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복음 20 장 주석 | [하루 한 장] 누가복음20장_당신이 무슨 권위로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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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8 (화) [하루 한 장]“당신이 무슨 권위로” (눅20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누가복음 20장은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도발적으로
묻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갈릴리의 젊은이가
떠들썩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뒤집어엎는 사건이 생기자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흔들림을 느끼고
예수님께 찾아와 시비를 겁니다
그러나 권위란 ‘엑수시아’로서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본질이라고는 전혀 없는
혈연, 학연, 지연으로 얽힌 것을
권위라고 믿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짐으로써 그들의 허위와
가식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십니다
자,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 스스로 던져야할
아주 중요한 신앙의 핵심입니다
매일 성경을 펴고 읽고 묵상하며
그 답을 꼭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교회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분홍목사의 설교 영상들을 통해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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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장 주석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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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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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누가복음 2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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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 20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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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20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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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 장. 탐욕의 포도원인 예루살렘에 들어간 아들 …

지혜와 힘을 주옵소서. 주 예수께서 모든 것을 극복하셨지만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이 땅에서 승리하는 것이 번영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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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월요일은 전날의 주일 설교의 약 60%를 발췌해서 보냅니다. * 주일 설교 100% 원문보기는 회원 가입 후 ‘주일 설교’ 란에서 보시면 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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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20 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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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ecMqya2gHKI

누가복음 20장 주석

누가복음 제 20장

=====20:1

하루는 – 이는 19:47의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그 ‘날

마다’ 중 어느 날 하루 일어났던 사건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처음 성전에서 가르치신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 이들은 유대의 종교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의 보전, 교수(teaching)

및 종교 의식 집행, 성전 관리와 같은 모든 종교 문제와 관할권은 이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며 그곳에서 백성들을 가르

치신 것은 그들의 권위와 고유 권한을 침해한 행위로서 마땅히 그들로부터 이의를 제

기받을 만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그들이 예수가 율법을

제정하신 입법자이자 성전의 실체인 메시야(히 9:11-28)이심을 바로 알았더라면 감히

그 같은 이의(異意)를 제기하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있던 이들 종교자들이 도리어 예수가 하나

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대적하였으니 이는 그들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함께

멸망당하고 마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19:41-44;21:5-28).

=====20:2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그들의 첫 질문은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것과, 아울러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어쫓고 독설을 퍼부었던 행위까지 포

함하여 그와 같은 언행을 할 무슨 자격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Sanhedrin)의 대표로 파송

되어 온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 관리와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공인된 직책을 가진 사람

들이었지만 예수는 공인된 직함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

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체제나 제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것도 하나 없

다. 따라서 산헤드린에서는 예수의 무자격을 빌미로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두번째 질문은 그런 언행의 자격이

있다면 누가 그런 자격을 부여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 그 여부를 알고 싶

어서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산헤드린에서 예수에게 공적인

권한을 부여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공격하는 질문이다.

=====20:3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예수께서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하신다. 이는 ‘대

답하기 이전에 나도 한 마디 묻겠다'(I’ll ask a question before I answer, LB)는 뜻

이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구절에서 한가지 조건을 덧붙이고 있다. 즉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어투를 볼 때 예수의 대응에서 만

만치 않은 저항적 모습을 읽게 된다. 반면 누가는 조건적 제안이 아닌 단순한 질문만

을 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누가는 여기서 성전 숙정 작업 때 예수께

서 의자를 뒤엎는 장면을 삭제한 것처럼 예수의 이미지에 거치른 면보다는 부드러운

면을 강조하려한 듯 하다.

=====20: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이 질문은 사실상 예수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처럼 대답 대신에 질문을 하신 의도는 단순히 그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1)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2절)를 판단하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요

한을 들어 질문한 것은 이미 세례 요한의 활동이 당시 민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

었고 이에 선지자로서 공인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자신은 요한에게서 세

례를 받았고 9:7에서 언급된 바처럼 사람들은 예수의 활동을 보고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이해할 정도로 예수의 활동과 요한의 활동을 긴밀하게 연관지어 이해했다. 따

라서 예수는 세례 요한의 활동과 자신의 활동을 일치시켜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 권위

를 되묻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 받았

다는 자명한 여론을 갖고 있었기에 그 여론을 근거로 대적들의 판단에 맡기신 것이다.

(2)대적들의 음흉한 계교를 역으로 공격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대적들이 예수께 권세

의 출처를 물은 것은 그것을 바로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의 무자격성을 드러내

어 배척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는 대답하기 힘든

본문과 같은 역질문을 통해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신 것이다. 이 질문 속에는 주님의

권세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비롯되었노라고 하는 강한 암시가 들어 있다.

=====20:5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 예수의 질문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은 뜻밖의 공격

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이 구절은 산헤드린 대표들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의논하는 그들의 갈등을 묘사해주고 있다. 그들이 고민하는 가장 큰 문제는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할 경우 자신들의 입장문제이다. 즉 세례 요한

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온 권세인줄 알았다면 왜 자신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참

여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헤드린 대표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또 국가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불경건함을 노출시켜서

는 안 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20: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 그들은 자기들의 체면 때문에 요한의 권위를 하나님으

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

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한 민중들의 믿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

가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그들의 고민은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은 민중들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

다. 여기서 유대 지도자들이 민중들로부터 돌에 맞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민중들로부터 별로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예루살렘

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침으로써 세례 요한이 백성들로부터 받았

던 열렬한 지지를 동일하게 얻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와 산헤드린의 대표들은

여차할 경우에는 민중 봉기(民衆蜂起)의 위험가지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함부로 예수를 대할 수 없었고 요한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면 초

가(四面楚架)의 위기를 느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은 유대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

살해 음모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20:7

알지 못하노라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서로 토론하여 얻어낸 결론

은 ‘알지 못한다’는 대답이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지혜로운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의 권위를 하늘로부터 왔다고 인정해도 자신들의 불신앙이 문제가 되

고 사람으로 부터 왔다고 해도 민중들의 분노가 문제가 되니 자신들의 현명치 못한 부

끄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고 하

는 것이 최선의 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끝내 예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악한 무리들이 참으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몰랐기 때문에 이 같은 대답을 하였

다면 그들은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있을 만한 자격이 없는 영적 무지자들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신 그들이 예수의 신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누리

고 있는 종교적 기존 권익을 고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같은 대답을 하였다면 그들

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탐욕자로 종교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자신들

의 배를 채우는 사기꾼이라는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른다고 대

답함으로써 예수와의 대결에서 완패를 시인한 셈이 되고 말았다.

=====20:8

나도…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세 복음서가 똑같이 이와 같은 대답을 전하

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경우 반문하기 전에 예수께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경우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대답못한 그들에게 예수께서

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의 대표를 전

면 무시하는 공격적 발언으로도 이해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말씀 속에는 산헤드린 공

회원들과 더이상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의사 표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20: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 이 비유는 19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입

을 통해 확인되는 바와 같이 당시 집권자들을 향한 비판적 공격이 되는 내용이다. 여

기서 ‘백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오스'(* )는 평민층을 중심으로 하는 ‘오클

로스'(* )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말이다. ‘라오스’는 불특정한 대중, 다수

의 사람 등으로서 이해되며 일반적인 사람들(people)을 가리키는 집단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의 비유가 성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는

특권층, 집권자, 산헤드린 대표 등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향해 주는 비유라고 생각했

던 것 같다.

한 사람이…농부들에게 세(貰)로 주고 –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건은 당시 팔레스

틴의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어 듣는 이들에게 별 무리없이 쉽게 전달되었을 것

이다. 당시에는 팔레스틴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고서 외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혹은

로마인으로서 팔레스틴에 땅를 사둔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부재 지주로 인한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곤 하였던 것이다. 세(貰)로 주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소유권

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다만 성도는 이를 관리하는 청지기 내지는 종의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또 타국에 갔다는 말은 주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포도원

을 경작하라고 맡겼다는 뜻인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맡은 바

사명을 추구해 나가야 함을 시사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게 주어지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사적 맥락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20:10

때가 이르매 – ‘때'(* , 카이로스)는 시간(time) 또는 어느 한 시점

(point of time)이나 시기(period of time)를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를 따 들이

는 추수의 때 곧 종말적 심판의 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성도에게는 풍성한 결

실과 완성의 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파멸의 때이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 9절에서 언급된 사실대로 포도원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고 농부들에게는 세로 빌려준 것이기 때문에 추수 때에 소작세를 받기 위

해 종을 보냈다고 묘사된다. 이것은 소작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 보다는 주인과 소작인

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비유를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

과 인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잘 유지되는가 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소작

료를 잘 내는 것은 주인과 소작인간의 관계가 좋다는 말이되고 소작료를 거부한다는

말은 주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때문에 종이 온 것은 주

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끊지 않고 계속 유지시키고자 함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선지자들의 주 임무 역시 백성들의 죄악을 회개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데 있었다.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 보냈다. 이는 주인과의 계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다는 의사 표

시이다. 아울러 이는 9절에서 언급된 포도원의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음에도 그 소유권

을 빼앗아 자기들이 갖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위이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

에 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모욕을 당했던 선지자들을 연상시키게 한다(렘

7:25,26;25:4;슥 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놀라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불신앙의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비유가 직

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에게로 돌아가는 화살이기도 하다.

=====20: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 마가복음과 본서는 종의 파송을 단수로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은 복수로 계속 언급한다. 아마 마태는 많은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있었

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농부들의 죄악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이 종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거칠고 잔인해진

다. 여기서 ‘능욕하다’라는 말은 예수가 체포되어 당하던 모욕을 연상하게 한다

(22:63-65;마 26:67-68;막 14:65). 마가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고 묘사하는데

이것 역시 예수가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쓴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마 27:29;막 15:7).

따라서 종이 받는 수난은 마지막 상속자가 받는 죽음으로 집중되고 있으며(14절) 이

같은 수난의 묘사는 곧 닥치게 될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 농부들은 주인과의 관계를 끊고 계약도 파기하며 주인

의 종까지 모욕을 주고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 사실에 대해 침묵하

고 세번째로 그 농부들에게 종을 보내는데 이것은 (1)주인이 농부들에게 보내는 끊없

는 신뢰이며, (2)농부들이 회개하여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시이고, (3)농부들의 배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인을 하나님으로 비유 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

족의 끝없는 배신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 종이 받는 상처가 점증되고 그냥 돌려 보낸 것이 아

니라 ‘내어 쫓아 버렸다’는 표현은 사용함으로써 농부들의 마음이 더욱 완악해진 살기

등등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세번째 종 이 외에 많은

종들이 다시 왔음을 밝히면서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고 묘사한다. 마가의 진술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고 보여지는 것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증명하듯이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

이 많이 죽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애굽에서의 유배

생활 중에 돌에 맞아 죽었으며 이사야는 톱에 켜여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14절에서 상속자의 죽음을 더욱 극적으로 말하기 위해 종들을 고난 받는 것으로만 묘

사한 듯 하다. 또한 누가는 종과 상속자의 죽음을 따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고

또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이 행했던 잔인한 반역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 예수의 죽

음까지 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3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 주인은 세번째 종이 상처를 입고 쫓겨오

게 되자 비로소 애절한 탄식과 함께 자신의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누가의 표현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주인의 직접 애절하게 탄식하는 모습과 자신

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겠다는 결심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누가에 의하면 주인이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하는데 이 탄식은 소작세를 받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안타까

움도 아니고, 주인이 보낸 종들의 수난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어떻게 해야 강

퍅해진 농부들의 마음이 변하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사실 이것은 모험(冒險)

이었다. 왜냐하면 종을 세 번 보내기까지 횟수가 거듭될 수록 농부들의 마음은 굳어지

고 종들에 대한 수난도 갈수록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모냈을 경우 이번

에는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인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사랑하는'(* , 아가

페토스)이라는 단어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only-beloved). 이 단어

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서도 사

용되었다(3:22). 따라서 이 같은 묘사는 누가의 의도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주

인의 탄식과 자신의 아들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곧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를 이 땅에

보냈다는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비유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예수의 수난

과 죽음에 알레고리적(allegorical)으로 일치시켜져 왔다.

=====20:14

의논하여 – 이 표현은 (* , 디알로기조마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말하되'(* , 레고)보다 훨씬 정밀한 묘사이다. 즉 그들이 서로 모

여 자신들의 이익을 어떻게 하든 수호하기 위해 골똘히 대책을 숙의(熟議)하였다는 뜻

이다. 이 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는 결국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결탁하여 예수

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어떻게 꾸몄는지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 농부들이 의논한 결과는 아예 상속자들 죽여버림으로써 포

도원의 소유권을 영구히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의 소유

권이 자기들에게 넘어온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농부들은 아들

이 자기들에게로 온 것은 주인이 아들에게 소유권을 넘겨 주었다고 믿었거나

(E.Bammel) 아니면 아들이 올 때 본래의 주인이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그 소유권을 명

확히 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부들의 판단은 잘못된 것

이었다. 주인이 죽은 것도 아니고 상속자 아들을 죽였다고 그 소유권이 자기들에게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핍박자들을 사주(使嗾)하였던 사단은 예수를 죽

임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보장받으려 하였으나, 만물의 주인이신 예

수는 다시 살아나사 사단의 무리들을 물리치셨다. 또한 본문은 농부들의 죄악된 탐욕

을 여실히 보여준다. 9절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주인과 농부의 관계는 소유주와 소작인

의 관계이다. 이것은 서로 간의 계약으로서 농부들이 일정한 세액을 납부하기를 약속

한 것이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이 계약을 파기하고 소유권을 부당하게 자신들의 소유

로 만들려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약을 인간이 먼저 파기했으며, 청지기적 신분을 망각한 인간의 탐욕이 온갖 범죄의

원인임을 말해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어쨌든 이 비유는 농부로 비유된 당시의 종교.정치 지도자들 또는 백성들이 하

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세상을 추구하려 한 죄악을 폭로한다.

=====20:15

있는데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아들을 죽인 다음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다고 되어있

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포도원 밖으로 끌고가 죽인 것으로 묘사한다. 이 구절은 아

들이 포도원 안이 아닌 밖에서 죽었다고 묘사함으로써 예수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

려가 처형당한 사실을 암시한다. 포도원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묘사한 것이다. 따

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 및 그들에게 약속된 모든 축복으로부터

차단시키고자 하는 음흉한 계획을 추진해 나갔으며, 예수는 이 모든 궤계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받으셨던 것이다(히

13:12).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 이 구절은 청중들로부터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유도성 질문이다. 즉 결론이 어떻게 날지 자명해진 시점에서 질문을 함으로

써 청중 모두가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며 곧이어 내릴 결론의 효과를 강조하

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마태는 청중들이 결론을 직접 말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 21:41).

=====20:16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 여기서 주인이 내린 두 가지 조

치가 언급되는데 이는 농부들이 저질러온 죄악에 대한 심판의 징벌로서 그들을 진멸시

키겠다는 선언이다. 따라서 이는 첫째, 농부들이 상징하는 산헤드린의 대표들에 대한

전면적인 응징(應懲)을 선언하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거부하고 공격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기도 하다. 두번째, 다른 사람에게 포도밭을 맡기겠다

는 가언을 하고 있는데 포도밭을 이스라엘이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의

해 지배받게 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같은 사실이 실제로 A.D.70년에 로마

군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같은 사실이 실제로 A.D.70년

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성취된 바 있다. 나아가 이 비유를 신앙의

문제로 연결지어 해석할 경우 예루살렘이라는 제한된 장소와 시간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하나님의 아들(요 1:1-12)을 끝내 배척하는 자는 인간적인 파멸 뿐만

아니라 악의 세력에 노예가 될 것이라고 경고로서 이해된다.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 그와 같이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원

을 표현하는 누가만의 묘사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메 게노이토'(*

)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부정적 소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독특

한 표현으로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롬 3:4,6,31). 즉 청중들이 안타깝고 간절한 바

램으로 요청하는 말이다.

=====20:17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시 118:22을 인용한 문구인

데 16절에서 언급된 결론과 청중들의 반응에 대한 추가적 대답이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비유가 주는 교훈을 더욱 명료하게한다. 이 비유 역시 상징적 의미로서

건축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경고와 좋은 돌은 한때 버려졌을지라도 다시 발견되어

머릿돌로 쓰여지게 된다는 필연성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여기서 건축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비유에서 주인의 종과 아들을 배척하고 죽인 농부들을 상징하며 사실적으로

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예수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의

미(행 2:36)이다.

=====20:18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 심판과 돌을 연관지어 상징적으로 묘사하

는 격언구 형식의 이 구절은 사 8:14,15과 단 2:34,44,45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표현은 항아리 따위의 물건이 돌 위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듯이 사람도 산산이 부서

져 파멸에 이른다는 말이다. 문맥상으로 여기서 돌 위에 떨어져 부서지는 형국에 처해

질 사람은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킨

다. ‘깨어지겠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들라스데세타이'(*

)는 ‘산산이 부수다’는 뜻의 ‘쉰들라오'(* )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으

로 예수와 그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의 말로(末路)가 어떠할 것인지를 잘 나타낸다.

이 돌이…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 이 표현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반대 형식으로

묘사된 심판 계시이다. 즉 사람이 돌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에게 돌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앞의 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것이다. 이 같은

표현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도록 완전한 파멸을 강조하는 말로서 앞의 묘사에 비해

심판의 철저함과 적극성이 강조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악인들이 자기 모순 속

에서 스스로 멸망하는 심판을 나타내며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마지막 날 예수께서 친

히 불신의 세력을 철저히 파멸시키실 것을 뜻한다. 이 같은 비유는 초기 기독교인 들

에게 자신들에게 임한 핍박과 고난을 예수의 고난과 동일시하면서 인내케 하며 또한

종말의 때의 통쾌한 승리를 약속하는 복음으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20:19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들 두려워하더라 – 19:47,48에서 언급된 내용과 비슷하다.

19:47,48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유대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되어 있는

군중들 때문에 예수를 죽이지 못한다고 하는 똑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예수는 일반 백성들의 열광

적인 환호를 받으셨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관해 본질적으로 오해하

고는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전폭적인 지지의 환호를 보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기득권자들은 예수의 언행이 매우 도전적이고 선동적이라고 생각하

여 두려워했을 것이 분명하다.

=====20:20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 마태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라고 문장의 주어를 밝히

고 있는데 반해 누가는 주어를 밝히지 않는다. ‘엿보다’라는 말은 주의깊게 몰래 지켜

보는 것을 뜻하며 문맥상으로 볼 때 예수의 약점을 책(責)잡아 공격하려고 ‘호시 탐탐

(虎視耽耽)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라는 뜻이다.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 2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제거

시키기 위해 처음 짜낸 묘안은 종교적 가르침의 권위를 문제삼으려 그를 책잡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문제로 예수를 문제삼았다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1-8

절) 허다한 군중들이 예수를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힘으로

예수를 처치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당시 죄수에 대한 사형권은 로마 정

부의 고유 권한이었기 때문에 설령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대법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조작한다해도 함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의 정치적인 힘을 빌어 예수를 제거하고자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정탐들을 보내어…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 1,2절에서 산헤드린의 대표들이 직

접 예수를 심문하듯이 공격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정탐이라고 표현되는 특정한 임무

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책잡고자 나타난다.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을 종합하면

산헤드린 대표들이 보낸 정탐꾼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이었다(마 22:15;막

12:13). 이 두 당파는 대개의 경우 서로 뿌리깊은 반감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예

수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일치 단결하고 있다. 예수는 이들에게

있어 기득권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요 공통의 타도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실

로, 그들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른 발을 지닌 악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잠 1:16).

=====20:21

우리가 아노니…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 정탐꾼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이 예수를 ‘당신’이라고 호칭했던 것과는(2절) 달리 ‘선생님’이라는 정중한 말을 사용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들어 칭찬한다. 그러나 이 말

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간교한 술책(術策)의 일환이었다.

사람을…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

는데 첫째는 20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들이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즉 자신들이 예수의 말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특히 예수의 가르침이 참으로 정

직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이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

하고 참된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위선적인 말이다. 둘째는 이 같은

칭찬의 말을 통해 예수를 인정하고 추종하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여 예수를 안심시키

고 자기들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려는 유도성 질문을 하기위한 연막(煙幕)이라고 할 수

있다.

=====20:22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 – 여기서 특별히 가이사(Caesar)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

하여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를 무력적으로 지배하면서 높은

세금을 징수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깊은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같은

민족 감정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말하게 함으로써 예수를 로마 쪽이나 유대 쪽으로부

터 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진퇴 양난식(進退兩難式)의 교묘한 질문이다.

민족 감정으로 첨예하게 드러나 있는 지배국에 대한 세금 납부 문제는 초기 단계에 이

미 유대인의 저항을 불러 일으킨 바있다(I.H.Marshall). 예수 당시에 유대인의 반(反)

로마적 감정은 세금 징수 문제에 있어 큰 반발심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정탐꾼은 자

신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인 것처럼 가장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당연하게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반대로 친로마적 발언을 한다면 예수를 환호

했던 대다수 무리들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20절의 내

용으로 보아 그들은 반로마적 대답을 기대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언급된 ‘가이사’

(Caesar)는 ‘시이저’라고도 발음되는데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서 로마 초대 황제

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때부터 유래되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대인

들이 납부해야 할 세금은 인두세, 관세 등 각종 세액이 있었는데 그 세금은 수입의

1/3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로마가 요구하는 세금 중 인두세(人頭稅)가 악명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인두세는 14-65세까지 해당되는 모든 남자와 12-65세까지

이르는 모든 여자에게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다.

=====20:23

그 간계(奸計)를 아시고 – 예수의 판단 형식을 빌어 질문하는 자들의 의도를 말해

주는 이 구절은 20절의 설명을 상기시키며 사람의 깊은 의중을 간파하시는 예수의 전

지성을 보여준다. 마가는 ‘간계’대신 ‘외식’으로 또한 마태는 ‘악함’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를 책잡으려는 정탐꾼들에 대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

리고 마가와 마태는 이 같은 평가 후 예수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반문하

는 것으로 묘사하여 공개적으로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폭로하신 사실까지 언급하였다.

=====20: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 이같은 예수의 요구는 로마에 납부하는 세금의 정

당성에 관한 질문에 대한 첫 대답인데 이 요구로 보아 한 데나리온은 일상적으로 지니

고 다닐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의 화폐인 것으로 보인다. ‘데나리온’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로마 화폐이다. 헬라 화폐 ‘므나’의 1/100에 해당되며 유대 화폐

‘세겔’의 1/4정도에 해당되는 단위인데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당시에 사용되었다.

또 잘 알려진 헬라 화폐 ‘달란트’의 1/6,000에 해당되는 가치를 갖고 있었다. 예수가

여기서 한 데나리온을 요구한 것은 아마도 당시에 로마에서 부과하던 인두세가 백성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던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셨던 것같다.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당시에는 어느 나라가 새로

세워지거나 왕이 새로 즉위하면 새 왕의 화상(畵像)을 넣은 돈을 만들었다. 또한 그것

들이 유통되는 곳에서는 세금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데나리온 주화에

는 당시 황제 가이사 디베리우스(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그

주화의 글귀는 황제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의 어머니가

여신으로서 묘사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 로마 주화에 그려진 황제의 얼굴은 종교

적 권위가 부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E.Stauffer).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화폐를 종

교적인 이유를 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기를 꺼려했었다.

=====20:25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켜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양극적 언급을 정교 분

리(政敎分離)의 이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정교 분리의 이론

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롬 13:1-7과 더불어 그리스도 인들이 지녀야 할 국가 또

는 사회 권력에 대한 합당한 자세를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질

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삶의 실제적인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 아무런 상

관이 없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논리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훼

손시키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다. 당시 유대는 철저하게 로마로부터 지배받아 사회.문화.종교 문제까지 위협을 받았

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정신

적. 종교적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

의 이야기를 로마의 것과 유대의 것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즉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로 돌려주고 유대의 것은 유대에게 돌려 놓으라는 말이

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역시 로마 황제의 소유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

온도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 유대의 정신을 유대인의 것

으로 돌려 놓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발언은 양 극을 피해가는 기회

주의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로 이

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민족주의의 한계속에 제한된 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놓으라는 강

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다면 또는 ‘가이

사’로 불려지는 황제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면(사실

당시 ‘가이사’의 권위는 가히 신적이었다) 그 권위를 하나님에게로 돌려 놓고 가이사

의 것만 가이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상

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바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이 세상의 돌하

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이사의 왕국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응답이 갖는 비판적 의미 때문에 예수를 고발했던 사

람들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한 사람이라고 증언하게 된다

(23:2).

