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조 보고서 | 명성황후시해의 진실’에조 보고서’ 전문을 밝히다. 이토 히로부미와 조선영사 미우라 고로가 지시한 전대미문의 왕비 암살의 전말은 을미의병의 불씨가 되었다! 61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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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DIO: ZOOM H5
에조리포트 NR: 아나운서 김혜연 성우 허윤혁
가야금: 나누리예술단 김선경 단장
판소리: 무한전통예술문화원 이진영 관장
명성황후역: 정지문
민비 시해 가담자 명단
이토 히로부미 : 총리
미우라 고로 :을미사변(여우사냥) 현장 총 지휘,
일본공사 증거불충분 (무죄) 1910년 추밀원 고문관
1924년 호헌삼파의 원로 최고의 권력을 누림
시바 시로 : 하버드 대학교, 펜실페니아 대학교 경제학 전공 1914년 외무성 참정관을 지냄
스기무라 : 일등서기관
아다치 겐죠 : 한성시보 사장, 언론인 중의원 14번 역임, 내각대신
오카모토 류노스케 : 육군 포병 소령 출신 (조선군사고문)
하기와라 : 외무성 경찰
시부다니 : 통역관
기구치 : 신문기자
무라이 : 육군 대위
사토 : 농민
토오 가쓰아키 : 무인 , 현재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보관된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의 주인
호리구치 구마이치 : (도쿄대 법학과) 외교관 (영사관보)
사세 구마테쓰 : 의사
구니모토 시게아키 : 일본의 한학자
마쓰무라 다시키 : 초등학교 선생
외 총 56 명
1895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하에 일본의 자객들이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의 도움으로 경복궁에 난입해 조선의 왕비 민자영을 살해한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던 왕비에 대한 보복과 조선내각에 대한 친일세력의 주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세계 정치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극악한 사건이었다.
On Oct. 8,1895, Miura,Japanese counselor, invaded the palace and murdered Queen with the help of Wu, bumsun. This was the punishment for Queen who tried to refuse Japan by Russia and this was a atrocity and brutal incident.
(此荒仕事の實行者は訓練隊の外守備兵の後援あり(後援は或は當からざるが如し)尙ほ守備兵の外に日本人二十名若あり熊本人多數を占(漢城新報社迹)中に新聞記者數名又醫師商人もあり 隨て洋?和?相混ぜり 岡서本は大院君と同時入城し實行の任に當れり 守備隊の將校兵卒は四門警衛に止まらず門內に侵入せり 殊に?次馬連は深く內部に 入입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油を注ぎ燒失せる茅 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云う 右は士官も手傳へたるも主として兵士外日本人の所爲に係るものの如し大凡三時間余を費して右の荒仕事を與したる後右日本人は短銃又は劒を手にし徐徐として光化門 (王城正門)を出て群集の中を通り拔けたり 時已に八時過にて王城前の廣小路は人を以て充塞せり)
-한국정부고문 이시즈카 에조의 스에마쓰 법제국장에 보낸 보고서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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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도망치다 구둣발로 짓밟히고…숨붙은 채 불태워진 왕비

‘에조보고서’란 명성황후 시해 사건 현장에 있던 일본인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의 보고서로 을미사변 직후 바로 작성되어 법제국 스에마쓰(末松) 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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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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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전 ‘능욕’당했다”한일월드컵과 107년전 ‘을미사변’

오랜 추적 끝에 ‘에조 보고서’ 전문을 입수한 작가 김진명씨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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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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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英臟) 보고서 – 일본역사

중략…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로 시작되는 에조(英臟)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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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o2ja.co.kr

Date Published: 7/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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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 보고서 ① 보고서를 작성한 에조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 …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 참조할 두 가지 글 · 쓰노다 후사코의 <민비암살>(1988) · 야마베 겐타로의 <일본의 한국 병합>(1966) · 그래서 원문을 볼 필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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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sk.pe.kr

Date Published: 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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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 나무위키:대문

소설가 김진명은 야마베 겐타로의 책을 본 뒤 당시 일본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던 권용석 씨를 통해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던 에조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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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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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시해의 진실’에조 보고서’ 전문을 밝히다. 이토 히로부미와 조선영사 미우라 고로가 지시한 전대미문의 왕비 암살의 전말은 을미의병의 불씨가 되었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에조 보고서

  • Author: 간도유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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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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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보고서 – 을미사변때 명성황후는 강간당했다.

