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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르나움(히브리어: כְּפַר נַחוּם, 고대 그리스어: Kαφαρναούμ ‘위안의 마을’) 또는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 언급되는 유대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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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베이루트라는 이름의 생지옥에서 살아가는 자인의 고단한 삶을 조명하고 폭로하는 영화.
예수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가버나움. 하지만 베이루트에 남은 것이라고는 신도 기적도 없는 지옥일뿐.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 부분 수상이 유력해보이는 수작.
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은 폭로에 그치고, 관객들에게는 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았던 작품. 조금 더 나갈 수는 없었을까, 문학적으로 더 아름다워질 수는 없었을까 아쉬운 마음이 드는 작품.
가버나움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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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의 뜻 – 네이버 블로그
가버나움 · 가버나움은 어떤 뜻일까? ·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고 갈릴리 지방의 서북안에 위치 하고 있었다. · 예수님께서는 공생에 초기에 이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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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사전/주석 – 두란노닷컴
‘나훔의 마을’이란 뜻의 이름을 지닌 이곳은 갈릴리 서북안에 위치한 곳이었다(마 4:13-16; 눅 4:31; 요 6:17-24).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이곳을 근거지로 전도를 했다.
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2/28/2021
View: 9856
[성경 지명 원어 강해 설교문] 가버나움 Capernaum – 두란노 서원
가버나움은 כפר(카파르)라는 ‘마을’과 נחום(나훔)이라는 ‘위로’의 합성어로 ‘위로의 마을’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예수는 한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
Source: drn153.tistory.com
Date Published: 10/24/2022
View: 4681
[인 더 바이블] 가버나움(Capernaum) – 국민일보
갈릴리 지방에 있는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안마을입니다. 히브리어로 본디 이 마을 이름은 ‘크파르 나훔’이었다고 합니다. 마을을 뜻하는 …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6/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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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Capernaum) – 성경지명사전 – 한국컴퓨터선교회
가버나움(Capernaum). 가버나움(Holy Land) ·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2-C). 뜻: 위로의 촌 갈릴리에서 서북쪽으로 위치한 성읍이다. (1) 예수의 제2고향(마4:13).
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8/5/2022
View: 5691
영화 ‘가버나움’은 무슨 뜻? 이스라엘의 갈릴리 바닷가에 있던 …
‘가버나움’은 요즘 소리 없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나딘 라바키 감독의 2018년 작품이다. 제71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제72회 영국 아카데미, …
Source: www.kookje.co.kr
Date Published: 10/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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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44 가버나움 의 뜻 All Answers
카파르나움(히브리어: כְּפַר נַחוּם, 고대 그리스어: Kαφαρναούμ ‘위안의 마을’) 또는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 …
Source: 1111.com.vn
Date Published: 9/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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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버나움(Capernaum) – “나훔의 마을” – 다음블로그
30 가버나움(Capernaum) – “나훔의 마을” 가버나움,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 소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불과 3장의 짧은 예언서를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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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가버나움이었을까? – 브런치
산책의 시간 / 인격 014 | ‘가버나움’은 ‘나훔의 마을’, 즉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시점과 장소 …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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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라이너의 컬쳐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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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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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카파르나움에 있는 고대 대 회당 유적
카파르나움(히브리어: כְּפַר נַחוּם, 고대 그리스어: Kαφαρναούμ ‘위안의 마을’) 또는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 언급되는 유대 마을이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의 고장[1], 예수의 집이 있는 곳[2]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의 공생애와 밀접한 곳이었다라고 말한다.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야코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다.[3] 그리고 세관에서 일하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도 이곳에서 예수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4]
성경 [ 편집 ]
신약성경에 의거하면 카파르나움은 어느 곳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기적이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고[5], 죽었던 야이로의 딸 소생시키며[6], 망령들린 자의 치유하고[7], 중풍병자를 치유시켰으며[8], 고관의 아들을 낫게 한 기적[9]등, 이외에도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카파르나움에서 제자들을 불러 가르치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유하며, 악마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기도하는 일상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많은 기적을 보고도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회개하는데 더디어 예수님에게 크게 꾸짖음을 맞기도 했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성 싶으냐?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10]라고 말했다. 이 당시 인구 수는 1,500명이었다.[11]
역사 [ 편집 ]
5세기 초엽에 이미 베드로의 집터에 있던 경당이 갈릴래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경당은 614년 페르시아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 마을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1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였다가 제1차 십자군 이전 어느 시점에서 버려졌다.[12] 그 후 1894년 작은형제회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하여 회당와 베드로의 집터를 확인했다. 사도 베드로의 집터에서는 ‘베드로’라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인 푯말과 어선의 그림을 발견했다고 한다.
현대 [ 편집 ]
“예수님의 마을 카파르나훔”이라는 팻말이 달린 문으로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정원에 선 커다란 베드로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그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베드로의 집터위에 배모양으로 지은 성 베드로 기념성당이 있다.
가버나움의 뜻
가버나움
가버나움은 어떤 뜻일까?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고 갈릴리 지방의 서북안에 위치 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에 초기에 이 가버나움을 근거지로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래서 이 가버나움을 본동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가버나움에는 세관이 있었는데 세관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많은 기적과 치유를 행하셨다.
백부장의 하인과 베드로의 장모와 귀신들린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는 생명의 떡에 관한 가르침을 이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다.
그러나 이곳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안했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해서 책망하셨다.
[성경 지명 원어 강해 설교문] 가버나움 Capern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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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두란노 서원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성경 지명 원어 강해 설교문 중에서 가버나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명연구 : 가버나움 Capernaum
1. 지명과 현재의 위치
1) 지명 : 코페르 나훔이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독한 이름이다.
2) 지명의 의미 : 코페르 나훔은 ‘나훔의 동네’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훔이 구약의 나훔 선지자인지 아닌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3) 현재의 위치 :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그렇지만 텔 훔 지역이 가버나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후 530년 이후부터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현재의 텔 훔 지역은 1.6Km에 걸쳐서 주초들만이 남아있는 폐허이다.
4) 주변 : 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갈릴리 호수로 들어가는 요단강이 있다.
5) 지명에 대한 다른 견해 : 유대교 랍비들은 랍비 탄훔이 장사된 곳이 후에 와전되어 텔 훔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2. 신약 당시의 가버나움
1) 규모 : 가버나움은 신약 당시에 가로 800m, 세로 250m 규모의 동네였다.
2) 위치 : 갈릴리 북서쪽 호수와 접해 있었다.
3) 인구 : 대략 1천5백 명에서 2천 명 정도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거주 시기 : 주전 약 1세기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약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5) 주된 시설 : 국경 지역이었으므로 세관이 있었고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cf) 예수님께 믿음을 칭찬받은 백부장도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6) 도시의 형태 : 성곽이 없는 국경의 작은 소도시(마을)에 불과했다.
3. 가버나움의 변화
1) 거주민들의 변화 :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 가버나움은 유대인들의 집단적 거주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2) 콘스탄티누스 : 그는 회심 이후에 이방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갈 수 없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이 지역이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했음과 더불어 유대인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을 보충적으로 알려준다.
3) 주후 7세기 : 가버나움은 아랍인들이 정복했으나 쇠퇴하지는 않았다.
4) 주후 8세기 : 중엽 때(746년) 강한 지진으로 인해서 큰 피해가 있었고,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5) 주후 11세기 : 완전히 쇠퇴하여 없어진 마을로 변모하였다.
4. 베드로의 집
1) 고대의 기록 : 4세기 말경의 순례자였던 에게리아는 가버나움에 가정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는 베드로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순례자들은 그 집 둘레에 담장이 처져 있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2) 설립 연도 : 기원전 1세기경에 세워진 하나의 건물이 독립적으로 서 있는 것이 발굴되었다.
3) 기록과의 일치 : 그 건물의 주변으로는 가로 27m, 세로 27m의 담장이 처져 있었다
4) 한 방의 발견 : 고대인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방이 발견되었는데, 크기는 가로가 5.8m, 세로가 6.45m로 예수께서 머무르셨던 방으로 알려지고 있다.
5) 장식 : 중앙 건물의 벽면에는 여러 색채의 장식물들과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6) 다른 증거들 : 그 건물에서 나온 몇몇의 석회 반죽들 중 일부에서 아멘, 주, 예수 등의 어귀들이 분명하게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이런 글씨들은 헬라어, 아람어, 시리아어, 라틴어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 건물이 매우 중요한 순례지였음을 보여준다.
7) 교회 건축 : 4세기 때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었고, 5세기 때 팔각형의 교회를 완공했다.
8) 담장의 파괴 : 원래의 담장은 7세기까지 남아있었으나 그 후에 파괴되었다(614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교회 건물과 담장이 파괴되었다).
5. 가버나움의 회당
1) 보존 상태 : 거의 완벽에 가깝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거의 유일한 회당이다.
2) 건축 : 예수 당시의 회당 터에 주후 3세기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3) 특징 : 정통 유대식의 회당의 모습이 아니다.
4) 장식 : 기하학적인 장식들이 많이 있다(이것은 주술과 상관되어 있다).
5) 다른 문헌의 언급 : 랍비 문학에서는 가버나움을 우상 종교들의 소굴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과 가버나움 회당의 모습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6. 고고학적인 발굴
1) 발굴 이전 : 유적지들의 돌들을 취당하여 많은 유적들이 손상당했다.
2) 발굴의 시작 : 1894년이 되면서부터 고고학적 관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이 지역을 더 이상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신부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들에 의해 관리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7. 복음서에서의 가버나움의 중요한 모습들
1) 예수께서 거주하신 도시 : 예수께서 집에 계셨다는 기록이 유일하게 나오는 도시이다(막2:1). 제자들과 함께 며칠 동안 유하셨던 도시이다(요2:12).
2) 병자들을 고치심 : 예수님께선 가버나움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막1:21-28눅4:31-38), 백부장의 하인(마8:5-13), 베드로의 장모(마8:14-17), 중풍병자(막2:1-12), 왕의 신하의 아들(요4:46-54) 등의 병을 고쳐 주셨다.
3) 저주를 받음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가버나움에 대해 저주를 내리셨다.
원어설교 : 가버나움 Capernaum
가버나움 כפר נחום : 카파르 나훔 Καπερναυμ : 카페르나움 Capernaum
마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번창한 도시(마11:23)로 갈릴리 바다, 게네사렛 호수의 서쪽 연안에 위치했습니다(요6:17). 가버나움은 כפר(카파르)라는 ‘마을’과 נחום(나훔)이라는 ‘위로’의 합성어로 ‘위로의 마을’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예수는 한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겼습니다(눅7). 또 예수는 이곳에서 사역을 많이하였습니다(마4:13).