=====20:26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

한 또 한 차례의 노력과 음모가 실패로 끝나는 장면이다. 그들이 예수를 책잡을 수 없

었던 이유는 첫째, 예수의 답변이 책잡기 위해 질문했던 자들의 수준을 크게 넘어섰기

때문에 그들이 당황하였고 둘째, 예수의 답변이 단순히 세금을 내고 안내고 하는 문제

를 넘어서 원천적으로 해결해야 될 근본적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 주

위에 함께한 무리들이 예수의 발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있었으며 그 분위기가

압도적인 것이어서 더이상 말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

수의 답변에 기이히 여겼다고 언급되는데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

)는 ‘놀라다’혹은 ‘칭송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답변이 합리적이며

반론의 여지가 없어서 청중들 가운데 긍정적으로 수용되면서 그 지혜에 놀랐다는 말이

다.

=====20:27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 본문의 사두개인들이 산헤드린의 명을 받고 고의

적인 공격 의도로 왔는지 아니면 종교상의 진지한 논의를 위해 왔는지는 밝히지 않는

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그들도 예수께 대한 공격적 의도로 질문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태는 ‘그 날에’라는 단어를 사용해 앞서 소개되었던 세금에 관한 논쟁

과 같은 날에 이 사건이 있었음을 시사한다(마 22:23). 한편 사두개파는 다윗과 솔로

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게 기원된(삼하 8:17) 집단으로서 하스모니안 시대 때

(B.C.166-163) 구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들은 특히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전승 문서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유대 사회내의 소수

집단이었지만 부유한 지배 계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현실주의자라는 별명과 함께 로마의 통치에 협력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했던

무리들이었는데 예루살렘 함락(A.D. 70)과 함께 몰락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 중

독특한 것은 부활과 영(spirit)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Josephus, Antiq., 13.10.6).

=====20:28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 이 사람들도 역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적대적 감정이 없는 듯이 말문을 열고 있지만 실상은 이어지는 질문을 통해 선생으로

서의 주님의 권위를 깡그리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께서 부활을 인

정하신다고 판단하고서 나름대로 철저한 반대 논리를 펴고자 했다. 기실 그들은 부활

에 관한 문제를 놓고 바리새인 등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첨

예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 대해서도 자신만만한 투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논거로서 언급한 내용은 신 25:5-10에 나타난 계대 결혼(繼代結婚)에

관한 법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남편이 자식 없이 죽을 경우 시동생과 그 과부

가 재혼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재혼을 통해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자손을 잇게 하

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모세 율법과 부활 교리와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드

러내기 위해 이러한 관습을 근거로 들고 나왔다.

=====20:29,30,31,32,33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 그들이 계대 결혼과 부활의 모순을 말하

기 위해 전제된 이야기가 29-32절의 내용이다. 즉 일곱 형제가 있는 집안에서 결혼한

맏형이 죽게되자 전통과 율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의 남편이 되었는데 그러기를 일곱

회나 반복하여 이 여인은 일곱의 남편이 생긴 셈이되었다. 마침내 이 여인도 죽었는데

문제는 모두 죽어서 다시 부활했을 때 한 여인이 일곱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있다.

그렇다면 부활 후 어느 한 사람이 진짜 남편이 되어야 하는데 일부일처제가 옳다고 생

각되는 상황하에서 일곱 명의 형제 중 누가 그 여인의 남편이 되겠느냐하는 질문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었는지 가상적인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생이 미망인인 형수

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수혼(嫂婚) 제도의 상황하에서 이 질문은 상

당히 진지하고 흥미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질문을 던진 사두개인들은

논쟁의 승리를 확신하고서 아마 속으로 예수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질문에

따라 일곱 형제 중 어느 한 명을 택하여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

것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 거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 때에

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식의 객관적 자세에서 나온 진지한 물음이 아니라 ‘그 중에 누

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아예 단정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 물음에는 마치 그 미망인

이 부활시에는 반드시 일곱 형제 중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된다는 것처럼 윽박지르

는 느낌이 담겨 있다. 그것은 현세의 삶과 동일선상에 두고자 하는 전제 자체의 오류

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20:34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 이 부분은 타공관복음서에서는 발

견되지 않는 문장인데 대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사두개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을 잘못 알아 부활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신 것으로 묘사된다.

본절에서도 예수는 대적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곧 그들의 질문에 끌려다

니는 입장에서 벗어나사 부활후 상태에 관한 진실을 본질적으로 설명하심으로써, 대적

들의 무지와 악한 계교를 자연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나게끔 하는 방법을 취하셨

다.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들어 전제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진리를 선포하는

이 놀라운 신적 지혜 앞에서 대적들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0절). 한편

본문의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일반적 부활관을 염두에 두고 예

수를 시험하려 했던 것 같다.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 부활관에 따르면, 사람들은 죽

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경은 부활

이후의 삶을 현세의 삶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묘사한다.(고전 15:35-49;빌 3:21;요일

3:2).

=====20:35

저세상과…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 부활하여 새롭게 사는 세계를 저세상

으로 표현한다. 즉 이세상과 저세상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사두개인이 질문한 내용이

일차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부활한 새로운 세계는 이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이다. 여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은 부활 후 거

하게 될 세계 곧 천국이 모든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 제한된 사람들의 세계임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에 의해서도 지적되는 바, 행 13:46에서 영생을 얻기에 합당

한 자와 합당하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 내용과 맥을 같이 한다(I.H.Marshall).

여기서 언급된 합당한 자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의(義)로 옷입

게된 자들을 가리킨다(롬 1:17).

=====20:36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천사와 동등이요 – 이는 앞절에서 언급된 바 곧 부활한

저세상에서는 결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출산을 통한 종족(種族) 보존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새생명을 받아 불멸의 존재로

새로 탄생하는 성도들로서는 더이상 결혼이나 출산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수효가 창세때로부터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듯이 부활의 생명을 받는 자들의

수효도 만세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더이상 수효를 보충해야 하는

부족함이 야기되지 않는다. 아울러 본문은 부활한 성도의 삶의 양태가 현세의 그것과

는 차원이 다를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20:37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칭하였나니 – 사두개인들이 모세 율법을 근거로 삼

아 예수를 시험하였듯이 예수께서도 이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증거하신 말씀을

통해 부활신앙을 변호하셨다. 즉 본문은 출 3:6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음

성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

나님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과 같은 신앙의 선조들이 몸은 비록 죽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새

생명에 참예케 될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들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구속력을 가지

고 있다. 따라서 유한한 인생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죽음이 곧 존재의 끝으로 보이지

만 신령한 믿음의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인 것이다.

=====20:38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인

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

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몸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

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구체적 삶이 변혁되지 못한 채로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

님은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중생한 사람이라면

(36절)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덧붙이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안에 있

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죽

음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부활 역시 육체적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

어서는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영생은 죽음 후

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이며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

서 영생, 부활이 있는 것이다(요 11:25,26).

=====20:39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 강했으며 사두개파 사람들과는 경쟁적 차원에 있었다. 이

러한 신학적 견해 차이로 말미암아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 했던 일(27-40절) 외에는

이 두 그룹은 항상 마찰을 빚어왔다. 본 구절에서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신들과 사상

적 숙적(宿敵) 관계에 있던 사두개인들의 그릇된 주장들을 여지없이 훼파해 주신데 대

하여선 크게 기뻐하였다.

=====20:40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 이 진술 역시 누가만 언급하고 있는데 사두개인들이

주장했던 논리가 예수 앞에서 단번에 무너지는 장면이다. 결국 본장에서 등장한 산헤

드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그리고 사두개인 등 모두가 예수

와의 논쟁에서 패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 민족의 지도층으로서 한 민족을 이끌

어가는 주도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인데 그들이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하

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예수의 신적 지혜와 권위를 더욱 부각시킨다.

=====20:41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

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다

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리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삼하 7장;시

89:20-37;사 9:2-7,11:1-9;렘 23:5-6;33:14-18). 이러한 예언을 곡해한 그 당시 대다

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다윗왕 시대와 같은 번

영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는 다

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

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점에서(빌 2:6), 그들의 메시야관

은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이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곧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언급한다(롬 1:3,4).

=====20:42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 시 110:1을 인용하여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이라고 부른

사실을 언급한다. 한편 마가와 마태는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말한 것으로 묘사하여

다윗의 말에 신적인 권위가 부여되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본문의 구약성경 전체가 메

시야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단적 실례를 보여준다.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수많은 메시야 예언들(사 7:14;호 11:1) 외에도 구약의 실재 인물

을 통해(창 14:18-20),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호 11:1), 구약의 각종 의식과 규

례를 통해(히 8-10장) 혹은 선지자들의 상징적 행동을 통해(슥 11:12,13) 메시야를 예

언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예언들이 바로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

=====20:43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때까지 – 마태와 마가는 ‘발아래 둘 때까지’라고

표현했다. ‘발등상’은 헬라어로 ‘휘포포디온'(* )으로서 ‘발판’ 곧

발을 올려 놓는 ‘대'(footstool)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께서 마지막 날

심판주로서 임하게 되실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원수’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를 꾀어 범죄케하고 세상 끝날까지 세상을 미혹케할 사단을 지칭하며, 따라서 이 사단

이 심판주의 발 아래 짓밟히게 됨으로써 창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

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20:44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으로 불렀는데 어떻게 그 주님

이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

로 오신다는 그 ‘인성’에 대해서는 알았으나 그의 ‘신성’에 대하여는 알지 못했다. 시

110편을 인용한 주님의 지혜로운 질문은 그의 대적자들을 침묵케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신성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목적도 내포한다. 예수가 그의 성육

신하신 몸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었으나 다윗의 주가 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사실상 다윗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같은 예수의 반문은 당

시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형식주의 신앙과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및 왜곡된 선

민 의식을 깨뜨리려는 의도까지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이미 한 가문이나 한 민족을

구원하고자 온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온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20:45

이 같은 교훈은 이미 앞에서 주어진 것(11:39-52)일 뿐 아니라 마 23:5-7;막

12:38-40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은 다른 평행 구절의 내용보다 훨씬 축

약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는 제자들에게(45절) 주어진

것이나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

고 있을 당시 주위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많은 무리들과 줄

곧 예수를 따랐던 자들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무리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 이 표현은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한 묘사이다.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서기관들은 율법 교사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위 성직자들의 권위를 내세우는 행위는 율법에 대한 지

식이 남보다 월등하다는 우월 의식과 함께 교만스러운 자기 과시욕의 표현이었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 시장은 대중적 장소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그곳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자기의 권위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높임 받기

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서기관들의 허영을 비판하는 말이다.

회당의 상좌(上座)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 서기관들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

로나 항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명예욕에 대한 비판인데 높이 되고자 하면 끝

이 되어야 하며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막 9:35)에 반대되는 것이

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삼가라는 경고의 말씀은 비단 서기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욕심을 향해 꾸짖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20:47

저희는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키며 – 서기관들에 대한 비판에 이어 구체적 죄상을

폭로하는데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는 자로 묘사된다. 당시 과부들은 고아들과

함께 경제 능력이 없는 자로서 보호 대상자였다. 본문은 약자의 재산을 착취하는 행위

가 흔히 있었던 것임을 반증해 준다. 이 구절이 뜻하는 구체적 사실은, 서기관들이 그

들에게 위임된 율법적 판결권을 남용하였거나(Jeremias), 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과

부들의 재산에 손실을 가한다거나(T.W.Manson), 타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법적 대리

인으로서 착취한 사실을 뜻할 수도 있다(J.D.M.Derrett).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 중의 하나가 기도를 길게 하는 것

이다. 유대교에서는 형식적으로 짜여진 기도문이 많았으며 길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기도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율법적으로 가장 정통한 율법학자라는 칭

호에 걸맞게 기도를 오해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 같은 기도는 하나님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외식으로 하는 기도였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예수는 그들의 약점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물론 이 비판은 오늘날

의 기독교인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 지식을 남용하고 권력과 종교적 율법을 악용하여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행위는 다른 죄보다 더 무거운 죄가 된다는 말이며 더욱

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악행을 범하면 하나

님 앞에 더 중한 판결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

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12:48).

헬라어 누가복음 2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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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에게네토 엔 미아 톤 헤메론 디다스콘토스 아우투 톤 라온 엔 토 히에로 카이 유앙겔리조메누 에페스테산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호이 그람마테이스 쉰 토이스 프레스뷔테로이스

개역개정,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새번역,1 예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데,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원로들과 함께 다가와,

영어NIV,1 One day as he was teaching the people in the temple courts and preaching the gospel,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together with the elders, came up to him.

영어NASB,1 On one of the days while He was teaching the people in the temple and preaching the gospel,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with the elders confronted Him,

영어MSG,1 One day he was teaching the people in the Temple, proclaiming the Message. The high priests, religion scholars, and leaders confronted

영어NRSV,1 One day, as he was teaching the people in the temple and telling the good news,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came with the elders

헬라어신약Stephanos,1 και εγενετο εν μια των ημερων εκεινων διδασκοντος αυτου τον λαον εν τω ιερω και ευαγγελιζομενου επεστησαν οι αρχιερεις και οι γραμματεις συν τοις πρεσβυτεροις

라틴어Vulgate,1 et factum est in una dierum docente illo populum in templo et evangelizante convenerunt principes sacerdotum et scribae cum senioribus

히브리어Modern,1 ויהי היום והוא מלמד את העם במקדש ומבשר ויגשו הכהנים והסופרים עם הזקנים׃

성 경: [눅20:1]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하루는 – 이는 19:47의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그 ‘날마다’ 중 어느 날 하루 일어났던 사건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처음 성전에서 가르치신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 이들은 유대의 종교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의 보전, 교수(teaching)및 종교 의식 집행, 성전 관리와 같은 모든 종교 문제와 관할권은 이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며 그곳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신 것은 그들의 권위와 고유 권한을 침해한 행위로서 마땅히 그들로부터 이의를 제기받을 만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그들이 예수가 율법을 제정하신 입법자이자 성전의 실체인 메시야(히 9:11-28)이심을 바로 알았더라면 감히 그 같은 이의(異意)를 제기하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있던 이들 종교자들이 도리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대적하였으니 이는 그들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함께 멸망당하고 마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19:41-44;21:5-28).

카이 에이판 레곤테스 프로스 아우톤 에이폰 헤민 엔 포이아 엨수시아 타우타 포이에이스 에 티스 에스틴 호 두스 소이 텐 엨수시안 타우텐

개역개정,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새번역,2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당신에게 주었습니까? 어디 우리에게 말해 보십시오.”

우리말성경,2 말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말해 보시오.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소?”

가톨릭성경,2 예수님께 말하였다. “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또 당신에게 그러한 권한을 준 이가 누구인지 말해 보시오.”

영어NIV,2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they said. “Who gave you this authority?”

영어NASB,2 and they spoke, saying to Him,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or who is the one who gave You this authority?”

영어MSG,2 him and demanded, “Show us your credentials. Who authorized you to speak and act like this?”

영어NRSV,2 and said to him, “Tell us,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Who is it who gave you this authority?”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ειπον προς αυτον λεγοντες ειπε ημιν εν ποια εξουσια ταυτα ποιεις η τις εστιν ο δους σοι την εξουσιαν ταυτην

라틴어Vulgate,2 et aiunt dicentes ad illum dic nobis in qua potestate haec facis aut quis est qui dedit tibi hanc potestatem

히브리어Modern,2 ויאמרו אליו אמר נא לנו באי זו רשות אתה עשה את אלה או מי הוא הנתן לך את הרשות הזאת׃

성 경: [눅20:2]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그들의 첫 질문은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것과, 아울러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어쫓고 독설을 퍼부었던 행위까지 포함하여 그와 같은 언행을 할 무슨 자격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Sanhedrin)의 대표로 파송되어 온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 관리와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공인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는 공인된 직함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체제나 제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것도 하나 없다. 따라서 산헤드린에서는 예수의 무자격을 빌미로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두번째 질문은 그런 언행의 자격이 있다면 누가 그런 자격을 부여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 그 여부를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산헤드린에서 예수에게 공적인 권한을 부여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공격하는 질문이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에로테소 휘마스 카고 로곤 카이 에이파테 모이

개역개정,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새번역,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으니,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우리말성경,3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으니 내게 말하라.

가톨릭성경,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영어NIV,3 He replied, “I will also ask you a question. Tell me,

영어NASB,3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I will also ask you a question, and you tell Me:

영어MSG,3 Jesus answered, “First, let me ask you a question:

영어NRSV,3 He answered them, “I will also ask you a question, and you tell me:

헬라어신약Stephanos,3 αποκριθεις δε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ερωτησω υμας καγω ενα λογον και ειπατε μοι

라틴어Vulgate,3 respondens autem dixit ad illos interrogabo vos et ego verbum respondete mihi

히브리어Modern,3 ויען ויאמר אליהם אף אני אשאלכם דבר ואמרו לי׃

성 경: [눅20: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예수께서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하신다. 이는 ‘대답하기 이전에 나도 한 마디 묻겠다'(I’ll ask a question before I answer, LB)는 뜻이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구절에서 한가지 조건을 덧붙이고 있다. 즉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어투를 볼 때 예수의 대응에서 만만치 않은 저항적 모습을 읽게 된다. 반면 누가는 조건적 제안이 아닌 단순한 질문만을 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누가는 여기서 성전 숙정 작업 때 예수께서 의자를 뒤엎는 장면을 삭제한 것처럼 예수의 이미지에 거치른 면보다는 부드러운 면을 강조하려한 듯 하다.

토 밮티스마 요안누 엨스 우라누 엔 에 엨스 안드로폰

개역개정,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새번역,4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난 것이냐?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느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왔느냐?”

가톨릭성경,4 요한의 침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영어NIV,4 John’s baptism–was it from heaven, or from men?”

영어NASB,4 “Was the baptism of John from heaven or from men?”

영어MSG,4 About the baptism of John–who authorized it, heaven or humans?”

영어NRSV,4 Did the baptism of John come from heaven, or was it of human origin?”

헬라어신약Stephanos,4 το βαπτισμα ιωαννου εξ ουρανου ην η εξ ανθρωπων

라틴어Vulgate,4 baptismum Iohannis de caelo erat an ex hominibus

히브리어Modern,4 טבילת יוחנן המן השמים היתה אם מבני אדם׃

성 경: [눅20: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이 질문은 사실상 예수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처럼 대답 대신에 질문을 하신 의도는 단순히 그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1)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2절)를 판단하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요한을 들어 질문한 것은 이미 세례 요한의 활동이 당시 민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고 이에 선지자로서 공인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자신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9:7에서 언급된 바처럼 사람들은 예수의 활동을 보고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이해할 정도로 예수의 활동과 요한의 활동을 긴밀하게 연관지어 이해했다. 따라서 예수는 세례 요한의 활동과 자신의 활동을 일치시켜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 권위를 되묻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 받았다는 자명한 여론을 갖고 있었기에 그 여론을 근거로 대적들의 판단에 맡기신 것이다. (2)대적들의 음흉한 계교를 역으로 공격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대적들이 예수께 권세의 출처를 물은 것은 그것을 바로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의 무자격성을 드러내어 배척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는 대답하기 힘든 본문과 같은 역질문을 통해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신 것이다. 이 질문 속에는 주님의 권세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비롯되었노라고 하는 강한 암시가 들어 있다.

호이 데 쉬넬로기산토 프로스 헤아우투스 레곤테스 호티 에안 에이포멘 엨스 우라누 에레이 디아 티 우크 에피스튜사테 아우토

개역개정,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새번역,5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면서 말하였다. “‘하늘에서 났다’고 말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우리말성경,5 그들은 서로 의논하며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예수가 ‘그러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가톨릭성경,5 그들은 저희끼리 서로 의논하였다. “ ‘ 하늘에서 왔다.’ 하면, ‘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것이오.

영어NIV,5 They discussed it among themselves and said, “If we say, ‘From heaven,’ he will ask, ‘Why didn’t you believe him?’

영어NASB,5 They reasoned among themselves, saying, “If we say, ‘From heaven,’ He will say, ‘Why did you not believe him?’

영어MSG,5 They were on the spot, and knew it. They pulled back into a huddle and whispered, “If we say ‘heaven,’ he’ll ask us why we didn’t believe him;

영어NRSV,5 They discussed it with one another, saying, “If we say, ‘From heaven,’ he will say, ‘Why did you not believ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5 οι δε συνελογισαντο προς εαυτους λεγοντες οτι εαν ειπωμεν εξ ουρανου ερει διατι ουν ουκ επιστευσατε αυτω

라틴어Vulgate,5 at illi cogitabant inter se dicentes quia si dixerimus de caelo dicet quare ergo non credidistis illi

히브리어Modern,5 ויחשבו בלבם לאמר אם נאמר מן השמים ואמר למה זה לא האמנתם לו׃

성 경: [눅20: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 예수의 질문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은 뜻밖의 공격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이 구절은 산헤드린 대표들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의논하는 그들의 갈등을 묘사해주고 있다. 그들이 고민하는 가장 큰 문제는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할 경우 자신들의 입장 문제이다. 즉 세례 요한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온 권세인줄 알았다면 왜 자신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헤드린 대표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또 국가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불경건함을 노출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에안 데 에이포멘 엨스 안드로폰 호 라오스 하파스 카탈리다세이 헤메스 페페이스메노스 가르 에스틴 요안넨 프로페텐 에이나이

개역개정,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새번역,6 ‘사람에게서 났다’고 말하면, 온 백성이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으니,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칠 것이다.”

우리말성경,6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요한을 예언자라고 믿는 모든 백성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질 것이다.”

가톨릭성경,6 그렇다고 ‘ 사람에게서 왔다.’ 하면, 온 백성이 요한을 예언자로 확신하고 있으니 그들이 돌을 던져 우리를 죽일 것이오.”

영어NIV,6 But if we say, ‘From men,’ all the people will stone us, because they are persuaded that John was a prophet.”

영어NASB,6 “But if we say, ‘From men,’ all the people will stone us to death, for they are convinced that John was a prophet.”

영어MSG,6 if we say ‘humans,’ the people will tear us limb from limb, convinced as they are that John was God’s prophet.”

영어NRSV,6 But if we say, ‘Of human origin,’ all the people will stone us; for they are convinced that John was a prophet.”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αν δε ειπωμεν εξ ανθρωπων πας ο λαος καταλιθασει ημας πεπεισμενος γαρ εστιν ιωαννην προφητην ειναι

라틴어Vulgate,6 si autem dixerimus ex hominibus plebs universa lapidabit nos certi sunt enim Iohannem prophetam esse

히브리어Modern,6 ואם נאמר מבני אדם וסקלנו כל העם בעמדם על דעתם כי יוחנן נביא היה׃

성 경: [눅20: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 그들은 자기들의 체면 때문에 요한의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한 민중들의 믿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그들의 고민은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은 민중들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유대 지도자들이 민중들로부터 돌에 맞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민중들로부터 별로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침으로써 세례 요한이 백성들로부터 받았던 열렬한 지지를 동일하게 얻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와 산헤드린의 대표들은 여차할 경우에는 민중 봉기(民衆蜂起)의 위험가지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함부로 예수를 대할 수 없었고 요한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면 초가(四面楚架)의 위기를 느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은 유대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 살해 음모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카이 아페크리데산 메 에이데나이 포덴

개역개정,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새번역,7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났는지를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7 그래서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우리는 모르겠다.”

가톨릭성경,7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영어NIV,7 So they answered, “We don’t know where it was from.”

영어NASB,7 So they answered that they did not know where it came from.

영어MSG,7 They agreed to concede that round to Jesus and said they didn’t know.

영어NRSV,7 So they answered that they did not know where it came from.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απεκριθησαν μη ειδεναι ποθεν

라틴어Vulgate,7 et responderunt se nescire unde esset

히브리어Modern,7 ויענו לא ידענו מאין׃

성 경: [눅20: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알지 못하노라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서로 토론하여 얻어낸 결론은 ‘알지 못한다’는 대답이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지혜로운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의 권위를 하늘로부터 왔다고 인정해도 자신들의 불신앙이 문제가 되고 사람으로 부터 왔다고 해도 민중들의 분노가 문제가 되니 자신들의 현명치 못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끝내 예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악한 무리들이 참으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몰랐기 때문에 이 같은 대답을 하였다면 그들은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있을 만한 자격이 없는 영적 무지자들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신 그들이 예수의 신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종교적 기존 권익을 고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같은 대답을 하였다면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탐욕자로 종교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사기꾼이라는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함으로써 예수와의 대결에서 완패를 시인한 셈이 되고 말았다.

