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회 비판 |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다ㅣ열린교회 김남준 목사ㅣ새롭게하소서 105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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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인의 열린교회 비판과 김남준 목사님의 답변

3) 열린교회에서 교인 교육을 위해 운영되는 어떤 학교들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4) 온가족교회 오는 날 예배시간에 신앙고백 순서를 빼버렸는데 사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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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dseonam.tistory.com

Date Published: 9/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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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교회 – 나무위키

열린교회 ; 소속노회. 동서울노회 ; 담임목사. 김남준 ; 표어. 예배에 감격이 있는 열린교회 ; 위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흥안대로439번길 31 (관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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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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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보다 선동” 신랄한 설교 비판집 나와 – 경향신문

정목사는 이밖에도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는 ‘예언과 선동의 갈림길에서’, 기쁜소식강남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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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han.co.kr

Date Published: 11/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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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교회의 타락 – 네이버 블로그

이런 열린교회들이 WCC를 비판하지 않았으며 교회가 배도와 배교로 가는 것에 대해서 동조와 침묵으로 협력을 했다. 그러면서 교활한 위선을 부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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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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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의 ‘교회 세습’에 대한 생각은 – 크리스천투데이

아들이 더 잘 해 성장한 교회 있지만… 그것이 특권 비춰지는 현실에서 굳이 비난 감수하면서 물려줄 필요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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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12/9/2021

View: 6697

김남준 목사 “하나님은 죄를 통해 인간을 의지케 하신다”

한국교회의 살아있는 지성으로 손꼽히는 김남준 목사(열린교회)가 교계 … 교회의 위기와 분쟁, 목회자의 타락 등 기독교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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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cumenicalpress.co.kr

Date Published: 4/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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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난 치열하게 공부하는 ‘고 3 학생’

열린교회 담임 김남준(55) 목사는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갈 때마다 중·고등학생들이 사용하는 백팩을 멘다. 양복에 백팩을 멘 목사를 상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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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2/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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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비평 –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열린교회의 김남준 목사(이하 ‘김 목사’)는 2005년 6월26일 주일공동예배 시간에 통곡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김 목사는 그날 “흔들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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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abia.net

Date Published: 9/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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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교회 담임 김남준 목사 – 기독교포털뉴스

김남준 목사(58, 열린교회 담임)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 그러면서도 김 목사는 특정교회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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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portalnews.co.kr

Date Published: 6/17/2021

View: 8672

“4차산업혁명 시대, 대안사역 찾아야” – 기독신문

열린교회(김남준 목사)는 10월 8일 본당에서 ‘4차산업혁명과 개혁주의 신학’ … 4차산업혁명 속에 숨어 있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교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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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7/3/2021

View: 8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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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열린 교회 비판

  • Author: 새롭게하소서C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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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6. 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w3byIuzMD4

“말씀보다 선동” 신랄한 설교 비판집 나와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 등 한국교회의 대표적 목회자 14인의 설교 내용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책이 출간됐다.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이자 경북 경산에서 샘터교회를 이끌고 있는 정용섭 목사(53)가 펴낸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대한기독교서회)는 한국 교회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설교자들의 설교에 대한 문제점을 분석한 설교 비평서다. 월간 ‘기독교 사상’에 연재했던 글을 모았다.

목회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국 교회 풍토에서 지금까지 목회자의 설교를 대놓고 비평하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 대형 교회 목회자들, 설교 잘하기로 소문난 ‘인기’ 목회자들의 설교를 비평하는 일은 거의 금기시돼 왔다.

그러나 정목사는 한국의 대표적 설교자들을 도마에 올려 과감하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강조하는 그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점으로 ‘성서 읽기의 아마추어리즘’을 꼽는다. 성서 읽기의 가벼움과 과도한 열정이 설교를 왜곡시키는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의 설교에는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먼 기복주의, 성속 이원론, 신앙의 도구화 같은 요소들이 교묘하게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 대신 설교자 자신의 경험과 인생관과 철학이 설교의 중심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정목사는 이러한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선동’이라고 주장한다.

정목사는 뉴라이트 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진홍 목사에 대해 “설교의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림 없이 동일한 템포로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설교자”로 평가하면서 “그의 설교에는 무협지처럼 영웅들만 설치고 있지 하나님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지난 4월 16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예수 잘 믿으면 ‘삼박자’ 축복을 받는다는 조목사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예수 믿는다고 영혼, 범사, 건강이 보장되는 법은 없다”고 비판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강조하는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에 대해서는 “그의 설교에 등장하는 모든 성서 이야기나 교회의 신앙 이야기는 한결같이 이 단순한 구조를 보강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될 뿐”이라며 “그것은 그의 설교 행위가 신들림 현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근거”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정치적 발언을 많이 하는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복음을 전하는 설교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쪽으로 경직된 시각을 가진 초보 정치인의 시국강연문”이라고 혹평했다. 또 서울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의 설교는 “성서 읽기와 신앙 경험이 철저하게 주술적 세계관에 기울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정목사는 이밖에도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는 ‘예언과 선동의 갈림길에서’, 기쁜소식강남교회 박옥수 목사는 ‘구원을 향한 과도한 욕망의 끝자락’ 등의 제목으로 ‘속 빈 설교’에 대한 쓴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정목사는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선교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 모새골공동체 임영수 목사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목사는 앞으로 대전중문침례교회 장경동 목사,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할렐루야 교회 김상복 목사, 새들백교회 린 워렌 목사 등을 비평한 두번째 설교비평서를 내놓을 계획이다.

〈김석종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열린교회의 타락

열린교회의 타락

이 시대의 개신교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문화와 오락을 전도와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철저하게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교회는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 교회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조차도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

교회가 이렇게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열어두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것은 교회가 심각하게 타락했다는 증거다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사람으로 비유를 하면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열린교회는 스스로가 대단히 폭넓은 견해를 수용하고 도량이 넓은 그리스도인,,,근본주의교회와 같이 좁아 터지고 죄와 심판. 지옥을 설교하지 않는 세련되고 감각이 있는 분위기 있는 교회라는 식으로 세상에다 자랑을 하는 교회다

그런 열린교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간에

세상 사람들이 ( 불신자들) 긍정적인 평을 해주는 교회로 불려지고 좋은 이미지 구식의 보수적이지 않는 이미지를 가진 교회로 지역사회에 소문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중산층의 세련된 기독교 신앙을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교회로 몰려올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상은 교회가 이 세상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교회는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교회가 성장을 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망상이 어느 정도 이루어 진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 열린교회는 복음의 메시지를 여러조각으로 쪼개서 더 이상 복음이 아닌 멸치볶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 교회는 다양한 세련되고 부드러운 CCM 음악과 성가대, 그외 각종 목장구역, 소그룹 예배 ,다양한 계층을 만족시키는 맞춤형 예배로 모든 종교서비스를 원하는 고객들을 포획하고 있다

거기다가 온갓 감각적인 도구를 다 동원한 예배형태를 유지함으로 인간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철저한 종교서비스 정신이 충만한 교회가 되었다

(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춤을 추고 입으로 맛보고 ( 커피숍 ) 면서 교회를 즐겁게 다닐수 있는 탁월한 종교서비스로 누구든지 만족시킬수 있는 교회가 최고의 목표다 )

그뿐인가?

