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3 장 설교 | 히브리서 31강 – 송태근 목사 \”영문 밖으로 나아갑시다\”(본문 – 히브리서 13:12-13) 14151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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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1강 – 송태근 목사 \”영문 밖으로 나아갑시다\”(본문 – 히브리서 13:12-13)
본문 – 히브리서 1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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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히 13:1~25)

제목: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 (히 13장) · 1.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 2.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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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edesd153.tistory.com

Date Published: 6/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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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3(금) \”히브리서 13:17-25\” / 작성: 이창호A

히브리서 13장 17절은 15절부터 시작된, 영문 밖에서 드려야 할 구체적 … 적어도 이 정도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사도에 가까운 존경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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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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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마지막 권면 – 벧샬롬교회

히브리서 13장. 마지막 권면. 히브리서 13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5-11-18. 설교본문; 음성설교; 음성다운 · 설교 내용 PDF 다운로드. 히브리서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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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church.net

Date Published: 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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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큐티설교(히브리서 13장 1-17절) 그리스도를 본받아

단순한 순종이 탁월한 지혜보다 낫다는 글을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불순종하였던 인물로 성경에 기록됩니다.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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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iic.net

Date Published: 3/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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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설교12th-<마지막 권면과 축도>-히브리서13장

히브리서 설교12th-<마지막 권면과 축도>-히브리서13장 · 1. 네 쌍의 권면과 자족하는 삶의 이유(1~6). *마지막 권면 단락인 히브리서 13장은 처음 여섯 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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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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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11월 18일. 히브리서 13장. – 하늘품은교회

히브리서 13장. 마지막 권면. 1. 많은 배교자들로 교회가 어수선해져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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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4/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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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히13:1-6) 2011. 7. 31 주일예배

그러면 하나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오늘 본문(히브리서 13장)에 다섯 가지의 명령이 나옵니다.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2. 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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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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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1강 - 송태근 목사 \
히브리서 31강 – 송태근 목사 \”영문 밖으로 나아갑시다\”(본문 – 히브리서 13:12-13)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히브리서 13 장 설교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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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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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히 1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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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살아났습니다.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담의 혈통으로 나온 자는 모두 죽었습니다. 이런 자를 살려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목: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 (히 13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히 13:1~25

요절: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신의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2~13)

주제: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자로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다. 사랑의 왕이시다.

이번 주일은 한국전쟁(Korean War,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2일간) 발발(6.25)을 회상하며 나라와 민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이 전쟁은 휴전협정으로 되어 있어 지금도 종전이 아니라 휴전인 전쟁 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준전시 상황으로 67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 서명함으로 일제 강점기 36년이 끝나고 해방되자 남한은 미군정으로 자유민주주의, 북한은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북한은 3년 동안 치밀한 전쟁준비를 하여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에 암호명 ‘폭풍 224’이었는데, 남조선 해방의 명목으로 대한민국에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여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하였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온 것이 그 시작입니다. 마침 주말 휴가로 많은 대한민국 군인들이 전선을 비운 사이에 남한으로 공격하여 3일 만에 서울 미아리고개 전선이 뚫리고 서울이 함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간청으로 참전을 결정하였고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 9:1로 유엔군 참전을 결의하여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인천 상륙을 9월 15일 지휘함으로 16개 나라가 군대를 지원하여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싸워주었습니다. 고마운 나라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들 16개 나라에 가서 교육선교를 하였습니다. 9월 28일에 3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어 시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습니다. 1951년 1월 중공은 조선족을 중심한 인민군을 파병함으로 1.4 후퇴가 되어 동부전선은 고성까지, 서부전선은 강화까지 국경이 형성되어 155마일 오늘날 휴전선이 생겼습니다.

한국 전쟁은 근대 국제 체제가 형성된 1500년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전쟁 가운데 군인 사망자가 일곱 번째로 많았던 전쟁입니다.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여 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여 명, 부상자 48만여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여 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여 명, 부상자 20만 8천여 명, 실종자와 포로, 비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미군 사망자는 3만 3천686명, 영국군 1천78명, 터키군 966명, 캐나다군 516명 순으로 사망자가 많고, 유엔군 실종자와 포로는 각각 3,950명, 5,817명이며 부상자는 10만 3,460명입니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여 명, 학살된 민간인 13만여 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여 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여 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입니다.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던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6.25노래가 1951년부터 불려 왔습니다.

1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이제 다시는 이런 전쟁이 우리나라에 없도록 남과 북이 평화롭게 통일이 되어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한국이 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일제 강점기 때 평양신학교 채플에서 즐겨 불렀던 찬송이 70장(통 79장)이 오늘도 부르면 좋겠습니다. 마틴 루터가 좋아한 시편 46편을 기초로 쓴 가사.

1.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 이 방이 떠들고 나라를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없네

4.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히브리서 마지막 장인 13장을 강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완성”이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전체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소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복음을 20여 년간 해 왔으나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라고 표현할 만큼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무궁한 대제사장, 멜기세덱, 새 언약의 중보자, 천국의 기업, 믿음의 완성, 소망의 완성, 사랑의 완성이심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히 13:1~6)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그러나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에서 형제 사랑(필라델피아 philadelphia, brotherly love)는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벧전 1:22).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이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 선행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합니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구체적으로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천사인줄을 알지 못하고 손님을 잘 대접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세 손님들에게 ‘달려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절), ‘급히 장막에 들어가’ (6절), ‘속히…떡을 만들라’(6절), ‘짐승 떼에 달려가서’(7절), ‘급히 요리한지라’(7절) 등의 표현을 보면, 그는 손님을 영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님 대접이나 선행은 참된 경건과 신앙의 증거입니다. 딤전 3:2에서 바울은 장로의 자격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기를,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딤전 6:17-18). 잠 11:24-25는 말하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합니다.

