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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editative film dealing with Seon Buddhist views on life, Why Has Bodhi-Dharma Left for the East? follows the lives of three Buddhist monks: a child, an adult, and an old man. This film is largely about two Zen koans. The koans are: What is my original face before my mother and father were conceived?, and (In death,) where does the master of my being go? The film’s title, although not explained literally in the film, is a reference to Bodhidharma, a 6th-century Buddhist monk from India who transmitted Zen to China. The question, \”Why has Bodhi-Dharma left for the east,\” is echoed by the young boy’s question, \”Why have we all left the world?\” The entire film can be seen as an answering of that question, so that the film itself becomes a koan. The three main protagonists are Haejin, an orphan boy, Kibong, a young monk, and Hyegok, a Zen master.” – https://en.wikipedia.org/wiki/Why_Has_Bodhi-Dharma_Left_for_the_East%3F
“Bodhidharma was a Buddhist monk who lived during the 5th or 6th century. He is traditionally credited as the transmitter of Chan Buddhism to China, and regarded as its first Chinese patriarch. According to Chinese legend, he also began the physical training of the monks of Shaolin Monastery that led to the creation of Shaolin kungfu. In Japan, he is known as Daruma.” – https://en.wikipedia.org/wiki/Bodhidha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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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나무위키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서양화 미술교수이던 배용균이 기획 8년, 제작 4년에 걸쳐 그야말로 홀로 다 만든 영화다. 감독, 제작, 연출, 각본, 촬영,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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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위키백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達磨가 東쪽으로 간 까닭은?)은 1989년에 제작된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Picto infobox cinema.png.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6/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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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다음영화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노스님 혜곡(이판용), 그의 가르침 아래 동자승 해진(황해진)과 젊은 스님 기봉(신원섭)은 절에서 생활하고 있다. 기봉은 눈 먼 어머니와 …
Source: movie.daum.net
Date Published: 6/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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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배용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 … – 법보신문
조주 스님은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동쪽 당나라로 오신 뜻을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화답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달마 조사는 혜가 …
Source: www.beopbo.com
Date Published: 6/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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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Why Has Dharma Left For The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Why Has Dharma Left For The East?, 1989 …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을만한 작품. 내게는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 중 …
Source: mkmk.tistory.com
Date Published: 9/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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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칼럼]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 법조신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물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話頭)로, 참선을 통해 진리를 깨우치는 수도승들의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
Source: news.koreanbar.or.kr
Date Published: 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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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 – 의약뉴스
너무 오래된 일이지만 그 일은 간혹 생각났고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보고 있으니 그 시절의 환영이 또렷이 떠올랐다.
Source: www.newsmp.com
Date Published: 8/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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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영화에서 불교보기 < 지난 ...
죽음, 빠진 이빨 버리는 정도의 퍼포먼스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한국, 1989) 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불교적인 관점에서 심도 있게 탐구하는 영화 …
Source: www.buddhismjournal.com
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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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Buddhism and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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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7.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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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Why Has Bodhi-Dharma Left for the East? 감독 배용균 각본 배용균 출연 이판용
신원섭
황해진
고수명
김희룡
윤병희
최명덕
이은영
이선혜 촬영 배용균 편집 배용균 음악 진규영 제작사 배용균프로덕션 개봉일 1989년 9월 23일 ( ) 시간 175분 국가 대한민국 언어 한국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達磨가 東쪽으로 간 까닭은?)은 1989년에 제작된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대구 효성여자대학교(현재의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배용균이 감독을 맡았으며 배용균프로덕션이 제작했다. 기획 8년, 제작 4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제작, 연출, 각본, 촬영, 미술, 편집, 조명 등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을 배용균 감독이 직접 처리해서 주목을 받았다. 산사에 사는 동자승의 눈에 비친 인간의 생과 사, 자연과 생명의 신비함 등을 묘사한 영화이다.
줄거리 [ 편집 ]
어느 날 기봉이라는 청년 승려가 노승 혜곡, 동자승 해진이 함께 살고 있던 산사를 방문했다. 기봉은 속세에 홀로 남은 시각 장애인 어머니에 대한 걱정에 시달리고 있던 청년 승려였지만 산사에서 대자유의 길을 얻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해탈에 이르기를 원했다.