목사들의 설교는 절대 심각한 죄와 악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열린교회는 죄와 악을 설교하는 목사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은 그런 설교를 상상도 못한다

만약에 열린교회에서 죄와 악을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는 다음주에는 절대 그 교회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

열린교회같은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교회들은 거룩한 교리적인 지식에 무지하다 그들이 가장 잘하는 것은 오직 흐느끼는 감정과 감각, 부드러운 분위기와 오직 포근한 감정적 위로로 사람들을 녹여내는 것이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열린교회는

포용적이다, 말로는 말씀중심, 교회중심,하나님 중심이라고 떠들고보수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직 위장을 하기 위한 껍떼기일 뿐이다

실제로는 교회연합운동( 에큐메니칼주의) ,포용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 등모든 신학에 다 문을 열어놓고 있다 심지어는 사악한 로마천주교를 같은 교회로 여겨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열린교회들이 WCC를 비판하지 않았으며 교회가 배도와 배교로 가는 것에 대해서 동조와 침묵으로 협력을 했다

그러면서 교활한 위선을 부리면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님을 떠벌이는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헌신과 헌금을 강탈하는 강도와 도적의 본성을 갓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정신차려라,,,

자신들이 지금 지옥에 한복판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엄청난 종교적 착시효과에 빠져 있는 것이다는 것을 하루빨리 냉수먹고 정신차려라,,,,

자신들이 회개, 중생, 거듭남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그런 중요한 신앙용어조차도 모르면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인생의 최종 종착점이 어디 일거라 생각하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열린교회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교회는 세상과 항상 대립되는 교회다

교회가 거룩하고 경건하기 위해서는 세상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구원의 방주가 될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제멋대로 이 세상의 모든 문화를 다 받아들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악기를 두둘기고, 뛰고 굴고 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난장판이다

오늘날 목사들중에는 이렇게 교회를 세상에다 완전히 개방하고 열어놓고

사람들을 오라고 하는 호객꾼 ( 삐끼)노릇이나 하는 저질적인 인간들이 많이있다

더 이상 예배가 경건과 거룩, 참된 영원을 향한 신자들의 소망과 거룩한 찬송의 조화, 성경의 교리를 올바로 철저하게 가르치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같은 것은 더 이상 이 시대의 열린교회들에게서는 찾아볼수가 없게 되었다

진리에 대해서는 듣혀 있으면서

세상의 문화와 여론, 분위기 ,감상적인 죄악들에는 철저하게 열린 교회?

그곳은 교회가 아닌 지옥의 터미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세상에 열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두고 깊은 영적인 고뇌를 해야 할 것이다

오인용 목사. 밴드 오브 퓨리탄스

하야방송 출연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저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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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살아있는 지성으로 손꼽히는 김남준 목사열린교회가 교계 인터넷 하야방송국장 유성헌에 출연해 자신의 저서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북 토크를 진행했다

먼저 김 목사는 이 책에 대해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매주 교회를 나가면서도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타의적 신앙에 머무는 이들을 위해 교회와 신앙의 참된 관계를 통해 고민에 대한 현실적 조언을 펼친 것이라고 소개했다.

교회의 위기와 분쟁, 목회자의 타락 등 기독교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의 모습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다”며 진지한 반성을 촉구했다.

김 목사는 “교회 안에서 온갖 다툼과 미움이 발생하고, 진리를 앞세워 서로를 정죄하는 일들이 너무도 쉽게 일어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면서 “이는 교회 본연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원리를 크게 거스르는 일로, 그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고 비판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 중 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죄를 만드시지 않으셨지만, 인간 속 죄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지하게 만드신다”면서 “죄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교회 역시 마찬가지로, 교회가 완전했다면, 우리의 신앙은 매우 교만해졌을 것이다”면서 “그 불완전함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고백을 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김 목사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깨달았으면 하는 바램을 전했다. 김 목사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서로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배려”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 결코 다툴 일도, 미워할 일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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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김남준 목사는 목회 외에도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후학 양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깊이 있는 신학과 날카로운 식견으로 정평이 나있는 김 목사는 간 영국 퓨리턴들의 설교와 목회 사역을 연구하며,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보편교회의 신학과 칼빈,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에 남다른 조예를 갖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기독교 출판문화상을 수상한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와 ‘거룩한 삶의 실천을 위한 마음지킴이’를 비롯해, ‘깊이 있는 주기도문’, ‘인간과 잘 사는 것’, ‘교회와 그리스도의 고난’ 등 다수가 있다.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통곡하는 설교자

그 장면은 내게 충격이었다. 만약 내가 남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하고 말았을 것이다. 열린교회의 김남준 목사(이하 ‘김 목사’)는 2005년 6월26일 주일공동예배 시간에 통곡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김 목사는 그날 “흔들리지 말라”(고전 15:58)는 제목으로 설교한 다음, 청중들과 함께 통성기도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남편을 여읜 젊은 아낙처럼 2분여에 걸쳐서 통곡을 했다. 모르긴 해도 지천명의 세월을 넘겼을 법한 한 남자 설교자가 자신의 모든 인격을 해체해 버린 듯 큰소리로 울고 있는 그 현상 앞에서 내 생각은 매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를 영혼의 심층에서 뻗쳐 나오는 통곡으로 몰아간 걸까? 그는 성령의 활동 앞에서 자기를 무장해제하는 순수한 영혼의 ‘불꽃’인가, 아니면 자기 역할에 몰입할 줄 아는 배우인가?

김 목사는 그 날만 운 게 아니다. 7월10일에도 통성기도 시간에 결국 울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설교 중간에도 울먹이는 경우가 흔하다. 내가 인터넷으로 확인한 그의 주일예배 설교는 6월26일부터 7월31일까지 6편에 한정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도 여전히 그런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는지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그런 ‘흐느낌’이 있는 예배야말로 열린교회의 모토처럼 ‘감격이 있는 예배’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집과 저서에 등장하는 흐느낌, 울부짖음, 눈물에 관한 대목만 따로 묶어도 몇 권의 책은 족히 될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설교자는 말씀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회중들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 때문에 설교 중 흐느끼기도 하였으며, 설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역사의 현장을 예배 속에서 보며 예상치 못한 엄청난 설교의 결과들을 인하여 경이로운 기쁨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136쪽. 이하 ‘불꽃’).

