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탑 | 3강 고대의 불탑 [최태성의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 문화재] 상위 192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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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별쌤 최태성의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 문화재]우리나라의 불교는 삼국시대에 도입되었다.
절과 불상, 탑 등의 문화유산에서 당시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백제와 신라에서는 중국의 전탑이나 일본의 목탑과 달리 ‘석탑’이 유행했다.
삼국시대 탑의 종류와 특징을 알아본다.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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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무슨 탑이 있을까? 《한국의 석탑과 전탑》

현존하는 전탑으로는 안동시 신세동 칠층전탑,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등 5기 정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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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post.naver.com

Date Published: 11/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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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재까지 조사된 우리나라의 탑파는 1,000기 이상을 헤아릴 수 있는데, 이 탑들을 건조한 재료에 따라 분류하여 일반적으로 목탑(木塔)·전탑(塼塔)·석탑(石塔)·모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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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2/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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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탑과 멋있는 탑 – 오마이뉴스 모바일

△ 경주남산 용장사3층석탑. · △ 경주감은사탑 사리장치와 불국사 석가탑의 대다라니경. · △ 익산 미륵사터 복원도와 석탑. · △ 일본 광륭사 5층목탑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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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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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고대의 불탑 [최태성의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 문화재]
3강 고대의 불탑 [최태성의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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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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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화재사랑 상세 – 문화재청

상륜부(相輪部)

1. 찰주(擦柱) | 상륜을 세우기 위한 중심부재로 쇠로 주조된 막대형 구조물이나 끝이 뾰족하다. 2층 또는 3층의 탑신부에서부터 고정되며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등 각각의 부재들을 끼워 상륜부를 구성한다.

2. 보주(寶珠)ㆍ용차(龍車) | 탑의 찰주 끝에 달린 구슬 모양의 장식으로, 인도의 탑에서는 실제로 병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중국에서는 표주박 형태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탑에서는 두 개나 한 개의 구슬 모양으로 변모하여 나타나며 그 명칭도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3. 수연(水煙) | 말 그대로 풀이하면 물안개라는 의미다. 인도 스투파에서는 부조로 탑 위에 꽃과 잎이 무성한 줄기와 나무로 표현되어 있는 예가 많아 연꽃잎 모양의 나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실상사삼층석탑의 수연을 보면 각 부분은 네 면에 정확히 맞춰져 있으며 나무 줄기와 잎이 조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4. 보개(寶蓋) | 햇빛을 가리는 일종의 우산을 천개, 산개라고도 하며 고귀한 신분을 상징한다. 보륜 위에 위치하며 탑이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5. 보륜(寶輪) | 보륜은 신들의 공간인 33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경전에 그 숫자가 정해져 있지 않아 탑마다 다르다. 스투파의 차트라와 같은 개념이다.

6. 앙화(仰花) | 상륜부 가운데 연꽃잎이 사방으로 피어 있는 형태이다. 이는 스투파의 하르미카를 상징 하는 것으로 수미산 정상에 위치한 천계를 의미한다.

7. 복발(覆鉢) | 그릇을 엎어놓은 모양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스투파의 안다, 즉 반구형 돔을 형상화해 놓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복발은 중앙에 띠와 꽃매듭이 장식되어 있는데, 인도의 경우스투파를 장식하기 위하여 띠를 두르고 여러 가지를 장식한 형태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8. 노반(露盤) | 스투파의 안다(돔)를 받치기 위한 기단에 해당된다. 중국에서 이슬을 받아 여기에 옥가루를 섞어 마시면 장수한다는 중국 도교 사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탑신부(塔身部)

9.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이라고도 한다. 탑신석 위에 놓이는 부재로, 목조 건축의 지붕과 같은 형태와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의 부재로 가공되는 경우도 있으나 1층이나 크기가 큰 경우 여러 매로 구성된다.

10. 옥개(屋蓋)받침 | 옥개석 아래, 탑신석 위에 위치하여 옥개석을 받치는 부분을 말한다. 옥개석과 한돌로 가공된 경우도 있고 별도로 가공된 경우도 있는데 별도로 가공된 경우 이 부재를 옥개받침석으로 부른다. 보통 4단 내외로 구성된다.

11. 탑신석(塔身石) | 탑신석은 옥개석과 함께 탑신부를 구성하는 부재이다. 탑신석과 옥개석을 하나의 층 단위로 보고 이것의 숫자에 의해 탑의 층수가 결정된다. 탑신석의 네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있고 평활한 부분을 면석이라고 한다.

12. 풍탁공(風鐸孔) | 각 층마다 풍탁, 또는 풍경 등의 장식을 매달거나 부착하기 위해 옥개석 모서리 또는 윗면에 구멍을 낸 부분으로 풍경구멍이라고도 한다.

13. 물끊기홈 | 석탑의 옥개석 밑면, 즉 처마부분 안쪽에 음각되어 있는 홈으로 우천 시 낙수면을 타고 흐른 물이 탑신석까지 흐르지 못하도록 가공한 부분을 말한다.

14. 우주(隅柱, 모서리기둥) | 탑신석 네 모서리의 기둥을 말한다. 우주는 별석(別石), 즉 별개의 부재로 가공되는 경우도 있고 면석과 한 부재로 가공되는 경우도 있다. 목조건축이나 건물 기단에서도 모서리에 세워지는 기둥을 우주, 또는 귀기둥이라고 한다.

15. 탑신받침 | 각 층 탑신을 받치는 부분으로 아래층의 옥개석 위에 가공되는 경우가 많으며 별도의 부재로 구성되기도 하는데 이때 탑신받침석이라고 부른다. 보통 2단 내외로 구성된다.

기단부(基壇部)

상층기단(上層基壇)ㆍ하층기단(下層基壇) | 기단은 건물이나 탑 등 기타 이와 유사한 축조물의 지면을 일반 지면보다 높게 시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석탑의 경우 기단의 규모는 대부분 단층, 또는 이층기단으로 구분되며 아래층의 기단을 하층기단, 위층에 해당하는 부분을 상층기단이라 한다.

16. 갑석(甲石) | 하층이나 상층기단 면석을 덮는 부재로 석탑의 크기에 따라 1매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으나 여러 매로 구성되는 경우도 많다. 탑신부로부터 떨어지는 낙수 등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윗면에 경사를 두어 가공하고 아래의 면석과 만나는 부분에 단을 가공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부연이라 한다.

