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표 율사 금산사 | 불교고승열전 19집 진표율사 01~20 상위 47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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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표는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 유가론(瑜伽論)과 유식론(唯識論)을 중심교학으로 하여 연구체계화한 법상종(法相宗)을 금산사(金山寺)에서 개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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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7/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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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율사(眞表律師)와 미륵신앙 – 대순회보 98호 상생의 길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불을 조성함으로써 금산사를 미륵신앙의 본산(本山)으로 만들었으며, 또한 한국 고대사회에서 미륵신앙을 민중의 신앙으로 뿌리내리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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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ebzine.daesoon.org

Date Published: 7/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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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신앙 원조 진표율사가 선택한 김제 금산사 … – 주간조선

그리고 그 사찰이 김제 금산사(金山寺)인 것이다. 진표 뒤에는 꼭 율사(律師)라는 호칭이 따라 붙는다.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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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eekly.chosun.com

Date Published: 6/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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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기행<102>진표율사 – 대구일보

진표율사가 창건한 금산사의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유일한 통층으로 건축된 3층 법당. 내부에는 미륵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진표율사는 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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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daegu.com

Date Published: 7/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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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고승열전 19집 진표율사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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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진표 율사 금산사

  • Author: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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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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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사찰] 진표율사의 철저한 참회와 실천도량 김제 금산사

“대장부! 계를 구하기 위해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미륵성불경>에 “부처님의 입멸 후 56억7000만년이 지나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 8만세가 되면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부처를 이루고 세 차례의 법회를 열어 96억, 94억, 92억의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했다. 이러한 미륵신앙은 우리나라에서는 원효, 진표스님을 통해 발전됐다.

원효는 <미륵상생경종요>에서 “도솔천에 상생코자 하는 사람은 먼저 항상 열 가지 착한 일을 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계율을 지키며, 미륵의 명호를 불러 죄를 참회하고 미륵보살을 관하라. 자신의 십선공덕을 믿고 불탑을 청소하고 향과 꽃을 공양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참회와 실천을 제일 덕목으로 여긴 사찰이 금산사이다.

금산사 미륵전. 금산사를 대표하는 전각으로 국보다. 밖에서 보면 3층 팔작지붕인데 안에는 통층이다. 1층은 ‘자비로운 어머니’란 뜻으로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 진표율사 부사의방 3년 기도…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표율사는 김제 출생으로 11살 때 30여 마리의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두었는데 다음 해 봄 버드나무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는 개구리를 보고, 잘못을 뉘우치며 12살 때 모악산 금산사로 출가했다. 진표율사는 27살 때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3년간 기도하였으나, 수기를 받지 못하자 망신참회(亡身懺悔)를 하니 지장보살이 가사와 바리때를 전해 주었다.

율사가 더욱 치열히 정진하니 미륵보살은 이마를 만져주면서 “대장부로다. 계를 구하기 위해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하며, 186개 간자(簡子)와 더불어 2개의 간자를 더 주었는데,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뼈인데, 제8은 첫 깨달음으로 성불을 나타낸 것이고, 제9는 원래의 깨달음이니 종자(種子)이다. 다음 생에는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 했다. 지장보살은 수기를 주고 계본을 전해주었다. 임인년(762) 4월27일에 율사는 마정수기(摩頂授記)와 교법(敎法)을 받고는 두 보살에게 예배를 드린 다음 부사의방에서 내려왔다.

진표율사는 점찰교법(占察敎法)으로 과거에 지은 죄업의 참회로 업장을 소멸하면 복락을 누릴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백제 유민들의 호응을 얻어 금산사를 중창했다. 율사는 갑진년(764) 6월9일부터 미륵장육금상(彌勒丈六金像)을 주성하기 시작하여 병오년(766) 5월1일에 금당에 모시고 금당 남쪽 벽에 미륵보살이 내려와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린 후 21일 동안 점찰도량을 열어 고통에 빠져 있는 대중들을 교화했다.

미륵전의 미륵 장육상.

