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에 관한 성경 구절 | 이혼하면 죄인인가요? 하나님도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시잖아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13 27461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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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면 죄인인가요?
하나님도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시잖아요.
이혼을 해도 되나? 하지 말아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는 까닭은
이런 말씀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태복음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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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과 재혼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에서 이혼과 재혼을 허용되는지에 관한 논란은 주로 마태복음 5장 32절과 마태복음 19장 9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음행한 연고 외에 ”는 성경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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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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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의 근거·절차를 규정한 성경 최초의 유일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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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받는 교회 ③] 이혼,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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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0.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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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과 재혼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질문

이혼과 재혼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답변

우선 이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든지 말라기 2장 16절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 성경에 따르면, 결혼은 평생 가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6). 하지만 하나님은 결혼이 죄성을 지닌 두 사람과 연관되기 때문에 이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혼당한 자들, 특히 여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몇 가지 법을 마련하셨습니다(신 24:1-4). 예수님은 이런 율법들이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주어졌다고 지적하셨습니다(마 19:8).성경에서 이혼과 재혼을 허용되는지에 관한 논란은 주로 마태복음 5장 32절과 마태복음 19장 9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음행한 연고 외에 ”는 성경에서 이혼과 재혼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많은 해석자들은 이 ‘예외가 되는 절’이 ‘약혼’ 기간의 ‘음행’을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유대인의 관습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아직 ‘정약’ 또는 ‘약혼한’ 관계에 있어도 이미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약혼’ 기에 저지른 부도덕함은 유일하게 유효한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음행’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보면 모든 형태의 성적 부도덕을 뜻할 수 있습니다. 간음, 매춘 그리고 간통 등을 의미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가 발생한 경우라면 이혼이 허락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적 관계는 부부의 유대 관계에서 필수적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마 19:5; 엡 5:31).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울타리 밖의 성적 관계 때문에 이 유대 관계를 깨는 것은 이혼이 허락되는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구절에서 재혼 또한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다른 데 장가 드는”(마 19:9)이라는 구절은 이 구절이 어떻게 해석되던지 간에 이혼과 재혼이 허락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아무 잘못이 없는 쪽에게만 재혼이 허락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혼 후의 재혼에 대한 허용은 성적 부도덕을 범한 자가 아니라 그 죄의 피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뜻합니다. “죄를 범한 측”도 재혼이 허락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본문에서는 분명치 않습니다.어떤 이들은 고린도전서 7장 15절을 또 다른 ‘예외’로 보는데,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자와 갈라서면 재혼이 허락된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재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믿지 않는 배우자가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믿는 자가 그 결혼 관계를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성경에 나열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학대(배우자 또는 자녀)’ 역시 이혼의 유효한 사유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매우 당연한 경우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추정하는 건 결코 현명하지 않습니다.우리가 예외 구절에 대해 논쟁을 하다가 종종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음행’의 의미가 무엇이든, 그 구절들은 이혼을 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닌 허용 조건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간음을 한 경우일지라도, 부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용서를 배울 수 있고 그들의 결혼 생활을 다시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분명 우리는 그분의 사례를 따라 간음 죄조차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엡 4:32).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배우자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 성적인 부도덕을 저지릅니다. 이 경우 마태복음 19장 9절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그들이 독신으로 남아있기를 원하실지도 모르는데, 이혼한 뒤에 곧바로 재혼을 생각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관심이 분산되지 않게 독신으로 부르십니다(고전 7:32-35). 어떤 상황에서는 이혼 후 재혼이 선택사항일 수 있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선택은 아닙니다.성경은 하나님이 이혼을 싫어하신다는 것(말 2:16)과 화목, 용서가 믿는 자의 삶의 표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밝히고 있습니다(눅 11:4; 엡 4:32).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 중에서조차 이혼이 발생할 것을 아십니다. 이혼하거나 재혼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혼 또는 재혼이 마태복음 19장 9절의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덜 사랑하신다고 느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이혼을 허용하는 구절이 있나?

1. 이혼, 처음부터 허락되지는 않았던 일

크리스천은 이혼율이 일반인들보다 낮긴 하지만 갖가지 갈등으로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혼을 한 크리스천들에 대해 신앙을 이유로 비난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많은 부부가 이혼을 생각해 볼 정도로 큰 위기나 사소한 분쟁, 이견이 있을 것이니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보다 낫다고 할 일도 아니다. 사회적 이목과 목회자라는 이유 등으로 억지로 살거나 서류만 그대로 두고 따로 사는 이들은 더욱 위선적일 수도 있다.

많은 갈등, 특히 종교 문제로 심각하게 이혼을 고려하는 이들이 있을 텐데, 그들은 과연 하나님이 이혼을 허용하시는지,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내 주변의 어떤 여성은 남편이 새로 다니게 된 이상한 교회 목사가 이혼하라고 압력을 넣으면서 불화가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물론 그런 목사는 이단이겠지만 그도 성경을 가지고 말한다는 것이 문제다.

일단 구약성경의 율법에 ‘이혼 증서’에 관한 이 말씀들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가 아내를 취하여 그녀와 결혼한 뒤에 그녀에게 어떤 부정함이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그녀가 그의 눈에 호의를 얻지 못하거든 그는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그녀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을 떠나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느니라. 그런데 나중의 남편도 그녀를 미워하여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그녀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혹은 그녀를 아내로 취한 나중의 남편이 죽었으면 그녀가 몸을 더럽힌 이후에 그녀를 내보낸 그녀의 이전 남편이 그녀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그 일은 주 앞에 가증한 것이니라.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게 할지니라. (신 24:1-4)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세의 율법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 그녀를 버리라고 명령하였나이까? 하니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이 강퍅하므로 너희 아내를 버리도록 너희를 허락하였으나 처음부터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였느니라. (마 19:7-8)

그리고 이 질문과 답 이전에 남녀 관계에 대한 처음의 창조 섭리를 그들 유대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처음에 그들을 만드신 분께서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거늘. (마 19:4-6)

물론 예수님이 계시던 이때도 구약시대이다. 십자가 사건을 전후로 구약과 신약이 나뉘며 새롭게 열린 교회시대 이후로 이방인을 포함한 신약 성도들은 여러 가지 다른 지침들을 받게 된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 이전의 예수님 말씀이 그런 지침과 모순이 된다거나 그 말씀들의 효력이 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신약 교회에 대한 경륜이 다르다는 것이다. 당연히 권리와 의무도 다르다.

이런 개념을 뒤죽박죽 이해하고 적용하면 많은 오해와 문제가 발생한다. 이혼장만 써 주면 끝이 아니라는 거다.

2. ‘갈리게 하라’와 ‘떠나게 하라’의 차이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이혼에 관한 말씀이 있긴 있다. 믿지 않는 배우자, 즉 신앙이 서로 맞지 않는 사람과는 이혼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여, 권장까지는 아니지만 부득이한 경우에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경우다. 우선 문제의 고린도전서 7장 15절 상반절을 먼저 개역개정 성경으로 본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갈라서게 되면 갈리게 하라고…? 정말 이것이 이혼을 허용하는 말씀일까?

그렇지 않다.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는 모든 자유가 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악한 길로 고의로 갈 때는 징계를 받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는 이혼도 가능하다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적절하지는 아니하며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세워 주지는 아니하나니. (고전 10:23)

다만 이 말씀처럼 가능한 모든 일이 유익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7장 15절 말씀을 제대로 번역한 것을 보면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떠나거든 떠나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그런 경우에 속박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7:15, 흠정역)

이처럼 내가 주체가 되어 배우자를 버려도 된다는 문맥이 아니다. 배우자가 정 믿기 싫다면서 떠나기를 원할 때는 보내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는 말과는 그 주체가 사뭇 다르게 들린다. 갈리게 한다는 것은, 마치 교회나 제삼자들이 어떤 부부를 조율하고 판결하라는 식으로 들린다.

그런데 이 구절을 중심으로 7장을 잘 보면, 사도 바울은 최악의 상황을 말하면서 오히려 웬만해선 이혼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매우 많은 교회였다. 이들에게는 험한 사례를 많이 말하면서 가르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잘 새겨서 봐야 한다. 앞뒤 문맥과 강조점이 무엇인가? 이어지는 7장 16절에서는, 배우자가 하나님을 믿게 될지도 모르는데 꼭 보내야겠느냐고 묻는다.

오 아내여, 네가 네 남편을 구원할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 남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고전 7:16)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며, 우리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애타게 찾으시는데, 이미 구원받은 성도인 여러분이 한 영혼을 위해 남은 인생을 투자할 가치가 없겠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3. 끊어질 수 없는 관계를 예표(豫表)하는 결혼

구약의 대언자 호세아는 창녀인 고멜을 끝까지 사랑하라는, 어찌 보면 부당해 보이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물론 호세아는 그 명령을 안 따라도 구원을 못 받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호세아와 고멜을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아내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성도들, 즉 그분과 정혼한 ‘한 처녀(신부)’인 교회시대 성도의 관계와 원칙이 비슷하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남편인 하나님을 잊고 음탕한 고멜처럼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내치시지 않는다. 신약 성도들도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구원을 잃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불공정한 약속이다. 결혼도 공정하고 평등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결혼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인내로 완성된다. 고멜과 호세아, 구약 성도와 하나님,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이런 원리들을 담고 있다.

고린도전서 7장은 15절의 잠깐 언급을 빼면 다 이혼하지 말고 한 몸으로 잘 살라는 권면이다.

