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 장 40 절 | 세상을 이기는 믿음 (히브리서 11:32-40)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190325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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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39-40 증거와 약속 2004. 9. 15.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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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 (히브리서 11:32-40)
아침예배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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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강) 히브리서 11:39-40 더 좋은 것

… 못하였으니”라는 말씀에서 이 사람들이란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 그것을 40절에서 ‘더 좋은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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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nlycross.net

Date Published: 1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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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 – 믿음

믿음.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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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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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히브리서 11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40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약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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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10/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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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강. 약속과 증거 (히 11:39-40) – 다음블로그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데 믿음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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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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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아니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 김재성의 느낌 ...

히브리서 11장 39~40절. 믿음은 완성되어 가는 것. 히브리서 11장은 노아·에녹·아브라함·야곱·모세·라합 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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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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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32-40절 말씀 묵상 [김경열 목사] – 복음뉴스

히브리서 11장 32-40절 말씀 묵상 [김경열 목사]. 복음뉴스 0 02.13 20:26. 본문말씀: 히11:32-40. 제 목: 세상이 감당치 못한 믿음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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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1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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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5(목) “히브리서 11:32-40” / 작성: 김광욱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장’이라고 불립니다.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면 … 이 사람들은’ 4절에서 38절까지 언급된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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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3/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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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결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믿음의 온전함(39~40절) …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설명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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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12/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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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39-40 증거와 약속

히브리서 11:39-40 증거와 약속 2004. 9. 15.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9절의 말씀을 보시면 믿음으로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옛 언약의 증인들, 즉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로 증거된 사람들이 증거는 받았지만 그 믿음의 실상인 약속된 것은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증거는 무엇이며 약속된 것은 무엇인지 또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방금 이 말씀, 증거와 약속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기는 합니다만 과연 성경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서도 설교를 합니다만 그 약속이란 것이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약속들만 말하고 듣기를 좋아한다면 성경과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내용을 다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또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라는 것이 약속입니다. 아직 보지는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는데 그 약속하신 것이 주어진다는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의 실체는 받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 실체를 받지 못한 것입니까?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새 언약의 완성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러 언약들이 나타납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하신 언약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는 새 언약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언약들이 결국 새 언약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데 그 새 언약의 실체에 대하여 증거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40절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더 좋은 것이란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는 이 수많은 증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그 어떤 인물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1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합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합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서 증거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 천국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몰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죄 사함을 받아야 가는 나라인데 예수님을 보고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증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데 그 증인들의 정점에 세례요한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더 큰 자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열리는 천국에서는 그를 믿고 천국의 백성이 된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세례요한 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성도들보다 신분이나 지위가 더 높아서 하늘에서 더 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신 그 언약의 완성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그 피를 그림자로 믿는 자들과 실체로 믿는 자들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 하에서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함을 이룬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같은 죄인이 오직 그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의 온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성령의 법에 소속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완성인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11장을 마무리하면서 구약에서 약속의 실체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 증거들만 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의 믿음으로 받은 증거들이 어떻게 약속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인지를 다시 보겠습니다. 그동안 개별적으로 보았습니다만 그것은 오늘은 전체를 한꺼번에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커다란 퍼즐이 있다고 합시다. 그 퍼즐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구약의 성도들이 퍼즐의 한 조각씩 맞추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성된 그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가만히 있다가 전체 퍼즐의 그림의 완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함을 극도로 드러낸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전체를 조감하고자 합니다. 올림픽에서 양궁을 보셨지요! 단체전에서 여러 선수들이 각자가 쏘는데 그 목표점은 한 곳입니다. 모두 한 과녁을 향하여 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약의 증인들이 퍼즐 한 조각을 든 사람이요, 화살 한 대를 목표를 향하여 쏜 것이 됩니다. 그 화살이 구약의 수천 년을 날아서 십자가라는 목표에 명중을 하는 것입니다.

아벨을 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제물과 제사가 함께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고서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로서 제사를 드리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증인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의 실체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4절을 봅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아 방주를 예비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믿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구원의 방주가 되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세상의 정죄에서 구원을 받고 의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방주는 모형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이 구원의 방주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고 말하는데 틀린 이야기입니다. 교회 나와서 죽도록 봉사, 충성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본향,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그 아들의 나라를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그 나라의 왕이요 주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이삭을 통하여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의 복인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 취향대로 축복하려고 하였으나 축복이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만 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원한다고, 달음박질 한다고 가는 곳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야망이 꺾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되는 것이 참된 복임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그 손을 어긋맞게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인간의 소원과 다름을 보이셨습니다. 오직 그의 약속대로만 주어지는 것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그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키실 때에 자기의 해골을 메고 나가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영광과 보물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나은 보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한 것의 모형과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습니다.

사사들과 선지자들을 다 말하자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칼날을 피하기도, 죽을 자를 부활로 받기도, 또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고, 희롱과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치는 것, 톱에 켜임, 궁핍과 환난과 학대, 이 모든 것들이 다 증거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퍼즐이 완성되고, 그들의 화살이 목표에 명중되고 보니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사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분명하게 완성된 그 약속을 받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그 약속의 증거물로 한 조각의 퍼즐을 가졌다면 우리는 완성된 그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구약의 증인들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회개할 일 외에 달리 없지 않습니까? 퍼즐 한 조각을 가지고 목숨을 버렸는데 우리는 완성된 그림을 들고서 다른 것을 기웃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1:20-22절입니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우리는 아멘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약속이 우리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사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주신 것은 구약의 그 어떤 증거물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면 될까요?

고린도후서 5:1-10절입니다. “봉독” 한마디로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거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하든지 떠나든지 누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약속의 실체를 성령의 보증으로 받은 사람들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9~40절 해석?

히브리서 11장

39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ㅡ> 40절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절의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히브리서 11

믿음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1)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ㄱ)네 2)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2강. 약속과 증거 (히 11:39-40)

22강. 약속과 증거 (히 11:39-40)

히 11: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글개역)

오늘 본문을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11장 강해가 끝을 맺게 되겠네요.

순서상으로 본다면 1장부터 차례로 강해를 해야 하지만 변칙적으로 11장부터 강해를 하게 된 것은 오늘 본문이 주는 의미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에서 신약을 내다보면서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구약의 엔딩 부분이라고 보시면 좋겠네요.

또 하나 히브리서 11장을 먼저 살펴 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상고한 후에 히브리서 1장에서 세상 마지막에 아들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 11장을 22번을 강해 해오면서 알게 된 것은 믿음이란 우리가 생각하던 믿음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알아온 믿음은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가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은 인간의 반응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반응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데 믿음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像)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證據)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뭐냐!

바라는 것의 실상(實像)입니다.

뭔가 있기는 있는데 지금은 안 보여요.

그래서 믿음이 뭔가 있기는 있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럼 뭔가 있기는 있는 것이 뭡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래서 믿음이 구약의 성도들을 장차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실 예수님을 보여 주려고 어떤 사건 속으로 밀어 넣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이 간섭한 사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행하실 사건을 미리 선취(先取)적으로 맛보게 되는 겁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믿음이 어떤 사건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장차 예수님이 당할 사건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말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의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말이 어렵지요.

여러분 사건은 우리가 의도해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예요.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이걸 신약에선 “때”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요.

하나님께서 우발적으로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이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의 뜻이나 계획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안 믿고 동의하건 안하건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데 우리에도 동의를 구하고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야! 노아야!

내가 지금 방주를 지어야 하거든 그러니 네가 날 좀 도와주렴!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냥 믿음이 야! 노아 이리와봐!

너! 지금부터 방주를 지어!

그러면 노아는 꼼짝 없이 방주는 짓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야! 모세야!

내 백성을 출애굽 시켜 그러면 그 자체가 능력이 되어서 밀어 붙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출애굽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 자체로 창조의 능력이므로 그 일을 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져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야! 사라야!

내가 지금 네 배를 좀 빌려서 아들을 하나 낳아야 하겠거든!

그러니 네 자궁을 좀 빌려 주렴!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야! 사라!

너! 명년 이맘때가 되면 네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면 사라는 늙었든 젊었든 상관치 않고 믿음이 죽은 나무와 같은 사라의 몸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기어코 낳고 만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라가 아니 ! 하나님!

하나님의 그 마음은 알겠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내 꼬라지를 좀 보고 말하세요.

내가 월경이 끊어진지가 언제인지나 알고나 말을 하십니까?

저기 저 옆집에 젊은 순이 한데 가서 부탁하세요.

순이는 지금 한창 젊었으니 아들을 순풍 순풍 잘 낳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 그렇구나!

나는 사라 네 몸이 그런 줄 몰랐구나!

미안하다!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 가시나가 말이 많다.

그냥 아들을 낳아!

내년 이맘때가 되면 아들을 낳을 것이야!

예!~에???

이게 믿음이예요.

이제 조금 이해가 되시는가요?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사라는 잉태 할 수 없는 몸인데도 아들을 낳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잉태 할 수 없는 몸이면 아들을 낳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잉태할 수 없는 몸인데도 믿음이 덮치니 아들을 낳더란 말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고, 믿음이 아들을 낳은 겁니다.

그러니 이삭은 사라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믿음이 낳은 자식인 겁니다.

이처럼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인간을 간섭하신 능력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령 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령이 성도를 거듭나게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 절 좀 거듭나게 해 주세요 한 적이 없잖아요.

어느 날 보니 거듭나 있는 겁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믿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신약에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 가시니 구약의 믿음과 같다고 볼 수가 있어요.

성령이 언제 우리를 찾아 와서!

야! 정 낙원이 내가 지금 너를 거듭나게 해야겠거든!

동의를 구하고 거듭나게 해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어느 순간 무작정 밀고 들어와서 우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다 처리해 버렸어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언제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줄 아세요.

아니에요.

이게 참 중요한 말인데!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믿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어요.

