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 의 난 | 역사저널 그날 – 김헌창의 난, 무엇이 다른가?.20160110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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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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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 나무위키:대문

신라 헌덕왕 14년(822), 웅천주 도독으로 재임 중이던 신라 진골 귀족 김헌창이 일으킨 난. 신라 조정에 단지 반기만 든 게 아니라 국호를 장안국, 연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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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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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金憲昌 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금의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반란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熊津城)이 함락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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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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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헌창(金憲昌, ? ~ 822년 음력 3월)은 신라의 왕족이자 장안국의 창건자로 태종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의 아들이다. 관등은 이찬에 이르렀으며 헌덕왕 시절에도 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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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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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 네이버 블로그

이 난은 작게는 원성왕계 귀족들과 무열왕계 귀족들 간의 제2차 왕위 계승전이었고, 크게는 신라 하대에 계속된 크고 작은 왕위 계승전들 가운데 하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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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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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과 신라군의 대응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 귀족들 간의 왕위쟁탈전은 지속되었고,이 과정에서주로 사병들이 동원되었다.치열한 왕위쟁탈전으로 왕권이 약화되는 한편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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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5/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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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822) – :: 티칭백과 ::

김헌창의 난으로 무열왕계 귀족들은 크게 몰락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많은 귀족이 죽임을 당했고, 사형을 면했더라도 골품제에서 신분이 강등되거나 토지 등의 경제적 기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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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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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에 대해 알아봅시다

김헌창의 난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헌창의 난은 822년 통일신라 헌덕왕 14에 옛 백제지역에서 일어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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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sense.tistory.com

Date Published: 11/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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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귀족 김헌창의 좌절: 온실속 화초는 잡초에 진다 | 경영일반

이 난의 원인과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혜공왕은 왕궁을 포위한 반군을 진압하고 왕좌를 지켰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신라 왕족의 단합과 내란의 상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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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br.donga.com

Date Published: 6/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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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김헌창 의 난

  • Author: KBS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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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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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金憲昌─亂)

이러한 김헌창의 반란은 자연히 무열왕계인 김주원 일파와 다른 방계(傍系) 김씨 왕족인 김경신 일파 사이의 제1차 대결이 있은 지 37년 뒤에 제2차 대결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난은 그 같은 양 세력의 충돌이었던 만큼, 전국을 휩쓰는 일대의 내란으로 전개되었다.

주 05)·완산주(完山州)주 07)·청주·주 08)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주 09)·서원경(西原京)주 10)·금관경(金官京)주 11)의 사신[仕臣: 소경(小京)의 장관]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이 삽시간에 장악된 것은 이들 지역에 반란 세력과 내통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武珍州) ·청주· 사벌주(沙伐州)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國原京) 의 사신[仕臣: 소경(小京)의 장관]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이 삽시간에 장악된 것은 이들 지역에 반란 세력과 내통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주에서는 도독 향영(向榮)이 추화군(推火郡)으로 비상 탈출을 했는데, 이 같이 반란 세력에 동조하지 않은 부류들은 피신하거나 탈출해 중앙 정부에 반란이 발생했음을 고하였다.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은 신라 9개 주 가운데 4개 주에 이르렀는데, 이는 충청도의 거의 전 지역과 경상도의 서부와 남부 및 전라도의 전주와 광주까지 포괄하는 범위로 수도인 서라벌을 포위하고 있었다.

주 12)추화군(推火郡)주 13)의 경우는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반란 세력에 휩쓸리지 않은 공으로 7년간 조세를 면제받았을 정도였다. 초기 반란 세력의 기세는 인근 일대까지도 압도했는데, 삽량주(歃良州) 추화군(推火郡) 굴자현(屈自縣) 의 경우는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반란 세력에 휩쓸리지 않은 공으로 7년간 조세를 면제받았을 정도였다.

이처럼 김헌창의 난은 반란의 중심 거점이 웅천주라는 지방이었지만, 반란에 동조하는 세력과 중앙 왕실에 동조하는 양대 세력으로 신라 전체가 양분되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대규모의 내란이 되었다.

중앙 정부는 난이 일어나자 우선 원장(員將) 8명을 보내 왕도(王都)의 8방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 다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계속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길찬(一吉飡)장웅(張雄)이 선발대로 가고 잡찬(迊湌)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제릉(悌凌)이 뒤따라갔으며, 이찬(伊飡)균정(均貞), 잡찬웅원(雄元), 대아찬(大阿飡)우징(祐徵) 등이 주력 부대인 3군을 맡아 정벌하러 갔다.