어느 날 혜곡은 산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행하던 도중에 큰 부상을 입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입적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기봉은 혜곡과의 교감을 통해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도를 깨우치려고 했지만 세속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입적을 얼마 앞두고 있던 혜곡은 기봉에게 자신의 입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자신의 시신을 화장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혜곡의 시신을 다비한 기봉은 해진에게 혜곡이 남긴 유품을 건네주고 산사를 떠났다. 한편 산사에 혼자 남은 해진은 불이 타오르는 아궁이에 혜곡의 유품을 넣어 태우게 된다.
출연 배우 [ 편집 ]
이판용: 노승 혜곡 역
신원섭: 청년 승려 기봉 역
황해진: 동자승 해진 역
고수명: 주지 역
김희룡: 도반 역
윤병희: 기봉의 어머니 역
최명덕: 여동생 역
이은영: 해진의 어머니 역
이선혜: 무희 역
수상 [ 편집 ]
18. 배용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부산국제영화제 우수작 10편에 선정돼 재상영됐다. 한국 불교영화의 정수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사진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캡쳐.
한국영화는 1919년 영화 ‘의리적 구토’ 상영을 기점으로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우수한 작품 10편을 선정했는데, ‘바보들의 행진’ ‘바람불어 좋은 날’ ‘하녀’ 등이다. 이 가운데 한 편의 불교영화가 포함되었으니, 그 작품은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다. 이 작품은 오랜 제작 기간 동안 안동 영산암에서 촬영한 순도 높은 불교영화이다. 이 작품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에서 수만명이 관람하여 지지를 받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이상한 두 작품을 홍상수의 첫 작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지목했다. 정성일은 부산국제영화제 특강에서 이 작품은 표면의 단순한 서사와 이면의 중층적인 서사로 텍스트를 해석해야한다고 했다. 표면의 서사는 노스님 혜곡으로부터 배움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한 기봉과 동자승 해진의 이야기이며 기봉은 혜곡의 다비식을 마치고 길을 떠나며 혜진은 절에 남는다. 그리고 정성일은 기봉 스님의 내면의 서사와 소가 상징하는 심우도의 시각에서 영화의 실마리를 풀어가야한다고 역설하면서 난해한 영화를 비평의 언어로 한 땀 한 땀 풀어가는 묘미를 보여주었다.
필자는 1989년 서울의 한 극장에서 감상한 이후 30년이 지난 올 해 다시 필름으로 친견하면서 감성의 프레임에 이미지를 담아보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의 해박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뒤로하고 객석에서 일어나 수영강변을 산책하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 대해 사색했다. 강변을 건너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필자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한국의 자연과 하늘 그리고 계곡물에 비춘 1980년대 한국의 계곡을 떠올리면서 그 이미지 속에 알알이 새겨진 불교의 무늬와 혜곡과 기봉과 해진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환기하면서 화두를 참구하는 수도승처럼 ‘불교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는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낯 익은 질문을 맨얼굴로 성찰했다.
첫 장면에서 염화미소의 일화를 언급한 것은 이 영화에 대한 감독의 친절한 안내문에 가까운 것 같다. 대중영화가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이야기로 완결된다면 이 불교영화는 부처님이 중생에게 내미는 꽃처럼 헤아리고 바라볼 것을 권유하는 인상을 받았다. 석가모니 세존께서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실 때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 때 세존께서 꽃을 들어 중생들에게 보이셨는데 가섭 존가가 빙긋이 미소를 지으셨다. 이에 석가모니 세존께서 “정법의 눈과 열반의 미묘한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무비 스님, 직지강설 상)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염화미소, 염화 시중을 통한 불립 문자라는 선불교의 가르침이 기원한다. 이 영화도 배용균 감독이 불교라는 꽃을 관객들에게 들어 보인 조금 친절한 불립문자에 가깝다.
제목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다. 달마 조사는 527년 남인도에서 당나라 낙양에 도착하여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 수도를 하였다. 인도를 중심으로 하면 달마조사는 동쪽으로 가신 것이며 중국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서쪽에서 오신 것이다. 서쪽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행보로 인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는 조주 스님의 문답이 있다. 조주 스님은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동쪽 당나라로 오신 뜻을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화답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달마 조사는 혜가 대사의 물음에 동쪽으로 온 까닭에 대해 답했다. “내가 본래 이 나라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미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라. 한 꽃에 다섯 잎이 피어서 결과가 저절로 이루어지리라”고 답했다. 실제 역사적인 사실과 화두는 배용균의 영화와 직접적으로 해석의 단서는 제공하지 않지만 우회적으로 지침을 마련해 준다.