3절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행위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감옥에 갇혔을 때 방문한 자의 행위가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그러나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부부의 관계는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관계입니다. 결혼이나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관계, 즉 인간이 범죄 하기 전부터 가졌던 귀하고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위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잠 5:18-19는, 아내를 사랑스러운 암사슴과 아름다운 암노루에 비유하였고 남편은 그 아내의 품을 항상 만족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가르칩니다.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에 간음이나 음행은 부부 사랑에 반대입니다. 그러려면 결혼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여 처신해야 하며, 술이나 춤 혹은 인터넷 채팅 등 중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부부는 마귀의 시험이 틈타지 못하도록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5-6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오?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번하게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헤어집니다. 우리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할 때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만을 따르자(히 13:7-13)

7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일러 주고 여러분들을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자.

7절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일러 주고 여러분들을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와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파악하여 해석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말씀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들은 먼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합니다(벧전 5:2-4).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들의 인도와 지도에 잘 따라야 합니다. 교인들은 인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생각하다’는 원어(므네모뉴오 mnemoneuvo)는 ‘기억하다’는 뜻입니다. 좋은 모범을 보인 인도자들은 바른 설교와 바른 행위를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 마지막도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물론 바르지 못한 설교와 나쁜 행위로 나쁜 모범을 보이다가 불쌍한 마지막을 가진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 같은 제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던 데마 같은 제자가 그러하며 또한 돈과 명예와 육신적 쾌락에 빠진 자들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와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Jesus Christ the same yesterday, and to day, and for ever.” 이 요절은 전도자 무디( Dwight Lyman Moody, 1837∼1899)가 가장 좋아했던 구절로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당(The Moody Church) 발코니에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의 참 인도자이십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도,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천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십니다.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러 가지’라는 원어(포이킬로스 poikilos)는 ‘다양한’이라는 뜻이고, ‘다른’이라는 원어(크세노스 xenos)는 ‘이상한’이라는 뜻입니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교훈들을 가리킵니다. 영지주의, 뉴에이지 사상, 종교 통합주의가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말합니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고정된,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명확하고 불변적인 진리를 버려두고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 보수신앙을 붙 들어야 합니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 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사였습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분은 그분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분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었다.

‘능욕’이라는 원어(오네이디스모스 oineidismos)는 ‘비난, 불명예, 모욕’을 뜻합니다. ‘그분의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영문’은 ‘진영’(陣營)이라는 말인데 진영은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핍박을 받을 때 사회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성도들이 일반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욕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주님의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3. 찬송과 선행의 예배(히 13:14-25)

14 이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같은 예배를 기뻐하시느니라. 17 이는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여러분들의 혼들을 위하여 깨어있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19 내가 더 속히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21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분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 형제들아 내가 여러분들을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여러분들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여러분들을 보리라. 24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여러분들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14-16절 “이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 같은 예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욕 즉 그분의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우리가 장차 올 것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즉 현실은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고난의 생활이지만,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가 죄 사함의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신약 성도는 삶 자체가 ‘거룩한 산 제물’이며(롬 12:1) 찬송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이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또 찬송은 그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증거 한다’는 원어(호몰로게오 homologeo)는 ‘감사한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찬송은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가장 좋은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남의 인격을 허물고 남을 거짓 되게 비난하는 일에 사용되었으며 종종 더러운 욕설이나 음란한 말의 도구가 되지는 않았던가. 이제 이런 더러운 입술이 정결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합니다.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영문 밖에서 희생하신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이 사랑을 이웃과 나눔이 주님께서 열납 하시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worship service)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mutual service).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열매입니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코이노니아 koinonia)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으로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힘써야 할 섬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먼저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그다음은 이웃을 향한 선행도 구제가 실천되는 예배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생활화입니다.

17절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그들은 여러분들의 혼(souls)을 위하여 깨어있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決算 give account)할 자들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될 것이며 근심으로 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것이 또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내가 더 속히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합니다. 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살전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살후 3:1, “형제들아, 여러분들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들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18-19절에서 바울이 수신자들인 유대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그는 그가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 곳에 있습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0-21절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분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기원의 내용은 우선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십니다. 요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부릅니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작은 목자들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무궁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증거 하신 신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 하십니다. 행 17:31, “이에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평강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습니다. 사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죄 사함 받은 혼들(souls) 속에 평강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이루시기를 소원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됩니다. 우리는 다른 특별한 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입니다.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증거 합니다. 계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히브리서 강해를 마무리 하면서 22-25절로 대신합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처럼 말씀을 받읍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분들을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여러분들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여러분들을 보리라.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여러분들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다른 바울 서신처럼 히브리서도 마지막 안부와 축도로 마칩니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을 받는 교인들에게 그의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 부르는 살전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회자와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로부터 교회에 목사와 장로들을 세우셨습니다(행 14:23; 20:28).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도 복음이 증거 되었음을 보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히브리서를 거듭 읽으시면서 예수님에 대해 확실히 증거 하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 히브리서를 마지막 장까지 읽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모세보다, 아브라함보다, 믿음의 모든 선진들보다 우월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완성하시고 소망을 완성하시고 사랑을 완성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시며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Yes, Jesus loves me, the Bible tells me so.)” 찬송 563장(통 411장) 부르며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게 하옵소서. 우리나라를 어떤 핵무기, 미사일, 테러, 코로나 바이러스, 자연재해,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전쟁의 방법이 아닌 평화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로 통일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니엘이 본 네 짐승과 작은 뿔 환상(단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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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3(금) \”히브리서 13:17-25\” / 작성: 이창호A

본문 히브리서 13:17-25

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교회지도자들을 향한 태도와 기도(17-19)