1. 인간은 위로를 받으며 사는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로받고자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깊은 내면에서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위로받을 수 없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위로한다는 것은 쉬울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라헬이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렘31:15)하고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는 말에 아들들의 위로를 거부합니다(창37:35).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으나(욥2:11) 오히려 근심에 쌓이게 만든 것은 인간이 인간을 위로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2.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입니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 위로할 수 없기 때문에 위로부터 누군가가 와야 합니다. 위로부터 온 자만이 이 땅의 사람들, 위로받기조차 거절하는 사람들을 진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오시어(막1:21) 아예 그곳에서 사셨습니다(마4:13).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역사를 행하셨습니다(눅4:23).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참다운 ‘위로의 마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임을 말합니다(마5:4). 우리가 우리의 환경이나 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 아뢰지 않고 묵묵히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임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것을 애통해할 때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만이 위로부터 임하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세상을 위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는 사실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위로의 사도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로하도록 명령하십니다(사40:1). 우리는 위로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마음이 여리고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난 받는 것도 믿음이 연약한 자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또 위로받는 것도 그들의 위로를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로가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역사할 때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고후1: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를 세상 사람들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초청하는 위로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위로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은 바로 남을 이해함으로 위로할 수 있을 때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모든 사람의 위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설교1 : 가버나움 Capernaum
천국 복음의 진원지
막1:21-27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진원지란 지리학적인 개념으로 지진의 발생점을 가리킵니다. 온 땅을 뒤흔드는 대지진도 사실은 지각 밑에 있는 진원지의 조그만 충격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온 세계에 생명의 혁명을 일으킨 기독교의 천국 복음 전파도 같은 원리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복음이 갈릴리 지방에서 비롯되었다고 증언합니다(행10:37). 갈릴리 지방에서도 본문의 가버나움이 바로 복음의 진원지인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처음으로 공생애 사역을 활발하게 시작하신 가버나움과 그 사역이 주는 교훈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방의 중심지입니다
1) 주 예수님의 제2의 고향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신 후 그가 감옥에 갇히자 주님은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공생애 사역의 중심지가 곧 가버나움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나사렛을 떠나…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4:13)라고 증언해 줍니다. 공생애의 많은 부분을 주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보내셨으며, 그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으셨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다메섹과의 지중해 교역 통로로 물자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습니다. 마태 같은 제자가 일하던 큰 세관과 로마군의 부대, 유대인들의 회당 등이 많았습니다. 가버나움은 그 당시 갈릴리 지방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이와 같은 대도시를 주님이 천국 사역의 출발지로 택한 것입니다. 나사렛은 성장하신 고향으로 삼고, 가버나움은 사역의 고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천국 사역의 사명을 지닌 우리 성도들은 나사렛에서 안주할 수만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도피와 은둔의 ‘산속 종교’가 아니라 사회 속에 뛰어들어 그곳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의로 개혁시키는 ‘시장의 종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변방으로 취급되었던 곳임
그러나 가버나움은 당시 유대 내륙 지방 사람들에게 업신 당하고 소외되었던 곳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이방의 갈릴리”(마4:15)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어느 나라나 국경 지대 근처의 변방 지역 사람들은 내륙 지방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잦은 외세의 침략과 교류로 인해 그들의 피와 정서는 내륙지방인들처럼 순수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피와 문화에 뒤섞여 본토 사람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고향 갈릴리 지방이 그처럼 천대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소외되고 무시되었던 갈릴리 가버나움을 복음의 진원지로 삼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는 약한 사람들, 천한 지역을 먼저 당신의 나라로 삼으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는 큰 예입니다(고전1:26-31).
2. 놀라운 새 교훈이 선포된 곳입니다
1)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다름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간 주님께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고 했습니다(22절). 당시 회당에서 강론하던 율법학자나 서기관과는 달리 신선하고 참신한 내용의 가르침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마7:28,29). 당시 서기관들은 그들의 스승들로부터 배운 지식과 유전대로만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를 수호하고자 그들이 만든 인간적인 계율을 강조했고, 백성들을 그 행정적인 멍에 속에 가둬놓는 가르침만을 행했던 것입니다(막7:3-13).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죽어버린 계율이 아니라 진리를 말씀하셨고, 머리가 아닌 따뜻한 마음으로, 권위가 아닌 사랑으로 가르치셨기에 가버나움 백성들의 의식과 영혼에 큰 충격을 준 것입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은 성령에 감화된 인격과 마음으로 전해야만 생명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놀라운 위로와 생명의 말씀임
성경은 당시 율법주의 종교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고후3:6)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진리로 조명되고 해석되지 않은 율법은 인간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정죄합니다. “너는 틀림없는 죄인이니 오직 심판받고 정죄받고 멸망받아야 한다”가 율법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자연히 서기관들과 율법학자와 제사장들이 전하는 하나님은 무섭고, 완고하고, 엄한 심판을 하시는 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이 충만하시며, 용서하고, 자비가 한없으신 하나님을 전하셨습니다.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화해하시고자 그 독생자까지 이 땅에 보내신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교훈은 사람들에게 실로 놀라운 생명과 위로가 되는 복음이었습니다. 이웃에게 비판과 정죄와 의무만을 강조하는 복음 전파와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고 나타내야만 이웃이 변화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3. 천국 권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곳입니다
1) 사단의 권세가 무너지기 시작함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훈은 신유의 표적으로 그 권세가 증명되기 시작했습니다. 회당의 귀신 들린 자를 구해주신 것입니다. 이는 사단의 권세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생명과 의의 권세가 발효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죽음과 죄, 그리고 심판 대신 생명과 의와 희망의 권세가 가버나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참된 회개와 믿음의 열매가 나타남
가버나움의 사역이 시작되자마자 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28절)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불신하고 등졌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참된 신앙을 지니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시작된 천국 복음 운동과 그 권세는 이렇게 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5,16)고 증언합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 비췬 천국 광명의 여명은 이제 온 세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주 예수의 복음 사역이 실행되는 곳은 모두 위로의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 시작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거하는 곳을 복음의 진원지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설교자료
◈ 태풍의 눈
강력한 태풍이 불 때 비교적 안정된 기상 현상이 나타나는 중심 부분. 태풍의 눈은 대개 태풍 중심부의 10여 Km 이내가 된다. 기이하게도 태풍의 눈은 태풍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상대적으로 바람이 약하고 기온이 상승하며 상대 습도의 저하 등의 특징을 보이고 하늘은 맑고 푸를 때도 있다.
◈ 인종 차별
① 인종이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간 차별, 분리, 격리 등의 정책이 생기는 사회·정치적 문제를 의미한다.
② 식민지 종주국과 식민지 간에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의 유색 차별, 미국의 흑인 문제가 대표적이다.
③ 냉전이 끝난 이후 인종간 정치적·경제적 대립관계,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 하나님 지식의 성격
하나님 지식의 성격이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지식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①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② 하나님은 자신을 아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언제나 알고 계신다
③ 하나님의 지식은 영원하다
④ 선험적이다. 직관과 추리에 의해 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직관적인 전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
◈ 약함에 대한 자각
약하다고 한탄하며 남의 도움만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기의 약함을 깨닫는 것은 남의 도움을 바라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굳센 힘을 얻어 서기 위함이다. 약하다는 자각은 신앙의 확립으로 끝나야 한다. 쓸데없이 비명을 질러서 세상의 동정이나 도움을 애걸하는 일은 크리스찬의 도리가 아니다.(내촌감삼)
◈ 로마제국의 붕괴
2세기 말부터 로마는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치와 향락에 빠졌으며, 주변 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군대가 황제를 폐립 시키는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제국은 쇠퇴기에 들어섰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정치의 혁신과 황제권 강화를 통해 로마의 중흥을 꾀했으나 그가 죽은 후 거듭된 혼란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게 망하였다.
◈ 구약에서의 회개
① 의미 : 구약에서 회개란 악에서부터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은 성품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대하 36:13).
② 주체 : 회개의 주체는 개인도 되고 민족도 된다.
③ 대리인 : 이 같은 주체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대리인으로 사용한다.
④ 결과 : 거부하는 자는 징벌, 포로, 파멸, 죽임을 당하고 회개하는 자는 용서와 생명을 얻는다.
설교2 : 가버나움 Capernaum
천국 시민으로 인정받는 신앙
마8:5-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그것에 합당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유효합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을지라도 합당한 신앙으로 응답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본문은 주 예수님이 제2의 고향인 가버나움에서 많은 은혜를 베푸신 일 중 한 예입니다. 주님은 이방인 백부장의 신앙을 칭찬하시면서 정작 유대인들은 천국 주변의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풍성한 은혜에 신앙으로 응답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백부장처럼 천국의 시민으로 주님께 인정받는 신앙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과연 그 신앙의 요건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국의 왕을 경외해야 합니다
1) 그 권세를 인정함
주님께 나온 백부장은 지금 우리나라 군편제로 비교하면 대대장급을 의미합니다. 군인 백 명의 수장입니다. 당시 가버나움에는 비상시에 로마 군대가 주둔해 있었으며 또 갈릴리 지방을 통치하는 헤롯 안디바의 군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백부장은 로마나 시리아 같은 이방인이 분명합니다. 이 이방인 군대 장교가 예수님을 ‘주님'(6절)으로 높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주 예수의 신적 권세와 권능을 온전히 알고 인정하고 믿는 신앙을 지닌 것입니다.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은 주님을 큰 선지자 정도로 여겼습니다. 결코 사람 이상의 존재로는 인정치 않은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들이 기대하고 인정한 점은,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켰던 것처럼 자기들을 로마의 식민 지배하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해방자로 이해할 뿐이었습니다. 3년 이상 함께 동거하고 교육받은 베드로가 훗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겨우 고백한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천국의 시민이 되고자 원하는 사람은 그 천국 주인의 실체를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주 예수님의 권세와 권능을 온전히 알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2) 그 사랑과 자비하심을 확신함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적대시하고 박대하는 풍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께 나아와 자비를 간구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굳게 확신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그분이 전지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주 예수님과 같이 자비와 사랑으로 나와 이 세상을 대하시는 분임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참된 신앙을 소유한 것이요,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주민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2. 천국 시민다운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1) 늘 겸손해야 함
백부장은 지휘만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하들을 거느린 지휘관입니다. 그가 로마인이었다면 유대인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을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직접 주님께 나와 간구하였으며, 가서 고쳐주리라는 주님의 수고에 황송하여 그저 말씀만 해주시기만을 청했습니다. 이는 세속적인 권위 의식이나 교만한 풍조에 물들지 않고 늘 자신을 겸손으로 훈련해 왔다는 증표입니다. 겸손은 참 신앙의 척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고 그분이 다스리는 이 세계를 인정하는 성도는 결코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과 그 영광만을 높이려는 의식과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세가 곧 천국 시민의 기본자세입니다. 자만하고 교만한 의식을 지닌 사람은 결코 천국 시민으로 생활할 수도 또 인정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사는 생활은 오직 성령과 말씀 안에서 겸손해진 성도만이 능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온유함으로 행해야 함
백부장은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13절)라는 주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그가 온유한 믿음을 지닌 증표입니다. 온유함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온유함을 단순히 도덕적 차원으로 인식합니다. 그 천성과 몸가짐이 온순하고 유순한 것을 온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는 그 이상의 개념입니다. 온유는 훈련을 통해서 단련된 신앙 인격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불의와 부당함에 대해 온유하게 대함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 순종하고 따르는 자세가 곧 성서적 온유함의 개념입니다. 한 예로 욥이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 것이 온유입니다. 축복을 주실 때만, 이해할 수 있는 섭리에만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섭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에도 순응, 순종하는 신앙이 곧 온유함의 요건을 지닌 참 신앙인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을 원했으며 그래야만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인정하겠다고 우겼습니다(마12:39). 그와 같은 태도는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고 행하는 자세가 온유함이요,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에 온유하게 순종하는 성도만이 천국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마5:5).
3. 천국의 가치관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백부장이 주님께 원했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한 행복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한낱 미천한 하인을 그 병에서 구해 주고자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당시 하인은 종과 노예의 신분을 지녔습니다. 물건처럼 돈으로 사고팔고 병들면 버리는 소모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백부장은 그 하인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성경 원문에는 백부장이 하인을 ‘파이스’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는 ‘아들’이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그는 하인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곧 천국의 표어요, 중심 가치관입니다. 이 사랑의 가치관을 따르는 사람이 참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사랑은 신앙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있는 사람만이 천국의 주민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설교자료
◈ 시민권을 따기 위한 4가지 길
① 정부 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② 그 나라의 환경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
③ 정부 기관의 법과 관례에 승복해야만 한다.
④ 그 나라의 문화적 배경을 잘 이해하며 답습해야 한다(미국대사 연설중에서).
◈ 백부장 시대의 사회 계층
귀족 사회와 하층 계급으로 구분됨.
1. 귀족사회
① 제사장 :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장, 성전 감독, 재정 담당 제사장 등
② 장로 : 지방 통치자들
③ 서기관, 랍비(선생) : 보수 없는 명예직, 산헤드린 공회원
④ 부와 권력을 쥔 자들
2. 하층사회
① 일반 서민 : 유대인의 대부분
② 사마리아인 : 이방인과 혼혈의 혈통
③ 노예 : 가내 노예
④ 이방인(개종자) : 이방인으로서 할례와 세례를 받은 이방인
◈ 천국에서 큰 자
성도 개개인과 하나님의 관계, 천국 백성들과의 관계, 이 두 관계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큰 자가 되려면 성경에서 말하듯 겸손해야 한다.
상호 간의 겸손과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겸손을 갖고자 하는 사람은 조리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의 자리까지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극진하신 사랑을 체험하여야 한다.
이러한 자만이 형제를 섬기는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 속에 참된 도리의 겸손함을 겸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
성도들 앞에는 장애물이 많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남을 용서하는 선행을 한다고 해서, 굶어 죽어가는 자를 구제한다고 해서, 세상의 유혹을 뿌리 친다고 해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해서 얻어지는 지위가 결코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의 소망을 잃지 않는 용기 있는 믿음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 성장
성장한다는 것은 재림이나 천년설의 성경적 지식을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영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성장은 생활이 변화해 가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온유함은 최대의 덕성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가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의 힘을 통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이다.