그리고 각간(角干)충공(忠恭)과 잡찬윤응(允應)은 문화관문(文火關門)을 지키게 하였다. 이 밖에도 2명의 화랑이 낭도들을 이끌고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원성왕 직계 후손들의 결속으로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토벌군이 출동하자 김헌창은 전략상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삼년산성 」(三年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 방면의 반란군이 도동현(道冬峴)에서 장웅의 부대에게 격파되었고, 이어 장웅의 부대와 합류한 위공·제릉의 연합군에게 삼년산성마저 함락당하자 결국 속리산에 배치된 병력까지도 섬멸당했다.

주 14)의 반란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게 패하였고, 웅진에 진을 친 반란군도 공격을 받아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난이 진압되자 반란 세력에 대한 무장 해제와 대규모의 처형이 일어났다. 그리고 왕경(王京)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성산(星山) 의 반란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게 패하였고, 웅진에 진을 친 반란군도 공격을 받아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난이 진압되자 반란 세력에 대한 무장 해제와 대규모의 처형이 일어났다.

김헌창은 참시(斬屍)되고, 이에 동조한 종족(宗族)과 도당 239명이 사형 당했다. 그러나 반란 세력에 의해 병졸로 동원된 사민(私民)이나 일반 양민은 방면·해산되었다. 또한 당시 사형을 당한 김헌창의 종족은 반란에 직접 가담한 친척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김헌창 형제의 자손과 근친은 대부분 살아남아 중앙정계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라 김헌창

新羅 金憲昌 지위 장안국의 초대 국왕 재위 822년 3월 전임 초임 후임 김범문 부왕 김주원(金周元) 이름 휘 김헌창(金憲昌) 연호 경운(慶雲) 신상정보 출생일 생년 미상(生年 未詳) 출생지 ? 사망일 822년 3월 사망지 웅진(熊津) 왕조 강릉 김씨(江陵 金氏) 부친 김주원(金周元) 모친 ? 배우자 ? 자녀 김범문(金梵文) 김분(金水+分)

김헌창(金憲昌, ? ~ 822년 음력 3월)은 신라의 왕족이자 장안국의 창건자로 태종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의 아들이다. 관등은 이찬에 이르렀으며 헌덕왕 시절에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웅천주도독일 때 과거에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일을 명분 삼아 822년 음력 3월 반란을 일으키고 국원경 등을 장악, 장안국을 건국했다가 신라군에 진압되어 자살하였다.

생애 [ 편집 ]

관직 생활 [ 편집 ]

807년 정월(애장왕 8년, 이하 모두 음력)에 관등은 이찬으로서 시중이 됐다가[1] 810년(헌덕왕 2년) 전에 물러났다. 813년 정월 무진주 도독에 임명됐고 814년 8월 중앙으로 들어와 다시 시중에 올랐다가 816년 정월에 청주(菁州) 도독으로 물러났고 821년 4월에는 웅천주 도독으로 전임됐다.

반란 그리고 자살 [ 편집 ]

822년 3월 과거에 아버지인 김주원이 원성왕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했음을 이유로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했으며 4주(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3소경(국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여러 군현을 복속시켰다. 청주도독 향영(向榮)은 추화군으로 도망갔고 한산주, 우두주, 삽량주, 패강진, 북원경 등은 김헌창에게 가담하지 않고 성을 지켰다.

3월 18일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 주조(州助)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수도 금성에 반란을 보고하자, 헌덕왕은 최웅과 영충에게 관직을 하사한 후 장웅(張雄)을 선발대로, 위공(衛恭)·제릉(悌凌)은 그 뒤를 잇게 하고, 김균정·김웅원(金雄元)·김우징 등이 삼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김충공과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종군을 청하기에 명기는 낭도들과 황산(黃山)으로,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가게 했다. 이에 김헌창은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한 후 삼년산성과 속리산에서, 김균정은 성산(星山)에서 김헌창의 군대를 격파한 뒤 모두 웅진성으로 진격하였다. 사세는 기울어 포위 공격 열흘 만에 김헌창은 자살하고 부하들이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 성이 함락되어 김헌창의 시체는 또 베어지고, 일가와 수뇌급 239명은 주륙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녹진에게 대아찬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에 속한 굴자군은 지리적으로 장안국과 가까웠으나 가담하지 않아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 825년 정월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주에서 재차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사하였다.