카이 호 예수스 에이펜 아우토이스 우데 에고 레고 휘민 엔 포이아 엨수시아 타우타 포이오

개역개정,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새번역,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우리말성경,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가톨릭성경,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영어NIV,8 Jesus said, “Neither will I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am doing these things.”

영어NASB,8 And Jesus said to them, “Nor will I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do these things.”

영어MSG,8 Jesus said, “Then neither will I answer your question.”

영어NRSV,8 Then Jesus said to them, “Neither will I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am doing these things.”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ο ιησους ειπεν αυτοις ουδε εγω λεγω υμιν εν ποια εξουσια ταυτα ποιω

라틴어Vulgate,8 et Iesus ait illis neque ego dico vobis in qua potestate haec facio

히브리어Modern,8 ויאמר ישוע אליהם גם אני לא אמר לכם באי זו רשות אני עשה אלה׃

성 경: [눅20:8]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나도…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세 복음서가 똑같이 이와 같은 대답을 전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경우 반문하기 전에 예수께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경우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대답못한 그들에게 예수께서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의 대표를 전면 무시하는 공격적 발언으로도 이해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말씀 속에는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더이상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의사 표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릌사토 데 프로스 톤 라온 레게인 텐 파라볼렌 타우텐 안드로포스 티스 에퓌튜센 암펠로나 카이 엨세데토 아우톤 게오르고이스 카이 아페데메센 크로누스 히카누스

개역개정,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새번역,9 예수께서 백성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오랫동안 멀리 떠나 있었다.

우리말성경,9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

가톨릭성경,9 예수님께서 백성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오랫동안 멀리 떠나 있었다.

영어NIV,9 He went on to tell the people this parable: “A man planted a vineyard, rented it to some farmers and went away for a long time.

영어NASB,9 And He began to tell the people this parable: “A man planted a vineyard and rented it out to vine-growers, and went on a journey for a long time.

영어MSG,9 Jesus told another story to the people: “A man planted a vineyard. He handed it over to farmhands and went off on a trip. He was gone a long time.

영어NRSV,9 He began to tell the people this parable: “A man planted a vineyard, and leased it to tenants, and went to another country for a long time.

헬라어신약Stephanos,9 ηρξατο δε προς τον λαον λεγειν την παραβολην ταυτην ανθρωπος τις εφυτευσεν αμπελωνα και εξεδοτο αυτον γεωργοις και απεδημησεν χρονους ικανους

라틴어Vulgate,9 coepit autem dicere ad plebem parabolam hanc homo plantavit vineam et locavit eam colonis et ipse peregre fuit multis temporibus

히브리어Modern,9 ויחל לדבר אל העם את המשל הזה איש אחד נטע כרם ויתן אתו אל כרמים וילך בדרך מרחוק לימים רבים׃

성 경: [눅20:9]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 이 비유는 19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입을 통해 확인되는 바와 같이 당시 집권자들을 향한 비판적 공격이 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백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오스'(*)는 평민층을 중심으로 하는 ‘오클로스'(*)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말이다. ‘라오스’는 불특정한 대중, 다수의 사람 등으로서 이해되며 일반적인 사람들(people)을 가리키는 집단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의 비유가 성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는 특권층, 집권자, 산헤드린 대표 등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향해 주는 비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 한 사람이…농부들에게 세(貰)로 주고 –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건은 당시 팔레스틴의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어 듣는 이들에게 별 무리없이 쉽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팔레스틴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고서 외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혹은 로마인으로서 팔레스틴에 땅를 사둔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부재 지주로 인한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곤 하였던 것이다. 세(貰)로 주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소유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다만 성도는 이를 관리하는 청지기 내지는 종의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또 타국에 갔다는 말은 주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포도원을 경작하라고 맡겼다는 뜻인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맡은 바 사명을 추구해 나가야 함을 시사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사적 맥락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카이 카이로 에페스테일렌 프로스 투스 게오르구스 둘론 히나 아포 투 카르푸 투 암펠로노스 도수신 아우토 호이 데 게오르고이 엨사페스테일란 아우톤 데이란테스 케논

개역개정,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새번역,10 포도를 거둘 때가 되어서,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 소출 가운데서 얼마를 소작료로 받아 오게 하려고, 종 하나를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우리말성경,10 포도를 수확할 때가 되자 그는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 열매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를 때리고 빈손으로 보내 버렸다.

가톨릭성경,10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포도밭 소출에서 얼마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영어NIV,10 At harvest time he sent a servant to the tenants so they would give him some of the fruit of the vineyard. But the tenants beat him and sent him away empty-handed.

영어NASB,10 “At the harvest time he sent a slave to the vine-growers, so that they would give him some of the produce of the vineyard; but the vine-growers beat him and sent him away empty-handed.

영어MSG,10 In time he sent a servant back to the farmhands to collect the profits, but they beat him up and sent him off empty-handed.

영어NRSV,10 When the season came, he sent a slave to the tenants in order that they might give him his share of the produce of the vineyard; but the tenants beat him and sent him away empty-handed.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ι εν καιρω απεστειλεν προς τους γεωργους δουλον ινα απο του καρπου του αμπελωνος δωσιν αυτω οι δε γεωργοι δειραντες αυτον εξαπεστειλαν κενον

라틴어Vulgate,10 et in tempore misit ad cultores servum ut de fructu vineae darent illi qui caesum dimiserunt eum inanem

히브리어Modern,10 ולמועד שלח עבד אל הכרמים לתת לו מפרי הכרם והכרמים הכהו וישלחהו ריקם׃

성 경: [눅20:10]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때가 이르매 – ‘때'(*, 카이로스)는 시간(time) 또는 어느 한 시점(point of time)이나 시기(period of time)를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를 따 들이는 추수의 때 곧 종말적 심판의 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성도에게는 풍성한 결실과 완성의 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파멸의 때이다.

󰃨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 9절에서 언급된 사실대로 포도원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고 농부들에게는 세로 빌려준 것이기 때문에 추수 때에 소작세를 받기 위해 종을 보냈다고 묘사된다. 이것은 소작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 보다는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비유를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잘 유지되는가 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소작료를 잘 내는 것은 주인과 소작인간의 관계가 좋다는 말이되고 소작료를 거부한다는 말은 주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때문에 종이 온 것은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끊지 않고 계속 유지시키고자 함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선지자들의 주 임무 역시 백성들의 죄악을 회개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데 있었다.

󰃨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 보냈다. 이는 주인과의 계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아울러 이는 9절에서 언급된 포도원의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음에도 그 소유권을 빼앗아 자기들이 갖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위이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모욕을 당했던 선지자들을 연상시키게 한다(렘 7:25,26;25:4;슥 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놀라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불신앙의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비유가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에게로 돌아가는 화살이기도 하다.

카이 프로세데토 헤테론 펨프사이 둘론 호이 데 카케이논 데이란테스 카이 아티마산테스 엨사페스테일란 케논

개역개정,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새번역,11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도 때리고, 모욕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우리말성경,11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종도 때리고 모욕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가톨릭성경,11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도 매질하고 모욕하고 나서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영어NIV,11 He sent another servant, but that one also they beat and treated shamefully and sent away empty-handed.

영어NASB,11 “And he proceeded to send another slave; and they beat him also and treated him shamefully and sent him away empty-handed.

영어MSG,11 He decided to try again and sent another servant. That one they beat black and blue, and sent him off empty-handed.

영어NRSV,11 Next he sent another slave; that one also they beat and insulted and sent away empty-handed.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προσεθετο πεμψαι ετερον δουλον οι δε κακεινον δειραντες και ατιμασαντες εξαπεστειλαν κενον

라틴어Vulgate,11 et addidit alterum servum mittere illi autem hunc quoque caedentes et adficientes contumelia dimiserunt inanem

히브리어Modern,11 ויסף שלח עבד אחר ויכו גם אתו ויחרפהו וישלחהו ריקם׃

성 경: [눅20:11]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 마가복음과 본서는 종의 파송을 단수로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은 복수로 계속 언급한다. 아마 마태는 많은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농부들의 죄악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이 종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거칠고 잔인해진다. 여기서 ‘능욕하다’라는 말은 예수가 체포되어 당하던 모욕을 연상하게 한다(22:63-65;마 26:67-68;막 14:65). 마가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고 묘사하는데 이것 역시 예수가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쓴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마 27:29;막 15:7). 따라서 종이 받는 수난은 마지막 상속자가 받는 죽음으로 집중되고 있으며(14절) 이 같은 수난의 묘사는 곧 닥치게 될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이 프로세데토 트리톤 펨프사이 호이 데 카이 투톤 트라우마티산테스 엨세발론

개역개정,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새번역,12 그래서 주인이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냈더니, 그들은 이 종에게도 상처를 입혀서 내쫓았다.

우리말성경,12 주인은 세 번째 종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 종마저 상처를 입혀 쫓아 보냈다.

가톨릭성경,12 그리고 또 세 번째 종을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도 상처를 입히고 내쫓아 버렸다.

영어NIV,12 He sent still a third, and they wounded him and threw him out.

영어NASB,12 “And he proceeded to send a third; and this one also they wounded and cast out.

영어MSG,12 He tried a third time. They worked that servant over from head to foot and dumped him in the street.

영어NRSV,12 And he sent still a third; this one also they wounded and threw out.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προσεθετο πεμψαι τριτον οι δε και τουτον τραυματισαντες εξεβαλον

라틴어Vulgate,12 et addidit tertium mittere qui et illum vulnerantes eiecerunt

히브리어Modern,12 ויסף לשלח שלישי וגם אתו פצעו ויגרשהו וידחפהו חוצה׃

성 경: [눅20:12]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 농부들은 주인과의 관계를 끊고 계약도 파기하며 주인의 종까지 모욕을 주고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세번째로 그 농부들에게 종을 보내는데 이것은 (1)주인이 농부들에게 보내는 끊없는 신뢰이며, (2)농부들이 회개하여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시이고, (3)농부들의 배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인을 하나님으로 비유 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끝없는 배신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 종이 받는 상처가 점증되고 그냥 돌려 보낸 것이 아니라 ‘내어 쫓아 버렸다’는 표현은 사용함으로써 농부들의 마음이 더욱 완악해진 살기등등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세번째 종 이 외에 많은 종들이 다시 왔음을 밝히면서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고 묘사한다. 마가의 진술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고 보여지는 것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증명하듯이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이 많이 죽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애굽에서의 유배 생활 중에 돌에 맞아 죽었으며 이사야는 톱에 켜여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14절에서 상속자의 죽음을 더욱 극적으로 말하기 위해 종들을 고난 받는 것으로만 묘사한 듯 하다. 또한 누가는 종과 상속자의 죽음을 따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고 또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이 행했던 잔인한 반역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 예수의 죽음까지 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이펜 데 호 퀴리오스 투 암펠로노스 티 포이에소 펨프소 톤 휘온 무 톤 아가페톤 이소스 투톤 엔트라페손타이

개역개정,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새번역,13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말하였다. ‘어떻게 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야겠다. 설마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우리말성경,13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사랑하는 내 아들을 보내야겠다. 아마도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가톨릭성경,13 그래서 포도밭 주인은, ‘ 어떻게 할까? 사랑하는 내 아들을 보내야겠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3 “Then the owner of the vineyard said, ‘What shall I do? I will send my son, whom I love; perhaps they will respect him.’

영어NASB,13 “The owner of the vineyard said, ‘What shall I do? I will send my beloved son; perhaps they will respect him.’

영어MSG,13 “Then the owner of the vineyard said, ‘I know what I’ll do: I’ll send my beloved son. They’re bound to respect my son.’

영어NRSV,13 Then the owner of the vineyard said, ‘What shall I do? I will send my beloved son; perhaps they will respec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3 ειπεν δε ο κυριος του αμπελωνος τι ποιησω πεμψω τον υιον μου τον αγαπητον ισως τουτον ιδοντες εντραπ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13 dixit autem dominus vineae quid faciam mittam filium meum dilectum forsitan cum hunc viderint verebuntur

히브리어Modern,13 ויאמר בעל הכרם מה אעשה אשלחה את בני את ידידי כראותם אותו אולי יגורו מפניו׃

성 경: [눅20:1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 주인은 세번째 종이 상처를 입고 쫓겨오게 되자 비로소 애절한 탄식과 함께 자신의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누가의 표현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주인의 직접 애절하게 탄식하는 모습과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겠다는 결심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누가에 의하면 주인이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하는데 이 탄식은 소작세를 받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안타까움도 아니고, 주인이 보낸 종들의 수난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어떻게 해야 강퍅해진 농부들의 마음이 변하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사실 이것은 모험(冒險)이었다. 왜냐하면 종을 세 번 보내기까지 횟수가 거듭될 수록 농부들의 마음은 굳어지고 종들에 대한 수난도 갈수록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모냈을 경우 이번에는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인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사랑하는'(*, 아가페토스)이라는 단어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only-beloved). 이 단어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서도 사용되었다(3:22). 따라서 이 같은 묘사는 누가의 의도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주인의 탄식과 자신의 아들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곧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를 이 땅에 보냈다는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비유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알레고리적(allegorical)으로 일치시켜져 왔다.

이돈테스 데 아우톤 호이 게오르고이 디엘로기존토 프로스 알렐루스 레곤테스 후토스 에스틴 호 클레로노모스 아포크테이노멘 아우톤 히나 헤몬 게네타이 헤 클레로노미아

개역개정,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새번역,14 그러나 농부들은 그를 보고서, 서로 의논하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여 버리자. 그래서 유산이 우리 차지가 되게 하자.’

우리말성경,14 그러나 농부들은 그를 보자 서로 의논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상속자니 그를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4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 저자가 상속자다.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서로 의논하면서,

영어NIV,14 “But when the tenants saw him, they talked the matter over. ‘This is the heir,’ they said. ‘Let’s kill him, and the inheritance will be ours.’

영어NASB,14 “But when the vine-growers saw him, they reasoned with one another, saying, ‘This is the heir; let us kill him so that the inheritance will be ours.’

영어MSG,14 “But when the farmhands saw him coming, they quickly put their heads together. ‘This is our chance–this is the heir! Let’s kill him and have it all to ourselves.’

영어NRSV,14 But when the tenants saw him, they discussed it among themselves and said, ‘This is the heir; let us kill him so that the inheritance may be ours.’

헬라어신약Stephanos,14 ιδοντες δε αυτον οι γεωργοι διελογιζοντο προς εαυτους λεγοντες ουτος εστιν ο κληρονομος δευτε αποκτεινωμεν αυτον ινα ημων γενηται η κληρονομια

라틴어Vulgate,14 quem cum vidissent coloni cogitaverunt inter se dicentes hic est heres occidamus illum ut nostra fiat hereditas

히브리어Modern,14 וכראות אתו הכרמים נועצו יחדו לאמר זה הוא היורש לכו ונהרגהו ותהי לנו הירשה׃

성 경: [눅20:1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의논하여 – 이 표현은 (*, 디알로기조마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말하되'(*, 레고)보다 훨씬 정밀한 묘사이다. 즉 그들이 서로 모여 자신들의 이익을 어떻게 하든 수호하기 위해 골똘히 대책을 숙의(熟議)하였다는 뜻이다. 이 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는 결국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어떻게 꾸몄는지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 농부들이 의논한 결과는 아예 상속자들 죽여버림으로써 포도원의 소유권을 영구히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의 소유권이 자기들에게 넘어온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농부들은 아들이 자기들에게로 온 것은 주인이 아들에게 소유권을 넘겨 주었다고 믿었거나(E.Bammel) 아니면 아들이 올 때 본래의 주인이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그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부들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주인이 죽은 것도 아니고 상속자 아들을 죽였다고 그 소유권이 자기들에게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핍박자들을 사주(使嗾)하였던 사단은 예수를 죽임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보장받으려 하였으나,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는 다시 살아나사 사단의 무리들을 물리치셨다. 또한 본문은 농부들의 죄악된 탐욕을 여실히 보여준다. 9절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주인과 농부의 관계는 소유주와 소작인의 관계이다. 이것은 서로 간의 계약으로서 농부들이 일정한 세액을 납부하기를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이 계약을 파기하고 소유권을 부당하게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려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약을 인간이 먼저 파기했으며, 청지기적 신분을 망각한 인간의 탐욕이 온갖 범죄의 원인임을 말해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어쨌든 이 비유는 농부로 비유된 당시의 종교.정치 지도자들 또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세상을 추구하려 한 죄악을 폭로한다.

카이 엨발론테스 아우톤 엨소 투 암펠로노스 아페크테이난 티 운 포이에세이 아우토이스 호 퀴리오스 투 암펠로노스

개역개정,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새번역,15 그리하여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바깥으로 내쫓아서 죽였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우리말성경,15 이렇게 해서 그들은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 죽였다. 그렇다면 이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가톨릭성경,15 그를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영어NIV,15 So they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and killed him. “What then will the owner of the vineyard do to them?

영어NASB,15 “So they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and killed him. What, then, will the owner of the vineyard do to them?

영어MSG,15 They killed him and threw him over the fence. “What do you think the owner of the vineyard will do?

영어NRSV,15 So they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and killed him. What then will the owner of the vineyard do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κβαλοντες αυτον εξω του αμπελωνος απεκτειναν τι ουν ποιησει αυτοις ο κυριος του αμπελωνος

라틴어Vulgate,15 et eiectum illum extra vineam occiderunt quid ergo faciet illis dominus vineae

히브리어Modern,15 ויגרשו אותו אל מחוץ לכרם ויהרגהו ועתה מה יעשה להם בעל הכרם׃

성 경: [눅20:1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 이 구절은 비유의 클라이막스(climax)라고 할 수 있는데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아들을 죽인 다음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포도원 밖으로 끌고가 죽인 것으로 묘사한다. 이 구절은 아들이 포도원 안이 아닌 밖에서 죽었다고 묘사함으로써 예수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사실을 암시한다. 포도원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 및 그들에게 약속된 모든 축복으로부터 차단시키고자 하는 음흉한 계획을 추진해 나갔으며, 예수는 이 모든 궤계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받으셨던 것이다(히 13:12).

󰃨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 이 구절은 청중들로부터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도성 질문이다. 즉 결론이 어떻게 날지 자명해진 시점에서 질문을 함으로써 청중 모두가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며 곧이어 내릴 결론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마태는 청중들이 결론을 직접 말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마 21:41).

엘류세타이 카이 아폴레세이 투스 게오르구스 투투스 카이 도세이 톤 암펠로나 알로이스 아쿠산테스 데 에이판 메 게노이토

개역개정,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새번역,16 주인은 와서 그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 말하였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말성경,16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농부들에게 줄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말했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성경,16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6 He will come and kill those tenants and give the vineyard to others.” When the people heard this, they said, “May this never be!”

영어NASB,16 “He will come and destroy these vine-growers and will give the vineyard to others.”When they heard it, they said, ” May it never be!”

영어MSG,16 Right. He’ll come and clean house. Then he’ll assign the care of the vineyard to others.” Those who were listening said, “Oh, no! He’d never do that!”

영어NRSV,16 He will come and destroy those tenants and give the vineyard to others.” When they heard this, they said, “Heaven forbid!”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λευσεται και απολεσει τους γεωργους τουτους και δωσει τον αμπελωνα αλλοις ακουσαντες δε ειπον μη γενοιτο

라틴어Vulgate,16 veniet et perdet colonos istos et dabit vineam aliis quo audito dixerunt illi absit

히브리어Modern,16 יבוא ויאבד את הכרמים האלה ויתן את הכרם לאחרים ויהי כשמעם ויאמרו חלילה מהיות כזאת׃

성 경: [눅20:1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 여기서 주인이 내린 두 가지 조치가 언급되는데 이는 농부들이 저질러온 죄악에 대한 심판의 징벌로서 그들을 진멸시키겠다는 선언이다. 따라서 이는 첫째, 농부들이 상징하는 산헤드린의 대표들에 대한 전면적인 응징(應懲)을 선언하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거부하고 공격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기도 하다. 두번째, 다른 사람에게 포도밭을 맡기겠다는 가언을 하고 있는데 포도밭을 이스라엘이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같은 사실이 실제로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같은 사실이 실제로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성취된 바 있다. 나아가 이 비유를 신앙의 문제로 연결지어 해석할 경우 예루살렘이라는 제한된 장소와 시간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하나님의 아들(요 1:1-12)을 끝내 배척하는 자는 인간적인 파멸 뿐만 아니라 악의 세력에 노예가 될 것이라고 경고로서 이해된다.

󰃨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 그와 같이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원을 표현하는 누가만의 묘사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메 게노이토'(*)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부정적 소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독특한 표현으로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롬 3:4,6,31). 즉 청중들이 안타깝고 간절한 바램으로 요청하는 말이다.

호 데 엠블렢사스 아우토이스 에이펜 티 운 에스틴 토 게그람메논 투토 리돈 혼 아페도키마산 호이 오이코도문테스 후토스 에게네데 에이스 케팔렌 고니아스

개역개정,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새번역,17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시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고 기록된 말은 무슨 뜻이냐? / ㉢시 118:22 ㉣또는 ‘모퉁이 돌’

우리말성경,17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됐다’라고 기록된 말씀이 무슨 뜻이겠느냐? 시118:22

가톨릭성경,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말씀하셨다. “ 그러면 이렇게 기록된 말씀은 무슨 뜻이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영어NIV,17 Jesus looked directly at them and asked, “Then what is the meaning of that which is written: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영어NASB,17 But Jesus looked at them and said, “What then is this that is written: ‘THE STONE WHICH THE BUILDERS REJECTED, THIS BECAME THE CHIEF CORNER stone’?

영어MSG,17 But Jesus didn’t back down. “Why, then, do you think this was written: That stone the masons threw out– It’s now the cornerstone!?

영어NRSV,17 But he looked at them and said, “What then does this text mean: ‘The stone that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ornerstone’?

헬라어신약Stephanos,17 ο δε εμβλεψας αυτοις ειπεν τι ουν εστιν το γεγραμμενον τουτο λιθον ον απεδοκιμασαν οι οικοδομουντες ουτος εγενηθη εις κεφαλην γωνιας

라틴어Vulgate,17 ille autem aspiciens eos ait quid est ergo hoc quod scriptum est lapidem quem reprobaverunt aedificantes hic factus est in caput anguli

히브리어Modern,17 ויבט בם ויאמר ומה הוא זה הכתוב אבן מאסו הבונים היתה לראש פנה׃

성 경: [눅20:1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시 118:22을 인용한 문구인데 16절에서 언급된 결론과 청중들의 반응에 대한 추가적 대답이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비유가 주는 교훈을 더욱 명료하게한다. 이 비유 역시 상징적 의미로서 건축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경고와 좋은 돌은 한때 버려졌을지라도 다시 발견되어 머릿돌로 쓰여지게 된다는 필연성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여기서 건축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비유에서 주인의 종과 아들을 배척하고 죽인 농부들을 상징하며 사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예수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의미(행 2:36)이다.

파스 호 페손 엪 에케이논 톤 리돈 쉰들라스데세타이 엪 혼 드 안 페세 맄메세이 아우톤

개역개정,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새번역,18 누구든지 그 돌 위에 떨어지면, 그는 부스러질 것이요, 그 돌이 어느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우리말성경,18 누구든지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마다 부서질 것이며 이 돌이 어느 사람 위에 떨어지든지 맞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가톨릭성경,18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나 부서지고, 그 돌에 맞는 자는 누구나 으스러질 것이다.”

영어NIV,18 Everyone who falls on that stone will be broken to pieces, but he on whom it falls will be crushed.”

영어NASB,18 “Everyone who falls on that stone will be broken to pieces; but on whomever it falls, it will scatter him like dust.”

영어MSG,18 “Anyone falling over that stone will break every bone in his body; if the stone falls on anyone, it will be a total smashup.”

영어NRSV,18 Everyone who falls on that stone will be broken to pieces; and it will crush anyone on whom it falls.”