을미사변때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낭인들 중 에조 라는 일본인이 쓴 보고서 형식의 문서이다.

<에조보고서 요약해보면>

일본에서 “에조 보고서”라는, 편지 형식으로 된 정식 보고서가 있는데 에조라는 사람이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해놓았다.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그런데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6명 째에 죽어있었는데도 계속 했다. 시체에 하는게 시간이고 살아있는 거에 하는게 윤간인데 명성황후는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에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후 너덜너덜해진 명성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죽은 후에도..(이건 에조도 함) 그리고 여자로써 가슴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했다. 그것을 길거리 서민들이 다 보고 있는데서 시행했다.

그 다음에 명성황후 시체에 기름 붓고 불로 활활 태웠다.

에조 보고서는 을미사변 직후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 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이다.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를,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때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라 명목상의 직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시즈카 에조는 낭인으로서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하기 이전에는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으며, 에조의 보고서는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이전 상관에게 보내진 셈이었다.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 1905∼1977)인데, 그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여기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일한병합소사》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된 때는 1982년 6월이다. 신학자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이 존재한다. 이 능욕설 대목은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하였다는 근거로 여겨지지만, 그의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책은 1966년 9월 발간한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이다. 친북조선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이 거론한 바 있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고 김진명 씨는 주장한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때는 1988년이다. 앞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번역, 조선일보사 출간)에 잠시 등장한다.

시해당시에 참여했던 일본 낭인들

소설가 김진명이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읽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음을 깨닫고, 그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으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뒤 한국과 일본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라며 물러섰다. 막다른 골목에서 김진명은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에게 보고서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고 귀국한다.

김진명이 한국에서 지내던 어느 날 권용석이 그에게 책 몇 권과 자료를 보내었다. 그중에는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고, 그 책을 읽다가 김진명은 ‘능욕’ 장면 중 일부를 발견하였지만, 에조 보고서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은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를 언급한 그 책의 223쪽 주석에 출전이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라고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김진명은 일본의 권용석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그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 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 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명성황후 능욕설” 및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김진명

[더오래]도망치다 구둣발로 짓밟히고…숨붙은 채 불태워진 왕비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2)

웨베르 보고서

러시아 공사 웨베르 보고서에는 고종의 증언이 담겨 있다. 현장 목격자 중에서 고종은 유일하게 살해범들의 이름을 거명했는데 황후를 살해한 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들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행동대는 20여 명이 더 있었으며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양복과 기모노를 입고 칼과 권총으로 무장한 일본 민간인이었다.

“짐의 눈앞에서 일본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전 조선 군부의 고문 스즈끼, 와타나베가 칼을 빼 들고 궁궐로 쳐들어 왔고 조선 군부대신 고문관을 지낸 오카모토와 스즈끼가 왕비를 잡으러 나갔다”고 진술하다 말고 실신했다고 웨베르는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왕의 처소에 일본군 침입 사실을 알리러 달려간 이학균 연대장이 “왕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은 “왕후는 지금 안전한 장소에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은 일본인들이 왕비를 잡겠다고 나간 뒤에도 고종은 명성황후가 무사한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간 왕비의 처소 곤녕합에서는 이미 참담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세자 이척의 증언은 일본인 흉한들이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고 했고,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 졌고, 살해범은 수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고 했다. 영국인 힐리어의 보고서에는 왕비가 실외에서 변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비가 죽어 있는 것을 실내에서 보았다는 고바야캬와의 기록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그가 실내에 죽어있던 다른 궁녀를 왕비로 착각한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왕비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막자 칼로 두 팔을 베어 버렸다.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 안에 섞여 있어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밖으로 떨어뜨렸다.