계보 [ 편집 ]

아버지 : 명주군왕 김주원

어머니 : 정숙왕후박씨(貞淑王后朴氏) 형 : 김종기 형수 : 원화부인박씨(元和夫人朴氏) 동생 : 김신 아들 : 김범문(金梵文) – 825년 고달산 산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남평양(南平壤)에 정하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했지만, 북한산주도독 총명(聰明)에게 진압되어 죽었다. 아들 : 김분(金水+分)

각주 [ 편집 ]

↑ 《삼국사기》10권 신라본기 제10 애장왕 8년

참고 문헌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통일신라 절반 휩쓴 김헌창의 ‘長安國’ 조선일보 2010년 4월 3일

김헌창의 난

김헌창의 난(金憲昌―亂)

822년(신라 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이 일으킨 반란. 신라 멸엽의 정치적인 혼란기를 당하여 왕위 쟁탈을 중심으로 음모ㆍ반역ㆍ골육상쟁의 난이 그치지 않았다. 김헌창의 난도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당시 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으로 있던 김헌창은 자기의 부친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이 원한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憬雲)이라 하며, 무진주(武珍州: 光州)ㆍ완산주(完山州: 全州)ㆍ청주(淸州: 晋州)ㆍ사벌주(沙伐州: 尙州)의 4도독을 위협하니, 국원(國原: 忠州)ㆍ서원(西原: 淸州)ㆍ금관(金官: 金海) 등의 관리들과 모든 군ㆍ현의 수령들이 이에 항복하였는데,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도망하여 퇴화군(堆火郡: 密陽)으로 갔으며, 한산(漢山: 廣州)ㆍ우두(牛頭)ㆍ삽량(歃良)ㆍ패강(浿江)ㆍ북원(北原: 原州) 등에서는 난이 일어난 것을 알고 수비하였다.

완산(完山: 全州) 장사(長史) 최웅(崔雄)은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의 도움으로 서울로 도망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장군 8명으로 서울을 지키게 하고, 장웅(張雄)ㆍ위공(衛恭)ㆍ제릉(悌凌)으로 헌창을 치게 하였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헌창의 군사를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 報恩)을 공격한 다음 속리산(俗離山)에[서 헌창의 군을 격멸하였다. 균정(均貞)은 성산(星山)에서 승리하고 제군(諸軍)이 웅진에 모여 김헌창의 군대를 격멸시키니, 김헌창은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이에 다시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김헌창은 자살했다. 그 후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은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과 난을 일으켰으나, 이것도 실패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公州)의 도독(都督)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반란 세력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지금의 충청ㆍ전라ㆍ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반란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熊津城)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 되어 진압되었다.

이 난은 작게는 원성왕계 귀족들과 무열왕계 귀족들 간의 제2차 왕위 계승전이었고, 크게는 신라 하대에 계속된 크고 작은 왕위 계승전들 가운데 하나였다.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김주원은 785년에 선덕왕이 죽자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귀족들에게 왕위에 추대되었지만, 김경신(金敬信: 元聖王)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 지방으로 물러난 사람이다.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난 뒤에, 계속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김헌창은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807년(애장왕 8)에는 시중이 되어 당시 원성왕의 후손 중 실력자인 상대등 김언승(金彦昇: 憲德王)에 버금가는 실력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 해 1월에 시중 직에서 밀려났다. 그 뒤 계속 헌덕왕파의 견제를 받아 813년(헌덕왕 5)에는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光州)의 도독, 816년에는 청주(菁州: 지금의 晉州)의 도독이 되어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821년에는 웅천주도독으로 전보되었다.

이처럼 헌덕왕 일파의 견제를 받는 가운데 웅천주도독으로 전보된 이듬해에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당시 김헌창이 반란의 명분을 표방한 것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귀족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왕위에 추대된 김주원이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것을 공격하는 것은, 원성왕의 즉위에 대한 합법성 및 당시의 원성왕계 왕실의 합법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거사에 대한 합리화인 동시에 과거 김주원을 지지했던 귀족 세력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명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헌창의 반란은 자연히 무열왕계인 김주원 일파와 다른 방계 김씨 왕족인 김경신 일파 사이의 제1차 대결이 있은 지 37년 뒤에 제2차 대결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난은 그 같은 양 세력의 충돌이었던 만큼, 전국을 휩쓰는 일대의 내란으로 전개되었다.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ㆍ완산주(完山州: 지금의 全州)ㆍ청주ㆍ사벌주(沙伐州: 지금의 尙州)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國原京: 지금의 忠州)ㆍ서원경(西原京: 지금의 淸州)ㆍ금관경(金官京: 지금의 金海)의 사신(仕臣: 小京의 장관) 및 여러 군ㆍ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이 삽시간에 장악된 것은 이들 각 지역에 반란 세력과 내통한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주에서는 도독 향영(向榮)이 추화군(推火郡)으로 비상 탈출을 했는데, 이같이 반란 세력에 동조하지 않은 부류들은 피신하거나 탈출해 중앙 정부에 반란이 발생했음을 고하였다.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은 신라 9개 주 가운데 4개 주에 이르고, 충청도·전라도의 거의 전 지역과 경상도의 서부와 남부에 해당해 수도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처럼 김헌창의 난은 반란의 중심 거점이 웅천주라는 지방에 있었지만, 반란에 동조하는 세력과 중앙 왕실에 동조하는 양대 세력으로 신라 전체가 양분되어 충돌한 대규모의 내란이었다.