그렇다고 해서 한 시간 반 동안 김 목사가 계속해서 울먹이며 설교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의 설교는 신학교 강의실을 방불하게 하는 진지한 내용으로 시작되며, 위트도 넘치고, 때로는 웅변가의 호소력도 엿보인다. 한편의 설교에서 ‘흐느낌’으로 묘사될 수 있는 부분이 양적으로는 일부라고 하더라도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결정체’(7월24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는(이름뿐인 신앙을 벗어나라, 188, 208쪽, 이하 ‘이름’) 그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를 예레미야 같은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러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나는 통곡과 눈물로 표현되는 그의 원초적 패토스가 부럽다.

김 목사는 그날 왜 통곡했을까? 어쩌면 이 글이 끝날 때까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설교를 정확하게 따라잡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질문을 내 염두에 둘 생각이다. 여기에 바로 그가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그래서 상당한 정도의 효력을 보이고 있는 설교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성서 텍스트가 울게 하는가?

이 질문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가기 위해서 우선 그 날의 설교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쉽게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늘 지성을 중요한 신앙적 인식론으로 간주하고(영적 기상도를 본다, 140쪽. 이하 ‘기상도’), 더구나 회중들의 반응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설교의 중심이 있다고 생각하는(‘불꽃’ 66) 설교자가 통곡했다는 사실은 성서 텍스트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김 목사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한 시간 반 동안 설교했다. 내 딸들은 35분 내외의 내 설교도 길다고 야단들이다. 김 목사의 설교는 길이만이 아니라 내용도 따지고 보면 어려운 편이었다. 그는 늘 교리적인 색채를 바탕에 깔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 목사는 7월31일에 “지식으로 자라게 하라”(엡 4:14)는 설교에서 지성, 이성, 오성, 믿음, 지식, 경험이라는 신학적이고 철학적 개념을 한 시간 반 동안 밀고 나갔다. 설교자로서의 내공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런 설교를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짧고, 쉽게!”라는 현대 설교학의 원리를 완전히 비틀어버리는 설교가 열린교회에서 먹히고(?) 있다는 이 불가사의는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볼만 하다.

6월26일에 그가 선택한 본문은 그 유명한 부활장(章)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공동번역, 고전 15:58). 그는 부활의 우주적인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을 구분해서 설명했다. 하나님은 종말에 우리의 흩어진 몸을 다시 모아서 부활의 몸을 이루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매일 부활하는 영적인 삶을 추구해야 한다. 김 목사의 설명에 의하면 그런 영적인 삶은 곧 죄로부터 용서받는 것이다. 부활에 관한 일반론적인 설명을 끝낸 후에 김 목사는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굳건한 삶과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야한다는 사실을 열정적으로 선포했다. 사명을 견고하게 지켜야 한다는 대목에서 그는 불끈 쥔 오른쪽 주먹을 위 아래로 수없이 흔들면서 “왜 교회가 이렇게 냉담할 수 있는가?”라고 외쳤다. 그는 이 장면에서 계속 울먹이며 청중들을 향해서 책망하고 호소했다. 그는 (열린)교회를 보면 신자들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그런 아픔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한 탓인지 급기야 그는 통곡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김 목사의 그런 열정을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바울의 부활장 전체를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바울은 거기서 세 가지를 진술했다. 첫째, 부활의 증인들. 둘째, 부활의 확실성, 셋째, 몸의 부활. 이로 미루어볼 때 고린도 교회는 부활 자체를 부정하거나 또는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해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15장 전체를 통해서 그런 이단들을 극복하고 있으며, 특히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56절)는 진술을 통해서 부활에 근거한 복음의 특징을 정확하게 논술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에 의해서 인간이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성취해야 할 모든 의무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김 목사가 선택한 본문(고전 15:58)은 부활 신앙을 올곧게 유지하라는 권고이며, 동시에 격려라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이 본문으로 설교했다면 청중들에게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희망하며 기뻐하라고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신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며, 통곡했다. 내가 보기에 울만한 장면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울었다는 사실을 보면, 김 목사는 텍스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적 종교경험에 치우침으로써 감정적으로 ‘오버’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신앙적 취향이기 때문에 내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다만 성서 텍스트를 향한 접근이 나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참회의 영성

이 ‘다르다’는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신앙의 토대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결정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영성을 현실에 대한 깊은 ‘긍정’에서 나오는 기쁨이라고 생각하지만, 김 목사는 죄와 심판과 ‘참회’에 의한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김 목사가 부활장을 본문으로 하는 이 설교에서 그렇게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기본적으로 참회의 영성에서 접근한다는 데에 있다. 그게 바로 김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앞에서 내가 흐느낌과 눈물이라는 단어가 그의 설교집과 저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지적했는데, 그건 곧 그가 참회의 영성에 천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오늘날 조국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쇠퇴하면서 눈에 뜨게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회개를 보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회의 눈물이 없는 예배,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는 마음이 없는 기도회, 성경을 읽어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어두움 같은 것들은 모두 참된 회개의 부족에서 생겨나는 것이다.(‘기상도’ 126).

이미 예수께서 “때가 다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막 1:15)고 말씀하셨으니까 김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열정적인 설교자들이 청중들에게 회심을 강조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그렇게 힘주어 말하는 ‘메타노이아’(회심)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도대체 어디로부터 어디로 돌아서라는 말인가? 물론 그들은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라는 복음찬송 가사처럼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돌아서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너무나 막연하다.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김 목사가 통곡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신자들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죄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의 설교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거룩한 빛이 예배의 현장에 들어올 때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죄악으로 가득 찬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죄에 대한 놀라운 각성은 성령의 능력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예배를 통하여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지 머리로만 아는 상식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미움과 원망의 죄, 공동체의 화해와 화목을 깨뜨린 자신의 허물을 보게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53쪽, 이하 ‘맺힌 것’)

성령의 능력으로만 각성될 수 있는 그 죄라는 게 ‘미움’(‘맺힌 것’ 34, 48)과 ‘포악하고 무자비한 성품’(‘맺힌 것’ 136)이라는 말인가? 만약 복음이 이런 인격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인들이나 약간만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눈여겨본다는 점에서 복음의 차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교양의 차원에 속한다. 너무 답답해서, 김 목사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 세상의 죄와 악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보기에 김 목사는 복음의 지평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메타노이아’가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신자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예수에게서 배운 바에 따르면, 이 세상으로부터 교회로 돌아오는 게, 또는 미움과 포악한 마음을 버리고 교양인이 되는 게 회심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실행할 수 있는 사건을 자기가 성취하겠다는 생각으로부터 그것을 포기하는 게 바로 회심이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예수의 선포는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한다. 바울이 부활장 56절에서 확인했듯이, 자신의 종교적 성취인 율법을 통해서 구원이 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구원을 일으키신다는 엄정한 사태로 돌아서라는 선포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영적으로 영민하고 지성적으로 진지하신 분이 회심의 토대인 ‘하나님 나라’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말이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는 김 목사가 신자들을 향해 돌아서라고 불을 토하는 그런 세상의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셨다. 종교적인 교양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로부터 “당신은 왜 죄인들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느냐?”고 핀잔을 들을 정도로 그냥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삶을 긍정하셨는데, 왜 김 목사는 그런 세상에 진저리를 치실까?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린 이유는 그들을 회심시켜서 반듯한 사람이 되게 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의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역시 나는 그가 틀렸다기보다는 나와 ‘다르다’는 사실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참회의 영성이 김 목사의 독특한,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고루하고 편협한 세계관에 의해서 침소봉대되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청교도 신앙