보고서에는 한 상궁의 중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인들이 왕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 일본군은 궁녀들을 밀치며 왕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입을 모아 여기에 왕비는 안계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옥호루) 아래로 궁녀들을 집어 던졌다. 이때 왕비가 복도로 도망쳤고, 일본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 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곤녕합 동행각 중간에 녹산(鹿山)으로 나가는 청휘문(淸輝門)이 있다. 일본인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녹산으로 옮기고 석유를 끼얹어 불태웠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 에조가 쓴 ‘에조보고서’에는 녹산에서 시신을 불태울 때 황후의 생명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에조보고서’란 명성황후 시해 사건 현장에 있던 일본인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의 보고서로 을미사변 직후 바로 작성되어 법제국 스에마쓰(末松) 장관에게 전달된 시해사건 기록이다. 1895년 당시 일본국 법제국 소속 참사관으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이었던 에조가 본국 스에마쓰 장관 앞으로 보낸 외교문서로 ‘왕비(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상을 보고’한 서간문이다. 에조는 당시 미우라 공사와는 다른 외교적 라인에 서 있었던 인물이라 이 사건을 아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렵다’는 표현으로 인간으로서 그 참혹한 상황을 지켜본 감정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명성황후가 칼에 베어져 숨진 뒤 그 시신이 불태워진 게 아니라,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태워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왕비의 모습을 바라보며 인간적으로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날이 밝은 후 궁궐을 순시하던 훈련대장 우범선(禹範善)은 녹원에서 타다 남은 유골을 발견하고, 이를 향원정 연못에 던지라고 명령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해 멀리 떨어진 오운각(五雲閣. 지금의 청와대 대통령 관저 부근)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려고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며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에 넣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2년 후인 1897년 11월 22일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청량리(현 숭인원 자리)에 처음 장사 지내졌다. 그리고 고종 승하 후 1919년 3월 4일에 이장해 현재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 고종과 함께 합장됐다. 일본으로 도피했던 우범선은 1903년 12월 본국에서 파견된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에 군 비상대기령을 내렸을 정도로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사건 직후 10월9∼10일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함과 선박 2척이 연이어 황급히 일본으로 떠났다는 자체 첩보에 따라 이 배가 시해범들을 실어 날랐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일본 정부가 시해 사건에 개입한 증거라고 나름으로 결론을 내린 대목도 있다.

사건 직후 각국 공사 앞에서 사바틴의 증언은 영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국에 발송되었다. 1895년 발행된 성 페테르부르그 신문, 루스코의 슬로보 신문, 모스콥스코의 베도 모스티 신문 등은 시해 현장에서 목격한 사바틴의 증언과 ‘워베르보고서’를 인용해 연일 이 사건에 깊은 연민을 표시하고 일제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례 없는 만행’이라고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참극이 벌어졌던 당일 오후 웨베르 공사의 제안으로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들이 새벽에 일어난 비극의 정황을 듣기 위해 일본 공사관에 모였다. 일본 공사 미우라, 서기관 스기무라와 웨베르 러시아공사, 알렌 미국 대리공사, 힐리어 영국공사, 크리인 독일영사, 르페브르 프랑스공사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주한 외교관들은 궁궐에 난입해 왕비와 궁녀를 학살한 전대미문의 폭력사건에 일본의 책임이 있음을 따져 물었으나 미우라는 조선 순검과 군인의 다툼에 일본군이 출동했을 뿐 누구도 죽이거나 한 사실이 없다며 일본 정부의 관련성을 부인하였다.

“명성황후, 시해 전 ‘능욕’당했다”
한일월드컵과 107년전 ‘을미사변’

▲ 비운의 생을 마친 명성황후. 사진은 명성황후라는 주장이 제기된 한 궁중여인이 성장을 한 모습.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월드컵 대회의 서막이 화려하게 올랐다.

침략과 저항, 지배와 피지배의 불행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 21세기를 맞아 처음으로 치러지는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두 나라가 불행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국 정상이 참여한 가운데 월드컵 개막식이 열리던 바로 그날,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이 “핵무기 무장” 발언을 한 것이다. 물론 일본 정부는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면서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지만, 한국인들에겐 지금까지 망언 파문 때마다 일본이 보여온 ‘치고 빠지기’의 전형적 수법으로 비쳐질 뿐이다.