중앙 정부는 난이 일어나자 우선 원장(員將) 8명을 보내 왕도(王都)의 8방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 다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계속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이 선발대로 가고 잡찬 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 제릉(悌凌)이 뒤따라갔으며, 이찬(伊飡) 균정(均貞),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大阿飡) 우징(祐徵) 등이 주력 부대인 3군을 맡아 정벌하러 갔다. 그리고 각간(角干)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應)은 문화관문(文火關門)을 지키게 하였다. 이 밖에도 2명의 화랑이 낭도들을 이끌고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원성왕 직계 후손들의 결속으로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토벌군이 출동하자 김헌창은 전략상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삼년산성(三年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報恩 지역) 방면의 반란군이 도동현(道冬峴)에서 장웅의 부대에게 격파되고, 이어 장웅의 부대와 합류한 위공·제릉의 연합군에게 삼년산성을 함락당한 뒤 속리산에 배치된 병력까지 섬멸당하였다.

그리고 왕경(王京)에 가깝게 깊숙이 자리잡았던 성산(星山: 지금의 경상북도 星州)의 반란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게 패하고, 웅진에 진을 친 반란군도 공격을 당해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이로써 난이 진압되자 반란 세력에 대한 무장 해제와 대규모의 처형이 있었다. 반란 세력의 귀족들에 의해 병졸로 동원된 그들 귀족의 사민(私民)들이나 일반 양민들은 방면, 해산되었다. 그리고 김헌창은 참시(斬屍)되고, 이에 동조한 종족(宗族)과 도당 239명이 사형당하였다. 다만, 이 때 사형을 당한 김헌창의 종족이란 반란에 직접 가담한 친척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경우, 김헌창 형제의 자손과 근친도 살아남아 그 뒤 그대로 중앙에서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많은 무열계 귀족들이 크게 몰락하였다. 즉, 반란에 가담해 많은 귀족들이 죽음을 당했고, 그 밖에도 사형은 면제되었지만 골품제에서 신분이 강등되거나 장원(莊園) 등의 경제적 기반을 몰수당한 세력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 난을 분기점으로 무열왕계는 중앙에서 활약을 하더라도 원성왕의 후손들이 주축이 된 각 귀족의 파벌에 가담하는 정도여서, 중앙 정계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서는 밀려났다.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은 이 때 피신해, 3년 뒤인 825년에 고달산(高達山)의 산적 수신(壽神)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로써 무열왕계 후손들은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김헌창의 난과 신라군의 대응

신라하대 김헌창은 반란을 일으켜 신라의 9주 5소경 가운데 4주 3소경을 장악하였다.특히 신라 왕조를 거부하고 새로운 국가를 지향하면서 신라하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그러나 반란은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신라의 진압군에 의해 손쉽게 진압되었다. 신라는 신속히 진압군을 편성하였고,공격부대는 선발대·본대·별동대로 구분하여 운용하였다.신라군의 본대가 성주에서 반란군과 대치하는 사이 선발대가후방의 보은산성을 점령하면서 전세는 신라쪽으로 기울었다.이후 반란군의 최후 거점인 웅진성은 신라군에게 포위되어 10일 만에 함락당했다.반란을 진압한 신라는 김헌창의 추종세력을 제거하고,전후 포상을 실시하였다. 일반적으로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것은 신라 귀족들의 사병(私兵)조직이라고 알려져 있다.그러나 당시 신라군의 편성과 진압과정을 통해서 볼 때 신라의 공적 조직 즉 정규군이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 귀족들 간의 왕위쟁탈전은 지속되었고,이 과정에서주로 사병들이 동원되었다.치열한 왕위쟁탈전으로 왕권이 약화되는 한편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면서 신라의 정규군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결국왕권을 지탱하는 한 축인 정규군이 도태되면서 신라는 후삼국 분열의 시대를맞이하게 된다.