17. 면석(面石) | 탑신석의 경우와 같이 기둥 사이의 벽체에 해당하는 부분을 말한다. 면석과 모서리기둥(우주, 隅柱), 안기둥(탱주, 撑柱)으로 구분되며 각각의 부분이 별도의 부재로 가공되는 경우와 면석과 탱주, 면석과 우주 등이 하나의 부재로 가공되어 구성되는 경우도 많다. 한편 탑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장엄의 조각상이 여기에 새겨지는데, 상층기단면석에는 팔부중상이, 하층기단면석에는 십이지상 등이 조각되기도 한다.

18. 탱주(撑柱, 안기둥) | 면석에서 우주의 안쪽에 새겨지는 기둥을 가리킨다. 규모와 시대에 따라 탱주의수가 대체로 1개에서 3개까지 변화를 보인다.

19. 지대석(地臺石) | 지면 위에 놓여 탑의 가장 아래에 위치하는 부재이다. 지대석 위로 기단부가 구성되며 이 부분의 보완을 위해 주변에 다시 돌을 놓기도 하는데 이를 탑구(塔區)라 한다.

탑 塔 이란

일반적으로 탑이라는 용어는 다층의 또는 높이 솟은 건축물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 쓰임새도 매우 넓다. 그러나 탑의 어원이 불교 건축물인 탑파(塔婆)의 줄임말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 Sanskrit)의 스투파(Stupa)와 팔리어(巴梨語, Pali)의 투우파(Thupa)가 중국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소리 나는 대로 적게 되면서 중국식 발음인 솔도파(率堵婆)와 탑파(塔婆)라고 표기하게 되었고, 이를 줄여 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스투파는 본래 제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죽은 사람을 화장한 뒤 유골을 묻고 그 위에 흙이나 벽돌을 쌓은 돔(Dome) 형태의 무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결국 탑의 원래 의미는 간단히 말하면 ‘유골을 매장한 무덤’이다.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앞에는 나란히 2개의 석탑이 위치하고 있는데 동쪽의 것이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2호), 서쪽의 것이 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이다. 불국사삼층석탑은 높이 10.4m로 다보탑과 함께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부나 탑신부에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워 전체적으로 균형이 알맞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완전한 신라식 석탑의 정형(定型)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탑파(塔婆)’의 준말이다. 탑파는 인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스투파(率堵婆)라고 하는데, 이를 의역(意譯)하여 방분(方墳) 또는 고현처(高顯處)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탑이라고 부르는데, 스투파는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 Sanskrit)의 stupa의 소리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며, 탑파는 파리어(巴梨語, Pali)의 thupa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stupa는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土石)을 쌓아 올린 불신골(佛身骨, 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탑파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에서 탑을 다가바(dagaba) 또는 다고바(dagoba)라 부르고 있는 것은 다투가르바(dhatugarba), 곧 ‘사리봉장(舍利奉藏)의 장소’라는 말을 약하여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미안마(Myanmar)에서는 탑을 파고다(pagoda)라 부르고 있으며, 구미인(歐美人) 역시 파고다라고 부른다.

세간에서는 흔히 홀쭉한 고층건물을 탑이라고 부르는 일이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타워(tower) 같은 것이지 스투파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찰에 건립된 탑은 엄밀하게 말하여 ‘탑파’ 또는 ‘불탑’이라 표현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한다.

주 01)하였다. 이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그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이 일어나게 되자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하였다. 사리신앙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불탑 역시 이때에 기원한다.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가 구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밑에서 열반한 후 그의 제자들은 유해를 당시 사회의 풍속에 따라 다비(茶毘) 하였다. 이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그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이 일어나게 되자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하였다. 사리신앙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불탑 역시 이때에 기원한다.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지 100년이 지나 대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Maurya)왕조의 제3대 아소카왕(Asoka, 서기전 273∼232)은 불사리를 안치한 8대탑을 발굴하여 불사리를 다시 8만4000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웠다고 하니, 신심 깊은 아소카왕이 일시에 많은 탑을 건립함으로써 넓은 지역에 불교를 크게 전파시켰음을 알 수 있다.

서기전 3세기 아소카왕 때의 불교 중심지였던 산치(Sanchi)에는 지금도 ‘산치탑’이라 하여 거대한 불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치탑’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4대 탑문(塔門)과 주위 난간 조각들이 아릅답고 또한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세계 제일의 탑파이다.

이와 같이, 탑을 세우는 의식은 인도에서 비롯되어 8기의 탑을 쌓았는데, 최초의 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루어 마치 분묘(墳墓)와 같은 모양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탑은 본래 원분형(圓墳形)을 이루고 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상륜(相輪)의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 돌난간을 둘러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놓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의 불교 수용과 탑파의 건립 경로는 중국을 거쳐 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인도·중국과 다른 독특한 탑파의 양식이 이루어졌다. 한국 고대 유적 유물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적인 조형물이다. 이 가운데서도 양과 질에서 볼 때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탑파와 불상이라 할 수 있으니, 이러한 상황은 탑파와 불상이 불교의 예배 대상으로서 불교도들의 신앙과 정성이 모두 이 두 곳에 결집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즉, 불교에서는 사원을 건립하는 목적이 탑파를 세우고 불상을 봉안하여 이 탑파와 불상에 예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탑파는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고, 불상은 직접 그를 향하여 예배를 올리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탑파와 불상은 가장 뛰어난 불교미술로서 한국의 고대미술을 대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우리나라의 탑파는 1,000기 이상을 헤아릴 수 있는데, 이 탑들을 건조한 재료에 따라 분류하여 일반적으로 목탑(木塔)·전탑(塼塔)·석탑(石塔)·모전석탑(模塼石塔)·청동탑(靑銅塔)·금동탑(金銅塔)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초기에는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양식을 모방한 누각형식의 다층목탑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지역에서는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비롯되고, 신라에서는 전탑을 모방한 석탑에서 시작되어, 바야흐로 석탑이 우리 나라 탑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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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불교 건축물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불교 건축물에 대해서는 탑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타워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타워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문서는 건축물에 관한 것입니다. 빅뱅의 가수에 대해서는 T.O.P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석공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담긴 불국사의 다보탑도 종교적인 목적(불교)으로 건축된 것이다.