우리는 또다시 터져 나온 이 ‘망언’을 통해 진정한 한일관계의 재정립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물론 그 방법은 있다. 불행한 역사에 대한 철저한 진실 규명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잊을 만 하면 터지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각종 망언, 그때마다 냄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는 한국의 반일감정은 이제 더 이상 ‘미래지향적 이웃사촌’이 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할 때는 선봉에 서다가도 국내에서 친일 잔재 청산 주장만 나오면 침묵을 지키거나 딴지를 거는 기득권 세력과 수구언론에 이 일을 맡겨둘 수도 없는 상황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 이 글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것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막바지에 발생한 이 비극적 사건이 20세기 전반기를 점철한 한일 두 나라의 불행한 인연의 첫 단추였다는 것, 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바로 채우지 않고서는 전향적 한일관계의 정립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물론 지구촌 최대의 경사인 월드컵 기간 동안에 ‘악몽의 역사’를 거론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주간 3호에 이 글이 처음 실렸을 때, 국내 언론사 중에서 관심을 표명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한 작가가 어렵게 찾아낸 명성황후 최후의 진실, 그 단말마적 비명은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한 역사의 회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망각과 방치로 결코 치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유태인들이 왜 시기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치의 범죄 행위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전 세계인에게 상기시키려 했는지, 그들보다 더 참혹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진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일 월드컵이야말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을 언급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본 낭인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가 있었다.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공개된 ‘에조(英臟)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그 동안 역사학계 일부에만 알려져 있던, 명성황후에 대한 일본인들의 ‘능욕(凌辱)’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존재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작가 김진명씨가 이 문서의 전문을 찾아내 기자에게 전달했다. 지금부터 이 문서를 ‘나침반과 지도’ 삼아 107년 전에 발생한 ‘아프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 날의 진실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1. ‘에조 보고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낭인 등으로 구성된 암살단은 경복궁에서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비밀작전 ‘여우사냥’을 수행하고 있었다.

광화문 등을 통해 궁내로 난입한 그들은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전모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작성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9일.

▲ 에조의 보고서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날 작성된 또 한 건의 보고서가 일본 본국으로 날아왔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였다.

그렇다면 이시즈카 에조는 어떤 인물인가. 오랜 추적 끝에 ‘에조 보고서’ 전문을 입수한 작가 김진명씨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에조가 갖고 있던 조선 정부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다. 그가 조선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등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라 낭인들이 명목상 하나씩 그런 직책을 얻어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1988년 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도 자신의 저서에서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발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에조가 스에마쓰에게 별도의 보고서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에조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다는 후사코 여사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에조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전직 상사에게 보고서를 보낸 것이다. 이와 관련, 다시 김진명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에조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실제로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돼 있는 이 보고서에는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제보에서 공개까지 한 달 걸린 이유

본격적 논쟁은 역사학계의 몫

작가 김진명씨 측으로부터 기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약 한 달 전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의 결정적 모티브였던 ‘435호 비밀문서’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침내 진본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만 해도 기자는 그의 제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쇼비니즘을 조장하는 소설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는 도 읽지 않은 상황이었다.

충북 제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기 직전에야 끝마친 ‘뒤늦은 독서’와 그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기초설명을 들은 뒤에야 이 문서, 즉 ‘에조 보고서’의 역사적 무게가 피부에 와 닿았다.

작가가 굳이 기자에게만 이 문서를 전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모든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돌릴 경우 자칫 일회성 기사로, 그것도 역사적 본질은 사라진 채 선정적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둘째, ‘젊은 세대’에게 이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인터넷 매체인 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작가의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곧바로 보도될 수 없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문서의 배경이 된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섣불리(?)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기자의 고집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자는 국사 교과서와 문학작품에서부터 전문서적까지 20여권의 단행본과 자료를 입수해 통독한 뒤에야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둘째,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도 작용했다. 역사의 상흔을 쓸데없이(?) 덧내는 것은 아니냐는 반론의 제기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부끄럽고 고통스런 과거라고 해서 망각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문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물론 관련 학계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문제의 제기’이자 ‘미완의 보도’인 셈이다. 기자가 언젠가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공간을 순례하는 답사기를 쓰려는 이유도,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명성황후의 현재성을 밝히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보고서의 존재는 어떻게 알려졌나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 健太郞, 1905∼1977). 그는 1966년 2월 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후 국내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한편 그는 이보다 앞선 1964년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의 기본 골격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은 16년이 흐른 뒤인 1982년 6월이다. 신학자 고 안병무 선생이 (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을 이 책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이 대목이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그는 이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966년 9월 발간한 이었다. 친북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결국 겐타로는 7개월의 시차를 두고 두 권의 책을 발간한 셈인데, 그나마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언급하고 일부 내용을 소개한 두 번째 책은 국내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에 의해서도 거론된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보고서를 찾아 헤맸던 김진명씨의 설명이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것은 22년이 흐른 뒤였다. 앞에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에 잠시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은 1988년 발간되고 몇 달 후 조선일보사에 의해 번역됐는데(번역자 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능욕설’ 관련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실제 보고서에는 ‘고문’이라고 적혀 있음-기자주)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쓰노다 여사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그 행위’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에조의 심정에 동감한 것일까.