김 목사는 왜 이 세상을 나와 전적으로 다르게 보실까? 열린교회의 홈페이지와 저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김 목사를 아는 처지에서 뭐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가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호감을 줄만한 스타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신학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서울 근교에서 우체국장을 역임하셨고, 전도사 생활 14년, 신학교수 9년의 경력을 거쳐 열린교회를 개척한지 10년이 넘었다. 김 목사의 외모는 동안인데다가, 천성이 좋은 사람 같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도 대체로 고압적이지 않아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한다. 한국교회를 향한 문제의식도 나와 비슷하다.

이렇게 의기투합할만한 부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 여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는 것 같다. 김 목사가 ‘청교도’ 신앙에 철저하게 경도되었다는 게 그 대답이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조나단 에드워즈, 리처드 박스터, 조지 휫필드, 존 오웬, 토마스 맨튼, 헨리 스쿠갈, 존 번역 같은 청교도들을 내세웠다. 개신교 설교자 중에서 종교개혁자들보다 청교도 지도자들을 더 많이 인용하는 설교자는 김 목사 이외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편식하면 사람의 건강에 적신호가 오는 것처럼 김 목사의 경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김 목사의 삶과 신앙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김 목사가 자주 인용하는 존 오웬은 로마서 8:13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청교도 신앙의 중요한 세 가지 교리를 이끌어낸다.

죄의 정죄하는 능력으로부터 확실하게 자유로운 가장 정선된 신자들은 죄의 거하는 능력을 극복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오직 ··· 성령만이 이 일을 하실 능력이 있다. ··· 우리의 신령한 삶의 활력과 능력과 위로는 우리가 육체의 행위를 극복함에 좌우된다.(J. Owen, Works 6, 7ff., 제임스 패커, 청교도 사상, 97쪽에서 재인용).

내가 보기에 청교도 신앙은 두 가지 특징으로 해명된다. 하나는 평생 죄 문제와 투쟁하는 일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기독도가 자기에게 매달리는 아내와 친구를 뿌리치고 장망성을 떠나 천성문으로 향한다는 <천로역정>의 주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끊임없이 기독교 영성을 죄와 회심에서, 그리고 육체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찾으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현재적 임재에 의한 신앙적 열정이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설교하는 순간에 성령이 임하신다는 사실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위의 책, 400).

이런 청교도의 전통에 따라서 김 목사는 목회자의 가장 큰 사명을 ‘성도 스스로 모르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7월24일), 예배에 ‘흐느낌’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의 회심이 계속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여름성경학교 설교 시간에 초등학교 2,3학년 어린이들에게 십자가에 관해 설교했을 때 “비닐 장판을 깐 기도실 바닥이 눈물로 질퍽질퍽할 정도”로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이름’ 70). 내가 볼 때 초등학생들에게 일어난 이런 현상은 기독교적 영성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작용에 불과하다. 훗날 청소년 집회 때도 그의 설교가 정점을 향하여 줄달음치자 여기저기서 흐느껴 우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설교가 끝났을 때에는 노천 광장을 뒤흔드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비에 젖은 땅바닥을 치며 우는 아이들과 주저앉아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였다.(‘기상도’ 132).

김 목사에게는 전문적인 설교자가 되기 이전에 이미 청중들을 울릴 수 있는 카리스마가, 혹은 ‘끼’가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청교도들은 감정보다는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반해서 김 목사는 이런 젊었을 때의 경험이 깊이 뇌리에 박힌 탓인지 설교 시간에 이런 감정적인 접근을 자주 시도한다. 그가 설교 중에 조성모 톤으로 부르는 복음찬송은 청중의 심금을 울리기에 ‘딱’이다.

청교도 신앙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그것을 신자들에게 강요하느라 눈물마를 날이 없는 김 목사를 향해서 인간이 그런 편협한 구도에서 해명되는 게 아니라고 내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무의미할 것이다. 그는 이미 그런 방식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교회를 개척한지 10여년 만에 수천 명의 교인들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집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하니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한물 간 청교도 신앙이 그에 의해서 다시 리바이벌하는 것 같다.

영적 결벽증

나는 청교도 신앙의 진정성과 열정이 김 목사의 설교와 목회 현장에서 아무리 실효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신앙이 한국교회의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교도들의 신앙적 특성은 17,18세기 영국 국교회와 또는 18,19세기 미국이라는 특별한 사회를 배경으로 일어난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기본적으로 그 당시 기독교의 금욕주의적 인간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퓨리턴(puritan)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그들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그 어떤 것을 향해서 비타협적으로 돌진한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을 ‘영혼 순수주의’, 또는 ‘영적 결벽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결벽증’은 깨끗함을 지나치게 즐기는 성벽이다. 다른 사람과 악수한 다음에도 곧 화장실로 달려가서 손을 씻는다거나 지하철 손잡이를 휴지나 손수건으로 닦은 다음에야 잡는 행동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위생건강을 위해서 가능한대로 청결한 생활습관을 갖는 거야 권장할 만 한 일이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이다. 우리가 손을 아무리 자주 씻어도 여전히 온갖 균이 남아 있으며, 아무리 음식을 끓여먹어도 우리 위와 창자에는 박테리아가 득실거린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그런 균들과 더불어서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 결벽증에서 훨씬 본질적인 문제는 당사자가 대상을 왜곡함으로써 피해망상에 빠진다는 것이다. 자기 이외의 모든 세계를 불결하게 생각함으로써 접촉하기를 꺼려한다면 결국 그것은 대상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자기 자식에게 눈물을 보이며 5분마다 “손 씻어라.”고 닦달하는 어머니처럼, 거의 모든 설교가 죄와 심판과 참회를 목표로 진행된다면 그건 심각한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았어도 동물처럼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목양 불꽃에 빠져라, 157쪽. 이하 ‘목양’) 김 목사의 주장에서 나는 이런 결벽증의 닦달을 느꼈다. 그는 도대체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 같은 목사이면서도 나는 그의 말이 낯설다. 그는 지금 신자들의 부도덕성이나 파렴치한 행위를 지적하는 걸까? 아니면 새벽기도회 드리지 않는 걸 말하나? 아니면 흐느낌 없이 예배드리는 죄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가 말하는 동물처럼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내가 보기에 그는 일종의 영적인 결벽증에 빠져있는 청교도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악하게 보고, 모든 세상 사람의 삶을 동물과 같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의 입에서 이런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쉽게 사는 것은 쉽습니다. 짐승처럼 사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 없지만 성도답게 사는 일에는 고난과 싸움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녀답게’ 사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절제와 죄를 죽이는 싸움을 요구합니다.(‘맺힌 것’ 122).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포기하거나 짐승처럼 살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에 관해서 배우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신앙생활의 목표가 하찮게 취급되고 있습니다.(‘목양’ 151).