믿지 않는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히 구별되고 믿지 않는 아내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히 구별되었나니 그렇지 않으면 너희 자녀들도 부정하였을 터이나 이제 그들이 거룩하니라. (고전 7:14)

믿지 않는 사람도 믿는 사람과 결혼하면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는 이 말씀은 부부가 한 몸이라는 원리가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을 해도 예외가 아니라는 하나님의 원리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걸림이 되거나 교회에 방해가 되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거나 허용하시는 이혼은 전혀 없다. 그런 상대면 결혼 전에 만나지 않기를 바라시겠지만, 이미 결혼한 뒤에는 결코 나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도 이혼을 하게 될 수 있다. 치명적인 범죄나 부도덕, 폭행은 물론 의심증 같은 정신질환 등 도저히 함께 살기 어려운 케이스도 있으며, 부부간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섣불리 욕하거나 비난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다른 일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살지 못하는 것처럼 결혼생활도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이혼을 할 때 믿음을 이유로 내세우거나 성경에도 이혼을 허용하는 구절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이혼을 허용할 만한 더 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원리에 위배됨을 알고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최초의 공동체를 해석하거나 이용하는 것을 보면 그 집단의 건전성을 알 수 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집단 결혼을 시키고 일정 기간 동안 잠자리도 금지시킨다든지, 툭 하면 반대하는 배우자와 이혼하고 자기네 종교단체에 전념하라는 등의 강요를 하는 간교한 이단에 속지 말아야 한다.

결혼이 흔들리는 세상이지만, 지금 심각하게 이혼을 고민하고 있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하고,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제와 오늘이 한결같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위로를 바라보면 어떨까….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자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함께할 것이다.

[ 출처: 김재욱, 연애는 다큐다 http://m.blog.naver.com/woogy68/220479255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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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관한 성경 구절: 이혼 -> 죄

죄: [이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와 이혼하면 그 아내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누구든지 남자가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고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10] 결혼한 사람들에게 명령합니다. (이것은 내명령이 아니라 주의 명령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갈라서지 마십시오. [11] (만일 갈라섰거든 재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화해하십시오.)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마십시오.

[31]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이혼증서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와 이혼하면 그 아내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3]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이유가 된다면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는 것이 적법한 것입니까?” [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에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와 [5]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해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6]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7] 그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남자에게 이혼증서를 주고 아내와 헤어지라고 명령했습니까?” [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2] 바리새파 사람들 몇 명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남자가 자기 아내와 이혼해도 됩니까?” [3]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하라고 명령했느냐?” [4] 그들이 말했습니다. “모세는 남자가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와 헤어져도 된다고 했습니다.” [5]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런 계명을 쓴 것은 완악한 너희 마음 때문이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아내와 더불어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안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11]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사람은 자기 아내에게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12] 또 그 아내가 자기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10] 결혼한 사람들에게 명령합니다. (이것은 내명령이 아니라 주의 명령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갈라서지 마십시오. [11] (만일 갈라섰거든 재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화해하십시오.)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마십시오. [12] 내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지 주의 말씀은 아닙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는데 그녀가 계속 그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면 그녀를 버리지 마십시오. [13] 또 어떤 자매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그가 계속 그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면 그를 버리지 마십시오. [14] 믿지 않는 남편이 그 아내를 통해 거룩해지고 믿지 않는 아내가 그 남편을 통해 거룩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자녀들도 깨끗하지 못할 것이나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 [15] 그러나 만일 믿지 않는 사람이 헤어지자고 한다면 그렇게 하게 하십시오. 이런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나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평화롭게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16] 아내여, 당신이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남편이여, 당신이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3]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이유가 된다면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는 것이 적법한 것입니까?” [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에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와 [5]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해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6]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7] 그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남자에게 이혼증서를 주고 아내와 헤어지라고 명령했습니까?” [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10]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만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11]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만 받아들인다. [12]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이 고자로 만들어서 고자가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라.”

또 그 아내가 자기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1] “만약 한 남자가 어떤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가 여자에게서 부끄러움이 되는 일을 알게 돼 마음으로 싫어지게 되면 그는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여자에게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 [2] 만약 그 여자가 그 집을 떠나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고 나서 [3] 그 두 번째 남편도 그녀를 미워해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집에서 내보냈거나 혹은 그녀를 데려간 그 남편이 죽었더라도 [4] 그녀가 더럽혀진 뒤에 그 여자와 이혼한 전 남편이 그녀를 다시 데려오지 말라. 이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그 땅 위에 죄를 부르지 말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혼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의 옷을 폭력으로 덮는 것도 싫어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희 마음을 잘 지키고 신의를 저버리지 말라.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남편에게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자기의 뜻대로 결혼할 자유가 있습니다. 단, 주 안에서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2] 결혼한 여자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간음한 여자라 불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다른 남자에게 가더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해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됐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에게 속해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는 율법으로 인한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속에서 작용해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사람들과 간음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만약 한 남자가 어떤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가 여자에게서 부끄러움이 되는 일을 알게 돼 마음으로 싫어지게 되면 그는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여자에게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

[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에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와 [5]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해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6]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15] “만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해 주어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는 것이다. [16] 그러나 만일 네 말을 듣지 않으면 그가 하는 모든 말에 두세 사람의 증거를 얻기 위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거라. [17] 그러나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거부하면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으면 너는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4] 너희는 “왜?”라고 묻는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얻은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녀가 네 동반자며 너와 언약으로 맺어진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신의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15] 여호와께서 하나가 되게 하시지 않았느냐? 그분이 남은 영이 없어서 그러셨느냐? 그렇다면 왜 하나겠느냐? 경건한 씨를 찾으시려는 것이다. 그러니 네 영을 잘 지키고 네가 어려서 결혼한 아내에게 신의를 저버리지 마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혼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의 옷을 폭력으로 덮는 것도 싫어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희 마음을 잘 지키고 신의를 저버리지 말라.

[22]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순종하듯 하십시오. [23]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몸의 구주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이다.

[17] 오직 주께서 나눠 주신 은사대로 또 하나님께서 부르신 대로 살아가십시오. 내가 모든 교회에 이 같은 원칙을 제시합니다. [18] 할례를 받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할례의 흔적을 지워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일부러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19] 할례를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때의 상태 그대로 머무르십시오. [21] 당신이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십시오.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23]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24] 형제자매들이여,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십시오.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면서 율법 가운데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십일조도 바치고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했다.

[1] 형제들이여, 내가 율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율법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2] 결혼한 여자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간음한 여자라 불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다른 남자에게 가더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달라고 하면 주고 네 것을 가져가면 돌려받겠다고 하지 말라.

[6]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7] 그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남자에게 이혼증서를 주고 아내와 헤어지라고 명령했습니까?” [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10]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만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11]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만 받아들인다. [12]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이 고자로 만들어서 고자가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연합해 둘이 한 육체가 될 것이다.”

믿음 없는 이스라엘이 간음을 저지른 이 모든 일로 인해서 내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주고 쫓아내 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한 자매 유다가 두려운 줄도 모르고 자기도 역시 나가서 음란한 짓 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각각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진노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함도 없습니다.

[14] 믿지 않는 남편이 그 아내를 통해 거룩해지고 믿지 않는 아내가 그 남편을 통해 거룩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자녀들도 깨끗하지 못할 것이나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 [15] 그러나 만일 믿지 않는 사람이 헤어지자고 한다면 그렇게 하게 하십시오. 이런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나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평화롭게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들을 끝마친 후에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편 유대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8] 내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나처럼 그냥 혼자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9] 그러나 만일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십시오. 정욕으로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습니다.

[13] 너희가 저지른 또 다른 일이 있다. 그분이 더 이상 너희 제물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너희 손에서 나온 것들을 기쁘게 받지 않으신다고 여호와의 제단을 눈물과 통곡과 울부짖음으로 덮었다. [14] 너희는 “왜?”라고 묻는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얻은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녀가 네 동반자며 너와 언약으로 맺어진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신의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15] 여호와께서 하나가 되게 하시지 않았느냐? 그분이 남은 영이 없어서 그러셨느냐? 그렇다면 왜 하나겠느냐? 경건한 씨를 찾으시려는 것이다. 그러니 네 영을 잘 지키고 네가 어려서 결혼한 아내에게 신의를 저버리지 마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혼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의 옷을 폭력으로 덮는 것도 싫어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희 마음을 잘 지키고 신의를 저버리지 말라.