헬라어신약Stephanos,18 πας ο πεσων επ εκεινον τον λιθον συνθλασθησεται εφ ον δ αν πεση λικμησει αυτον

라틴어Vulgate,18 omnis qui ceciderit supra illum lapidem conquassabitur supra quem autem ceciderit comminuet illum

히브리어Modern,18 כל הנפל על האבן ההיא ישבר ואת אשר תפל עליו תשחקהו׃

성 경: [눅20:18]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 심판과 돌을 연관지어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격언구 형식의 이 구절은 사 8:14,15과 단 2:34,44,45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표현은 항아리 따위의 물건이 돌 위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듯이 사람도 산산이 부서져 파멸에 이른다는 말이다. 문맥상으로 여기서 돌 위에 떨어져 부서지는 형국에 처해질 사람은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깨어지겠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들라스데세타이'(*)는 ‘산산이 부수다’는 뜻의 ‘쉰들라오'(*)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으로 예수와 그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의 말로(末路)가 어떠할 것인지를 잘 나타낸다.

󰃨 이 돌이…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 이 표현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반대 형식으로 묘사된 심판 계시이다. 즉 사람이 돌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에게 돌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앞의 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것이다. 이 같은 표현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도록 완전한 파멸을 강조하는 말로서 앞의 묘사에 비해 심판의 철저함과 적극성이 강조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악인들이 자기 모순 속에서 스스로 멸망하는 심판을 나타내며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마지막 날 예수께서 친히 불신의 세력을 철저히 파멸시키실 것을 뜻한다. 이 같은 비유는 초기 기독교인 들에게 자신들에게 임한 핍박과 고난을 예수의 고난과 동일시하면서 인내케 하며 또한 종말의 때의 통쾌한 승리를 약속하는 복음으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카이 에제테산 호이 그람마테이스 카이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에피발레인 엪 아우톤 타스 케이라스 엔 아우테 테 호라 카이 에포베데산 톤 라온 에그노산 가르 호티 프로스 아우투스 에이펜 텐 파라볼렌 타우텐

개역개정,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새번역,19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가 자기네들을 겨냥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그 때에 예수께 손을 대어 잡으려고 하였으나,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우리말성경,19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 것을 알고 당장 예수를 체포할 방도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가톨릭성경,19 율법 학자들과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당장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하였으나 백성이 두려웠다.

영어NIV,19 The teachers of the law and the chief priests looked for a way to arrest him immediately, because they knew he had spoken this parable against them. But they were afraid of the people.

영어NASB,19 The scribes and the chief priests tried to lay hands on Him that very hour, and they feared the people; for they understood that He spoke this parable against them.

영어MSG,19 The religion scholars and high priests wanted to lynch him on the spot, but they were intimidated by public opinion. They knew the story was about them.

영어NRSV,19 When the scribes and chief priests realized that he had told this parable against them, they wanted to lay hands on him at that very hour, but they feared th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εζητησαν οι αρχιερεις και οι γραμματεις επιβαλειν επ αυτον τας χειρας εν αυτη τη ωρα και εφοβηθησαν τον λαον εγνωσαν γαρ οτι προς αυτους την παραβολην ταυτην ειπεν

라틴어Vulgate,19 et quaerebant principes sacerdotum et scribae mittere in illum manus illa hora et timuerunt populum cognoverunt enim quod ad ipsos dixerit similitudinem istam

히브리어Modern,19 ויבקשו הכהנים הגדולים והסופרים לשלח בו את ידם בעת ההיא וייראו מפני העם כי ידעו אשר עליהם דבר את המשל הזה׃

성 경: [눅20:19]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들 두려워하더라 – 19:47,48에서 언급된 내용과 비슷하다. 19:47,48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유대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되어 있는 군중들 때문에 예수를 죽이지 못한다고 하는 똑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예수는 일반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셨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관해 본질적으로 오해하고는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전폭적인 지지의 환호를 보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기득권자들은 예수의 언행이 매우 도전적이고 선동적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했을 것이 분명하다.

카이 파라테레산테스 아페스테일란 엥카데투스 휘포크리노메누스 헤아우투스 디카이우스 에이나이 히나 에필라본타이 아우투 로구 호스테 파라두나이 아우톤 테 아르케 카이 테 엨수시아 투 헤게모노스

개역개정,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새번역,20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정탐꾼들을 보내서, 이들이 거짓으로 의로운 사람들인 체 행세하면서 예수께로 접근하게 하여, 그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를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겨주려고 하였다.

우리말성경,20 기회를 엿보던 그들은 첩자들을 보내어 의로운 사람들인 체 행동하도록 꾸미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에 트집을 잡아 결국 권력 있는 총독에게 넘겨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20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선량한 사람처럼 꾸민 앞잡이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말씀을 빌미로 그분을 붙잡게 하였다. 예수님을 직권과 사법권을 가진 총독에게 넘기려는 것이었다.

영어NIV,20 Keeping a close watch on him, they sent spies, who pretended to be honest. They hoped to catch Jesus in something he said so that they might hand him over to the power and authority of the governor.

영어NASB,20 So they watched Him, and sent spies who pretended to be righteous, in order that they might catch Him in some statement, so that they could deliver Him to the rule and the authority of the governor.

영어MSG,20 Watching for a chance to get him, they sent spies who posed as honest inquirers, hoping to trick him into saying something that would get him in trouble with the law.

영어NRSV,20 So they watched him and sent spies who pretended to be honest, in order to trap him by what he said, so as to hand him over to the jurisdiction and authority of the governor.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παρατηρησαντες απεστειλαν εγκαθετους υποκρινομενους εαυτους δικαιους ειναι ινα επιλαβωνται αυτου λογου εις το παραδουναι αυτον τη αρχη και τη εξουσια του ηγεμονος

라틴어Vulgate,20 et observantes miserunt insidiatores qui se iustos simularent ut caperent eum in sermone et traderent illum principatui et potestati praesidis

히브리어Modern,20 ויארבו לו וישלחו מארבים והם נדמו כצדיקים למען ילכדו אותו בדבר להסגירו אל השררה ואל יד ההגמון׃

성 경: [눅20:20]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 마태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라고 문장의 주어를 밝히고 있는데 반해 누가는 주어를 밝히지 않는다. ‘엿보다’라는 말은 주의깊게 몰래 지켜보는 것을 뜻하며 문맥상으로 볼 때 예수의 약점을 책(責)잡아 공격하려고 ‘호시 탐탐(虎視耽耽)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라는 뜻이다.

󰃨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 2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해 처음 짜낸 묘안은 종교적 가르침의 권위를 문제삼으려 그를 책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문제로 예수를 문제삼았다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1-8절) 허다한 군중들이 예수를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힘으로 예수를 처치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당시 죄수에 대한 사형권은 로마 정부의 고유 권한이었기 때문에 설령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대법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조작한다해도 함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의 정치적인 힘을 빌어 예수를 제거하고자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 정탐들을 보내어…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 1,2절에서 산헤드린의 대표들이 직접 예수를 심문하듯이 공격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정탐이라고 표현되는 특정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책잡고자 나타난다.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을 종합하면 산헤드린 대표들이 보낸 정탐꾼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이었다(마 22:15;막 12:13). 이 두 당파는 대개의 경우 서로 뿌리깊은 반감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일치 단결하고 있다. 예수는 이들에게 있어 기득권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요 공통의 타도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른 발을 지닌 악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잠 1:16).

카이 에페로테산 아우톤 레곤테스 디다스칼레 오이다멘 호티 오르도스 레게이스 카이 디다스케이스 카이 우 람바네이스 프로소폰 알 엪 알레데이아스 텐 호돈 투 데우 디다스케이스

개역개정,2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새번역,21 그들은 예수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계시는 줄 압니다.

우리말성경,21 첩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옳은 줄 저희가 압니다. 또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언제나 진리에 따라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시는 것도 압니다.

가톨릭성경,21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올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가리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신다는 것을 압니다.

영어NIV,21 So the spies questioned him: “Teacher, we know that you speak and teach what is right, and that you do not show partiality but teach the way of God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영어NASB,21 They questioned Him, saying, “Teacher, we know that You speak and teach correctly, and You are not partial to any, but teach the way of God in truth.

영어MSG,21 So they asked him, “Teacher, we know that you’re honest and straightforward when you teach, that you don’t pander to anyone but teach the way of God accurately.

영어NRSV,21 So they asked him, “Teacher, we know that you are right in what you say and teach, and you show deference to no one, but teach the way of God in accordance with truth.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επηρωτησαν αυτον λεγοντες διδασκαλε οιδαμεν οτι ορθως λεγεις και διδασκεις και ου λαμβανεις προσωπον αλλ επ αληθειας την οδον του θεου διδασκεις

라틴어Vulgate,21 et interrogaverunt illum dicentes magister scimus quia recte dicis et doces et non accipis personam sed in veritate viam Dei doces

히브리어Modern,21 וישאלהו לאמר רבי ידענו כי נכונה תדבר ותלמד ולא תשא פנים כי באמת מורה אתה את דרך אלהים׃

성 경: [눅20:21]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우리가 아노니…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 정탐꾼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당신’이라고 호칭했던 것과는(2절) 달리 ‘선생님’이라는 정중한 말을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들어 칭찬한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간교한 술책(術策)의 일환이었다.

󰃨 사람을…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첫째는 20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들이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즉 자신들이 예수의 말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특히 예수의 가르침이 참으로 정직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이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된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위선적인 말이다. 둘째는 이 같은 칭찬의 말을 통해 예수를 인정하고 추종하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여 예수를 안심시키고 자기들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려는 유도성 질문을 하기위한 연막(煙幕)이라고 할 수 있다.

엨세스틴 헤마스 카이사리 포론 두나이 에 우

개역개정,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새번역,22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우리말성경,22 저희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가톨릭성경,22 그런데 저희가 황제에게 조세를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영어NIV,22 Is it right for us to pay taxes to Caesar or not?”

영어NASB,22 “Is it lawful for us to pay taxes to Caesar, or not?”

영어MSG,22 Tell us: Is it lawful to pay taxes to Caesar or not?”

영어NRSV,22 Is it lawful for us to pay taxes to the emperor, or not?”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ξεστιν ημιν καισαρι φορον δουναι η ου

라틴어Vulgate,22 licet nobis dare tributum Caesari an non

히브리어Modern,22 המתר לנו לתת מס אל הקיסר אם לא׃

성 경: [눅20:22]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 – 여기서 특별히 가이사(Caesar)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를 무력적으로 지배하면서 높은 세금을 징수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깊은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같은 민족 감정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말하게 함으로써 예수를 로마 쪽이나 유대 쪽으로부터 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진퇴 양난식(進退兩難式)의 교묘한 질문이다. 민족 감정으로 첨예하게 드러나 있는 지배국에 대한 세금 납부 문제는 초기 단계에 이미 유대인의 저항을 불러 일으킨 바있다(I.H.Marshall). 예수 당시에 유대인의 반(反) 로마적 감정은 세금 징수 문제에 있어 큰 반발심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정탐꾼은 자신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인 것처럼 가장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당연하게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반대로 친로마적 발언을 한다면 예수를 환호했던 대다수 무리들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20절의 내용으로 보아 그들은 반로마적 대답을 기대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언급된 ‘가이사'(Caesar)는 ‘시이저’라고도 발음되는데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서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때부터 유래되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납부해야 할 세금은 인두세, 관세 등 각종 세액이 있었는데 그 세금은 수입의 1/3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로마가 요구하는 세금 중 인두세(人頭稅)가 악명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인두세는 14-65세까지 해당되는 모든 남자와 12-65세까지 이르는 모든 여자에게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다.

카타노에사스 데 아우톤 텐 파누르기안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개역개정,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새번역,23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채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말성경,23 예수께서 그들의 겉과 속이 다름을 꿰뚫어보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3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교활한 속셈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영어NIV,23 He saw through their duplicity and said to them,

영어NASB,23 But He detected their trickery and said to them,

영어MSG,23 He knew they were laying for him and said,

영어NRSV,23 But he perceived their craftiness and said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τανοησας δε αυτων την πανουργιαν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τι με πειραζετε

라틴어Vulgate,23 considerans autem dolum illorum dixit ad eos quid me temptatis

히브리어Modern,23 ויכר את נכליהם ויאמר להם׃

성 경: [눅20:2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그 간계(奸計)를 아시고 – 예수의 판단 형식을 빌어 질문하는 자들의 의도를 말해주는 이 구절은 20절의 설명을 상기시키며 사람의 깊은 의중을 간파하시는 예수의 전지성을 보여준다. 마가는 ‘간계’대신 ‘외식’으로 또한 마태는 ‘악함’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를 책잡으려는 정탐꾼들에 대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가와 마태는 이 같은 평가 후 예수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묘사하여 공개적으로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폭로하신 사실까지 언급하였다.

데잌사테 모이 데나리온 티노스 에케이 에이코나 카이 에피그라펜 호이 데 에이판 카이사로스

개역개정,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새번역,24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보여다오. 이 돈에 누구의 얼굴상과 글자가 새겨져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4 “데나리온을 나에게 보여 다오. 동전에 있는 얼굴과 새겨진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가톨릭성경,24 “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보여라. 누구의 초상과 글자가 새겨져 있느냐?” 그들이 “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영어NIV,24 “Show me a denarius. Whose portrait and inscription are on it?”

영어NASB,24 “Show Me a denarius. Whose likeness and inscription does it have?” They said, “Caesar’s.”

영어MSG,24 “Show me a coin. Now, this engraving, who does it look like and what does it say?”

영어NRSV,24 “Show me a denarius. Whose head and whose title does it bear?” They said, “The emperor’s.”

헬라어신약Stephanos,24 επιδειξατε μοι δηναριον τινος εχει εικονα και επιγραφην αποκριθεντες δε ειπον καισαρος

라틴어Vulgate,24 ostendite mihi denarium cuius habet imaginem et inscriptionem respondentes dixerunt Caesaris

히브리어Modern,24 מה תנסוני הראוני דינר של מי הצורה והמכתב אשר עליו ויענו ויאמרו של הקיסר׃

성 경: [눅20:2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 이같은 예수의 요구는 로마에 납부하는 세금의 정당성에 관한 질문에 대한 첫 대답인데 이 요구로 보아 한 데나리온은 일상적으로 지니고 다닐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의 화폐인 것으로 보인다. ‘데나리온’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로마 화폐이다. 헬라 화폐 ‘므나’의 1/100에 해당되며 유대 화폐 ‘세겔’의 1/4정도에 해당되는 단위인데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당시에 사용되었다. 또 잘 알려진 헬라 화폐 ‘달란트’의 1/6,000에 해당되는 가치를 갖고 있었다. 예수가 여기서 한 데나리온을 요구한 것은 아마도 당시에 로마에서 부과하던 인두세가 백성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던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셨던 것같다.

󰃨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당시에는 어느 나라가 새로 세워지거나 왕이 새로 즉위하면 새 왕의 화상(畵像)을 넣은 돈을 만들었다. 또한 그것들이 유통되는 곳에서는 세금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데나리온 주화에는 당시 황제 가이사 디베리우스(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그 주화의 글귀는 황제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의 어머니가 여신으로서 묘사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 로마 주화에 그려진 황제의 얼굴은 종교적 권위가 부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E.Stauffer).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화폐를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기를 꺼려했었다.

호 데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토이뉜 아포도테 타 카이사로스 카이사리 카이 타 투 데우 토 데오

개역개정,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새번역,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우리말성경,25 그들은 “가이사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가톨릭성경,25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영어NIV,25 “Caesar’s,” they replied. He said to them, “Then 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영어NASB,25 And He said to them, “Then render to Caesar the things that are Caesar’s, and 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영어MSG,25 “Caesar,” they said. Jesus said, “Then give Caesar what is his and give God what is his.”

영어NRSV,25 He said to them, “Then give to the emperor the things that are the emperor’s, and 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헬라어신약Stephanos,25 ο δε ειπεν αυτοις αποδοτε τοινυν τα καισαρος καισαρι και τα του θεου τω θεω

라틴어Vulgate,25 et ait illis reddite ergo quae Caesaris sunt Caesari et quae Dei sunt Deo

히브리어Modern,25 ויאמר אליהם לכן תנו לקיסר את אשר לקיסר ולאלהים את אשר לאלהים׃

성 경: [눅20:2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 두 문장이 극적으로 대립되어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켜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양극적 언급을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이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정교 분리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롬 13:1-7과 더불어 그리스도 인들이 지녀야 할 국가 또는 사회 권력에 대한 합당한 자세를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삶의 실제적인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논리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훼손시키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는 철저하게 로마로부터 지배받아 사회.문화.종교 문제까지 위협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정신적. 종교적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의 이야기를 로마의 것과 유대의 것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즉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로 돌려주고 유대의 것은 유대에게 돌려 놓으라는 말이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역시 로마 황제의 소유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온도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 유대의 정신을 유대인의 것으로 돌려 놓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발언은 양 극을 피해가는 기회주의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민족주의의 한계속에 제한된 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놓으라는 강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다면 또는 ‘가이사’로 불려지는 황제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면(사실 당시 ‘가이사’의 권위는 가히 신적이었다) 그 권위를 하나님에게로 돌려 놓고 가이사의 것만 가이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상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바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이 세상의 돌하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이사의 왕국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응답이 갖는 비판적 의미 때문에 예수를 고발했던 사람들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한 사람이라고 증언하게 된다(23:2).

카이 우크 이스퀴산 에필라베스다이 아우투 레마토스 에난티온 투 라우 카이 다우마산테스 에피 테 아포크리세이 아우투 에시게산

개역개정,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새번역,26 그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의 말씀을 책잡지 못하고, 그의 답변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우리말성경,26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말씀에 트집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대답에 놀라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가톨릭성경,26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빌미로 백성 앞에서 그분을 붙잡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답변에 경탄하며 입을 다물었다.

영어NIV,26 They were unable to trap him in what he had said there in public. And astonished by his answer, they became silent.

영어NASB,26 And they were unable to catch Him in a saying in the presence of the people; and being amazed at His answer, they became silent.

영어MSG,26 Try as they might, they couldn’t trap him into saying anything incriminating. His answer caught them off guard and left them speechless.

영어NRSV,26 And they were not able in the presence of the people to trap him by what he said; and being amazed by his answer, they became silent.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ουκ ισχυσαν επιλαβεσθαι αυτου ρηματος εναντιον του λαου και θαυμασαντες επι τη αποκρισει αυτου εσιγησαν

라틴어Vulgate,26 et non potuerunt verbum eius reprehendere coram plebe et mirati in responso eius tacuerunt

히브리어Modern,26 ולא יכלו ללכדו בדבר לפני העם ויתמהו על מענהו ויחרישו׃

성 경: [눅20:2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한 또 한 차례의 노력과 음모가 실패로 끝나는 장면이다. 그들이 예수를 책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 예수의 답변이 책잡기 위해 질문했던 자들의 수준을 크게 넘어섰기 때문에 그들이 당황하였고 둘째, 예수의 답변이 단순히 세금을 내고 안내고 하는 문제를 넘어서 원천적으로 해결해야 될 근본적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 주위에 함께한 무리들이 예수의 발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있었으며 그 분위기가 압도적인 것이어서 더이상 말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의 답변에 기이히 여겼다고 언급되는데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는 ‘놀라다’ 혹은 ‘칭송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답변이 합리적이며 반론의 여지가 없어서 청중들 가운데 긍정적으로 수용되면서 그 지혜에 놀랐다는 말이다.

프로셀돈테스 데 티네스 톤 삳두카이온 호이 안티레곤테스 아나스타신 메 에이나이 에페로테산 아우톤

개역개정,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새번역,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물었다.

우리말성경,27 부활이란 없다고 말하는 어떤 사두개파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가톨릭성경,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영어NIV,27 Some of the Sadducees,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came to Jesus with a question.

영어NASB,27 Now there came to Him some of the Sadducees (who say that there is no resurrection),

영어MSG,27 Some Sadducees came up. This is the Jewish party that denies any possibility of resurrection. They asked,

영어NRSV,27 Some Sadducees, those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came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7 προσελθοντες δε τινες των σαδδουκαιων οι αντιλεγοντες αναστασιν μη ειναι επηρωτησα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27 accesserunt autem quidam Sadducaeorum qui negant esse resurrectionem et interrogaverunt eum

히브리어Modern,27 ויקרבו אנשים מן הצדוקים הכפרים בתחית המתים וישאלהו לאמר׃

성 경: [눅20:2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 본문의 사두개인들이 산헤드린의 명을 받고 고의적인 공격 의도로 왔는지 아니면 종교상의 진지한 논의를 위해 왔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그들도 예수께 대한 공격적 의도로 질문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태는 ‘그 날에’라는 단어를 사용해 앞서 소개되었던 세금에 관한 논쟁과 같은 날에 이 사건이 있었음을 시사한다(마 22:23). 한편 사두개파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게 기원된(삼하 8:17) 집단으로서 하스모니안 시대 때(B.C.166-163) 구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들은 특히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전승 문서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유대 사회내의 소수 집단이었지만 부유한 지배 계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현실주의자라는 별명과 함께 로마의 통치에 협력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했던 무리들이었는데 예루살렘 함락(A.D. 70)과 함께 몰락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 중 독특한 것은 부활과 영(spirit)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Josephus, Antiq., 13.10.6).

레곤테스 디다스칼레 모위세스 에그랖센 헤민 에안 티노스 아델포스 아포다네 에콘 귀나이카 카이 후토스 아테크노스 에 히나 라베 호 아델포스 아우투 텐 귀나이카 카이 엨사나스테세 스페르마 토 아델포 아우투

개역개정,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새번역,28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남겨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형수를 맞아들여서 뒤를 이을 아들을 자기 형에게 세워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28 그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모세의 기록에 따르면 ‘형이 자식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과부가 된 형수와 결혼해 형 대신 자식을 낳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28 “ 스승님, 모세는 ‘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영어NIV,28 “Teacher,” they said, “Moses wrote for us that if a man’s brother dies and leaves a wife but no children, the man must marry the widow and have children for his brother.

영어NASB,28 and they questioned Him, saying, “Teacher, Moses wrote for us that IF A MAN’S BROTHER DIES, having a wife, AND HE IS CHILDLESS, HIS BROTHER SHOULD MARRY THE WIFE AND RAISE UP CHILDREN TO HIS BROTHER.

영어MSG,28 “Teacher, Moses wrote us that if a man dies and leaves a wife but no child, his brother is obligated to take the widow to wife and get her with child.

영어NRSV,28 and asked him a question, “Teacher, Moses wrote for us that if a man’s brother dies, leaving a wife but no children, the man shall marry the widow and raise up children for his br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28 λεγοντες διδασκαλε μωσης εγραψεν ημιν εαν τινος αδελφος αποθανη εχων γυναικα και ουτος ατεκνος αποθανη ινα λαβη ο αδελφος αυτου την γυναικα και εξαναστηση σπερμα τω αδελφω αυτου

라틴어Vulgate,28 dicentes magister Moses scripsit nobis si frater alicuius mortuus fuerit habens uxorem et hic sine filiis fuerit ut accipiat eam frater eius uxorem et suscitet semen fratri suo

히브리어Modern,28 מורה משה כתב לנו כי ימות אח בעל אשה ובנים אין לו ולקח אחיו את אשתו והקים זרע לאחיו׃

성 경: [눅20:28]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 이 사람들도 역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적대적 감정이 없는 듯이 말문을 열고 있지만 실상은 이어지는 질문을 통해 선생으로서의 주님의 권위를 깡그리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께서 부활을 인정하신다고 판단하고서 나름대로 철저한 반대 논리를 펴고자 했다. 기실 그들은 부활에 관한 문제를 놓고 바리새인 등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첨예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 대해서도 자신만만한 투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논거로서 언급한 내용은 신 25:5-10에 나타난 계대 결혼(繼代結婚)에 관한 법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남편이 자식 없이 죽을 경우 시동생과 그 과부가 재혼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재혼을 통해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자손을 잇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모세 율법과 부활 교리와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관습을 근거로 들고 나왔다.

헾타 운 아델포이 에산 카이 호 프로토스 라본 귀나이카 아페다넨 아테크노스

개역개정,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새번역,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얻어서 살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우리말성경,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서 살다가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가톨릭성경,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영어NIV,29 Now there were seven brothers. The first one married a woman and died childless.

영어NASB,29 “Now there were seven brothers; and the first took a wife and died childless;

영어MSG,29 Well, there once were seven brothers. The first took a wife. He died childless.

