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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25 (목) [하루 한 장]“전함을 싫어하여” (행4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사도행전 4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앉은 장애인을
고쳐준 일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음을 얻은 사람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더 듣고자 했고
이 때에 솔로몬의 행각에는
수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자
대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대노하며 몰려와서
그들을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본색입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고 방언하고
기적을 행할 때는 가만있다가도
복음을 전하면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과연 복음을 숨기고 적당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 이름의 능력을 전해서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영혼을 살리는
온전한 제자로 살 것인지 말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분홍목사 홍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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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2(토) “사도행전 4:1-12” / 작성: 김지현
[찬송가] 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사도행전 4장은 앞선 3장의 치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와 연결되지만 그 대상이 달라집니다.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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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5/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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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1-37절 말씀 묵상 – 복음뉴스
사도행전 4:1-37 말씀 묵상’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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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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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주해와 강해 – Pensées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아직 성전에서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방금 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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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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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시작과 믿음의 선포 (행 4:1-12) * 땅 끝까지 이르러
(사도행전 4장 1~12절) … 첫 번째 박해 속의 놀라운 부흥 (1-4절) … 지난번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가 능력 있는 설교를 했을 때 사람들이 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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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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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6. 2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DaSsctZGGGI
2020/09/12(토) “사도행전 4:1-12” / 작성: 김지현
[본문] 사도행전 4:1-12 [찬송가] 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사도행전 4장은 앞선 3장의 치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와 연결되지만 그 대상이 달라집니다. 3장이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4장은 제자들을 반대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성전에 올라가던 중,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고친 사건을 통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들에 의한 핍박으로 연결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체포(1-4)] [(1-3)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도들 즉, 베드로와 요한의 가르침이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들이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걷게 만든 기적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모습을 이제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르러’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적대적인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베드로와 요한이 군중에게 설교하고 있던 것을 중단시키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는 과정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먼저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 특히 제사에 관한 일과 유대인의 명절 예식 그리고 성전세 등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로 ‘성전 맡은 자’입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치안과 질서 유지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성전 내에서 대제사장 다음가는 2인자에 해당하는 요직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체포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습니다(눅 22:52-54). 마지막으로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의 관료 계층을 구성하는 제사장 문중에 속한 사람들로, 이들 중 대부분이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행동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자격이 제사장들에게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선포한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선언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부활의 선포가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예수님이 부활하셨음 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궁극적 회복역사의 시작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전자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제사장들이 십자가형을 통해 죽인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심각한 실책을 통렬히 질책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로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당장은 처치하지 못하고 옥에 잡아 가둡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았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는 1절에서 의도적으로 종교 지도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들을 분리합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대적할 때, 백성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4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중단하고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는’으로 표현된 단어는 ‘사실이고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맡기다, 믿다, 신뢰의 대상에 전적인 헌신과 함께 신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가 많았는데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된 것은 분명한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것을 증인으로서의 삶을 위한 또 하나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고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모여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5-12)] [(5-7a)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세 부류의 사람들이 이 공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먼저는 ‘관리들’입니다. 이들은 6절에 열거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 문중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대제사장의 문중은 그들의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힘을 합하면 공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 원로 관료들로 제사장들과 부유한 일반인들로 구성된 엘리트 유대인 집단입니다. 마지막으로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들입니다. 공회는 칠십명의 구성원과 현재의 대제사장이 모였습니다. 부를 소유하고, 학식이 높고,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힘을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제 제자들도 이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6절은 대제사장의 문중과 관련하여 네 명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안나스는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된 첫 번째 대제사장입니다. 그의 다섯 명의 아들 또한 후에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 예수님과 사도들, 스데반을 심문할 때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안나스 이후 18년 동안이나 대제사장 직을 수행했을 만큼 로마 총독의 마음에 들었던 존재입니다. 안나스는 원로 대제사장으로,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의 재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민족을 위하여 죽음의 형벌을 내린 자에게, 이제 다시 그 사람만큼이나 영향력 있을법한 존재들이 나타났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받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발걸음을 눈으로 보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겠노라는 심정으로 공회 앞에 섰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7b)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할 때 들으셨던 말과 유사합니다.
[(누가복음 20: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예수님을 대적하고 심문하였던 그들이, 이제 동일하게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부당한 판결을 내렸고, 결국 주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정의로움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똑같은 운명을 당해야 하는지, 자신들 역시 로마 정부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에 무능력하고 겁에 질려있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감히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8-10)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지금 심문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에게 도움을 준 ‘착한 일’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행위는 감사의 대상이지 심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공회의 엄중한 질문 앞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베드로는 공회가 심문할 때 표현했던 ‘누구의 이름으로’에 정확하게 맞추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일으킬 때 사용했던 표현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와도 동일한 표현입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동시에 언급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선언하며 당시 가장 부유하고, 지성적이었으며, 막강한 힘을 가진 이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의 놀라운 능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도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그들이 친숙히 아는 구약의 본문을 상기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시편 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열방에게 버림받은 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가운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악한 포도원 소작인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0:17-18)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이 비유를 통해서 고난 받으실 뿐 아니라 그 후 부활하여 이스라엘 집의 모퉁잇돌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부활로 인해 실현되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모두 이루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이 깨지고 가루가 되어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위기에 처해 있는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향하여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교만하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과 양보를 보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도 있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두 가지 이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는 교회가 정한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교회가 인기를 위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은 구원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늘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원 얻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선언은 결국 더 많은 반대와 핍박을 불러옵니다. 예수님에 관해 더 이상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사도들은 더 많이 체포되고 매질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증인 된 우리는, 눈물 흘리더라도 끝까지 그 길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단 하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힘과 능력으로 인하여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끝까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쁨을 얻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코로나19를 비롯한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늘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살아가게 하여 주옵시고, 세상을 향한 바른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1.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였습니까?
3.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며,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는 손이 되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김지현)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22)
제목: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본문: 사도행전 4장 1-22절
설교자: 조정의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박해를 받은 적이 있는가? 가장 최근에 예수님을 말하다가 위협이나 경고를 받은 적이 언제인가? 성경은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다(딤후 3:12).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 경건한 행동뿐만 아니라 말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은 박해가 보장된 삶이다.
오늘 우리는 초대 교회가 경험한 첫 번째 박해를 살펴볼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40여 년 동안 앉은뱅이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켰고, 그 놀라운 표적을 보고 모여든 수많은 사람에게 표적이 가리키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담대하게 선포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 일로 인해 그들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그들처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기 원한다.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사도의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하기 원한다.
1. 구속(1-4절)
사도들(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의 행각에서(행 3:11) 모여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말할 때에, 1절), 그 가운데 갑자기 들이닥친(이르러)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다(1절).
그들은 두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붙들어 체포하기 위해 기습한 것이다(잡으매, 3절).
불과 몇 주 전에 이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구속하고 심문하고 로마 재판에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 한 자들이다. 그걸로 일단락됐다고 생각했을 그들 앞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타나 또 그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치아픈 이름, 예수(요 11:45-53).
특별히 이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싫어했던(짜증나다, 격노하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들은 제사장들로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예식을 집행하는 높은 직책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별 볼 일 없는 평민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친다니 참으로 건방진 이들이 아닌가?
