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라 사 광인 | [신약관통20] 거라사 광인, 2000마리 돼지떼의 비밀! | 역사드라마로 읽는 성경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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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5:1-20,거라사 광인 – 다음블로그

거라사 광인을 고치심 (막5:1-20) 1. 사건의 배경(5:1) 막 5:1에 언급된 배경은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동편) 지역이지만 인종적으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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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7/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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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사인의 광인 – 수영로교회

본문 2-3절을 보면 그가 사는 곳은 무덤 사 …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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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1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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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난 사람들(2) 거라사의 광인 – Olive

성경은 이 갈릴리 동편지역을 가리켜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칭하였었다(마 4:15; 사 9:1).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이방인들과 이방문화로 가득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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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live.or.kr

Date Published: 9/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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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7 거라사의 광인 (마가복음 5:8-15) – 남가주사랑의교회

본문은 예수께서 거라사에 가셔서 군대 귀신들린 광인을 치유한 사건에 대한 말씀이다. 거라사는 이방인들만 거주하는 지역이였고 유대인들은 갈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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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arang.com

Date Published: 5/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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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지명사전:Gerasa / 거라사 – 한국컴퓨터선교회

거라사(Gerasa) …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그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시니 그 돼지들이 갈릴리 바다로 뛰어들어 몰살한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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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8/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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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路 새로운 삶 마가복음 14 _ 거라사 광인 – 주일예배설교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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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d1.kr

Date Published: 3/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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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과 정신 질환 – ‘거라사 광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 월드뷰

악령과 정신 질환 – ‘거라사 광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 월드뷰 04 APRIL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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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worldview.co.kr

Date Published: 1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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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관통20] 거라사 광인, 2000마리 돼지떼의 비밀!  | 역사드라마로 읽는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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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거라 사 광인

  • Author: 류모세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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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0. 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rVSr7-so5qE

마가복음5:1-20,거라사 광인

거라사 광인을 고치심

(막5:1-20)

1. 사건의 배경(5:1)

막 5:1에 언급된 배경은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동편) 지역이지만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거라사인들이 사는 이방지역이다. 이곳은 데가볼리 지역(20절) 중 하나로서 많은 돼지들을 치는 것으로 보아 유대지역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동쪽 변방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예수가 유대지역을 떠나 밤에 제자들과 함께 풍랑이 일어난 거친 갈릴리 바다를 항해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이방지역에서 ‘군대’ 귀신 들린 난폭한 광인을 구원하여 그로 하여금 복음 전파자로 삼으시기 위한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다 건너편의 거라사인의 지방은 예수께서 이방지역에서 사역한 최초의 장소로서 이 이적 사건을 통해 예수의 소문(복음)이 데가볼리 지역으로 퍼져가고 있음(막 5:20)을 마가는 언급하고 있다. 이점은 기독교 선교가 펼쳐질 시발점으로서 간주됨과 동시에 모든 이방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귀신들로부터 해방된 거라사인에게 복음 전파자로서의 사명이 주어진 모습은 기독교 선교의 한 모델로 소개될 수 있다(Starobinski 1971:382).

특히 본문에 묘사된 장면의 모든 것들(무덤, 돼지 떼들, 이방인들, 그리고 더러운 귀신들린 광인의 난폭한 모습)은 유대인에게는 정말 부정(不淨)한 것들로 온전한 유대인이라면 결코 이런 지역으로 들어섰을 리가 없고 또한 이곳에 왔다 할지라도 영접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어두움의 풍랑 가운데서 바다를 건너 이곳에 복음전파를 위해 의도적으로 오셨다(cf. 막 1:38; 3:27). 이곳에서 예수는 어두움의 세력, 불결한 세력(군대 귀신)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광적이고 파멸적인 한 사람(5:2-5)을 만난다. 특별히 독자에게 자세히 소개되는 거라사 광인의 처절한 모습(3-5절)은 사건의 중대성을 암시할 뿐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사건들(장면들)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다. 이 장면으로 인해 독자는 커다란 긴장 가운데 놓이게 된다.

2. 거라사 광인의 모습(막 5:3-5)

여기에 묘사된 거라사 광인은 ‘군대’ 귀신들린 사람으로서 하나님(예수) 없이 버려진 인간의 사회적이고 파멸적인 모습(버림받음과 유리함, 그리고 광란과 난폭함과 자학)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그의 모습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이 사람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잘 보여준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축출되고 격리되었고 무덤가에 거주하면서 벌거벗은 채 광란과 자학의 반사회적 행동을 하고 있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이 사람은 인간 편(마을사람들 편)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대의 정결법에 따라서 ‘부정(不淨)한 자’로 낙인이 찍힌 그는 동네에서 쫓겨나 무덤 가에 기거하였다. 더러운 ‘군대’ 귀신이 들린 이 사람은 너무나 난폭하였기 때문에 손과 발이 착고 되었고, 아무도 그를 통제할 수 없었으며,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 돌로 자신의 몸을 자학하며 살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분석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거처 : 무덤이나 산(3절)

더러운 귀신이 들려 마을로부터 축출을 당하여 무덤이나 산에서 기거하는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인생으로 죽음 같은 삶을 살아간다. 비록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무덤)의 죽은 자들(시체들)과 다름이 없다. 특히 돼지들에 대한 언급과 함께 묘사된 무덤 가에 기거하는 이 사람은 이사야에 따르면 우상을 숭배하는 불결한 백성으로 이해된다(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사 65:4).

제어할 수 없는 사람(3-4절)

모든 통제력과 사회성을 상실한 그는 어떠한 것으로서도 길들여 질 수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쇠고랑과 쇠사슬도…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4절).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없는 인생, 더러운 귀신들린 인생의 통제가 불가능한 파멸의 모습을 본다.

벌거벗은 채 처절한 자학의 사람(5절)

하나님 없이 사는 귀신들린 이 사람에게는 벌거벗음의 수치와 소외(버림받음)와 자기 번민과 소리 지름과 광란만 있다(5절). 정말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이며 또한 자기 자신도 혐오스러운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자학의 심도가 깊다.

이러한 사람이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고 있다(6절). 성경은 그가 어떻게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침묵하지만 아마도 들리는 풍문에 의해 예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특히 마가복음에서 귀신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예수의 신분과 그의 사역을 잘 알아보았다.

3. 귀신들의 반응과 예수의 사역(6-14절)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 올 때는(치유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무덤으로부터 나아온 이 사람은 치유를 위해서 자의로 나아 온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를 지배하고 있던 ‘군대’ 귀신이 이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나와 그를 통해 예수와 대면하였고 그들은 예수께 자신들을 멸망치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 군대 귀신의 간청은 그들이 이 곳에 머물게 해달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돼지 떼들 속에 들어가기를 청한다. 결국 예수의 허락에 의해 군대 귀신은 돼지 떼들 속에 들어가서 바다를 향해 달려가 그 속에 빠져 죽게 된다.

1) ‘군대’ 귀신과 돼지 떼의 몰사

먼저 자신에게 나아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본 더러운 귀신이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자 예수는 그에게 “너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그는 자신을 ‘군대’로 소개한다. 이 명칭은 6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로마군대 조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독자는 현재의 그의 광적 상황의 근원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즉 그의 광적 모습(3-5절)은 마치 그 안에 6000명의 군대가 거주하여 움직여 다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Lowry 1990:30). 거라사의 광인에게 거주하는 더러운 귀신은 ‘군대’ 귀신들로서 그들은 이 지방에 계속 머물기를 원한다. 결국 그들은 예수께 돼지 떼들(부정한 동물) 속에 들어가기를 간청하였고 이에 그들은 돼지 떼 속에 들어간 후에 비탈길로 내려가(혼돈의) 바다를 향해 달려감으로써 결국 바다 속에 빠져 죽게 된다. 물론 여기서 독자는 마가가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할 수 있다. 즉,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그들을 멸망시켜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돼지 떼의 익사가 귀신들의 미래적인 운명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적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돼지 떼를 몰살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군대 귀신과 그들의 운명(파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시도되어졌다.