칼빈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함으로 세상을 정복하신 구원자이시다.
설교3 : 가버나움 Capernaum
죽음에 관한 상반된 시각
막5:35-43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여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우리 기독교의 시각으로 볼 때 인류 불행의 원인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성경의 말씀대로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행의 사신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극복 문제는 종교와 철학의 공통적인 대명제입니다. 본문 가버나움 회당장의 어린 딸의 죽음과 그 딸을 죽음에서 소생시킨 주 예수의 행적 속에서 죽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각과 생명에 대한 주님의 시각을 대비시켜 줍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진실성과 그 귀중 성을 다시금 인식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절망과 희망을 보여줍니다
1) 절망하는 사람들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절). 이 말은 회당장의 이웃이 소녀가 죽은 소식을 전한 내용입니다. 그 말속에는 죽음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괴롭게 한다는 말은 ‘스큘레인’이라는 말로서 “말도 안 되게 혹사시킨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을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청하는 일은 어불 성설, 억지를 부려 예수님을 괴롭히는 일이니 그만두라는 뜻입니다. “죽으면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라는 절망적 인식이 사람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망감은 주 예수께 간구하고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결국 절망은 불신의 씨앗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도 했습니다. 죽음, 죄, 삶에 대한 절망은 우리 신앙의 적입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특색이요, 생명임을 기억합시다.
2) 끝없는 희망을 주시는 주님
이에 반해 우리 주님은 어떻습니까? 그 죽음의 소식을 듣고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36절)고 하셨습니다.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극복할 능력이 없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우리에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는 있으므로 구주 예수를 믿으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도 믿으라는 교훈입니다(롬4:18).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의인으로 인정받고 천국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며, 어떻게 죽은 후에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전능하신 권능과 그 사랑의 언약을 굳게 믿음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2. 체념과 권능을 보여줍니다
1) 체념하는 사람들
주님이 회당장의 집에 가시니 이미 장례 절차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곡하며 피리 불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풍습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나라가 동일합니다. 세계는 ‘죽음의 문화와 절차’에 아주 익숙합니다. 전문적으로 곡해 주거나 다양한 절차로 장례를 치름으로써 죽은 자의 가족들을 잠시나마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려낼 수는 없으니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장례식을 통해 위로받으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죽음에 관해 ‘체념’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지혜는 결국 죽음 문제에 대해 ‘체념’을 그 해답으로 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절대적 숙명이니 그저 체념하고 살아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습니다. 죽음은 필연적이니 살아있을 때 실컷 즐기라는 사상도 있습니다(고전15:32). 이 모든 사상의 밑바탕에는 죽음에 관한 체념 의식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2) 권능으로 죽음을 물리치신 주님
주님은 야이로의 딸을 보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절)고 하신 후 그 당장 ‘달리다굼’ 즉 일어나라고 명하사 죽음에서 소생시키시는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가버나움 회당장 딸을 부활시켜 주신 이적을 필두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부활의 이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은 즉시 살려내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 후 묘지로 가던 중 살려내셨으며, 야이로는 무덤에 묻힌 지 사흘이 지났을 때 살려내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의 권능,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는 권능을 가지신 창조주이심을 반증하는 예입니다. 어쩌다가 우연하게 살려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권세가 주 예수께 분명히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증거는 주 예수 자신도 삼일 만에 부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 안에 있는 그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까지 다시 살리실 것을 믿게 합니다.
3. 경악과 경계를 보여줍니다
1) 부활에 경악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기는”(42절), 가버나움 지방부터 시작된 주님의 천국 복음 사역은 세상 사람들에게 ‘놀람과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막 1:23-28). 주님의 가르침, 행사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기적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은 그저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는 일, 영생을 얻는 일, 기도의 응답받는 일 모두가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2) 맹신을 경계하시는 주님
그 기적적인 상황을 본 사람들에게 주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이 부활 사건을 은밀하게 처리하라고 경계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적이 일어나면 그 이적의 주인 되신 하나님보다 이적 그 자체를 우상화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소녀의 부활 사건도 그 소녀를 부활시킨 주님보다 그 부활 이적 자체, 아니 더 나아가 부활된 소녀를 신성시하는 맹신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보고 신비감에 젖어 있지만 말고 현실적으로 그 소녀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부활했어도 음식을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간접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처럼 이상과 현실 감각이 조화된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가버나움 회당장 딸을 사망 권세에서 건지신 이 사건은 이제 이 땅에 주님의 생명 권세가 왕 노릇 할 것이라는 신호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료
◈ 절망의 늪에서 탈출하라
① 당신 위에 : 주의 지키심이(신4:39)
② 당신 밑에 : 주의 받쳐 주심이(신33:27)
③ 당신 뒤에 : 주의 상급이(사52:12)
④ 당신 오른편에 : 주의 보호하심이(시16:8)
⑤ 당신 앞에 : 주의 인도하심이(사45:2)
⑥ 당신 주위에 : 주의 방패가(시125:2)
⑦ 당신 안에 : 주의 임재 하심이(겔36:27)
◈ 생명의 길이
① 노아 이전의 생명 길이는 평균 846년(창5장)
② 노아 이후의 생명 길이는 평균 393년(창11장)
③모세 당시의 생명의 길이는 칠십 내지 팔십년
◈ 회당장
회당의 우두머리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을 유지, 운영, 보존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예배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토라(율법)의 낭독과 설교 등을 할당해 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 인생은 이렇다
① 인생은 여행이다(창47:9).
② 인생은 꿈과 같다(시73:20).
③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전6:12).
④ 인생은 안개와 같다(약4:14).
⑤ 인생은 하나의 이야기와 같다(시90:9).
⑥생명은 땅에 쏟아진 물과 같다(삼하14:4).
⑦인생은 꽃과 같다(요14:1,2).
◈ 생명의 삶
죽음을 뛰어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바라보게 하신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서 부정적 요소를 버려야 한다.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바로 참 용기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지속적인 신뢰를 갖는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 있는 삶의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
◈ 영원한 축복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릴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사25:8고전15:45-55)은 반드시 약속과 성취, 그것으로 인해 성도가 항상 영원한 행복, 즉 부활의 목표를 염두해 두어야 함을 말해 준다. 이 행복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표현하더라도 그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 죄란 이렇다
① 성스런 법을 어기는 것 : 위법(요일3:4)
② 고약한 질병 : 인류를 파괴시키는 것(사1:4)
③ 두꺼운 구름 :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우는 것(사59:2)
④ 평온을 깨뜨리는 것 : 무질서, 근심(시38:3)
⑤ 축복의 강탈자 : 영혼을 갈하게 하고 죽이는 자(렘5:25)
⑥ 끔찍한 재앙(미6:13)
⑦ 넘어뜨리는 자(잠13:6)
⑧ 무겁게 해서 떨어뜨리는 자(사30:1)
◈ 인간의 무지
① 세상이 주님의 위험을 알지 못한다(마24:39).
② 교회가 주님의 필요를 알지 못한다(계3:17).
③ 교인이 그 주인인 주님을 알지 못한다(요14:9).
④ 죄인이 그 구주를 알지 못한다(롬11:25).
설교4 : 가버나움 Capernaum
가버나움의 한 시민으로
마17:24-27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
이스라엘 속담에 “풍년을 바라되 쟁기질은 멈추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크고 높은 이상과 꿈을 그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은 현실 속의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천국 시민의 지위를 인정받은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사회인으로서도 그 의무를 경시할 수 없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시민으로 그 의무를 다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성실하고 모범된 사회인의 의무와 역할을 다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사회가 성도를 오해치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1) 성도의 특권과 자유를 유보함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 마지막으로 가버나움에 들르셨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방의 중심 도시로서 헤롯 안디바의 관정이 있었던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갈릴리 전도 사역과 공생애 사역의 중심지로 삼은 도시입니다. 그때 반세겔의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찾아왔습니다. 학자들 견해에 따르면, 이 세금은 로마나 또는 헤롯이 거두는 ‘주민세’로 보는 이들도 있고, 유대인이라면 성인 누구나 내는 ‘성전세'(출30:13)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만일 그 세금이 성전세라면 성전의 주인 되신 주님과 그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은 내지 않을 특권이 있었습니다(26절). 일반적으로 통치자의 직계들은 세금을 면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세금이 로마 제국이나 헤롯이 걷는 것이었다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도들은 내지 않을 자유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세금을 내셨습니다. 사회가 기독교인들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 때문이셨습니다(27절). 우리가 성도 된 특권과 자유만을 이 사회 속에서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산다면 사회는 성도들을 반사회적 존재나 광신 집단으로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온전한 특권과 자유는 완성된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잠시 유보하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겸손하게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고전9:19-22).
2)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함
사회가 오해치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가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행동은 곧 사회의 표준이 됩니다. 사회가 교회의 행동을 그 윤리 규범으로 삼는 예가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경솔하게 반국가적 행동, 반사회적 운동을 한다면, 사회는 교회의 행동을 오해하여 더 큰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선한 일의 본을 보여”(딛2:7) 사회의 화평과 의를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납세 의무를 준수해야 합니다
1) 국세와 공세를 냄
주님은 ‘관세와 정세'(25절)를 열거하셨습니다. 관세는 화물이나 상품에 부과되는 간접세요, 정세는 주민세와 같은 직접 세금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세금을 납부해 오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가 세금 징수원에게 두말없이 세금을 내신다고 한 사실이 그 증표입니다(25절). 성도들에게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는 국세를 바치라고 명합니다.(롬13:7) 하나님의 백성과 그 자녀라도 국가와 사회의 법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국가의 권력이나 법도 “하나님의 정하신 바”(롬13:1)라고 증언합니다. 국가의 권세와 법으로 교회를 보호하시고 연단하사 그 구속 섭리를 펴시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국가가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지 않는 한 국가는 교회의 큰 보호자인 것입니다. 국가가 흔들리면 교회도 그 안정을 잃습니다(딤전2:1,2). 세금은 국가 유지의 중요한 요소이기에 성도들이 그 의무를 다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섭리를 협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교회의 봉헌 의무도 행해야 함
학자들 대부분은 주님이 내신 반세겔의 세금이 성전세라고 해석합니다. 이 세금은 당시 성전의 유지와 보수, 그리고 제사 비용과 성직자들의 생활비로 쓰였으며, 이는 구약의 율법에 의거한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고 율법이 폐하여졌을지라도 주님이 성전세를 내셨다는 사실은, 성도들이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모든 봉헌을 해야 함을 교훈하시는 예입니다. 어떤 이들은 신약에서는 십일조나 헌금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기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폐기된 것이 아니라 갱신되고 완성된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법으로 완성된 것이고 변혁된 것입니다. 결코 폐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 안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봉헌의 의무를 행해야 합당합니다. 자발적으로 감사하여 때로는 전재산도, 십의 십조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전도 사역비로 헌금을 받으셨으며 재정 부장으로 도마까지 세웠음을 기억합시다(요12:3-6).
3. 물질 소득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1) 성실하게 노동함
결국 세금과 봉헌할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온 물고기 입에 든 금화 한 닢을 세금으로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내용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베드로가 노동한 결과였습니다. 낚시는 원래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한 수단이요, 노동입니다. 비록 아가미에서 금화를 얻었을지라도 낚시라는 노동 끝에 얻은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심
성실하게 노동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기적과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성경은 노동도 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을 꾸짖습니다(살후3:10-12엡4:28). 유명한 부흥사 무디가 배를 타고 부흥회 장소로 가는 도중 그 배에 큰 불이 났습니다. 무디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물을 퍼 날랐습니다. 그때 한 성도가 “아니 목사님이 기도를 하실 것이지 이게 무슨 꼴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무디는 “내가 지금 불끄는 이 수고가 현재는 큰 기도 사역입니다”라고 했답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수고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설교자료
◈ 국민의 의무
국민이 국가에 대해져야 할 국민으로서의 의무. 헌법은 기본권과 함께 기본적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국민의 4대 의무는 다음과 같다.
① 국방의 의무 : 우리나라는 개병주의에 의한 징집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② 납세의 의무 : 조세의 종목과 세율은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에 따른다.