가르치는 내용도 문제였다. 제사장직을 독점했던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외의 성경을 권위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혼은 몸과 함께 소멸되기 때문에, 부활도 천사도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니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한단 말인가? 구약 성경에 정통한 바리새인 랍비면 논쟁을 하겠지만, 이들은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들은 성전 맡은 자(단수)를 데리고 왔는데, 그는 성전 보안 책임자로 제사장 바로 밑의 지위를 가지고 성전의 보물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성전의 경비대장들”, 눅 22:52-54).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체포했고(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다(3절). 아마도 안토니아 요새에 가두었을 것인데 유대인 성전 경비와 로마 병력이 함께 지키는 철통같은 감옥이었다(바라바, 강도, 살인). 거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주눅 들고 겁을 먹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감옥에서 제자들은 주님이 체포당하신 밤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20). 제자들은 그 말씀 그대로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을 체포하고 강금했던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의 증인들을 똑같이 체포하고 강금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박해를 감수하고 담대하게 선포한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생겼다. 그것도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는 사람들(여자 포함 약 만 명)이 구원받는 사람으로 더해졌다(행 2:47).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약 25,000 ~ 85,000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증인과 제자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셨으니 우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박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비방이나 조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4). 그리스도로 인하여 박해를 많이 받은 바울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했다(롬 8:17). 주께서 지금도 우리의 증언을 통해 믿는 자를 날마다 더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2. 재판(5-12절)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5절).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인(국회+대법원) 산헤드린 공회를 열기 위해서다. 공회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했다(6절). 최고 우두머리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으로 실세였고, 그 사위인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 그리고 그 가족들 모두는 성전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세력이고, 예수님을 처리한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요한은 베자 사본에 요나단이라고 나오는데 안나스의 아들로 가야바 이후 대제사장이 됐고, 알렉산더는 알 수 없다.
그들은 몇 주 전 예수님께 했던 대로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반원 모양으로 둘러쌓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 흥미롭게도 이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이다(눅 20:2).
몇 주전 예수님께 유죄 판결을 내리고 사형 선고를 했던 장소에서 71명의 분노한 고위 관리들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 12:11-12). 진실로 성령님은 이 때 베드로에게 할 말을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다(8절).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9절). ① 먼저 베드로는 앞에 있는 자들을 존중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② 그리고 그들의 질문을 조정하여 오해를 바로잡았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9절). ‘우리는 죄가 없다’고 확실히 선언한 것이다. 우리가 행한 일은 착한 일이다. 안식일에 행한 것도 아니고, 율법을 어기면서 한 일도 아니다. 사십여 세나 된 병 나은 사람을 구원한 참으로 선한 일이 맞지 않은가?(22절).
③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물었던 질문에 답을 한다.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으로 이 선한 일을 행했는지 설명한다. 이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헬: 소조), 육체의 질병에서 치유됐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새롭게 된 구원은 바로 다음에 제시한 분의 권세, 그분의 이름으로 된 일이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절).
그들이 그토록 짜증 내고 혐오했던 이름,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름, 나사렛 예수. 하지만 그들이 도무지 믿지 않았던 부활을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이루셨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그분이 참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바로 그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된 것이다. 절대로 거부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증거 1호가 그들 눈앞에 서 있었다.
베드로는 이어서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그들이 절대로 그리스도를 거절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선포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절). 이 말씀은 불과 몇 주 전 예수님께서 그들과 성전에서 논쟁하실 때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셨던 구절이다(눅 20:17-18).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 비유는 다음과 같다(눅 20:9-18). 한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타국에 있으면서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계속 그들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다. 세 번이나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냈다. 그는 존대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지만 악한 농부들은 도리어 독생자를 죽였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듣던 그들에게 물으셨다. 주인이 돌아와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침묵).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그들은 놀랍게도 “결코 그리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흠정역).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알았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마침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와 같은 심판을 내리지 않겠는가?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뻔뻔하게 주장했다(눅 20:19).
그때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이 베드로가 다시 언급한 시편 118편 22절이다.“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눅 20:17-18).
건축자들이 모퉁이의 머릿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쉽게 버리는 돌처럼 그들은 예수를 버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터와 반석, 기초석이 되게 하셨다. 누구든지 그분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다. 깨어지고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절). 예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복음의 핵심이다. 물론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교회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으며 악한 일로 고난을 받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배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만일 선한 일로 천국에 간다면, 각자 자기 신앙의 진실성을 인정받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면, 여러 예식이나 봉사나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면, 종교는 각자 다른 모양이지만 결국 종착점은 같다면,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가 없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유일한 길이다. 좁고 편협하다고 비난받아도 이 진리는 굽힐 수 없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대로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하나님 아버지께는 그분의 영광을 충만하게 보여주실 독생자 예수 외에 다른 자녀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이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 참 진리, 고귀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한다.
3. 판결(13-22절)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자들은 당황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그들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13절). 유대인으로서 기본 교육(히브리어 읽기, 쓰기, 유대 역사, 경전 암송)을 받았지만 유명한 랍비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니 대학자들 앞에서 주눅 들고 자신감 없이 말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담대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 알아챘지만,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다(14절). 거의 만 명이 되는 사람이 이 일을 통해 예수를 믿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 16, 21절)이 놀라운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1절). 도저히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6절). 예수님처럼 몰래 잡아다 죽이지 않는 한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었다(21절). 그래서 일단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15절).
16-17절은 그들이 공회에서 의논한 내용이다. 사도들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인데, 아마도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가말리엘을 통해 누가에게 알려진 내용일 것이다. 표적이 분명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데 달리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위협하여 더 이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자고 결의했다(17절).
흥미롭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들었을 때 똑같은 일을 했다. 부활의 표적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도리어 돈을 주어 거짓을 민간에 퍼지게 했다(마 28:11-15).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대부분 진리를 이해할 수 없어서 혹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거부하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거부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공회 앞으로 불려왔고, 그들은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절). 그들은 담대히 대답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절). 그들은 유대 최고의 법원 앞에서도 담대했다. 그들의 위협과 경고에 겁먹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이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는가? 그들이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 역시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께서 “내 증인이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행 1:8; 마 28:20).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성령을 통해 날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보고 들은 그 이름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과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핍박과 경고와 위협이 있어도 결코 그럴 수 없다.
2020년 1월 16일 선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작년에 하루 평균 8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매일 26개의 교회가 공격당했다고 한다. 세 시간에 한 명꼴로 순교하고, 한 시간에 한 개 이상의 교회가 공격을 당한 셈이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있고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한다. 하지만 정작 그만큼 편안한 환경에서 우리는 복음을 얼마나 담대히 전하고 있을까? 어쩌면 조금의 불편함이나 거절, 비방이나 조롱이 두렵고 싫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게으름을 버리고, 두려움을 내어쫓고 담대하게 바울처럼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도행전 4장 1-37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4:1-37 말씀 묵상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사도행전 4:18-20).
“Then they called them in again and commanded them not to speak or teach at all in the name of Jesus. But Peter and John replied, “Which is right in God’s eyes: to listen to you, or to him? You be the judges! As for us, we cannot help speaking about what we have seen and heard.”(Acts 4:18-20).
교회에 대한 최초의 박해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부터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던 사두개파 사람들과 패역한 제사장, 성전 관리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던 것입니다(1-3).
이튿날 아침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고, 가야바는 당시의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권위로 판결을 좌우하곤 했습니다. 또한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심문할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으나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무슨 권위와 뉘 이름으로 그런 혼란을 일으켰느냐’라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비유했습니다(11). 집 모퉁이의 머릿돌은 승리하신 예수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박해하여 복음 전파를 막으려 했으나 베드로는 오히려 이것을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8-12).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고 평범한 사람들인 줄 알았다가 그들의 담대한 증거에 무척 놀랐습니다(13). 산헤드린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임은 물론 병 나은 사람까지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조용해졌습니다. 그러한 사실들이 공회원들을 당혹하게 했을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책잡을 것을 발견치 못했던 것입니다(14-17).
관원과 장로들은 사도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하였으며, 또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18-20).
박해받는 교회는 오직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성령 충만은 복음을 더욱 담대히 전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교회를 하나되게 하였습니다(24-31).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32). 성도는 모든 물건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나의 소유는 하나님이 나에게 위탁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주님은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도록 담대함을 주었습니다(33).