히브리서 13장 17절은 15절부터 시작된, 영문 밖에서 드려야 할 구체적 예배의 마지막 권면에 해당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지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이 부분은 바로 이어지는 18절, 19절과 함께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부분과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17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란 정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지도자들, 곧 목사입니다. 7절에도 과거에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언급하고 있고, 여기에서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빠르면 AD 60년 초에 기록되었고, 늦어도 도미티아누스 박해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서의 이런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처음 태동한 초대교회 이른 시기부터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의 직무에 대해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고,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진술을 통해서 그들에게 일정 수준의 생활비도 지급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성도더러 인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의 어감으로 번역하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을 신뢰하며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라” 정도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인도자들이 성도의 영혼을 위해 경성하기를, 깨어 지키기를 마치 자신들이 이에 대해 계산하는 사람인 것처럼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맡은 영혼들을 깨어서 밤낮 가리지 않고 돌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맡겨진 양떼를 돌보되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한 눈 파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맡은 일에 대해 결산할 때가 오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이름과 명예를 지켜내어야 합니다. 자신의 흠결 있는 삶의 단면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에 누가 되는 행실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본질적으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자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철저한 책임의식, 사명감, 말씀 앞에서의 정결을 추구하는 구도자적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영적 지도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오늘의 말씀을 근거로, 성도는 목사가 사명감에 바탕을 두고, 즐거움으로 목회 사역을 감당하도록 그 기반을 함께 닦아가야 하고, 목회자는 무한한 책임감을 가지고 목회현장에서 성도를 향해 자신이 해야 할 섬김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렇게 순종과 섬김의 선순환이 교회 가운데 일어나야 은혜로운 공동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말이 현대인들의 사고체계에 이질감으로 느껴집니다. 특히 복종하라는, 아래를 뜻하는 전치사와 굴복하다를 뜻하는 동사의 합성어로 완전히 굴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기독교 윤리의 근간이 자기부인임을 전제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부인하시며 종의 형체를 입으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독립되고 존엄한 인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닮아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께서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순종과 복종이 요구되는 것은 성도를 비롯한 공동체의 영적 유익을 위함이기도 하고, 인도자들이 성도의 영혼을 위해 깨어지키기를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감당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존경어린 복종, 사랑 가운데서 나오는 성도의 복종을 통해 인도자들이 자신의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정점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양치는 목자들의 우두머리이시며(벧전5:4), 양들의 큰 목자(히13:20)이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양무리이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양 떼를 돌보도록 위임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들은 양무리를 위임해주신 주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야 하며, 성도는 이런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의 목사들에게 순종할 것을 권면한 뒤에, 자신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18-19)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성도는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히브리서 기자와 같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특히 말씀의 종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완벽한 사람이 없고, 혼자서도 능히 바로 서있을 수 있는 강건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성령 하나님의 함께하시고 붙드시는 은혜가 없다면,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교회를 어렵게 하기 위해서 사탄의 입장에서 누구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까? 설교자를 공격하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만약 설교자들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령을 이탈한다면 교회는 금방 허물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구약에 정통한 설교자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사도에 가까운 존경을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당시 성도의 기도가 필요했다면,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더더욱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18절과 19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18-19, 새번역)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한 점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모든 일에 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좀더 속히 돌아가게 되도록 기도하여 주시기를 더욱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한 점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양심은 창조주께서 사람 안에 창조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기를 객관화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의 길을 걸어, 이 능력을 상실했었으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 누구라도 죄를 지으면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뉘우칠 뿐만 아니라 그 죄를 다시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 삶을 되돌아볼 때, 이 양심이 바르게 작동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법에 대해 갖는 윤리적 감수성을 갖는 수준으로는 부족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처럼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이 양심이 있는 줄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선한 양심을 유지하는 것은 신자로서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기자는 이 양심을 바탕으로, 모든 일에 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바르게 행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한다는 말은 그가 선한 양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일에 바르게 처신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내가 왜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는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뿐만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살아가면서 작은 일에서조차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직면했던 하나님의 높고 크신 보좌 앞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모든 일을 바르게 처리해 나갈 수 있어야 하고, 서로를 바르게 세워나가기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20-25)

(20-21)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까지 설명해왔던 모든 가르침들이 수신자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 맺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의 내용을 듣는 모든 성도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다듬어주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특별히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이 부분을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너희로 합당하게 하고, 적합하게 하고 능하게 하사”라고 번역한 바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절대적인 완전에 이르는 상태가 되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되어 이를 듣고 이해한 바에 따라 행할 수 있도록 준비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분 앞에 자신의 능력으로 능히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한 힘을 다해서 거룩을 추구하고 성결한 인생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고, 성화되어 갑니다.

우리가 말씀을 이루기 위해 애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의 영원한 언약의 핏값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 백성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구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큰 복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참 자유를 가져다주며,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진리에 붙들려, 진리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 복에서 떠나 마음대로 살았던 지난날로 되돌아가기를 동경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본문의 “권면의 말”이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13장 15절에 따르면 당시 회당에서 행해졌던 설교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이 설교한 바를 수신자들이 받아들이도록 명령하지 않고, 간절하게 용납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중하게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품위 있는 태도로 전달하는 기자의 자세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신앙생활의 위기, 변곡점 앞에서 가장 먼저 되새겨야 하는 말은 가장 기본적인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를 출발점으로 삼으면, 우리는 지금 위치한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판단의 출발은 하나님으로부터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사는지 되돌아보는 것부터 해야 할 일입니다. 히브리서의 내용 중,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응당 마음에 지니고 살아야 하는 자세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달하면서도 이처럼 간곡하게 써야 했다는 것에서, 너무 당연한 진리조차도 지나치게 쉽게 우리 안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의의 길에 대한 권면과 설명을 자주 듣기 싫어하는 것은 아닌지, 듣고 싶어하는 말만 들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응당 용납해야 합니다.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총명을 어둡게 하고,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을 살았다고는 하나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다시금 밝혀진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용납할 뿐만 아니라 마음판에 새기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시편 119편 5절,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3-25)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히브리서 기자는 디모데가 석방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기자와 디모데가 만나게 되면 함께 수신자들에게로 가겠다는 의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서로 지역이 떨어져 있지만 문안하고, 서로의 안위를 확인하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이들과의 관계도 소중합니다. 우리 안에도 마치 성도의 교제는 선택적으로 가져가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적이지 않습니다. 모두 이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와 함께하기를 축복하듯이 늘 우리 주변에 허락하신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길 소망해봅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말씀으로 온전해지려는 몸부림이, 교회의 인도자를 향한 기도가 회복되도록 우리 인생 가운데 역사해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상관없는 육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인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도구가 되는 인생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과의 관계만큼이나 우리 안에 허락하신 공동체의 씨줄과 날줄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역할을 다하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성도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7)