독자들께서는 ‘짐승처럼’이라는 김 목사의 진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아시겠는가? 나는 모르겠다. 어쩌면 김 목사는 거꾸로 “나는 오히려 당신의 생각을 모르겠다.”고 말씀하실 것 같다. 옳다. 두 사람 중의 하나는 분명히 무언가 근본에 관해서 모르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판단은 독자의 몫이고,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몫이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도 ‘설교비평’이랍시고 뭔가를 투덜대고 있으니 짐승 운운하는 그의 예언자적 독설에 대해 뭐라 할 말은 별로 없다. 그러나 김 목사와 필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만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짐승이다

김 목사는 짐승 같은 삶에 진저리를 치지만(‘목양’ 152, ‘맺힌 것’ 136,168) 나는 그게 바로 인간 삶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그는 짐승으로서의 삶을 부정하고 나는 긍정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짐승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자연적 조건들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 요소들에는 우선 먹고 마시는 것, 성행위를 통해서 후손을 번식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먹으면 반드시 ‘똥’을 누게 되어있으며, 후손을 번식하려면 ‘에로티시즘’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우리가 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모습까지 포함된다. 노파심으로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두자. “그렇다면 거짓말과 미움과 폭력도 괜찮다는 말인가?”하고 묻지는 마시라. 그런 문제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교양의 지평이지 복음이나 존재의 지평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다.

시인 황지우는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의 표제로 삼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82).

김 목사는 이런 주점에 앉아서 술잔의 수위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짐승 같다고 볼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모습까지 포함한 모든 인간의 삶을 귀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렇게 자기 존재(Sein)의 심층을 뚫어보려는 시인들의 삶이 나에게는 바로 현실로 다가온다. 이 말은 이런 게 곧 구원론적인 사건이라는 뜻이다.

다른 목사들의 신앙과 세계관에도 여전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지만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순수주의에 함몰됨으로써 오히려 현실로서의 인간을 잃어버릴 염려가 많다. 인간에게 있는 짐승으로서의 삶이 부정되면 보기에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서양에는 남녀의 성행위에서도 ‘청교도 자세’가 있다고 한다. 성마저도 그런 엄숙주의가, 그런 순결주의가 지배하는 삶이 건강한 것일까?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런 순수주의를 ‘키취’로 설명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의 미학적 이상은 똥이 부인되는 세계, 모두가 거기에서는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계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취(저속)라고 일컫는다.(송동준 옮김, 305쪽).

자신들의 신앙적 절대명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불결하거나 불쾌한 것들은 아예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런 키취가 기독교 신앙 안에도 적지 않다. 이미 앙드레 지이드는 <좁은 문>에서 인간에게 있는 에로스와 섹셜리티를 죄라고 부정함으로써 결국 한 여자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가 극단적 순수주의의 의해서 실패한 것처럼, 내가 보기에 도덕적 허무주의가 우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 수도 있고, 개인의 인격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청교도의 도덕적 순수주의도 역시 이에 못지않은 위험성이 있다. 더구나 아무리 좋게 보아도 2,3세기 전에 영미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던 신앙적 정서에 불과한 청교도들의 영적 결벽증을 나사렛 예수의 복음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 세상을 기독교 신앙과 적대적인 것처럼 가르치는,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의 악과 투쟁해야 할 것처럼 가르치는 성서 텍스트에 관해서는 여기서 논의하지 말자. 이를 위해서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김 목사가 이 글을 읽고 정식으로 담론의 장 안으로 들어오신다면 그때 논의하자. 대신 나는 영적 결벽증과 도덕적 순수주의에 묶여 있는 청교도 신앙이 과연 도덕적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겠다. 이런 부분은 미국의 청교도적 신앙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한국 교회 설교자 모두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기독교 패권주의

이 세상을 전쟁터로 여기고, 전투적인 태도로 살았던 청교도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으려고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요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미국에서 활동한 수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인디언들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운명에 어떻게 동참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김 목사의 설교집과 저서를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이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잘못 보았다는 질정을 바란다.

모르긴 해도 청교도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리차드 박스터(청교도 사상, 388)나 김 목사(‘기상도’ 136)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설교에만 관심이 있었지 인간 삶에 개입하고 있는 역사적 부조리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서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선서를 하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디언들과 흑인들에게 사죄를 구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아무리 양심적이고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잘못되었거나 역사를 바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에 결과적으로 매우 몰염치하고, 파렴치하고, 더 나가서 패권적인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김 목사가 이런 청교도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탓인지 나는 그에게서 일종의 ‘기독교 패권주의’를 읽을 수 있었다.

일례로 그는 조국분단과 통일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다. 그는 남쪽과 북쪽의 이데올로기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중도적인 입장에서 적적하게 설명했다. 그는 ‘레드컴플렉스’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설교자의 위치를 교회 내부로만 한정시키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지 교회 안에서, 교회만을 위하여 설교하도록 부름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불꽃’ 163). 그러나 나는 통일문제에 관해 그가 무얼 말하고 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는 분단의 벽을 허물고 마음 깊이 하나 되게 하는 일은 정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면서 “그 나라가 처한 문제나 그 민족이 놓인 정황이 어떠하든지, 그들이 고통하는 실정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불꽃’ 168)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꿈에도 그리는 조국은 그리스도 없이 단지 물질적인 부요를 누리며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남과 북의 동포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되어 아오지로부터 마라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한 나라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가 열방 가운데 등불로 나타나고 열국 가운데 횃불로 타올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의 장엄한 행진을 역사 속에 보여주어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일에 시기 나게 하기 위함입니다.(‘불꽃’ 168).

김 목사의 이런 언급은 원칙적으로 옳기도 하고, 수사적으로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것처럼 들린다. 그는 교회가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매진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보다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복음으로 하나가 되지 않는 한 통일은 무의미하다는 말로 들린다. 백 개 이상의 교파로 분열되어 있는 한국교회가 남북통일 문제 앞에서 복음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만한 일이다.

