화해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교회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일치와 화합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역사적인 6.13 남북정상회담은

해방 이후 첫 만남으로 냉전극복에 대한 통일염원의 실천이며,

새 천년의 민족사적 의의를

더하여 가면서 우리 앞에는 민족 구원과

하나님 선교를 이어가야 할 책임과

민족의 통일이라는 커다란 과제가 놓여져 있다.

민족도 분열되어 있고 교회도 수많은 교파로

나뉘어 있고 사회 각계 각층은 갈등과

분열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의 현실 앞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그 모든 갈등을 치유하고

하나되기 위하여 교회가 먼저 하나되는

일치운동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민족의 분단이 우리 모두의 죄인인 것처럼

한국 교회의 분열도 한국교회의 죄이다.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고 쪼개서 산산조각을 내고 있다.

한국교회의 물량적

성장의 자랑 이면에는 교회분열의 책임에 통감치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교단과 보수

진보 사이에서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화해와 일치의 사역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와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화해의 다리를 놓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였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분열과 개교회주의는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라면 교리적,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극복하고 교권과

이권의 문제로 분열의 역사를 거듭해 온 과거를 회개하고

진정한 성령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이 땅에서 예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로 하나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에게서 낳고 성령은

교회의 숨결이며 활동의 원천이다.

성령의 은총 안에 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 안에 있는 교회는

자신의 희생을 통한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아간다.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질을 나누어주고 세상의 불의와 악에 대하여 단호히

대결하며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해서 헌신한다.

이런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선교적 과제를 분명히 할 때 지금은

비록 교단과 교파가 다를지라도 성령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될 수 있고 교회의 일치의 길은 열릴 것이다.

구원은 개개인에게 성령을 통하여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신앙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율법과 대립관계에 있는 복음으로서 전달된다.

개개인은 교회의 일원으로서 구원받되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 더불어 구원받는다.

이러한 구원의 확실성은

예정에 기초해 있고, 또 하나님만이 홀로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

성령은 현존하는 그리스도이다. 오순(50)절 성령강림사건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새 천년 첫 성령강림절에

그리고 6.25전쟁 50주년에 남북정상회담의 민족사적 의의,

이것은 한국교회가 비로소 하나된

기도의 숨결로 일치와 화해를 염원하는 마음을 모아

화해의 제단을 쌓을 것이며 민족의 통일과 평화공동체를 지향하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희년 실천의지로 화해 공동체를 이루고 성령의 역사(役事)로

화해의 복음이 넘쳐나기를 기도해야 한다.

▶ 9.오순절과 성령강림

/행2:1-4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독교의 3대 명절로는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이 있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고,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신 날이며,

성령강림절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으로

이 땅에 최초로 교회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월절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 열흘이 지나서 오순절 날이 되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이 특별한 날, 곧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오순절에 맞추어서 강림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오순절과

신약의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를 알아봄으로,

성령세례의 의미와 축복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구약의 오순절

구약성경에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세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나옵니다. 이 중에서 오순절은 밀 수확을 거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려지는 절기인 동시에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수여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구약의 오순절은 맥추절,

또는 칠칠절이라고도 하는 풍성한 수확의 절기로서,

우리 나라의 추석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의지할 곳 없는

객들이 굶주릴까봐 일부러 밭에 이삭을 남겨둘 정도로

사랑과 나눔의 절기였습니다. 단 한 사람도 소외됨 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즐기고, 축하하며,

기뻐하는 절기가 바로 오순절인 것입니다.

오순절은 추수한 것의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전적인 헌신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수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와 공기와 비를 알맞게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이 추수 때마다

이를 깨닫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가져오게 하는 비결입니다.

또한 오순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한 절기입니다.

오순절은 추수의 절기일 뿐만 아니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악된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말씀이자,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안내하는 능력과 권능의 말씀입니다(시 119:105).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주의 백성들에게 육체의 양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십니다.

둘째, 신약의 오순절

신약의 오순절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행 2:2-4)

성령강림은 성경과 예수님을 통하여

예고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며,

마지막 시대를 여는 새로운 변화의 사건입니다.

구약시대에 율법을 받고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제한적이며 일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예외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영으로 세례받고,

예수의 영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한편, 신약의 오순절은 성령께서 영혼을

추수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운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며,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을 볼 때까지 일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다는 예수님의 탄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추수군의 주인이신 성령님의 부르심에 따라 우리는 우리 가족과

이웃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거하는 하나됨의 은혜입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입니다(고전 6:19).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할 정도로

하나님과 철저하게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육체적으로 접촉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밀접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으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진실로

성령충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성경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신 결과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되어 함께 먹고,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하며 사랑으로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인해 교회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모두가 하나되고 능력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셋째, 나에게 주시는 성령세례

오순절의 축복과 역사는 구약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약을 거쳐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으며,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 추수의 기쁨을 누리고 말씀의 능력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고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눅 11:13).

성령의 임재는 십자가 구원을 현재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를 부인하던 베드로가 변화되어 주를 위해서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죽을 수 있었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이방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대사도 바울로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계실 때는 12명의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소수의 인원과들만 동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동행하십니다.

성령의 임재는 믿는 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고난당하는 것에 기쁘게 참여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수고하고 땀흘리며,

때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과 동행하면 그 수고와 어려움이 오히려 기쁨이 됩니다.

주를 위해서 매맞는 일,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는 일,

복음을 위해서 순교하는 일이 오히려 기쁨이요,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0-41)

오순절에 추수의 수고를 통해서 열매를 거두듯이, 이러한 수고와

헌신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그 상급은 하늘의 면류관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핍박하던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동역자가 되며,

우리를 괴롭히던 질병이 변하여 간증거리가 되고,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축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축복의 절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역시 이 땅의 모든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게 하는 축복의 절기입니다.

날마다 성령충만함으로 이 축복을 누리고 나누어 베푸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구약의 오순절도 축복이요,

신약의 오순절도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우리가 성령세례 받고 능력받는 것은 더 큰 복입니다.

이 은혜가 지금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10.성령강림이 가져온 변화

/행2:1-4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렇게도 위대한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무력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또한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제자들은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유월절 후 오순절까지 50일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긴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심으로 모든 의혹은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청량한 하늘같은

예수님의 계시가 임하신 것입니다.

1. 십자가 고난을 밝히 깨달음

성령이 임한 후 제자들에게 다가온

제일 첫 번째 변화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영원전부터 계획된 사실이며,

하나님 계획의 위대한

성취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들을 죄악의 세력에서

해방시키시는 위대한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에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세속의 더러움과

귀신들을 다 쫓아내시고 성령으로 채우셔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또한 마음의 슬픔과 육체의 질병에서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을 덮고 있던 저주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의 따뜻한

축복의 햇빛을 비추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우리들을 지옥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이 임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깨닫고 혼돈과 당혹과 좌절과 공포와

절망에서 놓여남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체험함

성령이 오심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육적인 관계였지만 이제는 신령한 관계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육으로 계시지 아니하시고 성령으로 각자의 영혼

속에 들어와 계신 것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한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제자들 또한

함께 죽고, 예수님이 장사 지냈을 때 함께 장사지내고, 예수님이 부활

하셨을 때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았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이미 보좌 우편에 앉았다는 이 놀라운

믿음을 믿을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신령한 사람으로

재창조된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제자들은 당당한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10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신분상의 확실한 변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베드로후서 1장 4절에도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3. 거대한 환희를 체험함

오순절 날 성령강림 후 제자들은 거대한 환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폭발적인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편 16편 11절은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편지했던 것입니다.