주께서 주신 오늘!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낙심치 말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적용: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나누어 보세요.
사도행전 4장 주해와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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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주해와 강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제사장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앞에서 변증 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풀려나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로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믿는 무리들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서로 물건을 통용합니다. 구브로의 바나바가 소개되면 4장이 마무리됩니다.
4장 구조
1-4절 사도들이 잡히다
5-12절 사도들의 변증
13-22절 사도들의 두 번째 변증
23-31절 풀려나 합심하여 기도하다
32-37절 하나 된 공동체
4장 주해와 강해
1-4절 사도들이 잡히다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아직 성전에서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방금 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을 베드로가 고쳤고, 사람들이 놀라워 베드로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기회를 틈타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듣기 싫어하던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1절)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둡니다. 이들은 로마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욕망을 채우는 자들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가장 유대적이어야 할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들은 가장 교묘하게 반유대적이며 반민족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세족적인 존재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유물론적 사고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바리새파와 다르게 이들은 오히려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이르러’는 에페스테산(ἐπέστησαν)으로 ‘기습했다’ ‘들이닥쳤다는 뜻입니다. 이 관리들은 거룩한 곳의 관리를 맡은 자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 제사를 관장하는 이들로 레위인들에서 최고의 서열에 속하는 제자장 그룹입니다. 성전 맡은 자는 경비대장으로 동일한 단어로 치안 판사나 관리를 말합니다. 이들은 친 로마적이라 예루살렘 안에서 불안한 정서나 분위기가 보이면 그것을 안정시키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4: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이 사도들을 싫어한 이유는 두 자기입니다. 하나는 예수에 대해 가르친 것, 둘째는 예수의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두개인 그룹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유물론적 사고를 가진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은 가당치도 않는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신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을 사도들이 행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발짝 하듯 사도들을 기습한 것입니다.
‘싫어하다’ διαπονούμενοι는 짜증 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후에 등장하는 가르치다의 디다스케와 선포하다의 카탕켈레인에 대한 반응이다.
4: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사도들은 현행범으로 붙들립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뭔가를 할 수 없어 곧바로 구류해 둡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가 단지 몇 분이 아니라 거의 6시간 넘게 흘러갔음을 말합니다.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누가는 사도들이 붙잡힘과 더불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오천명의 남자들이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어린아이와 여성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만 명을 넘어갈 것입니다. 위협과 위기의 순간이 계속되지만 공동체는 계속하여 성장합니다. 2장 47절에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다는 모호한 표현을 썼다면 4장에서는 남자의 수가 오천이라는 명확한 수치를 표시합니다.
5-12절 사도들의 변증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이튿날 유대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나 그의 비슷한 수준의 모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로 구성된 유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이들로 제사장들에게 학문적 조언을 하는 이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이 맡았습니다. 안나스는 이전 대제사장이며, 가야바는 현 대제사장입니다. 가야바는 빌라도 재임 시기에 재임합니다. 이들은 성전의 실질적인 권력자들입니다.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들은 권위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전 주님께도 동일하게 권위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대답하지 않아 주님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 21장 23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또 하나는 누구의 이름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권위와 존재 자체입니다. 권위와 이름은 동일한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 성전을 관리하고 있는 누가 사도들에게 가르칠 권한을 주었느냐는 협박이자 경고입니다. 베드로는 3장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습니다.(3:6) 이들은 알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 그렇기에 그들을 가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시 묻는 이유는 공적으로 모든 가르침을 금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변증 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는 성령 충만을 통해 예수의 영이 임했음을 강조합니다. 행 1:8에서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 성령의 임함을 예언하고 그로 인해 온 세상에 ‘증언’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그 일을 행합니다. 베드로는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을 부릅니다. 관리는 공직 관료이고, 장로들은 권위적 측면에서 말하여 관리와 장로는 유대 지도자들을 총칭합니다.
4: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위기를 기회로 사용합니다. 질문을 받고 답을 주면서 지금이야 말로 예수를 선전할 기회로 생각합니다. 먼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로 평가합니다. 이사야는 오래전 종말의 때에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병자에게 행한 일은 종말론적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임을 의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사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건강’을 뜻하는 ‘휘기에스’는 손상이 없는 신체적 건강을 뜻합니다.(BDGA) 이것을 율법적으로 흠이 없어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병자를 온전하게 한 사람이 누구냐? 바로 너희들이 십자가에서 못 박고 죽였지만 하나님이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치유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통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의 재판은 자신들이 받아야 합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건축자의 버린 돌은 시편 18:22를 인용한 것으로 메시아에 대한 거부를 암시합니다. 건축자는 유대지도자들일 수 있고,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상 유대 지도자들이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버린 돌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사람들은 버렸지만 하나님은 인정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 이름만이 사람을 구원할 것입니다. ‘다른 이름… 주신 일이 없다’ 즉 유일하다는 여호와께 사용하는 표현으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입니다. 이제 그 여호와의 구원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베드로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13-22절 사도들의 두 번째 변증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3절에서 두 가지 반응이 확연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 없는 범인인데 말을 너무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응할 말이 없어진 것입니다. 담대함의 파레시안은 사도행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로 ‘거침없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자유민의 특징'(존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선처를 구하지 않고, 지도자들의 억압에 굴하지도 않았습니다.
학문 없는 범인은 말 그대로 학식 없는 사람을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또는 정식적인 학업 과정을 밟지 않은 일반 사람들입니다. 문맹율이 현저히 높았던 당시에서 범인은 일반 사람들을 말한다. 당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글을 읽고 쓰고 공부했습니다. 심지 그는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였습니다. 이건 단지 예수의 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는 공식 공부가 아닌 예수를 따름으로 그에게 공부를 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더 할 말을 잃게 만든 것은 베드로가 치유한 사람이 바로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명백한 증인이 앞에 있기에 지도자들은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러한 명백함 앞에서도 그들은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악입니다.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공회원들은 의논합니다. 표적이 나타났음이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음에도 그들은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도록 사도들은 위협하기로 합니다. ‘유명한(그노스토스 γνωστός)은 ‘잘 알려지기 적합한’ ‘알려질 수 있는’의 의미로 특이하고 분명한 사건입니다. 너무나 명백함에도 그것을 강제적으로 억제하려는 지도자들은 완악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부당하고 황당한 결정을 내립니다. 이 소문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사도들을 위협하여 막자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입 단속하고, 대중매체를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는 명백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와 협박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너희’와 ‘하나님’을 대척점에 두고 선택할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관리들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놓아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아준 이유는 ‘백성들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은 백성들의 눈입니다.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할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악도 죄도 짓는 악행자들입니다.
23-31절 풀려나 합심하여 기도하다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풀려난 사도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당한 일들을 교회에 말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초대교회는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아픔과 사연을 공유합니다. 존슨은 동료라는 표현이 ‘초대교회가 얼마나 자신들을 서로 의지가 되는 친구들의 공동체로 보았는지 강조’한다고 말합니다.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기도의 대상은 대주재이며,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신약은 구약과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제 다윗의 시편인 시편 2편을 인용하여 세상의 관리들의 어리석을 지적 합니다. 그들은 서로 연합하고 마음을 모읍니다. 악을 위해서는 말이죠. 거짓과 연합하고, 악과 연대하는 세상의 관리들입니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위협을 감해 달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죠. 타협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입니다. 또한 치유의 기적과 표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 기적들은 ‘예수이 이름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손’은 의지와 능력을 말합니다.