김 목사는 조국의 통일에 진정한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 통일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데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통일 후의 무정부 상태와 같은 북한의 정신적 공황이 선교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기상도’ 209)는 그의 진술에는 기독교 패권주의가 엿보인다. 김 목사의 인격 자체는 결코 이런 패권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건 분명하지만, 청교도 신앙이 그를 그렇게 의식하도록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인디언들과 흑인 노예들에게 예수를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북아메리카 청교도들의 논리와 정치적인 통일보다는 남북 모든 주민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김 목사의 논리가 맞아 떨어진다. 청교도들의 입장은 어느 정도 이해할만 하다. 그들은 우선 영국 국교회에 맞서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런 극단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김 목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은 아무도 종교적인 박해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3,4세기 전의 영국과는 전혀 다른 종교 다원적 사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청교도 신앙을 문자의 차원에서 그대로 우리에게 주입시키려고 한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그 열정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한다.

성서해석의 오류

그의 설교가 내게는 그저 복음의 깊이에 이르지 못한, 그러나 나름으로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청교도의 도덕주의적 잔소리처럼 들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내가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가 늘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기상도’ 130) 내가 보기는 철저하게 센티멘털리즘에 기울어졌다는 사실도 더 따지고 싶긴 하지만 그저 서로 ‘다름’의 문제로 남겨두겠다. ‘거룩한 목회자와 어린아이 같은 교인들’이 아름다운 목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도 내가 이해할 수 없기는 매 한가지이다. 나는 신자들을 성숙한 사람들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리와 생명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목양’ 154),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한다고 열을 올리지만(‘목양’ 189) 그의 주장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사실도 역시 여기서 더 이상 문제 삼고 싶지 않다. 신기하게도 한국교회 신자들은 기복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호한 설교에만 은혜를 받는다.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본인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는 최근의 저서 <게으름>이 나에게는 그저 “새벽종이 울렸네!”의 노랫말로 대표되는 새마을운동 독려서처럼 보인다.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마디 더 한다면, 단지 청소년들의 감수성에나 약발이 먹힐만한 내용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바람에 나는 찡그리지 않고는 두세 쪽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독자들에게 내 표현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처럼 읽혔다면 용서를 바란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김 목사가 심취해 있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 빚어내는 결과들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잘못이라기보다는 내 생각과 ‘다르다’는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성서 해석과 그 적용의 오류만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다름’이 아니라 ‘틀림’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예배의 중심을 설교에 두고 있으며, 설교는 방법론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의 신앙 인격이라고(‘불꽃’ 137) 생각하고, 말씀의 막장에 들어가서 진리의 석탄을 캐는 일에 전념하고 싶다고 호소할 정도로 말씀 해석자로서의 진정성을 확보한 사람이기 때문에(6월26일), 그리고 늘 자신의 가르침에 자신만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오류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몇 가지 내용을 짤막하게 따라가 보자.

야곱이 죽은 다음에 요셉의 형들은 야곱의 유언을 빙자해서 요셉에게 용서를 빈 적이 있다. 그런데 김 목사는 이들이 요셉에게 전한 야곱의 유언을 모두 거짓이라고 단정한다. “아버지 야곱은 죽기 전에 그런 유언을 하지 않았습니다.”(‘맺힌 것’ 194). 물론 성서 텍스트가 그 사실 여부를 확정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곱이 그런 유언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는 것은 성서 텍스트의 깊이를 놓치는 어리석음이다. 김 목사의 주장과 반대로 폰 라트는 그런 단정을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김 목사는 엘리가 하나님의 의무를 이탈한 실패한 제사장으로 최후를 마쳤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의 목자로서의 그의 섬김은 단지 돈을 버는 세속적인 직업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종교적인 삯꾼으로 전락한 것입니다.”(‘목양’ 33). 그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을 혼동한 게 아닐까? 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신 교수 출신 설교자의 이런 주장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요한일서 4장3절은 분명히 초기 기독교 당시의 이단이었던 그노시스트를 향한 경고인데도 불구하고 김 목사는 그것을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영적인 운명”에 대한 것이라고 곡해하고 있다.(‘기상도’ 176).

아마 어떤 분들은 내가 김 목사의 작은 실수까지 헐뜯는 악동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그의 우연한 실수를 문제 삼는 게 결코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걱정되어 통곡할 정도의 영적인 열정이 있으며, 목회의 중심을 설교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오류를 문제 삼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 이외에도 크고 작은 문제들은 많다.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와 병행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놓고 예수가 단번에 설교한 것처럼 주장한다거나(‘불꽃’ 128, 142, 213), 중세기에 제시되었던 소위 ‘배상만족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맺힌 것’ 56,114), 예수의 용서가 쉬운 일이었다는 주장(‘맺힌 것’ 65), 예수탄생 설화와 연결된 유아살해 명령을 ‘피비린내 나는 영적인 싸움’이라고 확대해석하는 것(‘기상도’ 175)도 논란거리이다. 이런 문제들을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으니까 접어두고, 청교도적 신앙의 특징을 가장 그림처럼 보여주는 한 가지 오류를 짚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자.

피리 부는 장터아이

김 목사는 예수께서 주신 유명한 비유 ‘장터 아이들’(마 11:16-19, 눅 7:31-35)을 이렇게 전달하고 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탄하시던 세대와 같은 시대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쳐도 애곡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인들의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불꽃’ 335, 336 참조).

김 목사는 이 비유를 정당하게 인용한 것일까?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 비유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들어보면 아주 명백하다. “너희는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하고 말한다.”(공동번역, 눅 7:33,34). 이 설명에 의하면 피리를 불고 가슴을 치는 아이들은 금욕적으로 살았던 세례요한과 평범하게 살았던 예수가 자기들의 요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투정부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킨다. 이런 건 그렇게 심오한 신학적 사유를 거치지 않고 그저 문맥만 따라가면 충분히 포착될 수 있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김 목사는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예수의 해명을 제외한 채 이 비유 자체만 놓고 본다면 김 목사의 설명처럼 피리 부는 아이들이 곧 하나님의 일꾼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개연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비유에 근거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 거룩한 하나님이 모임 가운데 임하여 그 임재를 체험하도록 해주기를 사모하는 갈급함이 없는데 무슨 신앙의 감격이 있겠습니까?”(‘불꽃’ 335)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바리새인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받아들였다는 본문의 결론(35절)과도 한참 거리가 있는 해석으로서, 전형적인 견강부회이다.

어쩌면 김 목사는 무의식중에 그 비유를 정확하게 인용한 것인지 모른다. 그는 장터에 앉아 피리 부는 아이들처럼, 예수를 향해서 “왜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가?”하고 못마땅해 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을 향해서 “왜 당신들은 ‘게으름’을 피우는가?” 책망하고 있다. 만약에 예수가 2천년 살아가시던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면 김 목사는 예수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인간아, 왜 그렇게 사냐?”고 계속 울먹이며 채근할 것 같다.

이 대목에서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게 무엇인가, 하고 묻지는 마시라. 그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처럼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한 김 목사의 설교에 은혜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열린교회가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킬 필요도 없다. 그것은 종교사회학자가 간단하게 해명할 수 있는 현상이다. 나는 다만 김 목사의 설교를 이렇게 진단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에 의해 포위되었다.”