영어NRSV,29 Now there were seven brothers; the first married, and died childless;

헬라어신약Stephanos,29 επτα ουν αδελφοι ησαν και ο πρωτος λαβων γυναικα απεθανεν ατεκνος

라틴어Vulgate,29 septem ergo fratres erant et primus accepit uxorem et mortuus est sine filiis

히브리어Modern,29 והנה היו שבעה אחים והראשון לקח אשה וימת לא בנים׃

성 경: [눅20:29,30,31,32,3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 그들이 계대 결혼과 부활의 모순을 말하기 위해 전제된 이야기가 29-32절의 내용이다. 즉 일곱 형제가 있는 집안에서 결혼한 맏형이 죽게되자 전통과 율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의 남편이 되었는데 그러기를 일곱 회나 반복하여 이 여인은 일곱의 남편이 생긴 셈이되었다. 마침내 이 여인도 죽었는데 문제는 모두 죽어서 다시 부활했을 때 한 여인이 일곱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있다. 그렇다면 부활 후 어느 한 사람이 진짜 남편이 되어야 하는데 일부일처제가 옳다고 생각되는 상황하에서 일곱 명의 형제 중 누가 그 여인의 남편이 되겠느냐하는 질문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었는지 가상적인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생이 미망인인 형수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수혼(嫂婚) 제도의 상황하에서 이 질문은 상당히 진지하고 흥미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질문을 던진 사두개인들은 논쟁의 승리를 확신하고서 아마 속으로 예수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질문에 따라 일곱 형제 중 어느 한 명을 택하여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것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 거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 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식의 객관적 자세에서 나온 진지한 물음이 아니라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아예 단정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 물음에는 마치 그 미망인이 부활시에는 반드시 일곱 형제 중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된다는 것처럼 윽박지르는 느낌이 담겨 있다. 그것은 현세의 삶과 동일선상에 두고자 하는 전제 자체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 호 듀테로스

개역개정,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새번역,30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고,

우리말성경,30 그리고 둘째가 형수를 아내로 얻어 살다가 역시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가톨릭성경,30 그래서 둘째가,

영어NIV,30 The second

영어NASB,30 and the second

영어MSG,30 The second married her and died,

영어NRSV,30 then the second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ελαβεν ο δευτερος την γυναικα και ουτος απεθανεν ατεκνος

라틴어Vulgate,30 et sequens accepit illam et ipse mortuus est sine filio

히브리어Modern,30 ויקח אתה השני וימת גם הוא לא בנים׃

카이 호 트리토스 엘라벤 아우텐 호사우토스 데 카이 호이 헾타 우 카텔리폰 테크나 카이 아페다논

개역개정,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새번역,31 그 다음에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다 그렇게 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우리말성경,31 그 다음에 셋째가 그 형수와 결혼했고 이런 식으로 해서 일곱째까지 다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가톨릭성경,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영어NIV,31 and then the third married her, and in the same way the seven died, leaving no children.

영어NASB,31 and the third married her; and in the same way all seven died, leaving no children.

영어MSG,31 then the third, and eventually all seven had their turn, but no child.

영어NRSV,31 and the third married her, and so in the same way all seven died childless.

헬라어신약Stephanos,31 και ο τριτος ελαβεν αυτην ωσαυτως δε και οι επτα ου κατελιπον τεκνα και απεθανον

라틴어Vulgate,31 et tertius accepit illam similiter et omnes septem et non reliquerunt semen et mortui sunt

히브리어Modern,31 ויקח אתה השלישי וככה עשו אף השבעה ולא הניחו בנים וימותו׃

휘스테론 카이 헤 귀네 아페다넨

개역개정,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새번역,32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우리말성경,32 그리고 마침내 그 여인도 죽었습니다.

가톨릭성경,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영어NIV,32 Finally, the woman died too.

영어NASB,32 (없음)

영어MSG,32 After all that, the wife died.

영어NRSV,32 Finally the woman also died.

헬라어신약Stephanos,32 υστερον δε παντων απεθανεν και η γυνη

라틴어Vulgate,32 novissima omnium mortua est et mulier

히브리어Modern,32 ובאחרונה מתה גם האשה׃

헤 귀네 운 엔 테 아나스타세이 티노스 아우톤 귀네타이 귀네 호이 가르 헾타 에스콘 아우텐 귀나이카

개역개정,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새번역,33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우리말성경,33 그렇다면 일곱 형제가 모두 이 여인과 결혼했으니 부활 때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가톨릭성경,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영어NIV,33 Now then, at the resurrection whose wife will she be, since the seven were married to her?”

영어NASB,33 “In the resurrection therefore, which one’s wife will she be? For all seven had married her.”

영어MSG,33 That wife, now–in the resurrection whose wife is she? All seven married her.”

영어NRSV,33 In the resurrection, therefore, whose wife will the woman be? For the seven had married her.”

헬라어신약Stephanos,33 εν τη ουν αναστασει τινος αυτων γινεται γυνη οι γαρ επτα εσχον αυτην γυναικα

라틴어Vulgate,33 in resurrectione ergo cuius eorum erit uxor siquidem septem habuerunt eam uxorem

히브리어Modern,33 והנה בתחית המתים למי מהם תהיה לאשה כי היתה אשה לשבעה׃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 호이 휘오이 투 아이오노스 투투 가무신 카이 가미스콘타이

개역개정,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새번역,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우리말성경,3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간다.

가톨릭성경,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영어NIV,34 Jesus replied, “The people of this age marry and are given in marriage.

영어NASB,34 Jesus said to them, “The sons of this age marry and are given in marriage,

영어MSG,34 Jesus said, “Marriage is a major preoccupation here,

영어NRSV,34 Jesus said to them, “Those who belong to this age marry and are given in marriage;

헬라어신약Stephanos,34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ειπεν αυτοις ο ιησους οι υιοι του αιωνος τουτου γαμουσιν και εκγαμισκονται

라틴어Vulgate,34 et ait illis Iesus filii saeculi huius nubunt et traduntur ad nuptias

히브리어Modern,34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הם בני העולם הזה ישאו נשים ותנשאנה׃

성 경: [눅20:3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 이 부분은 타공관 복음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문장인데 대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사두개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을 잘못 알아 부활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신 것으로 묘사된다. 본절에서도 예수는 대적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곧 그들의 질문에 끌려다니는 입장에서 벗어나사 부활후 상태에 관한 진실을 본질적으로 설명하심으로써, 대적들의 무지와 악한 계교를 자연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나게끔 하는 방법을 취하셨다.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들어 전제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진리를 선포하는 이 놀라운 신적 지혜 앞에서 대적들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0절). 한편 본문의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일반적 부활관을 염두에 두고 예수를 시험하려 했던 것 같다.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 부활관에 따르면, 사람들은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경은 부활 이후의 삶을 현세의 삶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묘사한다.(고전 15:35-49;빌 3:21;요일 3:2).

호이 데 카탘시오덴테스 투 아이오노스 에케이누 튀케인 카이 테스 아나스타세오스 테스 에크 네크론 우테 가무신 우테 가미존타이

개역개정,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새번역,35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우리말성경,35 그러나 저 세상과 죽은 사람 가운데 부활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시집도 가지 않고 장가도 가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성경,35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영어NIV,35 But those who are considered worthy of taking part in that age and 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will neither marry nor be given in marriage,

영어NASB,35 but those who are considered worthy to attain to that age and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neither marry nor are given in marriage;

영어MSG,35 but not there. Those who are included in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will no longer be concerned with marriage

영어NRSV,35 but those who are considered worthy of a place in that age and 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neither marry nor are given in marriage.

헬라어신약Stephanos,35 οι δε καταξιωθεντες του αιωνος εκεινου τυχειν και της αναστασεως της εκ νεκρων ουτε γαμουσιν ουτε εκγαμισκονται

라틴어Vulgate,35 illi autem qui digni habebuntur saeculo illo et resurrectione ex mortuis neque nubunt neque ducunt uxores

히브리어Modern,35 והזכים לנחל את העולם הבא ואת תחית המתים לא ישאו נשים ולא תנשאנה׃

성 경: [눅20:3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저세상과…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 부활하여 새롭게 사는 세계를 저세상으로 표현한다. 즉 이세상과 저세상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사두개인이 질문한 내용이 일차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부활한 새로운 세계는 이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이다. 여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은 부활 후 거하게 될 세계 곧 천국이 모든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 제한된 사람들의 세계임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에 의해서도 지적되는 바, 행 13:46에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와 합당하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 내용과 맥을 같이 한다(I.H.Marshall). 여기서 언급된 합당한 자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의(義)로 옷입게된 자들을 가리킨다(롬 1:17).

우데 가르 아포다네인 에티 뒤난타이 이상겔로이 가르 에이신 카이 휘오이 에이신 데우 테스 아나스타세오스 휘오이 온테스

개역개정,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새번역,36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말성경,36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 다시는 죽을 수도 없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가톨릭성경,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영어NIV,36 and they can no longer die; for they are like the angels. They are God’s children, since they are children of the resurrection.

영어NASB,36 for they cannot even die anymore, because they are like angels, and are sons of God, being sons of the resurrection.

영어MSG,36 nor, of course, with death. They will have better things to think about, if you can believe it. All ecstasies and intimacies then will be with God.

영어NRSV,36 Indeed they cannot die anymore, because they are like angels and are children of God, being children of the resurrection.

헬라어신약Stephanos,36 ουτε γαρ αποθανειν ετι δυνανται ισαγγελοι γαρ εισιν και υιοι εισιν του θεου της αναστασεως υιοι οντες

라틴어Vulgate,36 neque enim ultra mori poterunt aequales enim angelis sunt et filii sunt Dei cum sint filii resurrectionis

히브리어Modern,36 כי לא יוכלו עוד למות כי שוים הם למלאכים ובני אלהים המה בהיותם בני התקומה׃

성 경: [눅20:3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천사와 동등이요 – 이는 앞절에서 언급된 바 곧 부활한 저세상에서는 결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출산을 통한 종족(種族) 보존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새생명을 받아 불멸의 존재로 새로 탄생하는 성도들로서는 더이상 결혼이나 출산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수효가 창세때로부터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듯이 부활의 생명을 받는 자들의 수효도 만세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더이상 수효를 보충해야 하는 부족함이 야기되지 않는다. 아울러 본문은 부활한 성도의 삶의 양태가 현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호티 데 에게이론타이 호이 네크로이 카이 모위세스 에메뉘센 에피 테스 바투 호스 레게이 퀴리온 톤 데온 아브라암 카이 데온 이사앜 카이 데온 야콥

개역개정,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새번역,37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보여 주었는데, 거기서 그는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 ㉤출 3:6

우리말성경,37 모세도 가시떨기나무를 언급하는 곳에서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출3:6

가톨릭성경,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영어NIV,37 But in the account of the bush, even Moses showed that the dead rise, for he calls the Lord ‘the God of Abraham, and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영어NASB,37 “But that the dead are raised, even Moses showed, in the passage about the burning bush, where he calls the Lord THE GOD OF ABRAHAM, AND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영어MSG,37 Even Moses exclaimed about resurrection at the burning bush, saying, ‘God: God of Abraham, God of Isaac, God of Jacob!’

영어NRSV,37 And the fact that the dead are raised Moses himself showed, in the story about the bush, where he speaks of the Lord as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헬라어신약Stephanos,37 οτι δε εγειρονται οι νεκροι και μωσης εμηνυσεν επι της βατου ως λεγει κυριον τον θεον αβρααμ και τον θεον ισαακ και τον θεον ιακωβ

라틴어Vulgate,37 quia vero resurgant mortui et Moses ostendit secus rubum sicut dicit Dominum Deum Abraham et Deum Isaac et Deum Iacob

히브리어Modern,37 וגם משה רמז בסנה כי יקומו המתים בקראו את יהוה אלהי אברהם אלהי יצחק ואלהי יעקב׃

성 경: [눅20:3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칭하였나니 – 사두개인들이 모세 율법을 근거로 삼아 예수를 시험하였듯이 예수께서도 이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증거하신 말씀을 통해 부활신앙을 변호하셨다. 즉 본문은 출 3:6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음성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같은 신앙의 선조들이 몸은 비록 죽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새생명에 참예케 될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들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유한한 인생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죽음이 곧 존재의 끝으로 보이지만 신령한 믿음의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인 것이다.

데오스 데 우크 에스틴 네크론 알라 존톤 판테스 가르 아우톤 조신

개역개정,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새번역,38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말성경,38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는 살아 있다.”

가톨릭성경,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영어NIV,38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영어NASB,38 “Now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all live to Him.”

영어MSG,38 God isn’t the God of dead men, but of the living. To him all are alive.”

영어NRSV,38 Now he is God not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of them are alive.”

헬라어신약Stephanos,38 θεος δε ουκ εστιν νεκρων αλλα ζωντων παντες γαρ αυτω ζωσιν

라틴어Vulgate,38 Deus autem non est mortuorum sed vivorum omnes enim vivunt ei

히브리어Modern,38 והאלהים איננו אלהי המתים כי אם אלהי החיים כי כלם חיים לו׃

성 경: [눅20:38]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몸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구체적 삶이 변혁되지 못한 채로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중생한 사람이라면(36절)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덧붙이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안에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부활 역시 육체적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영생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이며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 영생, 부활이 있는 것이다(요 11:25,26).

아포크리덴테스 데 티네스 톤 그람마테온 에이판 디다스칼레 칼로스 에이파스

개역개정,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새번역,39 이 말씀을 듣고서, 율법학자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말성경,39 몇몇 율법학자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가톨릭성경,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영어NIV,39 Some of the teachers of the law responded, “Well said, teacher!”

영어NASB,39 Some of the scribes answered and said, “Teacher, You have spoken well.”

영어MSG,39 Some of the religion scholars said, “Teacher, that’s a great answer!”

영어NRSV,39 Then some of the scribes answered, “Teacher, you have spoken well.”

헬라어신약Stephanos,39 αποκριθεντες δε τινες των γραμματεων ειπον διδασκαλε καλως ειπας

라틴어Vulgate,39 respondentes autem quidam scribarum dixerunt magister bene dixisti

히브리어Modern,39 ויענו מן הסופרים רבי יפה דברת׃

성 경: [눅20:39]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 강했으며 사두개파 사람들과는 경쟁적 차원에 있었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 차이로 말미암아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 했던 일(27-40절) 외에는 이 두 그룹은 항상 마찰을 빚어왔다. 본 구절에서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신들과 사상적 숙적(宿敵) 관계에 있던 사두개인들의 그릇된 주장들을 여지없이 훼파해 주신데 대하여선 크게 기뻐하였다.

우케티 가르 에톨몬 에페로탄 아우톤 우덴

개역개정,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새번역,40 그들은 감히 예수께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였다.

우리말성경,40 그들은 감히 예수께 더 이상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영어NIV,40 And no one dared to ask him any more questions.

영어NASB,40 For they did not have courage to question Him any longer about anything.

영어MSG,40 For a while, anyway, no one dared put questions to him.

영어NRSV,40 For they no longer dared to ask him another question.

헬라어신약Stephanos,40 ουκετι δε ετολμων επερωταν αυτον ουδεν

라틴어Vulgate,40 et amplius non audebant eum quicquam interrogare

히브리어Modern,40 ולא ערבו עוד את לבם לשאל אותו דבר׃

성 경: [눅20:40]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 이 진술 역시 누가만 언급하고 있는데 사두개인들이 주장했던 논리가 예수 앞에서 단번에 무너지는 장면이다. 결국 본장에서 등장한 산헤드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그리고 사두개인 등 모두가 예수와의 논쟁에서 패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 민족의 지도층으로서 한 민족을 이끌어가는 주도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인데 그들이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예수의 신적 지혜와 권위를 더욱 부각시킨다.

에이펜 데 프로스 아우투스 포스 레구신 톤 크리스톤 에이나이 다윋 휘온

개역개정,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새번역,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다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말하느냐?

가톨릭성경,4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어찌하여 사람들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영어NIV,41 Then Jesus said to them, “How is it that they say the Christ is the Son of David?

영어NASB,41 Then He said to them, “How is it that they say the Christ is David’s son?

영어MSG,41 Then he put a question to them: “How is it that they say that the Messiah is David’s son?

영어NRSV,41 Then he said to them, “How can they say that the Messiah is David’s son?

헬라어신약Stephanos,41 ειπεν δε προς αυτους πως λεγουσιν τον χριστον υιον δαβιδ ειναι

라틴어Vulgate,41 dixit autem ad illos quomodo dicunt Christum Filium David esse

히브리어Modern,41 ויאמר אליהם איך יאמרו על המשיח כי הוא בן דוד׃

성 경: [눅20:41]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다윗과 예수]

󰃨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리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삼하 7장;시 89:20-37;사 9:2-7,11:1-9;렘 23:5-6;33:14-18). 이러한 예언을 곡해한 그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다윗왕 시대와 같은 번영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점에서(빌 2:6), 그들의 메시야관은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이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곧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언급한다(롬 1:3,4).

아우토스 가르 다윋 레게이 엔 비블로 프살몬 에이펜 퀴리오스 토 퀴리오 무 카두 에크 뎈시온 무

개역개정,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새번역,42 다윗이 친히 시편에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 ㉦시 110:1

우리말성경,42 다윗이 시편을 통해 직접 말했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가톨릭성경,42 다윗 자신이 시편에서 말한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영어NIV,42 David himself declares in the Book of Psalms: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영어NASB,42 “For David himself says in the book of Psalms,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영어MSG,42 In the Book of Psalms, David clearly says, God said to my Master, “Sit here at my right hand

영어NRSV,42 For David himself says in the book of Psalms,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헬라어신약Stephanos,42 και αυτος δαβιδ λεγει εν βιβλω ψαλμων ειπεν ο κυριος τω κυριω μου καθου εκ δεξιων μου

라틴어Vulgate,42 et ipse David dicit in libro Psalmorum dixit Dominus Domino meo sede a dextris meis

히브리어Modern,42 והוא דוד אמר בספר תהלים נאם יהוה לאדני שב לימיני׃

성 경: [눅20:42]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다윗과 예수]

󰃨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 시 110:1을 인용하여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이라고 부른 사실을 언급한다. 한편 마가와 마태는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말한 것으로 묘사하여 다윗의 말에 신적인 권위가 부여되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본문의 구약성경 전체가 메시야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단적 실례를 보여준다.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수많은 메시야 예언들(사 7:14;호 11:1) 외에도 구약의 실재 인물을 통해(창 14:18-20),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호 11:1), 구약의 각종 의식과 규례를 통해(히 8-10장) 혹은 선지자들의 상징적 행동을 통해(슥 11:12,13) 메시야를 예언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예언들이 바로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

헤오스 안 도 투스 에크드루스 수 휘포포디온 톤 포돈 수

개역개정,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새번역,43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다.

우리말성경,43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시110:1

가톨릭성경,43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영어NIV,43 until I make your enemies a footstool for your feet.” ‘

영어NASB,43 UNTIL I MAKE YOUR ENEMIES A FOOTSTOOL FOR YOUR FEET.”

영어MSG,43 until I put your enemies under your feet.”

영어NRSV,43 until I make your enemies your footstool.”

헬라어신약Stephanos,43 εως αν θω τους εχθρους σου υποποδιον των ποδων σου

라틴어Vulgate,43 donec ponam inimicos tuos scabillum pedum tuorum

히브리어Modern,43 עד אשית איביך הדם לרגליך׃

성 경: [눅20:4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다윗과 예수]

󰃨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때까지 – 마태와 마가는 ‘발아래 둘 때까지’라고 표현했다. ‘발등상’은 헬라어로 ‘휘포포디온'(*)으로서 ‘발판’ 곧 발을 올려 놓는 ‘대'(footstool)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께서 마지막 날 심판주로서 임하게 되실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원수’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꾀어 범죄케하고 세상 끝날까지 세상을 미혹케할 사단을 지칭하며, 따라서 이 사단이 심판주의 발 아래 짓밟히게 됨으로써 창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다윋 운 퀴리온 아우톤 칼레이 카이 포스 아우투 휘오스 에스틴

개역개정,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새번역,44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우리말성경,44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가톨릭성경,44 이렇게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영어NIV,44 David calls him ‘Lord.’ How then can he be his son?”

영어NASB,44 “Therefore David calls Him ‘Lord,’ and how is He his son?”

영어MSG,44 “David here designates the Messiah as ‘my Master’–so how can the Messiah also be his ‘son’?”

영어NRSV,44 David thus calls him Lord; so how can he be his son?”

헬라어신약Stephanos,44 δαβιδ ουν κυριον αυτον καλει και πως υιος αυτου εστιν

라틴어Vulgate,44 David ergo Dominum illum vocat et quomodo filius eius est

히브리어Modern,44 הנה דוד קרא לו אדון ואיך הוא בנו׃

성 경: [눅20:4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다윗과 예수]

󰃨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으로 불렀는데 어떻게 그 주님이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그 ‘인성’에 대해서는 알았으나 그의 ‘신성’에 대하여는 알지 못했다. 시 110편을 인용한 주님의 지혜로운 질문은 그의 대적자들을 침묵케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신성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목적도 내포한다. 예수가 그의 성육신하신 몸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었으나 다윗의 주가 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사실상 다윗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같은 예수의 반문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형식주의 신앙과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및 왜곡된 선민 의식을 깨뜨리려는 의도까지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이미 한 가문이나 한 민족을 구원하고자 온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온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아쿠온테스 데 판토스 투 라우 에이펜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개역개정,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새번역,45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말성경,45 모든 사람이 듣고 있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5 예수님께서는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영어NIV,45 While all the people were listening, Jesus said to his disciples,

영어NASB,45 And while all the people were listening, He said to the disciples,

영어MSG,45 With everybody listening, Jesus spoke to his disciples.

영어NRSV,45 In the hearing of all the people he said to the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45 ακουοντος δε παντος του λαου ειπεν τοις μαθηται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45 audiente autem omni populo dixit discipulis suis

히브리어Modern,45 ויאמר אל תלמידיו באזני כל העם׃

성 경: [눅20:4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서기관에 대한 경고]

이 같은 교훈은 이미 앞에서 주어진 것(11:39-52)일 뿐 아니라 마 23:5-7;막 12:38-40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은 다른 평행 구절의 내용보다 훨씬 축약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는 제자들에게(45절) 주어진 것이나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있을 당시 주위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많은 무리들과 줄곧 예수를 따랐던 자들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무리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세케테 아포 톤 그람마테온 톤 델론톤 페리파테인 엔 스톨라이스 카이 필룬톤 아스파스무스 엔 타이스 아고라이스 카이 프로토카데드리아스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카이 프로토클리시아스 엔 토이스 데잎노이스

개역개정,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새번역,46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원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우리말성경,46 “율법학자들을 주의하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또 시장에서 인사받는 것과 회당과 잔치의 윗자리 차지하기를 좋아한다.

가톨릭성경,46 “ 율법 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영어NIV,46 “Beware of the teachers of the law. They like to walk around in flowing robes and love to be greeted in the marketplaces and have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the places of honor at banquets.

영어NASB,46 “Beware of the scribes, who like to walk around in long robes, and love respectful greetings in the market places, and chief seats in the synagogues and places of honor at banquets,

영어MSG,46 “Watch out for the religion scholars. They love to walk around in academic gowns, preen in the radiance of public flattery, bask in prominent positions, sit at the head table at every church function.

영어NRSV,46 “Beware of the scribes, who like to walk around in long robes, and love to be greeted with respect in the marketplaces, and to have the bes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places of honor at banquets.

헬라어신약Stephanos,46 προσεχετε απο των γραμματεων των θελοντων περιπατειν εν στολαις και φιλουντων ασπασμους εν ταις αγοραις και πρωτοκαθεδριας εν ταις συναγωγαις και πρωτοκλισιας εν τοις δειπνοις

라틴어Vulgate,46 adtendite a scribis qui volunt ambulare in stolis et amant salutationes in foro et primas cathedras in synagogis et primos discubitus in conviviis

히브리어Modern,46 הזהרו מן הסופרים החפצים להתהלך עטופי טלית ואהבים את שאלות שלומם בשוקים ואת מושבי הראש בבתי הכנסיות ואת מסבות הראש בסעודות׃

성 경: [눅20:4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서기관에 대한 경고]

󰃨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 이 표현은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한 묘사이다.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서기관들은 율법 교사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위 성직자들의 권위를 내세우는 행위는 율법에 대한 지식이 남보다 월등하다는 우월 의식과 함께 교만스러운 자기 과시욕의 표현이었다.