➲ 금산사 최고 전성기…

금산사 최고의 전성기는 혜덕왕사 소현에 의해서인데, 혜덕왕사는 법천사 지광국사의 제자로 11살 때 출가하여 문종 33년(1079)에 금산사 주지가 되어 진표율사의 중건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신앙을 선양했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금산사는 수문 대사가 선조 34년(1601)부터 인조 13년(1635)까지 35년에 걸쳐 지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뇌묵 처영대사는 의승군을 1000명을 이끌고 1593년 행주대첩을 비롯한 혁혁한 공을 세워 훗날 정조대왕은 휴정, 유정, 뇌묵 처영대사를 구국 삼화상으로 추존했다. 백곡 처능선사는 현종 2년(1661)에 죽음을 각오하고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疎)’를 올려 불교를 지켰다. 환성 지안선사는 최고의 강백으로 1724년에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1400여 명이 운집했는데 이때 지안선사를 역도의 우두머리로 모함하여, 1729년 유배지 제주도에 도착해서 일주일 만에 순교했다.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房). 진표율사가 3년간 기도하고도 수기를 받지 못하자 망신참회(亡身懺悔)를 하니 지장보살이 가사와 바리때를 전해 주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 금산사 대표하는 전각

국보 62호 미륵전은 금산사를 대표하는 전각으로 높이 19m, 측면 길이15.5m로 밖에서 보면 3층 팔작지붕인데 안에는 통층이다. 1층은 미륵은 뱃속에 있을 때도 그의 어머니를 자비롭게 해 특별히 ‘자비로운 어머니’란 뜻으로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수 아래에서 세 차례의 법회를 나타낸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용화세계 미륵불이 계시기에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전각 안에는 여원인과 시무외인을 한 높이 약12m의 미륵부처님과 약 9m의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원래 미륵불만 모셨는데 임진왜란으로 훼손되자 수문대사가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다. 1935년 화재로 미륵불이 소실되자 1938년에 조각가 김복진이 석고에 도금하여 모셨고, 협시보살은 수문대사 당시의 모습이다. 지하에는 진표율사 당시의 미륵불 연화대가 남아 있다.

미륵전 포벽에는 스님이 기생의 등에 시를 쓰는 특이한 그림이 있다. 당나라 벼슬아치 퇴지 한유가 불교를 얕잡아 보고 기생 홍련을 보내 태전선사를 파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홍련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태전선사가 그의 등에 시를 써주어 한유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十年不下鷲融峯(십년동안 축융봉을 내려가지 않고서)/ 觀色觀空色卽空(색과 공을 관하니 색이 곧 공이라)/ 如何曹溪一適水(어찌 조계의 한 방울 물이 흘러서)/ 肯墮紅蓮一葉中(한 잎 홍련에 떨어짐이 옳겠는가)”

방등계단. 보물이다.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보리를 증득하려는 사람에게 수계하기 때문에 방등계단이라 했다.

➲ 특별한 방등계단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은 특별하다. 방등계단의 ‘방등’은 대승경전을, ‘계단’은 수계의식을 하는 장소이다.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보리를 증득하려는 사람에게 수계하기 때문에 방등계단이라 했다. <대방등다라니경>에 “지극한 마음으로 육근으로 지은 죄를 드러내어 고백하고 참회하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세존사리탑 주위를 120번 돌며 다라니를 지송한 후 자리에 앉아 참선을 하면 수명 연장과 현세의 이익을 얻는다”고 했다.

보물 26호인 방등계단은 총 높이 4.2m, 보주형 사리탑 높이 1.2m, 1단의 폭이 12.5m로 중앙에 아홉 마리 용이 사리를 지키고 있어 특이하다.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계단주변에는 사천왕, 천인 등이 사리탑을 외호, 공양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방등계단 옆 보물 25호 고려시대 오층석탑(불탑)은 괴임돌이 있는 상·하 2단의 기단위에 체감이 좋은 5층 탑신을 올렸다. 불탑에는 과거불인 정광여래의 사리 4과, 석가여래 사리 3과와 1492년에 중수한 기록, 소형 형상불이 발견됐다.

또한 1635년에 지은 보물 827호 대장전에는 1644년에 조성한 석가모니, 가섭, 아난 삼존불을 모셨다. 둥근 얼굴, 가늘게 뜬 눈, 입가의 미소 등 친근감이 간다. 특히 타오르는 불꽃 속에 넝쿨로 이어진 연꽃이 두광과 신광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화려하다. 영가스님의 ‘증도가’에 ‘화중생련종불괴(火中生蓮終不壞)’라는 말이 있다. ‘삼계가 불타는 집이어도 부처님의 말씀은 불꽃 속에 핀 연꽃과 같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광배에 표현했다. 금산사는 예나 지금이나 중생들의 아픔을 미륵신앙으로 감싸주는 귀의처로 미래의 희망을 약속한 사찰이다.