믿어진 것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성령이 쑥 들어와서 예수가 믿어지게 만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인 겁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도 알고 보면 내 믿음이 아니고 성령의 믿음인 셈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믿게 해준 성도의 구원은 취소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관리하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식언치 않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하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한번 야! 정낙원 목사 너! 천국에 가! 그러면 꼼짝없이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정낙원 목사를 천국에 보내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정낙원 목사의 행함과 상관없이 천국에 갈 수밖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정낙원 목사가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요.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죄인은 예수를 믿어 줄 수 있는 그런 종자들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니 믿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감사 밖에 할 것이 없어요.

성도는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천국에 가는 겁니다.

이건 마치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광야로 빼낸 것과 같아요.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인도하였다고 하잖아요.

물론 이스라엘은 독수리 날개에 업혀서 오지 않았어요.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 아슬아슬하게 쫓기듯 도망치고 걸어서 왔어요.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도 죽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라고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왔다고 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여기까지 온 것도 아슬아슬하게 왔어요.

솔직히 말해서 자진해서 예수 믿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이리저리 간섭을 해서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저도 마지못해서 목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가 싫다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된 것이 저의 바램에서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와 있는 것이 맞지요.

이걸 모르고 조용기 목사는 요한계시록 12장 설교를 하면서 광야 예비처를 인도 하실 때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간다고 하니 지금은 헬리콥터로 이동시켜 준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코메디 같은 말입니까?

이런 사람이 세계최고의 교회를 갖고 있어요.

아이러니하지요.

진짜 복음 전하는 목사들이 있는 교회는 교인 몇 명이 없어요.

참으로 이상하지요.

여러분 성경을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안돼요.

인간의 상식은 이미 죄로 오염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선 틀린 상식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으로 보면 조용기 목사와 같은 설교를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 대다수의 목사들이 조용기와 동일해요.

다 예수를 이용해서 입신양명(立身揚名) 하고 있는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먹고 사는 일로 예수를 믿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교회가 크든 작든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관심이 없는 목사들을 다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이정도면 믿음이 어떤 것인가 이해가 되시지요.

인간들이 성경을 오해(誤解)하는 것도 인간들의 사고방식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그러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 믿음을 이해를 하려고 해요.

그래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믿음을 풀이하고 내어 놓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善惡)의 법(法) 아래서 태어납니다.

선악(善惡)의 법은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결정을 하게 합니다.

선(善)이냐!

악(惡)이냐!

너! 오늘 선(善)으로 살래! 악(惡)으로 살래! 늘 결정을 하라고 해요.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으로 선하게 살았다 악하게 살았다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 앞에선 악(惡)일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악의 법 자체를 악(惡)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선악(善惡) 자체가 손등과 손바닥처럼 한 덩어리예요.

따로 따로가 아니에요.

선이 있는 곳에 악도 있고 악이 있는 곳엔 선도 있어요.

그러므로 선악의 법아래서 태어나는 인간에게선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판단하는 그 자체가 죄인 겁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가 뭔데 판단합니까?

죄로 물든 피조물이 판단 한다는 것 자체가 건방진 겁니다.

인간에게선 하나님이 원하는 선(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금 선악의 법아래 선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악의 법에 갇혀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기가 행하여야 하는 쪽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가 믿음도 내가 가지고 행사하여야 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주 예수를 믿으라!” 고 하십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하나님 “어떻게 믿을까요?” 라고 묻습니다.

이건 마치 자기가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 제가 믿겠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으라’ 라는 말은 우리가 결정해서 동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정하고 동의를 한다고 하여도 그건 선과 악이 주는 정보(情報)로 결정하고 동의하는 것이라서 이미 틀린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이성(理性)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 밖에서 일어난 일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너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했다고 합시다.

이는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잖아요.

이를 문자적인 의미를 그대로 풀이하면 구원을 받는데 우리 능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은 선악의 법이 작동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하고자 해요.

인간의 본능은 자기가 배제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에겐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면 자기가 믿겠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을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행사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지 않고 자기 행위로 남게 되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세요! 라고 하면 예! 알았습니다! 내가 믿지요.

내가 믿어 드리지요! 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인간의 것이 되지요.

그러면 인간들은 난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

넌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라는 식으로 구원을 챙기게 됩니다.

이게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 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만 선물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도 선물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것도 선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음으로 살게 해 주시지 않으면 믿음으로 살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정면으로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육신의 소욕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연관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인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도 선물이고,

그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것도 선물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도 선물이고,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선물입니다.

예수님과 연관된 모든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자랑하지 말란 말입니다.

난 교회 나왔다.

난 헌금 했다.

난 전도 했다.

난 교회 봉사와 충성을 했다.

난 복음을 안다.

난 이웃을 사랑한다.

이러지 말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행하는 것들입니다.

진짜 믿음을 받은 성도는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 진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사람을 의식하거나 남에게 자랑하고자 하지 않는 겁니다.

누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자기 안에 믿음이 이런 일들을 하게 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고 나서도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독자적으로 남을 사랑하고 베풀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에요.

무슨 일이든지 다 반대급부(反對給付)를 바라고 하게 되어 있어요.

반대급부(反對給付)란 자기 유익입니다.

인간은 자기 유익이 되지 않으면 꿈적하지 않아요.

그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교인들은 자기가 교회 다니는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자기가 일한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면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 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누가 알아주면 하고 안 알아주면 안하고 한다면 그걸 어찌 은혜라고 하며 신앙이라고 하겠어요.

그건 믿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믿음 그러면 아! 그건 하나님의 일!

하나님 홀로 일하신 것!

우리와 상관없는 일!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요.

성도가 구원받고 신앙생활 하는 것까지 하나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십니다.

우리더러 방관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괜히 오해 해 가지고 야! 정 목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 그러지 마세요.

자기가 말 귀를 못 알아먹어서 그렇게 해석한 것이지 전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어요.

제 말을 제대로 알아먹었으면 가만있지를 못해요.

제가 아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가만 두지 않아요.

뭔가 자꾸 사건을 일으키고 달달 볶아요.

교인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충성을 이끌어 냅니다.

자발적으로 행하도록 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면 종교이고, 감사해서 하면 믿음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억지로 하면 그건 자기가 한 것이고, 자발적으로 하면 믿음이 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면 종교생활이고, 하나님이 하게 하시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남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아세요.

인간은 말이죠.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하려고 해요.

남이 하는 것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야! 이렇게 하면 되잖아!

왜? 그렇게 하느냐!

축구 경기를 보면 관중들이

왜? 그렇게 하느냐!

그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해야지!

아휴! 저 놈!

야! 이 병신아! 그것도 못하냐!

니가 어떻게 그러고도 선수가 됐느냐!

그 따위로 하려면 차라리 나가 죽어라!

급기야는 술병 집어 던지고 욕! 욕을 해 댑니다.

이걸 입장 바꿔 놓고 이번엔 선수가 관중이 되고, 관중이 선수가 되 보세요.

똑 같아요.

관중이 된 선수가, 선수가 된 관중에게 더 심하게 욕을 해 댑니다.

왜? 그러는 줄 아세요.

이게 모두가 모든 일에 중심엔 자기가 있어야 만족해하는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제외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뭐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흡족해 해요.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자기가 믿어야지 흡족하지!

누가 믿어지게 해 줘서 믿는다고 하면 떨떠름하게 생각해요.

나도 얼마든지 잘 믿을 수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그건 어디까지나 니 생각이고!

지금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 하고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도 한 고집을 하시거든요.

하나님은 우리 보다 더 합니다.

하나님은 남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을 참지 못해요.

사 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하나님은 하나님 영광을 다른 놈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지요.

여러분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곳이지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세세토록입니다.

하나님 잘났어!

하나님 잘났어! 그러는 곳입니다.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그래서 천국엔 자아가 살아 있는 놈은 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어 보세요.

고라 일당과 같이 모세 너만 제사장이냐! 나도 제사장이다! 라고 대 든 것같이 하나님께도 대 들어요.

하나님이면 다냐!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린 뭐 시다바리 하려고 천국에 온 줄 아느냐! 라고 촛불 시위를 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받는(천당 가는) 일에 인간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겁니다.

너희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이 또 누굽니까?

또 한 성깔 하잖아요.

성깔 피우다가 얻어터지는 겁니다.

이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한다는 말은 인간의 방법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인간에게 허용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 말은 너희는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믿을 수가 없어! 이 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인간의 본성이 누구를 믿는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 준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싫어한단 말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광야에서 아침마다 만나를 주면 고맙습니다! 라고 쳐 먹으면 되잖아요.

떡이 필요하면 떡을 주고, 목이 마르면 물을 주고, 고기 먹고 싶으면 고기를 주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맨 날 불평과 원망을 하잖아요.

꼭 애새끼들이 엄마가 해 놓은 밥 쳐 먹으라고 하면 짜증내는 것과 같아요.

하여간 인간은 못 말려요.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무슨 말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가요?

그래 믿음이야기 했지요.

믿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알아서 이렇게 저렇게 행사하셔서 하나님이 뜻한바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히 11: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글개역)

히 11:39-40=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증언(인정)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표준 새 번역)

본문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비교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하시라고 비교하는 겁니다.

39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다고 하지요.

증거(證據)를 받았다는 말은 곧 인정(認定) 받았다는 말입니다.

인정을 받았다는 말은 합격했다는 말입니다.

그래! 너 하나님 백성 맞다!

그래! 너 신앙 인정해 줄게! 그런 말입니다.

그럼 ‘이 사람들’ 이란 누구들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 쭉 이야기 해 왔던 사람들이겠지요.

아벨서부터 기드온까지겠지요.

더 광의적으로는 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이들은 모두가 증거(證據)는 받았지만, 약속(約束)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증거(證據)가 있고, 약속(約束)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 증거(證據)는 뭐고 약속(約束)은 무엇인지 알아야겠지요.

조금 어려우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증거(證據)는 인정(認定)을 받았다는 말이라고 했지요.

그럼 약속(約束)은 무엇입니까?

약속(約束)이란? 장래에 주어지는 것을 말하지요.