③ 근로의무 : 노동을 통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
④ 교육의 의무
◈ 성도의 의무
1.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의무
① 성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②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책임 인식을 의무로 삼아야 한다.
③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의 규례로 인정해야만 한다.
2.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성도의 의무
① 성도는 국가에 대한 지원에 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② 성도는 모든 동료 시민들에게 우호적인 마음을 지녀야 한다.
③ 법적인 권위의 행사에 기꺼이 복종해야 한다.
◈ 세금
국가나 지방 공공단체가 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국민으로부터 세법에 따라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돈을 세금이라고 한다. 세금은 징수하는 주체를 대상으로 해 국세와 지방세로 분류되며, 부담하는 방법에 따라 직접세(납세자와 담세자가 동일한 세금)와 간접세(납세자와 담세자가 다른 세금)로 분류된다. 우리나라는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자산 재평가세, 부당이득세 등은 직접세이고 부가 가치세, 특별 소비세, 주세 등은 간접세이다.
◈ 사회 윤리의 문제들
사회 윤리란 지성과 의지를 갖춘 개인들 또는 집단들 상호 간의 관계를 고려해 무엇이 좋고 나쁜 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다. 사회 윤리의 문제는 특성상,
① 사회적 요구와 개인적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화하는가
② 개인의 생각 및 행동과 집단의 행동 사고와 얼마나 같은가
③ 집단들 간의 관계 성격에 대한 문제(예 교회-사회)와 같은 것 등이 있다.
◈ 정교 협약
특정한 국가 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부 간에 종교적 문제에 관한 협약이나 법적인 조약을 의미한다. 이는 교회가 외교적으로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교회가 특권을 빼앗길 때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체결됐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정교 협약은 180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교회 간 맺은 협약이었다.
◈ 모랄 서베이 (morale sur- vey, 노동 의욕 조사)
사기 조사 또는 근로 의욕 조사를 의미한다. 종업원이 기업에 대해 어떤 심리적인 연대감을 갖고 있는가를 조사하는 것이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노동조건, 이해관계, 대우 등에 대해 불만이나 희망을 청취, 기업이 노무 관리에 참고하여 사기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설교5 : 가버나움 Capernaum
가버나움을 버리시는 이유
마11:17-24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무조건 자녀들로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형식적이더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의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안일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이 갈릴리 선교 본부로 삼으신 가버나움을 중하게 질타하시고 그 주민들이 후에 지옥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선고하십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형식적이며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에게 큰 경종이 됩니다. 과연 가버나움은 어떤 이유로 주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우리 신앙의 본질을 다시금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법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1) 율법을 불순종함
주님은 17-19절에서 가버나움을 포함한 갈릴리 주민들의 완악함을 비유로 질책하십니다. 피리를 불어도 곡하지 않고 애곡을 해도 응하지 않는 악동들처럼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리의 사자들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을 무시한 처사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 것을 명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대신 자신들이 만든 규례를 따르고 요한을 비웃고 끝내는 감옥에 가둬 그 생명까지 빼앗는 악행을 범하였습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선민이라는 조건이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될 수 없습니다. 중심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지녀야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복음도 불신함
그들이 주님께 버림받은 결정적인 요인은 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에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과 관용의 진리를 가르치고 실행하신 주님을 천한 자라고 무시한 것입니다(19절). 율법을 전하는 세례 요한은 이상주의자로(18절), 사랑을 전하는 주님은 천박한 자로 매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복음 진리의 예표인 율법도 불순종하고 완성된 율법인 주님과 그 복음 진리도 불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들과 그 세계는 분명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이 사실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배경과 환경 속에 거하는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이 없다면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주님께 외면당하게 된다는 진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 최선의 은총에 응답하지 않음
주님은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셨다면 그 소돔성이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3절). 소돔성에는 어떤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 때문에 잠시 관계를 맺었던 예만 있었을 뿐입니다(창14:21-24). 그런데 가버나움에서는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직접 거하시고 큰 이적을 풍성하게 행하셨으며 복음을 손수 전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곳입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직접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이 가버나움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은혜를 소돔성에 베푸셨다면 그들은 주님을 섬기는 길로 갔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큰 은혜를 많이 받고, 신비스러운 체험을 많이 한 것이 신앙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남보다 영적인 체험은 적을지라도 그 깨달은 은혜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려는 자세가 귀중한 신앙의 본질적 요소인 것입니다.
2) 은혜를 욕되게 만듦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치 않는 사람들은 한발 더 나아가 그 은혜를 욕된 것으로 만드는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 가버나움을 비롯해 갈릴리 사람들 중에는 주님이 베푸신 이적 권능을 ‘귀신의 장난’으로 매도한 사람도 있습니다. 바알세불의 힘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마9:34마12:24). 하나님 성령의 은혜와 권능을 전적으로 모독하는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성경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히10:29)고 경고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여기거나 욕된 것으로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타락한 자들 중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 시간을 아까워하고 그 때문에 물질과 시간을 낭비했다고 원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허망하고 불익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자들, 더 나아가 그 은혜를 ‘못된 운명의 신의 장난’으로 여기는 자들은 분명 주님께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3. 하나님의 소원과는 다른 방향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1) 외적인 표적만 요구함
주님께서 큰 이적과 권능을 베푸신 궁극적인 목적은 ‘회개와 믿음’의 열매를 얻으시려는 것입니다(마4:17눅15:7).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깨닫고 자신들의 불신앙과 불의한 죄를 회개하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기를 주님은 원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버나움 사람들은 더 큰 하늘의 표적만을 원했습니다(마12:38,39). 회개를 원하는 주님의 소원은 외면하고 신비한 표적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어리석음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가버나움식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표적과 기사에만 집착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은 경시하는 자들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많이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회개와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주님의 소원에 부응하는 참 신앙인으로 인정받습니다.
2) 스스로 교만해짐
주님은 가버나움 사람들이 하늘까지 높아질 줄 착각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23절). 주 예수가 자신들의 세계에 거하고 큰 기적과 권능을 다른 고을보다 많이 베푸셨으니 자신들은 다른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높은 하늘의 영광을 차지할 것으로 여기고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는 것입니다. 믿음도 회개도 거룩함의 열매도 무시하고 주 예수님과 형식적인 관계만을 믿고 교만해진 사람들, 그리고 그와 같은 가버나움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훗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광 대신 수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료
◈ 순종
순종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에 있어서 그 백성이 지켜야 할 조건이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 그것은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다. 이러한 순종은 마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며,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기스본)
◈ 소돔(Sodom)
창세기에 언급된 ‘골짜기의 도시들’ 중의 하나. 소돔은 대단히 악한 도시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창18:20-33). 그리하여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에 갔던 두 천사가 롯의 가족만을 이끌고 나오자마자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이 비같이 쏟아져 소돔과 고모라를 덮어버렸으며(창19:24-25), 그 도시들의 위치가 오늘날 물에 잠긴 사해 남부의 지역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소돔과 그 일대는 불과 유황 비를 맞고 멸망당한 후에 그 지역은 사해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그 골짜기 도시가 멸망된 상황은 고대의 기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있다. 오늘날의 고고학적 조사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데, 그 골짜기의 소돔과 다른 도시들의 멸망은 스며 나온 석유와 그에 동반된 가스에 불이 붙어 생긴 대화재에 의해 생겼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대화재는 “하늘 곧 여호와께로서”(창19:24)라는 구절에서 연상될 수 있는 번갯불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이다.
◈ 바알세불(Beelzebul)
예수와 그의 적대자들 모두가 ‘악마들의 두목’, 즉 사탄에게 부여했던 명칭(마10:25마12:24,27막3:22눅11:15,18-19). 불가타역은 Beelzebub으로 음역함으로써 왕하 1:2에 언급된 블레셋의 우상 바알세불과 동일시하고 있지만 그 둘의 연관성은 분명치 않다. 바알세불은 블레셋 에그론 성읍의 신으로 히브리어 ‘제붑’은 ‘파리’를 의미하며, 따라서 그 이름은 70인역과 요세푸스에 의해 ‘파리들의 바알’이라고 번역되는데, 이러한 명칭은 바알세불이 전염병을 유발하는 신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불가타의 형태인 바알세불은 후대 문헌에서 악한 자를 가리키는 흔한 명칭이 되었으며, 이 명칭이 밀턴의 「실락원」에도 등장한다.
◈ 교만한 자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지극히 미워하신다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탄이 결국 천사장의 위치에서 탈선한 것도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 때문이었으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도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 교만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모든 인간이 자기처럼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획책한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긍함(대하25:19), 마음을 완고히 함(단5:20), 견책받는 것을 싫어함(잠15:12), 다툼을 일으킴(잠13:10), 남을 해하려고 올무와 함정을 놓음(시140:5) 등 온갖 악한 것이 다 포함된다. 결국 이처럼 교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게 된다(잠15:25시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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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바이블] 가버나움(Capernaum)
갈릴리 지방에 있는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안마을입니다. 히브리어로 본디 이 마을 이름은 ‘크파르 나훔’이었다고 합니다. 마을을 뜻하는 ‘카파르’와 남자 이름 ‘나훔’이 합쳐져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서에 이 마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선지자 나훔을 이르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크파르 나훔’은 신약에서 그리스어로 ‘카파르나움’ 또는 ‘카페르나움’으로, 그리고 영어로 번역될 때도 그대로 음차했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지명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직접 전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그 당시에 인구가 1500명이나 되는 번듯한 고장이었고 오늘날 회당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을 떠나 32㎞쯤 떨어진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고, 아픈 사람들을 안식일에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이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 빵을 달라고 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 6:35, 새번역)
가버나움에서 함께 지낸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가르침을 어려워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려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예수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임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박여라 영문에디터 [email protected]
Top 44 가버나움 의 뜻 All Answers
가버나움 (2018) 영화 해석 (스포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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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르나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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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편집]
역사[편집]
현대[편집]
각주[편집] 카파르나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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¼º°æ/»çÀü/ÁÖ¼® – µÎ¶õ³ë´åÄ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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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Î ´õ ¹ÙÀ̺í] °¡¹ö³ª¿ò(Capernaum) – ±¹¹ÎÀϺ¸Article author: 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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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지명 원어 강해 설교문] 가버나움 CapernaumArticle author: drn15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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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지명 원어 강해 설교문] 가버나움 CapernaumArticle author: k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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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성경 지명 원어 강해 설교문] 가버나움 Capernaum 가버나움(Capernaum). 가버나움(Holy Land) ·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2-C). 뜻: 위로의 촌 갈릴리에서 서북쪽으로 위치한 성읍이다. (1) 예수의 제2고향(마4:13). 안녕하세요. 오늘도 두란노 서원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성경 지명 원어 강해 설교문 중에서 가버나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명연구 : 가버나움 Capernaum 1. 지명과 현재의 위치 1) 지명 : 코..두란노 서원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필요한 설교와 성경 자료를 공유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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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버나움(Capernaum) – “나훔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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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버나움(Capernaum) – “나훔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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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 제목 뜻 알아보니 영화와 잘 어울리네 – 스포츠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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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가버나움’ 제목 뜻 알아보니 영화와 잘 어울리네 – 스포츠니어스 ‘가버나움’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으로 ‘예수로부터 멸망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곳이다. 생지옥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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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 제목 뜻 알아보니 영화와 잘 어울리네 – 스포츠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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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르나움에 있는 고대 대 회당 유적 카파르나움(히브리어: כְּפַר נַחוּם, 고대 그리스어: Kαφαρναούμ ‘위안의 마을’) 또는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 언급되는 유대 마을이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의 고장[1], 예수의 집이 있는 곳[2]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의 공생애와 밀접한 곳이었다라고 말한다.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야코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다.[3] 그리고 세관에서 일하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도 이곳에서 예수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4] 성경 [ 편집 ] 신약성경에 의거하면 카파르나움은 어느 곳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기적이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고[5], 죽었던 야이로의 딸 소생시키며[6], 망령들린 자의 치유하고[7], 중풍병자를 치유시켰으며[8], 고관의 아들을 낫게 한 기적[9]등, 이외에도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카파르나움에서 제자들을 불러 가르치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유하며, 악마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기도하는 일상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많은 기적을 보고도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회개하는데 더디어 예수님에게 크게 꾸짖음을 맞기도 했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성 싶으냐?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10]라고 말했다. 이 당시 인구 수는 1,500명이었다.[11] 역사 [ 편집 ] 5세기 초엽에 이미 베드로의 집터에 있던 경당이 갈릴래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경당은 614년 페르시아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 마을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1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였다가 제1차 십자군 이전 어느 시점에서 버려졌다.[12] 그 후 1894년 작은형제회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하여 회당와 베드로의 집터를 확인했다. 사도 베드로의 집터에서는 ‘베드로’라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인 푯말과 어선의 그림을 발견했다고 한다. 현대 [ 편집 ] “예수님의 마을 카파르나훔”이라는 팻말이 달린 문으로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정원에 선 커다란 베드로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그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베드로의 집터위에 배모양으로 지은 성 베드로 기념성당이 있다.