32-37절 하나 된 공동체
이 부분은 초대교회가 어떠한 공동체를 이루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초대교회의 전부는 아닙니다. 누가는 성령을 받은 후 그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믿은 자들이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였다는 말이며, 자신의 견해와 생각이 주님께로 맞추어졌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서로 통용합니다. 자기의 소유로만 생각하지 않은 것이죠. 하지만 다른 서신서를 보면 초대교회가 모두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들은 내부적으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외부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행 1:8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 안에서만 증인입니다.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서로의 소유를 통용함으로 가난한 자가 없어졌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바울은 후에 일반 교회는 연보를 통해 공평해진다고 역설합니다.
고후 8: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 8: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8:15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본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는 레위족인데 특이하게 요셉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도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갖다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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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시작과 믿음의 선포 (행 4:1-12) * 땅 끝까지 이르러
2018년 3월 25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0 ✦
“고난의 시작과 믿음의 선포”
(사도행전 4장 1~12절)
[ 들어가는 말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날 사탄과 그의 부하들이 전략을 짜기 위해 모였을 때 사탄이 모든 부하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무슨 계략으로 인간들을 사로잡으려고 하는가?” 한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의심을 넣겠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우리는 그 전략을 오랫동안 써 봤는데 이제는 잘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에 종교는 부인하면서도 신은 부인할 수 없는 종교적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하나님을 찾는 열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방법으로는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악령이 말했습니다. “나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집어넣겠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지옥으로 끌고 오겠습니다.” 그 대답에 사탄이 또 대답했습니다. “그 전략도 통하지 않을 거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무서운 지옥 같기 때문에 지옥을 항상 두려워 할 거야.”라며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악령 하나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크리스천들만을 집중해서 공격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끊임없는 고난을 주어서 예수를 믿으면 재앙이 온다는 의식을 집어넣고 필요할 때에는 죽는 고통까지도 주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탄은 정색하면서 말했습니다. “그 방법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야. 이전에 우리가 완전히 실패한 전략이기 때문에 절대 사용해서는 안 돼. 우리가 지난 역사를 통해 크리스천들과 선교사들에게 많은 핍박을 하고 죽이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박해받는 성도들을 보며 주님을 위해 당하는 죽음을 영광스럽게 여기더군.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고 있어.”
그때 구석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악령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에 있어 모든 것을 다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급히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믿으면 되고 적당히 믿으면 된다는 마음을 집어넣겠습니다.” 그러자 다들 기립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흔히 우리 하는 말이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고 합니다. No pain, no gain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삶에서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영혼의 성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핍박을 통해 성장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예수님과 관련된 것이어야 합니다. 괜히 자기가 욕심으로 잘못해서 당하는 어려움이 아니라, 정말 주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런 고난은 우리를 아름답고 정결하게 하며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1. 첫 번째 박해 속의 놀라운 부흥 (1-4 절 )
1) 박해의 시작
처음 생긴 초대 교회가 장밋빛 꽃길만 걸으며 쉽게 성장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과 핍박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더 강해지고 더 뜨거워졌습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더 진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성경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 어둠의 세력의 저항도 강했습니다.
지난번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가 능력 있는 설교를 했을 때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하루에 3천 명이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고, 성전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켰을 때 놀라운 역사가 본문에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교회가 엄청난 성장을 하던 그때 사탄도 아주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서 더 강하게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려고 할 때 사탄의 공격도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서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며 강하게 나가면, 그렇게 강하게 성령으로 나가는 우리를 사탄이 맞서는 게 아니라 뭔가 빈틈이 없는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참 은혜를 받고 변화되려 할 때, 신앙생활이 잘될 때, 기쁨이 충만하고 교회 사역이 잘될 때, 교회가 막 성장하고 교제도 잘되고 기분도 좋을 때, 사탄이 작은 틈을 노리고 그곳을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작은 약점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한 틈을 막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지금 40일 특별기도회를 하면서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기분 좋고, 다 잘되고 있고, 잘 풀리고 있을 때, 작은 틈을 노리고 사탄이 들어옵니다. 그것을 막아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될수록 더욱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며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1-2절)
지난주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죽 합니다. “왜 이 일을 놀랍게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가 아니고 예수의 이름의 능력이 이 사람을 고쳤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싫어했습니다. 영어로는 hate가 아니라 disturbed입니다. 굉장히 마음이 불편했다는 겁니다. 지금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부활을 전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주 불편해졌습니다. 그래서 막으려고 온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크게 세 종류입니다.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 때부터 제사장들이 있어 왔습니다. 원래는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 이때는 돈을 주고 사거나 정치적으로 로마가 임명하면서 그런 질서가 이미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 지도자가 제사장들인데, 그들의 최고 우두머리가 대제사장입니다. 당시에는 로마에서 대제사장을 임명했는데, 6절에 안나스와 가야바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게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동했고,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했던 바로 그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한 명인데 여기는 계속 ‘안나스와 가야바’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도 먼저 안나스의 집으로 갔다가 가야바의 집으로 갑니다. 그들을 동시에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로마제국으로부터 퇴임 압력을 받아 일단 자리에서 물러난 안나스가 자기 사위인 가야바에게 대제사장직을 물려주었는데, 뒤에서는 그가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권력 암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장인과 사위가 겉으로는 협력하는 것 같은데 뒤로는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겉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지만 실권은 안나스가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도 안나스의 집으로 먼저 갔고 그 다음에 가야바에게 갔습니다.
두 번째로 ‘성전 맡은 자’인데 성경에 주가 달려 있는데 ‘경비대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군, 통치자, 총독 등의 의미로서, 최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치안과 경비는 24개 그룹으로 나뉘어 담당했는데, 그 총책임자가 이 사람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 의하면, 그는 대제사장 바로 다음 자리인 유대교 서열 제2위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높은 사람이 왔습니다.
세 번째로,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 당시 두 종파가 있었는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바리새파를 많이 꾸짖으시며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의 반대에 있던 사람들이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가 종교적인 이유로 정치를 멀리하고 로마를 반대하며 이스라엘의 독립을 원하던 반면, 사두개파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하면 친일파처럼, 사두개파는 로마제국에 찰싹 붙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기들이 장악한 있던 권력과 부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 각계각층의 상위직을 다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도 사두개인들이었고, 제사장들 대부분이 사두개파였고, 유대교 서열 2위인 성전 맡은 자도 사두개파입니다. 제사장 쪽은 대부분이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언급된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각각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사실은 다 같은 파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최고위층에 있고 권력을 잡고 있던 실세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이 가진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신앙은 현실지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지금 이 세상이 전부이지 부활이 뭐가 있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세에서 어떻게든 많이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막연한 다음 세상을 믿기에는 그들이 가진 권력과 부의 위력이 너무 크게 느껴졌던 겁니다. 그것이 사두개파 사람들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앞장서서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었던 이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외아들임을 자칭하는 나사렛 출신 떠돌이 랍비 예수를, 자신들의 권력과부를 지탱해주는 기존 사회와 종교의 질서와 자기들의 기초를 흔드는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출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자기들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이 맡은 성전 안의 솔로몬 행각에 와서, 자기들이 제거해버린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 예수가 부활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만물을 회복하실 심판주다.’라고 가르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왔던 것입니다. 그것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떼로 몰려와서 막으려 합니다.
제사장은 당연히 백성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중간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람들의 어려움과 상처와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인데, 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과 부와 권력을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정보력이 많고, 정보원들을 많이 두고, 군인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겁니다. 종교적인 데는 별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해치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소식에는 재빨리 움직이는 겁니다.