지금 바로 일어나는 일은 약속이라고 하지 않고 현실이라고 하지요.

야! 내가 너 용돈 줄께! 그러면 지금 준다는 말이 아니고 나중에 준다는 말이지요.

지금 준다면 말할 것 없이 주면 되요.

그러니 뭔가 말로 약속을 한다는 것은 장차 주어질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받은 약속도 나중에 성취가 되어 질 장차 일어날 일이란 말입니다.

야? 내가 널 천당 보내 줄께!

이 말은 장차 천당에 넣어 준다는 말이지요.

이해가 되지요.

히브리서 11장을 시작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고 했지요.

믿음이 뭐라고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럼 바라는 것이 뭔 줄 알아야 그 믿음의 성격도 알 수가 있어지겠지요.

그렇다면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라는 것이 뭡니까?

예수그리스도이지요.

히브리서의 주제가 구약의 율법에 성취자가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는 그 실상도 예수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려고 쓰여진 것입니다.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님과 연관된 이야기가 되어야겠지요.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지고, 반드시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져야 해요.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그건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 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을 가지고 인류 평화를 말하거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복 받고 잘 사는 이야기를 하거나,

병고치고 귀신 좇아내는 이야기를 하거나,

교회 부흥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뭘 한다거나 라는 식으로 설교를 하면 전부 반칙입니다.

그건 성경이 의도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과 죄에 대하여서만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과 죄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서 인간사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세상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도입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도 누구를 말하려고 쓰여진 것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지요.

그렇다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는 말도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 말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자! 정리합시다.

믿음의 실상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마다 믿음으로 누구는 어떻게 하고, 믿음으로 누구는 저떻게 하였다고 하는 것은 곧 다 예수님을 위하여 그런 일들을 하였다는 말이 되겠지요.

노아가 방주를 지은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고,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 한 것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고,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무너뜨린 것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럼 이 사람들은 다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자!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증거란? 인정받았다는 말이라고 했지요.

그래 내가 인정해 줄께! 그런 뜻입니다.

그럼 이들이 인정을 받은 것은 무엇을 위한 인정을 받은 겁니까?

약속을 위한 인정이지요.

아니 조금 전에 인정은 받았지만 약속은 받지 못하였다고 했잖아요.

그럼 약속이 무엇인줄 알면 해석이 됩니다.

성경의 약속은 모두가 누구에 대한 약속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약속이지요.

그럼 자연히 이들이 받지 못한 약속이란?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자! 서서히 풀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언제 오셨어요.

구약의 마지막 때에 오셨지요.

이를 신약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언제 사람들입니까?

구약 사람이지요.

그럼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 살던 시대에 예수님이 계셨어요?

안 계셨어요?

안 계셨지요.

아니 물론 예수님은 어느 시대고 계신 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신약이잖아요.

그럼 구약시대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안 계신 시대이지요.

맞지요.

지금 히브리서 11장에서 이 사람들이 전부 뭘 받았다고 합니까?

고난이잖아요.

지난 시간 살펴보았잖아요.

모두가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그런 고난들을 받았잖아요.

그럼 이들이 받은 고난은 누가 받을 고난입니까?

장차 육신으로 오실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이지요.

이해되는가요?

여러분 고난 받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지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는 고난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안 받지요.

고난은 육신을 입고 오셔야만 받는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 누구의 고난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까?

육신으로 오실 예수님의 고난이지요.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 살던 시대에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아직 안 오셨지요.

그럼 이 사람들에게 있어 장차 육신으로 오실 예수님은 약속의 예수님이 되겠지요.

그렇잖아요.

하지만 이들은 지금 고난당하는 것은 누구의 고난입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이잖아요.

그러니 이 사람들은 지금 장차 육신을 입고 오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받아야 할 고난을 미리 당겨서 보여준 것입니다.

이를 선취(先取)적 고난이라고 합니다.

선취(先取)적이라는 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일어난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벧전 1:10-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약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자 보세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靈)에 의하여서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을 영광을 미리 증거하게 하였다고 하지요.

잘 보세요.

누가 누구를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밀어 넣습니까?

그리스도의 영(靈)이지요.

그리스도의 영(靈)으로 고난을 당하였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고난을 당하였단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靈)을 히브리서 11장에선 믿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라는 말은 “성령으로” 라고 해석을 하여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사람들은 장차 약속으로 오실 예수님은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성령께서 예수님이 오셔서 받아야 할 고난에 미리 동참하게 함으로서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야! 참 어렵다 어려워!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고난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흔적(痕迹)이라고 한 겁니다.

믿음이 지나가고 간 흔적(痕迹)이라고 한 겁니다.

너는 내꺼! 라고 불도장을 콱 찍어 놓았단 말입니다.

다 까먹었지요?

그래서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모르면 안 돼요.

바울은 이 고난을 위해서 좇아간다고 했어요.

빌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보세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기 위해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하잖아요.

바울의 이런 열심을 믿음이 간섭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은 바울만 가지는 마음이 아니에요.

믿음이 간섭하시면 모든 성도에게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아주 생소하게 들리지요?

이런 말씀이 생소하게 들린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분들이 복음을 못 들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에 성도들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빨려 들어갔듯이 신약의 성도들도 믿음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성도가 맞는다면 조만간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기대 하세요.

물론 엄청 아플 겁니다.

죽을 지경일 겁니다.

쪽팔리고 창피하고 환장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닥치거든 아!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저도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하루 속히 그런 날이 오기를 기도할게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까불지 마라!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痕迹)을 가졌다고 하지요.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건 자랑하는 겁니다.

마치 6.25 전쟁 때 받은 훈장처럼 자랑하고 있는 거에요.

이 흔적이 없으면 안 돼요.

구약에 사람들도 다 이런 흔적들을 가지고 있어요.

천국엔 다 이 흔적이 있는 사람들만 살아요.

이 흔적이 없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이단 소리 들었으면 예수님께 속한 사람도 이단 소리 듣게 되어 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이단이라고 해서 그 당시 교권으로부터 축출당하고 죽였어요.

그럼 성도도 고난당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럼에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단 소리 안 듣고 인정받고 살라고 하면 안 되지요.

예수님이 누구로부터 이단 소리 들었습니까?

당시 가장 정통(正統)신앙을 가진 유대인들로부터 이단 소리 들었어요.

그럼 지금 정통(正統)이 누굽니까?

이 시대 교회들이지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고, 통합 측이고, 다른 교단도 다 마찬가지이지요.

여러분 예수님은 이방인이 핍박하거나 죽이지 않아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핍박하고 죽였어요.

사도바울도 유대인으로부터 핍박 받았어요.

이러한 맥(脈)은 지금도 그대로 전수(傳授)가 되요.

그래서 지금도 정통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면 지랄을 떠는 겁니다.

왜? 지랄을 떱니까?

자기들의 정체가 폭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어 갔어요.

어느 시대이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지극히 미미한 사람들이었어요.

여러분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들을 기억해 보세요.

850 : 1 이었어요.

예수님 당시 제사장만 20,000명이었어요.

20,000 : 1 입니다.

마태복음 24장으로 보면 종말에 대한 예언을 하시면서 시대상을 언급하셨어요.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지요.

여기서 많다는 말은 우굴 우굴 한다는 뜻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우굴 우굴 한다는 것은 거짓 신자들도 우굴 우굴 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가짜 신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 놈들 추수를 하려고 일 년에 신학생들이 수천 명씩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신학교 나와서 뭐하겠어요?

목회 할 것 아닙니까?

교회를 개척하면 손님들이 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손님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시장 조사를 해야 할 것 아니예요.

사장 조사를 해보니 손님들이 복을 좋아 하는 겁니다.

그럼 복 주는 목회를 해야지요.

그래서 사도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종말에 교회를 보았는데 귀신의 처소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계 16:13-14=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계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이 시대 교회는 절간과 똑 같아요.

여러분 기독교 TV를 틀어보세요.

거기 나오는 목사들의 설교를 듣다가 바로 아래 한 채널만 돌려 보세요.

불교 TV 나옵니다.

비교해 보세요.

앞에 기독교 자와, 불교 자만 빼고 보세요.

똑 같아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세요.

뭐가 다른가?

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잘 사느냐 뿐이예요.

전부 땅 이야기만 하잖아요.

이 사람들과 사도 바울과 비교해 보세요.

사도 바울은 어찌 하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하려고 좇아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기독교 TV에 나오는 목사들은 어떻게 하면 고난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가르치잖아요.

땅에 것을 생각하면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잖아요.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보세요.

땅에 일을 생각하면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잖아요.

스님도 땅에 일 생각하고 목사도 땅에 일 생각하면 그 놈이 그놈 아닙니까?

유유상종(類類相從)입니다.

바울은 하늘에 것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목사들은 땅에 것만 생각하고 살아요.

왜? 그런가요?

간단해요.

바울은 하늘에 사람이고 목사들은 땅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늘에 영을 받았고, 목사들은 땅에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주인이 누굽니까?

뱀이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하자 뱀에게 종신토록 흙만 먹도록 했어요.

뱀의 후손들은 땅에 코를 박고 땅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것만 생각하고 살던 바리새인들을 뱀 새끼들이라고 했지요.

바리새인만 뱀 새끼가 아니고 기독교 TV에 나와서 땅에 것을 주겠다고 하는 목사들은 다 뱀 새끼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는 것을 받아 먹겠다고 하는 교인들도 뱀 새끼들입니다.

아니 제 말에 반박해 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의 말이나, 제 말이나 뭐가 틀립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이나 바울의 말과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다른 말이 안 나와요.

다른 말이 나오면 바울이 받은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지요.

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았다면 자연적으로 바울과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뭐가 이상합니까?

그런데 어느 시대나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사람들은 가루 서 말 속에 감추어진 누룩같이 적어요.

변변치 못해요.

다 비실비실해요.

뭐 세상 적으로 내 세울 것이 없어요.