[인 더 바이블] 가버나움(Capernaum)갈릴리 지방에 있는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안마을입니다. 히브리어로 본디 이 마을 이름은 ‘크파르 나훔’이었다고 합니다. 마을을 뜻하는 ‘카파르’와 남자 이름 ‘나훔’이 합쳐져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서에 이 마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선지자 나훔을 이르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크파르 나훔’은 신약에서 그리스어로 ‘카파르나움’ 또는 ‘카페르나움’으로, 그리고 영어로 번역될 때도 그대로 음차했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지명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직접 전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그 당시에 인구가 1500명이나 되는 번듯한 고장이었고 오늘날 회당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을 떠나 32㎞쯤 떨어진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고, 아픈 사람들을 안식일에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이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 빵을 달라고 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 6:35, 새번역) 가버나움에서 함께 지낸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가르침을 어려워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려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예수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임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박여라 영문에디터 [email protected]
[성경 지명 원어 강해 설교문] 가버나움 Capernaum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도 두란노 서원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성경 지명 원어 강해 설교문 중에서 가버나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명연구 : 가버나움 Capernaum 1. 지명과 현재의 위치 1) 지명 : 코페르 나훔이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독한 이름이다. 2) 지명의 의미 : 코페르 나훔은 ‘나훔의 동네’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훔이 구약의 나훔 선지자인지 아닌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3) 현재의 위치 :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그렇지만 텔 훔 지역이 가버나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후 530년 이후부터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현재의 텔 훔 지역은 1.6Km에 걸쳐서 주초들만이 남아있는 폐허이다. 4) 주변 : 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갈릴리 호수로 들어가는 요단강이 있다. 5) 지명에 대한 다른 견해 : 유대교 랍비들은 랍비 탄훔이 장사된 곳이 후에 와전되어 텔 훔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2. 신약 당시의 가버나움 1) 규모 : 가버나움은 신약 당시에 가로 800m, 세로 250m 규모의 동네였다. 2) 위치 : 갈릴리 북서쪽 호수와 접해 있었다. 3) 인구 : 대략 1천5백 명에서 2천 명 정도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거주 시기 : 주전 약 1세기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약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5) 주된 시설 : 국경 지역이었으므로 세관이 있었고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cf) 예수님께 믿음을 칭찬받은 백부장도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6) 도시의 형태 : 성곽이 없는 국경의 작은 소도시(마을)에 불과했다. 3. 가버나움의 변화 1) 거주민들의 변화 :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 가버나움은 유대인들의 집단적 거주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2) 콘스탄티누스 : 그는 회심 이후에 이방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갈 수 없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이 지역이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했음과 더불어 유대인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을 보충적으로 알려준다. 3) 주후 7세기 : 가버나움은 아랍인들이 정복했으나 쇠퇴하지는 않았다. 4) 주후 8세기 : 중엽 때(746년) 강한 지진으로 인해서 큰 피해가 있었고,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5) 주후 11세기 : 완전히 쇠퇴하여 없어진 마을로 변모하였다. 4. 베드로의 집 1) 고대의 기록 : 4세기 말경의 순례자였던 에게리아는 가버나움에 가정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는 베드로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순례자들은 그 집 둘레에 담장이 처져 있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2) 설립 연도 : 기원전 1세기경에 세워진 하나의 건물이 독립적으로 서 있는 것이 발굴되었다. 3) 기록과의 일치 : 그 건물의 주변으로는 가로 27m, 세로 27m의 담장이 처져 있었다 4) 한 방의 발견 : 고대인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방이 발견되었는데, 크기는 가로가 5.8m, 세로가 6.45m로 예수께서 머무르셨던 방으로 알려지고 있다. 5) 장식 : 중앙 건물의 벽면에는 여러 색채의 장식물들과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6) 다른 증거들 : 그 건물에서 나온 몇몇의 석회 반죽들 중 일부에서 아멘, 주, 예수 등의 어귀들이 분명하게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이런 글씨들은 헬라어, 아람어, 시리아어, 라틴어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 건물이 매우 중요한 순례지였음을 보여준다. 7) 교회 건축 : 4세기 때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었고, 5세기 때 팔각형의 교회를 완공했다. 8) 담장의 파괴 : 원래의 담장은 7세기까지 남아있었으나 그 후에 파괴되었다(614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교회 건물과 담장이 파괴되었다). 5. 가버나움의 회당 1) 보존 상태 : 거의 완벽에 가깝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거의 유일한 회당이다. 2) 건축 : 예수 당시의 회당 터에 주후 3세기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3) 특징 : 정통 유대식의 회당의 모습이 아니다. 4) 장식 : 기하학적인 장식들이 많이 있다(이것은 주술과 상관되어 있다). 5) 다른 문헌의 언급 : 랍비 문학에서는 가버나움을 우상 종교들의 소굴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과 가버나움 회당의 모습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6. 고고학적인 발굴 1) 발굴 이전 : 유적지들의 돌들을 취당하여 많은 유적들이 손상당했다. 2) 발굴의 시작 : 1894년이 되면서부터 고고학적 관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이 지역을 더 이상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신부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들에 의해 관리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7. 복음서에서의 가버나움의 중요한 모습들 1) 예수께서 거주하신 도시 : 예수께서 집에 계셨다는 기록이 유일하게 나오는 도시이다(막2:1). 제자들과 함께 며칠 동안 유하셨던 도시이다(요2:12). 2) 병자들을 고치심 : 예수님께선 가버나움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막1:21-28눅4:31-38), 백부장의 하인(마8:5-13), 베드로의 장모(마8:14-17), 중풍병자(막2:1-12), 왕의 신하의 아들(요4:46-54) 등의 병을 고쳐 주셨다. 3) 저주를 받음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가버나움에 대해 저주를 내리셨다. 원어설교 : 가버나움 Capernaum 가버나움 כפר נחום : 카파르 나훔 Καπερναυμ : 카페르나움 Capernaum 마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번창한 도시(마11:23)로 갈릴리 바다, 게네사렛 호수의 서쪽 연안에 위치했습니다(요6:17). 가버나움은 כפר(카파르)라는 ‘마을’과 נחום(나훔)이라는 ‘위로’의 합성어로 ‘위로의 마을’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예수는 한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겼습니다(눅7). 또 예수는 이곳에서 사역을 많이하였습니다(마4:13). 1. 인간은 위로를 받으며 사는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로받고자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깊은 내면에서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위로받을 수 없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위로한다는 것은 쉬울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라헬이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렘31:15)하고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는 말에 아들들의 위로를 거부합니다(창37:35).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으나(욥2:11) 오히려 근심에 쌓이게 만든 것은 인간이 인간을 위로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2.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입니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 위로할 수 없기 때문에 위로부터 누군가가 와야 합니다. 위로부터 온 자만이 이 땅의 사람들, 위로받기조차 거절하는 사람들을 진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오시어(막1:21) 아예 그곳에서 사셨습니다(마4:13).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역사를 행하셨습니다(눅4:23).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참다운 ‘위로의 마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임을 말합니다(마5:4). 우리가 우리의 환경이나 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 아뢰지 않고 묵묵히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임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것을 애통해할 때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만이 위로부터 임하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세상을 위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는 사실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위로의 사도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로하도록 명령하십니다(사40:1). 우리는 위로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마음이 여리고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난 받는 것도 믿음이 연약한 자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또 위로받는 것도 그들의 위로를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로가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역사할 때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고후1: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를 세상 사람들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초청하는 위로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위로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은 바로 남을 이해함으로 위로할 수 있을 때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모든 사람의 위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설교1 : 가버나움 Capernaum 천국 복음의 진원지 막1:21-27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진원지란 지리학적인 개념으로 지진의 발생점을 가리킵니다. 온 땅을 뒤흔드는 대지진도 사실은 지각 밑에 있는 진원지의 조그만 충격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온 세계에 생명의 혁명을 일으킨 기독교의 천국 복음 전파도 같은 원리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복음이 갈릴리 지방에서 비롯되었다고 증언합니다(행10:37). 갈릴리 지방에서도 본문의 가버나움이 바로 복음의 진원지인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처음으로 공생애 사역을 활발하게 시작하신 가버나움과 그 사역이 주는 교훈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방의 중심지입니다 1) 주 예수님의 제2의 고향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신 후 그가 감옥에 갇히자 주님은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공생애 사역의 중심지가 곧 가버나움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나사렛을 떠나…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4:13)라고 증언해 줍니다. 공생애의 많은 부분을 주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보내셨으며, 그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으셨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다메섹과의 지중해 교역 통로로 물자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습니다. 마태 같은 제자가 일하던 큰 세관과 로마군의 부대, 유대인들의 회당 등이 많았습니다. 가버나움은 그 당시 갈릴리 지방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이와 같은 대도시를 주님이 천국 사역의 출발지로 택한 것입니다. 나사렛은 성장하신 고향으로 삼고, 가버나움은 사역의 고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천국 사역의 사명을 지닌 우리 성도들은 나사렛에서 안주할 수만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도피와 은둔의 ‘산속 종교’가 아니라 사회 속에 뛰어들어 그곳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의로 개혁시키는 ‘시장의 종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변방으로 취급되었던 곳임 그러나 가버나움은 당시 유대 내륙 지방 사람들에게 업신 당하고 소외되었던 곳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이방의 갈릴리”(마4:15)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어느 나라나 국경 지대 근처의 변방 지역 사람들은 내륙 지방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잦은 외세의 침략과 교류로 인해 그들의 피와 정서는 내륙지방인들처럼 순수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피와 문화에 뒤섞여 본토 사람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고향 갈릴리 지방이 그처럼 천대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소외되고 무시되었던 갈릴리 가버나움을 복음의 진원지로 삼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는 약한 사람들, 천한 지역을 먼저 당신의 나라로 삼으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는 큰 예입니다(고전1:26-31). 2. 놀라운 새 교훈이 선포된 곳입니다 1)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다름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간 주님께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고 했습니다(22절). 당시 회당에서 강론하던 율법학자나 서기관과는 달리 신선하고 참신한 내용의 가르침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마7:28,29). 당시 서기관들은 그들의 스승들로부터 배운 지식과 유전대로만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를 수호하고자 그들이 만든 인간적인 계율을 강조했고, 백성들을 그 행정적인 멍에 속에 가둬놓는 가르침만을 행했던 것입니다(막7:3-13).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죽어버린 계율이 아니라 진리를 말씀하셨고, 머리가 아닌 따뜻한 마음으로, 권위가 아닌 사랑으로 가르치셨기에 가버나움 백성들의 의식과 영혼에 큰 충격을 준 것입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은 성령에 감화된 인격과 마음으로 전해야만 생명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놀라운 위로와 생명의 말씀임 성경은 당시 율법주의 종교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고후3:6)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진리로 조명되고 해석되지 않은 율법은 인간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정죄합니다. “너는 틀림없는 죄인이니 오직 심판받고 정죄받고 멸망받아야 한다”가 율법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자연히 서기관들과 율법학자와 제사장들이 전하는 하나님은 무섭고, 완고하고, 엄한 심판을 하시는 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이 충만하시며, 용서하고, 자비가 한없으신 하나님을 전하셨습니다.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화해하시고자 그 독생자까지 이 땅에 보내신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교훈은 사람들에게 실로 놀라운 생명과 위로가 되는 복음이었습니다. 이웃에게 비판과 정죄와 의무만을 강조하는 복음 전파와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고 나타내야만 이웃이 변화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3. 천국 권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곳입니다 1) 사단의 권세가 무너지기 시작함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훈은 신유의 표적으로 그 권세가 증명되기 시작했습니다. 회당의 귀신 들린 자를 구해주신 것입니다. 이는 사단의 권세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생명과 의의 권세가 발효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죽음과 죄, 그리고 심판 대신 생명과 의와 희망의 권세가 가버나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참된 회개와 믿음의 열매가 나타남 가버나움의 사역이 시작되자마자 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28절)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불신하고 등졌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참된 신앙을 지니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시작된 천국 복음 운동과 그 권세는 이렇게 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5,16)고 증언합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 비췬 천국 광명의 여명은 이제 온 세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주 예수의 복음 사역이 실행되는 곳은 모두 위로의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 시작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거하는 곳을 복음의 진원지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설교자료 ◈ 태풍의 눈 강력한 태풍이 불 때 비교적 안정된 기상 현상이 나타나는 중심 부분. 