탑(塔) 또는 타워(영어: tower)는 뾰족하게 높이 세운 건축물을 뜻하며 단층 또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

어원 [ 편집 ]

한국어에서 탑은 산스크리트어(범어)의 스투파(स्तूप, stūpa)에서 기원한다. 이는 고대 인도에서 온 말로 돔 형태로 만든 흙 무덤을 지칭했던 말이었으며, 불교가 중국을 거쳐오면서 솔도파(窣都婆)로 음차되었고 이것이 줄어 오늘날에 쓰이는 탑파(塔婆), 탑(塔)이 되었다.

영어의 타워(tower)는 고대 영어에서는 torr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고대 프랑스어 tor에서 온 것이며, tor는 라틴어인 turris에서 기초한 것이다.

역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탑파 입니다.

동양에서 탑은 불교의 건축물로 원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었다. 이후 부처님의 사리가 여러 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여러 형태의 탑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네모난 기단을 다지고 그 위에 봉분에 해당하는 둥근 구조물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우산 모양의 상륜부를 얹은 당시 인도의 무덤 형태를 따랐다. 이 구조는 탑이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중국의 목조건축양식 혹은 벽돌건축양식과 만나 둥근 구조물과 상륜부는 축소되어 탑의 지붕 위에 장식처럼 얹히게 되었다. 이들을 각각 목탑양식, 전탑양식이라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탑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졌고 이 두 양식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양식이 석탑이다.

서양에서 처음에는 바빌론의 탑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나 피라미드처럼 종교와 관련된 목적으로 지었다. 그러나 로마시대로 접어들면서 방어 목적으로 각탑을 설치하였고, 중세에는 고딕 건축의 영향을 받아 높고 뾰족하게 지은 교회 건축물이 많았다. 또한, 중세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세운 탑이 많아졌다. 그리고 현대에는 송전탑과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과 전화를 목적으로 한 통신용 탑[1] 등이 등장하였다.

분류 [ 편집 ]

기능 [ 편집 ]

1.신앙의 매개체로서의 기능

앞서 말했듯이 동양에서 세워진 탑들은 기본적으로 탑의 내부에 사리를 봉안하며 스투파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를 기념하고 그를 따르고자하는 사상이 드러난 것이다. 그런 만큼 탑을 건축한다는 것은 불교의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다.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탑이 나타나는데 이슬람교의 건축물인 모스크의 옆에 지어지는 미나렛은 이슬람 율법에서 정한 하루 다섯 번의 기도의 시각을 알려주는(아잔이라고 한다.) 장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또 서양의 교회 건축에 쓰인 탑 또한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로서 작용하였다.

2.기념물로서의 기능

종교의 색채가 희미해지는 근대에 들어서게 되면 에펠 탑과 같이 , 건국 등 다양한 이유에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탑을 짓기 시작했다. 특히 현대에 들어서는 랜드마크로서 건축되기도 했다.

3.정보전달로서의 기능

1번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나렛이나 서양의 탑 에서는 사람의 목소리, 종과 같은 것 등으로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빅 벤과 같은 시계탑 또한 만들어졌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CN 타워와 같이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전파를 중계하기 위한 전파탑이 만들어졌다.

4.감시, 전망으로서의 기능

성과 같은 군사목적의 건물 옆에 지어진 탑들은 적이 성에 접근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지어졌다. 현대에 들어서는 전망을 위해서 높은 탑을 짓는 경우도 생겨났다. 공항의 관제탑 역시 이와 같은 목적으로 지어졌다 할 수 있다.

재료 [ 편집 ]

탑의 건립 시기와 목적, 장소 설립 주체가 다양한 만큼 탑을 구성하는 재료 또한 다양하다. 고대에는 나무, 구운 벽돌,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돌로 건축할 때 대부분은 화강암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때로는 안산암이나 점판암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현대에는 주로 철이나 콘크리트 따위를 이용한다.

나라별 탑 [ 편집 ]

한국 [ 편집 ]

한국의 탑은 주로 불교의 영향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에 목탑형식과 전탑형식의 탑이 중국에서 전래되었는데 이 두 양식은 한국에서 각각 황룡사 구층목탑, 분황사 모전석탑의 형식으로 현지화되었다. 이후에 통일신라 시기에는 삼국의 문화가 융합되며 그 문화가 전성기를 이루기 되는데 이시기에 한국 고유의 석탑양식이 완성되게 되며. 그 대표적인 예가 그 대표적인 예가 불국사 삼층석탑의 탑이다. 석탑양식은 고려까지 계속 이어졌고 고려 중기 이후 원의 영향으로 경천사지 십층석탑 등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사찰의 건축물로서 지어졌던 탑도 있지만 민간에서 단순하게 주변에 있던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돌탑도 있다. 소박하게 만들어진 이런 돌탑들은 토속신앙과 관련이 깊어 서낭신을 모시는 서낭당과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기복의 용도로 이용되었다. 한국의 불탑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이는 오랜 전란으로 인한 문화재의 훼손이 잦았고,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사찰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백제와 신라의 경우 형태상으로는 4각형이 많았지만, 고구려는 8각형 탑이 주로 지어졌다.[2] 이러한 양식은 당시 중국에서 4각형 양식의 불탑이 중심이었고, 이러한 양식이 백제와 신라를 걸쳐 왜국에까지 전파되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보편화된 양식인 것과 달리 대단히 이례적인 사례이다.

신라의 경우 인평(仁平) 시기에는 웅장한 양식이 주로 지어졌다. 당시 지어졌던 황룡사 9층 목탑이 무려 81미터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3] 이러한 높이는 당시 낙양 영녕사 다음으로 동아시아에서 지어진 2번째로 높은 건물로서, 현재 중국에서도 80미터 이상이 되는 불탑이 손꼽힐 정도로 드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높이이다. 분황사 또한 전면 복원하였을 경우 41미터 혹은 48미터에 달한다고 한다.[4] 이들 불탑은 중국에서 유행한 4각형 양식을 띄고 있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는 이러한 거대한 불탑 대신 소박한 불탑이 지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감은사와 불국사이다. 감은사의 높이는 13미터이고 불국사 3층 석탑의 높이는 고작 10미터로서, 이전 시대에 지어진 불탑과 비교해 그 크기가 작은 편이다. 통일 신라에서는 4각 3층 불탑이 보편화되었다. 발해는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했던 고구려와 달리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4각탑이 주로 지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발해 영광탑이다.