󰃨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 시장은 대중적 장소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그곳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자기의 권위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서기관들의 허영을 비판하는 말이다. 회당의 상좌(上座)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 서기관들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항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명예욕에 대한 비판인데 높이 되고자 하면 끝이 되어야 하며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막 9:35)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삼가라는 경고의 말씀은 비단 서기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욕심을 향해 꾸짖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호이 카테스디우신 타스 오이키아스 톤 케론 카이 프로파세이 마크라 프로슈콘타이 후토이 렘프손타이 페리쏘테론 크리마

개역개정,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새번역,47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말성경,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통째로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7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영어NIV,47 They devour widows’ houses and for a show make lengthy prayers. Such men will be punished most severely.”

영어NASB,47 who devour widows’ houses, and for appearance’s sake offer long prayers. These will receive greater condemnation.”

영어MSG,47 And all the time they are exploiting the weak and helpless. The longer their prayers, the worse they get. But they’ll pay for it in the end.”

영어NRSV,47 They devour widows’ houses and for the sake of appearance say long prayers. They will receive the greater condemn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47 οι κατεσθιουσιν τας οικιας των χηρων και προφασει μακρα προσευχονται ουτοι ληψονται περισσοτερον κριμα

라틴어Vulgate,47 qui devorant domos viduarum simulantes longam orationem hii accipient damnationem maiorem

히브리어Modern,47 הבלעים את בתי האלמנות ומאריכים תפלתם למראה עינים המה משפט על יתר יקחו׃

성 경: [눅20:4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서기관에 대한 경고]

󰃨 저희는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키며 – 서기관들에 대한 비판에 이어 구체적 죄상을 폭로하는데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는 자로 묘사된다. 당시 과부들은 고아들과 함께 경제 능력이 없는 자로서 보호 대상자였다. 본문은 약자의 재산을 착취하는 행위가 흔히 있었던 것임을 반증해 준다. 이 구절이 뜻하는 구체적 사실은, 서기관들이 그들에게 위임된 율법적 판결권을 남용하였거나(Jeremias), 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과부들의 재산에 손실을 가한다거나(T.W.Manson), 타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법적 대리인으로서 착취한 사실을 뜻할 수도 있다(J.D.M.Derrett).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 중의 하나가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형식적으로 짜여진 기도문이 많았으며 길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기도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율법적으로 가장 정통한 율법학자라는 칭호에 걸맞게 기도를 오해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 같은 기도는 하나님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외식으로 하는 기도였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예수는 그들의 약점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물론 이 비판은 오늘날의 기독교인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 지식을 남용하고 권력과 종교적 율법을 악용하여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행위는 다른 죄보다 더 무거운 죄가 된다는 말이며 더욱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악행을 범하면 하나님 앞에 더 중한 판결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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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0장 주석

누가복음20장

20:1-8.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와서 주님께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주님은 그들의 물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은 주님의 물음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 서로 의논한 후,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자신들은 요한이 메시야라고 증거 한 주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고,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아(自我) 중심적인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현실 가운데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주님의 물으심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을 할지라도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답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주님의 물음에 대하여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요한의 세례를 하늘로부터 온 것으로 인정하고 그가 증거한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했더라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주님을 만나서 구원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아(自我)를 포기하지 못함으로 결국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은 외적으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권위에 대하여 주님과 대제사장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으로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에 대하여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메시야 되심은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있다. 이 증거가 바로 세례요한이다. 당시 세례요한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선지자로 인정되었고, 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한 메시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받았다. 이것은 제사장들조차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요단에 이르러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요한의 소명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었고, 또한 이스라엘 가운데 메시야로 오신 분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요한이 이스라엘 가운데 메시야로 증거 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셨다. 그러므로 요한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반드시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해야만 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잘못은 주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부한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결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베푸신 은혜였다. 만일 그들이 이 기회를 은혜로 받고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했더라면, 지금까지 무지(無知)로 인하여 메시야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메시야를 영접함으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조차 거부함으로 스스로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물으심에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부정직함은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했다.

20:9-18. “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다. 구약 여러 곳에서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미4:4,슥3:10)”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서 포도원과 무화과나무는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얼마 후 포도원 주인은 몇 년 동안 외국에 나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稅)를 주었다. 포도원 주인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농부들에게 세를 받기 위하여 자기 종을 보냈다. 그러나 농부들은 세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보낸 종을 심히 때려 주인에게 되 돌려보냈다. 주인은 마음이 상했지만 또 다른 종을 보냈다. 그러나 농부들은 다른 종에게도 동일하게 대하였다. 이처럼 주인은 여러 차례 종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때마다 종들을 폭행하고 세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이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주인에게 상속자가 없어지므로 그 포도원은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을 대신하여 세를 받으러 온 주인의 아들을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진노하여 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악한 농부들을 진멸 하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세(稅) 주었다.

여기 포도원 주인은 주님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신뢰해 주시는지 말해 주고 있다. 주인은 외국을 떠날 때 농부들을 완전히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신뢰해 준다는 것은 그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뢰야말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격려 중에 가장 놀라운 격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받으며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생을 가장 긍정적이며 창조적으로 살게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베드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함으로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했다. 그리고 이런 죄책감은 그의 모든 꿈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일생을 고통 속에 살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증인으로서 살지 못하고 갈릴리바다로 내려가서 예전의 직업이었던 어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은 그를 찾아와 주셔서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내 양을 먹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야 내가 너의 약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신뢰한다. 어부에서 떠나 내가 네게 맡긴 복음의 증인으로서 살아라”라는 의미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자신을 신뢰해 주신 주님으로 인하여 일생동안 복음의 증인으로서 살 수 있었다. 만일 베드로에게 이와 같은 주님의 신뢰가 없었더라면 그는 스승을 배반한 자로서 평생 양심의 고통을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가 실패하여 낙심 가운데 있을 때 먼저 찾아와 주셔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변함없이 신뢰하고 있다. 내가 네게 부탁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마치 포도원 주인이 외국으로 떠날 때 농부들을 완전히 신뢰함으로 그들에게 포도원을 맡긴 것과도 같다.

이 비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오래 참아 주시는지 말해 주고 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에 대하여 오래 참아 주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받기 위하여 종들을 보냈을 때,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세도 주지 않았다. 이와 같은 한 가지 일만으로도 그들은 주인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고 여러 차례 종들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을 보냈다. 이렇게 사악한 농부들에 대하여 오래 참은 것은 주인이 어리석은 자였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자 하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우리의 악함을 아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도 그 앞에 설자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은혜 가운데 살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사랑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농부들은 주인의 오래 참음을 악용하여 아들까지 죽임으로 주인으로부터 포도원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베풀어준 사랑을 농부들이 악용하여 더욱 악을 행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는 사랑과 기회가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을 때 주인은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다. 주님은 죄인들에 대하여 언제까지나 참고 계시는 것은 아니다. 베풀어 주신 사랑을 끝까지 배반할 때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계시해 주셨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인간은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포도원 주인은 외국에 나갈 때 자신의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겼다. 여기 “농부”는 주님으로부터 삶의 목적을 부여받은 한 인간을 계시하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이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여기 “모든 사람”이란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 서로 다른 직업, 건강의 좋고 나쁨을 초월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하여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행복에 이르는 조건들 가운데 하나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지 못하여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행복 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들이 창조의 목적을 알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행복에 이르는 조건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지 알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부르심에 따라 사는 삶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자신의 기쁘심을 위하여 우리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 부르심에 따라 사는 삶이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다.

이 비유에서 인간은 부르심으로부터 떠나 그릇 행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부르심에 따라 산다는 것은 노예로서 사는 삶이 아니고 가장 자유 한 삶이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으로부터 포도원을 경영하도록 위탁받았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정해진 세(稅)만 주인에게 준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 포도원을 경영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삶이 포도원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최소한의 의무를 행한다면 우리의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삶을 경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부르심에 따라 사는 것은 자유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은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도 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인의 포도원을 빼앗고자 했다. 그래서 세를 받기 위하여 주인이 보낸 종들을 폭행했고 후에는 주인이 자신을 대신하여 보낸 아들까지 죽였다. 농부들이 이처럼 악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욕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인이 요구하는 세만 주었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포도원을 경영하여 이익을 남겼을 터인데 그들의 탐욕은 그것마저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이 세를 받기 위하여 보낸 종들을 폭행하였던 것이다.

여기 중요한 교훈은 주인이 종들에게 요구했던 세는 최소한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부들은 주인에게 최소한의 의무를 행했다면 최대의 권리를 누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의무는 최소한의 것이고 베푸시는 은혜는 최대한의 것이다. 십일조, 주일 성수, 공적 예배 참여, 매일의 묵상 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소한의 의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의무를 행할 때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악한 농부들처럼 최소한의 의무마저 행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풍성함을 누리면서도 십일조를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모든 시간들을 사용하면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최소한의 시간조차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고 있다. 우리 중에 세상일을 위하여 영적으로 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있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농부들에게 탐욕은 주인의 은혜를 배반하게 했고 끝내는 그들이 얻고자 했던 모든 것과 그들의 생명까지도 잃어버리게 했다. 주님은 포도원 비유를 통하여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稅)를 원했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그 의무는 우리가 영적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기 원한다면 먼저 이 의무를 행하여야한다.

이 비유에서 인간은 부르심에 따라 살지 않을 때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폭행하고 그의 아들마저 죽였을 때, 마치 주인과 싸워 승리를 얻은 것처럼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그들이 주인과 싸워서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승리를 자축(自祝)하고 있었을 때, 홀연히 주인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들을 진멸 했다. 여기 중요한 교훈이 있다. 주님을 배반한 인간이 승리의 노래를 부를 때, 주님은 바로 그때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것을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순간은 보지만 영원은 보지 못하고, 영광 받을 줄은 알지만 심판이 올 것은 보지 못한다. 농부들은 포도원을 빼앗기 위하여 종들에게 폭행하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지만 주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자신들을 진멸 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악한 농부들은 결국 진멸 당했던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에게 다음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셨다.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20:17)” 주님은 포도원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과 메시야이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 주시고, 탐욕에 이끌려 사는 그들이 장차 메시야를 어떻게 거부할 것인지에 대하여 암시해 주셨다. 그러나 주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에게 버림받은 메시야가 후에 건축물의 모퉁이 돌처럼 오직 세상을 구원하실 유일하신 구주가 되실 것을 말씀 해 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20:19-26.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주님의 비유의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했지만,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총독의 힘을 빌어서 주님을 잡고자 하여, 주님께 정탐꾼을 보내었다. 그들은 정탐꾼들로 하여금 함정을 파놓게 하여 주님께서 그 함정에 빠지도록 했다.

정탐꾼들은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20:22)”라고 물었다. 만일 주님이 이 물음에 대하여 “옳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로마에 반역하는 것이 되어 총독으로부터 체포될 것이고, “옳다”라고 대답한다면 자신들을 식민지로 삼은 로마를 지지하는 말이 되어 유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민족의 반역자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라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주님은 그들의 간계(奸計)를 아시고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도록 명하고, 그 화폐를 보이시며 그 화폐에 구누의 형상(形象)과 글이 있는지 물으셨다. 그리고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을 때, 주님을 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사람들이 화폐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생각을 알아야 한다. 고대 세계에서 화폐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했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한 일은 왕의 얼굴을 새겨 넣은 화폐를 발행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 것은 화폐에 새겨진 왕은 그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한 지역이 어느 왕의 지배 아래 있는지 그리고 그 지역에서 왕의 주권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살펴보려면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화폐와 그 화폐의 통화 상태를 보면 알 수 있었다(바클레이, 마가복음 주석 참조).

그러므로 “가이사랴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는 말은 세상에 속한 것은 세상에 돌려주라는 의미다. 디모데후서3장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교만한 것, 감사하지 않는 것,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는 것 등은 세상에 속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고, 갈라디아서 5장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투기, 술취함, 방탕 역시 세상에 속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세상의 얼굴과 세상의 이름이 새겨진 것은 모두 세상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세상에 돌려줌으로 경건의 삶을 살 수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의 것을 세상에 돌려주는 것인가?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즉 우리가 세상의 것을 세상에 돌려준다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들과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것과 관계를 끊지 않고는 우리가 영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성장의 정도는 세상에 속한 것들과 관계를 끊고 사는 정도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10:31)” 또한 사랑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경건의 삶을 위하여 항상 힘쓸 것을 이렇게 권고하였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 이처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경건한 삶을 위하여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삶은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하여 세상이 것은 세상에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분별심을 가지고 사는 삶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아야할 원칙에 따라 사는 삶인 것이다.

주님께서 제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보낸 정탐꾼들에게 “가이샤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책잡을 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지혜로우심에 대하여 놀라며 잠잠할 뿐이었다. 주님은 지혜의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떤 간계(奸計)도 주님을 넘어뜨리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20:27-40.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이 주님께 나와서 물었다. 그들의 물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 중에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신 법을 알아야한다. 모세의 율법 중에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있다. 그 법은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줌으로 그 형의 대를 이어가도록 하는 법이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이 법을 가지고 교묘하게 시험을 했다. 그들이 주님께 질문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한 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결혼한 후 자식 없어서 둘째가 그 아내를 취하였지만 그도 자식이 없이 죽었고 셋째, 넷째…일곱째까지 모두 이렇게 죽었다. 이렇게 하여 결과적으로 한 여자가 일곱 형제 모두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러면 부활의 날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라는 물음이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에서처럼 시집 가고 장가 드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물음은 무의미하다고 말씀해 주셨고, 또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 줌으로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그릇 됨을 깨우쳐 주셨다. 특별히 하나님 나라는 “시집가고 장가 드는 일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고 하는 그릇 된 생각을 경계하신 말씀이다.

20:41-44.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은 다윗은 주님을 “주(主)”’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친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20:43)”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그들의 메시야로 알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함이었다. 다음의 말씀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20:44)”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안다면 주님을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할 것이지만, 주님을 “다윗의 주”로 안다면 주님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20:45-47.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들이야말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의 외모가 곧 그 사람의 참모습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 해 주셨다.

2020. 9. 23.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20장

20:1 그리스도의 적들이 겪은 당혹(1) (누가복음 20:1-8) 여기에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에 보탠 것은 없다. 그러나 다만 첫째 절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주님은 이 때에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고 계셨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친히 전하는 분이시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마련해 놓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공포해 주셨다. 그리하여 복음의 진리를 완전히 확인시켜 주셨으며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큰 격려를 주셨다. 주님이 복음을 친히 전하여 공포해 주신 것은 그리스도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표시이다. 이 사실은 동시에 복음 전파자들과 그들의 직분과 사업에 큰 영예를 주시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경멸히 여긴다 하더라도 전도인들은 큰 영예와 긍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은 복음의 서민적 전도자에게 영예가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에 백성들의 능력을 귀하게 여기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또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에는 방해를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사탄과 사탄의 추종자들은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다. 그것은 사탄의 세력을 보다 잘 약화시키는 것은 복음의 전파이기 때문이다. Ⅱ. 주님의 원수들이 “가까이 와서”라는 말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 단어는 오직 여기에서만 쓰여졌다. 이 말은 다음의 사실을 암시한다. 1. 주님의 원수들은 이 질문으로 주님을 놀라시게 할 줄로 생각했다. 그들은 갑자기 가까이 왔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으시던 것이어서 그 대답에 당황하게 하심으로 주님을 잡기를 원했던 것이다.

2. 주님의 원수들은 그 문제로 주님을 놀라시게 할 줄로 생각했다. 그들은 떼를 지어 난폭하게 주님께로 가까이 왔다. 그러나 원수들의 계획을 방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주님께서 인간의 진노를 두려워하실 수 있겠는가? 주님은 도리어 인간의 간악한 계획을 변하여 주님의 찬양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신가? 이 기사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1) 이것이 한 감정의 표현으로써는 논쟁이 되고 눈이 가리어져서 빛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한 이상한 일로 여겨져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의심스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이적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분명히 보여 주셨으면 당신의 임무를 확인시켜 주셨다. 그런데 그 분명한 사실을 원수들에게 규탄 당하고 계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권위를 의심하는 자들은 그들이 만일 종교의 가장 분명하고 가장 확실한 원리를 자기들 스스로 캐어물었더라면 모든 사람에게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대답할 수 있는 평범한 문제인 요한의 세례에 관한 문제로 답변하셨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은 다 그것이 하늘로부터인 줄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세속적인 냄새나 경향이 조금도 없고 모두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들을 괴롭히고 당황케 하여 결국 백성들 앞에서 부끄럼만 당했다.

(3) 세평과 세속적인 관심사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이 가장 분명한 진리에 감금이 되다시피 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가장 강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 억눌려서 숨이 막힐 듯이 되는 것은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그것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신망을 잃을까 봐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임을 강조하지 못하고, 또 세례가 사람으로부터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두려워한 까닭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슨 착한 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4) 가지고 있는 지식을 파묻어 두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식을 더 얻기를 거부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과 맞섰던 자들이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세례가 하늘로부터임을 알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도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것이다(7, 8절).

주님의 원수들은 이 질문으로 주님을 놀라시게 할 줄로 생각했다. 그들은 갑자기 가까이 왔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으시던 것이어서 그 대답에 당황하게 하심으로 주님을 잡기를 원했던 것이다.주님의 원수들은 그 문제로 주님을 놀라시게 할 줄로 생각했다. 그들은 떼를 지어 난폭하게 주님께로 가까이 왔다. 그러나 원수들의 계획을 방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주님께서 인간의 진노를 두려워하실 수 있겠는가? 주님은 도리어 인간의 간악한 계획을 변하여 주님의 찬양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신가? 이 기사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이것이 한 감정의 표현으로써는 논쟁이 되고 눈이 가리어져서 빛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한 이상한 일로 여겨져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의심스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이적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분명히 보여 주셨으면 당신의 임무를 확인시켜 주셨다. 그런데 그 분명한 사실을 원수들에게 규탄 당하고 계신 것이다.그리스도의 권위를 의심하는 자들은 그들이 만일 종교의 가장 분명하고 가장 확실한 원리를 자기들 스스로 캐어물었더라면 모든 사람에게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대답할 수 있는 평범한 문제인 요한의 세례에 관한 문제로 답변하셨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은 다 그것이 하늘로부터인 줄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세속적인 냄새나 경향이 조금도 없고 모두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들을 괴롭히고 당황케 하여 결국 백성들 앞에서 부끄럼만 당했다.세평과 세속적인 관심사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이 가장 분명한 진리에 감금이 되다시피 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가장 강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 억눌려서 숨이 막힐 듯이 되는 것은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그것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신망을 잃을까 봐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임을 강조하지 못하고, 또 세례가 사람으로부터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두려워한 까닭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슨 착한 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가지고 있는 지식을 파묻어 두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식을 더 얻기를 거부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과 맞섰던 자들이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세례가 하늘로부터임을 알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도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것이다(7, 8절).

20:9 농부와 포도원(누가복음 20:9-19) 주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으로 주의 권위가 어떻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잘 알 수 있도록 증거를 밝혔는데도 그 권위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권위를 자기 자신들의 권위로 몰수함으로써 문제삼은 자들에게는 적절한 비유이었다. 이들이 포도원의 주인을 부인한 것은 포도원에 대한 자기들의 차용권을 무효로 한 것이며 자기들의 모든 자격을 포기한 것이다. Ⅰ. 이 비유에는 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바에 조금 보태진 것이었다. 이 비유의 의도하는 바는 유대 백성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나중에는 자기들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까지 핍박함으로써 하나님을 분내시게 하여 그들의 교회의 모든 특권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1. 우리의 눈으로 보는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포도원의 소작인과 농부와 같아서 포도원을 돌보고 또 그 포도원에 대한 소작료를 지불해야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종교를 설립하시고 질서를 설정하심으로써 포도원을 만드셔서 백성들에게 세(貰)로 주시고, 에베소 곧 포도원을 지키는 장막을 마련하게 하셨다(9절). 소작인과 농부들은 해야 할 포도원 일 곧 필요하고도 꾸준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러나 이 일은 유쾌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죄 때문에 땅을 경작하도록 정죄되어 있으므로 포도원에서 직분을 가진 그들은 순결한 중에 하던 아담의 일로 회복되어 정원을 매만지며 이것을 간수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포도원 다시 말하면 교회는 낙원으로써 그리스도 곧 생명의 나무가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포도원의 주인께 바칠 포도 열매를 가지고 있다. 또 이들에게는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고 해야할 봉사 사업이 있다. 이 세금과 일은 빌려 준 토지에 비례하여 내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지불해야 되며 해야 될 일을 감당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사자들이 할 일은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당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소작료 수집원들로서 늦게 오는 농부들을 기억해 두며, 또는 자기들로부터 보고를 받으시기를 바라고 계신 주인이 계심을 기억하고, 주인에 대한 그들의 의지심의 고백을 받고 또한 주인에 대한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다(10절). 구약의 선지자들은 유대교로 이 심부름을 하도록 보냄 받은 사람들, 자기들이 하나님께 책임진 의무와 순종을 그들에게 요구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3.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은 불행하게도 주인의 소작인들에게 학대받는 일이 가끔 있다. 소작인들은 주인께서 보낸 사자들을 때리고 능욕하여 사자들로 하여금 거저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도록 불리움 받기에 합당치 않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의 몇 사람이 그들의 가장 훌륭한 봉사로써 가장 어려운 일을 하려 내려왔다.

4. 하나님께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포도원의 열매를 모으기 위하여 등용하셨던 선지자들이 하던 일과 같은 일을 수행하시도록 하셨다. 어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존경을 받고 대접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선지자들은 종이라고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께서 친히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는 중에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이와 같은 영예를 주시면서 그들에게 보이셨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승리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만하다.

5. 그리스도의 사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친히 그들에게 가시면 주님도 거역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미 시험한 바로써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들의 핍박자와 살인자들은 주님 자신의 핍박자이며 살인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 하였다. 소작인과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죽였을 때에 다른 종들을 보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들만 죽일 수 있다면 또 보낼 다른 아들은 없을 것이며 그러면 더 이상 소작료와 세금을 요구하여 성가시게 굴지 않을 것이다. 포도원을 완전히 우리의 소유로 만들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약속하기를 만일 그리스도만 처분해 버리면 자기들이 영원히 유대교의 주인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담한 걸음을 걸으면서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었다.

