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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고백 (작사∙곡: 이제경)
piano: 이승호
vocal: 이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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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베드로의 3대 고백 – 국민일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번의 고백을 합니다. 처음 고백은 신앙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두번째 고백은 신앙의 …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5/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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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3-20 베드로의 신앙고백
그것은 물고기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익투스(ἰχθύς)라는 단어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단어들 첫 스펠을 모은 것과 같아서 이 베드로의 고백은 …
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4/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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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고백 – 설교말씀 – 양의문교회
베드로의 신앙고백 · 13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
Source: www.asheep.org
Date Published: 11/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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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대조표 / 베드로의 신앙 고백 – 한국컴퓨터선교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이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
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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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 고백 (마 16:13-20) – Daum 블로그
베드로의 신앙 고백 (마 16:13-20) 시몬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였습니다.그 당시에 가이사랴라는 장소는 두 곳이 있었습니다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5/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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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 – 사순절 제 35일 – 베드로의 고백 (마태복음 16:15-17)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Source: walkingwith.or.kr
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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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베드로 의 고백
- Author: happymaker행복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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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2.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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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베드로의 3대 고백
요한복음 21장 15∼17절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번의 고백을 합니다. 처음 고백은 신앙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두번째 고백은 신앙의 성숙을, 세번째 고백은 신앙의 재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죄인된 고백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당시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 하는 어부였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허탈감에 빠져 빈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 배에 나아 오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배를 잠시 빌려 임시 강단 삼으시고 바닷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는 만선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처음으로 올린 그의 고백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입니다.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은혜를 받고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반응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신앙 고백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르게 깨달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란? 그리스도의 삼직을 나타내는 말로써 ‘주님은 나의 왕 이시요, 제사장이시요, 선지자이십니다.’라는 신앙의 분명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그 자신으로 하여금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되고 결국 주를 위해 순교 할 수 있는 신앙의 장부가 됐습니다.
셋째, 사랑 고백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세 번째 사랑고백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과거를 묻고 따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현재를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냐?’ 주께서 물으실 때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고백은 ‘주님 제가 비록 믿음이 약해서 죽음이 두려워서 주님을 부인했지만 내가 어찌 주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제가 과거를 뉘우치면서 주님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제 마음을 다 아십니다.’ 라는 의미를 가진 고백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듣고 싶어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곳은 그가 주님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고백을 받으실 때 숯불을 피워 놓았습니다. 그 숯불은 얼마 전 그가 부끄럽게도 대제사장의 집 뜰에 피워놓은 그 숯불 앞에서 부인한 것을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자신이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이 시간 베드로에게 물으심같이 동일한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야 나는 너를 죽도록 사랑하였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정상은 김해주안교회 목사
(마태복음) 16:13-20 베드로의 신앙고백
요즈음은 보기 힘들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물고기 모양을 차 뒤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것은 물고기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익투스(ἰχθύς)라는 단어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단어들 첫 스펠을 모은 것과 같아서 이 베드로의 고백은 익투스로 상징되었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기독교가 핍박 받던 시절 기독교인들의 상징과 암호이기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마 16:16)
이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사람들이 이르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또 더러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가 아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사실은 믿노라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또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에 살 동안 복 받는다는 것 그것이 믿음과 관련된 정의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결과와 효과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무엇이 믿음이냐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고백 자체로도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그 고백의 과정,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물으신 물음과 어우러졌을 때 제대로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 하는 문제이고, 그것을 좀 어렵게 말하면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라고 하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더욱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베드로가 고백하는 그 순간, 예수님을 주로, 