2.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20)

3. 히브리서 기자가 성도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세요. (21)

4. 성도의 교제의 측면에서 나는 얼마나 믿음을 북돋우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까? (23-24)

(작성: 이창호A)

히브리서 13장. 마지막 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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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13장 마지막 권면 (찬 135)

1. 많은 배교자들로 인해 교회가 어수선해져 있을 때,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일이다(1). 이런 형제 사랑은 관대한 손님 대접으로 표현된다(2). 손님 대접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정규적인 사역이 될 수 있다. 사랑은 구체적이고 관대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1세기에는 여관이 비위생적이었고 비쌌던 것 때문에 손님을 집에 모시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순회 사역자들을 위한 중요한 사역이었다.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하였다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또 초대교회에는 신앙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게 된 형제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형제들을 동정하고 자신도 갇힌 자인 것처럼 그들을 섬기라고 권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권면이다.

2. 두 번째로 기자가 주는 서신의 마지막 권면은 거룩하고 영적인 삶을 지키는 것에 관한 것이다(4). 결혼생활은 정결하게 지켜져야 한다. 성적인 죄가 난무하는 오늘날 이 말씀은 더욱 적절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성적 범죄?이런 것은 어느 시대나 타락의 특징으로 빠지지 않고 나타났다?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 또한 경건을 파괴하는 해악이다. 그래서 기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라고 권면한다(5).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만족할 수 있다(6). 우리는 그 주님으로 만족하는가? 주님으로 만족함이 없다면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아무 힘도 없는 허수아비 같은 신앙이 될 것이다. 자족이 경건을 유익하게 한다(딤전 6:6).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돈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경건을 무너뜨리는 요소다(6). 사람들의 칭찬, 인기, 갈채를 원하거나 비난, 정죄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를 넘어지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3. 세 번째 권면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7~12). 8절은 히브리서에서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구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이 구절은 7절과 9절의 문맥에서 보아야 하는데, 7절은 교회의 이전 지도자들에 관하여, 9절은 거짓 교사들에 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자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은 그들의 증거, 지속적인 열매, ‘삶으로 나타난 결과’를 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이다(7). 그냥 목사니까 장로니까, 무조건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다! 9절에서 음식을 정하고 부정한 것으로 나누는 정결규례에 관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다룬다. 신자의 마음을 강건케 하는 것은 은혜지, 음식의 규칙을 지키는 데서 오지 않는다(9). 여기서 기자는 제사의 이미지를 다시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을 수 있었지만, 속죄일의 제사는 그렇지 않았다. 제물 전부가 불태워졌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배척을 받고 속죄제물로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성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울타리-안전 지대-를 벗어나서 세상을 섬기라는 권면일 것이다. 아무래도 약간은 배타적이었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을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안전 지대 밖으로 나아가 세상을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선교하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무시하고 주위에 안전한 성벽을 쌓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성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권면은 충격적 호소였을지도 모른다. 이 권면은 회당에서 쫓겨난 영웅적인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고 싶어했던 주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성도라면 모두가 장차 올 도성을 기다리면서 이렇게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다(14).

4. 기자는 새로운 형태의 예배(제사)를 소개한다(15~16). 새 언약의 성도들에게는 찬미의 제사와 그 이름을 증거(인정)하는 입술의 열매로서의 제사, 그리고 선을 행하는 구제의 제사가 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들을 존중하여야 한다(17~21). 첫째로 목회자는 돌보는 영혼들을 위해 경성하는 자들이다(17). 경성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혼을 돌보되,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초병처럼 주의하여 밤새 지키는 태도를 말한다. 기자의 권면은 지도자들에 대하여 무분별한 순종과 지각 없는 복종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목회자에게 열심히 반응함으로써 목회자가 자신의 사역을 행복과 즐거움으로 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교인은 목회자의 기쁨과 자랑이고 면류관이다(살전 2:19). 목회자는 영혼을 위해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처럼 하는 자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때 양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설명드려야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5. 히브리서 기자도 한 사람의 순회 목회자로서 말한다. 자신이 영적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다(18~19). 이런 점에서 목회자 자신도 성도들의 기도에 의존한다. 어떤 지도자도 자신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와 무관하게 사역할 수 없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성도 모두는 다 양의 큰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존한다(18~19). 기자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요청할 뿐 아니라 직접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한다(20~21).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신다고 할 때, ‘온전하게’란 말의 뜻은 그물을 깁는다는 말이다. 회복하고 수리하고 고쳐서 온전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인데,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내신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시려고 하기 보다는, 그 일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고 주의 형상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는 마지막 인사를 전하면서 서신을 마친다.

6. 13장에서 기자는 마지막 권면을 몇 자 적고 있다. 위기의 시대에 그리고 교회가 환난에 처해 있을 때,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또는 책망하고 경고하였다. 인간의 말로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준다. 그들이 이 서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썼듯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 실패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모든 환난을 이길 것이고 살아남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Sola Gratia!

7. “하나님 아버지, 히브리서를 통해 저희에게 필요한 위로와 사랑 어린 경고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그러시듯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심과 같이 저희의 안주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떨쳐내고 주님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복된 인생들이 되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온전하게 드러내게 하옵소서.”