반대로 가짜들은 전부 화려하게 장악하고 있어요.

이 영적 맥(脈)을 아셔야 해요.

예수님이 유대인들로부터 버림 당하셨듯이, 지금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저도 솔직히 말해서 교회가 컸다면 이렇게 무시당하고 살지 않아요.

저희 처가 쪽은 다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도 제 말을 안 들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교회가 작잖아요.

교회라도 크면 아! 교인들이 저렇게 많이 모이는 것 보니 정통인가 보다! 라고 생각 할텐데!

이건 세월이 갈수록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이 줄어들어요.

그러니 가짜라고 여기는 겁니다.

만약에 저희 교회가 조금만 커도 온다는 사람이 많아요.

목사님 말씀은 좋은대요?

그러면서 다른 핑계를 대고 안와요.

이는 복음엔 관심이 없고 교회가 크면 거기서 자기 이름을 한번 떨쳐 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안 오는 겁니다.

아니! 말씀이 좋으면 다른 조건 보지 말고 와야지요.

와서 말씀을 들어야지요.

그런데 안 와요.

말씀을 들으라고 해도 안 들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라고 하신 겁니다.

구약에 선지자들도 다 이런 핍박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바울도 그랬지요.

하나님께서 사도를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물의 찌끼같이 두셨다고!

성경은 성도가 고난을 받으면 기뻐하라고 하였지 슬퍼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고난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데 고난이 없다는 것은 그건 생각해 보아야 해요.

올바른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거나 가짜이기 때문에 고난이 없는 겁니다.

억지로 고난을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세상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악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 피 안에는 고난이 옵션으로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십자가 피를 받으면 고난도 따라와요.

마귀가 먼저 압니다.

마귀가 그러지요.

스게아의 아들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고 있으니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개 뼉따귀들이냐 라고 흠씬 두들겨 패지요.

마귀는 예수쟁이를 정확하게 알아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지 안하는지 귀신같이 알아보아요.

십자가 피를 전하면 아! 저 놈은 진짜 예수쟁이구나!

그래서 세상 힘으로 핍박을 가하는 겁니다.

하지만 가짜들은 마귀가 고난이 없도록 막아 줍니다.

도리어 세상 것을 듬뿍 주어서 세상에 안주하게 만들어요.

이런 영적 맥(脈)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 피만 증거하다가 욕을 먹어도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건 의지나 각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두 번은 욕을 먹고 고난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늘 상 당하게 되면 가짜들은 다 본색을 드러내고 포기하게 됩니다.

처음엔 십자가! 십자가!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보면 기성 교회 목사들과 똑 같은 행세를 하고 있어요.

무섭지요.

맞아요.

죽고 사는 일인데 왜? 안 무섭겠어요.

당연히 무섭지요.

영적 세계가 이렇게 무서운 곳입니다.

영적 세계엔 인정사정이 안 통해요.

오로지 예수 편이냐 아니냐만 있어요.

부모 자식이라 할지라도 예수 편이 아니면 원수입니다.

야! 어렵다 어려워!

여기까지 이해가 되세요.

이렇게 쉽게 쉽게 설명 하는데도 모른다면 그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다 이해 되실 줄 알고 진도 나갑니다.

이거 하나 설명 하는데 이렇게 지나왔네요.

오늘은 상당히 길겠네요.

각오합시다.

그럼 두 번째 중요한 것을 살펴봅시다.

두 번째는 뭔고 하니 40절입니다.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글개역)

하나님께서 ‘우리’ 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란 지금 저와 여러분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와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를 말합니다.

그럼 ‘저희’ 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전부 구약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히브리서가 쓰이기 전에 있던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구약 시대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우리’ 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아까 증거와 약속을 살펴보았지요.

쉽게 말하면 증거(證據)는 약속어음이고, 약속(約束)은 현찰입니다.

구약의 믿음이 증거 한 것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라고 했지요.

그럼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한 것이란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좋은 것인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약속이란? 실체(實體)를 말하고, 증거란 모형(模型)을 말합니다.

실체는 현금이고, 증거는 약속 어음입니다.

여러분은 현찰을 좋아합니까?

약속 어음을 좋아합니까?

당연히 현찰을 좋아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구약 시대 성도들인 ‘저희’는 더 좋은 것을 증거하는 약속 어음을 받은 것이고,

신약 시대 예수를 영접한 성도들인 ‘우리’는 현찰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걸 표준 새 번역에선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다고 합니다.

40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장차 이런 분이 오신 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성도들은 증거를 하였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만난 겁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멀리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만 보았는데 신약의 성도들은 만난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아브라함은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것을 보고 즐거워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신약의 성도들이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이지요.

마 13:16-17=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구약에 사람들은 나를 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보지 못하였지만 너희는 지금 나를 보고 있다고 복을 받은 자라고 하잖아요.

구약에선 성령 안에서 느꼈지만 신약에선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스킨쉽을 한다는 겁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분을 실제로 만났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예수님을 본 겁니다.

이삭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진과 같아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았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아들은 그리스도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서 이삭은 장차 오실 약속의 자녀인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사람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즐거워 한 사람들입니다.

사진만 보고 즐거워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사람들은 만났어요.

직접 만났단 말입니다.

직접 만나서 밥도 먹고 했단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감동이 안 되세요.

거참 이상하네!

구약에 사람들은 사진만 보고서도 그렇게 기뻐하였는데 이 시대 교인들은 손으로 만진바가 되고 눈으로 본 바가 되었음에도 즐거워하지를 않아요.

즐겁지 않다는 것은 만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가 기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시대적으로만 신약이지 이런 사람들은 아직도 구약의 사람들입니다.

신약의 사람은 약속을 받은 사람이고, 구약의 사람은 증거를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도 구약의 사람과 신약의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신약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저희’는 구약사람입니다.

‘우리’는 신약의 사람이고, ‘저희’는 구약의 사람들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과 이후로 구분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以前)은 옛 언약에 속한 구약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以後)는 새 언약에 속한 신약입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구약 사람은 죽었고 신약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살던 사울은 죽고, 은혜로 사는 바울로 거듭난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율법을 향하여 죽은 옛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구약의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함께 죽었어요.

그리곤 이젠 예수님이 부활 하실 때 율법과 상관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울처럼 율법에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율법과 상관없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성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고, 저희는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셨던 것입니다.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천국에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 되었으니 저희에게는 비밀이라고 했지요.

제자들과 유대인들을 구분하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예수님께서 ‘저희’라고 말한 상대는 율법신앙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럼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겐 천국은 감추어진 비밀이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에겐 천국은 열려져 환히 보이는 것입니다.

이건 구약이다 신약이다 시대를 따지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도 율법 신앙을 하면 구약시대 사람과 동일합니다.

이런 사람에겐 예수님의 십자가 비밀이 깨달아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이 아무리 찍접거려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사람은 율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율법에 영향을 받습니다.

중요하니 다시 반복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희’가 되고, 은혜 아래 잇는 사람은 ‘너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희’가 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우리’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일컬어 그림자라고 하지요.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자 보세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지요.

장차 오는 좋은 일이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실상이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율법신앙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구약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면 빛바랜 사진과 같은 율법 신앙을 고수할 이유가 없어요.

알다시피 율법 신앙이란 날과 달과 절기와 장소를 지키는 것들입니다.

이 시대적 언어로 표현하면 주일 성수를 하여야 한다거나, 성전신앙을 고수한다거나, 십일조나 갖가지 행함을 강조하는 신앙들입니다.

한마디로 행함 신앙입니다.

성화신앙도 여기에 속합니다.

암튼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모든 신앙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한 것을 보세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는데 자기는 이방여자이니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하지요.

장소를 묻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이 쪽 저 쪽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합니다.

안다!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맞느냐! 틀렸느냐! 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 언약이냐! 새 언약이냐! 라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아직 어떤 장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은 아직도 예배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배라고 합니다.

구약에선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성전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젠 여기다! 저기다! 라는 장소적 개념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신령(神靈)과 진정(眞理)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부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란 말입니다.

진리란? 하나님 약속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약속으로 오신 분이므로 진리는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는 곧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분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그럼 이젠 어떤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이젠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전 개념은 사라졌지요.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는 것은 구약의 알지 못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시대 교회를 성전 개념으로 두어서는 안 되겠지요.

교회는 모임의 장소 이외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교회에 어떤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의미를 둔다는 것은 아직도 구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가 마치 구약의 성전과 같이 되었어요.

목사들은 교인들을 교회에 가두려고 하지요.

교회가 마치 하나님의 집이라도 된다고 가르치지요.

결국 교회가 신전(神殿) 곧 우상의 전당이 되고 만 겁니다.

목사들도 성전 건축 한다고 헌금 하라고 하잖아요.

성전 건축 한다고 헌금 하라는 말은 나는 구약 사람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난 예수를 만나지 못한 목사입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교회가 어떤 신성한 장소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 와서 기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성전이라고 한다면

제사장도 있어야 하고,

안식일도 있어야 하고,

제물 되는 양이나 소가 있어야 해요.

구약 식으로 드려야 해요.

그러나 어느 교회도 양이나 소를 잡아 드리지 않지요.

성전이라고 하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지요.

절반은 구약이고, 절반은 신약입니다.

이상한 집단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교회와 교인들을 일컬어 괴물이라고 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은 반은 구약 사람이고, 반은 신약 사람입니다.

성경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가짜들이라는 겁니다.

교회도 아니고, 신자도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만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만나 주세요.

예수 안에서 만난 다는 말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맺은 새 언약 안에서 만나 주신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이란? 옛 언약과 달라졌다는 말이지요.

옛 언약 하에선 양을 잡고 양의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만나러 갔어요.

그러나 새 언약 하에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나아가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것들이 믿어져요.

그러니 성령 받은 성도는 구약식 신앙생활을 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주일 성수니,

성전이니,

십일조니,

제사장이니 하는 것들을 고집하지 않아요.

이젠 예수님이 주일이고,

예수님 성전이고,

예수님이 십일조이고,

예수님이 제사장이예요.