결혼한 여자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간음한 여자라 불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다른 남자에게 가더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27] 당신이 아내에게 매였으면 헤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내에게서 놓였으면 새로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당신이 결혼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결혼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육신에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므로 내가 여러분을 아끼는 마음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18]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 알맞은 돕는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온갖 들짐승들과 공중의 온갖 새들을 다 빚으시고 그것들을 아담에게로 데려오셔서 그가 어떻게 이름을 짓는지 보셨습니다. 아담이 각 생물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그것이 그의 이름이 됐습니다.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에게 알맞은 돕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21]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채우셨습니다. [22]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녀를 아담에게 데려오셨습니다. [23] 아담이 말했습니다. “드디어 내 뼈 가운데 뼈요 내 살 가운데 살이 나타났구나. 이가 남자에게서 취해졌으니 여자라고 불릴 것이다.” [24]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그 아내와 결합해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Korean Bible Woorimal 2004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목회적 지침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목회적 지침* 본지는 황성철 박사(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가 지난 4월 27일 서울 동광교회(담임 김희태 목사)에서 열린 예장 합동(총회장 전계헌 목사) 개혁신학대회에서 발표한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목회적 지침’이라는 논문을 연재합니다.▲황성철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Ⅰ. 서론오늘날 교회는 신음하고 있다. 교인들 가운데 이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가하면 이혼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있다. 또한 재혼이 증가하고 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이혼과 재혼의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현실이다. 이제 교회에서 이혼과 재혼은 더 이상 금기목록이 아니다. 몹시 우려되는 이야기지만 현재 이혼가정의 1/3이 기독교인의 가정이라는 비공식적 통계가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다.2015년 통계청 통계자료에 의하면 동년 전체 혼인건수는 30만 2천 8백건이었는데 이혼건수는 10만 9천 2백건이었다고 한다. 혼인한 가정의 1/3이 이혼을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나라가 세계 이혼율 1,2위를 차지하는 국가라는 말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이 시대의 결혼은 거룩한 언약의 의미는 이미 퇴색된 채 동거와 별반 차이가 없어졌다. 좋으면 같이 사는 것이고 싫으면 헤어지는 것에 별반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이런 세속적 분위기 속에서 과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바른 결혼을 갖고 가정을 세울 수 있을까? 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른 결혼관을 갖도록 도울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제는 교회들이 교인들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관해 목회적 관심을 더욱 기울여야 할 것이다.교인들의 가정이 건강하면 교회도 건강하다. 그러나 교인들의 가정이 병들면 교회도 따라서 병들게 되어 있다. 교회는 가정, 가정들이 모여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가정을 이루려면 먼저 교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바른 결혼을 해야 한다. 교회는 교인들이 바른 결혼을 이루어 건강한 가정을 세우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이혼이 만연해 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사명을 젊은 교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바른 결혼을 하도록 돕는 일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지고 나아가서 사회 국가도 무너진다. 이 첫 단추가 바로 바른 결혼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Ⅱ. 결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가운데 결혼제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래서 결혼 제도는 기독교의 원리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자연 일반의 원리까지 확장된다. 이 말은 결혼제도는 하나님의 기본 목적과 법칙이 모든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의 결혼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복음이전에 결혼제도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을 위해서 서로 다른 기본법칙들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결혼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가 아니다. 결혼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나님이 명령하여 만드신 제도이다. 하나님은 결혼을 모든 인간사회의 기본요소로 만드셨다. 교회, 사회, 국가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결혼이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라고 하면 인간에게 결혼을 폐지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셨기 때문에 오직 그분에게만 결혼을 폐지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결혼이 반드시 존재해야 할 제도라고 말씀하셨다(막12:25; 눅17:26-27). 만일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신 뒤에 더 이상 결혼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이런저런 규칙들을 마음대로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혼에 대한 분명한 뜻을 성경에 계시해 주셨다.사람들은 결혼을 할 수 있다. 이혼하고 재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대로 원칙을 따라서 결혼과 이혼, 재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결혼에 대해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원칙을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 누구도 결혼이나 이혼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 이 권리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뜻을 성경에 제시해 놓으셨다.1. 하나님의 언약으로 맺어진 동반자 관계결혼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혼과 재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결혼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창2:1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독신’의 삶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삶이다. 그러나 독신의 삶에도 예외규정이 마19:11-12과 고전7:7에 언급되어 있다.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예외라는 것이다.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독처를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다. “좋다”(토브)의 의미는 ‘선하다’, ‘기분 좋다’,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니까 독처하는 일이 “좋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선한 일도 아니고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느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결혼제도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 동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다.”독처 함” 즉 고독의 문제가 결혼제도의 동기가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반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하나님이 여자인 하와를 만드신 것이다. 동반자 관계의 언약이 결혼의 본질이다.결혼은 동반자 관계의 신성한 언약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로 맺어진 남녀의 동반자 관계’이다. 여기 말하는 언약은 사람 간 약속 혹은 계약(contract)이 아니고 언약(covenant)이다. 계약은 언제든지 당사자 중 하나가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파기할 수 있지만 언약은 그럴 수 없다. 계약은 인간 상호간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함부로 해체시킬 수 없는 게 결혼이다.하나님은 하와를 독처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돕는 배필인 하와를 만드셔서 독처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하나님이 하와의 독처함을 해소시켜주시는 과정은 참 인상적이다. 창2:18-20을 보면 하나님은 우선 각종 들짐승과 새를 지으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그들의 이름을 작명토록 아담 앞으로 지나가게 하셨다. 그때 아담은 각각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렇게 하고 난 후에 20절 하반절이 인상적이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아마도 아담이 이름들을 다 지어주고 나서 문득 ‘나는 짝이 없잖아?’라고 독처의 외로움을 느끼는 아담의 독백은 아니었을까?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독처함을 해결해 줄 여자를 만들어서 아담 앞에 세워주셨다(22절).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여자를 본 순간 환희에 찬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사랑의 아리아를 부른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3절) 아담은 그리워하던 ‘짝’을 만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주례자가 되신 것이고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신랑과 신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인류 최초의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서로의 짝을 찾아서 맺는 동반자 관계의 신성한 언약이다. 성경에는 동반자 관계를 이루는 ‘짝’에 대한 말씀이 있다. 잠2:17에는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짝”(???; companion)이란 말은 ‘길들여진 존재’, ‘다른 사람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가진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갖는 존재라는 것이다.2. “한 몸”의 비밀아내와 남편이 서로 “짝”으로서 동반자 관계의 개념은 말2:14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여기서 “짝”(????)으로 번역된 단어에는 ‘연합’ 혹은 ‘동반자 관계’라는 결혼의 본질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 들어 있다. 따라서 “짝”에 관한 두 구절을 종합해보면 남편과 아내는 서로 깊숙이 연합된 동반자로서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둘이 “한 몸”이 되는 관계다(창2:24-25).”한 몸”이 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부끄러움이 없이 벌거벗을 수 있는 관계로 연합이 되는 것이다. 24절에 보면 “… 그의 아내와 합하여 …”라는 말이 있는데 “합하여”는 ‘다바크'(???)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물질이 서로 달라붙는다.’는 뜻이다. 한편 신약에서는 (προσκολλ?ω)로서 그 의미는 ‘꼭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게 하다.’이다. 결국 “합하여(연합)”이라는 말은 결혼으로 맺어진 남편과 아내 사이는 마치 아교풀로 붙인 것과 같이 서로 접착되어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한 몸”이라는 말이다. 만일 둘을 떼어놓으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죽음뿐이다. 바꿔 말하면 이혼은 바로 죽음이라는 말이다.남편과 아내가 서로 동반자로서 “한 몸”이 되는 결혼은 1더하기 1이 곧 1이 되는 것은 ‘인간의 존재에서 가장 특유한 사실’이다. 다른 한편 “한 몸”이 되는 것은 1+1=3 또는 4가 되는 신비가 또한 있다. 이 계산은 산술적으로 맞지 않는 답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루는 곳에서는 가능한 계산이다. 이것은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수학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큰 비밀”(엡5:33)이라고 불렀다.결혼의 본질에 대한 성경 전체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맺는 신성한 언약이다. 결혼으로 둘은 “한 몸”이 되어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서로 간 깊은 친밀감 속에 연합이 되고 이 연합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거룩한 결합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일생 동안을 지속하지 못하는 결혼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죄이다.Ⅲ. 이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1. 이혼에 대한 성경적 전제이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가 아니다. 인간의 완악함이 만든 제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적으로 규정된 상황 아래에서만 이혼을 인정하시고 규정하셨다. 모든 이혼 뒤에는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혼이 죄는 아니다. 어떤 이혼은 합당하다(렘3:8; 마1:19 참조). 엄격하게 정해진 규율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혼을 하나님은 허락하셨다. 합법적인 사유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이혼은 인정하신다는 말이다. 비록 그 원인이 죄와 연관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모든 이혼은 죄의 결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혼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이혼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결코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배우자의 부적절한 행위(음행)가 있는 경우에는 이혼이 허락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절대적인 필수사항은 아니다. 배우자의 성적인 죄가 이혼의 충분조건은 되지만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혼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성경적인 기본입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성경은 합당한 사유로 인한 이혼은 인정하고 있다. 거기에 대한 규정도 밝혀놓았다. 성경은 이혼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 그리고 적법하게 이혼한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이 점은 이혼문제를 다루려는 교회지도자들은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물론 말2:16에서 하나님은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고 하셨다. 이 선언으로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맞다. 이혼은 인간의 완악함에서 연유된 것이지 하나님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합당한 이혼까지 정죄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이혼을 무조건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렘3:8에서도 발견된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증서까지 주었으되….”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과 이혼을 진행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특정한 환경 아래서 이루어진 합당한 이혼은 인정하고 계심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의로운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것으로 비난을 받지 않았던 경우는 하나의 좋은 예이다(마1:18-19).