고려에서는 이러한 양식에서 벗어나 5층, 7층, 혹은 4각 양식에서 벗어나 8각형 불탑 또한 지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다. 이러한 양식은 당대 유행했던 송나라 양식 혹은 이전 고구려에서 유행했던 8각형의 불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상당수의 문화재가 파괴되었는데 이로 인해 한국의 불탑은 큰 타격을 받았다.

조선에서는 검약한 기풍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건축 문화가 전반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숭유억불 정책과 이에 영향을 받은 유림들에 의해 기존의 사찰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불탑이 이전 시대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상공업의 발달 등으로 보은 법주사 팔상전 등이 지어졌다.

중국 [ 편집 ]

应县木塔, 응현목탑

중국에서 불탑의 건립은 삼국시대(3세기 경)에 시작된다. 후한 명제 이후 비단길을 통해서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래받은 중국은 기존의 누정 건축으로 인도의 스투파를 재현하였으며 반구형 중심이었던 인도와 다른 방식으로 탑을 건립하였다. 불교 전래 이전에 중국에서 종교의 역할을 했던 건 주로 도교였다. 도교에서는 신선이 사는 하늘을 이상화하여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건축물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누각이다. 또한 2층 이상 높이 쌓은 누각과 달리 신선의 휴식처를 상징한 작고 아담하게 지은 정각이 있다. 이러한 도교에서 비롯된 누정의 건축물은 중국식 불탑 양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은 탑의 양식은 이후 불교의 전래와 함께 동아시아 국가인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스투파와 같이 사리를 봉납하는 기능은 지속되었다.

삼국 시대에는 손권이 불교를 숭배하여 동오 시절에 불탑을 짓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남북조시대에는 윈강 석굴, 둔황 석굴과 같은 곳에서 불교가 융성했으며 탑 역시 이 지역에서 건립되었다. 이후 수나라 때 황실이 불교를 숭배하고 당나라시기에 널리 퍼지게 되면서 불탑의 건립이 중국 전역에 걸쳐서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불탑의 건립은 오대 십국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지속되었다. 이후 송나라가 세워지고 중국의 경제력이 강화되었다. 특히 금나라에게 중국 북부를 뺏기면서 강남지역의 개발이 이루어지는데 이와 같이 절의 건립도 크게 일어나 탑 역시 많이 건축되었다. 8각형 양식으로 대표되는 송나라의 불탑은 현재까지 중국의 보편적인 탑 양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몽골에 의해 정복당한 후 세워진 원나라시기에는 라마교의 영향으로 라마교 양식의 사찰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라마교 양식의 사찰은 청나라 황실이 라마교를 숭배함에 따라 북경과 내몽고 등 북부 지역에서 주로 지어졌다.

중국의 불탑은 양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뉜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양식은 누각식(樓閣式) 불탑이다. 누각식 양식은 요녕성과 자치구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누각식 불탑은 도교의 누각 양식을 본따 지어졌다. 누각식 탑은 내부 계단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먼 곳을 조망할 수 있어서 군사적 용도로 인해 지어지기도 했다.

요양백탑(遼陽白塔), 전형적인 밀첨식 양식의 불탑

중국의 불탑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양식은 밀첨식(密檐式) 불탑이다. 밀첨식이란 처마(檐)가 빽빽히(密) 모여 있는 양식으로, 누각식과 달리 내부 계단이 없어서 많아봐야 1층에서 2층 정도까지밖에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또한 누각식에 비해 1층이 매우 높고, 1층과 기단 사이의 공간에 부처와 여러 장식을 조각하였다. 밀첨식 불탑은 요녕성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양식이며, 이외에도 하남성, 하북성, 섬서성에 약 20여 구 이상 있다. 화남 지역에서는 사천성에 20여 구 이상 있다. 이러한 밀첨식 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거란과 송대이며, 이후 명청 시기에도 일부 지어지기 했다. 거란에서 지어진 밀첨식 불탑은 요녕성, 내몽고 자치구, 섬서성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송이 지은 밀첨식 양식은 하남성, 하북성, 섬서성, 사천성 등에 분포하고 있다.

누각 말고도 도교의 전통 건축 양식 중에서 정자의 양식을 본따서 지어진 정각식(停閣式) 불탑은 누각에 비해 그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주로 승탑으로 지어졌다.

원나라 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라마교 양식의 불탑으로는 복발식(覆鉢式)과 금강보좌식(金剛寶座式)이 있다. 복발식의 경우 그릇을 엎어 놓은 듯한 탑신을 쌓고 그 위로 탑찰을 쌓은 전통적인 토번 양식이다. 금강보좌식의 경우 탑 위에 또 다른 탑을 쌓은 라마교의 불탑 양식이다. 이들 불탑은 주로 티베트 자치구에 분포하고 있지만 북경 및 북중국에도 원나라, 청나라 황실이 라마교를 숭배함에 따라 지어져 일부 분포하고 있다.

이외에도 운남성 일부 지역에서는 소승 불교를 숭배했던 동남아시아 양식의 불탑이 존재하고 있다. 중국에서 이러한 양식을 태족식(泰族式) 불탑이라고 부른다. 태족식 불탑은 반구를 엎어놓은 전통적인 인도식 불탑 양식에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뾰족한 기둥을 세운 전형적인 소승 불교 양식을 취하고 있다.