목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목사는 다만 하나의 직분자일 뿐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자예요.

성도는 모두가 직분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청소하는 직분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밥하는 직분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운전하는 직분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주일학교 교사 직분을 맡았어요.

직분엔 높고 낮음이 없어요.

다 예수님의 몸에 지체로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성막에 쓰임 받는 여러 가지 도구들과 같습니다.

성소 안에 보면 불집게나, 재를 담는 그릇이나, 향을 피우는 향로나, 떡 상이나, 촛대나 모두가 정금으로 만들었어요.

이는 모두가 차별이 없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는 다 귀해요.

모두가 예수의 생명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聖徒)란? 거룩한 무리란 말입니다.

즉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주일학교 어린이라고 깔보면 안돼요.

그 쬐끄만 놈 속에도 예수님의 피가 있어요.

그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죽음도 피해가고 마귀도 까불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하나님을 수시로 만나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이 예수님 앞에 오는 것을 막으니 화를 내지요.

제자들이 애들을 가라고 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저 아이들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고 하잖아요.

저 아이들도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주일 학생은 다 왕자입니다.

왕자가 어리다고 깔보다간 임금한데 혼납니다.

그 속에 임금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겁니다.

머리가 허연 영의정 대감도 왕자 앞에선 머리를 조아리고 “세자 저하” 그간 강영하셨습니까? 라고 경대(敬待)를 하는 것입니다.

어리다고 야! 세자! 이리와봐!

그러다간 언제 죽을지 몰라요.

여러분의 자식도 예수를 믿으면 “세자 저하”입니다.

앞으로 잘 대하세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최고로 대해주어야 해요.

하지만 예수 안 믿으면 조져야지요.

뭐 볼 것도 없어요.

그건 짐승이니 잡아야 해요.

예수 안 믿으면 대학에 보낼 필요도 없어요?

고등학교 졸업하면 돈 벌어 오라고 해야 해요??? ^ ^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언중유골(言中有骨)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대학에 보내든지 회사 취직시키든지 그건 알아서 하세요.

암튼 율법 신앙은 아직도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구약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계세요.

구약 사람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늘 저주 아래서 쫓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저주를 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법의 특징은 지켜도 지켜도 끝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를 지키면 또 다른 것을 지켜야 합니다.

눈만 뜨면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은 늘 불안하고 저주를 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율법 조항이 365개라고 합니다.

전 세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신학자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압니다.

365개든지 3600개든지 그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니 세어 볼 필요가 없어요.

암튼 신학자들이 365개라고 하니 그런 줄 아는데!

왜? 365개냐 하면 일 년 365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 된다는 의미에서 365개가 아닌가 싶대요.

그렇다면 일 년 365일 저주 아래서 살아가는 겁니다.

참 재미있지요.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신약의 성도는 율법이 3만 개든 5만개든 상관치 않아요.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얼마나 배짱이 편합니까?

예수님께서 진리로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지요.

그럼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자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유자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세요.

얼마나 자유합니까?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살아가는 방식에서나 거침없이 살았습니다.

때로는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법 아래 자신을 가둘 때도 있었고, 때로는 법으로부터 초연하게 살았습니다.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대하고,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하였어요.

이건 세상의 가치로부터 갇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바울은 세상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저촉 받던 율법에 사람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세상과 상관없는 하늘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이 두렵지 않게 산 것은 곧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특징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지요.

왜? 세상이 감당치 못했습니까?

이는 세상 밖에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 없이 신앙은 관념(觀念)이 아니고 실제(實際)라고 말한 것은 세상에 매이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도(道) 닦지 말고 사세요.

십자가는 도가 아니라 생명이고 삶입니다.

생명이 뭡니까?

날마다 사는 겁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말고 영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살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어집니다.

이제 나머지 하나를 살펴봅시다.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글개역)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주셨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우리’가 아니면, ‘저희’가 온전해 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쉽게 하면 ‘우리’가 없으면 ‘저희’도 없다는 겁니다.

아까 우리란? 예수를 영접한 신약의 성도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를 영접한 성도가 없으면 구약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완전히 꽝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어렵지요.

맞아요.

성경이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육적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보면 어려울 것도 없어요.

자 살펴봅시다.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우리’가 아니면 ‘저희들이’ 온전해 지지 않는다고 했지요.

쉬운 말로 ‘우리’가 없으면 ‘저희’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것이 증거(證據)와, 약속(約束)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멀리서 내다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엄마가 자식에게 두부 한 모 사오라고 돈을 주고 보낸 것과 같아요.

엄마가 돈을 주고 멀리서 쳐다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

돈을 주고 보낸 것은 두부를 사오라고 보낸 거잖아요.

그럼 아이가 가게에 가서 두부를 사가지고 오면 엄마가 올커니 됐구나!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약속이란? 아이가 엄마가 심부름 시킨 대로 두부를 사온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합니다.

육상에서 1000M 계주하는 것으로 비유해 봅시다.

지금 아벨이 1번 계주예요.

준비 땅! 하고 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2번 주자인 아브라함에게 바톤을 넘겨주었어요.

아브라함이 바톤을 들고 또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3번 주자인 요셉에게 바톤을 넘겼어요.

요셉이 바톤을 들고 또 달립니다.

그리곤 4번 주자인 모세에게 줬어요.

모세가 바톤을 들고 또 달립니다.

그렇게 해서 구약의 마지막 주자인 세례요한에게 줬어요.

이제 세례요한이 뜁니다.

그러자 아벨서부터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가 숨을 조리면서 보고 있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중간에 넘어지지 않고 무사하게 예수님에게 바톤을 넘겨주어야 게임이 승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정확하게 골인 한 것입니다.

그러자 구약의 먼저 뛰었던 계주들이 모두가 야호! 이겼다! 이겼어! 라고 춤을 추는 것과 같아요.

이걸 본문에서 ‘우리’가 아니면 ‘저희’가 온전해 지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니 아벨서부터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 선지자까지 그들이 달려온 게임이 성공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고서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제일 크다고 한 겁니다.

키가 크다는 말이 아니고 아벨서부터 구약의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제일 크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 보다 더 크다고 했어요.

왜? 천국에서는 제일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더 크다고 합니까?

그건 세례요한은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지요.

가시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행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자 보세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구름을 타고 천국으로 가셨어요.

가시면서 뭐라고 합니까?

천사들이 예수님이 구름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예수님은 지금 너희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하지요.

그러니 12제자가 이제 신약 시대 1000m 계주하는 첫 번째 주자가 되어서 뛰는 겁니다.

어디로 향해서 뜁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서 뛰지요.

바울도 삼층천 가서 보았어요.

장차 우리가 가야할 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그래서 바울도 열심히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위해서 좇아간다고 한 겁니다.

빌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보세요.

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위해서 좇아간다고 하잖아요.

바울은 이미 얻었다 하지도 않고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 계신 그 곳을 향해서 좇아간다고 하잖아요.

이건 바울의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빨리 예수님 품으로 가고 싶다는 말입니다.

너무 너무 가고 싶으니 진심전력으로 좇아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 바울의 바톤을 지금 우리가 받았어요.

이제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였어요.

12제자나 바울도 구약의 신진들이 신약의 성도들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겠지요.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와요.

계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계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사도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어요.

천국을 보니 믿음에 선배들이 하나님께 빨리 세상을 끝장내라고 합니다.

이것은 빨리 믿음으로 시작된 마지막 계주가 천국으로 골인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경기를 마치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기다리라고 하지요.

너희들 같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할 주자(走者)들이 남아 있다고 하지요.

베드로나 바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다가 이단 소리 듣고 죽어야 할 자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12제자들과 같이 죽기로 남겨진 자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 시대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성도들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우리가 마지막 주자가 되어서 천국에 테이프를 끊는 것입니다.

마치 올림픽 폐회식 때 주(主) 경기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그 주(主) 경기장 안으로 마라톤 선수가 1등으로 골인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과거 바로셀로나 올림픽 때 황영조 선수가 손을 흔들면서 몬주익 경기장을 들어오는 모습이 생각나지요.

그 환호성과 영광을 한번 그려보세요.

하나님과 예수님과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과 베드로와 바울과 스데반과 그 외 등등 믿음으로 살다간 성도들과 천군 천사들이 나팔을 불면서 환호해 주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짜릿하지 않습니까?

황홀하지 않습니까?

온 몸이 짜릿 짜릿 지~지~지~지 오! 베이베!

너무 너무 떨려! 지~지~지~지

아니 이런 말씀을 들어도 기쁘지 않으면 무슨 말을 들어야 놀랩니까?

전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요.

이런 생각이 들면 빨리 죽고 싶어요.

그냥 잠자다가 그대로 갔으면 좋겠어요.

재미있지요.

신나지요.

그래요.

예수를 믿는다는게 이렇게 재미가 잇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믿어지면 신이 나요.

겁 날 것이 없어요.

이건 같은 편이 아니면 그 감흥을 몰라요.

그 기쁨과 스릴을 몰라요.

전 복음을 깨닫고 나서 그 기쁨을 잊지 못해요.

처음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책을 통해서 복음에 대하여 눈을 뜨고 난 후의 그 기쁨과 황홀함을 잊지를 못합니다.

한편으로는 율법 신앙에 찌들려 살았던 수십 년의 그 세월이 그렇게도 원망스럽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그 안도감에 엄청 울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그 때 그 감흥을 주는 것과 같은 노래가 있어서 혹간 부르곤 해요.

최진희 라는 가수가 부른 ‘꼬마 인형’이라는 노래입니다.

가사가 그렇게 제 마음을 미어지게 해요.

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마음을 담아 놓은 것 같아서 곧 잘 부르곤 합니다.

가사를 잘 음미해 보세요.

어떤 여인이 아주 멋진 남자를 만나서 첫 사랑을 나누었어요.

너무너무 황홀해서 그 밤을 못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시 온다고 하는 약속을 하고서 멀리 떠나가 버렸어요.