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인정치 않은 근거 위에서 이루어진 합당치 않은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원칙과 규제에 반하여 이루어진 이혼만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오늘날 교회지도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이혼문제에 대해 성경적이고 균형 있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이혼에 대한 바른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이혼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가?” 용서받을 수 있다. 이혼도 죄이기 때문에 회개한다면 분명히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가 못 씻을 죄는 없다.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도 용서를 받았고(요8:1-11),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한 사람도 용서를 받았다(눅23:43).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다른 한편 이 문제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려는 것 하나는 성경은 여러 곳에서 (고전6:9-10;계22:15;갈5:19-21등) 많은 죄 목록을 언급하고 있다. 우상숭배, 살인, 술 취함, 방탕, 이기심, 투기, 주술, 동성애 등의 죄목들을 나열하면서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갈5:21)고 못 박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죄 목록 가운데 이혼의 죄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물론 이런 주장을 통해 이혼을 조금이라도 두둔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잘못되게 이루어진 이혼은 분명 죄다. 그리고 반드시 죄로 인정하고 정죄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죄로 이루어진 이혼이 그 죄 목록에서 빠져 있음을 주목하는 이유는 사도들은 이혼을 가장 가증할 죄의 목록 안에 넣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이혼을 거의 첫 번째 죄 목록에 넣으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합당치 않게 이루어진 이혼의 죄를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교회지도자들은 누구보다 이혼에 대한 성경적이고 균형 있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다시 말하지만 이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아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이 말씀에서 다른 죄들은 용서받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렇다면 이혼의 죄도 사하심을 받는 “모든 죄”안에 들어가는 것은 자명하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뿐이다. 이혼은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있고 실제로 용서하셨고 지금도 용서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용서하실 것이다. 따라서 교회도 목회자도 마땅히 이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2. 성경에서 말하는 이혼결혼을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로 맺어진 남녀의 동반자 관계라고 했는데 그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 이혼이다. 동반자 관계인 남편과 아내로 맺어주신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를 부인하고 깨뜨리는 것이 이혼이다. 이제는 서로가 맺은 언약을 풀어버리고 자연인의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돌아간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만일 결행되는 이혼이 원인과 과정 모두에서 성경적으로 합당하다면 두 사람은 동반자로서의 의무를 해소함으로 다른 사람과 부부 관계를 자유롭게 맺을 수 있게 된다.(1) 신명기 24:1-4성경에서 이혼에 대한 근거 또는 절차들을 말해 주는 최초의 유일한 구절은 신명기 24:1-4의 말씀이다.”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 하게 하지 말지니라.”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혼을 요구하시지도, 권고하시지도, 심지어는 허락조차도 하시지 않으신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이혼에 있지 않고 이혼을 확정해 주는데 있지도 않다. 이혼이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기 때문에, 이혼한 전처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을 금하는데 있다. 이혼을 인정은 하지만 그 이혼을 규제하려는데 목적이 있다.이혼이 모든 경우에 묵인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이혼의 근거는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 되는 일”을 발견할 때다. “수치 되는 일”(??? ????)의 원어적 의미는 ‘벌거벗음’, ‘노출’, ‘외설’, ‘음란한 행위’ 등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문자적으로 볼 때 “수치 되는 일”은 ‘벌거벗음’의 문제다. 이 말은 추하고 역겨운 혐오스런 것을 뜻하고 있다. 존 머레이(John Murray)는 “… ‘수치 되는 일’은 간음이나 성적으로 불결한 행위를 언급한다는 것은 보여 주는 증거는 없다. … 우리는 ‘수치 되는 일’이 추한 것, 혹은 부적절한 행위를 의미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고 했는데 이 해석에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수치 되는 일”이 간음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간음에 대한 처벌은 죽음이지 이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대율법사 샴마이(Shammai)와 힐렐(Hillel)간에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율법사 샴마이는 엄격했다. 그래서 그 “수치 되는 일”을 간음 또는 난잡함에 약간 못 미치는 어떤 종류의 성적 범죄로 이해했다.그와는 대조적으로 율법사 힐렐은 온건한 편이었다. 그는 첫 번째 남편이 그 아내를 “기뻐하지 않게 된 것”(1절),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역시 그녀를 “미워한 것”의 구절들을 들어서 예컨대 그녀가 남편을 위해 만든 음식을 슬쩍했다거나, 혹은 다투기를 좋아했다거나, 아니면 남편이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보아서 그가 아내에게 흥미를 잃었다거나 하는 일과 같이 극히 사소한 잘못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을 했다. 힐렐은 ‘남편에게 괴로움이나 당혹감을 일으키게 하는 그 어떤 일들’도 이혼의 합법적인 근거로 보았다.그렇다면 이혼이 허용되면 재혼도 허용되어야 하는가? 그 여인이 일단 이혼증서를 받고 그 집에서 내보내지면 그녀는 이혼을 당한 사유인 “수치 되는 일”을 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혼증서를 주는 이유는 버림받은 여성들의 복지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긴급조치의 성격을 띤 사항이었다. 만일 이혼증서가 없다면 그녀는 성적 노리개 감이나 몸을 파는 여인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 이 증서를 쥐어준 것이다.모세는 그 남편이나 여인에게 이혼을 하라고 명령하거나 그들의 이혼에 합법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혼증서를 내어 주라고 한 모세의 가르침을 두고서 이미 구약시대에 이혼이 성행하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이 있다. 하지만 모세가 이혼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조치는 여인의 음행과 관련된 판단이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오직 배우자의 음행에 한해서 이혼을 인정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본적으로 조화를 이룬다.(2) 마태복음 19:3-12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19:3-12)은 바리새인들이 한 질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서 주어지고 있다. 마가는 그들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10:2), 마태는 시험을 한 그 질문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자세히 밝혀주고 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19:3). 아마도 그 질문의 배경이 되었던 것은 헤로디아의 추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그 샴마이-힐렐 간의 논쟁 속에 예수님을 끌어들이고 싶어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질문의 강조점은 이혼을 정당화하는 “연고” 혹은 “원인”에 두었던 듯하다.이혼에 관한 마19:3-12의 해석에서 예수님은 엄격한 견해를 견지하고 있지 않았던 율법사 힐렐의 입장을 거부하셨다. 그런 예수님의 태도는 산상수훈에서 이혼에 대한 가르침(마5:31-32)을 주실 때 사용하셨던 “너희가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소개되는 여섯 가지 반대명제들 가운데 하나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거기서 반대하셨던 것은 성경이 아니라(“기록되었으되…”) 유전이었고(“일렀으되…”),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서기관들의 비뚤어진 해석이었다.그들이 왜곡하려고 한 목적은 율법의 요구들을 감해서 보다 편안한 것들로 만드는데 있었다. 이혼에 관한 반대명제에서 서기관이 했던 인용(“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은 신명기24장의 구절을 교묘하게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이혼증서가 주어지기만 하면 힐렐이 가르쳤던 대로 아주 사소한 이유들에 의해서도 이혼이 즉각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바라고 있는 요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해석을 단호하게 거부하셨다.마19:3-12에서 예수님이 밝히신 이혼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① 결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항구적인 제도다. 예수님이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주시지 않으셨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답변 대신에 창세기1,2장에 언급된 결혼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이것들을 읽어보지 않았느냐(“읽지 못하였느냐”)라고 오히려 의아해 하셨다. 예수님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 그리고 결혼제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두 본문(창1:27과 2:7)을 한데 묶으시고 하나님을 그 두 구절의 저자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사람”은 이제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한 몸이 됨”(창2:24)을 언급하셨다. 여기에다가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고 추가적인 설명을 더하신 후에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συζευγνυμι – 문자적으로는 함께 멍에를 메다)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금기사항으로 못을 박으셨다.예수님의 이혼에 관한 가르침은 명백하다. 결혼은 인간적 계약 이상의 신성한 동반자적 관계의 언약으로 하나님이 지워주신 거룩한 멍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남편과 아내에게 이 멍에를 지우시는 방식은 인위적인 연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선언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은 그 자체 안에 결혼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해체시킬 수 없는 근거는 인간의 결단 – 예컨대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에 있다.② 이혼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잠정적 양보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응수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답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명령”이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허락”으로 해석하셨다. 이혼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해 마지못해 “허락”해 주신 것이라는 말씀이다.이혼에 대한 모세의 대처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양보였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할 더 큰 유해한 결과들을 제한시키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것이 예수님의 견해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혼을 승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모세가 말한 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이혼이 하나님의 양보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양보는 “본래부터”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과는 어긋나는 것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바리새인들의 오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창1,2장)과 인간의 죄성에 대한 법적 대처(신24장)가 서로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분별하지 못한 데 있었다. 이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의 완악함이 만든 제도다.③ 이혼 후의 재혼은 “간음”이다. 이혼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외적인 조항을 잠시 유보하고, 복음서(마5:31-32; 막10:2-12; 눅16:18)에 언급되어 있는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하는 사람은 둘 다 간음을 범하는 것이다. (2)이혼을 당한 아내 역시 재혼할 것이 예상되므로 그녀에게도 간음을 범할 이유를 주는 것이다(마5:32). (3)남편과 이혼하고 재혼하는 여자도 동일하게 간음을 저지르는 것이다(막10:12). (4)더구나 이혼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 이 상황에서는 상호작용상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도 간음을 범하는 것이다.이혼 후의 재혼은 “간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명확하다. 그분의 말씀은 진솔하고도 논리적이다. 죄가 어떻게 연속적으로 또 다른 죄를 만들어내는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고 이혼이나 재혼을 한다면 그것은 불법적인 것이고 바로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다.④ “음행”이 있을 시 이혼과 재혼은 허용되었다. 마5:32과 19:9말씀은 특별히 “예외적인 조항”(“음행한 이유 없이)으로 불린다. 이 조항의 목적은 이혼과 재혼을 “간음”이라고 낙인을 찍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데 있다. 이 조항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어왔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결론이 있다.첫째, 그 예외 조항은 예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다른 복음서, 즉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예외조항이 없기 때문에 무시하려고 했다. 이 예외조항이 유독 마태복음에만 있는 이유는 합당한 이혼이 허용되는 근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을 위해 기록했기 때문이고 반면에 마가와 누가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독자를 위해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와 누가는 마태와 동일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한다.그러므로 마가와 누가가 이 예외조항에 관해 침묵한 것을 그들이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 조항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 이방문화들은 간통을 이혼의 한 근거로 여겼다. 율법사 힐렐과 샴마이는 다른 점들에서는 의견의 불일치들을 보였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이 문제만은 그들의 쟁점이 아니었던 것이다.둘째, “음행”(πορνεια), 포르네이아(porneia)라는 단어는 부도덕성을 의미한다. 그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조심할 것은 온건하게 번역할 것인지 아니면 엄격하게 번역할 것인지의 양 극단을 피하는 것이다.포르네이아에 대해 엄격한 견해를 취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특별한 성적 범죄- 결혼 전에 행해진 ‘간음’이나 ‘결혼 후의 간통’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온건한 견해는 포르네이아가 ‘성적’인 죄로 간주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오히려 ‘잔인성’이라든가 심지어는 기질적으로 둘이 조화를 이룰 수 없어서 결혼관계를 근본부터 손상시키는 원인이 되는 허물과 같은 것이라고 보려는 입장이다.포르네이아(“음행”)의 원어적 의미는 ‘불법적인 성행위’, ‘매음’, 또는 ‘간음’을 말한다. 여기서 더 나가면 ‘근친상간’까지도 뜻하는 말이 된다. 