미륵전 벽화 속의 태전선사와 기생 홍련. 홍련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태전선사가 그의 등에 시를 써주어 한유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내용이 전해오고 있다.

[불교신문3683호/2021년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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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眞表: fl. 752)는 신라 중기의 고승(高僧)이다.[1] 성은 정(井),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 출신이다.[1]

진표는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 유가론(瑜伽論)과 유식론(唯識論)을 중심교학으로 하여 연구체계화한 법상종(法相宗)을 금산사(金山寺)에서 개종하였다.[2] 또한, 그는 미륵신앙이 강하였는데 미륵설계와 점찰법(占察法)으로 민간을 선도하였으며 대단한 교세를 이룩하였다.[2] 이런 면에서 진표는 법상종을 실천적 종교운동으로 바꾸어놓았다.[1]

그의 제자로 영심(永深) · 보종(普宗) · 신방(信芳) · 체진(體珍) · 진해(珍海) · 진선(眞善) · 석충(釋忠)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山門)의 조사가 되었다.[1]

생애 [ 편집 ]

《해동고승전》의 기록에는 진표가 어려서 활을 잘 쏘았는데 어느 날 논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두고 산에 가서 사냥을 한 후 개구리 일은 잊고 지내다가, 이듬해 봄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생각이 나서 그곳에 가 보니 지난해에 담가 둔 그대로 버들가지에 꿰어진 채 울고 있는 개구리를 보았다 한다.[1] 이에 뉘우치고 불도에 뜻을 두어 12세에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법사(崇濟法寺)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1]

숭제법사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善道)에게 배우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현신(現身)을 맞아 오계(五戒)를 받고 돌아왔으므로 진표가 도통(道通)의 요령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선계산(仙溪山) 불사의암(不思議菴)에 들어가 7야 7일을 고행으로 마음을 닦은 끝에 740년(효성왕 4) 음력 3월 15일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현신을 맞아 정계(淨戒)를 받았다.[1]

다시 영산사에서 도를 닦고 마침내 소원이던 미륵보살의 현신을 맞아 752년(경덕왕 11) 음력 2월에 《점찰경(占察經)》 2권과 간자(簡字: 점치는 대쪽) 189개를 받았다.[1]

그 뒤 경덕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보살계(菩薩戒)를 베풀고 조 7만 7천섬, 견(絹) 500단(端), 황금 50냥을 시주받아, 이것을 여러 사찰에 나누어 주어 불교를 융성케 했다.[1]

각주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미륵신앙 원조 진표율사가 선택한 김제 금산사

미륵신앙의 본산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전경.

우리나라에는 지역감정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지역감정도 한 개가 아니고 여러 개가 있다. 가장 큰 지역감정은 이북, 즉 북한 지역 사람들이 가졌던 차별의식이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 이북은 차별당했다. 여기서 차별이라 하는 것은 고위직 진출이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평양(평안)감사 자리이다. 이북 출신이 평양감사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 이남 출신이 이 노른자 벼슬을 차지하였다. 조선에서 중국 북경(베이징)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신들이 중간에 반드시 들르는 지역이 평양이다. 사신으로 가는 정권 실세들에게 평양감사는 대접을 후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홍수로 압록강에 물이 불어나면 평양 체류기간도 길어졌다. 평양감사는 이 시간에 진수성찬과 여색을 대접했다. ‘럭셔리’ 접대를 제공한 평양감사가 비리 혐의로 중간에 파직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실세들과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을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역 차별의 역사

이북 지역의 군수 이상 자리는 대부분 이남 출신들이 올라가서 차지하였다. 그래서 이북 사람들의 한이 쌓였다. 특히 인재가 많았던 서북 지역(평양과 인근 지역)은 지역감정이 쌓였다. 한양정부가 볼 때 서울의 서북 지역에 해당하는 평양 일대는 한양을 때리는 살풍(殺風)이 불어오는 위험 지역이었다. 서북 차별의 쌓인 한이 폭발하는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왜 이북 사람에게 벼슬을 주지 않았는가. 벼슬을 주면 한양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북 지역이 무력에 강하다고 여겼던 탓이다.