또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신앙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고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이 칭찬해마지 않았던 것은 지금 이 시대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으면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눈에 또 그 당시의 사람들 눈에 한낱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한 남자, 가끔씩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것은 선지자들도 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선지자라고는 할 수 있는 그냥 그런 한 사람, 또 한편으로는 세금도 내지 않고, 율법도 무시로 어기며, 가난한 사람, 죄인 그리고 창녀와 세리와 밥을 먹는 그런 한 사람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선지자나 세례 요한이라고 했던 것은 그들 마음에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볼 때 성경에 대하여 놀라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나 때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 사회와 역사 속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보였던 것이고, 그리고 세례 요한도 천국의 복음을 전파했기에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선지자로 보였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주나 메시아(그리스도)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는 대로 사람을 대한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그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늘 ‘선생이여’라고는 불렀을 뿐 <주>로 부르는 경우가 없었다. 그와 같이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은 선지자로서의 의미는 있었지만 그리스도로서의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겼다면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니까…
그런 이유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먼저 주라 칭하고 또한 그 자신의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베드로의 마음과 같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정체와 본질 역시 그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 말씀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와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블로그의 제목을 <성경은 나의 이야기다.(Bible become My story!)>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예수님은 나에게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예수님이 누구냐에 따라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밥 먹고, 창녀와 매국노 같은 세리와 놀고 때로 성경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면 그를 주로 또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에게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묻는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서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기에 예수님이 보실 때 너무 귀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세상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육신의 연약하고 고상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했을 때, 그럴 수 있는 사람의 고백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옷을 입지 않고, 또한 신학박사가 아니고, 또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한 것도 아니고, 또 때로는 고상하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존경받지 못할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지금 신학(신앙이 왜 학문이 되었는지 알 수도 없지만)적으로 많은 공부를 하고, 또 잘 차려입고 또 훌륭한 조명과 음향시설을 갖춘 높은 강대상에서 자신의 신앙고백이 아닌 성경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또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존경받는 방법으로 변질시킨 설교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상에 찌들어서 살아가는 중산층 이하의 삶을 살면서 때로 법도 어길 수밖에 없고, 또 때로는 욕도 하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거나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면 용납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시대의 가치관이 그렇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고, 그런 고백을 상징하는 것을 차에 붙이거나 자신의 종교의 대표성으로 표시할 자격이나 믿음이나 신앙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한낱 목수의 아들이고 때로 세금도 못내는 가난한 예수님을 보면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 안다면 교황이 왜 있으며, 교회를 왜 화려하게 지을 것이며, 또 목사를 청빙하는데 왜 학력을 보겠는가? 그러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어우러져 사는 거저 평범한 사람, 신학을 몰라도, 높고 좋은 강대상에 오르지 못해도, 또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영광이라고 할 것이 전혀 없고 성공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을 그리스도와 같이 대하고,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또 그 중에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미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베드로의 고백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고,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주변에 있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나 베드로 눈에 또 당시 유대인들 눈에 비친 예수님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메시아로 자신에게 의미가 있음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제사장의 화려한 옷을 입은 것도, 로마 황제의 옷을 입은 것도 아니라 베드로와 유대인들의 눈을 볼 때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도가 되고 또한 예수님과 같은 세계의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 평범한 인생들, 피라미드의 하층에 있고, 상대를 이겨야 승자가 되는 세상의 법에서 패자와 죄인이 된 사람들, 그런 인생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이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면 사는 꼴은 그러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대하듯 할 수 있다면 베드로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된 사람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졌다면, 또 신학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단언컨대 베드로의 고백은 그들의 고백은 아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마태복음 16 장
13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절: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절: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절: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 설교요약 —-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마 16:14).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범한 인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으로 인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중요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을 때 그 강조점은 “너희”에게 있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의 대변인 자격으로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은 베드로 자신만의 확신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공유했던 확신을 베드로가 대변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메시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처럼 바른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주님의 복된 약속의 말씀을 듣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장 큰 복