첫 번째는 사회-정치적 해석(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로마의 군대의 추방[몰락])이고 두 번째는 영적-신학적 해석(출애굽 사건과 함께 사탄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전투 혹은 세례의 의미)이다.

독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사탄의 실제와 그 목적을 볼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의 미래의 운명(멸망)을 보게 된다. 사건의 장면들이 전환되어 가는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사건의 장면은 거라사인의 지방(이방지역) ―〉 더러운 귀신 -> 더러운 무덤 가 -> 더러운 돼지 떼 -> 바다(혼돈)으로 전환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탄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여 몰사된다. 결국 사탄의 목적은 돼지 떼의 죽음에서 보는 것처럼 멸망인 것이다(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요 10:10a).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사탄의 무력한 권세를 본다(cf. 막 3:27). 이들은 예수의 단순한 명령에 의해 쫓겨 나간다(8절). 그러나 아직 사탄의 완전한 멸망은 그 때가 아니다(때가 이르기 전에-마 8:29). 그러므로 예수는 귀신의 요구를 허락하고 있다(10-13절). 더러운 ‘군대’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의 운명은 미래의 사탄의 운명(cf. 눅 8:31; 계 20:1-3, 10)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군대’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들의 바다에 빠져 죽음은 홍해에 빠져 죽은 애굽 군대의 운명(출 14:28)과 같다(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출 15:4). 돼지 떼에 들어간 ‘군대’ 귀신이 바다에서 빠져 죽음의 모습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출애굽의 사건과 견줄 수 있다(Wefald 1995:15; Derrett 1979:7) 이것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는 일종의 출애굽의 사건으로 여겨진다. 마치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세례적 의미(cf. 고전 10:2)로도 이해할 수 있다(Johnson 1992:130). 그리고 귀신들과 돼지 떼의 죽음의 모습은 사 65:1-7에서 보여진 대로 이방인의 신들을 멸망시킨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 전파자로 만드신 것을 보여 준다(Wefald 1995:15-16).

4. 온전해진 거라사 광인(15절)

사람들만 아니라 쇠사슬과 쇠고랑도, 어떤 제도도 이 사람의 난폭과 광란을 제어할 수 없었으나 예수에 의해 거라사의 광인은 유순하고 온전하여 졌다. 본문에 나타난 그의 고침 받은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졌다.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15절).

사나움에서 온순함으로, 벌거벗음에서 옷을 입고 수치가 가려짐으로, 그리고 광란과 발작의 행동에서 평온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그가 온전하여짐을 잘 대변해 준다. ‘군대’ 귀신이 쫓겨 나간 후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 있게”(15절)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거룩(정결)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게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온전하고 거룩한 사람이 된다.

이 사건을 통해서 독자는 예수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3:20)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

결국 예수는 세례요한의 말대로 “성령으로 세례(정결)를 주시는 분”이시다.

5. 두 가지 반응들(16-20절)

이 사건의 결론으로 보여진 두 가지 종류의 반응(예수를 떠나라고 간청하는 마을 사람들과 예수와 함께 있기를 간청한 고침 받은 광인)은 사람들이 구하는 종교적 추구란 어떤 모습이며 그리고 기독교가 추구하는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 마을 사람들 : 예수를 떠나시라고 간청함

우리는 여기서 고침 받은 이 사람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 참된 종교인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교훈 받는다. 마을사람들은 그 동안 마을의 고통거리였던 더러운 귀신들린 한 사람이 고침 받고 온전해진 모습을 보고 기뻐하기보다는 그들이 손해 본 것(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바다 속에 빠져 몰사함)만 바라봄으로써 두려움 가운데 예수를 떠나도록 간구한다.

마을 사람들은 더러운 ‘군대’ 귀신들을 마을에서 쫓아내신 예수를 따뜻하게 영접하고 모시는 것이 그들에게 진정한 축복이 되는 줄 알지 못한다. 오히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더 큰 골칫거리로 생각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종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추구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가시떨기 밭과 같은 자들로 그들의 관심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인해'(막 4:19) 신앙으로 나아 오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를 떠나시도록 간구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세속적 삶에 안주하고자 한다. 이들은 과연 ‘귀신들린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16절) 사이에서 어느 것을 더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을까? 이처럼 예수의 현존하심이 그들의 사회(삶)에 큰 도전이 되어졌을 때에 그들은 변화와 개혁의 길로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예수(혹은 의로운 사람들)를 떠나게 하거나 제거해 버린다. 이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는 대로 세상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사회적 더러움(부패)을 청산하는 정결과 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돼지들이나 더러운 군대 귀신들의 현존이 그들에게 세상적 부를 안겨 준다면 고통 당하는 한 사람의 온전함과 마을의 정결(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는 세상이 오늘의 세상이다. 이것은 썩은 고기들(불결)을 즐기는 까마귀의 삶과 같다. 이점에 있어서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2) 고침 받은 거라사 광인: 함께 있기를 구함(cf. 막 3:14)

고침 받은 거라사의 광인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게 되어서 이제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 학대와 광란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서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사람(복음 전파자)이 되었다. 거라사의 광인은 이제 절제하고 유순하며, 온전한 삶을 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는 옥토와 같은 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와 회복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보는 대로 오히려 예수는 우리를 위해 광인처럼 벌거벗겨진 채 수치를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심(막 15:16-20)으로써 우리의 속죄양이 되셨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친히 수치와 조롱과 더러움(저주받음)에 내어버림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결국 고침 받은 이 광인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사람은 이방인을 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비록 제자가 되는 첫 번째 과제인 ‘예수님과 함께 함’은 거절되었지만 두 번째 과제인 ‘보냄을 받음’의 명령이 주어진다(막 3:14). 우리는 여기서 단순한 ‘이적 베푸심(고치심)’이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한 ‘복음전파’가 그 목적(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전파하니 – 막 1:38)인 것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독자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이방의 땅에서 악(더러움)을 제거하고 새로운 환경(자비와 제자도의 환경)을 창출하심을 본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게 된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에 의해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분이시다. 더러운 귀신들린 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는 사나운 풍랑이 일고 어두움이 깔려 있는 바다를 건너오신 분이시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은 배척과 수난을 당하신 분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오히려 자신을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친히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조롱과 모멸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정결의 원천(정결의 샘)이 되셨다. 오직 더러움으로부터의 정결은 속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데 예수는 우리의 속죄 제물(10:45; 14:24)이 되셨다.

무덤 가에서 소리지르는 거라사의 광인. 그는 더러운 ‘군대’ 귀신들에 의해 사나움과 광란과 자학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모습은 마치 더러운 ‘군대’가 그를 끌고 돌아다니는 모습과 같다. 6000명의 더러운 귀신들로 구성된 군대가 그의 내면 속에서 활동하며 그를 이리 저리로 끌고 다니는 모습은 사단에 시달리는 인간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러한 그가 예수를 만나 구원 받았을 때 그는 정신이 온전해 지고 수치가 가려지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우리 역시도 이러한 모습 속에서 부름을 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이 사실을 망각하며 산다.