히브리서 설교12th-<마지막 권면과 축도>-히브리서13장

마지막 권면과 축도 / 2019.7.28. / Hebrews 13:1~25

*돈 많은 사람인가 잘 사는 사람인가?

-어느 날 기독교방송에 출연한 모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돈 많은 사람을 ‘잘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겁니다. 돈 많은 사람은 그냥 ‘돈이 많은’ 거고 반드시 잘 사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반면 돈은 좀 없지만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돈이 있으면서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나 쉽게 ‘돈이 많다’와 ‘잘 산다’를 동일시하며 살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됩니다.

-물론 언어적으로는 ‘잘살다’라는 말이 하나의 의미망을 갖게 되면서(동사) ‘부유하게 살다’라는 의미로서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잘사는’ 사람이 반드시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잘사는 집에도 잘못 사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못사는 사람이면서 진짜 잘못 사는 사람도 있고, 비록 살림살이로는 못사는 축에 속하지만 ‘잘 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 여러분은 어떤 쪽에 속하십니까? 설마 못살면서 잘못 사시는 건 아니겠죠? 잘살면서도 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잘살면서’ 동시에 ‘잘 살고’ 싶겠지만, 혹시 못살더라도 ‘잘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영화(베테랑)에서 배우 황정민이 그랬다면서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돈이 없어도 위신과 체면은 세우며 살고 싶다는 말이겠죠? 돈 없는 것까지는 참아볼 만한데, 최소한의 지켜야 할 양심, 도리, 아이덴티티까지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또 하나님의 섭리를 담은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그 아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입니다. 가오(顔) 세우고 삽시다. 성도의 얼굴 뒤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 얼굴빛 가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존감,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를 마무리하면서 ‘과연 인간은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나누어 보았습니다. 자족(自足)이라고도 하고, 지족(知足)이라고도 합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 ‘족함을 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할까>라는 글에서 톨스토이는 뭐라고 말할까요? 빠홈이라는 사람에게 해가 지기 전에 걸어서 돌아온 만큼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다 아시죠?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죽어서 묻힌 2미터 정도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이었다면 욕심을 비우고 일찌감치 홈으로 복귀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사실 좀 궁금합니다.

1. 네 쌍의 권면과 자족하는 삶의 이유(1~6)

*마지막 권면 단락인 히브리서 13장은 처음 여섯 절에서 자족하는 삶의 이유를 다룹니다. 네 쌍의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①형제 사랑이 약해지지 않고 지속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또한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1-2). 그러다가 천사를 대접한 이들도 있답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②감옥에 갇힌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을 기억하랍니다(3). 자유를 억압당하고 몸의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 그들도 우리가 누리는 일상과 몸의 자유로움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도록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③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랍니다(4). 결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철모르던 시절 짝을 맺어 동고동락한 아내(남편)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성 문제에 있어서 정결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음행하는 자, 간음하는 자, 조금 확대해석하여 영적 간음, 우상숭배를 하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결혼과 성의 문제에서도 만족할 줄 알고, 고마운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④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권면합니다(5-6).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딤전6:10처럼 돈을 사랑하다가 일만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요즘의 범죄를 들춰 보세요, 대부분이 돈과 관련됩니다. 돈을 사랑하다 미혹을 받고 옳은 길을 가지 못하며 심지어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오늘 5절은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다른 차원에서 말합니다. 돈은 정말 어렵게 우리 수중에 들어오지만, 얼마나 쉽게 ‘구멍 뚫린 주머니 속 동전’처럼 빠져나갑니까? 없을 때가 참 많습니다. 쉽게 사라집니다. 일관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버리시지도 않습니다. 돈은 우리를 쉽게 배반하지만 주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신31:6)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돈입니까, 주님입니까? 성도들의 만족함의 근거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주님의 돌보심에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말고 삶에서도 증명해 보이시기 바랍니다.

*만족을 아는 삶, 자족하는 삶은 인간의 본능적인 성향, 소유욕과 탐욕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삶입니다. 아주 사소한 영역에서라도 자족하는 삶을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머니가 넉넉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편에서 나를 도우시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하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시118:6)

2. 추가적인 권면과 삶의 예배(7~19)

①누구(무엇)를 따를 것인가(7~9)

-먼저 과거 지도자들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들려주시던 분들 말입니다. 그분들의 삶의 열매가 어떠한지를 살펴보면서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겁니다. 때로는 (속상하게도) 말년이 아름답지 못한 분들도 있고, 여전히 믿음의 옳은 길 가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나이 먹을수록 욕심과 고집을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과 삶의 괴리감과 불일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분들을 포함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8,9절을 참고해서 표현한다면, 그건 바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교훈에 솔깃해지기 쉬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지킬 만한 것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 희한한 기준을 자기 나름대로 정해놓고 자신도 힘들게 하고 남들에게도 강요하는 존재, 그게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우리 삶의 본이 되십니다. 사람은 한결같기 힘들지만, 주님은 한결같으시고 변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또는 무엇을 따르겠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목표물에 시선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②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 입술과 손의 열매(10~16)

-10절부터는 히브리서다운 화제를 다시 사용합니다. 앞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던 ‘우리는 가지고 있다’라는 진술로 시작됩니다. 성도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요? 10절은 ‘제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를 통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옛 언약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장막에서 섬기려 하는 자들은 이 특권을 누릴 수 없습니다.

-대속죄일 제사에서 대제사장은 동물들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 동물들의 사체는 진 밖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저자는 지금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우리도 주님의 수치를 짊어지고 성문(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도전합니다. 거기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어쩌면 진 밖으로, 성문 밖으로, 낮은 곳으로, 사람들이 외면하는 곳으로 나아가기를 의미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수치를 짊어지는 삶입니다.