영남은 어떤가? 영남도 조선 후기 250년 동안 차별을 당하였다. 대략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부터 차별이 시작되었다. 인조반정은 기호 지역인 서인들이 일으킨 정변이었다. 경남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남명학파가 괴멸되다시피 타격을 받았다. 경북 지역인 퇴계학파도 탄압을 받긴 했지만 남명학파보다는 덜 받았다. 임진왜란 때 서애 류성룡 이후로 영남 지역에서 영의정 벼슬이 나온 것도 드물다. 장관급인 판서 벼슬도 2~3명 정도밖에 없다. 영남 출신 인사가 정3품 당상관 이상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조령을 넘어 한양 가기가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안동의 명문가 종손들이 술자리에서 필자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250년 동안 노론의 칼바람을 맞으며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안동김씨 세도’는 무슨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안동김씨는 서울 장동(壯洞·지금의 청운동 일대)에 살았던 장동김씨를 가리킨다.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의 후손들을 말한다. 대략 17세기 중반부터 득세하기 시작하여 대원군 때까지 세도를 누렸던 집안이다. 이 사람들은 원적지는 안동이었지만 1500년대 초반부터 서울에 이사와서 살기 시작하여 계속 서울에 살았던 서울 사람들이었다. 족보가 안동이라고 해서 안동 사람은 아니다. 서울 장동 사람들이었다. 정치적인 노선도 영남의 남인당이 아니라 기호의 노론당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던 집안이다. 따라서 안동김씨는 안동 사람들이 세도를 누린 게 아니라 서울의 집권 여당에 속하였던 장동김씨들이 세도를 누린 것이다. 세도의 측면에서 안동과는 상관없다.

안동을 포함해서 영남은 조선 후기 250년 동안 춥고 배고팠다. 안동이 간고등어와 헛제삿밥을 먹어야 했던 배경이다. 250년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끝내준 인물이 박정희다. 5·16 군사정변 이후로 영남은 지역차별의 한을 풀었다. 근래에는 삼성이 반도체로 세계적 기업이 되면서 남명학파의 축적되었던 한이 풀리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황창규를 비롯한 삼성의 핵심 인재들이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리산권의 경남 지역 출신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남차별은 어떻게 되는가? 5·16 이후로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지역차별이라 할 만큼의 차별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호남의 지역차별이 역사적 뿌리가 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660년 백제 패망부터 거슬러 올라가 시점을 잡는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점령되면서 백제는 패전국 백성이라는 고달픈 삶을 살아야만 하였다는 상황은 짐작이 된다. 패전국 식민지 백성들의 한을 풀어준 인물이 바로 8세기 중반에 활동하였던 진표율사(眞表律師)이다. 백제 패망 후에 100년쯤 지나 나타난 인물이 진표이다.

출가식을 거행하는 금산사의 방등계단. 계단은 국내에 2곳이 남아 있다.

새로운 세상은 차별 없는 세상

진표는 어떤 방식으로 백제 식민지 백성의 한을 풀어주었는가? 방식이 중요하다. 미륵신앙이다. 미륵은 미래에 등장하는 미래불이다. 석가불은 이미 돌아가셨다. 죽은 양반에게 비는 것보다는 앞으로 나타날 미래 부처님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당대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미륵불이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가. 백제 유민의 고달픈 삶이 종식되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믿었다. 그것이 용화회상(龍華會上)이다. 미륵부처님이 나와서 다스리는 세상이다. 용화회상이 되면 뭐가 좋아지는가.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가? 그것보다는 차별 철폐였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백성이라는 딱지를 뗄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었다. ‘평등 세상’의 도래라고 이해하면 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미륵불이 양반, 상놈의 차별을 없애주는 부처님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하층계급의 민초들이 떠받드는 부처님으로 자리 잡았다. 미륵불이 나오면 상놈 딱지를 뗄 수 있다고 말이다.