중국의 불탑은 시기에 따라 그 양식을 달리하고 있다. 남북조 시대와 당나라 시기에는 4각형 불탑이 유행하였으나, 당말 대부터 등장한 6각형, 8각형 불탑은 송나라대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하여 8각형 불탑의 경우 현재 중국 불탑의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 [ 편집 ]

일본은 나무가 많은 산지지형이었으며 외세의 침략이 드믐 등 여러요인에 의해서 중국에서 전래된 목탑형식이 지속해서 유지되었다. 대개 탑은 삼층과 오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의 형태는 사각형의 누각형태였다. 탑의 가운데에는 나무기둥인 심주가 있고 심주의 아래에 사리를 묻었다. 이러한 탑의 건립은 불교를 받아들인 6세기부터 시작하여 절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감에 따라서 점차 융성해져 센고쿠 시대와 같은 후세에도 계속해서 탑의 건립이 시도되었다. 목탑의 특성상 화마와 전쟁, 자연재해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데 계속적으로 증축과 복원을 통해서 탑을 유지시켰다. 이러한 삼층, 오층목탑 이외에도 돌로만든 오륜탑, 각이 없는 무봉탑등 다양한 형태의 탑이 건립되었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우리나라 탑에 대하여

탑에 대하여

불교문화 중에서 불상과 더불어 탑은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탑의 역사 또한 불교의 성쇠에 따라 맞물려 왔다.

탑의 어원은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 Sanskrit)의 스투파(Stupa)와 빨리어(巴梨語 Pali)의 탑(Th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 뜻은 토석을 쌓아 올려 불신골(佛身骨) 즉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묘이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구조물인 것이다. 2500년 전 처음에는 사리를 팔 등분 하여 여덟 곳에 탑을 세웠다. 그 후 2세기 중엽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팔대탑을 나누어서 인도 전역에 8만4천개의 탑을 세우고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그 모양은 반구형의 분묘와 같고 그 위에 사리를 안치하고 상륜을 장식하였다. 차츰 변하여 하부에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를 올리고 상륜을 여러 개로 치장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거쳐 4세기 후반에 들어왔지만 독특한 양식을 이루었다. 탑은 그 재료에 따라서 목탑, 전탑, 모전석탑, 석탑, 청동탑, 금동탑 등이 있다.

목탑은 화재에 취약하기도 하지만 많은 兵火로 고대 목탑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터만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지, 사천왕사 목탑지, 백제의 부여 군수리사지 목탑지, 금강사 목탑지, 평양 청암리 목탑지, 대동군 상오리사지 목탑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탑은 벽돌을 생산하는데 노동력이 많이 들고 작업 과정이 어려워 일부에만 다소 건립이 되었다.

모전석탑 역시 재료 확보와 돌을 가공하는데 여러 가지 조건이 까다로워 유행할만한 형식이 못되고 말았다.

그 외 청동탑과 금동탑은 주로 실내에 두는 소품으로 공예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석탑은 우리나라의 자연조건에 딱 맞아떨어진다. 질 좋은 화강암이 전국에서 채취되어 다양한 수법의 석탑이 천 여기 넘게 세워졌다. 그래서 탑을 보면 불교를 알고 지나간 역사를 읽을 수가 있다.

중국은 일찍부터 거대한 강 주변으로 진흙과 노동력이 풍부하여 벽돌탑을 세워 올렸다. 그래서 중국은 전탑의 나라이다.

반면에 일본에는 목재가 넉넉하고 지진에도 비교적 안정적인 목탑이 주를 이룬다. 지금도 일본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호류지(法隆寺)5층 목탑 등은 그때를 말해준다. 그래서 일본은 목탑의 나라라고 한다. 불교를 받아들인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이 건립되었다.

그 후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에 석탑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삼국 말기에 목탑을 본뜬 탑이 백제에서 건립되었다. 백제는 그 당시 삼국 중에서도 건축술이 뛰어나 이웃 나라로 기술자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한 건축 기술에 돌을 접목하여 7세기 후반에 석탑을 시도한 것이다.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국보 제9호로 부여 정림사지 석탑이 그 모습을 보여준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의 가구 양식으로 화강암이라는 파격적인 재료를 선택했다. 부재 하나하나를 나무에서 돌로 깎아 만들어 세웠다. 기단부의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여느 법당과 같은 수법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11호

부여 정림사지 석탑 국보 9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30호

의성 탑리 5층석탑 국보77호

한편 신라에서의 석탑 발생은 백제와는 다르다. 신라의 석탑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탑(塼塔)의 모방에서 출발한다. 그 유구로는 국보 제 30호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탑의 재료는 구운 벽돌이 아니고 흑갈색 안산암의 석재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원형을 알 수 없어 아쉽다. 이 탑은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낙성이 되었다.

또 국보 77호인 의성탑리 5층 석탑도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다. 노반까지 남아 있는 높이가 9.6m인데 높이 단을 마련하고 자리를 잡았다. 전탑의 수법을 모방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발달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렇게 해서 삼국은 통일되었고 석탑은 새로운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정태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탑과 멋있는 탑

인도나 중국의 탑은 엄청 크다. 기가 질린다. 우리나라 탑은 그에 비하면 너무 작다. 그러나 정작 세상에서 제일 큰 탑은 우리나라에 있다. 바로 경주 남산 용장사터 위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 경주남산 용장사3층석탑. 윗기단만 있고 아랫기단은 산 전체로 대신했다. 경주 남산 한 봉우리 전체가 탑인 셈이다. ⓒ 신병철 통일신라시대에는 2중 기단에 3층 석탑이 전형이었다. 석가탑이 가장 대표적이다. 용장사터 3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석가탑과 거의 비슷하다. 3층의 탑몸과 지붕돌이 있다. 당연히 기단도 2중기단이 기대된다. 그러나 윗기단만 있고 아랫기단은 없다.

그렇다고 전형에서 벗어났을 수는 없다. 바탕으로 삼고 있는 바위를 아랫기단으로 삼았다. 잘 보면 용장사터가 자리잡은 조그만 산 전체가 아랫기단인 셈이다. 이래도 이 탑이 세상에서 제일 큰 탑이 아니라고 말할 건가.

용장사의 이 석탑 아래에는 엄청 높은 기단을 가진 불상이 하나 있다. 절은 조금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산꼭대기에 불상과 탑이 나란히 보인다. 부처님이 계신 저 피안의 극락이 바로 저기임을 나타내고 있다.