포르네이아는 육체적, 성적 부도덕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그것을 이혼을 위한 허용가능의 유일한 근거로 삼으셨던 이유는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결혼의 기초가 되는 “한 몸”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건한 입장보다는 엄격한 입장이 더 성경적이다.셋째, 부도덕성(“음행”)으로 인한 이혼은 허용적인 것이지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백한 쪽이 부도덕한 쪽과 이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더 나아가서 부도덕한 쪽으로 인해 사실상 결혼이 해체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셨다. 심지어는 부도덕함으로 인한 이혼을 고취시키거나 권고조차 하지 않으셨다. 반대로 결혼의 영구성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혼이나 재혼은 허용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그 예외 조항을 추가하신 이유는 간음에 해당되지 않는 이혼과 재혼이란 부도덕한 배우자에 대한 결백한 배우자에게만 국한된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죄책이 있는 배우자에 의해서 이미 부도덕한 행위가 저질러져 온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목적하시는 것은 그런 이유를 들어 이혼을 고취시키려는 게 아니고, 오히려 이혼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3) 고린도전서 7장 10-16절고린도전도 7장에서 바울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서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10-11절은 믿는 자들의 이혼에 대한 것이고, 12-16절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자로 이혼을 생각하는 믿는 자들에 대한 말씀이다. 주목해야 하는 점은 두 부류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① 믿는 자들의 이혼고전7:10-11은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명령이 믿는 자들의 이혼에 대해 주어지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 아내도, 남편도 서로 이혼으로 헤어질 수 없다. 둘째, 비록 헤어졌다고 해도 다시 합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예수님과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10절에서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라는 명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명령 뒤에 남편에게도 주는 또 다른 명령이 나온다. 11절에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이 두 개의 명령은 예외가 없는 주님의 명령이다. 더욱이 여기서 그것에 대한 그 어떤 예외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계속해서 바울은 11절에서 “만일 갈라섰으면”이라는 가정법 표현을 써서 이혼을 막으려고 하는데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궁극적으로 “화해”에 있다. 만일 아내가 이 명령에 불순종하고 이혼으로 결혼을 파탄 낸다면 아내는 재혼하지 않은 채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여자가 화해하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면 이것은 간음죄를 범하는 죄라는 바울의 경고다.그런데 왜 바울은 이혼한 여자에게 “그대로 지내라”고 조언을 하는가? “그대로 지내라”는 말은 이혼한 여자가 전남편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말고 전남편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더 좋은 방법은 당장 회개하고 잘못되게 떠난 남편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추구하는 것은 화해에 있다. 화해하고 재결합할 때까지 두 사람에게는 결혼의 모든 의무나 권리 그리고 특권도 없는 상태다. 두 당사자의 주된 의무는 화해다. 서로 화해에 이르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그러나 다른 한편 이혼으로 갈라섰지만 그대로 지내야 한다는 명령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이 하나있다. 서로 합의하에 갈라섰는데 “여전히 결혼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성경적인가? 비록 불법적인 사유로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해도 결혼은 이미 해체된 것이다. 결혼이 언약적인 합의로 이루어졌어도 그 합의는 이혼으로 무효가 되고 결혼은 해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혼 당사자들은 “결혼하지 않은 자”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즉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도 합법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다.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신24:1-4 신24:1-4절의 말씀은 부적합한 이유로 이루어진 이혼증서와 연관된 내용이다. 첫 번째 남편을 떠난 뒤 아내는 또 다시 남편이라고 불리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다”(2-3절). 그리고 첫 번째 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라는 구절이 있다(4절). 이혼은 했지만 여인이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첫 번째 남편의 아내라면 그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곧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중혼죄를 짓는 행위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아내”라는 표현은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여인이 다른 사람의 아내라면 더 이상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여인이 중혼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첫 번째 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4절)라는 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말은 여인이 어떻게 행동을 하든 줄곧 첫 번째 남편의 아내라는 관점을 부인한다. 그 여인은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다시 될 수 없다. 그것은 곧 그 여인이 이혼 뒤에는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더 이상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을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즉 동반자의 멍에를 벗고 자유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혼을 했지만 여전히 결혼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② 불신자와 결혼한 믿는 자의 이혼고전7:12-16절은 예수님이 다루지 않은 내용이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논의하지 않으신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12절에서 언급된 “나머지 사람들은” 10-11절에 언급된 사람들과는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교회가 지중해 지역으로 옮겨 갔기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의 회심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래서 상대 배우자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나 아내 어느 한쪽이 구원받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것은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이혼과 관련된 문제였다.믿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을 생각하는 믿는 자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이 경우는 믿는 자들의 경우와 똑같이 화해하도록 주장할 수가 없다. 사실 바울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믿는 자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구원받지 못한 배우자와 이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보다 덜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믿는 자는 상대 배우자가 결혼을 계속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배우자를 위해, 또한 자녀들을 위해 결혼을 유지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혼을 막기 위해 믿는 자가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계속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이혼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믿는 자가 불신 배우자와 이혼하는 문제에 대해 아주 간결하게 결론을 맺어 주었다.고전7:12-16절에서 언급되는 이혼은 절대로 이상적이지 않다. 이 문제에 있어서 바울이 추구하는 목표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라는 데 있다. 바울은 믿는 자에게 믿지 않는 배우자가 계속 살기를 원한다면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한 논증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단호한 말을 덧붙였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13절) 믿는 자는 계속 함께 살기를 원하는 불신 배우자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믿는 배우자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했음에도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다면 “갈리게 하라”(15절)고 말한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갈리거든”이라는 말은 불신 배우자가 마음으로 이미 갈라섰을 뿐만 아니라 결혼생활을 끝내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하는 말이다. 이혼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말이다. 불신 배우자가 분명히 이혼으로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믿는 배우자는 그것을 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바울은 허락을 나타내는 명령형을 사용하고 있다. “갈리게 하라.” 이혼하라는 강력한 권고다.그런데 믿는 배우자에게 “갈리게 하라”고 명령을 한 후에 덧붙이는 두 개의 말씀이 있다. 첫째, 15절에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이 구절에서 “구애될 것”(δουλοω)이라는 원어의 의미는 “노예를 삼다”이다. 이 말은 결혼의 구속이 깨어졌을 때 믿는 자가 불신 배우자에 대한 결혼 의무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혼의 모든 구속이 제거되고 모든 의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말이다. 이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다시 화해해야 할 의무도 없어진 것이다. 믿는 배우자는 불신 배우자와 재결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불신 배우자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재결합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믿는 자는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주 안에서만”(고전7:39)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둘째, “하나님은 화평 중에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대해 결말이 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혼의 문제가 화평 중에 매듭지어지기를 원하신다. 결혼생활이 유지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하나님은 결혼생활이 모호한 상태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미제상태로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이 있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그리스도인들은 자주 그릇된 조언을 받아들여서 그 중간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바로 별거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별거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것이 문제해결이라는 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별거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미해결된 상태로 계속 있게 한다. 별거는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고 잠간 동안 시간적 여유를 줄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론적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지도자들조차도 별거가 이혼보다 덜한 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주 이혼보다는 별거를 선택하고 또 권고도 한다. 그러나 별거가 성경에 근거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방법이기 때문에 유익보다는 해를 더 많이 가져온다는 것이 일선 지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상담자들은 별거를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화해를 이루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부부에게 별거를 권할 경우 그들을 다시 연합하게 하기는 쉽지 않다. 별거를 하면서 거짓 평안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면하고 다루는 법을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기를 원하신다.종종 사람들은 별거를 ‘냉각기’로 묘사하곤 한다. 문제를 더 차분하게 뒤돌아보기 위해 한 두 시간이나 며칠을 ‘냉각기’로 삼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아닌 장기적으로 ‘냉각기’를 갖는 것은 성경적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것이다.Ⅳ. 재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하나님은 이혼한 사람이 재혼하는 것을 허락하시는가?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 할 수 있고 또 어떤 조건에서 할 수 있는가? 성경은 본질적으로 배우자가 죽은 뒤 재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롬7:3절 말씀은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재혼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다.더 나아가서 딤전5:14의 말씀은 재혼을 격려까지 하고 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재혼하지 않을 경우 유혹과 비방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젊은 과부를 돌보는 것이 교회에 불필요한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실질적인 이유로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 교회에 그런 지시를 주었던 것이다. 재혼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재혼하도록 강력히 권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더욱이 바울은 성적 욕망을 제어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과부에게 재혼을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 것을 명령까지 한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8-9) 바울은 고전7:39절에서는 “아내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초대교회가 이런 재혼의 개념을 호의적으로 따랐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1. 이혼 후 재혼의 문제이혼 한 사람이 재혼을 하는 문제는 제기되는 사례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쉽게 해답을 갖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우선 고전7:27-28절의 말씀에서부터 그 실마리를 풀어보자.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본문에 “놓이다”(λυω)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묶인 것을 풀어주다’. ‘자유롭게 하다’, ‘원상태대로 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본문에 쓰인 “놓이기를”, “놓였느냐”는 이혼을 염두에 둔 말이다.동시에 결혼이 권고되지 않는 심한 박해시기에도 바울은 결혼의 속박에서 놓인 이혼한 자들에게 재혼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28절 전반부) 재혼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할 수 없다는 주장은 결코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은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여기서 마5장과 19장 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은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이 외에도 이혼한 사람들에게 재혼을 금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에스겔서44:22절에서도 발견된다. “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들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의 처녀나 혹은 제사장의 과부에게 장가 들 것이며 ….” 