한국 미륵신앙의 원조는 진표율사이다. 진표율사가 보여준 도력과 감화력, 그리고 성자로서의 면모가 미륵신앙을 한국 땅에 뿌리내리게 만들었다. 외래 사상이 그 땅에 뿌리를 내리는 단계에서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 인물이 진표율사다. 그리고 그 사찰이 김제 금산사(金山寺)인 것이다. 진표 뒤에는 꼭 율사(律師)라는 호칭이 따라 붙는다.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고대 불교의 수행방법은 우선 계율을 지키는 일이었다. 화두를 잡거나 염불을 하는 방법보다는 우선 가장 기본이 되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게 곧 수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계율이 어떤 것이겠는가. 간단하게 설명하면 살도음(殺盜淫)을 안 하는 것이고, 잡스러운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면 자연스럽게 삼매에 들고, 삼매에 오래 들어가다 보면 신통력도 생기고 특출난 지혜가 생긴다. 진표는 특별한 신통력의 소유자였다. 도력이 없으면 사람들이 어찌 믿겠는가. 예수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진표는 금강산으로 가면서 강원도 강릉 지역 일대를 통과하였는데, 강을 건널 때 다리가 없었다. 이때 자라 떼가 엄청나게 나타나 다리가 되어주었다. 진표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말이다. 진표가 흙바닥 길을 건너갈 때는 그 지역 사람들이 나와서 머리카락을 잘라 길에다 깔아주었다. 질퍽한 진흙을 밟지 말고 머리카락을 밟고 가라는 의도에서였다. 당시 사람들이 성자에 대한 최대한의 존경을 이런 식으로 표시했던 것 같다. 교황청에서 깔았던 카펫이 레드카펫이라고 들었다. 존경과 성스러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제에서 까는 레드카펫도 로마 교황청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서양에서 붉은색은 아주 신성한 색이었다. 양(陽)을 상징하는 색이다. 귀신을 쫓는 색이다. 레드카펫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카펫이 머리카락 카펫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서 길바닥에다 깔아놓고 성인이 지나가도록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엄청 의미하는 바가 크다.

진표는 머리카락 카펫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얼마나 그 인품이 고결했고, 얼마나 그 아우라가 성스러웠으면 그랬겠는가. 일연의 ‘삼국유사’는 내용의 대부분이 신라 중심의 콘텐츠에 해당한다. 일연이 경상도에서 태어나 그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에 백제 지역의 일화는 드물다. 그런데도 진표율사 이야기는 2편이나 소개되고 있다. 내용도 상당히 자세하다. 진표보다 무려 500년의 시간 격차를 두고 활동한 일연스님이 자기와는 멀리 떨어진 전라도 동네의 진표율사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입전(入傳)시킨 것은 그만큼 진표의 임팩트가 컸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맥의 기운이 뭉친 곳

금산사는 김제 모악산(母岳山· 793m) 자락의 정기가 뭉쳐 있는 곳이다. 전체적으로는 흙이 많이 덮여 있는 육산(肉山)이다. 지리산, 오대산과 같은 육산의 계보에 속한 산이다. 그런데 악(岳) 자가 붙어 있다. 악은 험한 바위가 있는 산에 붙는 이름이다. 설악산, 개성의 송악산, 원주 치악산, 월악산, 운악산, 관악산 등이다. 모악산은 어머니 품 같은 육산이면서도 속에는 악산(岳山)의 기운이 꿈틀거린다는 뜻이 아닐까. 이리 되면 외유내강이다. 사람도 외유내강이 있지만 산에도 외유내강이 있다. 원래 모악산은 금산(金山)이었다는 설이 있다. 산 속에 금이 많이 묻혀 있어서 생긴 이름 같다. 왜정 때에도 일본인들이 모악산 이쪽저쪽에서 금을 채굴하려고 시도하곤 하였다. 이 금 채굴에 결사 반대하다가 금광업자들에게 돌을 맞아 돌아가신 스님도 있을 정도다. 금이 많이 묻혀 있는 금산에 있는 절이 금산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작명이다.

금산사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계단(戒壇)이다. 머리 깎고 스님이 되는 출가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자 시설이다. 스님이 된다는 것은 우선 계율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다. 그 출가식을 거행하는 계단은 국내에 2군데 남아 있다. 하나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이고, 또 하나가 금산사의 방등계단(方等戒壇)이다. 금강계단에 비해 방등계단이 좀 더 평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금강계단이 출가자 전용 계단이라고 한다면 방등계단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이다. 출가뿐만 아니라 재가의 남녀 신도를 포함한 사부대중 모두가 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계단은 언덕 주변에 네모지게 돌난간을 만들고 기단은 석축으로 쌓았다. 필자를 안내하면서 직접 설명을 해주신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圓行)스님은 금산사가 머리를 깎은 출가본사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꿰뚫고 있다. “모악산에서 맥이 이 금산사 쪽으로 3군데가 내려옵니다. 모악산에서 왼쪽으로 내려온 줄기는 절의 좌청룡이 되었고, 오른쪽으로 내려온 맥은 우백호가 되었어요. 그 가운데로 내려온 맥이 바로 이 방등계단으로 왔습니다. 가운데 맥의 기운이 뭉친 지점이 계단인 것이죠. 옛날 어른들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가운데 맥이 떨어진 지점에다 진표율사가 계단을 설치한 것이죠. 이 지점에 계단을 정식으로 설치한 시기는 신라 경덕왕 21년인 762년입니다.” <하편에 계속>