이 여인은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어서 밤마다 꼬마 인형을 가슴에 안고 기다란다는 내용입니다.

이건 마치 아가서에 보면 술람미 여자가 솔로몬 왕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심정이에요.

전 황홀한 그 밤을 예수님을 만난 날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복음을 깨달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불러요.

떠난 그 사람을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불러요.

꼬마 인형은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피에 언약입니다.

그걸 꼭 안고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전 십자가 피를 생각 할 때마다 주님의 그 사랑이 고마워서 감사의 눈물을 흘린 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면서 부른 답니다.

너무 기뻐서 여기서 끝내야겠어요.

노래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불러 보세요.

꼬마 인형

1절

그날 밤 황홀한 시간을 난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당신을 알고 말았죠

말없이 흐르던 눈물을 난 감출 수가 없었네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하나 둘 세고 있었죠

늦어도 그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2절

늦어도 그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가슴이 뭉클하지 않습니까?

유행가 가사를 보면 복음 적인 것들이 참 많아요.

복음적으로 이해해서 부르면 복음 성가입니다.

노사연의 ‘만남’이라든가,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라든가,

임수정의 ‘연인들 이야기’라든가,

조영남의 ‘그대 그리고 나’ 라든가

제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입니다.

가사를 복음적으로 개사를 해서 부르면 훌륭한 찬송이 되요.

가사들이 솔직히 요즈음 복음 성가들보다 훨씬 더 복음 적이에요.

요즈음 복음 성가를 보면 거의가 다 세상 복을 추구하는 노랫말들이예요.

땅에 노래들이예요.

전 그래서 복음 성가보다 위에 노래들을 더 많이 불러요.

이상한 목사지요.

이상하게 유행가로 끝나게 생겼네요.

암튼 제가 만난 그 예수님을 만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귀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주님 안에 품겨 있기에 세상에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임을 알고 기쁘게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http://blog.daum.net/cross114/ 울산목양교회 정낙원목사님

[설교] 우리가 아니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히브리서 11장 39~40절

믿음은 완성되어 가는 것

히브리서 11장은 노아·에녹·아브라함·야곱·모세·라합 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 훌륭해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발자취를 따르기에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끝부분 39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증언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다.”(히 11:39)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그 약속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말이 좀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고 한참 후대에 내려가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는 그 땅을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의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히 11:13)

이것은 크리스천의 실존을 한마디로 잘 정의해 주고 있다. 그들은 자기 대에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가 약속 받은 것이 다음 대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즐거워하는 길손이요, 나그네라는 것이다. 그들의 기쁨은 도상의 기쁨이지 정상에 기를 꽂은 자의 환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39절에 이어서 40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히 11:40)

상반절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위한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을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그 위대한 분들이 시작한 일이 오늘날 우리의 일과 연관이 되고 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사람인 오늘의 나에 대하여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의식이다.

하반절에 나오는 ‘우리가 없이는’(choris hemon)이라는 구절은 이런 의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훌륭한 분들이 하신 일들도 ‘우리가 없이는’, ‘우리가 아니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가 그 적은 무리가 이루려고 하는 일들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해온 것을 이어서 하는 것이요, 오늘에 완성해 가는 위대한 일이라는 의식이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가진 믿음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면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 받은 것도 완성에 이를 수 없다는, 매우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자신들이 구원사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위대하고 큰 하나님의 집을 완성해 가는 센터라는 의식으로 가득했다.

대개 초대 교회들은 30명 안팎의 작은 공동체였으며, 사회적으로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중심부에 있지 못했고 주변부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만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작기 때문에, 나는 못 배웠기 때문에, 그저 훌륭한 분을 따라 하기나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주변부 공동체이지만 ‘우리가 아니면’, ‘내가 아니면’ 믿음의 조상들이 꾸어온 꿈이 완성될 수 없다는 충만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계승해야 할 역사의식이요, 사명감이다.

대형 교회가 생긴 이유

오늘날도 전체 교회의 1%도 안 되는 극소수의 대형 교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들이다. 그 작은 교회들은 농촌 지역 사회는 물론이고 도시의 주변부에 자리 잡고 자기 몫을 다하고 있다. 우리 교회도 그런 작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교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 작은 교회들이 이 초대 교회와 같은 역사의식과 충만한 사명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꾸만 대형 교회와 비교하여 건물의 크기나 화려함, 수천 명에 이르는 교인 수에 압도되어, 작은 교회들은 자신들이 뭔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다.

대형 교회가 생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산업화되면서, 도시 주변에 와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와 직장에서 많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거의 다 경제적으로 잘 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대형 교회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대형 교회는 일단 사람 수가 많다. 각자 군중 속에 파묻혀 교회가 제공하는 오케스트라 같은 음악과 감성적인데다가 오락성까지 가미한 요란한 기도와 설교 속에서 사회에서 입은 상처가 치유 받고 위로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주입하는 설교는 그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 무엇을 주도하거나 책임을 지는 데 부담을 느끼는데, 대형 교회는 그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산업화 과정에서 서울의 몇 곳과 신도시 등이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부각되었는데, 대형 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그런 곳에 자리 잡았다. 이는 대형 교회의 물적 토대가 이른바 강남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안정을 추구하는 세력들이다. 그래서 대형 교회들은 거의가 보수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안정을 추구하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미국을 찬양하거나, 미국을 예수 믿어 축복받은 대표적인 국가로 내세운다.

대형 교회에 사람들이 집중하는 현상은 일시적 사회 현상일 수도 있고 기형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최선의 목회 모델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더욱이 대형 교회의 규모나 교인 수에 비하여 작은 교회를 평가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 뽑은 것을 보라. 처음 선발된 3만 2000명은 너무 많았다. 첫 번째 심사에서 2만 2000명이 떨어지고 1만 명만 남았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너무 많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거기서 뽑은 정예 300명으로 전쟁을 승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초대 교회 때부터 존재해 온 가장 건강한 교회 모델은 큰 교회가 아니라 작은 교회이다. 초대 교회들은 30~50명 규모의 작은 가정 교회들이었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성경에 능하고 학식 있는 아볼로가 열심히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때 교인수가 모두 12사람에 불과했다. 성경은 교회를 말할 때 어디서도 교인 수의 적고 많음이나, 큰 교회나 작은 교회라는 개념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작은 교회는 가족 같은 교회이다. 본래 초대 교회는 가족 교회였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부를 때 “○○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라고 하였다. 그런 가정이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확대된 가족이 바로 교회이다. 우리 교회도 가족들이 나오는 교우들이 많고, 또 전체가 교회 가족이 되었다. 대형 교회에서는 이런 친밀한 가족 관계가 가능하지 않다.

대형 교회 예배에서는 목사와 성가대는 연주자이고 회중은 관객이 된다. 그러나 작은 교회 예배에서는 목사와 성가대는 이끄는 이이고 회중은 함께 합창을 하는 공연자이며, 하나님이 청중이 되신다.

대형 교회는 인재가 워낙 많아서 전문가가 아니고는 참여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성가대원이 되려면 적어도 음대 교수이거나 성악을 전공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늘 관객으로 남지 주체로 참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작은 교회는 사람 수가 적기 때문에 개개인이 은사를 활용할 수 있고 언제나 교회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지도자로서 훈련을 받는 데서도 큰 교회보다는 작은 교회가 더 좋다.

작은 교회의 또 다른 장점은 유연성이다. 작은 교회는 어떤 상황에 대해 대형 교회보다 빨리 반응할 수 있다. 골리앗이 힘이 약해서 다윗에게 진 것이 아니다. 골리앗은 너무 커서 몸이 둔했다. 작은 몸집의 다윗이 사울이 준 갑옷과 투구를 걸쳤다면 그는 실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벼운 복장으로 나아갔기에 날렵하게 움직여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

행복한 교회

대형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듯이, 작은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교회가 오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교회에 속한 사람 하나, 하나가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가가 가장 중요하다.

어떤 목사가 시골 교회를 섬겼는데 교회 문은 열어놓았으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전망도 매우 어두웠다.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그는 가장 내밀한 슬픔과 패배감에 대해서 적었고, 지난주 예배에 겨우 다섯 명만 참석했다는 것도 적었다. 즉시 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왔다. 거기에는 그 목사의 가슴을 찌르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

“예배에 몇 명이 참석했는지가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질문하거라.”

오늘날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숫자에 민감하다. “오늘은 30명밖에 안 왔어”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수를 세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헤아리는 것이다. 몇 명이 예배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했느냐가 중요하다.

오늘날 구성원들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것은 신자 개개인이 익명의 관객이 되고, 개개인이 빈자리를 메우는 숫자가 되는 교회는 아닐 것이다. 나 한 사람이야 가도 모르고 안 가도 그만인 교회, 각자가 알아서 낼 것 내고 받을 것 받는 슈퍼마켓 형 교회도 아닐 것이다.

내가 안 가면 성가대 베이스 파트가 안 된다고 걱정하면서 무리를 해서라도 꼭 나와야 하는 교회, 자리 한 곳이 비면 수를 카운트 하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면서 염려해 주는 교회, 목사와 언제라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 나 한 사람이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꼭 내가 나가야만 되는 그런 교회가 행복한 교회일 것이다. ‘내가 아니면’ 성가대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주일 학교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청년회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재정도 부족할 것이라는, 그런 사명감으로 가득 찬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일 것이다.

비록 적은 수가 모인 공동체이지만,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의 꿈과 그들이 받은 약속에 잇대어 살고 있으며, 그들과 서로 의존하고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니면’(choris hemon) 믿음의 조상들이 꿈꾸어온 것도 완성되지 않고, 우리가 아니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사명감과 역사의식으로 충만한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이다.