Kim Heon-chang of Silla caused the rebellion and it held the half of Silla. Kim Heon-chang refused the Silla dynasty and it pointed to anew state. The rebellion of Kim Heon-chang had large influence on Silla. However, the rebellion was early suppressed by the army ofSilla. Silla divided the attack army in an advance party, the main party, and another party. While the main party was opposed to the rebel army, the advance party occupied Samnyeon-seong(三年山城). Afterall, the rebel army’s Ungjin-seong(熊津城) was surrounded and it fell in ten days. Silla removed the influence of KimHeon-chang and awarded the prize to people. And the Gulja-gun(屈自郡) received exemption of indirect tax money for seven years. It is known that the Silla army consisted of the aristocrat’s individual soldiers(私兵). However, the regular unit of Silla actually did the large role. The throne scramble became increasingly intense and the king’s authority became weaker. After all, district influence grows and it enters still in the state at the time of the Later Three Kingdoms(後三國).

금성출판사 :: 티칭백과

김헌창의 아버지는 무열왕계의 진골 귀족인 김주원으로, 선덕왕 대에 가장 유력한 차기 왕위 계승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선덕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군신들은 곧 후사를 논의하여 김주원을 세우려 하였다. 그때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의 물이 불어 김주원이 즉시 알천을 건너올 수가 없어, 김주원 대신 상대등 김경신(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에 김주원은 명주 지방으로 물러났다.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난 뒤, 계속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김헌창은 중앙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807년 애장왕 때에는 시중이 되어 당시 원성왕의 후손인 상대등 김언승(헌덕왕)에 버금가는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시중 직에서 밀려났다. 그 뒤 계속 헌덕왕파의 견제를 받아 813년(헌덕왕 5)에는 무진주(전남 광주), 청주(경도 진주)의 도독이 되어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821년에는 웅천주 도독으로 전보되었다.

김헌창은 아버지가 원성왕에게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원성왕의 손자인 헌덕왕 시기에 웅천주(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822). 반란 세력은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면서 한때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중요 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 되어 진압되었다.

김헌창의 난으로 무열왕계 귀족들은 크게 몰락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많은 귀족이 죽임을 당했고, 사형을 면했더라도 골품제에서 신분이 강등되거나 토지 등의 경제적 기반을 몰수당하고,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김헌창의 아들 범문은 당시 토벌군의 진압 과정에서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3년 뒤인 825년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로써 무열왕계 후손들은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김헌창의 난에 대해 알아봅시다

김헌창의 난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헌창의 난은 822년 통일신라 헌덕왕 14에 옛 백제지역에서

일어났는데요. 중고교나 공무원 시험 등에 자주 나오는 사항

이라고 합니다.

이런 김헌창의 난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

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얼굴은 김헌창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고요

밑에 통일신라 지도는 김헌창의 난 때 김헌창이 점령

했던 지역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빨간색 원 안이 김헌창의 난 때 김헌창이 점령한 지역

인데요. 신라 지방체계가 9주 5소경인데 그중 5주 3소경을

점령 했습니다. 통일신라의 반이 김헌창의 난에 합류한

것입니다.

김헌창의 난은 저 중 웅천주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아래는 김헌창의 난 관련 문제를 보겠습니다.

○ 신라 후기의 여러 가지 반란 사건 중 무열왕 직계손인

김주원이 왕위 계승을 이루지 못하고 영주(강릉)로 퇴거

한 후 그 후손들이 일으킨 사건은?

답: 김헌창의 난과 범문의 난입니다.

김범문은 김헌창의 아들인데요. 김헌창의 난 때 살아남아서

3년 후인 825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호응도 별로

없었고 실패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길에 물이 불어난 모습과 원성완관련

사진입니다.

김헌창의 아버지는 김주원인데요 785년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김주원이 왕의 후보 1순위가 됩니다.

김주원은 그 때 궁으로 가는데요.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범람해 궁으로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안 귀족들이 이것은 김주원이 왕 되는 것을

하늘이 반대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김주원은 왕이

되지 못합니다.

그 후 김주원은 정계를 떠나 남은 생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아래는 관련 기록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 원년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여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고 싶지 않음이 아닐까?‘

그래서 왕이 된 사람이 김경신(원성왕)인데요

다른 내용의 기록도 있습니다.