기쁨은 놀라운 힘, 즉 에너지를 생산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 나게 됩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 마을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많은 병자들이 나으니

그 성에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마음속이 늘 우울하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이 오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대한 환희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님께 충성하는 믿음과 사랑의 에너지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대문에 사람들은 오순절 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한 것입니다.(사도행전 2:13)

우리의 마음이 기뻐야 일할 의욕이 생기고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며

나갈 수 있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기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면

놀라운 용기와 충성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기쁨과 함께 담대력이

생기면 어떠한 역경 가운데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되자 하루에 3천명을 전도하고, 이튿날에는 성전

미문가의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5천명을 회개시켜 예수님께서

인도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9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담대함이 들어오면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부들이나 세리와 같은 어리석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성령으로 충만 하자 그들에게

기쁨의 에너지가 솟구쳐 오르고 용기와 담력과 충성심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여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로마로,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였으며, 이 복음이 대한민국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놀라운 능력인 것입니다.

4. 천국 복음의 증인이 됨

이 세상에는 거짓 증인과 참 증인들이 있습니다.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지어내서 사람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거짓 증인은

헛된 소문을 퍼뜨립니다.

사실을 분명히 알고 진리를 말할 때 참 증인이 됩니다.

그러나 뜬소문이나 자기의 상상으로

어림잡아 증거 하는 것은 거짓 증인입니다.

십계명중에 ‘네 이웃을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짓는 죄가 이웃을 거짓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거짓 증인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체험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지어서 말하면 거짓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거짓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난 것을

분명히 보고도 그들은 돈을 받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에서 32절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체험적인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증언은 확실한 증거요,

조금도 거짓이 섞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 증인이 되려면 사도들처럼

성령을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 되심과 우리 구주 되심을 확신하게 되고 자기가

확신한 바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참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증인된 사람들에게 기름 부으심과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이론만 말하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권세와 능력과 감화와 감동이 있으며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은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고 했으며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8년 동안 중풍병을 앓던 애니아를 고치고 죽었던

도르가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전도의 열정이 없던 사람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전도하고자 하는 열정이 생깁니다.

우리 교회가 전세계에 선교사를

파송 하는 것도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에 “또 가라사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전도의 열정이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 하셨으며,

마태복음 28장 19절로 20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온전히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2천년 전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교회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여 계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도 건물만 있어서는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이 임하여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 60억 인구 중에

기독교인들은 20억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40억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남북한 7천만 중에서

6천만 명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받들어 우리 교회는

1975년 4월 1일 순복음세계선교회를

창설하고 지금 우리는 전 세계의 51개국에 509개의 교회를 세우고

629명의 선교사를 파송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하고 협력했기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 우리 한국에 5백 교회 그 이상 허락하면

5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합니다. 또한 세계에 나가서

거대한 집회와 함께 수만 명의 선교사를 땅 끝까지 파견하려는

계획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8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받고 선교사업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습니다.

복을 받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유없이 가난해질 권리가 없습니다.

저주받을 권리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전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힘을 합해서 온 천하 만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만 될 것입니다.

– 기 도 –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2천년전 성령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에게 임한 이후로 성령의 권세와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능력자임을 알게 되어되었습니다..

이 복음의 역사가 유럽과 영국과 미국을 지나

아시아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 까지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복을 받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은

즉 성령의 계시와 그 능력과 열정을 가지고 방방곡곡에

교회를 세우고 온천하 만국에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인도하여 주시 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11.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행1:8-

성령을 충만히 받는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교회에 나와 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했다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하고 충성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하는 일이 잘되고 형통하게 되는 놀 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나님의 능력 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영국 귀족이 인도의 한 영주에게 트럭을 선사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귀족은 영주가 사 는 곳을 방문하였다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보내 준 트럭은 쓰지 않고 한쪽

구 석에 세워둔 채, 여전히 소를 부려서 짐을 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귀족은 트럭에 휘발유를 넣고 소들이 지고 있던 짐을 싣게 하고는

시운전을 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영주 는 그제야 트럭의 용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트럭 한 대는 소 수십 마리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트럭이 있어도 휘발 유가 들어가야 움직이지,

휘발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휘발유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많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더해 주시고 지혜와 지식을 더해 주셔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 나타납니까? 성령 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사랑이 넘쳐납니다. 표적과 기사가 따릅니다.

축복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

헌금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여 전도의 열매를 주 렁주렁 맺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효과적으로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축 복도 받아 누리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본문 말씀 사도행전 1장 8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셔 서 40일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신 당부의 말씀이요, 유언의 말씀이요,

약속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마가복음 16장 15절 말씀과 같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 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을 통해 능력 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4∼5절과 8절에서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우 리는 능력을 받아서 내가 사는 동네 이웃에게,

더 나아가서 이웃 나라, 땅 끝까지 주의 복음 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개인뿐 아니라,

교회도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성령 의 역사가 나타나면 그것을 통해서

큰 기적이 일어나고 전도의 불길이 타오르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했습니 다.

둘째,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셋째,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 라’고 했습니다.

B.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1.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성령 충만

“오직 성령(聖靈)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權能)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a)

성령을 충만히 받으려면 우리는 먼저 성령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

성령(聖靈)’은 헬라어 성경에 보면 ‘

하기오스 프뉴마’라고 해서 ‘거룩한 영’

, 곧 ‘하나님의 영’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능력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분은 천지창조 시에도 역사하셨을 뿐

아니라(창 1:2), 개인에게도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일에 순종 하고 충성하게

하십니다(출 31:3; 민 11:17; 삿 11:29; 삼상 10:6, 11:6; 욥 32:8).

그분은 또한 초자연적인 기적과 역사를 나타내시며

(왕상 18:12; 왕하 2:16),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 시며(느 9:20),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십니다(딤후 3:16).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회개 하는 능력을 주시고

(슥 12:10), 더 나아가서 믿음을 주시고(롬 8:14∼15), 은사를 주시며

(고전 12:31), 소망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5절에도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 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 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막연하게 ‘나는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천국 가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움 없이는, 성령을 받지 않고서 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19장 2절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 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에베소 교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 노라”

고 말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에 대해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듣지 못했으니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안수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9 장 6∼7절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5장 18절에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사람에게

임하십니까? 기도하는 사람(눅 11:13), 회개하는 사람(행 2:38),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행 5:32),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성 령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 운동가였던

찰스 피니(Charles G. Finny ; 1792∼1875) 목사님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것도 죄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순종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악한 마귀,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탄은 크리스천이라고

해 서 무조건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한 크리스천을 무서 워합니다. 악한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아서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승리해야 합니다.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한 선생님이 언제부턴가

몸이 나른하고 일을 해도 의욕이 없었습 니다. 을지상계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더니, 결핵성 늑막염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런데 병원에 입원해서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도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방학은 끝나 가는데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결국 학교에서 2개월 병가를 얻어 기도원으로 가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10일 금식 하는 동안

‘하나님, 이 병에서 고침 받아 내 일에 충실하게 하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역사,

뜨거운 불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방 언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 겼습니다.