혜곡 노스님은 눈먼 노모를 속세에 두고 출가한 기봉 스님에게 화두를 내려준다. 그 화두는 ‘마음의 달빛이 차오르면 우리의 주인공은 어디로 향하는가’이다. 기봉은 화두를 참구하기 위해 계곡의 폭포 아래서 정진한다.
불교영화에서 화두 참구를 위한 정진 장면은 물과 연관해서 등장한다. ‘만다라’에서 법운 스님도 ‘입구가 좁지만 안이 깊고 넓어지는 병 속에 든 새를 어떻게 다치지 않게 꺼낼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깨우치기 위해 바닷가에서 정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닷가의 파도는 헤쳐 나갈 힘든 장애로 제시되며 계곡물의 드센 물살은 화두 참구의 고통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다.
혜곡 스님의 다비식을 마치고 산사를 떠나는 기봉에게 해진은 어디로 가는지 묻는다. 그때 기봉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서 청아한 하늘과 구름이 떠있다. 해진도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바라보고 다시 기봉의 자리를 바라보자 기봉은 이미 자취가 없다.
해진은 기봉이 남긴 혜곡 스님의 유품을 불에 태운다. 해진의 방식으로 혜곡 스님을 다시 다비한다. 그때 해진을 바라보던 새가 하늘로 날아간다. 새는 해진을 지켜본 죽은 새의 분신이거나 죽은 새의 짝이다. 해진은 새의 살생에 대한 죄의식과 죽음의 화두로부터 벗어나 하늘을 날아가는 새처럼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기봉은 소를 끌고 저자거리로 돌아간다. 십우도의 마지막 열 번째는 입전수수이며 저자 거리로 돌아가 중생을 계도하는 것이다. 기봉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참구하면서 ‘그가 떠난 것은 모두에게 완전히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라는 마음의 소리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마음의 소리와 마지막 장면에서 소와 함께 속세로 내려가는 장면이 서로 호응하고 있다. 소는 진여(眞如), 본래면목을 의미하며 화두의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불성의 한 자락을 잡고 중생을 계도하기 위해 떠나는 기봉의 모습은 유품을 다비하는 해진의 행위와 교차편집된다. 해진은 혜곡의 과거이며 기봉은 해진의 미래일 것이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
[1508호 / 2019년 10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Why Has Dharma Left For The East?, 1989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을만한 작품. 내게는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다. 아주 어릴 때 멋도 모르고 봤다가 구벅꾸벅했지만,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A SPACE ODYSSEY, 1968) 처럼 지금껏 수도 없이 감상했던 영화이고, 볼 때마다 아련해지고 감명을 받은 영화다.
비유는 적절치 않지만, 처음 친구와 일본에서 일본 라멘을 접했을 때, 맛이 맞지 않아 거짓말 안하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입에서 국물이 흘러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또 그 라멘 맛이 그리워져서 다시 먹고 싶어져 일부러 가끔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런 영화가 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일부러 아마존에서 해외판을 구입해서 일본의 동료나 존경하는 분께 선물하곤 했다.
음성은 한국어, 자막은 영어, 일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보지않으면 지루해지기 쉬운 영화이긴 하지만, 한국의 미, 개인의 삶의 의미, 지향, 깨닮음, 한컷한컷의 영상미.. 등을 가장 잘 표현해 낸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건축을 개인예술로 바꿔버린 오카케이스케씨(2016/03/11 – [논문보다가치있는일본예능/타모리구락부(タモリ倶楽部)] – 타모리구락부(タモリ倶楽部) – 스스로 짓는 건축가 셀프빌더 오카케이스케(岡啓輔))와 같이, 배용균 감독은 영화를 개인예술로 만들어 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건강칼럼]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물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話頭)로, 참선을 통해 진리를 깨우치는 수도승들의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본 화두의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된 바도 있다.
달마대사는 서기 6세기 인도의 왕자로 태어나 불교를 전하고자 인도에서 바다를 통해 동쪽인 중국으로 건너가서 양나라 무제를 만나 선문답을 한다. 선문답이 실패로 끝나고 무제의 미움을 받은 달마는 소림사로 들어가 토굴에서 9년간의 면벽수도를 한 후 선종을 창시하게 된다.