아래는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있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상대등 경신(원성왕)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김경신이 무력으로 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후 김주원은 정계를 은퇴하고 그의 아들인 김헌창이

벼슬을 하는데요. 머물렀던 벼슬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807년(애장왕 8) : 시중

813년(헌덕왕 5) : 무진주(광주광역시) 도독

814년 (헌덕왕 6) : 시중

816년(헌덕왕 8) : 청주(경상남도 진주) 도독

821년(헌덕왕 13) : 웅천주 도독

위의 빨간색원은 김창원이 도독으로 있던 곳의

위치인데요. 웅진주와 무진주는 빈곤이 특히 심했던 곳이라

김헌창은 백성들의 민생고를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시중은 지금의 국무총리급이고 도독은 도지사정도인데요

국무총리 하던 사람을 도지사로 돌리고 있는 상황인 것을

보실 수 있으십니다. 누가 봐도 좌천성 인사인데요.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이유는

1. 계속되는 좌천성 인사

2. 아버지가 부당하게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삼국사기 기록)

3. 헌덕왕의 불법적 왕의 찬탈(헌덕왕은 조카(애장왕)를 죽이고

왕이 된 인물)

4. 이것은 추측이지만 당시 많은 통일 신라인들이 김헌창의 난에

동조 한 것으로 보아 참혹한 민생고를 극복하고 하는 김헌창의

의지입니다. (신라는 당시 자연재해가 계속 돼었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극심하여 귀족들은 엄청난 재물을 계속 불리고 있었지만

일반 평민들은 여자 아이를 죽여서 재물로 바칠 정도로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김헌창은 태종무열왕계인데요 선덕왕이나 원성왕은 내물왕계

입니다. 김헌창은 난을 일으키면 중앙 귀족으로 있는 태종무열왕계

출신들이 동조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김헌창의 난이 실패함에

따라 그 후 태종무열왕계는 왕위 쟁탈전에서 밀리는 영향이

생겼습니다.

위의 사진은 민생고를 나타내는 사진과 삼년산성

모습입니다.

김헌창의 난이 다른 난들과 다른 점은 왕위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나라로 새운 것입니다.

국호는 장안이고 연호는 경운이라고 했는데요.

나라를 아예 새롭게 세운것으로 보아 신라를 리셋하고

새로운 세상을 살겠다는 의지가 보여 백성들의 민생고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통일신라는 100년 동안 전쟁이 없어서 군대가 느슨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요

통일신라의 중앙군은 의외로 빠르고 치밀하게 움직여 김헌창의 난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김헌창의 난 아주 이른 초기 때부터 밀고자가

있어 김헌창의 난 상황을 중앙귀족들이 알고 있었고요

김헌창의 난 군인들은 지방군인데 당시는 중앙군과 지방군

전투력 차이가 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투력이 높은 중앙군이 더 우세해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삼년산성이라고 그 성을 지키는데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곳이 있는데요. 김헌창의 난 반란군이 삼년산성을 지키면서

최초로 방어하는데 실패했다고 할 정도로 쉽게 김헌창의 난

반란군은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역사는 특히 더 승자기준으로 써져서 실질적으로

싸움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에는 중앙군이

김헌창의 난 반란군을 쉽게 진압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후 김헌창은 웅천성을 지키다가 패배를 예감하고 자살합니다.

그래서 그 유해는 김헌창 부하들이 머리와 몸통으로 나눠서 따로

묻는데요. 결국 통일신라 중앙군이 다 찾아내 유해에 다시 해를

가합니다.

그리고 김헌창 가문도 멸문지화를 당하고 무리 239명도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김헌창의 난 관련 이야기였습니다.

좋은 이상과 힘은 중요도가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이상만으로는 힘들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힘도 그 이상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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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귀족 김헌창의 좌절: 온실속 화초는 잡초에 진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신라의 역사는 흔히 상대, 중대, 하대로 분류된다. 건국해서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소위 신라의 극적인 성장기가 상대, 통일 후 행복하게 살았던 시대가 중대, 신라가 쇠망기로 접어드는 때가 하대다.

말기 증후군에 빠진 신라

하대의 시작은 혜공왕(765∼780)부터로 잡는다. 그 시작은 도를 넘은 권력투쟁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권력이 있는 곳에는 권력투쟁이 있다. 한때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우리는 조선시대의 당쟁을 무척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형태만 다르지 정파와 권력투쟁이 없는 나라는 없다. 정치의 타락을 판별하는 기준은 정쟁의 치열함이 아니라 정쟁의 비상식적 태도다. 조선을 예로 들면 조선 전기까지는 정파가 대립해도 국가운영과 제도를 두고는 최선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대립을 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제도와 국가의 운명까지도 정쟁 자체에 종속돼 정쟁의 도구가 된다. 이것도 우리 역사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망한 왕조, 몰락하는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형적 현상이다.

신라도 이 길을 걸었다. 비상식적 대립의 시작은 내전이었다. 768년 7월 96각간(角干)의 난이 터졌다. 각간은 당시 신라 최고의 품계로 신라 왕족 중에서 최고위층 인사들을 지칭한다. 통일 후 이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로 확산돼 살고 있었는데 수도 서라벌에서 각간 대공과 동생 아찬 대렴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33일간 포위하자 전국의 신라 왕족들도 두 패로 나뉘어 전투를 벌였다.