그리고 금식이 끝날 무렵,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단 정면의 십자가에서 햇살과 같은 불길이 나와서 자신의 가슴에

부딪치더니 갑자기 온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 로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체험을 하고

그는 더욱 병이 나았다는 확신 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그 후 금식을 마치고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보니 결핵성 늑막염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병이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전도 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개 이렇게 뜨거워지는 경험 을 한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나면 병 고침 받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특히 병 고침 받기 위해서 기도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성령의 체험을 할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도중에 포기한다든지 낙심하면 응답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너희가 권능을 받고 – 권능, 능력

“오직 성령(聖靈)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權能)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b)

성령께서 임하시기만 하면 어떠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권능,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난 다음 권능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 기만 하면

권능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능이란 어떤 권능을 말합니까?

여기에 나오는 ‘권능(權能)’이란 말은

헬라어 로는 ‘뒤나미스’라고 하는데, ‘힘’, ‘능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 의 ‘다이너마이트(dynamite)’도

여기서 유래한 말인데, ‘폭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 습니다.

그러니까 종합해 보면, ‘권능’이란 말은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강력한 힘’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다이너마이트 같은

큰 권능이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상상할 수 없는 큰 권능과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능력을 가지고 전도하고, 충성하고,

병 에서 고침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먹는 것, 자는 것, 세상일을 잠시 뒤로 하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10일 동안 전심 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불을 체험하고 방언으로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니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성령을 충만히 받고 권능을 체험해야 합니다.

신명기 34장 9절에는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 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 더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성령을 받아 지혜가 넘치게 되자,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이끄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지혜가 넘쳐나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 7∼11절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 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 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 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 하나님의 일꾼 된 사람 은 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은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섬기고

충성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생각도 달라집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뀝니다. 원망 하고 불평하던

사람이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

할 수 없다’는 사람이 ‘할 수 있다’

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 큰 일하는 사람, 많은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축복받은 사람은 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고국인 이스라엘로 돌아와

그 땅의 역사를 바꾼 ‘무사 알라미라’라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고국에 돌아와 보니 그 땅은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나 목축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큰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 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광야 어딘가에 분명히 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땅에서 물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줄기를 찾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학식이 높은 사람,

그 지역에 오래 산 노인들, 관리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헛수고하지 마시오.

이 지역은 물이 안 나는 곳이오.”

그래도 그는 사람들을 모아 사막 같은 땅에서 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기진맥진했습니다. 반대하던 사람들은 광야 에서 무슨

물을 찾겠다고 헛고생을 하냐며 계속해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넉 달, 다섯 달, 여섯 달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축축하게 젖은 모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더 파고 들어가니까 광야 한 가운데서

생수가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 후로도 그런 물줄기를 15군데 나 더 찾았습니다.

그는 광야에 목장을 만들고

밭을 일구어 과일과 채소도 생산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키부츠(qibbutz)’라는

농장 운동이 생기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쳐

새마을운동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고

누구든지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함으로써 불가능을

깨뜨리고 가능케 할 수 있습니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황무한 땅을 옥토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못한 것을 기적을 통해서 성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업장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 니다.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 다.

우리 개인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승리합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다름 사람에게 존경받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남이 못하는 큰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3.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증인, 전도

“오직 성령(聖靈)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權能)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c)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증인(證人)’이 란 헬라어로 ‘말튀스’인데,

이는 ‘증거’, ‘순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증 인이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므로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 다. 본래 증인이란 법정에서

목숨을 걸고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확실히 이것은 옳습니다.”

라고 증거할 때, 그것은 자기의 목숨을 거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증인은 순교자의 각오가 되 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주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입니다.”

라고 증거할 때, 우리 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악한 마귀 사탄과 싸워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증인(Witnesses)’이라는 말에는 ‘

내가 믿는 신앙이 바로 진실입니다.’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목숨 걸고 나갈 때 악과 싸 워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18∼20절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 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 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할 때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성령께서 우 리로 하여금 전도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무슨 말을 해 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 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 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 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키고 보호하시는 사람은 바로 주의 복음을

전 파하는 사람이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요,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고

충성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 주신 후에,

능력 주신 후에, 우리에 게 권세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권세,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 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전도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 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므로

보답하기 위해서 자기도 모르게 전도하게 됩니다. 가족 과 이웃,

주변 사람들을 전도하여 하나님 앞에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을 가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망하지 않게 하시고,

실패하지 않 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 아 계신 표적이

나타나고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에 열정적인 믿음이

생겨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감동과 감화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신앙은 성령으로 충만케 된 신앙이요,

전도하지 않는 신앙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신앙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게으르고, 무지하고, 나태하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 빠져서 전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나가서 담대하게

주 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전도 대상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린아이, 청소년,

어른, 노인 할 것 없이 영혼을 가진 모든 이에게

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대개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전도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으면

힘이 나고 사 랑이 넘쳐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전도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닭은 알을 많이 낳아야 주인의

사랑을 받고, 젖소는 우유를 많이 내야 주인의 사랑을 받 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하나님의 사 랑을 받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사랑받고 충성하면

재물의 축복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 을 이루느니라”

(롬 8:28)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충성함으로

전도에 앞장서 나갈 때, 하나 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건강이 필요한 자에게 건강을 주 시고,

능력이 필요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뿐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형통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15년 동안 알코올중독자로 살아온

사람에게 어느 날 폐병 3기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가 정은 아내에게

맡겨둔 채 그는 여기저기서 방황했습니다.

버림받은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죽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지은 죄를

다 회개하고 천국에나 가려는 마음으로 기도원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쓸모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죽으 면 천국이라도 가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마음이

감동되면서 눈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성령을 뜨겁게 체 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나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도도 바뀌어 죽어서

천국 가겠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시면 남은 인생 주를 위해 보 람되게 살겠습니다.’

하고 뭔가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런데 기도하는 순간, 용기가 생기고 희망이 생겼습니다. 신체적으로도

변화가 나타나서 알코올도 끊게 되고,

폐암 3기에서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기적을 체험하고 그는 너무나 감사해서 ‘

하나님 나도 보람된 일을 하게 하옵소서.’ 하고

다시 한 번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자면 성경을

좀 알아야 하니까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 었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우연히 알코올 중독자 거지를 만났습니다.

옛날의 자기 모습이 생 각나 그 거지를 집에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 믿으면, 성령 받으면, 당신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를 전도하고 나서 본드를 흡입하는

그의 동료 일곱 명도 전도하여 함 께 산속 깊은 곳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

알코올중독 귀신은 물러갈지어다!

하나님, 능력을 주시옵소서. 나 혼자의 힘으로는

이들 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이들의 생애가 변화되게 하옵소 서.’ 이렇게 1시간, 2시간,

3시간째 기도하니까 알코올중독자도 따라서 기도하더니

눈물을 흘렸 습니다. 점점 변화되더니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그는 깨닫게 되었 습니다.

‘알코올중독자인 나를 살려 주신 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

나도 남이 못하는 좋은 일 을 할 수 있어.’