-루터 영화를 보셨죠? 마지막의 명대사를 기억하십니까? 독일 황제가 최종 결정을 내리던 무렵, 아이들을 모아놓고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하던 루터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일컫는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compassion’입니다. 세상의 어떤 부자도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온다고 달려나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열정과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 연민 또는 동정 또는 긍휼. 그러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쩌면 고통당하는 평범한 성도들에 대한 긍휼(compassion)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감독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에 말씀드린 대로 히브리어로는 ‘긍휼’과 ‘자궁’이 어원이 같습니다. 자신의 배가 아파서 나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부모의 마음과도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긍휼히 여긴다는 겁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라면, 주님이 당하신 수치라면, 나 또한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영광으로 알고 기꺼이 당하겠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첫 세기를 살았던 신앙 선배들의 고백이었습니다.

-14절은 우리가 여기에 영원한 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처소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 된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자고 권면합니다. 노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입으로 내뱉는 모든 고백들이 그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한 가지가 더 있죠. 16절이 말하듯이 선을 행하고 나누는 것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입니다. 입술의 열매와 손의 열매, 찬양하는 제사와 선을 행하는 제사. 입술의 고백과 나눔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③기쁨으로 일하게 해 주오(17~19)

-17절은 현재의 인도자들에게 청종할 것을 말합니다. 리더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리더십의 부재’ 시대를 지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리더를 세우시는 분도, 그에게 권위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리더십의 타락과 악함에 대해 매의 눈으로 살필 필요가 있지만, 리더십 자체를 부인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법정에라도 나서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먼저 도망가지 않습니다. 몰라라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리더들이 어떤 마음으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당연히 근심 걱정 때문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게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저자 일행을 위한 기도 요청이 이어집니다(18). 모든 일을 선한 양심에 따라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수신자들 그룹에게로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3. 문안과 축도(20~25)

*저자는 20,21절에서 수신자들을 축복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간단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에서 가르치셨던 양용의 교수가 좀 더 쉽게 번역한 언어를 참조하여 읽어 보겠습니다.

-“평화의 하나님, 곧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들로부터 이끌어 내신 분께서, 여러분이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모든 선한 것으로 여러분을 갖추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그분께서 당신 보시기에 기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하기를! 아멘.”

*22-24은 개인적인 후기입니다. 수신자 형제들이 자신의 권면의 말에 맘 상하지 않고 잘 이해해 주기를 당부합니다. 형제 디모데가 석방된 소식을 전하며 디모데와 함께 조만간 수신자들을 방문하겠다고 말합니다. 교회를 지도하는 자들과 성도들에게 문안을 전하라고 하며, 이탈리아에서 온 무리들도 안부를 전한다고 합니다.

*25절은 짧은 축도입니다. “은혜가(지금까지 설명해왔던 바로 그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4. 닫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히브리서를 공부했습니다. 충분한 이해가 되지 못했다면 설교자의 전달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개인적으로 히브리서를 좀 더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될 수 없이 뛰어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단번의 제사로 자신을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늘 지성소, 하나님 앞에 이르는 길을 내셨습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를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 자들입니다.

-이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술의 열매와 나눔의 열매를 맺으심으로써

항상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일말씀묵상. 11월 18일. 히브리서 13장. > 매일말씀묵상

히브리서 13장. 마지막 권면.

1. 많은 배교자들로 교회가 어수선해져 있을 때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1). 형제 사랑은 관대한 손님 대접으로 표현됩니다 (2).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격려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신앙으로 감옥에 갇힌 형제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갇힌 자처럼, 이들을 동정하고 섬기라는 이 권면은 마태복음 25장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핍박과 배교로 인색해지기 쉬운 시절에도, 형제들을 대접하고 섬기라고 했다면, 오늘 이 시대도 동일하게 살아야할 신자의 삶입니다.

2. 본문의 두 번째 권면은 거룩하고 영적인 삶에 관한 것입니다 (4). 결혼생활은 정결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 성적인 범죄가 난무하는 오늘날 이 말씀은 더욱 적실한 말씀입니다 . 하나님은 성적 범죄(이것은 어느 시대나 타락의 특징이다)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도 경건을 파괴하는 해악입니다. 성도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것을 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5) .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분명하다면, 성도는 언제나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6). 우리는 날마다 주님으로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허수아비 같이 무력해질 것입니다. 자족이 경건을 유익하게 합니다 ( 딤전 6:6).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돈을 사랑하는 것만큼 우리의 경건을 무너뜨립니다(6).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기를 바라고, 비난이나 정죄를 두려워하는 것도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3. 세 번째 권면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7~12). 8절은 히브리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8절은 7절과 9절의 문맥에서 보아야 하는데, 7절은 교회의 이전 지도자들에 관하여, 9절은 거짓 교사들에 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자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은, 그들의 지속적인 열매, ‘삶으로 나타난 결과’를 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7). 그냥 목사이고 장로니까, 분별하지 않고 그저 본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4. 9 절에서 음식을 정결하고 부정한 것으로 나누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다룹니다 . 신자의 마음을 강건케 하는 것은 은혜이지, 음식의 정결규례가 아닙니다(9). 여기서 제사의 이미지가 다시 소개됩니다. 보통 제사장들은 제물을 먹을 수 있었지만, 속죄일의 제사는 예외여서 제물 전부가 불태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배척을 받고 속죄제물로서 영문(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성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그들 자신의 울타리(안전지대)를 벗어나서, 세상을 섬기라는 권면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약간은 배타적이었을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문은 주님을 따라서 자신의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섬기는 백성이 되라는 말입니다. 선교하는 백성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무시하고, 주위에 안전한 성벽을 쌓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성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권면은, 회당에서 쫓겨난 영웅적인 성도들 뿐 아니라, 그 안에 머물고 싶어 했던 주저하는 성도들 모두에게 충격적 호소였을 것입니다. 성도는 모두 장차 올 도성을 기다리며 이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14).