6. 그리스도를 원수들이 죽인 것은 유대인의 죄악의 극에 달한 것으로써 그들은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멸망을 초래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시는 도리밖에 없었다. 농부들은 세를 내지 않는 것으로 시작하여 결국은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고 끝내는 자기들의 젊은 주인까지도 죽이었다. 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무시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와 멸망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포도원의 소작인과 농부와 같아서 포도원을 돌보고 또 그 포도원에 대한 소작료를 지불해야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종교를 설립하시고 질서를 설정하심으로써 포도원을 만드셔서 백성들에게 세(貰)로 주시고, 에베소 곧 포도원을 지키는 장막을 마련하게 하셨다(9절). 소작인과 농부들은 해야 할 포도원 일 곧 필요하고도 꾸준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러나 이 일은 유쾌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죄 때문에 땅을 경작하도록 정죄되어 있으므로 포도원에서 직분을 가진 그들은 순결한 중에 하던 아담의 일로 회복되어 정원을 매만지며 이것을 간수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포도원 다시 말하면 교회는 낙원으로써 그리스도 곧 생명의 나무가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포도원의 주인께 바칠 포도 열매를 가지고 있다. 또 이들에게는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고 해야할 봉사 사업이 있다. 이 세금과 일은 빌려 준 토지에 비례하여 내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지불해야 되며 해야 될 일을 감당해야 한다.하나님의 사자들이 할 일은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당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소작료 수집원들로서 늦게 오는 농부들을 기억해 두며, 또는 자기들로부터 보고를 받으시기를 바라고 계신 주인이 계심을 기억하고, 주인에 대한 그들의 의지심의 고백을 받고 또한 주인에 대한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다(10절). 구약의 선지자들은 유대교로 이 심부름을 하도록 보냄 받은 사람들, 자기들이 하나님께 책임진 의무와 순종을 그들에게 요구하러 온 사람들이었다.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은 불행하게도 주인의 소작인들에게 학대받는 일이 가끔 있다. 소작인들은 주인께서 보낸 사자들을 때리고 능욕하여 사자들로 하여금 거저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도록 불리움 받기에 합당치 않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의 몇 사람이 그들의 가장 훌륭한 봉사로써 가장 어려운 일을 하려 내려왔다.하나님께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포도원의 열매를 모으기 위하여 등용하셨던 선지자들이 하던 일과 같은 일을 수행하시도록 하셨다. 어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존경을 받고 대접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선지자들은 종이라고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께서 친히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는 중에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이와 같은 영예를 주시면서 그들에게 보이셨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승리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만하다.그리스도의 사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친히 그들에게 가시면 주님도 거역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미 시험한 바로써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들의 핍박자와 살인자들은 주님 자신의 핍박자이며 살인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 하였다. 소작인과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죽였을 때에 다른 종들을 보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들만 죽일 수 있다면 또 보낼 다른 아들은 없을 것이며 그러면 더 이상 소작료와 세금을 요구하여 성가시게 굴지 않을 것이다. 포도원을 완전히 우리의 소유로 만들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약속하기를 만일 그리스도만 처분해 버리면 자기들이 영원히 유대교의 주인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담한 걸음을 걸으면서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었다.그리스도를 원수들이 죽인 것은 유대인의 죄악의 극에 달한 것으로써 그들은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멸망을 초래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시는 도리밖에 없었다. 농부들은 세를 내지 않는 것으로 시작하여 결국은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고 끝내는 자기들의 젊은 주인까지도 죽이었다. 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무시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와 멸망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Ⅱ. 이 비유의 말씀에는 다른 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말 곧 사람들이 자기들을 멸망시키려는 주인의 경륜을 반대하였다는 말이 있다(16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지이어다.” 농부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의 대가가 멸망을 당하는 것밖에 다른 무엇을 바랄 수 있으랴마는 그런 선고를 들으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죄인들은 자기들이 종국에는 멸망당할 것을 내다보고 두려워하면서도 그냥 그 죄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나가는 어리석음과 완악이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악을 범하고 나서 하나님께 그렇게 하지 말아 주시라고 하여 그 멸망을 피하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자기 자신들을 속이는 일을 했는가. 그러나 그들의 만류가 무슨 효과를 나타내겠는가? 하나님의 경륜대로 될지 자기들의 주장대로 될지는 자기들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멸망됨을 어리석게 반대한데 대하여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는가. 1. 주님은 “저희를 보셨다.” 이것은 누가복음 기자만이 기록한 말이다(17절). 주님께서는 그들을 동정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쳐다보시면서 자기들이 멸망의 길을 걸어놓고 나서 스스로 속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은 저희들을 보셨다. 그들이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지는지 또는 그들의 표정에서 측은하게 여기는 표시가 나타나는지 보려고 그들을 쳐다보신 것이다.

2. 주님은 그들에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기록된 바가 무엇이뇨? 너희가 경멸히 여기고 반대하는 주님의 의기양양함을 막지 못할 때 너희가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으로 들려 올려지실 것이다. 주님에게는 위임받으신 모든 심판의 권세와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주님은 교회의 모퉁이 돌이며 머리 돌이시다. 그러니까 주님의 원수들은 멸망될 수밖에 없다. 주님을 경멸히 여기고, 주님을 넘어지게 하고 또 주님을 반대한 자들도 “깨어지겠고”──곧 멸망당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반대할 뿐 아니라 미워하고 핍박한 자들 곧 유대인과 같은 자들은 주님께서 그들과 마주쳐서 그들을 조각으로 부셔서──가루로 만들어 흩으실 것이다. 악의에 찬 박해자들은 무관심한 불신앙자들에 대한 정죄 보다도 훨씬 더 엄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비유의 말씀에 의하여 격노하게 된 것이다(19절).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주님은 사실 그렇게 하신 것이다. 떳떳치 못한 마음은 고발자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주님의 원수들은 양심의 가책이 생기기보다도 자기들의 가슴에 품고 있으나 자고 있는 사자를 일깨워 준 주님에 대하여 “즉시 잡고자” 하였다. 그들의 부패성은 자기자신들의 양심적 가책을 반대하여 이를 물리쳐버렸다. 그들이 주님께 정면으로 대들지 못하고 앙심만 품고 있었던 것은 조금이라도 하나님이나 그들의 눈앞에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단지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속자니 죽이자.” 주목할 사실은 인간의 자손들의 마음이 악행을 하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그들이 범하려고 하고 있는 죄와 그 죄의 결과에 대하여 아무리 좋은 경계를 하더라도 감명을 받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입맞추기보다도 그를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 이제 그에게 달려들겠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죄의 처벌을 비난했지만 조금 있다가 그들은 도리어 범죄를 계획하고 있다. 주님은 “저희를 보셨다.” 이것은 누가복음 기자만이 기록한 말이다(17절). 주님께서는 그들을 동정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쳐다보시면서 자기들이 멸망의 길을 걸어놓고 나서 스스로 속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은 저희들을 보셨다. 그들이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지는지 또는 그들의 표정에서 측은하게 여기는 표시가 나타나는지 보려고 그들을 쳐다보신 것이다.주님은 그들에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기록된 바가 무엇이뇨? 너희가 경멸히 여기고 반대하는 주님의 의기양양함을 막지 못할 때 너희가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으로 들려 올려지실 것이다. 주님에게는 위임받으신 모든 심판의 권세와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주님은 교회의 모퉁이 돌이며 머리 돌이시다. 그러니까 주님의 원수들은 멸망될 수밖에 없다. 주님을 경멸히 여기고, 주님을 넘어지게 하고 또 주님을 반대한 자들도 “깨어지겠고”──곧 멸망당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반대할 뿐 아니라 미워하고 핍박한 자들 곧 유대인과 같은 자들은 주님께서 그들과 마주쳐서 그들을 조각으로 부셔서──가루로 만들어 흩으실 것이다. 악의에 찬 박해자들은 무관심한 불신앙자들에 대한 정죄 보다도 훨씬 더 엄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비유의 말씀에 의하여 격노하게 된 것이다(19절).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주님은 사실 그렇게 하신 것이다. 떳떳치 못한 마음은 고발자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주님의 원수들은 양심의 가책이 생기기보다도 자기들의 가슴에 품고 있으나 자고 있는 사자를 일깨워 준 주님에 대하여 “즉시 잡고자” 하였다. 그들의 부패성은 자기자신들의 양심적 가책을 반대하여 이를 물리쳐버렸다. 그들이 주님께 정면으로 대들지 못하고 앙심만 품고 있었던 것은 조금이라도 하나님이나 그들의 눈앞에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단지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속자니 죽이자.” 주목할 사실은 인간의 자손들의 마음이 악행을 하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그들이 범하려고 하고 있는 죄와 그 죄의 결과에 대하여 아무리 좋은 경계를 하더라도 감명을 받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입맞추기보다도 그를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 이제 그에게 달려들겠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죄의 처벌을 비난했지만 조금 있다가 그들은 도리어 범죄를 계획하고 있다.

20:20 그리스도의 적들이 겪은 당혹(2) (누가복음 20:20-26)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세금에 대한 문제를 제의함으로써 원수들이 쳐놓은 올가미를 피하심을 보게 된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된다. Ⅰ. 이것은 주님을 해치려고 계획한 위해였는데 이것은 전에 것보다도 더 어리석은 것이었다. 이 음모는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는” 것이다(20절). 그들은 율법 때문에 그들 자신이 주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는 것이며 그들이 의지할 수 없는 민중의 폭동을 일으켜서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심판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짐짓 주님을 박해하는 자와 고발자가 아닌체 하고 주님을 모해할 정보를 제공하려고 했다. 그들은 주님을 반대하는 총독에 아첨할 수 있는 요긴한 사실을 알아내기를 바랐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교회의 치리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악행의 도구로써 세속적인 권력을 쓰는 것이 보통 술책이며 또는 자기들이 해야 될 성가신 일을 지상의 왕들이 하게 하는 것도 흔히 있었던 일이다. 왕들이 악한 무리들의 술책에 선동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이웃은 조용히 살았을 것이며 그것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기기까지에 빌라도가 그리스도에게 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써 원수들의 저주할 만한 계책에 의하여 주님은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Ⅱ. 다음에 생각할 것은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고용된 사람들이 약간의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라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누가복음에는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은 스스로 의인인 체하여”란 말이 첨부되어 있다. 악한 사람들이 스스로 의인인 체하여 가장 악한 계책을 가장 진실하고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악마는 빛의 천사로 변모할 수 있고 바리새인의 젊잖은 외관과 그리스도의 제자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탐정은 반드시 변장을 하게 마련이다. 이 탐정들은 그리스도의 판단에 대하여 가치를 인정하는 체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체한다. 그러므로 양심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주님의 의견을 들으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전도자들은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계하도록 조심할 것이며 뱀과 전갈의 자식들 속에 있을 때에는 뱀과 같이 지혜로 와야한다. Ⅲ. 그들은 내놓은 문제로써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 1. 그들의 시작하는 말은 매우 예의를 갖추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십니다(21절).” 이처럼 그들은 주님에게 아첨하여 주님이 부주의하시는 중에 마음을 터놓고 자유스럽게 말씀하시는 중에 자기들이 원하는 약점을 잡으려고 했다. 교만한 그들 또 진정한 사랑이 없는 그들은 무슨 일을 하려면 오직 아첨하고 친절한 듯이 말하였다. 그러나 겸손한 예수에게까지 속임수로써 자기들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도 큰 잘못이었다. 주님은 그런 위선자의 말을 즐겨하시지 않으셨으며 또 그런 말로써 당신이 존경을 받으신다고는 생각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임이 사실이고 또한 모든 사람의 심중을 아시고 그들의 마음을 아시며, 원수들이 아무리 좋은 말로 하더라도 그들의 심중에는 일곱 가지 가중한 것이 있음을 아셨다. 주님께서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원수들은 주님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하고 있음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책잡히시지 않으셨다.”

2. 그들의 문제는 매우 좋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라는 말은 누가복음에만 있다. 아브라함의 자유의 몸으로 태어난 자손인 우리 곧 하나님께 세를 바쳐야 할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교만심과 탐욕심이 많은 그들은 세금을 내는 것이 싫었다. 그러므로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한지 부한지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께서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다 말씀하시면 백성들이 화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주님께서 메사야를 가장 첫 자리에 앉으실 분으로 인정하여 로마의 압정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여 가이사에게 세 바치기를 거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원수들이 기대하는 대로 세 바치는 것이 불가하다고 말씀하시면(만일 그런 마음을 주님께서 갖고 계시지 않다면 일반 백성들이 전처럼 주님을 떠받드려고 하지 않으리라고 원수들은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총독에게 고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의 시작하는 말은 매우 예의를 갖추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십니다(21절).” 이처럼 그들은 주님에게 아첨하여 주님이 부주의하시는 중에 마음을 터놓고 자유스럽게 말씀하시는 중에 자기들이 원하는 약점을 잡으려고 했다. 교만한 그들 또 진정한 사랑이 없는 그들은 무슨 일을 하려면 오직 아첨하고 친절한 듯이 말하였다. 그러나 겸손한 예수에게까지 속임수로써 자기들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도 큰 잘못이었다. 주님은 그런 위선자의 말을 즐겨하시지 않으셨으며 또 그런 말로써 당신이 존경을 받으신다고는 생각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임이 사실이고 또한 모든 사람의 심중을 아시고 그들의 마음을 아시며, 원수들이 아무리 좋은 말로 하더라도 그들의 심중에는 일곱 가지 가중한 것이 있음을 아셨다. 주님께서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원수들은 주님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하고 있음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책잡히시지 않으셨다.”그들의 문제는 매우 좋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라는 말은 누가복음에만 있다. 아브라함의 자유의 몸으로 태어난 자손인 우리 곧 하나님께 세를 바쳐야 할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교만심과 탐욕심이 많은 그들은 세금을 내는 것이 싫었다. 그러므로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한지 부한지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께서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다 말씀하시면 백성들이 화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주님께서 메사야를 가장 첫 자리에 앉으실 분으로 인정하여 로마의 압정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여 가이사에게 세 바치기를 거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원수들이 기대하는 대로 세 바치는 것이 불가하다고 말씀하시면(만일 그런 마음을 주님께서 갖고 계시지 않다면 일반 백성들이 전처럼 주님을 떠받드려고 하지 않으리라고 원수들은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총독에게 고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Ⅳ. 주님께서는 원수들이 쳐놓은 올가미를 피하셨다.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셨다”(23절).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해치려는 원수들의 간계가 아무리 교묘하다고 하더라도 가장 교활한 변장도 뚫어보실 수 있고 가장 위험한 간계의 올가미도 피하실 수 있다.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곧바로 답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약점을 잡으려고 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하시고 당시에 상인들의 통화 한푼을 가져오라고 하셨다.──셋돈을 내게 보여라.” 그리고 물으시기를 그것이 누구의 돈이며, 누구의 인이 찍혀 있으며, 누구의 화상이 그려 있느냐고 하셨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하고 시인했다. 이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왜 너희들끼리 가이사의 돈을 주고받는 것이 가하냐고 먼저 물을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이미 이 돈을 너희들의 거래의 도구로 쓰고 있지 않느냐? 너희가 이의없이 인정하고 있고, 너희의 행동으로 결론짓고 있으니 너희는 의심할 것도 없이 너희의 거래에 편리하도록 마련해 준 그 사람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또 이것으로 너희가 보호를 받고 너희 돈의 가치에 대하여 그 사람의 권위를 인가해 주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칠 것이다. 인간사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권력자에게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가이사가 법률과 공정한 행정으로 너희를 보호한다면 너희는 마땅히 그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 그러나 거룩한 일에 있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너희의 왕이시다. 너희는 가이사의 종교에 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찬미하며, 가이사가 마련해 놓은 금으로 만든 우상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정하신 대로만 경배하고 찬미해야지 가이사가 만들어낸 것에 따라서 하면 안 된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어라”는 말씀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으시다.

20:27 사두개인의 트집(누가복음 20:27-38) 이 주님과 사두개인들과의 담화는 여기에 기록된 그대로 다른 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부활 후의 상대가 약간 더 충분히 또한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된다. Ⅰ. 어느 시대에나 계시 종교의 근본적인 원리를 파괴하려고 힘쓰는 사람들이 있다. 자칭 자유사상가라고 하는 오늘날의 자연신교 신봉자들은 실상 허위사상가들이다. 이와 같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시대에 있었는데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에 대한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실상 이 교리는 구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으며 유대교 신앙의 한 조목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고, 육체에 생명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뿐 아니라 생명 속에 영혼이 계속해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영계라는 것은 없는 것이며, 육신으로 행했던 일이 보상된다든지 보복되는 상태로 될 수 없다는 말했다. 이 부활을 빼버린다면 모든 종교는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 Ⅱ. 하나님의 진리의 토대를 침식하려고 계획하는 자들이 흔히 하는 일은 하나님의 진리를 혼란케 하며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이 바로 이렇게 하였다. 그들이 부활의 교리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을 약화시키려고 할 때에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할 수 없을 만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것은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며 적어도 일곱 명의 남편을 가졌던 한 여인의 예를 들어 부활의 문제를 삼은 것이 그 하나이다. 그들은 부활에 있어서 “부활의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의 아내이든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음으로 끝났을 때에는 그 부부관계가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Ⅲ. 지상에 있는 사람의 자녀들의 상태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상태와의 차이는 크며,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감정의 세계에서 우리의 현실적인 향락으로 저 영의 세계를 우리의 이해력으로 형성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1. 이 세상의 인간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간다.” 이 시대와 이 세대의 자녀들은 좋고 나쁘고 다 저희끼리 결혼하며 자기들의 자녀들을 결혼시킨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가정을 일으키고 다스려 나가며 또한 가정을 위하여 준비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즐거움의 대부분은 우리의 친척, 부부, 자녀간에 이루어지며, 자연 그런 편으로 기울어진다. 결혼은 인간생활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는 결혼생활의 상태로 우리의 육체를 지니고 살게 된다. 간음을 금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의 타고 난 욕망이 야수적이어서는 안 되고, 일정한 방향과 통제하에 충족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이 결혼의 과정을 열망하여 또한 그대로 해나간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며 또한 자녀들을 결혼시킨다. 그래야 인간 세계에 필요한 일군들을 공급하게 되고, 한 세대가 지나고 다른 세대가 오게 되며 또 자손들을 갖게 되어 자기들의 노력의 열매 특히 미래의 시대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될 사람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곧 결혼에 의하여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니”(말 2:15) 하나님을 섬길 자손이며 하나님에게 한 세대가 될 자손이다.

2. 내세에 있을 일은 전혀 다르다. 그 주요성과 고귀성으로 보아서 저 세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은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가시 세계와 미래의 가시 세계가 있으며, 이것은 우리 누구나의 관심사로써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비교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각과 주의는 둘 중의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선택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자.

(1) 저 세상의 주민은 누가 될는지, 그런 사람은 그 세상에서 살 만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하여 저 세상을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이해가 깊은 사람이어야 하며 성령에 의하여 그들 안에서 역사 하심으로 성령과의 거룩한 만남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저 나라를 위하여 준비하도록 하신다. 이들은 그들 자신에게는 저 세상의 주민이 될 만한 법적인 정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이를 위하여 공로를 세운 것도 없다. 그러나 복음적인 가치는 가지고 있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소유를 대속하기 위하여 지불하신 헤아릴 수 없는 값이 있는 것이다. 이 값으로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화롭게 되었으며 저 세상의 주민이 되기에 합당하게 되었다. 부패된 성품에 있는 못마땅한 요소들은 제거해버리고, 영혼의 기질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 세상의 주민의 자격에 합당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저 세상을 얻을 수 있게 되고 또한 자격을 받게 된다. 이것은 저 세상을 얻게 되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며, 거기에 미치지 못할 위험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저 나라를 얻기 위하여 달려가야 한다. 저 나라를 믿는 사람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리니 곧 복 받은 부활을 얻을 것이며, 심판의 부활은(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요 5:29) 사망으로의 부활, 둘째 사망 곧 사망으로부터 가 아닌 영원한 사망이다.

(2) 저 세상의 주민의 행복한 상태는 “눈으로 보질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전 2:9). 그러면 주님께서 저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알아보자.

[1]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 주님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온전히 주님의 즐거움에 휩싸여서 신랑으로서 신부에게서의 즐거움을 필요를 하지 않는다. 사랑의 세상인 저 세상에서의 사랑은 모두 고상하여서 감정의 세상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즐기는 가장 순결하고 가장 즐거운 사랑도 마치 일식이 되는 것처럼 가려져 버린다. 육체 자체가 영적인 육체가 될 것이며 감정적 쾌락은 다 없어지고, 완전히 거룩한 것만 있어서 죄로부터의 예방제로서의 결혼을 할 필요가 없다.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에는 불결한 것을 지니고 있을 수 없다.

[2]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다.” 이것은 저희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도 된다. 이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는 사망으로 인하여 생기는 빈곳을 채우기 위하여 결혼해야 한다. 그러나 무덤에 장사 지내는 일이 없는 저 세상에서는 결혼이 필요치 않다. 이 사실은 사망이 다시는 없는 저 세상의 즐거움을 빛나게 한다. 이 세상에서는 이 사람이 모든 아름다움을 더럽게 하고, 모든 즐거움을 시들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사망이 다스린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는 사망이 영원히 없어져 버린다.

[3] “저희는 천사와 동등이요.” 다른 복음서에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천사와 동등이요”라고 기록되었다. 곧 천사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영광과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린다. 이들은 같은 광경을 볼 것이며 같은 일을 하게 되며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즐거움을 누린다. 성자들이 하늘로 올라갈 때에는 하늘나라에 귀화되고, 성격으로는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지불하신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으면”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유로 태어난 천사들과 동등한 특권을 갖게 되는데 그 천사들은 저 하늘나라의 원주민들이며 토착민들이다. 그들은 천사들과 친구가 될 것이며 그들을 정답게 사랑하는 복 받은 영들과 담화하며, 이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온 많은 무리들과 한패가 되어 교제하게 된다.

[4]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우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 곧 “아들들의 기업으로 아들의 명분을 다하게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리라” 하였다(롬 8:23). 그러므로 육체가 무덤으로부터 구속을 받을 때까지는 양자가 다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라”(요일 3:2). 우리는 아들의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 있지만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는 완성되지는 않는다.