이 규칙은 특별히 선별된 제사장들에게만 적용된 말씀이다. 제사장들은 특별한 계층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할 때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 제사장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재혼의 문제였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재혼이 아무 문제될 게 없었다.결론적으로 재혼에 대한 성경의 일반원칙은 재혼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격려하거나 명령을 하기도 한다. 초대교회는 재혼을 호의적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성경은 이혼한 뒤 재혼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에서도 재혼은 허락되었다. 그러나 합당하게 배우자에게 “놓였을” 경우에만 이혼이 죄가 되지 않고 허락된다는 것이 성경적이다.다음으로 이혼한 뒤에 누가, 어떤 조건에서 재혼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 마디로 “합당하게 이혼한” 모든 사람은 재혼할 수 있다. 이혼으로 놓임을 받아 자유롭게 되었으면 재혼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고전7:27-28절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그런데 재혼에 관한 일반원칙 외에 다음과 같은 보다 복잡한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만 살펴보자. “복음서에 언급된 이혼에 대한 ‘예외조항’을 지키지 않아 이혼을 하고 자신의 배우자와 화해해야 할 의무 아래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결혼을 할 수 있는가?” 원칙적으로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 결혼을 하면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가(그녀가) 그 예외조항의 말씀을 인지를 하고 있었던지 그렇지 않던 지간에 상관없이 결혼을 강행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이 된다. 그러나 결혼 후에 그가(그녀가) 하나님 앞에 그 불순종의 죄를 깊이 참회를 했다면 하나님은 그를(그녀를) 용서하시고 이루어진 결혼관계를 양해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못 씻을 죄는 없기 때문이다.2. 중혼의 문제교회에서 이혼한 사람이 장로나 집사로 선택되는 것은 성경적인가? 이 물음은 딤전3:2,12절과 딛1:6절에 나오는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물론 재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혼한 사람은 재혼을 할 수 없고 교회에서 그 어떤 직분도 맡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갖는다. 이런 입장은 재혼을 격려하고 명령을 하기까지 한 신약의 말씀과 충돌을 일으킨다. 성경은 그런 금지명령을 내린 곳이 없다.”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씀의 근본 의도는 현재 몇 명의 아내가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남자가 몇 번 결혼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엄격히 말해서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말씀이다. 교회를 섬길 장로나 집사는 결혼생활에서 교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중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데 초점이 있다. 그 구절은 어떤 경우에도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결코 재혼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Ⅴ. 결혼과 이혼에 관련된 목회적 지침교인들의 결혼과 연관되어서 파생되는 문제들은 복잡하기도 하고 여간 마음이 쓰이는 문제가 아니다. 특히 이혼하는 일이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가고 있어서 목회적으로 다루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교회와 세상, 말씀과 이성, 두 사이에서 교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적인 관점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목회자가 이런 교인들을 말씀으로 바르게 지도하는 일은 설교를 준비하는 일보다 더 어려울 때가 많다.목회자들의 이런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는 목적에서 목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부딪치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과 연관된 문제들을 질문형식을 빌려 사례별로 다루어 보았다.1. 이혼한 사람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가?본 교단 총회결의로 결혼식을 올릴 수 없지만 재고되어야 한다. 197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8회 총회의 결의[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193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7회 그리고 197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8회 총회에서 주일은 물론 평일, 예배당과 부속 건물까지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이러한 결의는 1644년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과 본 교단 헌법보다 강경한 결의이다. 원래 ?예배모범?에는 교회 결혼식을 금하지 않았으며 금식일과 주일만 금하고 있다. 그러나 58회 총회결의는 원천적으로 교회에서 결혼식 올리는 것을 금지했다.]는 일절 교회당이나 교회 부속건물도 사용을 못하도록 금지했다. 현행 총회 「표준예식서」가 지교회의 예배와 예식에 큰 공헌을 하여온 것은 사실이지만 다양한 목회 환경과 교인들의 목회 수요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사실이다. 그래서 2006년 제91회 총회에서는 이런 점들을 재검토하고 보완하기 위한 헌의를 상정했지만 부결되었다.그런데 총회에서의 부결과 일선 교회현장과는 괴리가 있다. 일선교회는 교인들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합당한 사유로 이혼한 교인이 교회에서 결혼하기를 원할 때 교회가 안 된다고 거절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부도덕한 죄(음행)로 이혼을 당한 사람이 요청할 때는 교회가 거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경적으로 결백한 이혼자의 결혼식까지 막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신학과 그 신학에 근거한 결의는 이혼한 사람의 결혼식을 교회에서 할 수 없다고 막지만 예수님은 그런 규정을 언급한 일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 앉아 식사하실 때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9:10-11)는 힐난을 받고 이에 예수님은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9:13)고 반박하셨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예수님의 몸(엡1:22-23)라면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에서 교회의 지체되는 성도가 결혼식을 할 수 없다는 논리는 성경적이 아니다.더욱이 합당하게 이혼한 결백한 사람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맞을지 모르지만 성경적이지는 않다. 총회는 일선 교회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하여 다양한 교인들의 목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기존 예식서를 재검토하고 보완해서 목회현실에 맞는 「표준예식서」를 제정해야 한다.2. 이혼한 사람이 일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려고 할 때 목회자가 주례를 할 수 있는가?주례할 수 있다. 합당한 사유로 이혼한 사람을 주례 못해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부적절한 행위(음행)로 인해 이혼한 사람은 신중해야 한다. 우선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참회의 기준은 삶의 열매이며 또한 교회에서 동료 교인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고 덕을 끼치고 있는지의 여부다. 이러한 기준에 부합 된다면 주례를 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이 문제의 결정은 목회자 자신의 기도와 신중한 판단 아래 내려져야 한다.3. 이혼한 사람이 교회중직에 임직할 수 있는가?원칙적으로 임직할 수 있다[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장로의 피선거권에 대해 미혼 장로가 가능하도록 결의한 바 있다(2011년 제96회 총회). 이혼장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결의한 바 없다]. 그러나 상대 배우자의 부정행위로 이혼을 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부정행위로 이혼을 당했는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만일 합당한 이혼을 했으면 임직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교회는 비록 이혼에 어떤 사유를 제공하지 않았을지라도 이혼한 결과에 대해 참회의 열매를 살펴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합당하다고 판단이 되면 임직하는 데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그러나 부정행위로 인해 이혼을 당했다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교회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피로 못 씻을 죄는 없다. 이혼을 당했어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은 성경적이다. 그러나 임직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거룩과 순결을 생명으로 하는 공동체다. 그러므로 일반 신자라면 몰라도 교회의 중직은 교회에 본이 되고 덕을 끼쳐야 하기 때문에 교회중직으로 섬기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4. 이혼이나 별거의 경우 교회는 시벌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가?합당한 이혼인 경우는 시벌이 없다. 그럼에도 자숙하는 기간을 갖도록 교회가 권면하는 게 좋다. 그러나 이혼을 당한 경우는 깊은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고 해도 교회는 이 경우에는 시벌해야 한다. 시벌의 정도는 교회가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는 게 좋다.5. 이혼한 사람이 목회자가 될 수 있는가?원칙적으로 목회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되려고 하기 전에 이혼을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만일 합당한 이혼을 했다면 문제될 게 없으나 이혼을 부도덕한 일로 당한 것이라면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합당치 않게 이혼을 한 경우라도 회개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사람이라면 우선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하고(벧전5:1-3 참조) 교회에 덕을 끼쳐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마음을 접는 게 좋다(참고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은 매년 입학시험 때 이혼한 학생들이 지원을 하는데 합당한 이혼을 했는지의 여부를 철저히 심사를 하고 더 나아가서 학생이 소속된 교회 당회장에게 학생의 이혼이력에 대한 의견을 대외비로 받아서 최종 심사를 하고 있다).6. 목회자가 목회 중 이혼을 하고서도 계속 목회를 할 수 있는가?할 수 없다. 우선 목회자가 이혼을 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게 된다. 비록 합당한 이혼이었고 자신은 모든 면에서 결백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었던 가정을 해체시키게 된 원인에 도의적으로 일단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목회자 이전에 한 사람의 신자로서 참회를 하여 이혼한 일에 대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목회를 계속하는 것은 교회에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므로 원만한 목회를 하지 못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혼한 목회자로서 혹시 가정불화로 이혼을 하려고 생각하는 교인들에게 암묵적으로 이혼을 도와주는 심각한 폐단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혼한 목회자는 목회를 떠나서 하나님이 또 다른 섬김의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다리며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그러면 이혼을 하고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다른 교회로 가서 계속 목회하는 것은 어떤가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이혼으로 인한 불순종을 회개하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목회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피해야 한다. 지상 모든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교인들은 새로 부임한 목회자가 이혼을 했는지의 여부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을 만홀히 여기는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은 삼가야 한다.7. 목회자의 자녀가 이혼을 했을 때 교회는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자녀가 합당한 이혼을 했던지 그렇지 않던지 간에 징계해야 한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있다면 그 직분에서 사면토록하고 교회는 합당한 징계를 하여야 한다. 징계의 수위는 교회에서 정해야 하는데 그 일을 결정하는 자리에 목회자는 참석치 않는 게 교회에 덕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목회자 자신은 교회 앞에 목회서신 딤전3:4에서 가르치는 대로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지 못한 부덕함을 진솔하게 사과해야 한다. 이 일로 목회자가 사임을 할 이유는 없다.8. 교회 중직자가 이혼을 했을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먼저 어떻게 이혼을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야 하고 합당한 이혼이었다면 근신하는 기간을 주어서 직분을 잠정 휴무케 하고 그 기간 동안 수찬정지 해야 한다. 그러나 부도덕한 일로 이혼을 당한 것이라면 직분을 사면토록 교회가 권면하고 교회에서 기타 모든 일에서 물러나도록 하고 교회가 정한 기간 동안 수찬정지 해야 한다. 만일 사면에 불응하면 교회는 마18:15-17의 말씀에 따라서 권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는 제명을 포함한 징계를 서슴치 말아야 한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성경을 위반하고 불법 이혼한 후 재혼한 자에게는 무기 책벌하고 확실히 회개하기 전에는 해벌하지 말 것”을 결의하였다<1931년 제20회>). 교회의 순결은 곧 교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9. 교회 중직자의 자녀가 이혼을 했을 때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그 자녀가 합당한 이혼을 했다면 교회는 그를(그녀를) 불러서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권면과 충고를 해 주고 그럼에도 당분간 교회 일에 근신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합당치 않은 이혼을 했다면 그 자녀가 맡고 있던 직분을 사면케 하고 교회에서 정한 일정 기간 수찬정지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부모는 교회 앞에 깊은 사과의 말씀을 하고 자진해서 자신의 직분을 잠정 휴무하는 게 교인들에게 본이 되고 교회에 덕이 된다.10. 부부가 원만한 결혼생활을 이루어가지 못해서 이혼 전에 우선 별거를 해도 되는지를 목회자에게 물어왔을 때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가?먼저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이유를 들어봐야 한다. 배우자의 부도덕한 일은 없는데 부부가 서로 간에 성격차이가 너무 심하다든가 경제능력이 없다든가 또는 언어나 신체적 폭력이 있어서 헤어지고자 할 때 목회자를 찾아와서 바로 이혼을 하는 게 좋은지 별거를 하는 게 좋은지를 묻는 경우에는 이혼도 성경적이 아니고 별거 역시 성경적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어야 한다.성경은 배우자 간에 성적 부적절한 경우 외에는 이혼을 허락하고 있지 않다. 물론 그럼에도 배우자가 자기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혼을 강행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혼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그리고 상대 배우자나 자녀에게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그리고 별거의 경우는 서로 간에 냉각기를 갖기 위해서 잠시 떨어져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이혼으로 나간다는 것이 상담자들의 대체적인 결론이다. 성경에 별거에 대한 말씀은 없다. 이혼을 하든지 아니면 화해하여 결혼생활을 계속해 나가든지 두 길밖에 제시하고 있지 않다. 목회자가 쉽게 별거를 권고하거나 부추기는 일은 성경적이 아니므로 삼가야 한다11. 이전 배우자가 재혼을 하고 있지 않다면 이혼한 사람은 언제 재혼하는 게 좋은가?재혼은 합당한 근거로 이혼했을 경우에 이혼한 배우자가 재혼하는 것이 허용된다. 만일 부도덕한 죄(“음행”)를 저지른 배우자가 이혼을 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을 때 상대 그리스도인 배우자는 다른 신자와 결혼할 수 있다(마5:32;19:9 참조). 