열린교회 담임 김남준 목사

“아직도 설교는 이국의 언어, 목회는 원치 않는 가슴앓이”

▲ 교회에 있는 게 가장 행복한 김남준 목사(사진 손우진 집사)

혼신을 다해 글을 썼지만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책이 있다. 쉽게 득달같이 썼는데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책도 있다. 김남준 목사(58, 열린교회 담임)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그의 책 [죄와 은혜의 지배]와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게으름]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죄와 은혜의 지배]는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다. 하지만 시장은 이 책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많이 팔리지 않았다. 반면 [게으름]은 수십만부가 팔린 기독교계의 베스트셀러다. 한호흡에 내려쓴 쉬운 책이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기자도 이 책을 가슴을 찢으며 읽었다. 게으름과 나태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그분의 사랑과 질투의 마음을 그대로 보는 듯해 오랜 악습을 내려놓기도 했다. 반면 [죄와 은혜의 지배]는 읽다가 말았다. 김 목사가 알면 기분 나빠하겠지만 책이-그는 이 책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쓴 책이라 한다- 지루하고 따분하고 어려웠다.

김남준 목사의 인터뷰 기사, 기자는 [게으름]같은 인터뷰를 하고 그런 기사를 쓰고 싶었다. 평소 무게 있고 진중하고 진지한 김 목사의 이미지 때문에 더욱 그랬다. 기사만큼은 가볍고 쉽고 흥미로워서 대중이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써보고 싶다. 그러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인터뷰 기사. 과연 그런 글이 나올 수 있을까.

청교도 신학에서 이지스함까지

김 목사는 사춘기 시절 적잖은 방황을 했다. 김 목사의 방황은 ‘탈선’과는 약간 달랐다. 중학교 2학년까지 교회를 다녔다. 하지만 교인들의 언행 불일치와 표리부동함을 목도했다. 교회를 떠났다. 21살, 회심하기 전까지 6년 동안 지적 방황을 했다. 방황의 주제는 ‘내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였다. 교회의 도덕적 타락을 보면서 인생의 주제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교회에 발길을 끊고 중학교 때는 문학책을 섭렵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상·철학 서적을 통해 인생의 답을 찾고자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에 심취했다. 그의 책이면 무엇이든지 읽고 밑줄을 그었다. 인간의 악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사상과 신념에 반했다. 그러나 ‘초인’론을 주장하던 사람의 초라한 말로를 보면서 그는 니체를 떠났다. 염세철학의 쇼펜하우어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염증만으로는 고통과 악에서 세상을 구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쇼펜하우어도 떠났다. 그후 버트란트 럿셀에 매료되기도 했다. 철저히 무신론자가 됐지만 21살 때 주님을 깊이 만나면서 회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는 각종 철학과 사상들을 등졌을까? 목회자가 된 지금도 김 목사는 동서고금의 철학과 사상들에 대한 안테나를 제거하지 않았다. 또다른 차원에서 ‘흡입’ 중이다. 김 목사의 사무실이 위치한 경기도 평촌의 열린빌딩 6층은 담임목사실과 장서 5만여 권이 있는 도서관이 연결돼 있다. 그의 담임목사실까지 서재의 나무 향, 책 냄새가 흘러 들어올 정도다. 그의 사무실에는 독특한 책들이 여러 권 있다. 타종교의 경전은 물론 그것을 설명하는 각종 책자도 눈에 띈다. ‘리그 베다’, ‘이슬람’, ‘노자’, ‘장자’ 등이다.

▲ 5만권의 장서가 있는 도서관(사진 손우진 집사)

그는 지금도 공부란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 휴식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책을 좋아한다. 기자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김 목사는 비서를 불러 되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지?” 곧바로 “책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요즘 관심을 갖고 읽는 책은 ‘미식의 역사’다. 과학, 양자역학, 자연과학, 역사, 미술에 대한 책들도 섭렵한다. 그래서 그가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의 폭이 무척이나 넓다. 김 목사는 원자력 발전소 연구소장부터 비행기 조종사까지, 어떤 분야의 학자·철학자들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어거스틴을 10년 연구하고 조나단 에드워드를 20년 연구한 청교도신학의 전문가라고만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그의 지식 습득의 스펙트럼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언젠가 기자가 평촌의 열린빌딩을 지나칠 때였다. 우연히 김 목사가 신문을 탐독하면서 걷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청소년 시절의 지적 방황은 지금도 그를 ‘세상읽기’를 그치지 않는 목회자로 만든 것 같다. 매일 반드시 뉴스를 시청한다. 신문은 보수/중도적인 성향을 섞어서 4가지를 본다. 양쪽의 얘기를 같이 듣고 전체적으로 보려고 애쓰고 싶어서다. 경제·사회·문화 분야와 함께 이코노믹잡지도 구독하고 국방무기와 전쟁에도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이지스함에 대한 책을 뗐다고 말한다.

학문은 신학이 최고다. 그러나 결국 신학이 최고인 것은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서 증명될 때 진가가 드러난다는 생각 때문이다. 청교도 신학의 전문가로서 이런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갖는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세상과의 소통을 중단해선 안 된다는 게 김 목사의 지론이다. 김 목사는 교회안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로는 세상과 소통하기 어려워서다.

그래서 김 목사는 신학 고전과 인문학은 물론 현대인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철학사와 문학사, 역사를 통해 공부해간다. 세상 읽기를 위해 신문과 뉴스도 많은 관심을 갖고 보고 듣는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 속에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서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랑에는 이해가 동반돼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으면 설교는 공격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진리는 비타협적이지만 세상을 알 필요가 없다고 외면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세상과의 소통.’ 그가 지금도 치열하게 공부하는 이유다. 그러면서 김 목사가 책을 한 권 꺼내왔다. 1260페이지에 이르는 ‘한스큉’의 [이슬람]이었다.

피상적 설교는 형식적인 교회를 만든다

▲ 열린교회 장년부 수련회 집회 모습(사진 열린교회 커뮤니티)

열린교회는 설립 20주년이 돼 간다. 성도들은 4천여 명이 넘는다. 그의 설교는 짧지 않다.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는 “특별하게 설교의 은사를 받지 않는 이상 30분을 넘는 설교는 현대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목사의 주장에 비춰보면 확실히 김 목사는 설교에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 평균 40분, 때로 1시간 가까이 설교할 때도 있다.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는 일이 예사스러울 정도의 그의 설교에는 감동과 힘이 있다.