한편 국내에서 명성황후 능욕설이 제기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야마베 겐타로의 첫 번째 책이 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온 후부터로 보인다. 그러나 기자가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된 국내 기록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능욕설의 근거가 된 ‘에조 보고서’ 전문을 직접 찾아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다수가 야마베 겐타로의 소개와 해석에 그대로 의존하고 있었을 뿐이다.

3. 보고서 전문을 어떻게 찾아냈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 헤매던 김진명씨는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을 정독하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온통 헤집었지만 그는 도저히 문제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낼 수 없었다. 마침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며 한 발짝 물러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김진명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씨에게 보고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권씨가 몇 권의 책과 자료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앞에서 기자가 거론한 도 있었다. 김진명씨는 이 책을 읽다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문제의 ‘능욕’ 장면 중 일부가 소개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보고서의 일부가 아니라 전문(全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씨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가 언급돼 있는 이 책의 223쪽을 보자 주석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주석 번호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출전이 밝혀져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

역사학계에서 수없이 거론됐지만 정작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던 ‘에조 보고서’가 역사학자가 아닌 한 작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적인 추적을 거친 끝에 ‘우연히’ 발견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씨는 이 문서를 즉각 찾지는 않았다. 문서를 찾으면 공개해야 하고, 이 문서의 공개가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둔 한일 양국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공개를 늦출 수 없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권용석씨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이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4. 보고서엔 어떤 내용 들어 있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기자는 이 보고서를 김진명씨로부터 입수한 뒤 일본어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겼다. 그러나 주로 고어(古語)와 사어(死語)로 쓰여 있어 도저히 완벽한 번역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보고서에 한자로 표기된 ‘부덕의(不德義)’ ‘경솔천만(輕率千萬)’ ‘직무상 책임(職務上 責任)’ ‘주모자(主謀者)는 미우라 공사(三浦 公使)’ 등의 표현이,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는 김진명씨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기자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겐타로보다 좀더 자세하게 ‘에조 보고서’ 내용을 인용한 서적을 발견하는 의외의 성과를 얻었다. 친일문제전문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일본 서적들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뒤지던 중 찾아낸 (합동출판, 1996)이 바로 그것이다.

재일 사학자 김응룡씨가 쓴 이 책은 ‘에조 보고서’ 전문 중 10분의 1 정도만 인용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나온 어떤 저술보다도 풍부하게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음은 이 책에 서술된, ‘에조 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에조는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 안에서, 왕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왕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 왕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에게 보인 데다, 이 외국인들과 언쟁까지 벌인 일과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체에 대한 능욕”이란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 역시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보고서에 담긴 진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편 김진명씨는 ‘에조 보고서’와 관련해 기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발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 에조 보고서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에조 보고서’에서 능욕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고서에서 실제로 그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주요 한자 표기 그대로 살렸음-기자주).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그는 이 부분을 소리 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뒤 이렇게 주장했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한국에서까지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실제로 시해 장면을 묘사한 ‘에조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들은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왕세자 이척의 증언)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등이 대표적이다.

▲’뮤지컬 명성황후’중에서

다만 그들은 명성황후가 그렇게 칼에 찔려 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진명씨는 이렇게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 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창밖을 응시하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 주권 국가의 왕비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과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한국인들 역시 처참하게 능욕 당하면서 죽어간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줘야 할 책임이 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는 오늘, 우리는 “나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라”는 명성황후의 단말마적 외침을 가슴으로 생생히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김진명 인터뷰 “역사왜곡에 종지부 찍을 문서”

‘에조 보고서’ 전문이 발견됨으로써 에 등장하는 ‘435호 비밀문서’는 실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소설의 작가이자 보고서 전문을 찾아낸 김진명씨를 만나 보았다.

-‘에조 보고서’를 찾아 헤맨 까닭은 무엇인가.