5. 본문은 새 언약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예배 ( 제사 ) 를 소개하는데 (15~16), 찬미의 제사와 그 이름을 증거 ( 인정 ) 하는 입술의 열매로서의 제사 , 그리고 선을 행하는 구제의 제사입니다 .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들을 존중하여야 합니다(17~21). 목회자는 돌보는 영혼들을 위해 경성하는 자들입니다 (17). ‘경성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혼을 돌보되, 목자가 양을 지키듯 주의하여 밤새 지키는 태도를 말합니다. 본문은 지도자들에게 무분별한 순종과 지각없는 복종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사역을 행복과 즐거움으로 감당하도록 반응하라는 권면입니다. 교인은 목회자의 기쁨과 자랑이고 면류관입니다(살전 2:19). 목회자는 영혼을 위해 경성하기를 자기가 청산할 자인 것처럼 해야 하며, 성도는 자기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와 함께 해야 합니다.

6. 히브리서 기자도 한 사람의 순회 목회자로서 말합니다 . 자신이 이런 영적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18~19). 목회자는 성도들의 기도에 의존합니다 . 어떤 지도자도 자신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 없이 사역할 수 없습니다 . 성도들은 목회자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와 성도 모두는 양의 큰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존합니다(18~19). 기자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요청할 뿐 아니라 직접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20~21).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길 기도하는데, ‘온전하게’란 말은 그물을 깁는다는 뜻입니다. 회복하고 수리하고 고쳐서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만드십니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22).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시기보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고,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13 장은 히브리서의 마지막 권면들입니다 . 히브리서는 위기의 시대에, 환난에 처한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또는 책망하고 경고하였습니다. 기자는 자신의 격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줍니다. 그래서 이 서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어떠한 상황에도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 그들은 모든 환난을 이길 것이고 살아남을 것이며 ,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 오직 주님의 은혜로 . Sola Gratia( 오직 은혜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히브리서를 통해 저희에게 필요한 위로를 주시면서도, 사랑을 담아 경고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게 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들을 감당하도록 힘과 능력을 부어 주옵소서. 또한 어느 순간에도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떼지 않고, 더욱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히13:1-6) 2011. 7. 31 주일예배

드디어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인 13장까지 왔습니다. 지난 해 9월 12일부터 시작해서 오늘 33번째 히브리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12장에서 13장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관찰이 필요합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가? 등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조명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분은 모세보다 더 위대한 분이시고, 그분은 천사보다 더 높은 분이시며, 그분은 대제사장들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그리고 13장에 오면서 형제를 사랑할 것, 나그네를 대접할 것 등의 아주 실제적인 권면으로 마무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인 고민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로마서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서신서 말씀들이 이런 패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앞부분은 복음이 무엇인가?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 와 같은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후반부로 가면 실천적인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고민스러운 상황을 만납니다. 이런 삶에 대한 권면을 들을 때 우리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을 공부해 본 사람들은 다 한 번 이상 들어보셨겠습니다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거져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에 대한 말씀이 끝나면 다시 삶에 대한 명령을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이 점에 대해 고민합니다. 열심히 살라고 하면 살긴 하겠는데, 아무튼 머리 속에서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양자 사이에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설명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제 3의 율법이라는 표현도 했고, 또 어떤 학자들은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율법을 구분해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오늘 본문(히브리서 13장)에 다섯 가지의 명령이 나옵니다.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3. 갇힌 자를 생각하라.

4.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이 다섯 가지의 말씀은 꼭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 그것은 율법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주님은 왜 이런 명령을 굳이 하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12장까지 무사히 왔지만, 여기서 13장으로 잘 건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율법적 신앙으로 돌아가게 되든지, 아니면 아무런 맥없는 믿음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이는 일을 일삼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번은 사울이 다메섹(다마스커스)라는 큰 도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 가고 있었는데, 가던 도중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강한 빛이 하늘에서 비취었고,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청년 사울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히브리서에서 1장부터 12장까지는 “주님,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면, 히브리서 13장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래서 13장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이 질문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님, 제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되어서, 이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겠습니까?” “주님, 제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질문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나왔을 때 이 말씀은 들려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모든 말씀은 다 이렇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때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회개했다고 성경을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14-36절까지 긴 말씀을 선포하자 그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형제들아,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십자가에 죽었는데, 우리가 행할 일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집을 나간 아들이 밖에서 고생하다가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혼자 다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런 고백이 바로 오늘 히브리서 13장에 관련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1장부터 12장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분의 존재와 사역과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히브리서 4장 15절의 말씀대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신 분이시고, 시험도 받은 분이심을 말씀하시면서, 히브리서 5장 7절의 말씀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즉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간절히 정말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할수만 있으면 정말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고, 그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당신의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12장까지 전한 히브리 기자는 “우리가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논의를 할 정도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2장까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본문의 말씀을 듣고 묵상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질문을 가진 성도에게 주시는 답변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도 없고, 그런 질문도 없다면 그리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 없다면 오늘의 말씀을 우리를 지나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아닙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바로 이 질문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이들에게 주님은 다섯 가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본문은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권면이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질문을 던질 수도 있는 권면입니다.