우리가 이룩한 것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우리 역시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길손이요, 나그네임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교회, 그리하여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말해주고, “너희가 아니면 우리 꿈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일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2-40절 말씀 묵상 [김경열 목사]

본문말씀: 히11:32-40

제 목: 세상이 감당치 못한 믿음의 사람.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7-38) They were stoned, they were sawn asunder, were tempted, were slain with the sword: they wandered about in sheepskins and goatskins; being destitute, afflicted, tormented;(Of whom the world was not worthy:) they wandered in deserts, and in dens and caves of the earth.(Heb 11:37-38)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의 빛나는 생애와 저들의 신앙의 역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론적으로 11장은 1-3절에서 믿음의 본질을 말하고, 4-7절에서 아브라함 이전의 세 사람 아벨과 에녹과 노아의 믿음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8-19절까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20-31절에는 아브라함 이후 네 사람, 곧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 부분으로 사사시대 이후의 믿음의 선진들을 종합적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은 이 사람들의 위대한 삶과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그 능력은 인간의 의지나 열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이긴 힘이 바로 ‘믿음’ 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의 신앙의 위대함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죽음도 불사하는 삶에서 나타났습니다.

죽음을 두려워않는 이 순교적인 신앙은 저들의 삶에서 믿음으로 산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너희가 죄와 더불어 싸우되…(히12:4) 라 했습니다.

우리 뉴욕영안교회 성도들도 이들의 믿음같이 세상을 이기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시길 축복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고 하였습니다.(32절)

첫째로 저들의 믿음은 아름다운 승리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33절) 라고 하였습니다.

1) 이방나라들과의 접전에서 이긴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라들’ 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여러 이방국가들을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래 바락 앞에서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인 시스라를 이겼습니다(삿4:15).

기드온은 3백 용사로 미디안 군데를 물리쳤습니다(삿7:22).

입다는 암몬자손을 항복시켰습니다.(삿11:33).

다윗은 블레셋과 여부스와 아말렉, 에돔족속을 정복하였습니다.(삼하 5장, 8장).

이들은 전쟁에서 용맹이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다고 하였습니다.(34절하)

무수한 전쟁을 이겼다는 말은 바로 죽음을 이겼다는 말이 됩니다.

2) 의를 행하기도 하였습니다(11:33).

이것은 개인적인 공명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 의를 말합니다.

믿음으로 사사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의를 행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나라를 세우고, 자기 뜻을 이루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의를 행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의가 숨겨져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구속사역 의를 이루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뜻인 의를 이룰 수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3) 약속을 받기도 하였습니다.(11:33)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는 길입니다.

언약신학이란 하나님의 관계가 약속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Old Testament), 신약(New Testament)의 약속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무엇을 믿느냐? 첫째: 그가(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상 주시는 이심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컨대,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바울, 등 믿음의 선조들이 다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을, 도무지 이룰 수도 없는 것들을, 바랄 수 없는 약속이지만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빛나는 미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약속 성취를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저들의 삶을 용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4)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습니다(11:33)

그것은 마치 사자굴속에 들어간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봉해 주심과 같은 것입니다.

죽음을 이긴 순간이었습니다.

5)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였습니다(11:34)

이는 느브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음이 죄가 되어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 불에 들어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두고 한 말이 됩니다.

우리가 섬기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단3:17)

그들이 불에 들어간 것은 의지(신념)의 담대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저들은 그 죽음의 불꽃 속에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아니하고, 산채로 불꽃 속에서 다시 나오고 말았습니다.

죽음을 이긴 믿음의 능력입니다.

6) 믿음의 사람들은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습니다(11:34)

다윗은 사울 왕의 칼날 앞에서 살아남았습니다.(삼상18:11).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칼날 앞에서 살아남았습니다(왕상19:1)

엘리사는 아람왕의 칼날 앞에서도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왕하6:12-19)

모두 죽음을 이긴 자들입니다.

7)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11:35)

그 외에도 기드온(삿8:24-27), 바락(삿4:12-16), 삼손(삿16:4-22), 입다(삿11:34-40), 이들은 용맹한 사람들이지만, 실은 그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연약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믿는 믿음 안에서 용맹을 떨쳐 죽음을 이기는 신앙생활로 영웅의 삶을 치루었습니다.

둘째로. 저들의 믿음의 능력은 고난을 감수하는 인내의 삶에서 나타났습니다.(11:35-38)

1) 죽음을 이겼습니다.

남자들 뿐 아니라. 믿음으로 여자들도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습니다.(11:35).

예컨대,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되살림 받았습니다.(왕상17:23).

수넴의 여인은 엘리사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부활로 선물 받았습니다.(왕하4:35-37).

신약에서 나인성 과부는 죽은 아들을 예수로 말미암아 부활로 다시 받았습니다.(눅7:11-14).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예수로 말미암아 죽은 오라비를 부활의 은총을 받았습니다.(요11:17-44).

모두 믿음으로 죽음과 싸워서 승리한 자들이었습니다.

2) 고난을 이겼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치 아니하였습니다(11:35).

더 좋은 부활….(35절)은 둘째부활 곧 마지막 부활입니다.

예수 재림 시에 받을 영화로운 부활을 말합니다.

악형을 받되… 란 말은 ‘북을 치듯이 죽도록 때린다’ 는 뜻입니다.

이 형벌은 죄수를 형틀위에 누인 후, 사지가 팽팽해지도록 말뚝에 맨 뒤에 사지의 연결부분을 창으로 찔러 피를 내고, 배와 가슴을 북치듯이 쳐서 죽이는 비인간적인 극형을 가리킵니다.

이천년 기독교 박해사(迫害史) 는 사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러 유형의 악형이 기독인들의 죄목이 되어 무차별 가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이런 죽음의 고난 속에서도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부활은 다 같이 하지만, 그 부활의 영광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받고자 하는 자는, 고난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배교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더 좋은 부활의 영광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과는 너무 다른 것 아닙니까?

3) 그들은 희롱과 채찍도 받았습니다(11:36).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만 충성되이 증거한다는 이유 때문에 제사장 바스훌에게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웠더니.(렘20:2).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렘29:7-9).

예수의 사도들은 새 술에 취한 자들로 오해를 받았습니다(행2:12).

바울은 염병 같은 놈으로, 미친놈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행26:24).

수없는 굶주림과 목마름, 매 맞음과 헐벗음이 계속되었습니다. (고후11:16-33)

4)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11:36).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 감옥에 갇혔다고 했습니다(렘20:2, 37:15)

복음을 전한다고 베드로가(행12:3-5), 사도바울이 갇혔습니다(고후11:23)

미가야 선지자가 그 곳(감옥)에서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셨습니다.(왕상22:27).

결코 이 세상 감옥이라고 하는 장소가 악인들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의의 사람, 경건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믿는 다는 죄목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들어갔던 고난의 가시밭길 이었습니다.

귀신을 쫓았다고 감옥에 갗이고,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5) 돌로 침을 받았습니다(11:37).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진실을 말하다가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대하24:20-22).

나봇은 조상들 전래의 유업인 포도원을 지키려 하다가 아합 왕과 백성이 함께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왕상21:13).

스데반 집사는 예수를 증거 하다가 동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행7:59).

6) 톱으로 켜서 죽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11:37).

이사야는 므낫세 왕의 우상숭배 강요에 불복하고, 오히려 그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다, 이사야 선지자는 므낫세 왕의 톱에 의해 그 몸이 두 동강이로 쪼개어져 죽었다고 합니다.(전승)

7)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했다고 하였습니다(11:37)

이세벨은 그의 칼로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왕상18:13)

예레미야 시대 우리아도 그렇게 죽임을 당한바 되었습니다(렘26:23)

8) 양과 염소의 가죽옷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11:37).

엘리야가 그러했고(왕하1:8, 왕상19:9), 엘리사도 그러했고(왕하2:8),세례 요한도(막1:6)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역대 환난시대를 살아가던 앞서간 모든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저들은 죄악된 세상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돌이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이라고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만났고, 은혜를 받고 보니 무엇이 진짜 멋지게 사는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죽음도 핍박도 무섭지 않고, 광야와 암혈과 산중과 토굴이 저들의 거처가 되었습니다(히11:38)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생활을 하였습니다.(삼상19-30장)

엘리야는 이세벨의 박해를 피하여 호렙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왕상19:1-18)

‘이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도다.’ 고 하였습니다.(38절)

이 세상과 마귀가 이들을 유혹해도 생명을 가지고 협박을 해도 절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아무런 손해를 끼치지 못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가 타고 있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교만으로 다시한번 기회를 주어서 그들을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 때에 그 청년들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우리들에게 절하라고 말하지 마옵소서, 우리들은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저 극렬히 타는 불에서 건져내실 능력이 있고,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단3:17-18)

얼마나 담대한 믿음입니까?

어떤 고난이나 유혹이나 죽음이나 세상이 가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보았지만, 이들의 믿음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누가 꺾을 것입니까?

우리가 심히 큰 이 하나님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4:7)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8-11)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만이 승리합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로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 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니이라.”고 하였습니다.(히11:39-40)

저들은 믿음을 따라 확실하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상급도, 명예도 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놓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여기에 ‘더 좋은 것’ 을 우리들이 받아야 합니다.

이들은 요즘같이 이렇게 밝은 진리가운데서 믿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면서 가진 믿음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들의 소망하던 것들을,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심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아벨,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다니엘…바울, 폴리감 말틴루터, 어거스틴, 칼빈 웨슬레 웰리암케리 허드슨테일러 토마스 언더우드 아펜젤라 등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만날 이 분들이 지금도 우리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면 저희의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저희들 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성취하셨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성경을 주셔서 복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자들이, 그 모든 예언들이 다 이루어진 것을 증거로 보고 있는 때입니다.

또 우리는 이방인들이지만, 우리가 아니면 천국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방인의 수가 다 들어오기까지 세상은 잠깐 보존되고 있습니다.(롬11:25-32)

오늘 우리들 믿음이 얼마나 좋아야겠습니까?

그리스도도 나타나지 않으셨고, 계시도 희미한 구약시대에도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이렇게 담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우리들은 구약성도들 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많이 받았는데, 그러나 너희가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 까지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히12:4)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아무런 어려움 없는 현실에서 믿음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은가요?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합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히12:1)

왜 이 사람들을 보여줍니까?