생체의 여러 중요한 리듬 중에 하나가 24시간 주기의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이다. 이 리듬은 크게 두 가지, 몸 안에 있는 내적 시계와 외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외적 시계에 의해 조절된다. 우리 몸 안에도 이런 일주기 리듬을 조절하는 시계가 있는데, 이는 대뇌의 시상하부의 시교차상핵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내적 생체 시계에 의해 조절된다. 외적 시계는 ‘자이트게버(zeitgeber)’라고 부르는데 외적인 시간 신호, 즉 햇빛의 강도와 해의 위치, 식사, 업무 시간, 기상 시간 등이다.
낮과 밤의 시간에 따라 갖게 되는 각성 주기와 수면 주기에 의해 인간의 호르몬 분비를 비롯해 대사 작용 등의 신체 과정이 조절된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인해 평소의 수면각성 주기가 일주기 리듬과 어긋나 동조가 되지 못하면 신체에 여러 증상이 나타나며 수면장애가 발생될 수 있는데 이를 ‘일주기 리듬 수면장애’라고 한다.
특히 순환 근무자들, 즉 보안 요원, 야간 당직자, 간호사, 항공사 승무원 등에서 잘 발생된다.
그 중에서 평소 살던 시간대와 다른 표준 시간대를 가진 먼 거리의 장소로 비행기를 이용하여 단기간에 이동하게 되면 현지의 시간과 평소 가지고 있던 신체의 주기가 어긋나게 되어 여러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시차증(jet lag)이라고 한다.
시차증은 대체로 시차가 4~5시간 이상일 때 나타나고 여행 거리가 길수록 시차가 많이 변하기 때문에 증상이 심해진다. 시차증의 증상으로는 두통과 피로, 식욕 저하, 소화 불량 등이 있고 판단력과 기억력이 저하되기도 한다. 밤에는 잠이 잘 오지 않고 낮에 졸리게 되는 수면 장애가 발생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 시간에 몸이 적응하게 되면 증상이 서서히 나아지는데 노인의 경우에는 시차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
시차증은 서쪽으로 이동할 때보다 동쪽으로 이동할 때 시차 적응이 더 힘들며 증상이 더 잘 생긴다. 즉, 우리나라에서 유럽을 갈 때보다 돌아와서, 미국은 돌아올 때보다 가서 더욱 힘들다. 서쪽으로 갈 경우에는 2~6일, 동쪽으로 갈 경우에는 3~11일 정도가 시차 적응에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왜 동쪽으로 갈 때가 더 힘든 것일까?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생물들은 태양의 24시간 주기에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아침에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 등교를 하기 위해, 주부는 남편과 애들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각자 일정한 시간에 기상해야만 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내적 생체 시계에 의해 조절되는 실제 생체리듬 주기는 24시간보다 약간 긴 24.8시간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원래 태양의 24시간 주기보다 좀 더 긴 일주기 리듬을 갖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태양의 주기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신 원래의 생체 리듬을 앞당겨야 하는 고통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생체리듬 주기가 24시간보다 길기 때문에 취침/기상 시간을 조금씩 늦추는 것(phase delay)은 쉬우나, 앞으로 당기는 것(phase advance)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서쪽으로 이동할 때는 생체리듬 주기가 늦춰지기 때문에 좀 더 적응하기 쉬우나, 동쪽으로 이동할 때는 생체리듬 주기를 앞으로 당겨야 하기에 더욱 힘든 것이다.
즉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고행’하러 간 것이라고 수면의학 측면에서 재미있게 해석하기도 한다.
시차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여행하기 전 도착지의 시간에 맞춰 자고 일어나면서 미리 시차적응을 하는 것이 있다.
유럽으로 떠날 예정이라면 며칠 전부터 매일 1시간씩 늦게, 미국으로 갈 예정이라면 1시간씩 일찍 취침하는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다. 목적지 시간에 맞추어 식사 시간이나 수면 시간을 조절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낮 시간에 외출을 통해 햇빛을 많이 쬐고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도 시차증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졸피뎀(zolpidem)과 같은 수면제를 비행기에 타서 도착지의 수면 시간에 맞추어 복용 후 수면을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299.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
나 어릴 적에 어치를 잡았다. 그때는 당가치로 불렀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산까치의 일종인 어치였다. 어치는 마당에 앉아서는 깡충깡충 뛰었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까치의 일반적인 행동이었다.