그 후로 그는 청량리 일대를 돌며 알코올중독자만

찾아다니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리고 사람이 점점 많이 모이자,

양평에 숙소와 예배실, 식당을 갖춘 500평 규모의

‘실로암 금주선교회’라는 훈련소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루에도 수십 명의 알코올중독자들 이 이곳을 찾아와

기도하여 삶에 변화를 받고 갱생하는, 새 사람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성령을 받으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좋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도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하는 놀라운 일을 성취할 수 있습 니다.

여러분도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내 인생 헛된 인생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고,

사람을 돕는 보람된 인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C. 성령 충만하여 능력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가 되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못한다고 하지 마시고,

안하겠 다고 하지 마시고, 안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만 받으면 여러분에게도 능력이 나 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였던 한 집사님이 자궁암으로 죽어 가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소식을 듣게 되 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방안에 그대로 방치해 둔 채 있었습니다.

목욕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몸에서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그 아주머니를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도 와줄까 생각하다가 전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당신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아 주머니도 기도하세요.”

집사님은 그 아주머니를 모시고 기도원에 갔습니다.

10일을 작정하고 함께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10일째 되는 날,

새벽에 갑자기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머니 를 붙들고 기도하는데 온몸이 감당치

못할 정도로 뜨거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누워 있 던 아주머니도 일어나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아주머니는

바로 화장실로 뛰어가더니 핏덩이를 마구 쏟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얼굴이 환해져서 돌아왔습니다.

좋아서 생글생글 웃고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

나는 다 나은 것 같아요. 다 나은 것 같아요.”

자궁암으로 다 죽어가던 여자가

10일 금식을 하고는 병에서 낫게 된 것입니다.

다 죽는 줄로만 알았던 아주머니가 살아서 집에 돌아오자

온 동네에 화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가 690명이나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690명을 전도하기까지는,

주일학교 교사였던 한 집사의 뜨거운 기 도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니까 그 사람이 690명을 전도한 것입니다.

내가 많은 사 람을 전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한 사람만

바르게 인도하면, 한 사람만 전도하면,

한 사람만 병 고침 받게 하면, 한 사람만 하나님을 만나서

성령 충만을 받게 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 도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절망에 처한 사람, 병든 사람,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가항력적 인 상황에서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 버림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도 그 사람들에 게 가서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전도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

수십, 수백, 수천 명씩 하나님 앞에 나오게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재물의 축복을 받아서 물질을 드리게 하십니다.

그 사람의 아들딸,

자손이 번창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나 한 사람만 성령 받아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 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큰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 12.성령의 바람 불어오소서

/행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 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 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 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본문에 성령의 임하시는 장면을 표현하기를 하늘로부터

강하고 급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 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큰 바람 같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임하심을 말씀할 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 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8) 라고 했 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성령의 바람 불어 오소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번에 우리나라를 휘몰아쳐 간 태풍은

그 위력 면에서 가장 가공할만한 것이었습니다.

태풍이란 중심 최대 풍속이 초속 17m 이상의 폭풍우를

동반하는 열대성 저기압을 일컫는

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공기가 엄청난 속력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상청의 자료에 의하면 바람의 속도가 초당 10m를 넘으면

우산을 받기 힘들고 15m를 넘 으면

허술한 간판이 떨어져 날아갑니다. 그리고 초속 20m를 넘으면

바람을 향해서 허리를 30도

정도로 굽히지 않으면 서 있을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30m를 넘으면

목조 건물이 무너지고 40m를 넘으면 작은 돌맹이들이 날아가고

60이 상이 되면 전봇대가

뽑히고 철탑이 휘어지는 등 엄청난 피해가 난다고 합니다.

이번에 지나간 “프라피룬”은 순간

최대 풍속이 초속 20-30m를 넘는 거센 바람과

우리나라 기상 관측이래 가장 강력한

최대 58.3m에 달하는 돌풍을 몰고 왔습니다. 제주도,

목포 등지 에서는 자동차를 뒤집어놓고

지붕을 날려보내기도 하고 나무가 뿌리 채

뽑히는 가공할 위력 의 강풍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바람에 관한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회리 바람, 광풍, 대풍, 큰바람 등으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바람을 설명할 때

일반적인 자연현상학적으로

설명하기 전 에 그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욥기서 28:25절에 보면

“바람의 경중” 하나님이 정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모스 4:13절 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람을 창조하신다고 했고

사무엘하 22:11절에서는 “바람 날개”를 타고 나타나시는 분으로

묘사하였습니다.

① 바람의 경중을 정하심 (욥28:25)

② 바람을 창조하심 (암4:13)

③ 바람 날개를 타신 분 (삼하 22:11)

그리고 성경에서 바람을 언급할 때는

대략 두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① 첫째는 강하고 무섭게 부는 폭풍이나

광풍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렘 4:11-12절에 보면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이를 자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 자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케 하려 함도 아니며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베풀 것이라 ” 라고 하였습니다.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고

깨긋게하기 위함도 아니라 심판하기 위해서

뜨거운 폭풍을 불게 하 신다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는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초속 20m의 바람에 인간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관측된

최대 풍속은 1934년 4월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북부에 있는 워 싱턴산 꼭대기에

불었던 강풍으로 시속 3백71km, 초속1백3m에 달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관측 기록은

지난 92년 9월25일 울릉도의 초속 51m가 최대입니다.

공식적으로 관측기록은 없지만

바람이 남긴 흔적으로 추정해 본 풍속은 훨씬 엄청나다고 합 니다.

1953년 6월 미국 매사츄세츠 주에 불어닥쳐 철강으로 만든

송신탑을 부러뜨린

회오리 바람 (토네이도)은 시속 5백50km에 이른 것으로 추정됐고

일부 학자들은

음속(音速)과 같은 시속 1천2백20km의 초(超)토네이도도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풍을 불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은 얼마나

더 크고 위대하고 놀라우신 분일까 요?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시간 이 자리에 여러분의 심려에 성령의 바람을

불게 하시기 를 바랍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행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던 120여명의 성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찬송하고

기도할 때 성령의 바람이 불어 닥치는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에서

강하고 급한 바람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온 집에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이 갈라지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귀로는 태풍소리가

들리고 눈으로는 불꽃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시

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타오르는 불꽃이 거센 바람을 만나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최초 성 령의 역사는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장엄하고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① 성령의 바람은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가 아니라

거기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마가의 다락방 에 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던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만나는 주님으로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개별 면담이 중요합니다.

주님과 개별면 담을 하십시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그대로 주님께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엘리 야,

예레미아와 같은 선지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죽은 셰례 요한이

살아서 나타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이라 평가하든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하여,

예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과 어떤 관계가 없으면 죽은 지식입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느낌이 없습니다.

②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나의 인격이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 입니다.

즉 나의 생각과 행동이 성령에 의해 통제되고 성령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이해될지 모르겠습니다.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성령에 의해 사로 잡힘의 상태” 는 광신적이 란 비난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에 사로잡혔느냐가

중요합 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인격적인 신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가장 선하고 윤리적으로 최고의 높은 기준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그분의 높은 인격과

그분의 도덕적 기준에 의해 행동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을 단순히 감정적인 면에서만 보면 안됩니다.