본문을 볼 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중에 누구도 그 자체로 충분히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저 사람이라면 내가 실망하지 않고 정말 사랑할만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한 번 지긋이 쳐다보십시오. 다 저를 보고 계시는군요! 제가 그렇게 사랑할만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함량 미달입니다. 본문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는 권면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상대가 사랑받을만 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형제의 모습, 그의 됨됨이, 인격을 보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도, 목사도, 친구도, 자녀도 모두 사랑할만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형제 사랑에는 이런 단서가 없습니다. 어떤 형제만 사랑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형제 사랑은 자격을 전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 때문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장부터 12장까지 내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가기 힘든 그 길, 십자가의 길, 그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릴 수밖에 없으셨던 그 주님, 그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셨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가능성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사랑에 대한 감동과 기쁨을 누리고 살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사랑으로 주님을 닮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 마땅히, 반드시 그렇게 형제를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힘이 모자라고, 때로 그런 사랑을 하기가 힘들 때는 주님께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전심으로, 온맘으로 형제를 사랑하기를 작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의 품꾼의 하나로 보아 달라고 했지만, 어떻게 품꿈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품꾼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음에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작은 아들처럼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도 바울과 동일한 은혜를 받은 우리가 마땅히 형제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어떻게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은혜에 감격한 자로 살아갑시다. 이것에 얼마나 멋진 삶이겠습니까?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초대교회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디도서 1장 8절에서는 감독의 자격 중 하나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나그네라 함은 주로 순회하는 복음 전도자들을 의미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인숙에서 묵었지만, 당시 순회 전도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여인숙에 머물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순회 복음 전도자들은 주로 성도들의 집에 머물곤 했습니다.

2절 후반부에 보면, 손님을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사건은 창세기 18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리의 상수리 나무 아래 있을 때, 여호와께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마침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이 있어 대접을 했는데, 이 세 사람이 바로 여호와와 두 천사였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년 후에 아들을 낳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데 있어서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주로 전도자들이었지만, 그들 중에는 가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규칙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이틀까지 머물도록 하지만, 사흘 이상 머무는 사람은 가짜 전도자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도자들을 섬길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손님, 나그네를 대접할 것을 명령합니다. 본문은 그 당시 있었던 가짜 전도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회 전도자를 대접하는 것은 전도자의 자격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 인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손님을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사람도 있고, 기드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부름을 받기도 했습니다. 마노아라는 사람은 손님을 대접하다가 삼손이라는 아들을 얻을 것을 약속받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잘 드려다 보면 그들이 처음부터 그들이 천사였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고 나서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었음을 깨닫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삶에 복을 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저는 한국에서 부목사로 목회할 때 10명의 부목사들이 주일 저녁예배가 끝나면 한 번씩 모여서 담소를 나누곤 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희 집에서 자주 모였습니다. 그러면 간단한 다과를 나누며 대화의 시간을 가지곤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목사님이 기도하고 함께 간식을 먹으며 대화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기도하시는 목사님들이 정말 간절히 풍성하게 복을 빌며 기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도를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 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저희 집에 누가 오면 가능하면 제가 기도하기보다는 오신 분에게 기도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그렇게 받은 기도가 저의 삶 가운데 다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고, 정말 귀한 은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한 이들도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을 주시기 위한 방편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꺼이, 온맘으로 섬기고, 그러는 중에 천사를 대접하고, 아들도 낳고, 가정에 은혜가 임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갇힌 자를 생각하라

3절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당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살피고 함께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주님은 친히 그런 고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 말씀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다시 한 번 원론적인 말씀을 나눕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고, 그런 삶이 곧 주의 백성에게 합당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섬기던 고 윤덕수 목사님의 간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분은 경상도 산골짜기에서 태어나서 학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겨우 다녔는데, 1년만 더 다니면 졸업할 수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중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 학생을 잘 아는 어느 장로님께서 1년이나 놀고 있는 이 학생을 안타까이 여겨서 지금의 한남대 총장에게 소개를 했습니다. 이 학생을 꼭 1년만 이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 후는 당신이 알아서 결정해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채 대학 시험을 보지도 않은 채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떻게 공부했겠습니까?

거져 받은 은혜란 이런 것입니다. 거져 대학을 갔다고 거져 졸업을 시켜준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계속해서 그렇게 그런 모습 그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갇힌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고통 받는 자를 돌아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4. 결혼을 귀히 여기라

네 번째는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주님 앞에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이렇게 주님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서 주님의 뜻을 묻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결혼을 귀히 여기고 네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복음적인 삶입니까? 복음적인 삶은 바로 결혼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을 잘 지키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음행은 결혼 관계 안에서 순결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간음은 결혼 관계 외에 모든 면에서의 순결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성적인 순결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성도가 순결을 잃어버리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순결을 잃어버리면 받은 구원을 잃어버립니까? 아닙니다. 성도가 순결을 잃어버리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순결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는 아예 처음부터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점이 두려운 것입니다.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순결에 대해 무감각하다면 마치 둘째 아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품꾼의 하나로 살겠다고 해 놓고는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자신을 깊이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5. 돈을 사랑하지 말라.

마지막 다섯 번째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로 족한 줄로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과 누가복음 16장 13절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고, 디모데전서 6장 6-8절에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는 사도 바울이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이렇게 계속해서 말씀하는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고백하며 체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를 1장부터 12장까지 읽고 묵상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던 율법과 전통, 모세와 천사, 대제사장으로 통해 오던 성전 제사, 이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을 히브리서를 통해 만났습니다. 그분은 통곡하며 눈물로 인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몸을 온전히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바로 그 분이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 재물로 인해 염려하지 말라. 네 노년을 위해 걱정하지 말라.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현재와 장래를 붙들고 계심을 믿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장래를 주님께 맡길 수 있다면 오늘 현재 하루 하루를 얼마나 신나고 힘있게 살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현재 우리가 얼마나 마음의 여유와 풍요함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막쓰고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꺼이 주님을 신뢰하고, 기꺼이 이 말씀을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그 사랑에 겨워 주님과 함께 주의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물질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첫 번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나의 재물, 나의 재정적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첫 번째 신앙고백입니다. 십일조는 믿음의 마지막 결단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께서 나의 재정적인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숨길 수도 없고, 거짓으로 할 수도 없는 첫 번째 신앙의 모습입니다.

결론

우리는 히브리서 1장부터 12장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했습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모세나 천사나 대제사장들보다 더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이 되시고 친히 제물이 되셔서 지성소로 나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당연히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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