마을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귀신들린 자의 당한 것'(온전함)과 ‘돼지의 일'(몰사함)을 듣고 예수를 떠나도록 간청하는 이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가득한 이들. 다른 사람의 회복(구원)과 마을의 정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재물(기득권)의 손실에만 관심을 둔 사람들. 이들의 모습이 오늘의 한국 사회며 한국 교계의 현실은 아닌지…어쩌면 나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는 본문 앞에서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성경지명사전:Gerasa

고대 제라시는 헬라어로 거라사라 불리워 지는 길르앗 지방 언덕의 헬라 도시였다. 기원전 332년쯤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는 이후 로마에 점령당하여 로마의 속주 중 10대 도시(데카폴리스)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에서는 석기 및 청동기 시대의 층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3천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그리스 시대에 큰 도시로 성장한 제라시는 왕의 대로와, 기원 후 112년에 건설된 트라야나 노바 길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근처에 좋은 철광이 있었던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당대에 로마 제국 전체에서 아주 부유한 도시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기원전 103년에서 76년까지 이스라엘의 하스모니안 왕가에 의해 통치를 받기도 했던 고대의 거라사는 로마의 폼페이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기원 후 129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거라사의 번영은 서기 4∼7세기에 걸친 비잔틴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기독교를 공인했던 비잔틴 시대 에는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고, 약 300년 동안 거라사에도 15개가 넘는 대규모의 교회들이 세워졌다. 약 500여년 동안 트랜스 요르단의 문화와 상업을 이끌어 오던 거라사는 628년 페르시아의 침공과 635년 아랍의 공격을 받고 파괴되고 말았다. 발굴된 동전을 보면 774년까지 도시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잔틴 교회도 이 때까지는 그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8세기 중반에 있었던 대규모의 지진으로 인하여 웅대한 석조 건물들이 대부분 무너져 거라사의 영광은 모래와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아랍 시대 이후로는 이름도 제라시로 바뀌었다. 성경에는 ‘거라사인의 땅’ 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언급되었고, 예수께서 정신병자를 고쳐주신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태 4:25, 마가 5:20, 7:31의 배경이 되는 이곳은 예수님 당시에는 아마도 18,0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번성기 때의 제라쉬는 현재 발굴된 20만평 크기의 2배 이상이었을 것이다.

시젠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된 이래 192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 졌으며, 지금도 꾸준한 발굴 작업과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행히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흙속에 잘 보존되어 고고학자들의 복원작업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제라시에는 20만평이 넘는 넓은 언덕에 웅장한 석조건물 유적이 펼쳐져 있다. 성벽에는 모두 101개의 탑이 17-22m 간격으로 설치되었으며, 3m 두께의 성벽에는 모두 6개의 성문이 있었다. 성문은 납북에 각각 1개씩, 동서에 각각 2개씩 설계되었다. 도시의 중앙에 설치된 카르도는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길이가 800m에 이르고, 동서로는 2개의 거리가 수직으로 나있다. 동서남북의 교차로에는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타원형 광장이 펼쳐져 있으며, 광장에는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지하의 완벽한 하수도 시설과 두 개의 야외 원형 극장, 여러 신전들(제우스신전, 술과 포도주의 신-디오니소스를 위한 신전, 거라사의 수호여신 아데미(Artemis)를 위한 거대한 신전들)과 1천평이 넘는 대규모의 목욕탕이 두 개 발굴되었다.

또한 대형 경마장(Hippodrome)도 발굴되었는데 길이가 2백60m, 폭이 80m에 이르는 이 경마장은 대도시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규모이다. 남쪽 성문으로부터 400m 가량 떨어진 곳에는 한개의 이취가 세워져 있는데 하드리안 황제의 방문 이후에 세워진 하드리안 황제의 개선문으로 확인되었다.

과거 디오니소스 신전을 교회로 전환시킨 대성당(Cathedral)은 비잔틴 시대의 대표적인 교회이며, 대성당 뒤의 성 테오도르 교회와 529년에 세워진 성 조지 교회, 531년의 성 요한 교회, 533년에 세워진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 교회를 비롯해 15개 이상의 비잔틴 교회터도 발굴되어 있다.

9세기에 일부 아랍인들이 살았고 11세기에 그나마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1122년 십자군의 볼드윈 3세에 의해 파괴되었던 곳을 19세기에 이르러 한 탐험가에 의해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귀신들림과 축사(逐邪)

– 막 5,1-20(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치유: 마 8,28-34; 눅 8,26-39)을 중심으로 –

김지철(장신대:신약학 교수)

복음서기자들은 인간에게 귀신이 들리게 하는 힘, 또는 인격으로서 귀신의 존재를 보도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귀신을 축출하는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사역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한다. 곧 귀신축출 사건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기적사건들 가운데 결정적인 사건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예수에게서 귀신축출 사건은 병치유와 더불어 예수의 치유 기적사건 가운데 한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 양자는 종종 서로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별개의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귀신축출이란 성경에서 보면 사탄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예수의 몸을 통해 드러났다고 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구체적인 모습이 예수의 행위를 통해 드러남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주는 징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한 이야기(거라사 귀신들린 자: 막 5,1-20)를 통해서 예수의 귀신축출 사건을 살펴보려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축사자로서의 예수의 모습과 귀신들린 자, 그리고 귀신들과의 관계성을 검토해 보려 하는 것이다. 먼저 용어풀이와 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흐름을 살펴보고 우리의 본문을 중심으로 석의적 분석을 기초로 하여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에 관련된 몇가지 신학적/목회적인 결론을 맺고자 한다.

I. 관련 용어 이해: 사탄(마귀)과 귀신들

1. 마귀( )/사탄 : 히브리어어의 사탄(욥 1,6-8.12.2,1-7; 슥 3,1.2 등)은 LXX 역에서 마귀( )로 번역된다. 신약에서 보면 사탄은 36 번, 마귀는 34 번 등장하고 있다. 두 어휘 모두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 사도행전 계시록등에 나타난다. 많은 경위 이 두 어휘는 서로 동의어로 혼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수의 광야 시험 장면인 막 1,13에서는 사탄( )으로 나타나나, 그 병행구인 마 4,1/눅 4,2에서는 마귀( )로 언급되고 있다. 계시록에서는 둘 다 혼용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실제로 용어사용에 있어서 마귀와 사탄은 의미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마 4,1 병행; 눅 4,2; 참조 막 1,13; 요 13,2.27; 눅 22,3).

마귀(눅 8,12)/사탄(막 4,5)은 우선 ‘악한 자’로 이해된다( : 마 5,37, 13,19.38; 요 17,15(참조 엡 6,11.16; 살후 3,3; 요일 2,13-14; 3,8.12; 5,18-19). 그리고 유혹자(마 4,3), 원수( 마 13,39; 눅 10,19),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 이 세상의 통치자(요 12,31; 14,30; 16,11), 벨리알(고후 6,15), 바알세불(막 3,22 병행)로 불리우기도 한다.

사탄이 하는 일은 주로 사람들을 고소하고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유혹자로 등장한다(대하 21,1; 욥 1,6-2,7; 시 108,6(LXX); 슥 3,1-2; 마 4,3; 눅 22,31: 사단이 밀까브르듯 한다; 막 4,15; 8,33: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이에서 더 나아가 예수의 적대자(마 4,1-11; 병행 눅 4,1-13),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마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 귀신들의 우두머리로(마 9,34; 12,

24.26; 25,41: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가는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나, 요한의 경우는 6,70; 8,44; 13,2에서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귀와 사탄이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용어로 나타나고 있다( 참조 마 4,1.5.8.11과 4,10; 막 4,15; 눅 8,12; 13,16).