그 까치는 100년도 넘게 묵은 팽나무를 보호막 삼아 나무와 땅을 오고 갔다. 학교에 돌아와 가방을 집어 던지고 마당으로 나와 보니 그 날은 어치가 유난히도 깍깍 짖어 댔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어서 나는 좀 당황했다.
그러다가 팽나무 위에 까치집이 있고 새끼가 막 부화한 것을 알았다. 어미는 내가 다가가자 새끼를 해치는 줄 알고 방어했으며 그런 어치를 향해 나는 손에 잡히는 돌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날개를 펴고 머리 위를 빙빙 돌거나 호버링 하듯이 잠깐 멈춰선 녀석에게 그것을 던졌다. 그래도 어치는 도망가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나는 어치의 가슴에 돌팔매를 정확히 명중시켰고 어치는 순간 기절해 땅에 떨어졌다.
어치의 발에 나는 낚싯줄을 감았고 대문 기둥에 묶어 놓았다. 사발 종지에 물을 담아 놓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어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수소문 한 끝에 팽나무보다 더 높은 느티나무 꼭대기에 녀석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길게 늘어진 낚싯줄이 마치 거미줄처럼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줄은 마침 지는 석양을 받아 반짝였고 허공에 매달린 채 아무리 높이 뛰어도 잡을 수 없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어치를 보았고 그 모습을 다음날도 보았으나 그 다음 날에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치를 찾을 수 없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지만 그 일은 간혹 생각났고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보고 있으니 그 시절의 환영이 또렷이 떠올랐다.
화면에서 보는 어치는 내가 잡았던 어치와 똑같았다. 갈색의 등이나 날개 죽지 주변에 파란색이 있는 것이 영락없는 녀석이었다. 동자승 해진 (황해진)도 나처럼 어치를 잡았다.
그리고 줄로 묶어 두는 대신 방에 두고 물을 주었으나 다음날 어치는 죽었다. 그는 죽은 어치를 깨진 기왓장으로 덮어 두었고 나중에 떠들었을 때 시체는 온통 구더기가 들끓었다.
나 어릴 적 시골이나 깊은 숲속의 산사에서나 어린애들이 놀것이 부족해서 이렇게 산 것을 곧잘 죽였다.
노승 혜곡 (이판용)이 살생장면을 보았다면 어떤 행동을 했을지 감히 유추해 볼 수 없지만 해진아, 문 닫아라 하고 조용히 타이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동자승은 커서 지금의 내 나이 보다는 적겠지만 만난다면 그 어치가 여전히 생각이 나는지 물어보고 싶다. (손에 잡았던 순간의 따뜻함과 작은 심장이 급하게 뛰었는지도.)
각설하고 그 절에 어느 날 젊은 스님 기봉(신원섭)이 올라온다. 중 눈썹을 한 것이 영락없는 스님 행세인데 깊은 수심이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 것처럼 얼굴 한가득 이다.
노스님과 해진 그리고 젊은 스님 셋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다른 사람들, 예를 들면 기봉 스님의 눈먼 어머니와 조금 이상한 여동생 정도가 나오니 출연진은 단촐하다.( 연출부도 그렇다. 배 감독이 감독은 물론 제작, 각본, 촬영, 미술, 편집, 조명 등을 혼자 했다고 한다.)
출연진 셋이 수다를 떨거나 춤추고 노래하고 일하는 것이 아니니 화면은 빠르기보다는 느리고 자꾸 바뀌기보다는 한곳에 머물고 대사 대신 자연이 주 배경이 되겠다.
흐르는 계곡물 소리, 산 짐승의 울음소리, 계절 따라 바뀌는 산새 소리, 종소리, 등잔불 심지 타는 소리, 목탁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가 고요한 화면 속을 더 숨죽이게 만든다.
장작불 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어린 동자승의 모습을 보는 관객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숙연해지고 자신이 마치 도를 닦는 기봉 스님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젊은 스님의 고뇌를 어찌 관객이 다 헤아릴 수 있을까.
혈육과 욕심을 박차고 나온 스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도를 터득하는 일일 터. 그러니 그의 수행은 수행이라기 보다는 학대에 가깝다.