영동 천태산에 있는 영국사 부근 산꼭대기에 있는 삼층석탑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탑은 조그만 바위를 아랫기단으로 삼아서 그렇게 크게 보이지는 않는다. 산꼭대기 바위 위에 살짝 올라앉은 석탑이 온 세상을 밝혀주리라는 염원에서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탑은 원래 부처님의 무덤을 말한다. 부처님을 화장(다비)했더니 사리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 사리를 전 세계에 나누어 모시는 사리안치장치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무덤이라는 뜻의 스투파가 되었다. 중국에서 음역하여 탑파가 되더니 우리나라에서는 더 줄여서 탑이 되고 말았다. 이 탑 안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

▲ 경주감은사탑 사리장치와 불국사 석가탑의 대다라니경. 탑파는 원래 무덤이었다. 그래서 탑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다. 감은사탑에서는 사리장치 안 수정병에 사리가 들어 있었고 석가탑에서는 다라니경이 나왔다. ⓒ 화보집 그러나 진신사리는 한정되어 있는 법. 그래서 후세에는 탑을 만들고 진신사리 대신 부처님 사리로 인정하는 법신사리를 봉안했다. 석가탑에서는 법신사리로 불경 다라니경이 나왔다. 아예 불상이나, 탑이 부처님 몸을 대신하기도 했으니, 조그만 탑을 봉안하기도 했다. 불교가 유행할수록 탑을 많이 만들었다. 이런 탑 중에서 진짜 제일 큰 탑은 어느 것일까?

사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탑은 삼국시대 탑이다. 익산 미륵사에 있는 석탑은 대단히 컸을 것 같다. 현재는 한쪽 귀퉁이만 남아 있다. 다행히 그 맞은편 석탑을 원래대로 복원하여 그 크기를 살펴볼 수 있다. 두 탑 중앙에는 더 거대한 목탑이 있었다고 하니, 이 탑이 가장 큰 탑이었을까?

▲ 익산 미륵사터 복원도와 석탑. 백제의 부흥을 도모했던 무왕 때 만든 미륵사는 3탑 3금당 양식을 갖추고 있다. 현재 미륵사석탑은 거의 무너져 한 귀퉁이만 남았다. 복원하면 저런 모양이 된다고 한다. ⓒ 신병철 미륵사 석탑은 돌로 만들었으되, 마치 나무로 만든 것 같다. 돌로 기둥·지붕·서까래 등 집을 구성하는 부재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쌓아서 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목탑양식의 석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목탑 양식의 석탑은 가까이 있는 ‘왕궁리 5층 석탑'(고려시대 탑이라는 주장도 있다)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석탑에서 백제계 석탑이라 말할 수 있다.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에서 만든 탑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돌보다는 나무로 만들기 쉬웠는지 목탑이 많았다. 북한에서 추측해 낸 청암리 절터의 목탑 복원 그림이 고구려의 탑 모습이라 추측한다. 이런 목탑은 일본으로 기술이 건너가 일본 광륭사 5층 목탑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일본 광륭사 목탑은 대단히 아름다운 목탑이다. 집으로 저렇게 아름다운 구조를 지닐 수 있는지 황홀하다.

▲ 일본 광륭사 5층목탑과 쌍봉사 대웅전. 고구려와 백제의 목탑 건조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저렇게 아름다운 목탑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이런 목탑이 부활하였다. 안타깝게도 소실하고 지금은 복원한 탑이 쌍봉사에 있다. ⓒ 신병철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가 목탑이 일정 부활한다. 17세기에 법주사 팔상전이 나타나더니 화순 쌍봉사 대웅전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쌍봉사 대웅전은 삼국시대 목탑 양식을 재현한 듯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80년대 화재로 없어지고 이후 복원한 것이니 안타깝고도 안타깝다.

신라에서도 석탑과 목탑을 많이 만들었다. 분황사 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만들어 그것을 쌓았다. 중국의 탑들은 대부분 벽돌탑이었고, 중국탑을 모방해서 벽돌탑을 쌓고자 했으나, 벽돌보다는 돌이 더 만들기 쉬웠던가 보다. 모전석탑이 되고 말았다. 원래는 7층인지 9층인지 분명치 않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남은 벽돌들이 그 옆에 수북이 쌓여 있다. 이 탑이 원래 모습대로 존재한다면 굉장히 거대한 탑이 되었을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으로 신라는 벽돌탑 전통을 지녔다고 말한다.

▲ 경주 분황사탑과 황룡사 복원도. 분황사탑은 돌을 벽돌처럼 만들어 쌓았다. 신라의 벽돌탑 양식을 대표한다. 경주 평지에 높이 솟아 있던 황룡사 9층 목탑은 7세기 신라의 융성을 상징한다. ⓒ 신병철 신라의 목탑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황룡사9층탑이다. 1230년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리고 없으니 이 또한 안타까울 뿐이다. 경주 남산 탑곡 바위에 그 모양이 새겨 있어 황룡사 목탑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좌우 7칸씩 49칸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이 주의의 금당들보다 월등히 높이 솟아 있었다. 7세기 신라의 융성과 국왕권의 절대성을 보여주는 목탑이었다. 지금은 복원 모형으로밖에 살펴볼 수 없으니 그 크기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

이렇게 삼국시대의 탑파들은 모양도 재질도 다양하고 대부분 중국의 탑들과 같이 거대하였다. 그러나 삼국통일 뒤에는 중국과 다른 우리식의 탑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북 의성에 있는 5층 석탑은 이런 신라식 탑파의 시작이었다. 기단은 2중이나 아직 별로 크지 않으며, 백제계 석탑처럼 목탑 양식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신라계 벽돌탑처럼 지붕돌의 아래 위에 층급이 져 있다. 백제와 신라의 양식을 융합하여 자신의 양식을 창출해내고 있었다. 통일신라 문화를 삼국문화의 융합과 발전이라고 말할 때 이 탑을 예로 든다.

▲ 의성탑리 5층석탑과 감은사터 3층석탑. 백제의 목탑양식과 신라의 벽돌탑 양식이 결합하여 통일신라 석탑 양식이 등장했다. 의성탑리5층석탑에서 발전하여 2중기단에 3층석탑으로 전형화했다. 감은사탑은 그 시작이었다. ⓒ 신병철 그리고 곧 이어 경주에 화강암으로 씩씩한 3층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감은사3층탑과 고선사터3층석탑은 통일신라 초기의 강성을 반영하고 있는지 덩치가 크고 굳센 기상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감은사탑이 직선적이고 남성적이라면 고선사탑은 조금은 부드러워 여성적이다. 그리고 8세기 중엽에 불국사 석가탑으로 통일신라탑은 완성되었다.