2. 귀신들( ) : 마귀/사탄과는 달리 귀신은 자주 복수형태로 등장한다. 신약의 경우 63번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 53번이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다. 곧 마태복음(11 번), 마가복음(13 번), 누가복음(23 번), 요한복음(6 번)에 나타난다. 귀신들은 종종 ‘더러운 영들'(막 1,23.26.27; 3,11), 또는 ‘악한 영들'(눅 7,21), ‘벙어리 영'(막 9,17), ‘벙어리되고 귀머거리된 영'(막 9,25), ‘병약함의 영들'(눅 13,11), ‘귀신들의 영들'(계 16,13.14)로 불리운다. 눅 8,2에서는 ‘악하고 병약한 영들’과 ‘일곱 귀신들’이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단지 ‘영들’만으로 귀신들을 표현하기도 한다(마 8,16; 눅 10,20; 행 23,8.9). 때로는 레기온(막 5,9; 눅 8,30: 군대/많다)이라는 말을 통해서 귀신들의 숫자가 많음을 표시하기도 한다.

귀신은 주로 사람 안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아프게 하며 병들게 한다. 이에 예수는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 ). 예수의 제자들 또한 예수처럼 귀신들보다 더 강한 영의 능력을 받아 축사를 행한다.

3. ‘귀신들리다'( ): 이 동사는 신약 복음서에서 13 번 등장한다. 마태복음에 7번, 마가복음에 4번, 그리고 누가와 요한복음에 각각 한번씩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이 그 안에 머무는 귀신에 의해 질병상태에 놓이는 것을 가리킨다.

요 10,21.22에 의하면 이’귀신들리다’라는 말은 ‘귀신을 지니고 있다’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 15,22에서는 단순히 귀신들림이 아니라, ‘귀신들려 고통 당하다’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곧 인간의 몸과 마음에 지니고 있는 질병의 근거가 귀신들에게 온 것을 말해 준다.

4. 귀신들의 장소와 시간 : 귀신들이 머무는 곳은 광야(눅 8,29: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마 12,43 병행; 눅 11,24 참조 막 1,12.13 병행), 파괴된 곳(계 18,2), 무덤(마 8,28 병행; 막 5,2; 막 5,3 병행; 눅 8,27; 막 5,5)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에 대한 적대자 곧 귀신들이 갇힐 곳은 무저갱(눅 8,31; 계 9,1; 20,1-3 참조 롬 10,7)으로 나타난다. 귀신들이 또한 머무는 곳으로 불과 물, 공중이 나타나기도 한다(9,22; 참조: 마 17,15. 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하는 수단(계 20,9; 참조 눅 9,54); 물: 귀신들의 요소다(계 12,15.16; 13,1; 참조 막 5,1-13 병행, 공중권세를 잡은 자(엡 2,2)).

귀신이 활동하는 시간은 주로 밤이다. 밤이란 신적인 계시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악한 영들, 죽음의 영이 일하는 시간으로 나타난다(눅 12,20; 참조 행 20,7-9). 예를 들어, 베드로가 고기낚기를 실패하는 때도 밤으로 나타나며(눅 5,5-7; 요 21,3-6), 예수가 배반을 당하는 때도 밤이다(요 13,30; 고전 11,23), 밤에 체포당한다(참조 눅 22,53; 예수의 예언: “밤에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마 26,31; 26,34 병행 막 14,30). 귀신들은 곧 어두움을 가져오는 존재이다(계 16,10). 따라서 예수가 다시 오시는 종말의 때란 더 이상 밤이 없는 빛의 자리이다(계 21,25; 22,5).

II. 사탄과 귀신들의 역할

사탄은 첫 장조에서 인간을 유혹했던 뱀과 동일시되고 있으며(계 12,9; 20,2; 참조 창 3,1-15), 하나님과 적대하는 능력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로 등장한다(막 3,23-26; 마 12,26/눅 11,18). 사탄의 영역은 어둠의 세계이다(행 26,18; 고후 11,14). 질병과 파괴의 영들이 그에게 복종한다(눅 13,16; 고후 12,7; 살전 2,18; 딤전 1,20).

사탄/마귀는 곧 인간을 적대하는 자로서(삼상 29,4; 왕상 5,18 등), 초월적인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고소하는 자로 나타난다(욥 1,6-12; 2,1-7; 슥 3,1.2; 대하 21,1(LXX ). 또한 사탄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원수로 나타나므로 마귀의 세계는 하늘의 세계와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 귀신들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다. 귀신들은 말하자면 그의 졸개들이라고 할 수 있다(마 25,41; 계 12,7.9).마귀는 곧 질병과 죽음을 가져오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이다(행 10,38; 참조 고후 12,7-9; 히 2,14; 참조 레 20,10.13.14).

마귀는 인간을 죽음과 질병에로 몰고 갈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을 유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교하게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불순종하게 하기도 한다(마 4,1.5.11 병행; 눅 4,2.3.6.13; 계 2,10; 12,9; 20,10). 예를 들면, 마귀는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서 곧 잡초를 밭 가운데 뿌릴 뿐 아니라(마 13,39), 하나님의 말씀의 선한 씨앗을 도둑질하기도 한다(눅 8,12). 또한 인간에게 올무를 놓고(딤전 3,7; 딤후 2,26), 인간을 죄에 빠뜨릴 뿐 아니라(요 8,44; 요일 3,8), 처음부터 살인자이고, 거짓말쟁이고, 죄인이다. 유다에게 반역하게 만들 뿐아니라(요 13,2), 인간을 교만하게하고(딤전 3,6), 형제를 미워하게 한다(요일 3,8). 따라서 모든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마귀의 자녀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다(요 8,44; 행 13,10; 요일 3,8.10). 사탄은 죄와 사악함의 시조인 것이다(막 4,15; 눅 22,3 병행; 요 13,27; 행 5,3; 딤전 5,15).

그러나 이러한 마귀의 사역은 일정한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계 12,12).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마귀는 천년동안 갇히울 것이다(계 20,2). 그리고 결정적인 마지막 전투 후에(계 20,10), 또는 마지막 심판 후에(마 25,41), 마귀는 영원한 불에 던지워 멸망당할 것이다(마 25,41; 계 20,10).

그러나 사실은 마귀의 다스림의 세계는 이미 무너졌다(참조 요 12,31; 14,30; 16,11). 예수께서 이미 마귀의 일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요일 3,8). 예수께서 귀신을 내 쫓음은 곧 마귀의 세계가 종말을 고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도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마 12,28 병행; 눅 11,20).