설교를 지금까지 35년을 해왔고 교회 개척한 지는 20년이 됐다. 그렇다면 그에게 설교는 익숙할까?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김 목사는 “아직도 설교는 내게 이국의 언어, 목회는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라고 답했다. 교회를 개척한 지 20년 동안 ‘목회는 딱, 내 일이다!’는 마음이 생긴 적이 없다. 지금까지 5천 번을 넘게 설교했다. 일년 365일 매일 설교했다고 가정할 경우 13년을 하루도 빼놓지 않은 셈이다. 지금도 1년이면 250번을 설교한다. 그런데도 개척 초기보다 요즘 설교 준비하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 더 진액이 빠진다. 어떤 영역이든 10년이면 전문가가 된다고 했는데 설교는 죽을 때까지 늘 부족감에 시달릴 거 같다는 게 김 목사의 자기 고백이다. ‘특별한 설교의 은사자’라는 평가는 외부의 시각일 뿐이다.

김 목사가 목회에 대해 말한다.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 노력해서 열리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저 나무는 건강하면 된다는 것이다. 목회도 신앙에서 비롯된다. 기본적으로 목회도 하나님과 목회자의 관계다. 그는 신학생들에게 주님을 만난 흔적을 간직하라고 말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의 거룩함과 영광됨을 경험한 것을 보여 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붙들려야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것들이 목회자뿐 아니라 신학생들에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학문도 얕고 경험도 못하고 있다면 설교는 얕아지고 영적·지적으로 매우 피상적인 설교가 잉태된다. 그런 설교는 피상적 교인을 양산하고 형식적인 교회를 만들어 간다. 결과는 어떨까?

▲ 기도하는 청년(사진 열린교회 커뮤니티)

형식적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거룩한 에너지를 주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게 김 목사의 지적이다. 그러면서도 김 목사는 특정교회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교회가 겪는 아픔과 고통을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가십 소재가 되게 하지 말자는 게 김 목사의 생각이다. 뭔가 고치고 개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회의 문제를 사랑이 없이 비난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플라톤과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비판하기 전에 비판하는 대상을 사랑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사랑은 정의의 완성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모든 비판과 충고·정의 실현에 사랑이 전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 목사에게 어느 날 우편물이 배달돼 왔다. 어떤 단체의 문제를 바로 개혁하겠다는 사람들의 인쇄물이었다. 펼쳐 보니 몰래카메라로 특정 대상을 촬영하며 문제를 지적해 놓았다. 입맛이 씁쓸했다. 비판자의 마음에 과연 비판 대상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인쇄물에는 분노와 억울함과 상처가 있었고 원한 맺힌 비판이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몸을 이루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의·사랑이 함께 가는 개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조국교회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한국교회라는 말을 쓰다 보니 왠지 주님의 몸인 교회를 객관화·객체화 시킨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부터 그의 모든 저작물에는 ‘조국교회’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김 목사는 교회 문제를 언급할 때 자신을 제거하지 않은 연합의 의미로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목사는 성도들이 하나님에게서 즐거움과 만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으면 영혼에 변질이 온다는 것이다.

김 목사가 교제하는 절친한 동기들이 있다. 김윤기 목사(남부중앙교회), 박순용 목사(하늘영광교회), 백금산(예수가족교회), 화종부 목사(남서울교회) 등이다. 같은 동기지만 나이는 김 목사가 제일 많다. 아직 그는 안식년을 갖지 않았다. 2주 연속으로 강단을 비운 적이 아직 없다. 그러나 조금 쉬어야 겠다는 생각을 종종하고 있다. 얼마 전 목을 수술했다. 의사가 설교를 쉬어야 한다고 했다. 무시하고 설교를 했다.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6월 이후에는 조금 쉬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과연 그가 잠시라도 사역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 스스로 회의적일 정도로 김 목사는 교회에서 책을 보고 말씀을 보고 공부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게 무척이나 행복하다.

▲ 피상적 설교는 형식적 교인을 만든다는 김남준 목사(사진 손우진 집사)

그러나 조금 더 긴 안목에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중 한사람인 김 목사가 안식년을 갖는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그는 휴식을 통해 분명히 재충전을 꾀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사역을 승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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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는 남녘 남(南), 빼어날 준(俊) 자를 쓴다. 할아버지께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현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 신학과를 야학으로 마쳤다. 총신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석사학위를 받았고 신학 박사 과정에서 공부했다. 1993년 경기도 평촌에 열린교회를 개척, 20년째 목회를 했다. 시류와의 영합을 거절하는 청교도적 설교로 널리 알려진 저자는 조국교회에 바르고 깊이 있는 신학적 목회가 뿌리 내리기를 갈망하며 연구와 설교, 집필에 힘쓰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10년, 조나단 에드워드를 20년 연구했다. 주요 저서로는 1997년 기독교출판문화상을 수상한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규장), 2003년도 기독교출판 문화상을 수상한 [거룩한 삶의 실천을 위한 마음지킴], [죄와 은혜의 지배], [개념없음] 등 다수가 있다. 이명희 사모와의 사이에 일남일녀(김영래 전도사/총신신대원 2년, 김이슬/서울여대)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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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산업혁명 시대, 대안사역 찾아야”

▲ 열린교회가 8일 개최한 웨스트민스터콘퍼런스에서 김남준 목사가 발제를 하고 있다.

열린교회(김남준 목사)는 10월 8일 본당에서 ‘4차산업혁명과 개혁주의 신학’을 주제로 제3회 웨스트민스터콘퍼런스 인 코리아를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에는 피터 릴백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을 비롯, 야닉 앵베르, 스티븐 통, 손화철 박사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강연했다 이들은 4차산업혁명 속에 숨어 있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교회가 사회변화를 잘 읽고 대안적 사역을 펼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 피터 릭백 총장이 강의하고 있다.

릴백 박사는 “4차 산업에는 양면성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문화명령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을 준다는 것과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르려는 교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릴백 박사는 “특히 4차산업혁명은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가 대체하게 함으로 편안함과 쉼을 주려고 한다”면서 “그러나 성경에서 노동은 죄악이 아니며 삶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활동이며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향후 교회의 역할은 정서적 물질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고, 기독교적 교육모델을 만들어서 새로운 시대에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앙베르 박사도 “4차산업혁명을 신뢰하는 이들 가운데는 장차 인간이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면서 “기술발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하는 것은 비슷한 류의 문화 철학 기술적 운동과 마찬가지로 유물론적 운동”이라고 지적했다. 앙베르 박사는 “인간을 뛰어넘는 인간의 추구는 성경적 세계관과 반대에 위치해 있는 것”이라면서 “이런 세계관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관여하려면 우리에게는 타협하지 않는 답변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화철 한동대 교수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해 기독교는 갑자기가 아니라 맥락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기독교회는 평소 꾸준히 ‘왜’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며 사회 문제에 대한 침묵을 반성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에 대해 관심과 통찰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신학을 위한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한 김남준 목사는 “목회자는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고 보편적인 인간성과 소통하기 위해서 인문학을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인문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미학과 예술, 의학과 법학을 비롯한 기타 사회과학 영역까지 공부함으로 신학공부와 설교에 더 큰 도움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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