이 난의 원인과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혜공왕은 왕궁을 포위한 반군을 진압하고 왕좌를 지켰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신라 왕족의 단합과 내란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로 신라는 긴 권력투쟁에 빠져들었고 쿠데타와 내전이 빈발했다. 혜공왕은 768년의 위기는 무사히 넘겼지만 780년 끝내 다시 궁궐이 점령당하는 쿠데타를 허용하고 반란군에게 살해됐다.

국가와 지배층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신라의 정치와 신라 왕족으로 제한되는 좁은 권력구조 및 폐쇄적인 신분제, 비효율적인 국가운영방식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치솟았다. 그러나 신라의 지배층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전혀 쇄신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170년이란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한반도가 고립된 지역이고 주변국의 침공이나 위협이 없었던 덕택이다.

김헌창의 난

신라 하대에 발생한 많은 쿠데타 중에서 제일 규모도 크고 극적이었던 사건이 김헌창의 난(822년)이다. 김헌창은 신라 정계의 최고 실력자였다. 선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다음 왕으로 김헌창의 부친 김주원이 내정됐다. 그러나 집터를 잘못 골랐는지 그의 집이 알천 북쪽에 있었다. 바로 궁으로 와서 즉위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마침 내린 비로 알천이 범람해 하천을 건너지 못했다. 그러자 왕좌를 오래 비워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김주원의 이복형제 또는 사촌으로 추정되는 김경신이 원성왕(38대 왕)으로 즉위해 버렸다. 두 세력이 혈연적으로 너무 가깝고 세력 균형이 팽팽했기 때문에 알천 범람 같은 사소한 사건이 왕위를 갈랐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원성왕은 이 위험한 라이벌을 제거할 수도 없었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그 후로도 신라 정계의 일인자로 살았다. 그 사이에 기회가 왔다. 원성왕의 후손들이 또다시 분열했기 때문이다. 원성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김인겸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맏손자 김준옹이 소성왕(39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도 일찍 죽어서 다시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40대 왕)이 13살로 즉위했다. 이후 소성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김언승(김인겸의 둘째 아들)은 조카인 애장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다 수양대군처럼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41대 헌덕왕)에 오른다. 하지만 헌덕왕은 재위 기간 내내 두 동생(김인겸의 셋째, 넷째 아들)들로부터 끊임없이 왕권 위협을 받아왔다. 그의 작은 아버지(원성왕의 둘째, 셋째 아들) 후손들의 야심도 만만치 않았다.

김헌창은 이처럼 원성왕계 후손들의 분열과 복잡한 권력구조 덕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들의 입장에서 보면 껄끄럽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는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시중을 지냈지만 시중으로 재임한 기간은 짧았고 주로 지방의 총독인 도독을 맡았다. 헌덕왕 때 그는 무진주(지금의 광주), 청주(진주), 웅천주(공주) 도독을 차례로 역임했다. 지방으로 내보내도 한곳에 오래 두면 자기 세력을 양성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자주 재임지가 바뀌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방식이 역효과를 낳았다.

부친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데 불만을 갖고 있던 김헌창은 822년 3월 웅천주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나라 이름을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의미에서 장안국이라고 지었다. 장안은 당나라의 수도 명칭이기도 하다. 당의 지지를 유도하거나 당의 지지를 받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이 명칭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김헌창이 건국의 깃발을 들자 전국 여기저기 수령들이 그에 가세했다. 마치 요즘 누가 창당을 했더니 여기저기 지역구 의원들이 가세하는 것과 똑같은 형세였다. 현대와 다른 점은 김헌창을 지지하는 의원들은 그 지역의 전권을 장악하고 군대까지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김헌창이 오랫동안 세심하게 반란을 준비한 증거는 농후하다. 김헌창에게 호응한 지역을 보면 일단 신라의 숙적인 옛 백제 지역이 거의 호응했다. 김헌창 자신도 백제의 수도였던 웅천주를 수도로 삼았다. 백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부여)나 무진주가 적합할 수도 있지만 사비는 방어에 불편하고 무진주는 남쪽에 너무 내려가 있고 지형적으로 방어가 곤란하다. 반면 웅천주는 충청도에 위치해 신라의 중앙부이고 산과 강이 막고 있어서 충청도에서는 제일 훌륭한 요새도시였다.

하지만 이것보다도 더 놀라운 건 상주, 충주, 청주, 김해, 보은, 성주, 진주의 수령이 모두 김헌창에게 가담했다는 것이다. 지도로 이 지점을 표시해 보면 소백산맥 안쪽에서 충청, 경상도의 낙동강 서쪽, 전라도로 진출하는 도로상의 요충이 모조리 김헌창에게 가담했다. 신라는 완전히 포위 고립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한성과 한성 이북, 경기권이 김헌창에게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지역과 서라벌과의 교통은 완전히 끊겼기 때문에 신라 입장에선 별 도움될 게 없었다.