단순한 인간적인 지식과 지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유일하신 그리스도라는 인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를 통하여 성령으로 알려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른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요 구주이심을 믿고 고백하는데, 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성인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구원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 중에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르게 믿는 복이 가장 크고 근원이 되는 복입니다. 사람이 예수님 믿는 복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 그 어떤 복도 결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 그 자체가 가장 큰 복입니다. 이 복을 받으면 영생의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과 온갖 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죄 사함과, 의롭다 함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됨과, 그의 백성됨과, 성령의 은혜와, 금생과 내세의 온갖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게 되니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께서 두 번째로 말씀하신 복된 약속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세우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터가 되시고 머리가 되시며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란 건물도 아니고, 사람들로 조직된 어떤 단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의 공동체이며, 선교 공동체요, 예배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의 제자가 되게 하고, 그의 몸인 교회의 회원이 되어 다른 성도들과 함께 이 땅 위에 있을 동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충성하다가, 때가 되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은 모든 참된 신앙고백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시지만 바울은 사도들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짐을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건물로 비유할 때에 베드로와 같은 신앙 고백자들로 교회는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베드로와 같은 참된 신앙 고백자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로 교회는 세워지는데, 그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돈이나 벽돌이나 많은 수의 사람들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들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신자들이 전도하여 예수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고 그의 제자가 되게 하는 전도와 양육 사역을 통해서 교회는 세워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 믿는 자들을 통하여 이 일을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세우실 교회는 어떤 세력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가 입증해 줍니다. ‘음부의 권세’란 최대 최악의 적을 의미합니다. 사탄과, 온갖 죄악과, 어떤 국가의 권력, 종교의 힘, 그 어떤 적대 세력도 교회를 이길 수 없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고 친히 인도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한 두 사람이 모인 교회라도 진정한 신앙을 가진 자들로 이루어진 교회라면 주님이 친히 그들 중에 계시고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며, 모든 대적하는 세력을 이기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 열쇠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들어가는 문을 열고 닫는 열쇠입니다. 베드로만 이 천국 열쇠를 가진 것이 아니고, 베드로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로서 성령이 주시는 증거의 능력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자에게 이 천국 열쇠는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천국 백성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 문이 열려진 것입니다. 반면에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천국 문은 닫히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 믿는 자는 복음의 약속인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되지만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바른 신앙을 가진 복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들의 터 위에 든든히 세워져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일에 귀하게 수종드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천국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수 있는 바른 예배를 드리는 교회,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잘 양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coram Deo
베드로의 신앙 고백 (마 16:13-20)
시몬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였습니다.그 당시에 가이사랴라는 장소는 두 곳이 있었습니다.하나는 지중해 연안 욥바 항구 바로 윗편에 가이사랴라는 요새가 있었습니다.그 요새는 헤롯이 가이사 아우구스트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지역이라 볼 수 있습니다.또 다른 한 곳은 본문에 나와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이 도시는 헤롯의 아들인 빌립왕이 그 당시에 디베료 가이사랴라는 로마의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를 기념하는 가이사랴라는 도시를 만들었습니다.그러나 가이사랴라는 지역이 두 곳이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와 구별하기 위해서 빌립이 만들었기 때문에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가이사랴 빌립보는 바로 헬몬산 밑에 있는 도시로 거기에서부터 요단강이 시작됩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두로와 시돈을 거쳐서 이 헬몬산 밑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오셨을 때에 조용한 시간이 생겼습니다.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의견을 질문하셨습니다.여러 가지 답변이 나왔습니다.“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더러는 엘리야,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1.베드로의 신앙고백
그러나 예수님의 주 관심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은 계속해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라고 물으셨습니다.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대 성인 가운데 하나,혹은 위대한 스승,혹은 혁명가 등 여러 가지로 얘기할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예수님께서 질문을 했을 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그러면 이 신앙고백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라는 말은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첫째는 존경의 뜻입니다.선생이라는 뜻입니다.그래서 랍비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둘째는 우리의 생명이나 재산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셋째가 가장 중요한 뜻인데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구약성경에 보면 주,아도나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구약성경에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을 ‘주’라 불렀습니다.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또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그런데 그 당시 왕과 예언자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라는 말은 바로 예수님은 왕이시고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시라는 뜻입니다.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둘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왔다는 뜻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예를 들어 이들은 지혜가 많은 사람을 지혜의 아들,지식이 많은 사람을 지식의 아들,부자들은 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이듯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신성,즉 그가 하나님 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2.예수님의 대답과 그에 대한 바른 해석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고 하시면서 세 가지 중요한 말씁을 하셨습니다.시몬이라는 말은 본래 시메온입니다.그런데 우리말로 음역할 때 시몬이라고 번역했습니다.시몬을 히브리어이고 베드로는 페트로스,즉 헬라어이며 게바라는 말은 아람어입니다.반석이란 뜻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 중요한 말은 ‘바’라는 말입니다.이 말은 아람어로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그러니까 바요나란 요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아버지 이름이 요나.혹은 요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은 혈육이나 인간의 지식이나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이나 저나 신앙고백을 바로 하려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그래야 영의 눈이 활짝 열려집니다.