2) 놀라운 부흥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3-4절)
유대 종교 관습에 따르면 날이 저문 다음에는 죄인을 심문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잡히시던 때가 아주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그때 안나스의 집에 끌려와 재판을 받으십니다. 그 다음에는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십니다. 해가 지면 죄인을 심문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저지른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재판한 것이 다 불법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들이 그 법을 지킵니다. 해가 저무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의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에 성전 미문으로 들어가다가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그 사람을 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는데, 해질 때까지 두세 시간 이상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저녁 때가 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혔지만, 갇힌 후에 남자만 오천 명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믿으라고 권할 때 믿을까 말까 합니다. 그래도 전했으니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감옥에 갇혔는데 잡힌 다음에 남자만 오천 명, 즉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만 명 이상의 엄청난 사람들이 믿은 겁니다. 이것이 놀라운 역설입니다. 첫 번째 박해인데 교회는 오히려 부흥했습니다. 그 당시 안 믿던 사람들이 믿어서 부흥을 한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이 꼭 무섭고 두렵고 나쁜 것이 아님을 여기서 봅니다. 내가 없어도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꼭 내가 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잡혀가도 하나님은 부흥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콜럼버스가 지난 10년 사이에 메트로 지역이 두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도 많아지고 집값도 많이 올랐습니다. 백만, 이백만 되는 도시에서도 교회가 갑자기 며칠 사이에 만 명이 되면 대단한 뉴스거리인데, 당시 인구밀도도 높지 않던 예루살렘에서 단 며칠 만에 만 명이 넘어가는 엄청난 교회가 이루어진 것이 놀랍습니다. 그것도 사도들이 갇혔는데도 그런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코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해서 일어납니다.
2. 박해하는 자들의 실체 (5-7 절 )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5-7절)
이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유대인들의 ‘공회’가 소집되었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라는 것은 일종의 국회 같은 것입니다. 로마가 다스리는데 자꾸 유대인들이 와서 종교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니까 그들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세운 기관입니다. 공회는 7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제사장이 의장인 기관으로,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를 다루는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그 대신, 사형을 시킬 권한은 없습니다. 종교 문제만 처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기서 모였다는 겁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인데,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정치와 타협하면 안 된다고 하며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나스와 가야바와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입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같이 모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평소에는 원수였던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되었고, 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지금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나오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처리하는 데에 서로 원수처럼 지내던 두 파가 같이 모여서 같은 목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기 “관리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 같고, “서기관들”은 바리새파로서 율법과 전통의 전문가들입니다. 안나스는 대제사장이었는데 퇴임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가야바가 이때 대제사장인데, 요한과 알렉산더는 당시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사람들이었고, 대제사장의 문중도 다 참여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이 여기에 다시 모인 겁니다.
그들은 모두 성전 문 앞에서 다리 못쓰던 사람이 일어난 사건을 들어서 압니다. 그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메시지의 핵심은 자기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도 정보원들을 통해 다 들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들은 청중들이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서 남자만 5천 명이 믿었다는 정보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죽여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제자들이 나와서 더 큰 영향력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고 충격을 받고 패닉 상태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비상대책회의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모였습니까? 첫째는, 시기심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이 나면서부터 다리 못쓰던 사람을 고친 것 같은 큰 기적을 베풀어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모인 그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가 말씀을 가르치는데 백성들이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사실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킨 엄청난 능력을 사람들이 보았으니까 거기에 몰려드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백성들의 관심이 가는 게 싫었던 겁니다. 인정과 존경을 빼앗기는 게 싫었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종교 지도자라고 옷도 멋지게 걸치고 다니고 거룩하게 보였는데, 그 체면과 권위가 말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어쩌면 다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이적을 행하신다면 종교 지도자들인 자기들을 통해서 하셔야지,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는가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러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게 아니라고 몰아가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적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어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조작과 조종에 능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까지 올라와서 기득권을 잡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조작해서 모략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무너뜨리고서 자기가 올라가려는 흑색선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려면 우리를 통해 해야 한다. 설교로 은혜를 주시려면 우리를 통해서 해야 한다. 사람들이 변화되고 살아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스타가 되는 게 중요하다. 차라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더라도 우리가 드러나야 한다.’ 이런 것이 그들의 입장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이들은 모든 것을 파워 게임으로 봅니다. ‘누가 더 강하냐?’ 지금까지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유대인들의 정치와 경제의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이런 기적을 보면서 지도자들이 잘못되었고 진짜는 사도들이라고 하며 시위가 일어나면, 로마 정부가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다른 사람들로 대체하게 됩니다. 실제로 로마 정부는 사람들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군중의 소요나 무질서 사태에 대해 책임을 엄중히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행했느냐?” 그러자 예수님도 한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으로서냐, 사람으로서냐? 그럼 내가 대답해주겠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왜 안 믿었느냐고 할 게 두려웠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백성들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을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느냐 할까 봐 두려웠기에 ‘우리는 모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대답을 안 해주셨습니다.
그 질문을 여기서 또 하는 겁니다.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너희가 왜 까불어?’라는 겁니다. 마치 조폭들이 ‘우리 구역에서 누구 허락 받고 장사 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뒤를 봐주는 세력이 누구야?’라고 하는 식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때 ‘나 몰라? 나 총독 조카인데?’라고 했다면 깜짝 놀라며 두려워하면서 조사를 해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은 항상 사람을 이용합니다. 마귀가 갑자기 빨간 옷을 입고 뿔을 달고 꼬리를 달고 삼지창 들고 나타나서 찌른다고 위협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통해서 공격합니다. 항상 세상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지금 사탄에게 이용당해서 나온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는 베드로도 이전에 사탄에게 이용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어야 하고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럼 안 된다고 말렸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합니다.
특히 사탄이 잘 이용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벌레는 깨끗하고 청소를 잘하는 데 생기지 않습니다. 벌레가 생기고 거미줄이 쳐지는 곳은 청소를 안 하는 곳, 더러운 곳입니다. 우리 마음도 똑같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와 말씀으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사탄이 꼬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질투, 시기, 미움, 음란, 욕심, 교만, 폭력이 있는 사람의 마음은 사탄이 아주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하고 스스로 성경 지식을 자랑하며 교만하게 나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은 사탄이 조종하고 역사하기에 너무 좋은 마음입니다. 아주 사탄이 갖고 노는 놀이터입니다. 종교지도자라고 하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고 있는데, 그들의 권력욕과 돈에 대한 욕심을 이용한 사탄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겸손함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순간이라도 우리가 방심하면 바로 이렇게 됩니다. 오랫동안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한순간만 방심하면 마귀가 바로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매일 왜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공부해야 합니까? 귀찮은데 하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안 하면 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마귀의 뜻을 따라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매일 우리의 마음 밭을 가꾸고 청소하며 주님을 붙들어야겠습니다.
이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의 말씀 전함을 너무 불편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두개인들 자체가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가르쳤는데, 사도들이 와서 ‘부활이 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라고 하고 사람들이 거기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니까 자기들의 영적 권위가 떨어질 것을 아주 두려워합니다.