깨달음에 대한 깊이가 깊어 질수록 노스님의 몸은 점차 쇠잔해 진다. 오랜 수행의 결과 혜곡은 자신의 숨길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말을 기봉에게 전해 주고 어느 날 길지도 않은 머리를 깎자고 냇가로 재촉한다.
열반에 들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마침 그날 기봉은 해진을 데리고 산 아래 큰 절에서 벌이는 승무를 구경하고 저녁 늦은 무렵 산으로 올라왔다.
절 마당에서 문간에 비친 스님은 꼿꼿하다.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기봉이 가졌던 팽팽한 긴장감은 풀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자 스님이 옆으로 쓰러진다.
먼 길로 가기 전 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알려 번거롭게 하지 말 것과 관으로 쓸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려줬고 이 모든 일은 한나절 반이 넘어가지 않도록 다짐을 주었기에 기봉은 서두른다.
시체를 넣을 궤짝을 찾고 그것을 태울 장작을 모으고 불이 잘 붙도록 열심히 입으로 바람을 불고 석유를 뿌린다. 마침내 힘쓴 보람이 있는지 불길은 세차게 타오른다. 어둠이 가고 주변이 환하다.
산불을 조심하라는 스님의 당부대로 기봉이 신경을 썼는지 하늘로 치솟는 불길은 사방으로 번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만 화염을 품는다.
그 모습을 해진도 지켜본다. 시간이 지나고 불은 꺼지고 스님은 한 줌의 재로 남는다. 재를 골라 뼈 몇 조각을 추린 기봉은 돌로 그것을 잘게 부순 다음 흰 가루를 조심스럽게 뿌린다.
어치가 죽은 것처럼 스님도 죽었다. 어치가 죽었을 때 다른 짝은 심하게 울부짖었으나 스님이 죽었을 때 기봉과 해진은 우는 대신 마음속으로 슬픔을 삼켰다.
일을 마친 기봉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한다. 바랑 하나로 남은 스님의 유품을 해진에게 전해주고는 내려가서 너를 돌볼 스님을 올려 보내겠다고 한다.
기봉은 깨달음을 얻고 하산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스승을 찾아 자신이 갈구하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을까. 기봉이 떠난 절집에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진다.
국가: 한국
감독: 배용균
출연: 이판용, 황해진, 신원섭
평점:
팁: 화면이 느리니 스님이 받는 고통이 더 심하게 느껴진다. 욕망이 최고조에 달한 젊은이. 머리를 자르고 장삼을 펄럭인 결과 해탈의 경지에 올라섰을까.
폭포 아래서 도를 닦고 시장 바닥에서 염불을 하고 온갖 쓰레기 더미 속에서 참선을 해봐도 답이 없다. 스님은 다시 노스님 곁으로 돌아온다. 지팡이로 등짝을 얻어 맞은 기봉은 아픔 때문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고 그 아픔 때문인지 이런 헛소리를 지껄인다.
스님은 왜 산에 계십니까. 혜곡은 말한다. 강남에서 온 제비야. 별은 먼 곳에서 하늘의 균형을 잡는다. 너 같은 멍충이가 나를 찾아오니 내가 산에 있어야 한다. 선문답치고는 제법 이치에 맞다.
네가 선 곳이, 그 자리가 극락정토다. 그러나 젊은 기봉은 그 자리를 벗어나서 곧장 물속으로 뛰어든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비가 오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 그 사이로 부처 얼굴이 언뜻 비친다.
종소리 은은하다. 화두의 바닥을 보았느냐. 육신이 세속과 맺은 인연이 끝나갈 때 던진 혜곡의 질문에 기봉은 아직 답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나의 잔재를 너에게 맡긴다는 임무만은 충실히 했다. 기봉은 앞이 막히면 어디에 물어야 할지 이제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미 찾았다면 좋은 일이지만 찾지 못했다면 가는 것이 오는 것이고 오는 것이 가는 것이라는 혜곡의 말을 더 새겨야 한다. 아직 그대는 도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치의 삶과 죽음은 해진이 풀어야 할 숙제다.
한편 이 영화는 한국 최고의 예술영화로 평가받는다. 이런 평가에 걸맞게 제 42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인 금표범상을 비롯해 감독상, 촬영상, 청년비평가상을 받았다다.