불신자인 배우자에게 버림을 받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고전7:15 참조). 이러한 문제 외에 다른 근거를 가지고 이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배우자에 대하여 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들이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것은 “간음”이다(막10:11-12 참조).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신자인 여성 배우자가 합당치 않은 이유로 이혼을 했을 때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고전7:10-11). 만약 그 배우자가 합당치 않은 이혼에 대해 회개했다면 그 회개의 참된 열매는 전 배우자와 화해하는 것이다(마5:23-24 참조). 합당치 않은 이유로 이혼을 한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고전7:11 참조).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재혼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전 배우자가 재혼을 했거나, 불신자라는 사실이 드러났거나 또는 사망했을 때이다.성경은 이혼한 사람과의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 이혼이 성경적인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화해를 할 책임이 여전히 있으므로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 된다(막10:11-12 참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그 이혼한 사람이 합당한 이혼을 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합당한 이혼이었다면 언제든지 재혼을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오직 “주 안에서”해야만 한다(고전7:39 참조).12. 불신자였을 때 이혼한 사람이 신자가 되어 재혼을 하려고 하는데 할 수 있는가?재혼할 수 있다. 바울은 고전7:27-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하고 있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그러나 이 두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혼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바울은 앞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7:20).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그들이 이혼한 상태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 재혼을 하려면 “주안에서” 해야 한다.13. 결백한 배우자는 합당치 않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고 있는 배우자를 언제까지 기다려줘야 하는가?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성경적으로 합당치 않은 죄를 짓고 회개치 않고 있는 배우자를 둔 많은 사람들이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어 한다. 만약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이 이혼하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을 끝내기 전에 결백한 배우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화해에 있기 때문에 끝까지 배우자의 회개를 기다리고 용서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만약 죄를 지은 배우자가 신자가 아닌 불신자라면 무죄한 배우자는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려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혼하기로 결정을 하면 결백한 배우자는 언제든지 이혼을 할 수 있다. 교회는 그 이혼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죄를 지은 배우자가 신자인 경우는 좀 다르다. 그가(그녀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성경적이다. 그러나 그 배우자가 회개는커녕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려 산다면 그(그녀)는 간음죄를 범한 것이 되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이때 결백한 배우자는 결혼을 하는 데 자유로울 수 있다.14. 치료불가능한 정신병이 이혼의 사유가 되는가?이 문제의 대답에는 여러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정신병을 앓고 있는 배우자가 상대 배우자에게 결혼생활을 더 이상 이루어가기가 어렵다고 이혼을 요구하면 이혼이 허락될 수 있다. 결혼은 두 남녀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육체적 정서적 그리고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인데, 이 경우는 “한 몸”을 이루기 위한 충분조건, 즉 부부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다. 물론 이혼이 허락되기 위한 필요조건, 즉 부도덕한 죄는 없지만 두 당사자 간의 결혼현실을 감안해서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 은혜롭게 서로에게 유익이 된다고 본다.둘째, 정신병을 앓고 있는 배우자의 상대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또한 문제될 수 있다. 이 경우 상대 배우자는 이혼을 요구할 수 없다. 두 사람이 “한 몸”으로서 친밀감을 누리지 못하는 아픔은 있지만 오히려 이 아픔을 감사로 승화시킬 수 있는 믿음을 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치 태의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두 부부가 평생을 자녀 없이 지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보아야 한다.15. 잠자리 거부가 이혼사유가 되는가?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잠자리 거부는 육체적인 게 원인이 아니라 심적인 게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혼 후 인간관계 속에서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든가 또는 부부관계에서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든가 더 나아가서는 서로에 대한 매력을 잃었다든가 등등 그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근본적으로 상담이나 의사처방으로 얼마든지 회복가능하다. 문제는 두 사람이 이런 것을 치료하고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느냐의 여부이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은 우선 교회지도자든지 전문 상담자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그럼에도 이 경우는 성경이 이혼을 허락지 않는 문제다.16. 합당치 못한 부도덕한 죄를 범해 이혼을 당한 사람은 재혼할 수 있는가?우선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상대 배우자에게 용서를 빌고 화해를 시도해야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화해해서 재결합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상대 배우자가 화해하기를 거부하면서 이혼을 요구할 때 이혼을 허락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상대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그러면 이혼을 당한 사람은 어떤가? 재혼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혼을 당했기 때문에 신앙양심에 따라 하나님 앞에 자숙하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하다. 철저히 부도덕하게 저지른 죄를 참회하고 변화된 새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그 자숙의 시간은 얼마나 길어야 하는가? 현실적으로 상대 배우자가 결혼을 할 때까지라고 보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상대 배우자가 평생 결혼을 안 하고 지낸다면 이혼을 당한 사람도 그렇게 따라야 하는가? 그런 사실이 객관적으로 확인될 경우 거기에 꼭 묶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것은 교회지도자에게 지혜를 구해서 판단하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된다.17.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다가 헤어졌을 때 이를 이혼이라고 볼 수 있는가?이혼이라고 볼 수 없다. 이 경우는 간음죄를 범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할 수만 있는 대로 빠른 시일 안에 두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한다.18.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하는 청년이 자문을 구해 왔을 때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하는가?’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짝을 찾아서 결혼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아주 명확하게 답변을 주신 일이 있다. 한번은 예수님이 이혼에 대해 논할 때 음행이 믿는 자들에게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지적하셨을 때(마19:3-9)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이렇게 반문했다.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마19:4). 이 대답은 결혼이 그렇게 영구적이라면 잘못 만나 결혼하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편이 더 낫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마19:11)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창2:18,24에서 주신 결혼의 규칙에 예외가 있음을 분명하게 인정하신 것이다.물론 성경은 독신의 은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독신의 은사에는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마19:12). 그러시면서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고 결론을 내려주셨다.결론적으로 만일 그 청년이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독신의 은사를 받은 확신이 있다면 목회자는 말릴 이유가 하등에 없다. 그가 그런 은사를 받았는지를 우선 살펴서 대답을 주는 게 좋을 것이다.(계속)ⅤI. 결론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의 문제는 이제 교회가 더 이상 외면하거나 유보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되었다. 증가일로에 있는 교인들의 가정해체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정서적 이혼(emotional divorce)-정서적 이혼이란 한 지붕 밑에 두 가정과 같은 것이다. 한 이불을 덮고 자며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만 이미 서로 간에 몸과 마음은 분리된 결혼상태를 말한다. 막상 이혼을 하려니까 자녀, 경제력, 사회적 체면 등 걸리는 게 많아서 결행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상태에 놓인 가정들이 의외로 많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루는 가정사역에 대한 관심이 교회들마다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막상 이 사역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회적 안내를 못 받아서 좌왕우왕하는 교회들을 본다.결혼과 관련된 문제가 교회에 쌓여가는 데 그 문제를 성경적으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교회현장은 지금 혼란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한 예를 들어서 교회중직 자녀가 임신을 하고 와서는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는데 결혼주례를 해달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유사한 문제들이 교회현장에는 만연해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목회자가 곤혹스러운 때다.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의 영역은 거의 무법지대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강조하는 교회에서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 무시되고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비성경적인 가르침들과 세상 가치관의 유입은 교회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말씀의 제자이어야 할 교회지도자들이 불법적인 이혼과 재혼의 중매를 자처하고 나서기까지 하는 일은 교회를 세속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일이나 하등 다를 바 없다. 은혜와 사랑이라는 명분아래 행하여지는 비성경적인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은 가정과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일이다.이혼하려는 남편과 아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원하는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알아서 개척하라”가 아니라 “그냥 지내든지 아니면 남편(아내)과 화합하라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7:11)는 것이다.지금 요청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이혼과 재혼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배우는 일이다. 비록 그런 종류의 일들이 세상 사람들의 안목과 자신들의 마음에 흡족함이 없을지라도 성도라면 오직 성령과 말씀이 주시는 하늘의 긍휼과 위로를 힘입고 살아야 한다.그러면 교회에서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의 문제를 성경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치고 지도해서 건강한 교회를 세워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총회와 지교회에 다음과 같은 제안한다.1. 총회(예장 합동)에 제안사회의 변화 속에 사람들의 삶도 다양화되고 있다. 교회도 이런 추세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것은 교인들의 실제적 필요를 신앙적으로 시의 적절하게 도와주는 일이다. 특히 교인들은 삶이 복잡해짐에 따라서 교회에 다양한 목회적 요구를 하고 있다. 이런 요구들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명확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물론 개교회가 교회의 형편에 맞게 각종 예식을 진행할 수도 있다. 그렇게 모든 교회들이 자신들의 소견에 따라서 원칙 없이 행한다면 교단의 신학적 통일성은 방향을 잃을 것이고 교단의 질서 또한 무너지게 된다.다른 교단들은 벌써 발 빠르게 새로운 예식서를 전면 개정 내지는 새로이 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본 교단도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교단적 고민이 있어야 한다.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 그리고 교회법에 맞게 총회의 각종 예식서가 정비되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표준예식서』가 손질되어야 한다. 여기에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한 목회예식서도 새로이 보완 개정하여 일선 목회자들의 사역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2. 지교회에 제안본 논문에서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한 성경적인 원론을 명확히 제시하였다. 이 원리에 따라서 교인들은 결혼을 중시하고 건강한 가정을 충실하게 세워나가야 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교회현장에서는 이러한 가르침과 현실에는 괴리가 있다. 교회에는 이미 가정이 해체되었거나 이혼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다. 이혼 후 혼자된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서 올 때 교회는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이전에 치유와 회복의 관점에서 돌보아야 한다. 교회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고 하셨는데 오늘의 교회지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이 말씀을 음미해야 할 때다.이제 교회는 교인 모두를 품는 큰 가정이 되어 해체된 가정들이 회복되도록 도움을 주는 가정과 같은 따뜻한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실제로 교회를 가정과 비교하고 있는 신약의 말씀들을 보면 교회가 얼마나 가정과 같아야 하는가를 정확히 알 수 있다(엡5:22-33 참조). 특히 형제사랑에 관한 말씀들은 가정생활에 관한 그 시대의 관점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한 형제로 보는 구약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래서 가정은 작은 교회요 교회는 큰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결국 교회 전체가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가정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예방 차원에서 본다면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가정을 만든다. 가정과 가정이 모여서 교회를 이룬다. 건강한 가정들이 많이 모인 교회는 건강한 교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처 입은 가정들이 많이 모인 교회는 그렇지 못할 수 있다. 이제 교회들은 상처 입은 교인들, 가정해체로 인해 아픔을 안고 있는 결손가정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에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출처] 크리스천투데이[원본링크]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7184