또 베드로는 예수 안에 죽은 자들도 다 부활한다고 합니다. 불과 두 달 정도 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그 예수가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면 자기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러면 종교지도자로서 권위가 땅에 떨어지며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막아야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때라도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데, 체면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지도자들은 재판을 통해 일단 베드로와 요한의 기를 꺾어놓아야 했고, 말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두었습니다. 이들에게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단 막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곤란했던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말은 막을 수 있지만 이미 일어난 기적은 막을 수 없습니다. 이미 일어났고 사람들이 다 봤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가 안 믿는 분들을 인도할 때 제일 좋은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혹시 말은 좀 막힐 수 있지만 변화된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다리 못쓰던 사람은 가는 곳마다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누가 봐도 예수의 능력이 역사한 증거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변화된 우리의 모습이 가장 좋은 전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3. 담대한 믿음의 선포 (8-12 절 )
1)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8절)
졸지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된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자기들은 도망가고 부인했는데, 그때 예수님은 이 자리에 서서 억울하게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때 큰 감격과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했는데, ‘주님이 서셨던 자리에 내가 서다니!’ 하며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때 보통 사람이면 굉장히 위축되고 겁에 질릴 상황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전에 도망갔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순간에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입니다. 어지간한 사람은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 아무 말도 못할 텐데, 베드로의 비결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베드로가 한 게 아닙니다. 그 안에 계신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다’, ‘성령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말재주로 할 수가 없는데, 성령이 역사하셔서 담대히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씀을 할 것을 언제 계획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할 말을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미 이럴 때가 올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19-20)
이 역사가 베드로에게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시기심과 분노와 두려움이 충만해서 말했지만,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해서 말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령의 지혜로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할 말을 주십니다. 베드로가 이전에 목숨을 빼앗기는 게 두려워서 벌벌 떨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는데, 지금은 그 베드로가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서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2) 제대로 된 질문을 하라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9절)
베드로는 이 사건을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사람에게 아주 유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이 뭡니까? ‘지금 너희는 백성의 종교지도자라고 하면서 사랑이 없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썼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냐?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났다. 그러면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찬양하고, 또 이 불쌍한 사람이 회복되었으니 축하해주는 게 당연한데, 이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 사랑이 없다.’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너희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라고 합니다. 이들의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이라고 합니다. 누가 했고 누구 권세냐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일으키셨는가? 하나님이 해주셨구나.’ 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지, ‘누구 권세로 했냐? 너희는 권세도 없는데 왜 함부로 이 일을 했느냐’라는 데 왜 관심을 갖느냐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만약 하나님께서 뭔가 이적을 행하신다면 우리를 통해 하셔야지, 너희들이 뭔데 함부로 하느냐?’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베드로는 초점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무슨 권세로 되었는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하셨으면 되는 것인데, 본질을 제쳐놓고 왜 자꾸 비본절적인 문제를 가지고 문제의 핵심을 흐리느냐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니까 바울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무슨 상관인가? 예수님이 전파되기만 하면 나는 기뻐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전해지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기 위해서 나가지만, 반드시 우리 교회를 통해서만, 나를 통해서만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통해 역사하시면 감사한 일이지만, 다른 형제자매들을 통해 그런 역사가 일어나면 감사한 일입니다. 다른 교회를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막 나타났다면 배 아파야 할 일이 아니라 감사한 일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 교회들을 통해서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3) 능력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0절)
베드로는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렇게 말이 단순하고 분명하고 담대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선포합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예수님이시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 자신이 일으켰으니까 영광이 자기에게 와도 가만히 있을 만한데, 철저히 자기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1-12절)
율법과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공사장에서 쓸모없는 돌을 버리듯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우리 구원의 머릿돌,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머릿돌은 건물의 핵심이 되는 돌입니다. 그 당시에는 건축할 때 머릿돌이 없으면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예수님을 빼면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빼면 하나님 나라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선포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되어야 합니다. 설교나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한 게 아니라,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직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고 합니다.
오래 교회에 다니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에게는 ‘아멘’ 할 만큼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분이나 교회에 처음 나온 분이 들으면 너무 배타적이고 불편한 내용입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고,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래서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왜 다른 길도 있는 것 같은데 예수만 유일한 길이라고 하느냐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쇠가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많지만 맞는 열쇠는 단 하나입니다. 만약 모든 키가 다 통하면 문제 아닙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분이셔야지, 여러 분이면 문제 아닙니까? 내 컴퓨터를 여는 암호가 어떤 것을 쳐도 다 되면 문제 아닙니까? 하나만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요즘 iPhone X이 나오면서 얼굴 인식을 해서 비밀번호를 해제하여 들어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쌍둥이면 둘 다 통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쌍둥이가 아닌 형제도 그냥 통과된다는 겁니다. ‘아, 잘됐다. 진리는 여러 개라도 되지.’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만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만 되어야 합니다. 여러 개가 다 되면 문제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산꼭대기는 하나이지만 올라가는 길은 여려 개가 아니냐? 꼭 기독교만 유일하고 예수만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 배타적이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산꼭대기는 어느 길로 올라가도 괜찮다고 하는 말이 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말인 것을 아십니까?
그 말은 모든 길을 다 가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길을 올라가다가 막혔는지, 길이 끊어졌는지, 낭떠러지인지 어떻게 압니까? 가 봐야 아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길로 다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자기가 다 가봐야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 독선적인 말이 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 예수 이외에도 길이 많이 있다고 하면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고 그분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임했습니다. 예수님 중심, 성령의 충만이 교회에게 중요합니다. 또 그럴수록 사탄의 역사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적인 승리의 열쇠는 사탄이 공격해올 때 일일이 가서 땜질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 중심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기본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럼 성령 충만함을 주셔서 능히 이길 길을 주십니다.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능력을 주십니다.
[ 나가는 말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존 웨슬리가 주님과 교통하며 기도하다가 깊이 잠이 들어 천국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서기 직전에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천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와 함께 영광스런 복음 운동인 감리교(Methodist)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천국에 들어와 있습니까?” 그 천사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명부를 한참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감리교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웨슬레는 다시 물었습니다. “나의 신앙이 잘못된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영광스런 존 칼빈의 5대 교리를 강조하던 장로교인들이 다 천국에 왔나요? 그들은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사가 막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장로교인 역시 한 명도 안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종교개혁이 대단히 실패한 모양입니다. 그러면 천주교인들이 다 온 모양인데 그들은 얼마나 들어와 있습니까?” 이번에도 천사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천주교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웨슬리는 천사의 대답에 너무 괴로워서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왔단 말이오?” 천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천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이 와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정한 교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리교이든, 장로교이든, 침례교이든, 초교파이든, 순복음이든, 가톨릭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12절, 새번역)
이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 사실을 확신하시고 감격하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들고 나아가 전함으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교회로 더욱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4장, 산헤드린 공회에게 날린 베드로의 돌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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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말을 따를 것인가?
본문 : 사도행전 4장 1-22절
2014. 2. 23. 소토교회 주일낮 예배 설교
1. 잘못 알고 있는 역사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를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조선 마지막 왕 고종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저는 고종 그러면 일단 나라를 망하게 한 무능한 왕, 명성황후와 아버지 대원군 사이에서 휘둘려 제대로 자기 정치를 펼치지 못한 왕. 명성왕후가 궁에서 피살당하자 죽는 것이 겁이나 러시아대사관에서 1년이나 피신해 있던 겁많은 왕. 그리고 어줍잖게 열강의 흉내를 내 나라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가 되었다가 13년만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왕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그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가 된 것은 열강의 흉내를 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게 해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나라를 근대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정치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서울을 근대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로를 정비하고, 공원을 만들고, 도시를 활성화시켰습니다. 여러분, 아시아에서 전차가 가장 먼저 도입된 나라가 어디일까요? 당연 일본이라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우리나라입니다. 서울에서 전차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들어섰습니다. 이를 위해 전기회사가 만들어졌고, 나중에는 서울 전역에 가로등이 생겨 거리를 환하게 밝혔습니다. 서울에 최고 더러운 도시 중 하나였는데, 대한제국으로 바뀐지 3년만에 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하고 근대화된 도시로 불렸습니다. 서울을 방문한 많은 외국인들이 그 변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군함을 만들고, 근대식 군대를 만들어 우리나라의 안보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종의 개혁에 위기의식을 가진 열강들이 서로 담합해서 대한제국의 개혁을 주저앉혀버린 것이죠. 안타깝게도 열강들의 전쟁과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엔 역부족이었긴 해도 그 13년간의 변화는 우리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엔 충분하였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합니다. 그런데 우린 왜 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해 그렇게 몰랐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근대사에 대해 들었던 것은 당시 이 나라를 침탈한 일본이 해석한 역사를 그대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말을 듣느냐? 그리고 누구의 말을 따르는가는 이처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또한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누구의 말을 따를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 역시 그 선택에 기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2. 사두개인과 부활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장애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두개인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로잡아 공의회에 세웠고, 그들을 위협하여 더 이상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을 겁박하여 그러지 못하도록 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입니다. 이상한 걸 느끼지 못하셨나요? 이들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지 못하게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나가서 성경을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님을 못박아 죽게 하는데 앞장 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데, 그 지도자들의 중심이 바로 이 제사장과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들입니다.