기획 8년, 제작 4년이라는 오랜 제작 기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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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한국, 1989) 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불교적인 관점에서 심도 있게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마치 과학자가 현미경 렌즈를 통해 대상을 관찰하듯 감독은 불교라는 렌즈를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 성과 있는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또한 감독의 렌즈는 선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영화는 엄밀하게 말하면 선승의 렌즈를 통해 현상계를 설명하고 인간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의 의문에 대해서도 선불교의 입장을 빌어 명쾌하게 답을 제시하는 편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등장은 당시 한국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신인 감독이 완전 새로우면서도 영화문법에 비추어 전혀 손색이 없는 영화를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80년대는 김기덕도 홍상수도 나오지 않았던 시기로 우리나라 영화가 해외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내고 있을 때인데 이 영화는 세계 영화제 중 하나인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당당하게 그랑프리인 황금표범상을 비롯한 중요한 상을 휩쓸었으며, 칸느 영화제에서도 ‘주목할 만한 부문’에 선정됐기 때문입니다. 신인 감독으로서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이후 배용균 감독은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됐으며, 다음 영화가 기다려지는 감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제목 참 특별합니다.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정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굉장히 궁금하지만 정답을 찾을 길 없어서 의심이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이런 걸 화두라고 하지요. 간화선에서 중심을 삼는 게 화두고, 영화는 화두의 형식을 빌어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염화미소’와 관련한 문장을 보여줍니다. 까만 화면에 ‘그는 진리를 묻는 제자 앞에 한 송이 꽃을 들어보였다.’는 하얀 문장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부처님께서 들어보였던 연꽃의 의미와 궤를 같이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섭이 유일하게 그 의미를 알았던 것처럼 감독 또한 자신이 보여주는 영화의 의미를 관객이 알아채기를 기대한 장면이면서 또한 영화가 현상계 이면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예고이기도 합니다.
화두라는 게 언어와 표현 너머의 소식으로, 이것은 현상계를 뛰어넘을 때 밝혀질 수 있는 것으로서 화두는 현상계의 부정에서 출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상계에 발을 빼고 있는 사람에게 화두는 수월하게 풀리는 수수께끼고, 현상계에 발을 깊게 묻고 있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깜깜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용균 감독이 만든 이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아주 새로운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를 통해 현상계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부처님께서 보여주었던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말이나 표현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야 할 것을 설명하려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도전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감독은 어려운 레이스를 성공적으로 완주했습니다.
영화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한 스님은 임종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노스님으로 깨달음을 얻은 스님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스님은 젊은 스님으로 그는 가장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일 나무하고, 절 살림 살고, 큰스님 시봉 하고, 절 안팎의 모든 일이 그의 노동에 의해 굴러가는 것도 그렇지만 마음속에 번민이 있어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출가는 했지만 집에 두고 온 눈 먼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미안함과 애착, 이런 감정들로 마음이 번잡합니다. 마지막으로 동자가 있습니다. 동자는 2살 때 시장에 버려져있는 걸 노스님이 업어와 키웠습니다. 동자는 엄마의 얼굴도 모르기 때문에 그리움도 슬픔도 없지만 어린 아이들이 가질만한 외로움, 무료함, 이기심, 순박함, 이런 태초에 가져온 감정들을 갖고 있기에 완전히 행복하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인물 구성을 살펴보면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노스님인 혜곡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자 나머지 둘에 대해서 스승 역할을 하고, 또한 아주 행복한 세계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해진 동자와 기봉스님은 노스님과 달리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면서 이런 감정들을 해결하여 노스님의 자유자재한 행복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학생 신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어린 두 스님들이 수행과 배움을 거쳐 큰 스님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주 골격입니다.