III. 귀신들림과 예수의 귀신축출

1. 귀신들림이란 인간 안에 들어온 귀신들이 그 인간을 육적으로 영적으로 괴롭히며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예: 삼상 16,14-23: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사울)를 번뇌케 한다). 성경은 귀신들린 사람을 ‘귀신을 지녔다’고도 말한다( : 눅 4,33; 마 11,18 병행; 눅 7,33: 세례요한; 예수에 대해서 요 7,20; 8,48.49.52; 10,20). 그러나 귀신들은 사람에게 ‘들어가기도’ 하며( : 눅 8,30; 막 5,12.13; 눅 8,32.33). 능력있는 말씀에 의해 그에게서 ‘떠나기도’ 한다( : 막 1,26 병행; 눅 4,35; 4,41; 8,2; 마 8,32 병행; 막 5,13/눅 8,33; 8,35.38; 막 7,29.30; 마 17,18; 눅 11,14). 예수를 만난 귀신들이 떠나기 전에 귀신들린 자에게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마 1,21-28; 5,1-20; 7,24-30; 9,14-29 등). 이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곧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지니고 있음으로(막 1,24; 3,11; 참조 행 16,17) 그들이 영적 존재임을 알려준다(귀신들림의 구체적인 현상은 III. 3. 또는 IV. 3. 을 참조할 것)

2. 마가복음에는 네 개의 중심적인 귀신축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막 1,21-28; 5,1-20; 7,24-30; 9,14-29). 그러나 그 외에도 짧은 보고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마 9,32-34; 12,22(눅 11,14); 막 1,32-34.39; 3,7-12등). 귀신축출 이야기에 나타난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근거없는 자들로, 사회의 변두리에 쫓겨난 사람들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행동이나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반드시 모든 사람이 다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귀신축출 사건(막 1,21-28)을 보면, 그 사람은 유대 사회의 중심흐름에 놓여 있는 사람이며, 그의 공동체에서 종교적인 생활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귀신들린 아이의 경우도 그 아이는 그의 가족과 함께 있었고 그 아버지와 함께 예수의 제자들을 보기 위하여 동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막 9,14-29). 경제적으로도 그 당시 사람들의 평균수준보다 오히려 낳은 상태에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경우도 가정에 머물고 있었으며(막 7,24-30), 그녀는 딸을 집밖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딸이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고, 집을 떠나기에는 너무 그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가정에서 그와 같은 딸을 돌보았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가정이 부유한 가정이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막 5,1-20)는 버려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무덤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의 변두리마져도 그를 용납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그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어, 성전에 들어가거나 예배에 참여하거나 종교적 식사에 참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이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 귀신이 매우 폭력적이어서 이웃과 공동체의 자리가 그를 유리시킬 수밖에 없는 파괴적인 존재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에 언급된 대로 귀신들림이 혼돈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은 때때로 그가 자신의 상황에 전혀 반대되는 성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귀신들은 영적인 적대자를 직면했을 때 그 자신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쨋든 귀신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적대적인 사역이 예수에 의해 거부됨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

1) 축사자로서의 예수:

예수는 당시 유대적인 세계관과 같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곧 마지막 시대에 마귀와 그 세력들은 다 제거되어질 것이라는 유대 종말론의 한 단면을 가지고 계셨다(1 QS 3,24.25; 4,20-22; 1 QH 3,18; 1 QM 1,10.11 등).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귀신축출과 병치유는 말하자면 바로 이러한 유대 종말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 또한 그것을 보여준다(마 11,4-6 병행; 눅 7,22.23). 다시 말하면 예수의 병치유와 그에 따른 귀신 축출은 구약 예언적 말씀에 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참조 사 29,18.19; 35,5.6; 61,1). 이를 통해 예수는 자신의 종말론적인 자기 인식과 그의 축사행위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 특히 귀신축출에 대한 종합보고인 마 12,43-45(병행; 눅 11,24-26)을 보면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서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고소를 당한다(막 3,22; 마 9,34; 12,24; 눅 11,20). 이것은 말하자면 예수가 축사자로 나타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적대자들의 그러한 비난을 예수는 거절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축사자였다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고 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성령/하나님의 손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마 12,28; 눅 11,20)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가 헤롯을 향해 자기의 사명과 운명을 언급한 구절인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눅 13,32) 는 말씀은 바로 예수가 축사자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축사자 예수의 이름을 빌어 축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막 9,38 병행 눅 9,49) 그러한 명성에 걸맞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축사능력은 그의 제자들(70인)에게도 전수되고 있다. 그들은 예수 앞에 나아와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라고 기뻐하며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축사자의 권위는 이미 제자들을 선택할 때 부여된 것으로 마가는 보도하고 있다. 마가에 의하면(3,14)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는 예수와 더불어 함께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이다. 특히 제자 파송에서 그들의 역할은 첫째는 말씀 선포였고, 둘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었다. 즉 예수는 제자들에게 축사의 권위를 부여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축사를 행하는 권위의 전승은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제자들의 사

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바울도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고 축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 귀신축출의 과정: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

귀신들린 자에 대한 예수의 치유는 대체적으로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는 축사행위로 이루어진다(마 15,21-28 병행; 막 7,24-30; 막 1,23-28 병행; 눅 4,33-37; 막 5,1-20 병행; 9,14-29 병행). 예수는 축사행위를 통해서 육체적인 질병도 치유했다. 예를 들면 맹인의 고침(마 12,22-24; 막 10,46-52 병행; 2,1-12 병행), 벙어리(마 9,32.33 병행; 눅 11,14; 참조 막 9,14-29 병행), 중풍병(막 2,1-12 병행; 눅 13,10-17), 문둥병(막 1,40-45 병행; 눅 17,11-19), 열병(막 1,29-31 병행)의 치유등이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축사의 특징은 귀신에 대한 꾸중과 위협이다( 마가 1,25 병행; 눅 4,35; 막 3,12 병행; 9,25 병행; 눅 4,39 등). 그 외에도 침을 바르는 것(막 7,31-37; 8,22-26; 요 9,6.7). 안수하는 것(마 8,15 병행; 막 1,31; 마 9,29 병행; 20,34; 막 7,32.33; 8,22-26; 참조 막 5,41 병행)도 병행된다.

여기서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축사자로서의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귀신축출의 과정을 살펴보면,

a.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막 1,23: 귀신들린 사람의 소리지름)

b. 귀신(들린 자)의 응답: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막 1,24)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 5,7)

c. 예수의 침묵명령: “잠잠하라”(막 1,25)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1,25; 5,8; 9,25).

이는 축사행위에 있어서 하나의 도식이라 할 수 있다. 그 중간에 귀신을 향한 예수의 물음이 나타난다. “네 이름이 무엇인가?”(막 5,9). 이름을 질문함으로 귀신을 무장해제 시킨다. 막 9,21-22에서는 예수가 귀신들린 아이의 질병 과정을 묻는다(“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d. 예수가 귀신으로 하여금 다시 귀신들렸던 자에게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명령함(참조 마 12,43-45; 병행; 눅 11,24-26).

e. 귀신들이 예수에게 관용을 요청함(막 5,10-12: 돼지에게로 들어가기 원함).

f. 예수가 귀신들로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막 5,13).

g. 귀신들린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다(막 5,15).

h. 목격자들의 두려움과 놀라움(막 1,27: “다 노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이 과정에서 귀신의 폭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소리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함/ 돼지를 물에 빠뜨림(막 5,4-5/11-13),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함(막 1,26; 9,26).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병치유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예수와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닌 멀리있는 사람이 귀신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신을 쫓아낸 경우도 있다(막 7,24-30: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는 사실이다.

3) 귀신축출의 수단: 예수의 말씀으로 귀신을 내 쫓기도 하시며(막 1,25; 9,25), 하나님의 영/손가락으로 내쫓기도 하시고(마 12,28; 눅 11,20), 자기 권위로 내쫓기도 하신다(막 9,25: 내가 네게 명령한다). 특히 성령을 통해 나타난 귀신축출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오심을 의미한다(막 3,22-27 마 9,32-34; 12,22-30; 눅 11,14-23). 따라서 축사행위는 단지 하나님 나라의 준비나 도래의 표지라기 보다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뜻한다. 강한 자의 비유는 그것을 말해준다(마 12,29; 막 3,27; 눅 11,21-22). 예수는 그의 축사행위에서 사탄의 능력을 박탈하고 구속한 것을 의미한다. 귀신축출 자체가 바로 메시야적 행위라는 것이다. 귀신축출은 사탄을 가두는 첫 단계이고, 마지막 심판에서 궁극적 승리가 나타날 것이라(마 13,30: 추수 때)는 말씀이다.