감정정으로만 충만해서는 안됩니다. 돼지가 시궁창에서 뒹굴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 를 부른다면 아무도 그 노래가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충만 이

드러나게 하여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삽니다.

정욕에 사롭잡히고 헛된 부귀영화에 대한 꿈에 사로잡혀 삽니다.

며칠 전에 보험금 7천만원 을 타기위해 자기의 아내를 차에 태우고

가다가 고속도로 상에서 밀쳐 떨어뜨렸다가

들통난 비정한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돈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자신도 그러기까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의 뜻에 따라 살고 성령에 맡기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들이 비난하고 욕 할 것입니다.

왜냐면 자신들은 그것을 모 르기 때문입니다.

욕심 충만이 아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읍시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결국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고을에 마늘 도둑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 마늘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잡혀서 고을 원님 에게 끌려왔습니다. 원님은 마늘 도둑에게 3가지

방법의 벌을 내라고 그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마늘을 훔쳤으니 마늘 100개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곤장 50대를 맞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라는 것입니다.

마늘 도둑은 금전 한 냥을 내기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곤장 50를 맞을까 하다가 너 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늘 100개를 먹는 쪽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마늘 백 개를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열 개를 쯤먹으니까 속이 쓰리고 아프고 눈에서는 눈물이

쑥 빠지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시작한 것이니 먹어보자

하 고 20개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도저히 못먹을 것 같아서

마늘 도둑은 곤장을 맞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곤장을 치게하였는데

15대 20대를 맞고 나니 엉덩이에서 피가 나고 도저히

더 못맞고 기절 하고 말았습니다. 깨어나자 원님에게 사정했습니다.

곤장은 더 이상 못 맞겠으니 벌금으로 내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벌금 금전 한냥을 내고 풀 려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욕심에 충만하면 결국 받을 고난

받은 벌 받을 고생 다 받고 풀려납니다. 결국 인생이 고생하고

손해보고 어려움 당하는 것 따지고 보면 모두 내 욕심 충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약1: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으니라” 고 말하 지 않습니까?

성령 충만합시다. 성령의 충만은 필수 사양입니다.

선택사양이 아닙니다. 요 20: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성령을 받으라” 라고 명령했습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그리고

엡 5:18절에 보면 바울도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고

명령형으로 말하고 있 습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순절 성령의 바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성령의 충만함을 주는 바람이었습니다.

오늘 우 리교회에도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여기있는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기를 바 랍니다.

③ 성령의 말하게 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중에 사도들이 거리로

나가서 전도하는 것을 보면 전도하게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할 때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어진 수단에 불과합니다.

결국 성령의 은사는 “복음을 말하게 하는 것” 입니다.

사도행전 1: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말은 진리를 위해서

핍박을 받고 참고 인내하며 최후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증인라는 말 “마르티스” 는

순교자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 니다.

즉 성령의 바람이 불면 예수의 증인이 되는 바람이 일어납니다.

즉 순교하기 까지 복음을 전하는 권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의 불꽃이 일고

그위에 강한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입 니다. 이 바람은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록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기록하여 세상에 보내어지는 편지들입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오늘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불었던 성령의 바람 내게 불어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담대히 읽어야 할 사람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찾아갑시다.

▶ 13.성령 강림절

제 목 성령의 바람 불어오소서 (행2:1-4 )

성령의 바람 불어오소서 행2:1-4

양정교회 / 박재신목사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 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 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 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본문에 성령의 임하시는 장면을 표현하기를 하늘로부터 강하고

급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 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큰 바람 같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임하심을 말씀할 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 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8) 라고 했 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성령의 바람 불어 오소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번에 우리나라를 휘몰아쳐 간 태풍은

그 위력 면에서 가장 가공할만한 것이었습니다.

태풍이란 중심 최대 풍속이 초속 17m 이상의 폭풍우를 동반하는

열대성 저기압을 일컫는 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공기가 엄청난 속력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상청의 자료에 의하면 바람의 속도가 초당 10m를 넘으면

우산을 받기 힘들고 15m를 넘 으면 허술한 간판이 떨어져 날아갑니다.

그리고 초속 20m를 넘으면 바람을 향해서 허리를 30도

정도로 굽히지 않으면 서 있을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30m를 넘으면 목조 건물이 무너지고 40m를 넘으면

작은 돌맹이들이 날아가고 60이 상이 되면 전봇대가 뽑히고

철탑이 휘어지는 등 엄청난 피해가 난다고 합니다.

이번에 지나간 “프라피룬”은 순간 최대 풍속이 초속 20-30m를 넘는

거센 바람과 우리나라 기상 관측이래 가장 강력한 최대 58.3m에

달하는 돌풍을 몰고 왔습니다.

제주도, 목포 등지 에서는 자동차를 뒤집어놓고

지붕을 날려보내기도 하고 나무가 뿌리 채 뽑히는

가공할 위력 의 강풍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바람에 관한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회리 바람, 광풍, 대풍, 큰바람 등으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바람을 설명할 때 일반적인 자연현상학적으로

설명하기 전 에 그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욥기서 28:25절에 보면

“바람의 경중” 하나님이 정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모스 4:13절 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람을 창조하신다고 했고

사무엘하 22:11절에서는

“바람 날개”를 타고 나타나시는 분으로 묘사하였습니다.

① 바람의 경중을 정하심 (욥28:25)

② 바람을 창조하심 (암4:13)

③ 바람 날개를 타신 분 (삼하 22:11)

그리고 성경에서 바람을 언급할 때는

대략 두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① 첫째는 강하고 무섭게 부는 폭풍이나

광풍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렘 4:11-12절에 보면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이를 자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 자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케 하려 함도 아니며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베풀 것이라 ” 라고 하였습니다.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고 깨긋게하기 위함도 아니라

심판하기 위해서

뜨거운 폭풍을 불게 하 신다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는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초속 20m의 바람에 인간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관측된 최대 풍속은

1934년 4월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북부에 있는

워 싱턴산 꼭대기에 불었던 강풍으로 시속 3백71km,

초속1백3m에 달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관측 기록은 지난

92년 9월25일 울릉도의 초속 51m가 최대입니다.

공식적으로 관측기록은 없지만 바람이 남긴 흔적으로

추정해 본 풍속은 훨씬 엄청나다고 합 니다. 1

953년 6월 미국 매사츄세츠 주에 불어닥쳐 철강으로

만든 송신탑을 부러뜨린 회오리 바람 (토네이도)은

시속 5백50km에 이른 것으로 추정됐고 일부 학자들은

음속(音速)과 같은 시속 1천2백20km의 초(超)토네이도도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풍을 불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은 얼마나 더 크고 위대하고 놀라우신 분일까 요?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시간 이 자리에 여러분의 심려에

성령의 바람을 불게 하시기 를 바랍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행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던

120여명의 성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찬송하고 기도할 때

성령의 바람이 불어 닥치는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에서 강하고

급한 바람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온 집에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이 갈라지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귀로는 태풍소리가 들리고

눈으로는 불꽃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시 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타오르는 불꽃이 거센 바람을 만나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최초 성 령의 역사는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장엄하고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① 성령의 바람은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가 아니라 거기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마가의 다락방 에 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던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만나는 주님으로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개별 면담이 중요합니다.