태풍의 눈은 대개 태풍 중심부의 10여 Km 이내가 된다. 기이하게도 태풍의 눈은 태풍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상대적으로 바람이 약하고 기온이 상승하며 상대 습도의 저하 등의 특징을 보이고 하늘은 맑고 푸를 때도 있다. ◈ 인종 차별 ① 인종이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간 차별, 분리, 격리 등의 정책이 생기는 사회·정치적 문제를 의미한다. ② 식민지 종주국과 식민지 간에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의 유색 차별, 미국의 흑인 문제가 대표적이다. ③ 냉전이 끝난 이후 인종간 정치적·경제적 대립관계,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 하나님 지식의 성격 하나님 지식의 성격이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지식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①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② 하나님은 자신을 아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언제나 알고 계신다 ③ 하나님의 지식은 영원하다 ④ 선험적이다. 직관과 추리에 의해 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직관적인 전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 ◈ 약함에 대한 자각 약하다고 한탄하며 남의 도움만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기의 약함을 깨닫는 것은 남의 도움을 바라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굳센 힘을 얻어 서기 위함이다. 약하다는 자각은 신앙의 확립으로 끝나야 한다. 쓸데없이 비명을 질러서 세상의 동정이나 도움을 애걸하는 일은 크리스찬의 도리가 아니다.(내촌감삼) ◈ 로마제국의 붕괴 2세기 말부터 로마는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치와 향락에 빠졌으며, 주변 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군대가 황제를 폐립 시키는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제국은 쇠퇴기에 들어섰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정치의 혁신과 황제권 강화를 통해 로마의 중흥을 꾀했으나 그가 죽은 후 거듭된 혼란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게 망하였다. ◈ 구약에서의 회개 ① 의미 : 구약에서 회개란 악에서부터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은 성품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대하 36:13). ② 주체 : 회개의 주체는 개인도 되고 민족도 된다. ③ 대리인 : 이 같은 주체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대리인으로 사용한다. ④ 결과 : 거부하는 자는 징벌, 포로, 파멸, 죽임을 당하고 회개하는 자는 용서와 생명을 얻는다. 설교2 : 가버나움 Capernaum 천국 시민으로 인정받는 신앙 마8:5-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그것에 합당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유효합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을지라도 합당한 신앙으로 응답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본문은 주 예수님이 제2의 고향인 가버나움에서 많은 은혜를 베푸신 일 중 한 예입니다. 주님은 이방인 백부장의 신앙을 칭찬하시면서 정작 유대인들은 천국 주변의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풍성한 은혜에 신앙으로 응답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백부장처럼 천국의 시민으로 주님께 인정받는 신앙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과연 그 신앙의 요건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국의 왕을 경외해야 합니다 1) 그 권세를 인정함 주님께 나온 백부장은 지금 우리나라 군편제로 비교하면 대대장급을 의미합니다. 군인 백 명의 수장입니다. 당시 가버나움에는 비상시에 로마 군대가 주둔해 있었으며 또 갈릴리 지방을 통치하는 헤롯 안디바의 군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백부장은 로마나 시리아 같은 이방인이 분명합니다. 이 이방인 군대 장교가 예수님을 ‘주님'(6절)으로 높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주 예수의 신적 권세와 권능을 온전히 알고 인정하고 믿는 신앙을 지닌 것입니다.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은 주님을 큰 선지자 정도로 여겼습니다. 결코 사람 이상의 존재로는 인정치 않은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들이 기대하고 인정한 점은,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켰던 것처럼 자기들을 로마의 식민 지배하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해방자로 이해할 뿐이었습니다. 3년 이상 함께 동거하고 교육받은 베드로가 훗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겨우 고백한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천국의 시민이 되고자 원하는 사람은 그 천국 주인의 실체를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주 예수님의 권세와 권능을 온전히 알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2) 그 사랑과 자비하심을 확신함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적대시하고 박대하는 풍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께 나아와 자비를 간구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굳게 확신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그분이 전지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주 예수님과 같이 자비와 사랑으로 나와 이 세상을 대하시는 분임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참된 신앙을 소유한 것이요,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주민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2. 천국 시민다운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1) 늘 겸손해야 함 백부장은 지휘만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하들을 거느린 지휘관입니다. 그가 로마인이었다면 유대인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을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직접 주님께 나와 간구하였으며, 가서 고쳐주리라는 주님의 수고에 황송하여 그저 말씀만 해주시기만을 청했습니다. 이는 세속적인 권위 의식이나 교만한 풍조에 물들지 않고 늘 자신을 겸손으로 훈련해 왔다는 증표입니다. 겸손은 참 신앙의 척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고 그분이 다스리는 이 세계를 인정하는 성도는 결코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과 그 영광만을 높이려는 의식과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세가 곧 천국 시민의 기본자세입니다. 자만하고 교만한 의식을 지닌 사람은 결코 천국 시민으로 생활할 수도 또 인정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사는 생활은 오직 성령과 말씀 안에서 겸손해진 성도만이 능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온유함으로 행해야 함 백부장은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13절)라는 주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그가 온유한 믿음을 지닌 증표입니다. 온유함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온유함을 단순히 도덕적 차원으로 인식합니다. 그 천성과 몸가짐이 온순하고 유순한 것을 온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는 그 이상의 개념입니다. 온유는 훈련을 통해서 단련된 신앙 인격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불의와 부당함에 대해 온유하게 대함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 순종하고 따르는 자세가 곧 성서적 온유함의 개념입니다. 한 예로 욥이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 것이 온유입니다. 축복을 주실 때만, 이해할 수 있는 섭리에만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섭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에도 순응, 순종하는 신앙이 곧 온유함의 요건을 지닌 참 신앙인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을 원했으며 그래야만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인정하겠다고 우겼습니다(마12:39). 그와 같은 태도는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고 행하는 자세가 온유함이요,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에 온유하게 순종하는 성도만이 천국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마5:5). 3. 천국의 가치관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백부장이 주님께 원했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한 행복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한낱 미천한 하인을 그 병에서 구해 주고자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당시 하인은 종과 노예의 신분을 지녔습니다. 물건처럼 돈으로 사고팔고 병들면 버리는 소모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백부장은 그 하인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성경 원문에는 백부장이 하인을 ‘파이스’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는 ‘아들’이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그는 하인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곧 천국의 표어요, 중심 가치관입니다. 이 사랑의 가치관을 따르는 사람이 참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사랑은 신앙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있는 사람만이 천국의 주민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설교자료 ◈ 시민권을 따기 위한 4가지 길 ① 정부 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② 그 나라의 환경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 ③ 정부 기관의 법과 관례에 승복해야만 한다. ④ 그 나라의 문화적 배경을 잘 이해하며 답습해야 한다(미국대사 연설중에서). ◈ 백부장 시대의 사회 계층 귀족 사회와 하층 계급으로 구분됨. 1. 귀족사회 ① 제사장 :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장, 성전 감독, 재정 담당 제사장 등 ② 장로 : 지방 통치자들 ③ 서기관, 랍비(선생) : 보수 없는 명예직, 산헤드린 공회원 ④ 부와 권력을 쥔 자들 2. 하층사회 ① 일반 서민 : 유대인의 대부분 ② 사마리아인 : 이방인과 혼혈의 혈통 ③ 노예 : 가내 노예 ④ 이방인(개종자) : 이방인으로서 할례와 세례를 받은 이방인 ◈ 천국에서 큰 자 성도 개개인과 하나님의 관계, 천국 백성들과의 관계, 이 두 관계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큰 자가 되려면 성경에서 말하듯 겸손해야 한다. 상호 간의 겸손과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겸손을 갖고자 하는 사람은 조리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의 자리까지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극진하신 사랑을 체험하여야 한다. 이러한 자만이 형제를 섬기는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 속에 참된 도리의 겸손함을 겸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 성도들 앞에는 장애물이 많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남을 용서하는 선행을 한다고 해서, 굶어 죽어가는 자를 구제한다고 해서, 세상의 유혹을 뿌리 친다고 해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해서 얻어지는 지위가 결코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의 소망을 잃지 않는 용기 있는 믿음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 성장 성장한다는 것은 재림이나 천년설의 성경적 지식을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영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성장은 생활이 변화해 가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온유함은 최대의 덕성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가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의 힘을 통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이다. 칼빈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함으로 세상을 정복하신 구원자이시다. 설교3 : 가버나움 Capernaum 죽음에 관한 상반된 시각 막5:35-43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여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우리 기독교의 시각으로 볼 때 인류 불행의 원인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성경의 말씀대로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행의 사신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극복 문제는 종교와 철학의 공통적인 대명제입니다. 본문 가버나움 회당장의 어린 딸의 죽음과 그 딸을 죽음에서 소생시킨 주 예수의 행적 속에서 죽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각과 생명에 대한 주님의 시각을 대비시켜 줍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진실성과 그 귀중 성을 다시금 인식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절망과 희망을 보여줍니다 1) 절망하는 사람들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절). 이 말은 회당장의 이웃이 소녀가 죽은 소식을 전한 내용입니다. 그 말속에는 죽음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괴롭게 한다는 말은 ‘스큘레인’이라는 말로서 “말도 안 되게 혹사시킨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을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청하는 일은 어불 성설, 억지를 부려 예수님을 괴롭히는 일이니 그만두라는 뜻입니다. “죽으면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라는 절망적 인식이 사람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망감은 주 예수께 간구하고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결국 절망은 불신의 씨앗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도 했습니다. 죽음, 죄, 삶에 대한 절망은 우리 신앙의 적입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특색이요, 생명임을 기억합시다. 2) 끝없는 희망을 주시는 주님 이에 반해 우리 주님은 어떻습니까? 그 죽음의 소식을 듣고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36절)고 하셨습니다.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극복할 능력이 없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우리에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는 있으므로 구주 예수를 믿으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도 믿으라는 교훈입니다(롬4:18).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의인으로 인정받고 천국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며, 어떻게 죽은 후에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전능하신 권능과 그 사랑의 언약을 굳게 믿음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2. 체념과 권능을 보여줍니다 1) 체념하는 사람들 주님이 회당장의 집에 가시니 이미 장례 절차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곡하며 피리 불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풍습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나라가 동일합니다. 세계는 ‘죽음의 문화와 절차’에 아주 익숙합니다. 전문적으로 곡해 주거나 다양한 절차로 장례를 치름으로써 죽은 자의 가족들을 잠시나마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려낼 수는 없으니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장례식을 통해 위로받으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죽음에 관해 ‘체념’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지혜는 결국 죽음 문제에 대해 ‘체념’을 그 해답으로 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절대적 숙명이니 그저 체념하고 살아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습니다. 죽음은 필연적이니 살아있을 때 실컷 즐기라는 사상도 있습니다(고전15:32). 이 모든 사상의 밑바탕에는 죽음에 관한 체념 의식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2) 권능으로 죽음을 물리치신 주님 주님은 야이로의 딸을 보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절)고 하신 후 그 당장 ‘달리다굼’ 즉 일어나라고 명하사 죽음에서 소생시키시는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가버나움 회당장 딸을 부활시켜 주신 이적을 필두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부활의 이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은 즉시 살려내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 후 묘지로 가던 중 살려내셨으며, 야이로는 무덤에 묻힌 지 사흘이 지났을 때 살려내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의 권능,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는 권능을 가지신 창조주이심을 반증하는 예입니다. 어쩌다가 우연하게 살려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권세가 주 예수께 분명히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증거는 주 예수 자신도 삼일 만에 부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 안에 있는 그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까지 다시 살리실 것을 믿게 합니다. 3. 