[5]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미래의 상태에서 등용되고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그들은 저 세상에서 태어나 그 가족에 속하며, 이 세상에서 이를 위하여 교육을 받았고 또한 거기에서 자기들의 유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난 부활의 자녀들만 당신의 자녀로 시인하시며, 이들은 영의 세계에 결연되어 있으며, 저 세상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으며, 그 가정의 자녀들이다. 이 세상의 인간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간다.” 이 시대와 이 세대의 자녀들은 좋고 나쁘고 다 저희끼리 결혼하며 자기들의 자녀들을 결혼시킨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가정을 일으키고 다스려 나가며 또한 가정을 위하여 준비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즐거움의 대부분은 우리의 친척, 부부, 자녀간에 이루어지며, 자연 그런 편으로 기울어진다. 결혼은 인간생활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는 결혼생활의 상태로 우리의 육체를 지니고 살게 된다. 간음을 금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의 타고 난 욕망이 야수적이어서는 안 되고, 일정한 방향과 통제하에 충족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이 결혼의 과정을 열망하여 또한 그대로 해나간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며 또한 자녀들을 결혼시킨다. 그래야 인간 세계에 필요한 일군들을 공급하게 되고, 한 세대가 지나고 다른 세대가 오게 되며 또 자손들을 갖게 되어 자기들의 노력의 열매 특히 미래의 시대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될 사람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곧 결혼에 의하여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니”(말 2:15) 하나님을 섬길 자손이며 하나님에게 한 세대가 될 자손이다.내세에 있을 일은 전혀 다르다. 그 주요성과 고귀성으로 보아서 저 세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은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가시 세계와 미래의 가시 세계가 있으며, 이것은 우리 누구나의 관심사로써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비교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각과 주의는 둘 중의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선택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자.저 세상의 주민은 누가 될는지, 그런 사람은 그 세상에서 살 만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하여 저 세상을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이해가 깊은 사람이어야 하며 성령에 의하여 그들 안에서 역사 하심으로 성령과의 거룩한 만남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저 나라를 위하여 준비하도록 하신다. 이들은 그들 자신에게는 저 세상의 주민이 될 만한 법적인 정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이를 위하여 공로를 세운 것도 없다. 그러나 복음적인 가치는 가지고 있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소유를 대속하기 위하여 지불하신 헤아릴 수 없는 값이 있는 것이다. 이 값으로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화롭게 되었으며 저 세상의 주민이 되기에 합당하게 되었다. 부패된 성품에 있는 못마땅한 요소들은 제거해버리고, 영혼의 기질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 세상의 주민의 자격에 합당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저 세상을 얻을 수 있게 되고 또한 자격을 받게 된다. 이것은 저 세상을 얻게 되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며, 거기에 미치지 못할 위험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저 나라를 얻기 위하여 달려가야 한다. 저 나라를 믿는 사람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리니 곧 복 받은 부활을 얻을 것이며, 심판의 부활은(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요 5:29) 사망으로의 부활, 둘째 사망 곧 사망으로부터 가 아닌 영원한 사망이다.저 세상의 주민의 행복한 상태는 “눈으로 보질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전 2:9). 그러면 주님께서 저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알아보자.”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 주님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온전히 주님의 즐거움에 휩싸여서 신랑으로서 신부에게서의 즐거움을 필요를 하지 않는다. 사랑의 세상인 저 세상에서의 사랑은 모두 고상하여서 감정의 세상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즐기는 가장 순결하고 가장 즐거운 사랑도 마치 일식이 되는 것처럼 가려져 버린다. 육체 자체가 영적인 육체가 될 것이며 감정적 쾌락은 다 없어지고, 완전히 거룩한 것만 있어서 죄로부터의 예방제로서의 결혼을 할 필요가 없다.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에는 불결한 것을 지니고 있을 수 없다.”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다.” 이것은 저희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도 된다. 이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는 사망으로 인하여 생기는 빈곳을 채우기 위하여 결혼해야 한다. 그러나 무덤에 장사 지내는 일이 없는 저 세상에서는 결혼이 필요치 않다. 이 사실은 사망이 다시는 없는 저 세상의 즐거움을 빛나게 한다. 이 세상에서는 이 사람이 모든 아름다움을 더럽게 하고, 모든 즐거움을 시들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사망이 다스린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는 사망이 영원히 없어져 버린다.”저희는 천사와 동등이요.” 다른 복음서에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천사와 동등이요”라고 기록되었다. 곧 천사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영광과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린다. 이들은 같은 광경을 볼 것이며 같은 일을 하게 되며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즐거움을 누린다. 성자들이 하늘로 올라갈 때에는 하늘나라에 귀화되고, 성격으로는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지불하신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으면”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유로 태어난 천사들과 동등한 특권을 갖게 되는데 그 천사들은 저 하늘나라의 원주민들이며 토착민들이다. 그들은 천사들과 친구가 될 것이며 그들을 정답게 사랑하는 복 받은 영들과 담화하며, 이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온 많은 무리들과 한패가 되어 교제하게 된다.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우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 곧 “아들들의 기업으로 아들의 명분을 다하게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리라” 하였다(롬 8:23). 그러므로 육체가 무덤으로부터 구속을 받을 때까지는 양자가 다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라”(요일 3:2). 우리는 아들의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 있지만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는 완성되지는 않는다.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미래의 상태에서 등용되고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그들은 저 세상에서 태어나 그 가족에 속하며, 이 세상에서 이를 위하여 교육을 받았고 또한 거기에서 자기들의 유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난 부활의 자녀들만 당신의 자녀로 시인하시며, 이들은 영의 세계에 결연되어 있으며, 저 세상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으며, 그 가정의 자녀들이다. Ⅳ. 이 세상에서의 생명 후에는 다른 생명이 있음은 의심 없는 진리이며 교회의 초대 시대에 이 진리에 대한 뛰어난 발견을 했다(37, 38절).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하였느니라.” 아브라함, 이삭 및 야곱은 우리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죽었었다. 그들은 여러 해 전에 이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육체는 막벨라의 굴속에서 흙으로 변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실 수 있으실까?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원천이신 분이 보통 흙과 다름이 없는 굴속에서 흙이 된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관계를 계속하고 계시다면 이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다른 세상에 가서 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누가는 여기에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말을 첨가했는데 이 말은 곧 그들과 같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믿는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죽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고, 그들의 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전 12:7)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살고, 그들의 몸은 끝날에 다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살 것이다. “그는 믿는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다”(롬 4:17).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뜻도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의 하나님이라 부르신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더 없는 복이며 행운이고, 그들에게 전능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창 17:1) 그들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다(창 15:1). 그런데 그들의 역사를 살펴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위하여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의 큰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계획과 범위로 응답해 주신 것이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 세상에서의 생 이후에 다른 생이 있어서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하신 바를 완전히 이해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래야 그들의 참 하나님이 되셔서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실 수 있으며, 당신과 함께 있는 모든 영혼들을 행복하게 하시되 모든 영혼에게 또한 각 영혼에게 만족하게 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20:39 서기관들의 패배(누가복음 20:39-47)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이었으며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설해 주는 자들로서 지식과 명예로 평판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은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 왔던 서기관 중의 몇 사람을 보게 되는 이들에 관한 기사에서 네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다른 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Ⅰ.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께서 하신 답변을 칭찬한 서기관이 있는 것이다.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39절). 주님께서는 주님의 반대자들에게서 주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는 증언을 들으셨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이 주님의 반대자이었던 것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종교의 기본적인 관례를 정당하다고 인정하시고 그것을 변호하신 것으로 보였을 때에 서기관들까지도 주님의 하시는 일을 칭찬하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옳게 여겼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 중에도 많은 수가 이러한 정신까지도 부족하다. Ⅱ. 이 때에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의 지혜와 권위로 인하여 경외심을 일으키게 되었다(40절).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왜냐하면 서기관들이 주님과 논쟁하기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너무도 어려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비록 약하기는 하지만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이기 원해서 무슨 질문이든지 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교훈에 반대하고 트집잡으려고 하는 사두개인들은 아무 것도 묻지 못하였다. Ⅲ. 서기관들은 주님의 메시야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어리둥절하여 꽉 막히고 말았다(41절). 여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알았었다. 소경들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18:39). 그리고 다윗이 메시야를 자기의 주님이라고 부른 것도 분명하다(42, 42절). 주님이라고 한 것은 자기의 소유자, 치리자 또한 후원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다”(시 110:1). 하나님께서 메시야에게 말씀하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그의 주님이라고 부르셨을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주님이시라면 왜 우리는 그를 그의 아들이라고 부를까? 이것을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생각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모순되는 듯한 이 문제를 조화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다윗의 주님이면서도 다윗의 자손이신 인간 예수로 모실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시다”(계 22:16). 주님의 인간성에 의하여 주님은 다윗의 자손 곧 다윗의 가족의 지체이시었다. 그리고 주님의 신성에 의하여 주님은 다윗의 뿌리로써 주님으로 인하여 다윗이 존재했으며 생활했고 또한 모든 은혜의 공급을 받았다. Ⅳ. 여기에는 서기관들의 나쁜 성격이 기록되어 있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삼가라는 공개적인 주의의 말씀이 있다(45-47절). 이 기사는 마가복음 12장 38절에는 여기와 꼭 같이 기록되어 있고 마태복음 23장에는 보다 과장해서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은 다음의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1. “그들로 인하여 죄의 길로 끌려 들어갈까 조심하라. 그들의 생활태도를 배우고 그들의 생활수단을 좇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들이 지배를 받고 있는 그 위선적인 정신을 조심하라. 그들이 유대교 안에서 하는 짓을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하지 말라.”

2. 그들로 인하여 난처한 지경에 빠질까 조심하라. 이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말씀과 같은 뜻이다(마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이 이러한 짓을 할 것이다. 그들을 삼가라. 왜냐하면,”

(1) “그들은 교만하고 불손한 자들이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거리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마치 상류계급의 사람들인 것처럼(일하는 사람들은 허리를 동이고 당겼기 때문에) 점잖을 빼고 지위가 높은 사람인 것처럼 “한다.” 겉치레로 위엄을 보이려고 했다. 그들은 심중에 백성들이 장거리에서 그들을 보고 절 받기를 좋아했으며,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기를 원했으며 많은 사람이 모인 모든 곳에서 자기들에 우선권을 주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었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높은 좌석에 앉고, 잔치자리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에 앉게 될 때에는 자기들을 과대평가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보았다. 자기들은 왕이나 된 듯한 태도였다.

(2) “그들은 탐욕이 많았으며 다른 사람을 압박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종교를 가면적인 것이며, 범죄를 가리우는 덮개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로서 과부들의 재산을 자기들의 수중에 넣었으며, 간계를 쓰거나 다른 수단으로 그들의 재산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고, 또한 그들에게 기대서 살았으며 과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먹으며 지냈다. 과부들은 그들의 만만한 낚시밥 이었다. 왜냐하면 과부들은 서기관들의 허울좋은 겉모양에 미혹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 아마 과부들이 슬퍼하는 중에 있을 때에 자기들이 과부들을 측은히 여길 뿐 아니라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과부들과 오래 기도했을 것이다. 이렇게 과부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힘써서 그들에게 돈을 받고 또 손아귀에 넣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식적인 경건한 사람들에게 과부들은 정녕코 많은 돈을 맡겼을 것이나, 그 경건한 체하는 서기관들은 저희들의 것으로 삼아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들의 운명을 다음의 몇 마디로 판단하셨다. “이들은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이들은 이중의 천벌 곧 불쌍한 과부들을 능욕하여 그들의 집을 삼켜버린 죄와 종교 특히 기도를 악용하여 자기들의 세속적인 악한 계율을 보다 그럴듯하고도 유효하게 성취하기 위한 핑계로 삼은 죄의 벌을 받을 것이다. 가식적인 경건은 이중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들로 인하여 죄의 길로 끌려 들어갈까 조심하라. 그들의 생활태도를 배우고 그들의 생활수단을 좇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들이 지배를 받고 있는 그 위선적인 정신을 조심하라. 그들이 유대교 안에서 하는 짓을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하지 말라.”그들로 인하여 난처한 지경에 빠질까 조심하라. 이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말씀과 같은 뜻이다(마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이 이러한 짓을 할 것이다. 그들을 삼가라. 왜냐하면,””그들은 교만하고 불손한 자들이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거리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마치 상류계급의 사람들인 것처럼(일하는 사람들은 허리를 동이고 당겼기 때문에) 점잖을 빼고 지위가 높은 사람인 것처럼 “한다.” 겉치레로 위엄을 보이려고 했다. 그들은 심중에 백성들이 장거리에서 그들을 보고 절 받기를 좋아했으며,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기를 원했으며 많은 사람이 모인 모든 곳에서 자기들에 우선권을 주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었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높은 좌석에 앉고, 잔치자리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에 앉게 될 때에는 자기들을 과대평가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보았다. 자기들은 왕이나 된 듯한 태도였다.”그들은 탐욕이 많았으며 다른 사람을 압박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종교를 가면적인 것이며, 범죄를 가리우는 덮개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로서 과부들의 재산을 자기들의 수중에 넣었으며, 간계를 쓰거나 다른 수단으로 그들의 재산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고, 또한 그들에게 기대서 살았으며 과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먹으며 지냈다. 과부들은 그들의 만만한 낚시밥 이었다. 왜냐하면 과부들은 서기관들의 허울좋은 겉모양에 미혹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 아마 과부들이 슬퍼하는 중에 있을 때에 자기들이 과부들을 측은히 여길 뿐 아니라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과부들과 오래 기도했을 것이다. 이렇게 과부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힘써서 그들에게 돈을 받고 또 손아귀에 넣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식적인 경건한 사람들에게 과부들은 정녕코 많은 돈을 맡겼을 것이나, 그 경건한 체하는 서기관들은 저희들의 것으로 삼아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들의 운명을 다음의 몇 마디로 판단하셨다. “이들은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이들은 이중의 천벌 곧 불쌍한 과부들을 능욕하여 그들의 집을 삼켜버린 죄와 종교 특히 기도를 악용하여 자기들의 세속적인 악한 계율을 보다 그럴듯하고도 유효하게 성취하기 위한 핑계로 삼은 죄의 벌을 받을 것이다. 가식적인 경건은 이중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20 장. 탐욕의 포도원인 예루살렘에 들어간 아들

누가복음 20장은 예루살렘에서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께서 마지막 격돌을 하는 모습이다.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헤롯당 모두는 비장의 카드로 예수를 공격했지만 전패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의 내용보다 간략하게 제시했다.

1. [눅 20:1-8] 예수의 권위의 근거는(마 21:23-27; 막 11:27-33).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할 때에,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장로들과 함께 와서 “권위(authority)”에 대해서 질문했다(1-2절).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의 권위에 대해서 반문하셨다(3-6절). 예수의 반문(反問)은 세례 요한의 권위를 알지 못한다면 자기의 권위를 설명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다(6절). 백성의 선생이라 자처한 위인들이 백성의 생각을 두려워하고 염려해서 말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누가 선생이고, 통치자인가? 그들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백성은 왜 자기를 두려워하는 그들을 선생이라고 존경할까? 탐욕이 얽히고 얽힌 구조이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께서도 그들에게 자기 권위의 근거를 말씀하지 않으셨다(8절). 그럼에도 그들은 더 이상 답변을 요구할 수 없었다. 예수의 권위는 어디 있을까? 요한복음에서 요한 사도는 아버지에게 있고, 아들 자체에게 있다고 진술한다. 아들을 증언하는 최초 증언자는 아버지이시고(마 17:1-13, 막 9:2-13, 눅 9:28-36), 항상 그리고 최종 증언자는 성령이시다(참고 행 1:8, 계 2-3장). 예수의 권위(authority)를 위탁받은 교회는 신적 권위(Divine authority)가 있다. 우리는 예수의 권위나 탁월성을 논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고 전하는 백성이다.

2. [눅 20:9-18] 악한 포도원 지기 비유(마 21:33-46; 막 12:1-12). 예수께서 악한 포도원 지기를 비유를 백성에게 말씀하셨다(9절). 포도원을 조성하고 농부(tenants, 소작농, 고용인)를 고용하고 타국에서, 소작료를 받으려는 종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때리고 지불하지 않았다. 세 번까지 거부하자, 결국 주인은 아들을 보냈다(13절). 그런데 포도원의 농부들은 아들을 보면서 죽여 포도원을 탈취하자고 합의하여 죽였다. 그렇다면 그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께서 특이하게 포도원에서 내 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16절). 그런데 그들의 답변은 더욱 특이하다.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16절, Surely not, 절대로 일어나면 안됩니다).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셨다(17절). 그것은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말씀이다. 유대인이 버린 돌이 모퉁이돌이 되어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다(시 118:22).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셨다. 그 돌을 공격하는 것은 곧 가루처럼 될 것이다(18절). 버려진 돌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고, 모퉁이 돌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유대인이 버린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죽임받고 밖으로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흘리신 피로 교회를 세워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셨다. 교회의 제자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미워하는 것이다(요 15:18).

3. [눅 20:19-26] 세금 문제(마 22:15-22; 막 12:13-17). 서기관, 대제사장들이 예수께서 하신 비유가 자기들임을 파악했지만 백성 때문에 잡지 못했다(19절). 결국 그들은 정치범으로 몰아서 총독에게 고발하려고 협의했다(20절). 당시에 민감한 세금 문제를 예수께 질문하여 책을 잡으려고 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취하지 않고,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고 하셨다(21절). 그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24-25절). 그들은 예수에 대해서 어떤 책(責)을 잡지 못하고 물러갔다(26절).

4. [눅 20:27-40] 부활 논쟁(마 22:23-33; 막 12:18-27). 예수께 사두개인들이(Sadducees) 와서 계대 제도(繼代結婚, levirate marriage, 수혼제,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 신 25:5)를 놓고 질문했다.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those who deny that there is a resurrection).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그룹으로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채택하여, 사후 세계에 대해서 독단한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독단 메커니즘은 7형제와 한 여인의 관계를 제시했다(29-33절).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도 사랑도 안중에 없는 구도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확하게 가르치셨다. 사후 세계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으며(34-35절), 천사와 같은 상태라고 말씀하셨다(36절).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38절). 부활 세계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서기관이 동의했다(39절). 사두개인은 더 이상 질문할 수 없었다(40절). 사두개인들은 허망한 사색(idle speculation)에서 자기 귀결을 낸 구도이다. 계대제도는 혼인관계가 아니라, 형의 후손을 계승하기 위한 제도이다. 형수와 관계를 맺어도 동생의 아내가 되는 구조가 아니다. 동생이 형의 아내와 아들로 보호하여 양육하는 제도이다. 헌신적인 가계법을 호기심으로 변용한 것은 자기 욕망(lust)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면서, 욕망을 폭로시켰다. 서기관은 부활은 믿었지만, 부활 능력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부활은 대속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막연한 종교심으로 극락왕생이나 낙원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세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이루신 영원한 세계이다.

5. [눅 20:41-44] 그리스도의 주이신 메시아(마 22:41-46; 막 12:35-37).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다윗의 관계를 질문했다(41절). 참고 누가복음은 “그들에게”이니 사두개인이고, 마태복음은 바리새인에게(마 22:41), 마가복음은 서기관들이(막 12:35) 예수께 질문한 내용이다. 세 복음서의 진술이 약간 차이를 갖고 있지만, 총합하면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다윗의 후손이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구약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르침을 따르는 당시 유대인들은 정치적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만을 고대하기만 했다.

시편에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했는데 어떻게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44절).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지만, 다윗은 메시아를 향해서 경배하는 피조물이었음을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아브라함이 내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요 8:56). 구약시대에 믿음의 선조들은 오실 메시아를 믿고 경배하였다(Logos asarkos). 오실 메시아를 믿었던 백성들은 눈으로 보아도 믿어지지 않은 메시아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았지만, 오실 메시아를 정치적으로 고대했던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처럼 예루살렘을 회복할 위인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사도들도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만을 고대했지만(행 1:6), 성령을 받은 뒤로는 그 말을 버리고 오직 예수만을 증거했다.

6. [눅 20:45-47] 서기관을 삼가라(마 23:1-36; 막 12:38-40; 눅 11:37-5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다(46절). 서기관들 자체를 삼가라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이 행하는 외식을 금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문안받는 것을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46-47절). 우리시대에도 서기관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많다. 교회지도자는 서기관처럼 되지 않아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서기관과 같은 지도자를 본받거나 존경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7. 전능하신 하나님, 예루살렘의 모든 지식을 동원했지만 예수님을 모욕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게 한 것이 1세기 예루살렘이었고, 지금 우리시대에도 동일한 악의 모습입니다. 주의 지체인 우리가 가는 길이 쉽지 않지만, 주께서 주신 십자가입니다. 주께서 저에게 주신 십자가는 지고 가겠나이다. 주께서 함께 멍에를 메어주시기에 위로와 능력을 주심도 믿으며 기대합니다.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주의 십자가를 지고 가겠나이다. 지혜와 힘을 주옵소서. 주 예수께서 모든 것을 극복하셨지만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이 땅에서 승리하는 것이 번영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고 주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며 영광을 나타낼 수 있도록 성령의 지헤와 권능을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한규의 온새기&월새기

누가복음 20장 9-18절

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 안에서 깨어지라 (누가복음 20장 9-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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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들 비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교훈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1. 오래 인내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며칠 전 성전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다(9절). 한 사람은 하나님을 뜻하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뜻하고 농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뜻한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지경을 맡아 관리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추수 때가 되어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그를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10절).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보내자 두 번째로 보낸 종은 더 심하게 때리고 능욕까지 해서 거저 돌려보냈다(11절). 그래도 포도원 주인이 진노하지 않고 세 번째 종을 보내자 그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았다(12절). 그때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을 바로 진멸하지 않는 모습은 택한 백성의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바로 진멸하는 대신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을 보내신다. 그 하나님의 인내를 배워서 불의한 세상을 볼 때 일단 먼저 인내하는 마음을 가지라. 불의에 대해 쉽게 흥분하거나 쉽게 낙심하지 말라.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를 겸비하라. 특히 힘 있는 자리나 공적인 리더의 자리에 있을 때는 더 밸런스를 갖추고 성급한 판단을 삼가라. 힘들 때도 인내해야 하지만 남에 대해 판단할 때도 인내하라. 하나님의 인내가 있었기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나를 향한 약속은 피로 맺어진 언약이다. 언약이란 단어에는 하나님의 인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나의 죄와 허물로 인해 속상해도 바로 진멸하시지 않는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선택된 백성을 진멸하려다가 뜻을 돌이키셨다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변함없는 하나님이 뜻을 변화시켰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뜻을 변화시키신 셈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다.

2.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

주인은 세 번째 종이 상처를 입고 쫓겨 오자 “어찌할까?” 하고 탄식한 후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혹시 존대할까 해서 아들을 보냈다(13절). 그때 포도원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예감하고도 보냈다. 그 장면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잘 보여 준다. 나의 고난과 문제와 기도 제목에 대해 하나님이 오랫동안 침묵하셔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변함없이 내 삶의 저변에 흐르고 있음을 잊지 말라.

2차 세계 대전 중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는데 그 중 약 150만 명이 어린이였다. 그들은 죄도 없이 죽어가면서 가스실 벽과 쪽지에 이런 글들을 남겼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이천 년간 헤매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저는 그분을 믿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도와 절규에도 하나님은 종종 침묵하신다. 어떻게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불의한 고난 상황을 그냥 방치하시는가? 많은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다가 시험에 든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침묵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얼굴과 마음을 완전히 돌리신 것은 아니다. 나중에 보면 “이래서 하나님이 그때 그렇게 침묵하셨구나.” 하고 찬탄할 때가 온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며 나의 믿음이 더 깊어지기를 원하시고 때가 되면 모든 아픔과 슬픔을 넘어서는 최상의 상황을 펼쳐 주실 것이다.

3.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아들을 보고 서로 의논하여 말했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14절).” 농부들의 의논하는 묘사는 예수님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논의하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결국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여 포도원의 소유권과 아들의 유산을 차지하자고 모의했다. 그리고 그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다(15절). 그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연상시킨다.

마침내 농부들의 악한 모습에 포도원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라고 했다(16절). 그것은 교권주의자들을 진멸하고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을 상징하는 비유였다. 실제로 주후 70년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손에 진멸되어 약 1900년 가까이 나라 없는 백성으로 전 세계를 떠돌았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심판하실 때는 무섭게 심판하신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 사랑을 앞세워 행동하되 잘못된 사람도 무조건 사랑하고 잘못된 것도 무조건 덮어 주어야 한다는 착한 성도 콤플렉스에 빠지지 말라. 착한 것보다 바른 것이 우선이다. 잘못된 길로 가면서 착한 것은 나도 망치고 남도 망치고 교회와 사회도 망친다. 결국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는 것은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공의로 잘 판단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세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면 판단도 주의하게 되고 비교적 공의로운 판단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도 조심스럽게 대하고 내가 살아가는 시간도 하나님의 시간처럼 소중히 아끼고 나의 인생 여정도 하나님의 계획 하에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여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사려 깊게 행동하라. 내 뜻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려는 사람을 통해 세상은 점차 아름답게 변화된다.

4. 역전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농부들이 진멸된다는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대략 짐작하고 백성들이 말했다. “그렇게 되지 말기를 원합니다(16절).”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을 보며 말씀하셨다.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17-18절).”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은 악한 농부들 같은 당시 교권주의자들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버려진 돌처럼 되었지만 결국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머릿돌이 되셨다는 암시의 말씀이다. 그처럼 모퉁이 돌로 버려졌다가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면 누구라도 얼마든지 역전 인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역전 인생을 꿈꾸고 더 나아가 누군가가 역전 인생을 꿈꾸게 만들라. 자기 상처와 슬픔에 지나치게 몰입된 사람에게 위로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변화의 의지를 더 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처지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의 슬픔을 조롱하지 말고 그와 함께해 주라. 절망한 사람에게 부활의 역전 역사를 꿈꾸게 하고 실제로 그런 역사가 나타나도록 돕는다면 그것처럼 내게 참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주는 것은 없다.

남의 것을 빼앗고 삼키려는 인생과 순박하게 하늘을 의지해 사는 인생은 조만간 역전된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 하나님을 변함없이 의지하고 기도하고 내 할 일을 하면 모퉁이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역사도 나타나고 천국에서 빛나는 존재가 된다. 지금도 아무런 죄와 잘못도 없이 절망 중에 신음하는 사람이 있다. 그 곁에 서서 그를 버린 돌에서 머릿돌로 만들려고 힘쓰면 조만간 내게도 영광스러운 역전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 예수님 안에서 깨어지라 >

결국 당시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깨뜨리려고 했다가 스스로 깨어지고 더 나아가 가루로 만들어져서 전 세계로 흩어졌다. 그것은 예수님을 대적한 삶의 말로를 잘 보여 준다. 사람이 진짜로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의 돌 위로 나를 떨어뜨려 깨뜨릴 줄 알아야 한다. 언젠가 심판 때가 오기 전에 먼저 나를 깨뜨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는 길이 사는 길이고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길이다.

가끔 보면 믿음으로 기다리며 행동했는데 오랫동안 승리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왜 그런 기다림이 오래 지속되는가? 그것은 내가 조금 더 깨지고 그 후에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기다림이 계속되면 힘들지만 기다림이 힘들다는 마음이 있는 것 자체가 아직 내가 깨지지 않고 내 속의 욕심이 걸러지지 않은 증거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잘 아신다. 그 하나님께서 아직 내게 문제가 남아 있게 하셨다면 조금 더 나를 깨뜨리려고 하라.

고난과 문제 중에 너무 의문을 품거나 너무 질문을 하지 말라. 여기저기 상담도 너무 다니지 말라. 그런 모습 자체가 아직도 내가 깨어지지 않은 모습이고 여전히 하나님과 씨름하겠다는 모습이다. 더 씨름하려고 하기보다 더 빨리 항복해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라. 하나님 안에서 항복해야 행복도 따라온다. 아직 미운 사람이 불쑥불쑥 생각나면 그때를 “나를 더 깨뜨리소서.”라고 기도하는 기회로 삼으라. 하나님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변화되기보다 내가 변화되기를 원하신다.

마리아처럼 나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리라. 내가 깨뜨려야 할 가장 소중한 옥합은 바로 나 자신이다. 육적인 자아(ego)를 깨뜨릴 때 참된 자신(self)을 찾는다. 내게 어떤 기다림이 계속되는 것은 내가 기다리는 것보다 사실상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나의 자아가 깨어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내가 오래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은 더 오래 기다리시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라.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내게 속히 평안을 주기를 원하신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나를 더 예수님 안에서 깨뜨리고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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