주님과 개별면 담을 하십시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그대로 주님께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엘리 야, 예레미아와 같은 선지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죽은 셰례 요한이 살아서 나타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이라

평가하든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하여,

예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과 어떤 관계가 없으면 죽은 지식입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느낌이 없습니다.

②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나의 인격이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 입니다. 즉 나의 생각과 행동이

성령에 의해 통제되고 성령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이해될지 모르겠습니다.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성령에 의해 사로 잡힘의 상태” 는 광신적이 란 비난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에 사로잡혔느냐가

중요합 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인격적인 신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가장 선하고 윤리적으로 최고의 높은

기준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그분의 높은

인격과 그분의 도덕적 기준에 의해 행동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을 단순히 감정적인 면에서만 보면 안됩니다.

감정정으로만 충만해서는 안됩니다.

돼지가 시궁창에서 뒹굴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 를 부른다면 아무도 그 노래가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충만 이 드러나게 하여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삽니다. 정욕에 사롭잡히고 헛된

부귀영화에 대한 꿈에 사로잡혀 삽니다.

며칠 전에 보험금 7천만원 을 타기위해 자기의 아내를 차에 태우고 가다가

고속도로 상에서 밀쳐 떨어뜨렸다가 들통난

비정한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돈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자신도 그러기까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의 뜻에 따라 살고 성령에 맡기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들이 비난하고 욕 할 것입니다.

왜냐면 자신들은 그것을 모 르기 때문입니다.

욕심 충만이 아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읍시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결국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고을에 마늘 도둑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 마늘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잡혀서

고을 원님 에게 끌려왔습니다.

원님은 마늘 도둑에게 3가지 방법의 벌을 내라고

그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마늘을 훔쳤으니 마늘 100개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곤장 50대를 맞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라는 것입니다.

마늘 도둑은 금전 한 냥을 내기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곤장 50를 맞을까 하다가 너 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

래서 결국 마늘 100개를 먹는 쪽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마늘 백 개를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열 개를 쯤먹으니까 속이 쓰리고 아프고 눈에서는

눈물이 쑥 빠지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시작한 것이니 먹어보자 하 고 20개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도저히 못먹을 것 같아서

마늘 도둑은 곤장을 맞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곤장을 치게하였는데 15대 20대를 맞고 나니

엉덩이에서 피가 나고 도저히 더 못맞고 기절 하고 말았습니다.

깨어나자 원님에게 사정했습니다.

곤장은 더 이상 못 맞겠으니 벌금으로 내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벌금 금전 한냥을 내고 풀 려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욕심에 충만하면 결국

받을 고난 받은 벌 받을 고생 다 받고 풀려납니다.

결국 인생이 고생하고 손해보고 어려움 당하는 것 따지고 보면

모두 내 욕심 충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약1: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으니라” 고 말하 지 않습니까?

성령 충만합시다. 성령의 충만은 필수 사양입니다.

선택사양이 아닙니다. 요 20: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성령을 받으라” 라고 명령했습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그리고

엡 5:18절에 보면 바울도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고 명령형으로 말하고 있 습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순절 성령의 바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성령의 충만함을 주는 바람이었습니다.

오늘 우 리교회에도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여기있는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기를 바 랍니다.

③ 성령의 말하게 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이란 무엇일까요? 그

것은 나중에 사도들이 거리로 나가서 전도하는 것을 보면

전도하게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할 때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어진 수단에 불과합니다. 결국 성령의 은사는

“복음을 말하게 하는 것” 입니다. 사도행전 1: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말은 진리를 위해서 핍박을 받고 참고 인내하며

최후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증인라는 말 “마르티스” 는 순교자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 니다. 즉 성령의 바람이 불면 예수의 증인이

되는 바람이 일어납니다. 즉 순교하기 까지

복음을 전하는 권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의 불꽃이 일고

그위에 강한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입 니다.

이 바람은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록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기록하여 세상에 보내어지는

편지들입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오늘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불었던 성령의

바람 내게 불어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담대히

읽어야 할 사람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찾아갑시다.

▶ 14.21세기 성령 강림절

/행1:4-

오늘은 21세기 첫 번째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최초의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10일 만에 마가의 다락방에 서 이루어진 오순절 사건입니다.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이어 인류 역사상

초 대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원래 오순절은 처음 익은 소출을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 감사제로서 유월절로부터 50일이 지 난날에 해당합니다

(민9:11). 그러한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모 든 성도들은 성령 강림의 사건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온 성령 강림의 내용에 대해

함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에

성령 강림절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최초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 강림은

갑작스럽게 된 일이 아니라 구약 성경 에 예언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십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 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마지막 기간에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께서 자기 이름으로 보 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14:26). 이 약속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강림 하신다는 사건은 이미 구약에도 예언되었습니다.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 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그 약속이 중요하며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십니다. 곧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성령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범죄한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어야 하 듯이 연약한 인생에게는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임합니다.

성령의 본질과 능력이 그리스도와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제자들을 영원히 떠나시지 않고

함 께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은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최초의 성령 강림은 충만하게 임했 습니다.

얼마나 충만했던지 오고 오는 세대가 다 구원을 받고

진리로 인도하시기에 부족함 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 다.

2,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증거 하신 후에 마지막

승천 하시기 직전에 한 번 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 부 곧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 라.”(4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기다리라” 는 말씀은 믿음 가운데서 준비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또한 예수님의 틀림 없는 약속입니다.

또한 그 약속은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약속을 불신하고 예루 살렘을 떠나

자기의 길로 가버린다면

결코 그 귀한 약속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과 신실한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며 그 약속을 기다렸습니다(행1:14).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에 예언자들이 약속했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 시고 승천하신 후에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변화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성령 강림의 내용에 있어서

또한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보혜사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약 속하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요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 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보혜사라는 뜻은 “돕는 자, 변호자, 탄원자,

중보자를 가리킵니다.

먼저 보혜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 14:16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그 제자들 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보혜사(돕는 자)로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며, 힘주셨는데,

이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보혜사, 대언자이십니다. 보혜사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은 오셔서 신자와 함께 있고,

속 에 거하시면서(요 14:16, 17),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고

(요 15:26),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 십니다(요16:14).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믿는 자를 가르치시고(I 요 2:27),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또한 장래 일을 알려주십니다

(요 15:26, 26:13). 또한 그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 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 사람의 눈을 여십니다(요 16:8).

또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 고 연약을 도우시며,

말로 할 수 없는(간절한)탄식으로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롬:26-27).

그래서 보혜사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 이상의 큰일도 하게 하시는(요 14:12),

인간 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은사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가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충만은

보혜사로 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 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되신 것처럼(요14:6) 오순절에 임할

성령도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께서는 진리를

바로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진리이신 예 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증거 해 주시는 분이며

(요15:26)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며

그리스도 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요14:26).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진리를 잘 모르고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신 분입니다.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요 14:16 하반절 …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성령 강림은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를 돕는 자로 항상 성도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길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고 했습니다.

곧 성령께서는 믿는 성도 속에 항상 내주해 계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성령 강림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영원히 이 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는 것입니다(마28:20).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며(고전12:3) 성령의 도움을

항 상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친히 도와주십니다.