(2)“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 18절과 19절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의 역사상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온 구절로서 아직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예수님은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그런데 베드로라는 말이 반석이라는 뜻입니다.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주장하기를 ‘이것은 바로 베드로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이다.베드로 뒤에는 교황들이 그 권리를 이어간다.그러므로 천주교가 정통이다.’라고 말합니다.그러나 이 말은 틀립니다.원어로 얘기하면 ‘너는 베드로라’하는 말은 ‘수에 페트로스’ 즉 ‘너는 페트로스라’가 됩니다.이 페트로스라는 말이 베드로라는 말입니다.원문에 보면 ‘너는 작은 바위라 내가 이 반석 위에’에서 반석이란 ‘페트라’입니다.‘너는 베드로라’할 때는 여성명사를 썼습니다.앞에서 말하는 베드로의 반석이라는 뜻과 뒤에서 말하는 반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너는 페트로스라’는 말은 너는 작은 바위라는 뜻이고,‘내가 이 페트라 위에’에서 페트라는 기초가 되는 암석을 말하는 것으로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그러니까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기초한 것입니다.진실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는 딱 하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예수 그리스도 위에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들이 돌을 쌓은 것입니다.그리고 우리는 벽돌장처럼 그 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천주교에서 ‘기독교는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것이고 그 위에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들에 의해서 계속되어 간다’는 말은 이 원어를 바로 해석하지 못한 데서 온 신학적인 실언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18절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본문의 음부라는 말은 ‘하데스’라는 말입니다.하데스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스올’이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쉽게 말씀드리면 죽은 자들이 있는 곳,죽음의 세력을 얘기합니다.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사탄의 세력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아무리 사탄이 날뛰고 죽음이 날뛰어도 부활이요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운 교회를 결단코 파멸시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3)“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절).천국 열쇠를 누구에게 준다고 그랬습니까 베드로에게 준다고 했습니다.천주교에서는 이 말씀을 바로 인간의 삶을 다스릴 교회의 권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그래서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하는 것을 교회가 좌지우지한다고 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결단코 베드로의 사면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권한을 손상시키는 얘기입니다.예수님만이 사면할 수 있습니다.
요한 칼빈에 의하면 이 말은 그에게 사도직을 준다는 것을 재확인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사도행전 16장 9절에 보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그때 사도들이 모여서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결정했습니다.바로 그런 권한을 얘기합니다.그러니까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그들은 사도로서의 권한을 가집니다.그러면 사도로서의 권한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요 그 사도 직의 권한은 일회적인 것입니다.그들에게만 있습니다.그것이 계속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다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기도했던 그 역할은 계속 내려오지만 소위 기독교를 창립하는 사도로서의 권한은 단회적인 것입니다.그래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은 교회의 논쟁에 대한 금지,논쟁을 금지하거나 허락하는 능력을 바로 이들에게 주었던 것을 말합니다.이들에게 기독교를 세울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것들을 주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의 신앙을 종합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사도신경은 12마디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도들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닙니다.그후에 세례 문답을 하기 위해서 교회가 만들어낸 것입니다.그러나 거기에 있는 내용은 사도들이 고백한 내용을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신경’즉 사도들이 고백한 신앙고백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 시간에는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예수님께서 하신 아주 중요한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저나 여러분들도 시몬 베드로처럼 칭찬받을 만한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물론 그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이 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열쇠를 사도들에게 주셨습니다.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천국의 열쇠는 사도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주신 것입니다.복음이 전파될 때에 천국에 가는 문이 열려집니다.그러나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할 때에는 천국의 문이 닫혀집니다.그렇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땅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천국 가는 길이 계속 열려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항상 말씀과 기도 생활에 충실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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