조금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알아봅시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룹니다. 이 나라는 열두지파의 연합체이고,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한 후 사사들이 이끄는 시대가 됩니다. 사사시대라고 하죠. 그 후에 왕이 세워지고, 다윗왕가가 이어집니다. 그러다 솔로몬왕 이후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다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나중에는 남 유다도 망합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식민지가 됩니다. 바벨론에 의해, 나중에는 페르시아에 의해, 그 후에는 알렉산드의 헬라제국에 의해, 그리고 로마제국에 의해 지배를 당합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이 식민지 기간이 약 500년 정도가 됩니다.
이 식민지 기간 중에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습니다. 그러다 주전 160년 경에 마카비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라는 사람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을 하게 되고, 성공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왕조가 하스모니안 왕조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이 왕도 되는 그런 나라가 된 것이죠. 이 왕조는 약 80년 정도 지속되다가 로마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로마의 총독과 로마가 세운 괴뢰정부인 헤롯이 왕이 되어 다스리지만,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실권은 이들 제사장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제사장들 중에 사독의 후예가 대제사장이 되었는데, 이 사독의 후예들을 두고 사두개인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해석하고, 성경을 필사하는 일을 하는 지도자를 서기관이라고 하는데, 이 서기관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맡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공회를 산헤드린이라고 하는데, 이 산헤드린은 바로 제사장과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들이 중심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가장 권위 있는 사법기관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나중에는 이 산헤드린에 귀족과 바리새인들도 일부 참여하였지만, 이 산헤드린은 그야말로 제사장과 레위사람들로 짜여진 기관이었고, 이 산헤드린의 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이렇게 제사장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고, 이 제사장들을 이끄는 그룹이 바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즉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아주 현세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권력추구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제사장들이면서도 부활을 믿지 않았고,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카비 시대부터 이미 메시야가 도래했고, 자신들이 그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메시야의 구원을 믿지 않았습니다. 즉 현세적인 욕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무늬만 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고, 이들 역시 일반 백성들보다는 당시의 권력자들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가 가장 싫어한 사람들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백성들의 신앙의 지도자로 떠오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메시야의 도래와 부활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싫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현세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고, 부활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여서 부활을 이루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말하는 것도 싫었는데, 그보다 더 싫은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선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더 싫고 미운 것이었죠.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을 부추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합니다.
우리도 사두개인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오직 현세적인 것에 몰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기도를 마쳤을 때에 마귀는 예수님께 이런 제안을 합니다. 예수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 천국 이런 거 다 필요 없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먹고 잘사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니 돌들을 떡으로 변하게 하셔서 먹을 걸 풍성하게 주시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셔서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셔서 인기를 얻으시고, 나를 경배하셔서 내가 가진 권세를 다 가지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마귀를 쫓아내버렸습니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그런 마귀의 말을 듣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것처럼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 구원을 저버린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현세적인 욕망에 충실해 있었고, 이것을 이루어준다는 말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들었고 보았습니다. 그 외에는 다 배척해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귀에 예수님의 말씀은 들려지지 않았고,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도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복음을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3. 누구 말을 따를 것인가?
그런데 핍박도 아주 교활하게 진행합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공회에 잡아서는 위협합니다. 그러고는 묻죠.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했느냐?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전문적으로 성경 공부를 한 사람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주신 권리로” 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불경죄를 저지른 것이 되어 체포할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주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그는 장애인이 멀쩡하게 치료된 것을 하나님의 선한 일이라 주장하였고, 이 일을 이룬 것은 바로 당신들이 죄없이 죽인 예수님 때문이며,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니 공회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이 가진 권력으로 제자들을 위협하고 억눌렀습니다. 지금은 풀어주지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 때 베드로가 돌직구를 날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건 정말이지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는 말입니다. 뼈아픈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너희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갈등과 고민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이 세상의 현실에 사로잡혀 살아왔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 역시 이 땅에서 사두개인들처럼 현실적인 욕망을 얼마나 잘 이루는가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세상의 말에 귀기울이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자리에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갈등이 시작됩니다. 예전에 살았던 사두개인과 같은 그런 인생을 계속 지속해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인생을 살 것인가?우리도 베드로처럼 이 세상을 향해 멋진 돌직구를 날려봅시다. (*)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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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성령 충만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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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4장. 성령 충만을 구하라. (찬 191)
1.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 불릴 만큼 성령님께서 사도들과 성도들을 통해서 이루신 일을 기록한 책이다. 본문에서 공회 앞에 선 사도들과 공회의 위협 속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들이 성령의 충만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못 걷는 자를 일으킨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 서게 되었다. 주님의 예언대로다(막 13:9). 두 달 여 전 예수님을 정죄했던 그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의 심정은 어땠을까? 전에는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지금은 변했다. 왜 그런가?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8). 여기 열쇠가 있다. 그는 담대하게 무서운 공회의 권위 앞에서 그들이 정죄하여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못 거던 자가 건강하게 되었다고 담대히 증거한다(10).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 베드로의 담대한 선언과 병 나은 사람의 존재 앞에서 공회원들의 입이 닫혔다. 그들은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전하지 말라고 협박을 하고 놓아줄 수 밖에 없었다. 베드로가 여기서 공회원들에게 전한 말은 교회역사 속에서 유사한 상황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용하고 힘을 얻었던 그 말씀이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변호사가 아니라 증인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받았다. 보고 들은 확신이 없다면 어찌 증인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열쇠는 성령의 충만함이다.
2. 석방된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왔다. 교회는 이미 이 일로 남자만 5천명이나 더 증가하였으니(4) 벌써 2만 5천명 이상의 대형 교회가 되었다.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은 교회는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주재(Sovereign Lord)께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분별하면서 기도했다(24~30). 그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다 구약성경 기록의 성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기도를 마칠 때 그들이 모인 곳이 진동하였고(하나님은 이 현상으로 그들을 확신으로 인도하셨다) 그들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밖으로는 복음을 전하고 안으로는 사랑이 풍성해져 갔다. 먼저 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고 온 교회가 큰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공동체는 더욱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서로 사랑하되, 물질을 나누는 실제적 교제가 풍성해졌다. 자기 재산을 바친 이들 중 한 사람이 소개된다.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바나바다. 격려하고 위로를 잘 하고, 자기는 숨고 다른 사람을 앞세우는 성품을 보고 사도들은 그에게 바나바, 격려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을 교회에 주신다.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교회에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구하자.
3.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성령의 충만을 입은 사도와 성도들의 모습을 본다. 당신은 이런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사는가? 그 은혜를 구하는가? 또 그 결과로 당신의 삶에서 담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가? 성령의 충만을 구하라. 성령의 충만은 반복적으로 우리의 삶에 임하는 은혜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담대하게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하신다. 오늘날 교회에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4. “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어떤 대가와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참되고 부끄럽지 않은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사도행전 4장 성경말씀] 유대인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베드로(행 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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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4장 성경말씀 중에서 유대인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베드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승천하고 성령을 받은 후에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이 싫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제자들을 체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제사장들 앞에서 담대하게 나사렛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두려워서 떨었지만 지금은 성령을 받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유대인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베드로(행 4:1-37)
1-22절, 공회 앞에서 증거함
[1-4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성전 경비대장]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제사장들은 구약교회 지도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싫어하였다. 중생치 못한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할 것이다. 심지어 교회의 직분자라 할지라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만 깨달을 수 있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롬 10:17) 듣고 믿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엡 2:8). 남자들의 수가 약 5천명이 되었다. 이 말은 솔로몬 행각에서의 전도로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수가 약 5천명으로 늘어났다는 뜻일 것이다(칼빈, 매튜 풀).