특히 기도하는 자를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4, 오순절 날에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라고 했습니 다.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의 약속 성취로 주어진

오늘날의 교회가 탄생된 사건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 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고 했습니다.

오순절에 한 곳에 모인 무리들 가운데 홀연히 하늘에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나면서 성령이 강하게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행2:2). 놀라운 것은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그 자리에 모인 성도들에게 첫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도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으며 이적과 기사가 일 어났고

또한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습 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함으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 더라.” 고 했습니다.

오순절에 최초로 임한 성령 강림은 큰 부흥을 이루게

했던 사건입니다. 그날에 회개하고 세 례를 받은 사람이

무려 3천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3천명은 오늘날처럼 단순한

교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수가 3천명이나”

(41절) 더한 것입니다. 곧 구원받은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이 강림이 3천명의

부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5천명이 되었으며(행4:4)

그리고 계속적으로 부흥하여(행2:47, 5:14, 6:1, 6:7, 9:31)

복음이 온 지역과 온 민족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한 사건입니다. 그 성령 강림의 내용은

예수님이 친히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했습니다.

또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와주실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강림은 그 곳에 모인 성 도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해 주었으며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21세기 첫해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복음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최초로 마가 다락방에서

임한 성령의 충만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충만 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 믿음이 성숙해 지는 것,

고급한 믿음이 되는 것 모두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 15.오직 성령으로!

/행2:1-4

1.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신약교회의 출발은 오순절 성령강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성막(聖幕)에서 시작된 율법에 따른 제사의 행위로 모이던

회당(會堂)이,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된 사람들이 모이는

성령의 공동체로서의 교회(敎會)가 시작되었습니 다.

본래 교회(敎會)란 헬라어로 <엑크레시아>라는 말인데,

엑크레시아란<불러냈다> (call-out) 는 뜻이 있는 말로서,

죄악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People)을 의미합니다.

그 러므로 신약 교회의 개념은 건물이나, 율법에 의한 제사 형식이나,

제사장권의 제도가 아니 라 불러냄을 받은 백성,

즉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들(People of God)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성령에 의하여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이 교회란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란 성령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진

신앙공동체가 교회란 말입니다.

교회는 그러므로 어떤 이익집단도 아니고, 정치집단도 아 니며,

자선기관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의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발휘해야 하는

생명력을 지닌 유기적 기관입니다.

교회는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는 생명체이어야 합니다. 죽

은 기관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명력을 위하여

{성령의 역사}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고 신세대가 도래하여도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서만(the Work of the Holy Spirit)

부흥하고 발전하고 성취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Artificial Way)으로는

아무리 교회를 성장시키려 해 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인간의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서 역사 하는 성령의 임재 하심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비로운 영적 능력이 있습니다.

마치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는 성령의 충만 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은 프로그램 위주로 또는 어떤 기구나

제도 개선으로 교회 부흥을 기대할 수 없 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시대 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신비로움의 영적 능력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새 사람되는 변화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의 우려되는 현상은 소위 열린 예배랍시고

예배가 축제 분위기로 흘러 드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으로 자기 도취, 자기 만족으로 이어져

가는 경향이 농 후합니다. 그런 예배는 백날 드려봐야 인격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서 말세에 성령을 믿는

자들에게 물 붓듯이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 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고 하였습니다.(요 엘2:28-30)

성령을 부어주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겠다는 의미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이런 성령 을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능력으로 채워주겠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점점 죄의 세력에 지배를 받겠으나 그 속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사실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장차 나타날 천국 백성의 일단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모든 교회의 이상적 모델이기도 합니다.

교회란 모든 것이 갖추어 있다해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그리고 성령의 조명과, 성령 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성령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2.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①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나의 주(主)라고 시인할 수 없습니다.

롬10:9-10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 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 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주(主)로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동(感動)과

성령의 역사(役事)가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 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세상 지식으로도, 어떤 권위로도, 어떤 사람의 권면으로도

예수를 <나의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설령 어떤 외적 조건이나 힘으로 교회에 나온다고 하여도,

그것은 참된 신자는 아니란 것입 니다.

군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지휘관이 기독교인이므로

명령한다고 예수를 믿게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되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은 오 직 성령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안 믿는 남편을 둔 분들은 이점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 무리 잘 해주어도

고집 센 남편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세상의 단편 지식으로 별별 이유를 다 대면서,

그리고 조롱하고 빈정거리면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못합니다.

또 좀 더 심각하게 말하면,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직도 {예수의 사람}들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의 크리스천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라고 봅니다.

한국에는 교회도 많고 예 수 믿는 사람도 많은데,

‘예수의 사람’들이 없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 교회 나가 는 사람들도 많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많은데, 예수를 나의 주(主)라고 고백하면서 주 와 함께 살아가는

{예수의 사람}들은 적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들은 깊이 반성해보고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고는 결코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못한다는 말씀, 옳은 말씀입니다.

② 성령이 아니고는 핍박과 고난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7:55-60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 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 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 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하였습니 다.

스데반이 어떤 죽음을 하였습니까?

죄 없이 돌 탕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한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억울한 죽음,

죄 없이 당하는 핍박을 무슨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겠습니 까?

오직 성령 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오늘도 핍박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교육의 힘도 아니고,

경제의 힘 도 아니고 지식의 힘도 아닙니다.

여러분!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암살 당한 흑인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을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나 온 힘입니까?

오직 하나님께로 나온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는 백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섯 살이 되자 당시 법에 따라(흑백 분리의 법)

그들은 각기 다른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러자 백인 친구는 점차 그와

노는 것도 달가 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마틴은 그 친구에게서 자신의 아버지가

더 이상 같이 놀지 말 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틴은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인종차별의 현실을 차분히 들려주었습니다.

덧붙여 몇 가지 당 부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백인에게 뒤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잊지 말아라. 너는 누구 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야.

또한 백인을 미워해서도 안 된단다!

마틴, 그러한 백인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의무란다”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런 어머니 품에서 자란 마틴 루터 킹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 게 한 줄 믿습니다.

1955년, 한 흑인 여성이 만원 버스에서

백인 전용석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백인 남성이 차에 오르자 운전사는

그 부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피곤에 지친 그 여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흑백 분리법에 의하여

여인은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이 대규모

버스 보이콧 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 목사가 된 27 살의 마틴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과 용서와 비폭력을 통한 저항을 강조했습니다.

1951년 1월, 마틴의 집이 폭파되었 습니다.

마틴은 자신의 집으로 몰려든 흑인들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여기 저기서 백인들과 결판을 내자는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저항운동이 폭력에 의한 혁명으로

바뀌려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마틴은 이러한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적(敵)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여 러분이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도록 만드십시오. 내가 무너지더라도

이 일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이기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총과 돌멩이, 심지어 콜라 병까지 들고 있던

노한 군중의 입에서 ‘아-멘’이 울려 퍼졌습니 다.

1963년 8월 23일,

마틴은 6만 명의 백인을 포함한 링컨 기념관 앞에 모인

25만 명의 군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그 노예의 주인의 후손들이 함께

형제애를 나누는 식탁에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 말입니다.

오늘 저에게는 꿈 이 있습니다.

거친 곳이 평평해지고 굽은 곳이 펴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 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꿈입니다”….