불국사 3층석탑, 속칭 석가탑은 언제 봐도 깔끔하다. 나이가 1200살이 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젊다. 최근에 만든 탑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보이는 데는 석가탑이 지니는 몸체의 비례에 그 이유가 있다고 한다. 지붕돌 모서리 세 점과 윗기단 갑석(제일 위 판돌) 모서리 점이 처음으로 일직선상에 있고, 그것이 땅과 이루는 각도가 서 있는 물체가 가장 세련되게 보이는 각도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갑석 넓이와 탑몸 높이가 황금분할에 가깝다고도 한다. 석가탑으로 신라식의 탑파는 완성되고 말았고, 이런 탑들을 전국에 수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 통일신라의 석탑은 석가탑으로 완성되었다. 2중기단과 3층석탑의 전형이 탄생했다. 이런 석가탑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그 상대되는 전례가 없는 다보탑을 만들어낸 것이다. ⓒ 신병철 석가탑을 만들 수 있었던 균형감각과 조형술은 석가탑 상대편에 정말 상대가 되는, 또 조화를 이루는, 전례 없는 탑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다보탑이다. 기단·몸체·머리 부분의 뚜렷한 경계도 없는 듯하면서 아래쪽은 4각, 조금 위는 8각, 머리는 아예 원이 되었다. 하늘로 향하면서 점차 다각화로 꾸몄다. 계단과 기둥과 지붕과 꼭대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석가여래가 저쪽에 상존함을 과거불이나 다보불이 증명하노라’라는 뜻이란다.

완성은 곧 이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법. 신라의 탑파는 새로운 변화 바람 앞에 섰다. 탑의 반반한 면에 온갖 부조를 새겨 넣었다. 새로운 불교 교리가 들어 왔나 보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신라 진골체제를 상징했다면, 지방 세력의 등장은 새로운 변화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기단이 작아지기도 하고 둥글어지기도 하고, 연꽃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탑층수도 다양해져갔다.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도 탑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고려시대 아무리 높은 탑을 세웠다 할지라도 신라의 황룡사탑만은 못했을 것이다. 조선의 탑으로 가장 높은 탑은 원각사지 탑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크기로 대적할 수 없을 정도다. 최근에 만든 탑은 하도 다양하고 어떤 경우는 화려하거나 조잡하여 비교 대상에 넣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탑은 이제 대강 파악되었다. 정답은 ‘잘 모른다’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길이를 실제로 재보고 남아 있는 유물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추측해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인가? 크기가 아니라 멋이 중요하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있는 탑

크기야 재보면 알지만, 멋있는 정도는 재볼 수 없으니 애매하다.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겠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부여 장하리 삼층 석탑이 가장 멋있다. 부여에서 백마강을 건너 임천 쪽으로 가다 백마강변으로 따라 얼마 가면 이 탑이 있다. 집 한 채가 가까이 있고 밭 가운데 덩그렇게 서 있다.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마주보고 있다. 이 곳에 절간이 있었고, 그 절 앞에 세운 탑파였을 것이다.

▲ 부여 장하리 3층석탑.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정림사지5층석탑과 마주보고 서있다. 깔끔하고 푸근하다. 누군가 모딜리아니의 여인같다고 했다. ⓒ 신병철 이중으로 된 작은 기단이 있고, 그 위에 3층의 탑몸과 지붕돌이 솟아 있다. 지붕돌은 비스듬한 낙수면은 없고 3개 정도 판돌이 겹쳐 있으며 아래쪽으로도 2단의 층급이 있다. 탑몸은 기둥이 뚜렷이 표시되어 목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탑몸과 지붕돌이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는데 각층 지붕의 넓이와 탑몸의 높이가 적절하다. 맞춤하게 서 있는 모습이 모딜리아니의 여인같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의 특징을 살린 탑이 거의 없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그 정복 지역에 통일신라 석탑 형식만 용인한 듯하다. 고구려 지역이었던 단양에도, 백제 영역이었던 지리산 지역에도 석가탑 비슷한 탑만 세웠다. 삼국의 격전지였던 충주 의 중앙탑은 높은 단 위에 엄청 높은 탑을 세웠다. 아마도 피정복민에 대한 위압 목적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그러나 고려가 건국되고, 탑파 양식에 대한 통제는 사라졌다. 삼국의 특징이 되살아난 것이다. 옛 고구려 지배 지역에서는 고구려 양식의 탑이 나타났다. 오대산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이 그것이다. 옛 백제 지역에서는 백제 특유의 탑이 부활했다. 부여 장하리 삼층 석탑은 부여정림사지 5층석탑의 고려식 모드였다. 작은 기단 위에 높이 솟아서 생긴 상승감, 그러면서도 온화한 분위기, 그대로 빼 닮았다.

▲ 경천사터 10층석탑과 원각사터 10층석탑. 고려말에는 몽고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장식적인 석탑이 나타났다. 이런 탑은 조선으로 이어져 종로 원각사 10층석탑으로 나타났다. ⓒ 신병철 초기의 이런 삼국 부활 경향은 점차 나아가 고려 양식을 창출해 나갔다. 탑층수가 많아져 높이가 대체로 높아졌고, 4각형 외에 8각형도 나타났다. 고려말에는 몽고의 간섭을 받으면서 라마교의 영향 아래 화려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 탑파들이 나타났다.

개풍군에 있던 경천사터10층석탑은 일제가 일본으로 유출하고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3층 기단을 탑몸으로 치면 13층 석탑이 되고, 기단으로 치면 10층 석탑이 된다. 10층 석탑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온갖 불교 조형물이 이 탑 가득히 부조되어 있다.

경복궁에 외로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해체하여 보관하고 있다. 제발 궁궐이 아닌 적당한 곳에 복원해 빨리 구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통일되어 개풍군 원래 자리에 서 있는 이 탑을 볼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숭유억불의 나라 조선에서는 공식적인 탑파 건축은 자제했다. 세조 때 종로2가에 원각사를 짓고 그곳에 경천사석탑을 모방하여 10층석탑을 세운 것이 예외였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정치에서 멀어질수록 크지는 않지만 많은 석탑이 곳곳에 세워졌다.