[5-7절]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관원’이라는 원어(알콘타스)는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말로 아마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산헤드린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공회의 회원으로서 사두개파에 속하였다. 당시에 시무하는 대제사장은 유대인 공회의 의장이 되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었으나 바리새파에 속하였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로 성경의 사본을 보존하고 필사(筆寫)하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즉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지 자신들의 이름으로 하는지 물었다.
[8-10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담대하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비상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담대함과 능력을 주신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에게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되어 그들의 앞에 섰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죄가 없으셨음을 증거하였고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다(롬 1:4). 또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자주 표현했다(2:22; 3:6; 10:38). 그것은 사람으로 오신 역사적 예수를 가리킨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독특한 인격 곧 하나님과 사람이시다. 그는 살아계셔서 지금도 신성(神性)의 영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그의 이름이 능력이 있고 그 이름이 이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이다.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베드로는 시편 118:22의 말씀으로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 말씀은 메시아 예언이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너희 건축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켰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고 마침내 로마 총독 빌라도를 통해 그를 죽게 하였으나, 그 버린 돌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 집의 좌우의 벽을 연결하는 기초석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석이시다. 사람들은 그를 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셨고 중요하게 사용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뜻을 이루는 일이었다.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 베드로는 세상에서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였다. 주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였다(딤전 2: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를 세상에 보내주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한 구주이시다. 우리는 이 유일한 구주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타종교와의 대화분과장이었던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타종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고 동료 순례자라고 말하였다. 감신대학 학장이었던 교수도 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런 이단 사상을 경계해야 한다.
[13-14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파르레시아)[담대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사도들의 담대한 발언은 분명히 성령께서 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약속하셨었다(마 10:19-20). 모세가 하나님께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하며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고 말씀하셨었다(출 4:11-12).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구변(口辯)을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말했었다(요 7:15).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고 은혜스럽게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이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담대히 은혜스럽게 증거케 역사하신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비난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고 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앉은뱅이가 그들과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리는 항상 당당하다. 진리에 대한 정당한 비난은 없다. 진리의 사람들에 대한 비난들은 항상 있어왔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대해서도 그러했으나, 모든 거짓된 비난들은 다 파하여지고 진리는 견고히 세워질 것이다.
[15-16절]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그노스토스)[확실한, 다툴 여지가 없는]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그 앉은뱅이가 나은 것은 공회원들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려 했다. 그것은 그들이 어두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진리는 은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이루어진 사실들에 기초하고 있다(행 2:22). 그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항상 진리를 부정하고 왜곡시키려 하였다.
[17-18절]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공회원들은 예수님에 대해 믿을 만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고 대적하며 그것이 전파되는 것을 싫어하고 방해하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다(롬 3:11).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19-20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였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말씀을 순종하였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과 그의 명령들을 말하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말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
[21-22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40여세나 되었더라.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원수들의 입을 막으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환경조건과 별개로 역사하신다.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싫어하고 그들을 잡아 가두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셨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충성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자.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였다. 또 그는 살아계신 주 예수께서 그 앉은뱅이를 낫게 하셨다고 증거하였다.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가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유일한 구주이시다. 인류의 구속(救贖)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자는 예수밖에 없으시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유일한 구원의 종교이다. 오늘날 교회들 속에 들어와 있는 종교 다원주의는 이단이며 그것을 포용하는 것은 배교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람들의 위협 속에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하고 또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사도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 예수님을 증거하였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증거하는가? 우리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증거할 수 있는가?
23-37절, 고난에 대한 사도들의 대처
[23-24절]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공회에서 놓인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 사도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도들은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였다. 그들에게는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일치된 믿음과 행함이 있었다. 기도는 어려울 때 담력을 얻는 길이다. 성도는 기도로 어려운 세상 현실을 잘 극복할 수 있다.
사도들은 기도하되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였다. 통성으로 기도한 것이다. 보통 때에는 조용히, 남에게 방해되지 않게, 속삭이듯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 무의미하게 말을 반복하거나 중얼거리지 말고 인격적 하나님께 또박또박 아뢰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상한 때에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대주재여, [주께서는]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하나님이시니이다](전통본문)”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참 주인, 즉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시고 모든 일을 임의로 행하실 권한이 있으신 자이시다.
[25-28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사도들은 헤롯과 빌라도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메시아를 대적한 것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시편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도들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증거한 것이다. 또 그들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신앙과 대항도 그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셨음을 말했다.
[29-31절]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주의](전통본문)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사도들은 하나님께 몇 가지를 간구했다. 첫째는 권세자들의 위협을 보시옵소서라는 간구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면 사도들을 위해 적절하게 조치하여 사도들을 보호해 주시든지 피신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원수들을 진멸시켜 주실 것이다.
둘째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이다. 진리에 대한 핍박은 예견된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없애주시기를 구함보다 그것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 주시기를 구했던 것이다. 진리 운동에 고난과 핍박은 항상 있다. 그러나 전도를 통해 영혼들은 구원을 얻고 교회는 설립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히 계속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 있게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며 모든 신자들에게 가장 귀한 일이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큰 중요성을 두고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셋째는 주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이었다. ‘손을 내밀어’라는 말은 전통본문에는 ‘주의 손을 내밀어’라고 되어 있다. 주께서 병고침과 기적을 행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이런 역사가 많이 일어났었다.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며 신약교회가 아직 튼튼하게 건립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통해 복음 진리를 확증하셨으나, 하나님의 기사들과 능력들은 교회 역사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것들 없이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기독교는 기적이나 철학을 전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왔다(고전 1:22-23). 2천년 기독교 확장은 기적들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다. 모인 곳은 진동했고 모든 사도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성령은 능력의 영이시며 능력을 주시는 영이시다. 사람은 대적자들의 위협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기 쉽지만, 성령의 충만함으로 담력을 얻는다. 오늘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얻음으로 담대히 전도할 수 있다. 전도의 담력은 성령 충만에서 나온다.
[32-37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공동으로 사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교회이었다. 사도행전 2:44-45도,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의 유무상통은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짐에서 나왔다. 그것은 그들이 한 교훈을 받았고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졌으며 한 순종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고 무리들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밭과 집 있는 자들은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그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바나바도 밭을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물론 기독교는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신 15:11). 왕정 시대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다. 또 부지런한 자는 부해지고 게으른 자는 가난해진다(잠 10:4). 그러나 비록 성경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만, 우리의 모든 재산은 실상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물질에 종이 되지 말고 물질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에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의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대상 29:11, 14-16). 또 다윗은 시편 24:1에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재산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즐거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초대 교인들의 유무상통의 정신이었다. 물질적 여유가 있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물질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내 것이라고 자랑하며 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그의 뜻과 그의 영광을 위해 내놓는 것일 것이다. 물론 모두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전제되어야 한다. 게으름은 악한 것이다. 사람마다 건강 상태가 다르고 타고난 재능도 다를 것이지만, 누구든지 손으로 하는 일을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했다(살후 3:1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어려울 때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다.
둘째로, 성도는 세상의 고난과 핍박 중에도 담대함을 가지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 고난 많은 세상에서 성도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을 얻을 때 담대함을 얻는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개인적 신앙 생활에서나 교회의 봉사 생활에서나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언제나 담대히 행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바른 교훈과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지식과 풍성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재산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과 어려운 교우들을 돕는 일을 위해 사용하자.
[사도행전 히브리어 성경말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1-13)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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