경악과 경계를 보여줍니다 1) 부활에 경악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기는”(42절), 가버나움 지방부터 시작된 주님의 천국 복음 사역은 세상 사람들에게 ‘놀람과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막 1:23-28). 주님의 가르침, 행사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기적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은 그저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는 일, 영생을 얻는 일, 기도의 응답받는 일 모두가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2) 맹신을 경계하시는 주님 그 기적적인 상황을 본 사람들에게 주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이 부활 사건을 은밀하게 처리하라고 경계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적이 일어나면 그 이적의 주인 되신 하나님보다 이적 그 자체를 우상화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소녀의 부활 사건도 그 소녀를 부활시킨 주님보다 그 부활 이적 자체, 아니 더 나아가 부활된 소녀를 신성시하는 맹신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보고 신비감에 젖어 있지만 말고 현실적으로 그 소녀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부활했어도 음식을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간접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처럼 이상과 현실 감각이 조화된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가버나움 회당장 딸을 사망 권세에서 건지신 이 사건은 이제 이 땅에 주님의 생명 권세가 왕 노릇 할 것이라는 신호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료 ◈ 절망의 늪에서 탈출하라 ① 당신 위에 : 주의 지키심이(신4:39) ② 당신 밑에 : 주의 받쳐 주심이(신33:27) ③ 당신 뒤에 : 주의 상급이(사52:12) ④ 당신 오른편에 : 주의 보호하심이(시16:8) ⑤ 당신 앞에 : 주의 인도하심이(사45:2) ⑥ 당신 주위에 : 주의 방패가(시125:2) ⑦ 당신 안에 : 주의 임재 하심이(겔36:27) ◈ 생명의 길이 ① 노아 이전의 생명 길이는 평균 846년(창5장) ② 노아 이후의 생명 길이는 평균 393년(창11장) ③모세 당시의 생명의 길이는 칠십 내지 팔십년 ◈ 회당장 회당의 우두머리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을 유지, 운영, 보존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예배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토라(율법)의 낭독과 설교 등을 할당해 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 인생은 이렇다 ① 인생은 여행이다(창47:9). ② 인생은 꿈과 같다(시73:20). ③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전6:12). ④ 인생은 안개와 같다(약4:14). ⑤ 인생은 하나의 이야기와 같다(시90:9). ⑥생명은 땅에 쏟아진 물과 같다(삼하14:4). ⑦인생은 꽃과 같다(요14:1,2). ◈ 생명의 삶 죽음을 뛰어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바라보게 하신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서 부정적 요소를 버려야 한다.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바로 참 용기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지속적인 신뢰를 갖는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 있는 삶의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 ◈ 영원한 축복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릴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사25:8고전15:45-55)은 반드시 약속과 성취, 그것으로 인해 성도가 항상 영원한 행복, 즉 부활의 목표를 염두해 두어야 함을 말해 준다. 이 행복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표현하더라도 그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 죄란 이렇다 ① 성스런 법을 어기는 것 : 위법(요일3:4) ② 고약한 질병 : 인류를 파괴시키는 것(사1:4) ③ 두꺼운 구름 :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우는 것(사59:2) ④ 평온을 깨뜨리는 것 : 무질서, 근심(시38:3) ⑤ 축복의 강탈자 : 영혼을 갈하게 하고 죽이는 자(렘5:25) ⑥ 끔찍한 재앙(미6:13) ⑦ 넘어뜨리는 자(잠13:6) ⑧ 무겁게 해서 떨어뜨리는 자(사30:1) ◈ 인간의 무지 ① 세상이 주님의 위험을 알지 못한다(마24:39). ② 교회가 주님의 필요를 알지 못한다(계3:17). ③ 교인이 그 주인인 주님을 알지 못한다(요14:9). ④ 죄인이 그 구주를 알지 못한다(롬11:25). 설교4 : 가버나움 Capernaum 가버나움의 한 시민으로 마17:24-27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 이스라엘 속담에 “풍년을 바라되 쟁기질은 멈추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크고 높은 이상과 꿈을 그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은 현실 속의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천국 시민의 지위를 인정받은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사회인으로서도 그 의무를 경시할 수 없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시민으로 그 의무를 다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성실하고 모범된 사회인의 의무와 역할을 다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사회가 성도를 오해치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1) 성도의 특권과 자유를 유보함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 마지막으로 가버나움에 들르셨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방의 중심 도시로서 헤롯 안디바의 관정이 있었던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갈릴리 전도 사역과 공생애 사역의 중심지로 삼은 도시입니다. 그때 반세겔의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찾아왔습니다. 학자들 견해에 따르면, 이 세금은 로마나 또는 헤롯이 거두는 ‘주민세’로 보는 이들도 있고, 유대인이라면 성인 누구나 내는 ‘성전세'(출30:13)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만일 그 세금이 성전세라면 성전의 주인 되신 주님과 그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은 내지 않을 특권이 있었습니다(26절). 일반적으로 통치자의 직계들은 세금을 면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세금이 로마 제국이나 헤롯이 걷는 것이었다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도들은 내지 않을 자유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세금을 내셨습니다. 사회가 기독교인들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 때문이셨습니다(27절). 우리가 성도 된 특권과 자유만을 이 사회 속에서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산다면 사회는 성도들을 반사회적 존재나 광신 집단으로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온전한 특권과 자유는 완성된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잠시 유보하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겸손하게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고전9:19-22). 2)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함 사회가 오해치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가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행동은 곧 사회의 표준이 됩니다. 사회가 교회의 행동을 그 윤리 규범으로 삼는 예가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경솔하게 반국가적 행동, 반사회적 운동을 한다면, 사회는 교회의 행동을 오해하여 더 큰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선한 일의 본을 보여”(딛2:7) 사회의 화평과 의를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납세 의무를 준수해야 합니다 1) 국세와 공세를 냄 주님은 ‘관세와 정세'(25절)를 열거하셨습니다. 관세는 화물이나 상품에 부과되는 간접세요, 정세는 주민세와 같은 직접 세금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세금을 납부해 오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가 세금 징수원에게 두말없이 세금을 내신다고 한 사실이 그 증표입니다(25절). 성도들에게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는 국세를 바치라고 명합니다.(롬13:7) 하나님의 백성과 그 자녀라도 국가와 사회의 법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국가의 권력이나 법도 “하나님의 정하신 바”(롬13:1)라고 증언합니다. 국가의 권세와 법으로 교회를 보호하시고 연단하사 그 구속 섭리를 펴시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국가가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지 않는 한 국가는 교회의 큰 보호자인 것입니다. 국가가 흔들리면 교회도 그 안정을 잃습니다(딤전2:1,2). 세금은 국가 유지의 중요한 요소이기에 성도들이 그 의무를 다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섭리를 협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교회의 봉헌 의무도 행해야 함 학자들 대부분은 주님이 내신 반세겔의 세금이 성전세라고 해석합니다. 이 세금은 당시 성전의 유지와 보수, 그리고 제사 비용과 성직자들의 생활비로 쓰였으며, 이는 구약의 율법에 의거한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고 율법이 폐하여졌을지라도 주님이 성전세를 내셨다는 사실은, 성도들이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모든 봉헌을 해야 함을 교훈하시는 예입니다. 어떤 이들은 신약에서는 십일조나 헌금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기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폐기된 것이 아니라 갱신되고 완성된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법으로 완성된 것이고 변혁된 것입니다. 결코 폐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 안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봉헌의 의무를 행해야 합당합니다. 자발적으로 감사하여 때로는 전재산도, 십의 십조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전도 사역비로 헌금을 받으셨으며 재정 부장으로 도마까지 세웠음을 기억합시다(요12:3-6). 3. 물질 소득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1) 성실하게 노동함 결국 세금과 봉헌할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온 물고기 입에 든 금화 한 닢을 세금으로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내용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베드로가 노동한 결과였습니다. 낚시는 원래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한 수단이요, 노동입니다. 비록 아가미에서 금화를 얻었을지라도 낚시라는 노동 끝에 얻은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심 성실하게 노동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기적과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성경은 노동도 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을 꾸짖습니다(살후3:10-12엡4:28). 유명한 부흥사 무디가 배를 타고 부흥회 장소로 가는 도중 그 배에 큰 불이 났습니다. 무디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물을 퍼 날랐습니다. 그때 한 성도가 “아니 목사님이 기도를 하실 것이지 이게 무슨 꼴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무디는 “내가 지금 불끄는 이 수고가 현재는 큰 기도 사역입니다”라고 했답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수고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설교자료 ◈ 국민의 의무 국민이 국가에 대해져야 할 국민으로서의 의무. 헌법은 기본권과 함께 기본적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국민의 4대 의무는 다음과 같다. ① 국방의 의무 : 우리나라는 개병주의에 의한 징집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② 납세의 의무 : 조세의 종목과 세율은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에 따른다. ③ 근로의무 : 노동을 통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 ④ 교육의 의무 ◈ 성도의 의무 1.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의무 ① 성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②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책임 인식을 의무로 삼아야 한다. ③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의 규례로 인정해야만 한다. 2.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성도의 의무 ① 성도는 국가에 대한 지원에 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② 성도는 모든 동료 시민들에게 우호적인 마음을 지녀야 한다. ③ 법적인 권위의 행사에 기꺼이 복종해야 한다. ◈ 세금 국가나 지방 공공단체가 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국민으로부터 세법에 따라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돈을 세금이라고 한다. 세금은 징수하는 주체를 대상으로 해 국세와 지방세로 분류되며, 부담하는 방법에 따라 직접세(납세자와 담세자가 동일한 세금)와 간접세(납세자와 담세자가 다른 세금)로 분류된다. 우리나라는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자산 재평가세, 부당이득세 등은 직접세이고 부가 가치세, 특별 소비세, 주세 등은 간접세이다. ◈ 사회 윤리의 문제들 사회 윤리란 지성과 의지를 갖춘 개인들 또는 집단들 상호 간의 관계를 고려해 무엇이 좋고 나쁜 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다. 사회 윤리의 문제는 특성상, ① 사회적 요구와 개인적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화하는가 ② 개인의 생각 및 행동과 집단의 행동 사고와 얼마나 같은가 ③ 집단들 간의 관계 성격에 대한 문제(예 교회-사회)와 같은 것 등이 있다. ◈ 정교 협약 특정한 국가 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부 간에 종교적 문제에 관한 협약이나 법적인 조약을 의미한다. 이는 교회가 외교적으로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교회가 특권을 빼앗길 때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체결됐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정교 협약은 180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교회 간 맺은 협약이었다. ◈ 모랄 서베이 (morale sur- vey, 노동 의욕 조사) 사기 조사 또는 근로 의욕 조사를 의미한다. 종업원이 기업에 대해 어떤 심리적인 연대감을 갖고 있는가를 조사하는 것이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노동조건, 이해관계, 대우 등에 대해 불만이나 희망을 청취, 기업이 노무 관리에 참고하여 사기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설교5 : 가버나움 Capernaum 가버나움을 버리시는 이유 마11:17-24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무조건 자녀들로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형식적이더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의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안일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이 갈릴리 선교 본부로 삼으신 가버나움을 중하게 질타하시고 그 주민들이 후에 지옥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선고하십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형식적이며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에게 큰 경종이 됩니다. 과연 가버나움은 어떤 이유로 주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우리 신앙의 본질을 다시금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법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1) 율법을 불순종함 주님은 17-19절에서 가버나움을 포함한 갈릴리 주민들의 완악함을 비유로 질책하십니다. 피리를 불어도 곡하지 않고 애곡을 해도 응하지 않는 악동들처럼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리의 사자들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을 무시한 처사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 것을 명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대신 자신들이 만든 규례를 따르고 요한을 비웃고 끝내는 감옥에 가둬 그 생명까지 빼앗는 악행을 범하였습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선민이라는 조건이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될 수 없습니다. 중심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지녀야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복음도 불신함 그들이 주님께 버림받은 결정적인 요인은 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에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과 관용의 진리를 가르치고 실행하신 주님을 천한 자라고 무시한 것입니다(19절). 율법을 전하는 세례 요한은 이상주의자로(18절), 사랑을 전하는 주님은 천박한 자로 매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복음 진리의 예표인 율법도 불순종하고 완성된 율법인 주님과 그 복음 진리도 불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들과 그 세계는 분명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이 사실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배경과 환경 속에 거하는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이 없다면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주님께 외면당하게 된다는 진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 최선의 은총에 응답하지 않음 주님은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셨다면 그 소돔성이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3절). 소돔성에는 어떤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 때문에 잠시 관계를 맺었던 예만 있었을 뿐입니다(창14:21-24). 