그리고 해진동자의 괴로움은 어느 날 새 한 마리를 잡아오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계곡에서 수영을 하던 동자는 우연히 날아가는 새 한 쌍을 발견하게 되고, 동자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돌을 던져 새를 잡습니다. 돌에 맞아 다친 새를 절로 데려와 몰래 숨겨놓고 물도 주고 하면서 간호를 하지만 새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습니다. 새가 죽자 동자는 새를 기왓장 아래 숨겨둡니다. 혹시나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죽은 새의 시체에서 구더기가 바글바글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 모습에서 동자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죽음을 체험한 동자에게 현상계는 불안과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오줌 누러 일어났다가 나무에서 울어대는 새소리와 산짐승 소리에 잔뜩 겁을 먹고 도망가듯 방으로 숨기도 하고, 큰스님 약사발을 들고 가다가도 새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자 주변에는 늘 새 한 마리가 쫓아다녔습니다. 동자가 죽인 새와 한 쌍을 이뤘던 새로 짝 잃은 새입니다. 동자에 대한 원한과 잃은 짝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동자가 갖고 있는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걸 상징하는 매개물입니다. 결국 동자는 새 한 마리를 갖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가 이렇게 불편한 감정들을 무더기로 껴안게 된 것입니다. 기봉스님이 집에 두고 온 노모에 대한 죄의식과 별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절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사람인 노스님은 이들이 불행한 이유를 알고 있었고, 스승답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해진스님이 버려진 이빨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고통의 근원은 ‘자기’라는 소유욕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진스님의 이빨이 예전에 해진스님의 몸에 붙어있을 때 해진스님의 것이었지만 이제 길에 버려졌는데도 여전히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해진스님이나 기봉스님이나 모두 몸을 자기라고 생각하는 데서 고통이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빨이 수명이 다해 폐기되는 것처럼 이 몸도 그렇게 사라질 것인데 절대로 근본자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시작된 ‘이 몸이 바로 나’ 라는 생각 때문에 자기라는 정체성이 생기고, 내가 있으니까 죽는 걸 걱정하게 되고, 또 이 몸을 낳은 부모와 형제도 갖게 되고, 거기서 많은 소유욕이 생겨나고 애착이 생기고, 고통이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혜곡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는 도인이었습니다. 동상에 걸린 살을 한 근이나 잘라낼 때도 웃을 수 있는 경지, 육신에 대한 애착을 많이 끊어낸 경지에 이른 혜곡스님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제자인 기봉스님에게 죽음과 관련한 당부를 상세하게 합니다. 자기가 죽으면 관으로는 반닫이를 쓰고, 입었던 옷 그대로 그 관에 넣어서 하루 밤 사이에 다 태워달라고 당부합니다. 그의 당부에는 몸에 대한 어떤 존중도 슬픔도 보이지 않습니다. 수명이 다한 이빨을 길가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듯이 쓸모가 없어진 고기 덩어리를 처리하는 것 같은 담담함이 느껴지는 어조였습니다.
혜곡스님의 육신은 스님의 유언처럼 장작더미 속에서 밤 내내 타들어갑니다. 영화는 오랜 시간 육신이 불 속에서 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궁극적으로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이 이 속에 들어있으니까요. 혜곡 스님도 기봉스님에게 자신의 죽음을 당부하면서 자신의 다비식이 제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활구(活句)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하고 싶은 말은 육신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직시해서 그 허구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육신은 결국 이렇게 불구덩이 속에서 타들어가고 한 줌의 재로 남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는 집요하게 불길을 잡습니다. 그렇게 밤 내내 타들어간 육신은 아침이 되자 재로 남습니다. 제대로 타지 못한 뼛조각은 기봉스님이 다시 빻아서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장면까지 리얼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렇게 훌륭한 스님도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걸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세부적인 묘사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완전한 재로 남은 혜곡스님의 육신은 기봉스님에 의해 뿌려집니다. 그 재는 물 속에 뿌려지고 바람에 날리고 숲속에 버려지고 하면서 흙의 양분이 되고, 물고기 밥도 되고, 마침내 육신은 지수화풍으로 돌아갔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퍼포먼스이자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끝나고 과연 노스님의 두 제자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노스님이 죽음을 통해 보여주었던 활구를 통해 기봉스님과 해진스님은 성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또한 그들의 성장이 이 영화의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해진스님은 절에 남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그는 여법하게 예불을 올립니다. 그리고 해진스님을 맴돌던 짝 잃은 새는 떠나갑니다. 이는 해진스님이 새의 죽음을 통해서 갖게 됐던, 불안과 두려움, 애착, 죄의식 등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 또한 쓸데없는 감정을 극복하고 수행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이 영화를 통해 기봉스님과 해진동자처럼 한 단계 의식이 확장된 경험을 했습니다. 삶이라는 건 이빨이 입 속에서 제 역할을 하는 정도고, 죽음이란 빠진 이빨이 버려지는 것 정도의 차이 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빨이 한때는 내 것이었지만 어느 순간 무관한 물건이 돼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 또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본 후 다른 의문이 남았습니다. ‘이 몸이 흙과 물과 바람으로 허공에 흩어지고 나면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는가?’ 라는 화두를 하나 챙기게 됐습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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