최근에 들어와 자본주의의 기술력이 발달하고, 구복 행위가 겹쳐지면서 절간에 돈이 모였다. 기술과 돈이 결합하여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석탑이 등장하기도 한다. 서울 승가사 석탑은 이런 우리 시대 석탑의 대표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천사10 석탑의 치장은 저리 가라다. 불교 관련 상징물이 총동원되었다. 산간의 조그만 절간에 저렇게 굉장한 탑을 지을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우리 자본주의 시대다.

▲ 서울 승가사석탑과 충주 단호사석탑. 우리의 자본주의 시대에 나타난 탑파들. 기술과 자본이 모여 과거에 볼 수 없던 탑이 등장했다. 반면에 조그만 정성으로 간단하게 만든 탑파도 있다. ⓒ 신병철 반면에 소박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탑도 있다. 충주 단호사에는 보도블록을 교체하면서 못쓰게 된 보도블록으로 절간 한 귀퉁이에 탑을 세웠다. 꼭대기에는 정형에도 없는 보살상을 올려놓기도 했다. 부처님에 대한 정성이 엿보여 나름대로 감동을 준다.

모든 문화재가 그러하듯이 탑파도 시대의 반영물이다. 이런 탑들 중에서 가슴에 품고 가끔 찾아 가고 싶은 탑 하나쯤 만들어 봄이 어떨까?

나는 부여 장하리 3층 석탑을 간직하고 있다가 가끔 꺼내 본다. 훤칠한 키, 정면에서 보면 지붕이 수평이 되어 깔끔해지고, 옆에서 보면 지붕이 넓적하게 보여 펑퍼짐해지는 이 탑은 한마디로 푸근한 탑이다. 부처님 만난다는 생각으로 이번 겨울에 꼭 한번 찾아가 보리라.

우리나라엔 왜 돌로 만든 탑이 많을까?

우리나라엔 왜 돌로 만든 탑이 많을까?

불탑엔 나라마다 특징 있어요

목재가 풍부한 일본은 ‘목탑’, 동원할 인구 수 많은 중국은 세우기 까다로운 진흙 ‘전탑’

질 좋은 화강암 많은 한국은 돌로 만든 ‘석탑’이 발달했죠

매년 300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일명 석가탑)이 창건 1270년 만에 전면 해체·복원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탑(石塔)인 석가탑이 곧 보수에 들어간다고 해요. 불국사가 창건된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에 세워진 석가탑은 높이가 10.8m로 웬만한 3~4층 건물 높이입니다. 고전적이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석가탑은 탄생 이후 지진과 벼락, 전쟁, 도난과 같은 세월의 풍파를 겪어왔어요. 그동안 몇 차례 보수를 해왔지만 이번엔 탑 전체를 해체해 다시 조립하는 대대적 공사를 거칠 예정입니다.

석가탑뿐 아니라 우리나라 방방곡곡엔 아름다운 탑이 많이 있지요. 탑은 탑파(塔婆)의 줄임말로 흔히 불탑(佛塔)이라고도 부르는 불교 건축물입니다. 우리가 또 다른 ‘탑’으로 부르는 프랑스 에펠탑,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과는 전혀 다른 것이죠. 이런 탑은 폭이나 두께보다 높이가 훨씬 더 긴 건축 구조물인 타워(tower)입니다. 군사, 종교 목적으로 사용하다가 세월이 흐르며 방송 송수신, 관광 등을 목적으로 짓고 있어요. 올봄 문을 연 높이 634m의 세계 최고(最高) 타워인 일본 도쿄의 스카이트리도 전파 송신탑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부터 불탑(佛塔)을 만들었을까요? 불탑은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석가모니의 사리(舍利)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이 시초입니다. 이후 불교와 함께 중국, 한국, 일본 등 여러 지역으로 퍼지면서 국가와 시대에 따라 탑의 양식과 의미가 다르게 발전해왔어요.

탑은 사용한 재료에 따라 종류를 구분해요. 중국과 인도에서는 황토로 된 진흙이 많고 사람을 많이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탑(塼塔)을 주로 세웠지요. 전탑은 진흙을 네모로 빚어 가마에서 구워낸 벽돌을 쌓아 만드는 방식입니다. 표면에 문양을 넣어 장식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재료의 특성상 탑이 튼튼하지 못해 지금까지 제대로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나무로 만드는 목탑(木塔)은 목재가 풍부했던 일본에서 많이 세워졌어요. 화산지형 때문에 흙이 거칠어 벽돌을 만들기에 적합지 않았고, 돌은 석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에 일본은 자연스럽게 목탑이 발달하였죠. 하지만 목탑은 자연재해에 약하고 불에 타기 쉬운 단점이 있어요.

(사진 왼쪽)통일신라시대의 대표 석탑인 석가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 무영탑(無影塔)으로도 불린다. (사진 오른쪽)국내 유일한 5층 목탑인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석탑(石塔)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발달했어요. 질 좋은 화강암이 많았고 돌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한 덕분이죠. 전쟁과 외적의 침략이 잦았던 우리나라에서 나무와 벽돌로 만든 탑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현재 우리나라 전통 불교문화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우리나라 석탑은 7세기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작되었고, 통일신라가 불국사 석가탑에서 삼층석탑의 형식으로 발전시켰어요. 이후에 만들어진 석탑은 석가탑을 충실히 따르거나 변화를 가미하면서 다양하게 발달해왔습니다.

석가탑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다보탑입니다. 오랜 세월 석가탑과 서로 형제처럼 의지해 온 다보탑(국보 제20호)은 평소 10원짜리 동전에서 봐왔을 거예요. 얼마 전 문화 관련 시민단체에서 다보탑 돌사자의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있었어요. 만약 다보탑 돌사자가 원래 자리로 이동하면 10원 주화를 비롯해 역사 교과서의 사진이 수정되어야 할지도 몰라요.

사람은 살면서 여러 가지 병을 겪고 노화 현상을 겪습니다. 이번 석가탑 보수공사 뉴스에서 보듯 아무리 화강암과 같은 튼튼한 돌로 지어진 탑일지라도 천년풍상을 겪다 보면 탈이 나게 마련이에요. 병이 나면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필요하듯 문화재도 탈이 난 곳을 제대로 보수하고 정성스레 보살펴야 본래의 모습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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