“한국민과 대다수 선량한 일본인의 기대와는 달리,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망언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양국의 역사인식 차이는 좁혀질 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 이유가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자국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인이 직접 쓴 이 보고서를 찾아내 그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이 평행선을 달린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예컨대 한국인들은 군위안부나 징용을 얘기하면 일본인들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군위안부를 말하면, 그들은 전표를 내놓는다. 즉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돈을 벌던 여자들이라는 식의 논리다. 징용을 얘기하면, 그들은 다시 봉급명세서를 내놓는다. 징용자는 돈을 벌러 일본으로 온 노동자라는 것이다. 조선 병합과 수탈에 대해서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려고 했다는 식의 논리를 내놓고, 실제로 이런 것들을 자국의 국민들에게 가르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는 일본인들이 모두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도 역사를 제대로만 알면 반성하고 사과할 줄 안다. 지난번 후쇼샤의 교과서 채택 거부운동에서 보았듯이 역사왜곡에 종지부를 찍을 사람들도 결국은 일본의 선량한 시민들이다. 나는 일본의 정부, 언론, 학계가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그리고 어떤 논리로도 호도할 수 없는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 일본인들이 정말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사료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이 작성해 본국으로 보낸 이 ‘에조 보고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최고의 사료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선 아직도 일제의 침략과 만행이나 친일 잔재 청산을 말하면 ‘과거지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반공과 반북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남북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증오하고 갈등하게 만든 분단과 전쟁의 뿌리는 일제의 침략과 압제였다. 그리고 그 ‘불행의 씨앗’은 107년 전 어느 날 새벽에 발생한 이 나라 ‘국모’의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명성황후의 비극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에조 보고서 ① 보고서를 작성한 에조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낭인 중 한 사람이다? 아니다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 참조할 두 가지 글

쓰노다 후사코의 <민비암살>(1988)

실제로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도 자신의 저서에서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발언이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 쓰노다 후사코 <민비암살> 중

야마베 겐타로의 <일본의 한국 병합>(1966)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法制局)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 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 야마베 겐타로 <일본의 한국 병합> 중

그래서 원문을 볼 필요가 있었던 거다

긴 글을 적다가 시간이 없어서 시리즈로 적는다. 내가 이 글을 시리즈로 적을 정도로 길게 적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해석은 엄밀히 구분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역사 소설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다. 이는 내 블로그에도 비슷한 맥락의 글을 많이 적었었다. 고로, 역사 소설이라 하여 등장 인물이 실제 인물이라 하여 그게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고 궁금하면 찾아보면서(세상 좋아졌잖아?) 확인하는 별도의 과정을 거쳐야할 필요가 있는 거고.나는 역사학자도 서지학자(서지학자란 고서나 고문을 읽고 해석하는 학자를 말한다)도 아니다. 단지 에조 보고서를 알게 되고 난 다음부터 의문이 들었고 궁금해서 확인하는 과정에서 알게된 걸 정리하는 것일 뿐. 나는 서지학자 김종욱씨가 밝혀낸 것을 정리하는 거 밖에 안 된다. 내가 왜 소설가를 지식인 취급하지 않는지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소설가는 그냥 스토리 텔러지 즉 얘기를 재밌게 풀어나가는 사람이지 지식인이 아니다. 재미나게 얘기하는 친구가 똑똑하다거나 지식이 풍부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매한가지다.오마이 뉴스 인터뷰 기사에 보면 소설가 김진명씨는 에조 보고서를 작성한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낭인 중의 한 명으로 얘기를 하고 있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적은 보고서라 신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가 그렇게 생각한 근거를 보면 인터뷰 기사 다음에 잘 나와 있다.그럼 쓰노다 후사코가 쓴 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이에 대해 서지학자 김종욱씨가 이란 책에서 에조 보고서의 글을 한 두 줄 정도로 간략하게 인용하고 출전만 들어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고, 실질적으로 후사코 여사도 을 적을 때, 야마베 겐타로의 에 기록된 내용을 옮긴 것에 불과하지 실제로 에조 보고서를 직접 확인하고서 인용한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야마베 겐타로가 를 낸 1966년에 또 다른 책 하나를 낸다. 이란 책이다.이는 서지학자 김종욱씨가 월간중앙에 쓴 기사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분명 위에서 서지학자 김종욱씨는 쓰노다 후사코씨는 에 기록된 내용을 옮긴 것이라고 했는데, 같은 해에 낸 에도 똑같은 문구가 있다. 에도 이 문구가 있고, 에도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란 책은 야마베 겐타로의 책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라는 거다.