IV. 복음서와 원시기독교회에 나타난 귀신축출 보고의 특성

1. 마태복음: 사탄과 마귀의 이름이 서로 호환되고 있지만(4,10; 12,26; 16,23), 마귀라는 이름을 보다 선호(4,1.5.8.11; 13,39; 25,41)한다. 마태는 사탄의 유혹자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킨다(4,13).

마태는 예수의 축사의 역할을 마가복음보다는 축소시킨다. 예를 들면 막 1,21-28의 가버나움에서의 귀신축출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마 8,24-34에 이르기까지 축사의 이야기를 담지 않고 있다(요약보고에서만 취급: 마 4,24). 그러나 마태에게서도 귀신축출의 행위는 예수의 중요한 계시행위였다(마 12,22-30). 마 9,32-34(벙어리 귀신의 축사: 눅 11,14)에서 축사는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야적 행위로 이해된다(사 42,7.16; 29,18; 35,5; 42,18-20; 43,8; 61,1(LXX)). 예수의 축사행위를 통해서 종말에 나타날 귀신들의 고통이 이미 시작됐음을 알고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는가?”라고 예수에게 묻고 있다(마 8,29). 이에 예수는 다만 귀신들을 향해 “나가라”(마 8,32)고 명령하신다. 마태에서는 예수가 기름이나 침이 아니라, 말씀으로 축사를 행하신다(마 8,16).

2. 마가복음: 마가는 곧 예수의 공적인 첫 번째 행위가 귀신축출임을 명백히 한다. 마가복음의 13 개의 치유이야기에서 가장 큰 범주는 축사(1,21-28; 5,1-20; 7,24-30; 9,14-29)인 것이다. 마가는 곧 예수의 사역의 요약보고에서 그의 귀신축출의 모습을 언급하므로 예수의 귀신축출이 그의 사역에서 지닌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1,32-34; 3,11-12).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사탄의 중요한 역할은 예수를 그의 선교적 사명에서 빗나가게 하는 일이었다(막 1,13: 광야시험; 8,33: 베드로의 간청을 사탄의 요구로 이해). 만약 마가가 씨뿌리는 자를(4,3.14) 예수로 이해했다면, 사탄은 예수의 사역을 파괴하는 자로 이해한 것이다(4,15). 마가는 귀신이라는 단어를 13 번, 더러운 영이라는 단어를 11 번 사용한다. 때로는 둘을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한다(참조 3,22.30; 7,25-26). 귀신들이라는 용어는 축사의 문맥에서만 사용된다(1,34.39; 3,15). 귀신들은 사람들에게 하는 일은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소리지르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26). 귀신들은 곧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자로서, 자해하는 자로 묘사(5,3-5; 9,22)되고 있다. 곧 사람을 땅에 넘어지게 하며 입에 거품을 물게 하고 이를 갈게 한다(9,18). 그러나 귀신은 동물에게도 들어갈 수 있는 존재(5,11-13)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수가 귀신을 내쫓을 때에 예수가 사용한 동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꾸짖다'( : 막 1,25; 3,12; 9,25), ‘입막음하다'( : 1,25-26), ‘명령하다'( : 9,25: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명령하다)는 동사를 통해 귀신의 사역을 제어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1,27; 2,7; 4,41; 6,1-6.14-16.49-50.54; 8,27-28)에 대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들 중에 귀신들도 중요 역할을 담당한다(1,24-25.34; 3,11-12; 5,7)고 말한다. 이러한 고백은 마가복음서의 시작에서부터(막 1,1), 예수의 세례받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1,11), 그리고 적대자들(대제사장)과(14,61) 이방 백부장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지속됨을 보여준다(15,39). 이러한 사실을 통해 마가는 그의 예수상을 제시하려 한다.

3. 누가복음: 광야유혹 이야기에서 누가는 마귀가 ‘잠시동안 그를 떠났다'(4,13)라고 보고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적대자가 다시 등장할 것을 기다리게 한다. 그렇다고 귀신들의 역사가 가롯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갈 때까지 마귀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의 사역을 통해 귀신들과 투쟁하고 있다(4,33-37; 6,18; 7,21; 8,2.26-39; 9,37-43; 눅 10,17-18; 11,14; 13,11.32). 누가는 마가보다 더 분명하게 마귀가 원시기독교회에서도 적대자임을 말해준다(눅 8,11-12; 행 6,7; 13,5). 가장 결정적인 예수에 대한 적대는 가롯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를 배반하게 하는 것이다(눅 22,3-4). 그의 제자들도 항복하도록 만든다(눅 22,31-32: “사탄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사탄의 파괴적인 능력을 예수는 기도로서 승리한다. 또한 사탄은 제자들을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중에 70인 제자의 보고가 우리에게 흥미를 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계속해서 예수의 말씀 곧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는 말씀을 통해 사탄의 종말론적인 멸망이 예수의 사역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행전에서 보다 명백하게 보여진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는 성령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축사는 곧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4. 요한복음: 놀랍게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이 행하는 축사의 모습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요한복음 기자가 귀신이라는 용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귀신들렸다(7,20: 8,48.49.52)고 비난받고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7,20: 이는 그가 미쳤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10,21-22).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마귀로 불리우고(6,70), 사탄이 곧 유다에게 들어갔다(13,2.27)고 말한다. 8,44에서는 마귀가 예수와 대조되고 있다(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짖말쟁이/거짓의 아비). 예수는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심판받고 무너질 것이다(12,23-36)고 말씀하신다.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공관복음서에서 사탄의 패배는 예수의 축사행위와 연관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사탄의 패배는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다(요 14,30; 16,11)는 점이다.

5.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축사: 예수는 제자들에게 축사를 가르치셨으나(마 10,8 병행, 눅 9,2; 막 3,15 병행; 6,13; 눅 10,17 등), 제자들이 행한 축사는 성공(눅 10,17)과 실패(막 9,18)가 엇갈리면서 나타나기도 한다. 원시기독교회에서 축사와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마 7,22; 막 16,17; 눅 10,17; 행 3,6.16; 4,7.10.30; 16,18). 치유하는 기도(참조 행 9,40; 28,8)와 제의적인 기름부음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도 했다(약 5,14). 또 안수를 행하거나(행 9,12.17; 28,8), 손을 붙잡거나(행 3,7; 참조 9,14). 전체 몸을 만지는 행위도 나타난다(행 20,10: 유두고; 참조 왕상 17,21; 왕하 4,34). 베드로의 구원하는 그림자에 씌우는 경우(행 5,15), 바울의 수건(행 19,12)을 놓은 경우도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치유에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모든 세력을 지배하시는 주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마 28,18; 빌 2,9.10; 골 2,10.15 등). 우리는 또한 바울의 축사적인 기도를 알고 있다(고후 12,7-9).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바뀌고 있음을 보게된다.

V.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치유이야기(막 5,1-20 병행; 마 8,28-34; 눅 8,26-39).