삼국유사 기행<102>진표율사

신라사람들<24>진평왕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13세에 왕위에 올라 67세까지 54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박혁거세 61년의 즉위 기간 다음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집권한 왕이다.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이다.진흥왕이 넓혀 놓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적들과의 전쟁에 많은 시간과 국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때문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남산성을 길게 쌓아 올리고,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다시 정비했다. 진평왕은 국방의 업무에 이어 안정적인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 불교 중흥 정책과 함께 많은 제도적 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진평왕의 하반기 고민은 왕위를 물려줄 인물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딸들에게 왕위를 이양할 지 아니면 사위에게 왕좌를 물려줄 지를 두고 상당한 고심을 해야 했다. 진지왕의 아들이었던 용수와 용춘 형제를 왕궁에 불러들여 중책을 맡기는 한편 첫째와 둘째 사위로 삼았던 것만 봐도 왕의 고민을 짐작할 수 있다. ◆진평왕의 즉위진평왕은 579년 진지왕의 폐위에 이어 13세의 나이로 신라 26대 왕으로 즉위했다. 성은 김이고 이름은 백정(白淨)이다. 시호는 진평(眞平)이며, 건복(建福)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입종 갈문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누이인 만호 부인 김씨이다. 왕비는 복승 갈문왕의 딸인 마야부인 김씨이다. 삼국유사에는 어머니를 만녕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승만 부인인 손씨를 후비로 삼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은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범상치 않았고 체격이 컸으며 지혜롭고 의지가 굳고 밝고 활달했다. 그리고 사냥을 무척 좋아해서 병부령 김후직의 간언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죽은 뒤 무덤 속에서도 간언을 하는 김후직의 충심에 감동해 사냥을 그만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키가 11자나 되었으며, 천주사(天柱寺)를 방문했을 때 그가 밟은 돌계단이 한꺼번에 3개나 부러지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은 566년(진흥왕 27)에 진흥왕의 태자가 됐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572년에 죽었다. 576년 진흥왕이 죽은 뒤에는 숙부인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579년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은 뒤에는 진지왕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인 진평왕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정란과 황음을 이유로 귀족회의에서 진지왕을 폐위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미실과 노리부 등이 결탁해 거칠부를 숙청하고, 화백회의를 열어 진지왕을 폐위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천사옥대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진지왕에서 진평왕으로 왕위 교체 과정에 왕실 내부의 갈등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진평왕의 전쟁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이 정복 군주로 나서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해 이에 반발하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진평왕은 방어 정책으로 직속 부대를 창설해 왕권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려고 했다. 583년에 서당을 설치했고, 625년에는 낭당을 설치했다. 서당과 낭당은 뒷날 9서당의 녹금서당과 자금서당으로 발전했다. 이 밖에 사천당, 군사당, 급당 등의 군사조직도 새로 만들었다. 602년 백제의 무왕이 모산성이라 불리는 아막성을 공격해오자 진평왕은 수천 명의 기병을 보내 이를 물리쳤다. 진평왕은 소타·외석·천산·옹잠에 4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변경을 공략했고, 이를 공격해온 백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 603년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공격해오자 진평왕이 직접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해 이를 물리쳤다. 그리고 이듬해 남천주를 폐지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했다. 그러나 608년에는 고구려에게 우명산성을, 611년 백제에게 가잠성을 빼앗겼다. 백제는 616년 다시 아막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618년 진평왕은 북한산주의 군주인 변품을 앞세워 가잠성을 공격해 이를 탈환했다. 