한국정부 고문이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스에마쓰(末松)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사건 진상을 보고한 서간

안녕하십니까? 이 땅(當地)에서 어제 아침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는 벌써 대략 아시겠지요? 왕비 배제(排除) 건은 시기를 보고 결행하자는 것은 모두 품고 있었던 것이지만 만일 잘못하면 바로 외국의 동정을 일으키고 영원히 제국(諸國)에 점(占)할 일본의 지보(地步)를 망실함이 필연한 것이므로 깊이 경거망동하지 말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저는 먼저부터 모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만, 오히려 어렴풋이 그 계획을 조선인에게 전해 들어 조금씩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국외자로서 그 모의에 참여해 심지어 낭인들이 병대(兵隊)의 선봉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경솔천만(輕率千万)으로 거의 장난(兒戱)에 속한다고 사려되는데 다행히 그 가장 꺼림칙한 사항은 외국인은 물론 조선인에게도 서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현 공사에 대해서는 조금 예의가 없는 느낌이나 일단 사실의 대요(大要)를 보고드리는 것이 직무상의 책임일까 생각해 아래와 같이 간단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① 에조(원문 해석에서는 에이조라 되어 있다) 자신은 관여하지 않다고 적혀 있다.

② 서두에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는 표현은 없다.

그렇다면 야마베 겐타로는 왜 그렇게 쓴 것일까? 무슨 근거로? 또한 소설가 김진명씨는 원문을 그렇게 찾아 헤맸다는데 찾고 나서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았던 것일까? 읽어봤는데도 야마베 겐타로의 글을 믿은 이유는 뭘까? 근거가 부족한데 단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실제로는 에조가 가담했는데 처벌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적을 가능성도 있다. 그걸 아예 배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에조가 가담했다는 다른 근거를 대야지. 왜 원문과 야마베 겐타로의 글이 다르잖아. 그런데 상식적으로 원문을 보면 야마베 겐타로의 글에 신뢰가 가냐고. 그렇다고 해서 야마베 겐타로의 다른 모든 글이 신뢰가 안 간다는 게 아니라 이 부분만큼은 원문을 본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서지학자 김종옥씨의 말을 빌리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련된 문헌들이 에조 보고서만 있는 건 아니란다.

어떤 문헌에는 시해사건에 가담한 인원들이 정확히 48명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된 문헌도 있는데 그 어떤 문헌에서도 에조가 시해사건에 가담한 낭인들 중에 한 사람이라는 걸 발견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낭인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고 단정할 순 없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냐는 거다. 별다른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 이 원문을 보면서 야마베 겐타로의 글을 보자. 두 가지를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야마베 겐타로는 왜 그렇게 쓴 것일까? 무슨 근거로? 또한 소설가 김진명씨는 원문을 그렇게 찾아 헤맸다는데 찾고 나서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았던 것일까? 읽어봤는데도 야마베 겐타로의 글을 믿은 이유는 뭘까? 근거가 부족한데 단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실제로는 에조가 가담했는데 처벌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적을 가능성도 있다. 그걸 아예 배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그렇다면 실제로 에조가 가담했다는 다른 근거를 대야지. 왜 원문과 야마베 겐타로의 글이 다르잖아. 그런데 상식적으로 원문을 보면 야마베 겐타로의 글에 신뢰가 가냐고. 그렇다고 해서 야마베 겐타로의 다른 모든 글이 신뢰가 안 간다는 게 아니라 이 부분만큼은 원문을 본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서지학자 김종옥씨의 말을 빌리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련된 문헌들이 에조 보고서만 있는 건 아니란다.어떤 문헌에는 시해사건에 가담한 인원들이 정확히 48명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된 문헌도 있는데 그 어떤 문헌에서도 에조가 시해사건에 가담한 낭인들 중에 한 사람이라는 걸 발견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낭인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고 단정할 순 없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냐는 거다. 별다른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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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원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있긴 하지만, 그건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 원문을 원문 그대로 해석한 걸 보자.(사실 이 해석에 대해서 인터넷 상에 떠도는 글들을 보면 잘못된 부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석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서지학자 김종욱씨가 한 것이다. 원문의 도입부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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