1. 짜임새: 막 1,23-28이 유대 회당에서 행한 축사행위이라면, 막 5,1-20은 이방 거라사 지방 무덤가에서 행한 축사행위이다. 이 본문은 그 짜임새가 아주 명확하게 구성되어 있다. 서론과 질병의 상태에 대한 언급(1-5 절), 예수님의 귀신과의 논쟁(6-13 절), 증거자들의 태도(14-17 절), 고침받은 자의 모습(18-20)이 차례로 나타난다. 여기서 몇가지의 주제들이 반복, 또는 중복되고 있다.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2. 6 절), 귀신들린 자가 무덤에 머무는 것에 대한 묘사(3. 5 절), 귀신들의 요청(10. 12 절), 갑자기 일어난 사건에 대한 목자들의 보고(14, 16 절)가 그러하다. 또한 이미 있은 일을 나중에 기록하는 방식의 언급도 있다. 예를 들면,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다(6), 예수가 추방명령을 내렸다(8), 귀신들린 자가 군대귀신 집혔던 자로 확인된다(15c), 도시로부터 온 증거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다시 보고한다(16 절: 돼지떼들의 일).

‘예수가 배에서 내려온 후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2 절)는 묘사와 ‘귀신들린 자가 그를 멀리서 보고 달려왔다'(6 절)는 언급이 서로 긴장 관계를 이루는 것 같기도 하나 양자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바다 건너편’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옴으로(4,35; 5,21; 6,45; 8,13) 여기서도(막 5,1) 그 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의 한 부분임을 암시한다. 그 표현 뒤에는 각각 기적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풍랑이 잠잠해지는 사건(4,35-41), 귀신들린 자의 귀신쫓아냄(5,1-20), 물위를 거니신 기적(6,45-52), 바리새인들의 표적 요청에 대한 대답을 하시면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막 8,13)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모습을 살펴본다면, 바다 건너편(1 절)으로 가서, 그곳에 도착하여(2 절: 배에서 내리다),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다시 배에 타는 것으로 되어 있다(18 절). 특히 18-20 절은 선교 신학적인 동기가 들어 있다.

귀신축출의 양식/동기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해 본다면,

1)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1-2 절)

2) 귀신의 방어시도(6-7 절)

3) 예수의 축출명령(8 절)

4) 귀신의 내쫓김(종종 시위적으로 묘사된다: 13 절)

5). 목격자들의 두려움(15.20 절)과 귀신축출에 대한 소식이 퍼짐(14a.18,20).

a. 질병의 특수성과 그 중증에 대한 묘사(지금까지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됨을 강조: 3-5 절)

b. 치유된 자에게 행한 치유에 대한 실증(15 절: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c. 목격자들의 두려움의 반응(14.16-17.20 절: “보고 두려워하더라.”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와 귀신과의 만남에서 드러난 대화와 그 결과를 보면, 예수는 a. 귀신의 이름을 묻는다(9 절). b. 귀신들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며 방어적인 요청을 한다(10-12 절). c. 이제 귀신들은 새로운 자리로 내쫓김(12-13 절)을 당한다.

2. 귀신축출과정의 구체적인 설명

1)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1-2 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1-2 절).

예수가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자 마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아와 예수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람은 더러운 영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더럽다'( )는 말은 유대 종교적인 용어이다. 즉 부정한 장소인 무덤에서 그가 나왔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무덤이란 바로 귀신들이 머무는 장소이기도 하다. 거라사라는 이방지역과 더불어 무덤이라는 장소에 대한 설명은 따라서 부정함의 극대화를 드러낸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인격의 대면이다. 곧( )이라는 말로서 어떤 긴장관계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즉 귀신들린 자의 부정한 영이 자기보다 강한 적대자를 만난 것 같은 낌새를 알아 이제 구체적인 도전적인 만남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2) 귀신의 방어적인 시도: 6 절의 도입부/7 절의 구체적인 시도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6-7 절).

귀신들린 자는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간청한다. 절하는 것은 예배하는 형태이다. 전적으로 복종적인 자세를 보인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방어한다. 그렇다면 6 절은 만남의 두 번째 단계인가? 여기에서 명백한 것은 예수의 우월성이 드러나고 귀신의 방어가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러운 영이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다. 이러한 귀신들의 큰 소리와 귀신들린 자의 큰 소리가 귀신축출의 설명가운데서 항상 반복되는 특성이다( : 소리지르다. 귀신들이 부르짖음: 막 5,5; 9,26; 눅 9,39). 소리지름 자체가 그가 영적인 인격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에게 방어양식을 들이댄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있는가?'(단수로 되어 있다). 이는 상대방을 거절하며 그 한계를 긋는 언어인 것이다.(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위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왕상 17,8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거라사인은 이방인으로서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그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방지역에서 더러운 귀신들에 의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나를 괴롭게하지 말라”는 간구에서 이미 예수의 힘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의 힘이란 귀신의 역할과는 다른 것임도 보여준다. 즉 귀신을 멸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이시다(1,24: 나를 멸하러 왔나이까?).

3) 예수의 축출명령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8 절).

즉 귀신의 방어적인 간구 이전에 이미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는 명령을 하셨다는 것이다(‘나오라’: ). 이는 꾸중이 담긴 전형적인 추방명령이다. 어디로 가라는 가에 대한 것은 불분명하다.

4) 귀신의 내쫓김의 진술

“허락하신 대로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13)

추방명령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즉 귀신들의 순종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복종했다. 여기에 축사자의 능력이 있다. 그 추방명령에 의해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간 것이다. 귀신들의 움직이는 모습, 즉 들어감과 나감은 성서에 구체적으로 진술되고 있다(참조 눅 22,3: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다).

5) 목격자의 반응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 하더라.”

거주자들이 일어난 사건을 보기 위하여 왔다. 그들은 예수에게 나와서 치유받은 자가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보았다. 그 치유의 모습은 명확하게 제시된다. 이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붙잡힌다. 이 두려움은 신현현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이해된다. 모든 보고를 들은 그들은 예수에게 그 지역을 떠날 것을 간청한다. 이 떠날 것에 대한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것이다(아니면, 소유자들이 계속적인 손해볼 것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18-20: 치유받은 자, 그리고 그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

이에 목격자의 두려움과 기적적인 행위의 소식이 널리 퍼졌다(목격자들의 반응: 15.17 절)

3. 귀신들림의 특성

1)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막 1,21-28)은 예측 불가능한 무질서함을 보여준다. 그가 회당에 참여한 것을 보면 보통 때는 유대 종교사회의 주요흐름에 동참했던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보이다. 어쩌면 영적인 적대자를 만났을 때에만 자기 고유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막 5,1-20). 그는 무덤, 곧 부정함의 장소에 그 거처를 두고 있다(3a). 그 질병은 광포함으로 나타난다(3-4).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묶어둘 수도 맬 수도 없었다. 그는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 이는 귀신의 광포함을 가리킨다. 그뿐만 아니라 밤과 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지르는 것이다(5). 통제할 수 없는 슬픔과 한 맺힘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덤이라는 장소와 그의 행동 모습이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돌로 상하게 하는 것이다(5). 이러한 자학은 자기 파괴적인 충동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이러한 전체적인 진술은 귀신들의 이름이 레기온으로 주어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막대한 힘을 가지고 모든 묶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 안에 2000 귀신이 거주한다면, 그는 무한한 힘을 사용할 것이다(이사야 65 장(LXX)은 귀신들림의 질병을 묘사하는 기본본문으로 이해됐다. 사 65 장에서 이방인들은 산에서 우상/귀신들에게 제사드리며(3 절), 무덤에서 사는 자들이고(4 절), 돼지고기를 먹는 자들이다). 산 사람과의 교제는 끊어지고 소외되고 상실된 인간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2) 귀신들은 인격적인 존재로 설명된다. 그들은 계시적인 비밀, 예를 들면 예수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알기에 예수로부터 침묵하도록 요청 받기도 한다(막 1,24.34 병행; 눅 4,34.41; 막 3,11; 5,7 병행). 귀신들린 자의 소리침은 곧 귀신들의 소리침으로 이해된다(참조 막 1,23 병행; 눅 4,33; 막 3,11; 5,5; 5,7 병행; 막 9,26 병행; 눅 9,39; 눅 4,41). 귀신은 귀신들린 자에게 경련을 일으킴으로 자기의 광포함을 드러내며, 귀신들린 자가 자기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막 1,26 병행; 눅 4,35; 8,29; 막 9,18.20 병행; 눅 9,39.42).