이 얼마나 힘있는 연설입니까!

이것은 마틴 개인의 힘이 아닙니다.

마틴 속에 역사 하는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성령이 아니 고는 핍박과 역경을 이겨낼 사람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그 혹독한 핍박과

굶주림의 고난 속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③ 성령이 아니고는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6:23-25절에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옥에 갇혀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감사와

기쁨은 오히려 고난 중에서 터져 나옵니다.

참된 감격의 찬송은 성령의 감동에서 나타납니다.

목소리로 부르던 찬송이 성령이 함께 하면

그 찬송이 가슴으 로 불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실망에 찬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 기를 줍니다.

참으로 놀라운 역사입니다.

④ 성령이 아니고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14절에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 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당당 하게 외쳤습니다.

무식했던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온 것이겠습니까?

오직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전도할 수 없습니다.

헬라인은 지식을 말하기를 좋아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철 학적 이론을 가지고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저들 에게 나사렛

예수만을 증거 했습니다. 모두 녹아졌습니다.

유대인의 교만이 꺾어졌습니다. ” 우리가 어찌할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었던 일입 니다. 오늘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입을 벌려 전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전도를 내가 하는 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도는 전적으로 내 속에 있는 성령의 능력이 하게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죽은 자를 살려냅니다.

무식한 자들을 들어서 유식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전도를 유식하게 할 수만은 없습니다.

기도하고 나서면 성령이 말하게 하십니다.

우리 나라에 유명했던 김익두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에는 깡패이었습니다.

장에 가는 사람들 이 서낭당에 돌을 던지면서

“오늘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줍쇼”라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믿고 성령 받으니,

그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입 에서 권능의 말이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령은 능력입니다. 힘입니다. 다이너마이트입니다.

폭발력이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이요,

우리 교회 창립주일입니다.

지금껏 믿는 사람들이라는데 만 족하지 말고

예수의 사람들이 되도록 성령 충만을 받기를 바랍니다.

성령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자기를 비어놓으면 성령은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런 일에 우리 모두 하나 되는

교회가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

출처 :은혜로운 향기 원문보기 ▶ 글쓴이 : Gideon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도행전 1:4-8] 성령강림주일 설교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예수님을 하늘로 들어 올리셔서 당신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실 모든 권세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령을 남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으니 그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은 곧 성령님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안 계신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증인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 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있으시면서, 제자들이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말씀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보여주셨고, 예수님의 부활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승천하는 모습까지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본 것을 세상에 그대로 증거하라고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꼭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성령님을 받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이 지난 오순절에,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님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을 때에 증인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도 성령님을 약속해 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임하시게 되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당신이 승천해서 이 땅에 없을 때에, 제자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님을 기다리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뻔합니다. 제자들을 그냥 내 버려 두면,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자신의 마음대로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증거하겠다고 뛰쳐나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안 계시니 다시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이들도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님을 먼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임하실 때에, 비로서 제자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에, 제자들이 한 소망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고,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나타나셔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오라 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서 예수님께 임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은 성령님께 이끌려서 광야로도 가셨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도 성령을 내리시고 그 사역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의 임재가 있기 전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 임재의 경험없이 예루살렘을 성급히 떠나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 뜻과 열정을 가지고서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예루살렘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이 많다고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서 세상으로 가는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기 전에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이 성령의 임재와 그 분의 지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고, 직장과 사회생활을 하러 나가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성령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0:36절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께서 오시기까지 열흘이 걸렸습니다. 제자들이 열흘간을 긴 시간들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또한 그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의 신앙의 태도가 조급할 때가 있습니다. 열흘이 아니라, 몇 시간도 하나님의 약속을 지긋히 기다리지 못하고 내 판단대로 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에, 성령의 임재와 지시를 기다리는 예루살렘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에 비로소, 내 뜻대로 사역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왜곡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주님의 제자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에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권능, 힘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악한 영의 권세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마땅한 권능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인들과 같이 사회적인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지적으로도 탁월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대부분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신분이 미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을 상대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 가기에는 너무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외모로 볼 때에 뱃사람으로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의지 또한 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장차 자신을 버리고 도망 갈 것이라고 예언하셨을 때에,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죽일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잡히신 예수님을 뵈려고 대제사장의 집 뜰에 있을 때 그곳에 있던 여자 계집종이 베드로에게 와서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거하기는 커녕,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저주까지 했습니다. 아주 보 잘 것 없는 여종 앞에서 말입니다. 의지는 강할지 모르지만, 그 의지를 이룰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로서, 증인으로서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해도, 우리 스스로에는 그 사명을 감당할 만한 권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그들을 주장하게 되니까 그들이 능력있게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 누구의 권능보다도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능력을 구합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서 사람들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질의 능력을 구하고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물질을 의지하는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에 “사람이 일하냐? 돈이 일하지? “라면서 물질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상적인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오늘날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을 구하지 않고, 세상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사역하고 있는 듯 합니다. 성령의 영적인 능력은 구하지 않고, 세상적인 지혜와 방법을 구하며 그 힘으로 믿음생활을 하며, 교회를 운영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현대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에이든 토저 (Aiden Wilson Tozer)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님이 몸을 빼시면 우리들이 하는 일의 95퍼센트는 계속될 것이고, 아무도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신약교회에서 성령을 제외시킨다면 그들이 한 일의 95 퍼센트가 중단될 것이고 누구나 그 차이를 직감하였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 뱅이를 보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앉은뱅이에게 임하게 되고, 그가 고침을 받아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세상적인 권세와 능력은 없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는 세상적인 많은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유능한 사람들도 많아졌고, 재산도 소유하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성령의 능력이 구하지 않아도, 사역을 잘 할 수 있을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성령님의 신령한 영적 능력이 사라져 가는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성령의 영적인 능력을 간구하고 그 능력을 덧입으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의 영적인 대적자들을 이기며, 능히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이야 말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성도들의 가장 큰 능력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8절에 보면, 이러한 성령의 권능을 받은 후에, 그 능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게 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성령님을 받게 되면, 그 때에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서,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증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은 더 이상 마가의 다락방에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권세있는 자들이 제자들을 위협하며 방해해도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핍박받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교회로서의 사명을 열심히 감당할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와 선교에 힘쓸 때에, 그 현장에서 성령님의 능력을 또한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내가 가정에서, 직장과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아 갈 때에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자 할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그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증인이 되어 다른 이들을 섬기고자 할 때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더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소망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에, 우리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심과 부활을 증거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의 임재가 우선적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성령의 임재를 구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예루살렘을 뛰쳐 나가게 되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증인된 성도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주님의 일을 하기 전에, 가장 우선적으로 예루살렘에 머물러서 성령의 임재를 구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심을 드러내는 외적인 증거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주님의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인의 삶을 통해서 더 큰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뜨겁게 복음이 성장하는 곳 중에서 하나가 중국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들이 사회적인 능력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성령의 임재가 있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사람들이 성령의 영적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변화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능력은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죄인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소망하기는, 우리교회와 속한 모든 믿음의 성도들이, 삶의 분주함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고 기다리는 예루살렘 오순절 다락방의 시간들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가운데서, 신령한 권능 가운데서, 증인의 삶을 우리의 삶속에서 펼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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