신라군의 반격

지도상으로 보면 싸울 필요도 없어 보였다. 김헌창의 완전한 승리였고 신라는 고사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서라벌이 단합하고 힘을 냈다. 궁지에 몰렸다고 다 힘을 내지는 않는다. 파멸상태에 이른 조직은 조금만 압박이 가해지면 스스로 터지고 무너진다. 그러나 신라는 역사가의 눈으로 볼 때 망국의 길에 발을 디딘 것이지 아직 망한 것은 아니었다.

김헌창군이 신라로 들어오는 모든 중요 지역을 장악했다는 건 그 어느 쪽으로도 치고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때 겁에 질린 지휘관은 똑같이 전방위로 병력을 배치할 것이다. 이미 신라의 영역이 장안국의 장악지역보다 넓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런 전술을 채택하면 필패다.

다행히 신라의 지휘부는 이 함정에 빠지지 않고 과감한 반격을 시도했다. 가용병력을 모두 서라벌로 끌어모아 서라벌 수비대만을 편성하고 나머지 병력으로는 돌파를 시도했다. 지휘부가 공세적인 자세를 보이자 여기저기서 지원병이 쇄도했다. 그중 특이한 집단이 화랑도였다. 삼국 통일 후 화랑은 오히려 위험한 군사집단으로 매도돼 해체 직전까지 갔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내전이 터지자 진압군에 자원한 것이다. 이 덕에 화랑은 위상을 회복했고 신라가 망할 때까지 정치사에서 과거의 명성을 제법 유지하게 된다.

신라군의 진격코스는 과거 삼국통일기의 백제 침공 코스 그대로였다. 신라는 군을 셋으로 나눠 김헌창군의 주요 요충을 각개 격파한 후 옛날 그대로 황산벌에서 집결해 최종적으로 웅천주로 진격하기로 했다.

이 작전에서 제일 걸림돌이 보은에 위치한 삼년산성이었다. 삼년산성은 신라가 한참 약했을 때 신라를 지켜준 위대한 요새였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들어가는 요충에 위치했다. 충청 지역의 백제나 고구려가 경기도를 거쳐 신라로 침공할 때 제일 좋은 길이 옥천-보은 통로였다. 그래서 신라는 삼년산성을 정성껏 쌓았다. 지금 봐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요새 중 최고의 걸작이 삼년산성이다. 삼년산성은 잘 남아 있지만 제일 강력한 방어시설이자 걸작인 4대문의 옹성이 사라져서 안타깝다. 독특한 구조의 옹성은 통로가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 좁고 두껍고 튼튼해 공성구를 들이댈 수도 없었다. 이 강력한 방어력은 이 성이 전략요충에 위치했으면서도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는 경력으로 증명된다.

이 중요한 성이 반군 편에 넘어갔다. 신라군으로서는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반란 진압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토벌군이 지지부진하면 반군 세력은 눈덩이처럼 확장된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신라군의 공격에 삼년산성이 손쉽게 떨어졌다. 삼년산성의 유일무이한 패전이었다. 신라군은 웅천주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패배를 자인한 김헌창은 자살했다. 전황판의 기세가 무안하게 그의 반란은 1년도 가지 못하고 진압되고 말았다.

귀족형 리더가 흔히 빠지는 실수

김헌창의 반란은 귀족형 반란의 전형이다. 모험을 할 줄 모르고 전쟁과 바둑을 혼동해 상황판의 판세에만 집착한다. 그러다 보니 병력이 완전히 분산돼 각개격파를 허용했다. 심지어 최대의 승부처이며 그리 넓지도 않아 기본적인 수비대만 있었어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던 삼년산성에도 병력을 투입하지 않는 우를 범해 난공불락의 요새를 단박에 내주었다.

김헌창뿐 아니라 귀족형 반군, 귀족형 리더는 전쟁에서 이런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인 이유는 온실에서 자란 탓이다. 어려서부터 주변사람들이 보살펴 주고 자기 세계와 환경이 자체의 틀에서 완벽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훈련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도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이는 비단 귀족에게만 해당하는 경구가 아니다. 독점적 기업, 안정된 상황, 메커니즘이 나무랄 데 없이 잘 돌아가는 조직일수록 자기 세계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잡초에게 반드시 진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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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역사저널 그날 – 김헌창의 난, 무엇이 다른가?.201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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