그런데 가버나움에서는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직접 거하시고 큰 이적을 풍성하게 행하셨으며 복음을 손수 전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곳입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직접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이 가버나움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은혜를 소돔성에 베푸셨다면 그들은 주님을 섬기는 길로 갔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큰 은혜를 많이 받고, 신비스러운 체험을 많이 한 것이 신앙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남보다 영적인 체험은 적을지라도 그 깨달은 은혜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려는 자세가 귀중한 신앙의 본질적 요소인 것입니다. 2) 은혜를 욕되게 만듦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치 않는 사람들은 한발 더 나아가 그 은혜를 욕된 것으로 만드는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 가버나움을 비롯해 갈릴리 사람들 중에는 주님이 베푸신 이적 권능을 ‘귀신의 장난’으로 매도한 사람도 있습니다. 바알세불의 힘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마9:34마12:24). 하나님 성령의 은혜와 권능을 전적으로 모독하는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성경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히10:29)고 경고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여기거나 욕된 것으로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타락한 자들 중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 시간을 아까워하고 그 때문에 물질과 시간을 낭비했다고 원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허망하고 불익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자들, 더 나아가 그 은혜를 ‘못된 운명의 신의 장난’으로 여기는 자들은 분명 주님께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3. 하나님의 소원과는 다른 방향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1) 외적인 표적만 요구함 주님께서 큰 이적과 권능을 베푸신 궁극적인 목적은 ‘회개와 믿음’의 열매를 얻으시려는 것입니다(마4:17눅15:7).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깨닫고 자신들의 불신앙과 불의한 죄를 회개하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기를 주님은 원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버나움 사람들은 더 큰 하늘의 표적만을 원했습니다(마12:38,39). 회개를 원하는 주님의 소원은 외면하고 신비한 표적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어리석음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가버나움식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표적과 기사에만 집착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은 경시하는 자들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많이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회개와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주님의 소원에 부응하는 참 신앙인으로 인정받습니다. 2) 스스로 교만해짐 주님은 가버나움 사람들이 하늘까지 높아질 줄 착각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23절). 주 예수가 자신들의 세계에 거하고 큰 기적과 권능을 다른 고을보다 많이 베푸셨으니 자신들은 다른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높은 하늘의 영광을 차지할 것으로 여기고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는 것입니다. 믿음도 회개도 거룩함의 열매도 무시하고 주 예수님과 형식적인 관계만을 믿고 교만해진 사람들, 그리고 그와 같은 가버나움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훗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광 대신 수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료 ◈ 순종 순종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에 있어서 그 백성이 지켜야 할 조건이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 그것은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다. 이러한 순종은 마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며,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기스본) ◈ 소돔(Sodom) 창세기에 언급된 ‘골짜기의 도시들’ 중의 하나. 소돔은 대단히 악한 도시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창18:20-33). 그리하여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에 갔던 두 천사가 롯의 가족만을 이끌고 나오자마자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이 비같이 쏟아져 소돔과 고모라를 덮어버렸으며(창19:24-25), 그 도시들의 위치가 오늘날 물에 잠긴 사해 남부의 지역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소돔과 그 일대는 불과 유황 비를 맞고 멸망당한 후에 그 지역은 사해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그 골짜기 도시가 멸망된 상황은 고대의 기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있다. 오늘날의 고고학적 조사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데, 그 골짜기의 소돔과 다른 도시들의 멸망은 스며 나온 석유와 그에 동반된 가스에 불이 붙어 생긴 대화재에 의해 생겼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대화재는 “하늘 곧 여호와께로서”(창19:24)라는 구절에서 연상될 수 있는 번갯불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이다. ◈ 바알세불(Beelzebul) 예수와 그의 적대자들 모두가 ‘악마들의 두목’, 즉 사탄에게 부여했던 명칭(마10:25마12:24,27막3:22눅11:15,18-19). 불가타역은 Beelzebub으로 음역함으로써 왕하 1:2에 언급된 블레셋의 우상 바알세불과 동일시하고 있지만 그 둘의 연관성은 분명치 않다. 바알세불은 블레셋 에그론 성읍의 신으로 히브리어 ‘제붑’은 ‘파리’를 의미하며, 따라서 그 이름은 70인역과 요세푸스에 의해 ‘파리들의 바알’이라고 번역되는데, 이러한 명칭은 바알세불이 전염병을 유발하는 신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불가타의 형태인 바알세불은 후대 문헌에서 악한 자를 가리키는 흔한 명칭이 되었으며, 이 명칭이 밀턴의 「실락원」에도 등장한다. ◈ 교만한 자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지극히 미워하신다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탄이 결국 천사장의 위치에서 탈선한 것도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 때문이었으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도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 교만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모든 인간이 자기처럼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획책한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긍함(대하25:19), 마음을 완고히 함(단5:20), 견책받는 것을 싫어함(잠15:12), 다툼을 일으킴(잠13:10), 남을 해하려고 올무와 함정을 놓음(시140:5) 등 온갖 악한 것이 다 포함된다. 결국 이처럼 교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게 된다(잠15:25시31:23). 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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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버나움(Capernaum) – “나훔의 마을”
30 가버나움(Capernaum) – “나훔의 마을”
가버나움,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 소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불과 3장의 짧은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의 이름인 나훔서의 1장 1절에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의 옛 이름이 엘고스 였던가 봅니다.
나사렛에서 환영 받지못한 예수님이 왜 이 곳을 전도의 중심지로 삼았 던지는 나훔 묵시서에도 정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고, 신약성경에서는 단지 나훔 1장 7절이 디모데 후서 2:19에 간접적으로 인용되었지만, 이곳은 고대로부터 ‘해변의 길’ (Via Maris, 사 9:1)이라고 부르는 남북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이방인을 포함한 시민들과 군인, 상인, 여행자 등이 왕래하는 길목이기에 선교적 차원에서 중요한 곳이라 여기시었던 것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탄생 후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나사렛에서 성장하신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가르침을 시작하시었으나 결국은 “선지자가 자기 집과 고향 외는 존경을 받지 못하는 곳이 없다”(마 13:57)고 하시며, 그 당시에는 제법 큰 도시인 가버나움을 전도의 중심지로 삼으셨으니까요.
제자들 중 어부였던 베드로 형제와 요한의 형제, 그리고 세리였던 마태까지 5명의 고향이자 생활 터전이었기에 갈릴리 호반의 여러 도시로 다니시며 사역하기가 편할 수도 있었던 것 역시 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요?
마가복음 1장 22절에는 안식일에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으로 들어가 가르치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라고요.
마침 그 때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이를 고쳐 주시니 예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고 28절에 기록되었지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다 통용되는 모양입니다.
그 때의 그 회당이 아직도 부서진 채로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거의 모든 곳에는 천주교회에서 기념 교회들을 지어 놓고 순례객들을 부르고 있는데 반하여 이 유대인들의 회당 터에는 아직 새로운 회당이 지어지지도 않았고, 또 새로운 교회가 들어서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두 종교가 아직도 합일점을 찾지 못하였다는 반증이겠지요.
회당 터 앞에는 베드로의 집이었다는 유적 위에 지금은 “성.베드로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교회는 마치 공중 부양하는 UFO처럼, 위에서 보면 팔각형 지붕 아래, 본당의 중앙은 비워 놓아, 그 아래에 발굴된 옛 베드로의 집을 볼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또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준 후 바로 이 곳,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fever”라고 하였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속물인 저에게 피뜩 떠오른 생각은 혹시 우리 말의 “홧병이 아니었을까?” 였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생선을 잡아 생활하던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가 배를 묶어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니 갑작스레 막연해진 생활고 걱정에 장모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운 것은 아니었을까요? (에그~속물!)
그러나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들에게 수종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 벌써 수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베드로 집 문 앞에 모였고 주님께서는 이들을 고쳐 주신 후 한적한 곳으로 가시어 기도를 하시었지요.
이날 이후 이 근방에서 여러 날 가르치심과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었습니다.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배 두 척에 그득 찰 정도의 고기를 잡게 하셨고
중풍병자를 친구로 둔 네 명이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집의 지붕을 뚫고 들어간 사건 (막 2:1-12) 역시 가버나움에서였습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고 들어 갔다는 것이 한국이나 이 곳 캐나다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갈릴리 지방이 현무암 지대여서, 대부분 돌로 집 벽을 짓고, 갈대나 종려나무 가지로 지붕을 덮는 형태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던 이 지방의 가옥 형태를 알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심으로 유대인들과 안식일에 대한 논쟁으로 미움도 사시고, 유대인에게 회당을 지어 준 백 부장의 종도 고치셨습니다.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시고,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어 제자들이 두려워할 때, 큰 폭풍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것도 이 부근에서 였습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심과,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자가 고침을 받음, 그리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신 일들이나,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던 제자들에게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만나신 것도 이 부근이었습니다.
이렇듯 많은 가르침, 병 고침, 그리고 여태 경험할 수 없었던 기적들을 보여주셨지만 가버나움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
탄식하시었지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마태복음 11:23)
그래서였을까요?
예수의 사역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버나움, 고라신, 벳세다 등의 도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1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였다가 제1차 십자군 전쟁 이전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며 폐허로 변해갔습니다.
1838년 미국의 탐험가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inson)이 폐허로 변한 이곳을 처음으로 확인한 이후 여러 차례 발굴을 통하여 현재까지 복원된 회당의 잔해들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5세기 초엽에 이미 베드로의 집터에 있던 경당이 갈릴리 지방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경당은 614년 페르시아 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인 1894년 작은 형제회(프란체스코회)에서 발굴작업을 하던 중 베드로의 집터에서 ‘베드로’라는 헬라어로 쓰인 푯말과 어선의 그림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집터 위에 최근에 UFO처럼 공중에 띄워진 채로, 가운데는 바닥이 비어 있어 그 아래 옛날 베드로의 집 터가 보이도록 “성.베드로 기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후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회당의 남은 유적.
복구를 기다리는 잔해들입니다.
베드로의 집 터 위에 지은 팔각형 교회. “성.베드로 기념 교회”라고도 합니다.
교회 내부와 유리로 막은 가운데 빈 공간
밖에서 본 베드로의 집 터
가버나움 유적지
30 가버나움 나훔의 마을.pdf 3.40MB
왜 하필 가버나움이었을까?
‘가버나움’은 ‘나훔의 마을’,
즉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시점과 장소가 나온다. 시점은 침례 요한이 잡혔을 때이고, 장소는 가버나움이다(11-12절). 예수님이 공생애의 대부분을 사셨던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서쪽 5km 지점에 있는 성읍이다. 그 당시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세관도 있는 큰 성읍이었던 이곳은(마 8:5-9;막 2:14), 어업이 번창하였고 동방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동서 상업로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이곳을 통과할 때에는 통행세를 지불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갈릴리 지역에는 많은 이방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어 정치, 종교적으로 소외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수많은 마을 가운데 다른 곳도 아닌 가버나움에서 사셨던 것일까? 이스라엘에는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가버나움보다 훨씬 중요한 성읍이 많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이나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 그리고 헤브론, 벧엘, 브엘세바 등과 같은 곳들이 아닌, 하필이면 이방인의 성읍인 가버나움에서 사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14-16절).
하나님의 뜻은, 이방(소외)과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빛을 선물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 빛’이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요 1:9)가 그곳에 머물기 원하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또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곳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셨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원대로 거처를 정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갈 때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또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곳에는 그분의 영광과 평화도 함께 임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이 땅은 평화를 선물로 받게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평가하였다(삼상 15:22-23).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인들에게 남긴 유산 가운데 코어(core)는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세우기’인 것 같다. 그 결과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그 가치가 녹아 있는 삶의 현장은 ‘자기 멋대로’가 판을 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가장 큰 장애물인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에서 소멸시킨다.
그렇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시대 상황이 있다. 사사 시대에 만연하였던 현상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 21:25). 그렇게 행한 결과 이스라엘 땅에는 역사상 가장 추악한 죄악들이 범람하였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어느 모로 보나 닮아 있다. 이런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길은 가버나움에서 사셨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처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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