3) 축사의 과정

a. 이름을 물음: 9 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많은 귀신에 붙잡힌 것에 대한 표현이다. 9-12 절에서 단수와 복수가 계속적으로 뒤바뀐다. 내 이름은…우리가 많음이다. 우리를 돼지에게로… 막 1,24 에서는 단수와 복수가 혼용되어서 등장한다. 이는 인격적인 분열 때문인가? 아니면 속임수의 변명인가? 명백한 것은 예수가 오신 것은 사탄의 세력들을 멸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질문은 귀신에 대한 강압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b. 허용요구: 귀신들의 복종의 고백과 예수에 대한 요구가 함께 나타난다. 돼지떼가 바다로 빠진다(구약에서 바다란 종종 파멸의 자리이다). 결국은 귀신들이 그 파멸의 구덩이에 빠진 것을 의미한다.

c. 추방명령: 예수의 우월성과 귀신들의 종속성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있다. 예수의 추방명령은 다른 때의 예수의 부드러운 온유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 귀신에 대한 예수의 분노가 들어있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 13 절에서 귀신들의 나옴과 들어감이 묘사된다. 귀신들의 상하고 파괴하는 활동성을 드러난다. 광포와 자기 파괴적인 분노가 드러난다. 돼지떼에게 돌진하는 모습( )은 인간적인 판단에 의해서 조절되지 않는 격렬한 움직임을 뜻한다. 귀신들린 자의 광포가 돼지에게 전가되었고 곧 자기파괴가 명백히 드러났다. 귀신들린 자는 스스로 돌로 상해했으나, 돼지 떼는 언덕길로 내달아 물에 빠져 죽었다. 생명을 상하고 파괴하는 더러운 영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4) 귀신들림에서 치유

5,15b에서 3-5 절에서 보였던 광포한 모습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있다. 그는 예수 곁에 앉아있다. 소리지르고 스스로 상하게 하는 대신에 정신이 들어 있다. 광포대신에 이성으로 되돌아왔다( 은 의 반대개념이다). 그는 전에는 벌거벗고 돌아다녔으나, 이제는 옷을 입고 있다. 예수의 귀신축출은 귀신들린 자를 조용한, 그리고 이성적인 정신상태로 되돌려 보냈다. 예수는 그를 귀신들로부터 자유하게 했다.

VI.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반성

1. 예수가 축사자로서 활동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도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의 질병을 귀신에게로 돌렸다(더러운 영/ 더 악한 영: 마 12,43-45 병행; 눅 11,24-26; 벙어리 귀신: 눅 11,14; 벙어리의 영: 막 9,17.25; 연약함의 영: 눅 13,11; 참조 눅 8,2). 따라서 치유란 귀신을 쫓아내는 데 있었다(마 9,33; 10,8; 12,24.27.28; 막 1,34.39; 3,15.22; 6,13; 9,38; 16,9.17; 눅 9,49; 11,15.18-20; 13,32). 예수는 육체적인 연약함, 예를 들면 소경(눅 7,21; 마 12,22-24; 막 10,46-52 병행), 벙어리(막 9,14-29 병행; 마 9,32.33 병행; 눅 11,14), 중풍병(막 2,1-12 병행; 눅 13,10-17), 문둥병(막 1,40-45 병행; 눅 17,11-19), 열병(막 1,29-31 병행), 게다가 마음과 정신의 질병까지도 귀신을 내 쫓음으로 치유했던 것이다(막 1,23-28 병행; 눅 4,33-37; 막 5,1-20 병행; 7,24-30 병행; 9,14-29 병행). 말하자면 예수시대에 귀신을 축출하는 것과 질병을 고치는 것은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되었다(막 1,32-34 병행; 눅 6,18.19).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이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귀신들림과 정신질병, 또는 귀신과 육체적인 질병과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귀신들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광포함/자기상해 등의 귀신들림의 전형적인 모습과 정신질병과를 구분할 수 있는가?

2.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마 11,4-6 병행; 눅 7,22.23) 있어서 예수는 그의 치유를 구약의 성취로서 해석했다(참조 사 29,18.19; 35,5.6; 61,1). 유대주의의 종말론적인 기대가 귀신들에 대한 예수의 승리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막 3,27 병행; 참조 눅 13,32). 만약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손가락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라면(마 12,28a/눅 11,20a),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한 것이라(마 12,28b 병행; 눅 11,20b)는 말씀이다. 따라서 바알세불에 의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에 대해서 단호히 거절하신다(막 3,22 병행). 예수의 영을 잘못 이해하는 자는 곧 거룩한 성령에 대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짓는 것과 같다(막 3,28-30 병행)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축사는 마귀의 힘을 종말론적으로 제거했다는 표징이며, 동시에 마귀와 싸워 승리함으로 예수가 마지막 승리자가 됐다는 증거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이 쫓겨나가는 자리에는 항상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가장 구체적으로 세워지고 있는 자리를 어디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시대에도 인간을 개인적, 집단적으로 억압하며 파괴시키는 세력들을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축사적 행위를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3. 예수는 귀신적인 인간/음식의 불결함에 대해 결코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본질을 바꾸어 버렸다. 그는 친히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었고 질병들린 사람의 동무가 되심으로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함을 몸으로 보여주었다(마 9,10 병행; 막 2,16; 눅 5,30; 15,2; 행 10,1-11,18; 갈 2,11-14). 또한 귀신들린 자와 귀신과를 구별함으로써 귀신들린 자와 귀신을 동일시하며 귀신들린 자를 사회와 종교에서 영원히 제거하는 당시의 관습을 타파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종교사회의 판단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고, 한 인격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다시 가정과 종교적 사회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결/부정결에 대한 판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그 판단으로 사람들이 자유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억압받게 되는 것인가? 우리의 가정과 사회, 그리고 종교는 오히려 이러한 갈등과 억압을 증폭시키고 한 맺힘이나, 억압에 대한 저항적 세력화된 귀신들림을 만들고 있는 주범은 아닌가?

4. 예수는 축사행위를 할 때에 어떤 고정된 축사양식을 도입하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예를 들면, 의약품/기구/향료등), 또한 어떤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한 권위를 갖고 축사를 행한다(마 12,28; 눅 11,20).

그렇다면 오늘의 축사 행위는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 우리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가?

5. 예수의 축사행위 자체에만 관심가진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마 7,22-23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행위 없이 축사가 행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 없으면 그 성령의 은사가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고전 13,1-14,1). 따라서 예수의 축사사역에는 인간을 파괴하는 귀신들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인간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들어가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귀신축출의 목표는 귀신들린 자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가정과 종교에로의 회복, 그리고 또한 평화를 누리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 때문에, 그리고 인간을 파괴하는 사탄과 그의 세력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예수路 새로운 삶 마가복음 14 _ 거라사 광인 – 주일예배설교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 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 를 만나니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 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 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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