우리들로 경주 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이 한 번 달리듯이 다시없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게 살지 말고 믿음의 사람들 같이 더 좋은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기회지난 후에 후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껄껄하지 말고 기회가 있(왔)을 때, 영혼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히11:16), 곧 하늘에 있는 본향, 더 좋은 부활(히11:35), 더 좋은 것이 예비 된 곳(히11:40) 을 향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나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저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생각하였습니다.(히11:13).

그래서 저들은 이 세상에서 받은 사는 날 동안의 시간과 살고 있는 활동의 공간(장소)을 우거하는 자로 여겼습니다(히11:9).

저들은 이 세상을 잠깐 동안 외국에 거류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며, 거류자(居留者)이며 나그네요, 길가는 순례자였습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과 관계가 없다거나, 동떨어져 있다던가, 이 세상에서의 시민(국민)의 의무가 소용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쉬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선교의 무대요, 복음 전파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이 지나갈 교량(브릿지)과 같은 곳입니다.

현명한 자는 그 교량 곧 다리를 지나 건너갈 따름이지, 그 교량 위에 결코 자기 집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대상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은 현실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구원입니다.

성도들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더 믿음을 지키려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더 좋은 부활이 약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같고 들어갈 천국은 같은 것이지만, 부활의 영광은 다릅니다.

더 좋은 부활이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그들이 악형을 받고도 구차히 면치 않은 것은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사망을 이긴 생명의 영웅들입니다.

그리고 없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세계, 곧 천국을 믿음의 기업으로 받은 승리의 영웅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소망과 불사의 세계, 곧 천국의 실존에 대한 그 환상과 소망의 약속을 잃지 않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성취하는데 어떠한 고난이 오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생명행군에는 멈춤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계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더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애굽으로(세상) 되돌아 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 개나, 더러운 곳에 뒹구는 돼지같이 세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에게는 피곤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 건너편에 있는 것은 천국입니다. 주님의 나라입니다.

영생의 세계입니다. 완전하고 거룩한 세계입니다.

바로 주 예수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스러운 거룩한 약속입니다.

신앙생활의 영웅들에게 약속된 길 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히15:55-56)

바로 순교자 주기철목사, 손양원목사, 박관준장로 조만식장로 한경직목사 한상동목사 조용기 목사 같은 우리 선배들의 감사였습니다.

사망을 정복한 생명의 영웅들입니다.

순교자의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순교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 사람’ 입니다.

돈으로도 명예도 부모도, 처자식도 이기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여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약한 사람 같아 보이나 천하가 쥐고 흔들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인격을 닮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잘난 사람들입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금 보다 귀한 믿음은 하늘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내 평생소원 주를 위해 살다가 주를 위해 죽을 결심과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왜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피성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천국을 준비하고 꼭 올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할 영원한 처소를 만드시고, 주님이 천국에서 우리를 꼭 기다리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히11장의 믿음의 용장들과, 믿음의 선진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믿음의 동역 자들 주님께서 사랑하셔서 십자가고난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 사랑 함께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

2021/07/15(목) “히브리서 11:32-40” / 작성: 김광욱

본문 히브리서 11:32-40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장’이라고 불립니다.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면, 첫째는 믿음의 정의에 대한 서론이 있고, 둘째부터 다섯째까지는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믿음의 선진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시대를 구분하였습니다. 둘째는 아브라함 이전 시대 믿음의 선진들, 셋째는 족장 시대의 믿음의 선진들, 넷째는 모세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믿음의 선진들, 다섯째는 사사시대 이후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는 앞에서 아담의 아들 아벨부터 가나안 입성 때의 라합까지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믿음의 내용만으로 충분하기에, 더 이상의 믿음의 선진들의 소개는 불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는 이전 방식대로 한 사람씩 이름을 언급하며 믿음의 내용을 소개하지 않고 간략하게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사사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사시대 이후의 왕정 시대의 대표적인 믿음의 선진입니다. 다음은 사무엘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본 구절에서 6명의 사람을 언급하면서 사무엘을 다윗 다음으로 언급한 것이 주목할만한 점입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에 태어나 왕정시대까지 살면서 하나님께서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 기름을 부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자신의 아들 둘을 사사로 삼았지만(삼상8:1), 사람들은 사무엘을 마지막 사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 직무 이외에 엘리 제사장을 이어 제사장 직무를 수행했으며, 선지자로서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사무엘을 다윗 앞에 언급하지 않고 왕정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들 중 제일 앞에 기록한 것입니다.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할 말이 너무 많기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부터 간략히 이들의 믿음의 행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선진들의 행동의 특징은 ‘믿음으로’ 행함입니다. 사사들과 다윗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겼습니다. 칼이나 창이나 군인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의를 행함 역시 믿음 없이 행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불의를 행하지 않고 의의 행동을 합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특별한 약속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았다’는 것은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현실과 거리가 멀어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약속을 믿음으로, 미래에 믿음의 실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던 사람으로는 삼손과 다니엘이 떠오릅니다. 다윗도 사자를 물리쳤습니다(삼상17:36-37).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믿음으로 불의 세력을 멸한 사람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생각납니다. 맹렬한 풀무불에 들어가고서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칼날을 피한 사람은, 다윗이 사울 왕의 칼을 피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의 칼날을 피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엘리사 선지자가 아람 왕의 칼날을 피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된 사람은, 머리카락이 깎이고 눈이 뽑힌 삼손이 다시 힘을 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신전 기둥을 넘어뜨렸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히스기야가 죽음을 앞에 두고 벽을 향해 간절히 기도한 후 생명이 15년 연장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사람들은 다윗과 앞에 언급된 사사시대 사람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인 여자들은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사렙다 과부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의 수넴 여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여인은,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보았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히브리서의 1차 수신자들이 잘 알고 있었던 성경 외에 인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카비 4서’에 두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90세 되는 제사장 엘르아살이 부정한 음식인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했다가 극형에 처했던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7명의 순교입니다. 7명의 순교자들은 우리나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가면 볼 수 있는 고문 형틀처럼 일반인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문 형틀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속전을 내면 죽임을 면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문자적 의미는 ‘몸값의 지불로 자유를 얻는다’입니다. 오늘날 보석금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도 사형수가 돈을 주고 사형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돈으로 사형을 면할 수 있다면 어느 사형수가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겠습니까? 믿음의 선진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구덩이에 갇히기도 하고, 나무 고랑으로 목이 결박되기도 했습니다(렘20:2).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은 분열 왕국시대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톱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은 이사야 선지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죽음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탈무드와 ‘이사야의 순교’라는 문헌과 초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자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왕이 보는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톱에 의해 몸이 두 동강이 났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자면 “큰 소리로 울부짖거나 울지 않았으며, 그의 몸이 두 조각으로 잘릴 때까지 그의 입술이 성령으로 말하였다”라고 합니다.

칼에 죽은 사람들은 사울 왕 시대에 죽임을 당한 제사장들 그리고 남 유다 왕국 말기에 예언자 우리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렘26:23).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양과 염소 가죽옷은 직물로 제조된 옷에 비해 초라한 옷입니다. 오늘날처럼 잘 재단한 가죽옷과는 거리가 멉니다. 직물이 귀했던 고대에 산이나 들에서 유리할 때 입던 옷이 양과 염소 가죽옷입니다. 더운 날씨에도 이런 가죽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궁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원시 시대의 사람을 떠 오르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먹었던 것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는 세상은 그들이 살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본향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여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불편한 잠자리일 뿐이고, 본향인 천국에 가면 편안한 침대가 있음을 알았던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지금 세상의 불편함에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본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은 단지 야영 생활지입니다.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4절에서 38절까지 언급된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증거 자료를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행한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증인이 되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무엇을 행하더라도 그것이 눈에 보이는 증거로 남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의 행함을 보고 계시기에 마치 CCTV 녹화영상물이 법정에 증거 자료로 채택되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증인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주신다면 더 이상 무슨 증거 자료가 필요하겠습니까? 다음으로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약속의 성취를 받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믿음의 선진들은 구약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존재했던 사람들로서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들은 생전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보다 신약 시대 성도들이 누리는 영적 특권이 더 큼을 부각시켜 주고 있습니다.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은 구약 성도들에 비해 신약의 성도들에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더 좋은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를 누리지 못했으며, 다만 믿음으로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약의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신약의 성도들과 함께 온전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구약의 성도들은 그들 스스로 온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 역시 오직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미래의 사건이 과거의 상태를 온전하게 하였다는 말이 불합리하게 들리겠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보다 늦게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지만, 예수님께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에 존재했던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구약을 구원의 은혜의 기초’라고 말하고 신약은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는 상호 관련성이 있습니다. 예수님 속죄의 피로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 역시 예수님 속죄의 피로 인해 구원에 참예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 세상의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세상의 사람들에게 성취될 수 있도록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구원에 참예하게 된 것을 생각하며, 신약 시대의 성도인 우리는 자신을 죽이는 자원 제물이 되어 흑암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입과 몸으로 드리는 자원 제물이 되어야 이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감사하며, 교회 안팎의 자원봉사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구약 시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바라고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음이 귀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믿음보다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더 좋은 것,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예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구약의 성도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기억하며, 오늘날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견고하게 하는 통로가 되길 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믿음으로 저희의 입과 몸을 하나님께 자원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믿음으로 의를 행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회고해 봅시다.

2. 믿음으로 약속을 받은 적이 있다면(성경을 묵상하다가 받은 말씀) 무엇이며, 그 약속의 실상을 보았습니까? 아니면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3. 삼손이나 히스기야 정도는 아니더라도 믿음으로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된 적이 있습니까?

4. 한여름에 입을 옷이 없어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옷을 입을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다면 믿음의 선진들 중의 누구를 깊이 생각하면 좋겠습니까?

5.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던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작성: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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