그러자 백제는 623년에 신라의 늑노현을 기습했고, 624년에도 신라의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혈책의 6개 성을 공격해 3개 성을 점령했다. 626년에는 성주 동소를 죽이고 주재성을 장악했다. 627년에 또 사걸(沙乞)이 이끄는 백제군이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점령하고 3백여 명의 신라 백성을 붙잡아가기도 했다. 당시 백제 무왕은 웅진으로 병력을 모아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으나, 진평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하자 공격을 중단했다. 628년 백제가 다시 가잠성을 포위하고 공격해왔으나 진평왕은 군대를 보내 이를 물리쳤다. 629년에는 김용춘을 대장군으로 삼아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처럼 백제, 고구려와의 분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진평왕은 591년 남산성을 쌓고, 593년에는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는 등 국방 체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해 고립을 피하고 고구려를 압박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진평왕의 업적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의 뒤를 이어 정치, 군사 제도를 비롯해 많은 제도적 장치를 정비했다. 먼저 국정의 안정을 위해 진흥왕과 같이 불교 진흥 정책을 썼다. 진흥왕이 황룡사를 짓고, 거대한 장륙존상을 세운데 이어 진평왕은 새로이 금당을 웅장하게 다시 짓고, 중금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강당을 추가로 지어 황룡사의 사역을 크게 넓혔다. 또한 당나라에서 공부 중이던 원광법사를 신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문서를 보내 당에서 원광을 신라로 돌아가게 허락했다. 원광이 돌아와 황룡사에서 백고 강좌를 열어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서를 작성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게 했다. 진평왕은 제도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훌륭한 인재등용을 위해 관리를 선발하고 진급 등을 담당하는 위화부를 설치했다. 또 배를 만들고 출입항을 허가하며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는 선부를 설치하고, 조부에 관리를 두어 세금을 책임지게 했다. 또 수레와 관련된 일을 하는 승부를 설치 운영했다. 의식과 교육을 담당하는 예부에 전문 관리를 배치하고, 외국 사신을 대접하는 전문기관으로 영객부를 두었다. 내성에 사신을 두어 대궁과 양궁, 사량궁 등의 3궁을 관리하게 하고, 상사서와 대도서를 설치해 각각 전문관리를 임명했다. 진평왕은 정치제도 정비와 함께 서라벌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고쳐 쌓았다. 왕은 591년에 남산에 남산성을 길게 쌓고, 593년에는 왜구의 공격에 대비해 동쪽에 명활산성을 다시 튼튼하게 고쳐 쌓고, 서형산성도 재정비했다. 왕이 즉위한 지 7년 되던 585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궁핍하게 되자 왕은 스스로 정전에 머무르지 않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다. 또 남당에 나아가 직접 죄수들의 억울함을 살펴 풀어주기도 했다. 589년에 서쪽 지방에서 홍수가 나서 많은 집들이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기고, 사람도 200여 명이 죽었다. 왕은 관리를 보내 물난리를 겪고 있는 백성들을 지원하게 했다. 또 628년에는 여름 가뭄이 심해 농작물이 말라 죽으면서 백성들의 고충이 심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가 내리도록 기우제를 올렸다. ◆진평왕의 고민진평왕은 잦은 전쟁 중에서 후사를 걱정해야 했다. 그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다. 천명과 선덕, 선화 등 딸들, 공주만 줄줄이 태어나 아버지를 바라봤다. 기쁨이자 슬픔이었다. 왕은 할 수 없이 왕의 아들이었던 사촌들에게 눈을 돌렸다.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까지는 어엿한 왕자로 성골이었던 용수와 용춘 형제였다. 그들은 진평왕에게는 사촌이었다. 왕은 일찍이 성품이 뛰어나면서도 지혜롭고 용맹스런 사촌 용수와 용춘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나라의 일을 맡아보도록 했다. 그리고 진평왕은 용수와 용춘 형제를 천명, 선덕공주와 짝을 지었다. 사위로 맞아 들여 반란의 여지를 없애고 왕위를 물려줄 생각에서 취한 조처였다. 그리고 진평왕은 용수와 용춘을 따로 조용히 불러 의중을 물었다. “나에게는 아들이 없다. 그렇지만 사위도 아들이나 다를 바 없으니 네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며 명령하듯 타이르듯이 의중을 물었다. 그러나 용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저는 폐위된 왕의 자식입니다. 나라의 죄인으로 오로지 그 업장소멸을 위해 열심히 일할 뿐입니다. 왕위를 잇는다는 것은 역사에 죄를 더하는 일입니다. 그것만은 아니됩니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용춘도 “부마의 자리도 힘에 겨워 어깨가 무너져내리는 듯합니다. 당치도 않으신 하명은 거두어주십시오”라며 용수와 똑같이 왕위를 잇는 일에는 추호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진평왕은 하는 수 없이 용수와 용춘 형제에게 여왕을 받들어 나라가 흔들림 없이 태평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당부하며 삼국시대 최초로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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