[고난받는 교회 ③] 이혼,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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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 소기천 교수

2014년 10월 22일 기사

현재 한국 교회는 고난을 당하고 있다. 사실 개혁은 고난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개혁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닌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현재 겪는 고난에 대해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한국 교회 스스로 자기욕심에 끌려 고난을 자초했다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한국개혁신학회가 지난 10월 11일(2014년)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개혁신앙과 고난 받는 교회’를 주제로 제37차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한국 교회 고난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개혁신앙에 근거한 참된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해 마련된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연구논문을 ‘고난받은 교회’ 연재형식으로 일부 정리해서 싣는다. <편집자 주>

이혼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 소기천 교수(장신대, 신약학)

현대 가정 문제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상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이혼이다. 이혼으로 인해 사회와 교회의 기반이 되는 가정이 붕괴됨으로 말미암아 사회는 물론 교회라는 공동체도 불안정한 상태에서 고난을 받는 경우가 많다.

사실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이혼은 간음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다. 그리스도인인 남편과 아내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한 몸이므로 결코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성서에 근거한 개혁신앙의 전통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천하면서 오늘날의 교회는 성도들의 이혼 문제를 등한시할 수 없게 됐다. 왜냐하면 초기 교회 당시의 상황과 가르침에만 의존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들 아래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신앙은 성서에 근거한 신앙의 원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혼에 대해 성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혼은 절대 불가한가? 가능하다면 성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 구약의 율법서에 나타난 이혼

레위기 전체의 주제는 ‘거룩’이다. 레위기 21장 7절과 13~14절은 이혼한 여인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진다. 21장 1~9절은 제사장들, 10~15절은 대제사장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며, 16절부터는 아론의 자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해당 7절에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식물을 드리는 자이므로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혼당한 여인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과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다. 대제사장에게 해당하는 13절에서는 대제사장의 결혼 대상을 숫처녀로 한정하고 있으며, 14절에서는 과부를 결혼 불가 대상자 목록에 추가하고 있다. 대제사장에게 결혼 불가 대상이 확대 적용된 것은 대제사장에게 거룩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각자의 직분에 따라서 요구되는 거룩의 정도가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혼과 재혼에 관한 언급이 거룩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거룩에 대한 요구로서 결혼 명령이 제한되어진 본문은 사회 지도층에게 요구되어지는 거룩이며 또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거룩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한 야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과 결혼에 관한 엄격한 기준이 성서적 개혁신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이해는 오늘날의 사회적 통념과는 거리가 멀지만, 오래된 성서의 가르침이기에 개혁신앙에서 중시해야한다. 더구나 하나님께 몸 바친 제사장들의 경우 이혼한 여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구절을 통하여 오늘날 평신도와 엄연히 구분되는 성직자들의 경우에 이혼한 후 재혼을 함부로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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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4장 1~4절은 구체적 금지로 되어 있다. 4절의 내용은 이혼한 여인이 재혼했는데 새 남편이 죽은 이후에 전 남편이 다시 그 아내와 재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재혼을 가증한 일로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이혼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이혼은 이혼증서나 언약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혼증서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원리에서 보면 결혼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인데 인위적인 이혼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곧 하나님의 뜻을 떠난 인간의 뜻만이 난무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불임, 제사의식의 위반, 가사 노동의 태만(아침에 빵을 태우거나 불을 꺼뜨린 경우) 등을 이유로 이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의 본문은 이혼 일반에 대해 다룬 것이 아니라 남편과 이미 이혼한 사실이 있는 여인이 다시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룬 것이 그 핵심이다. 그 이유는 본래의 남편이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는 데 초점이 있다.

즉, 이혼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었고 그 이후 다시 전 남편과 결합한다면 이는 간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덧붙여서 이 구절이 대단히 남성 중심적일지라도, 그 핵심은 22장의 여성 보호적인 내용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내용의 핵심은 만일 남편이 부정으로 오해해서 여인을 잘못 내쫓았을 경우 그 여인을 다시 데려와야 하고(신 22:19),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범한 남자는 그 여자와 이혼할 수 없다(신 22:29)는데 있다. 이는 당시의 열악한 여성을 보호하고 여성의 인권을 중시하는 차원에서 이혼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성서적 원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개혁신앙은 이 원리를 중시하여 여성이 함부로 이혼을 당하여 남성 중심적 사회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여성인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구약의 예언서에 나타난 이혼

이사야 50장 1절에는 아직 이스라엘이 아비 없는 자식처럼 팔려간 것은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 때문이며, 그 어미는 쫓겨났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 자신의 의무로 삼았던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하나님을 고발한다.

이와 같은 고발에 대한 답변은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버리는 것은 심판 절차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피고인의 행동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잘못 때문에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어머니와의 이혼이나 자녀 매매 비유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멸망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것은 다른 아닌 이스라엘의 죄다.

예레미야 3장 1절과 8절에서 이스라엘의 죄는 부부관계의 이혼 혹은 추방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예레미야 3장의 경우 는 부부간의 실질적인 이혼을 말한다기보다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말하기 위한 결혼 은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말라기 2장 10~16절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질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이런 특수한 지위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그들의 선조들과 맺으신 언약의 규례를 따라 확증되었고, 이스라엘은 그 언약의 규례를 따라 살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 신들을 섬기는 여인들에게 장가든다면, 이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다. 즉 이방인과의 통혼은 하나님께 범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행동은 배신행위이므로 피해를 막으려면 그 사람들을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서 쫓아내는 수밖에 없다.

11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이방신 숭배자들과의 결혼이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성결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 언약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여 맺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내쫓긴 여인들을 변호하기 위해 나서신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신다.

히브리인들은 ‘옷’을 부부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다. 여기서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란 부부관계에서 폭력적이고 불의한 태도로 행동하는자를 말한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조강지처가 싫어져서 내쫓는 것은 제 옷을 찢는 것과 같다”로 번역하였다.

이혼과 관련된 말라기의 구절들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성품은 결혼 언약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말라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명기 24장 1-4절의 지시를 넘어서고 있다. 말라기의 가르침은 개혁신앙이 받아들여야 할 가장 성서적인 가르침이다.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신명기서의 가르침을 넘어서 말라기서가 결혼 언약을 소중히 여기고 이혼 자체를 금지하는 가르침은 성서적 개혁신앙의 기초가 될 말한 가르침이다.

종합해볼 때, 성적인 범죄와 이혼에 대한 본문들은 일관되게 불순종과 죄의 이야기들로 해석되어 왔다. 이스라엘 내에서 이 계명은 점차로 확대되어 온갖 형태의 성적인 부정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반하는 범죄로 간주되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혼인의 신성함을 가장 극명하게 밑받침해 주는 예언은 이혼이라는 악한 관행을 폭로하는 말라기에 의해 제시된다. 말라기 선지자는 혼인을 하나님이 증인으로 서신 한 남자와 그 아내 사이의 깨뜨릴 수 없는 언약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말라기서의 가르침은 이혼을 하나님께서 금지하신다는 성서적 개혁신앙의 근본이 될 수 있다.

# 신약성서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이혼

예수께서 이혼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는 기사를 담고 있는 마가복음 10장 2-12절에서는 이혼의 합법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이혼법이 나오게 된 이유, 즉 인간 마음의 완악함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이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아니라는 것, 즉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인간이 나눌 수 없다고 밝힌다. 이혼의 정당한 사유에 대한 언급은 아예 나와 있지 않다.

누가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께서는 이혼 후 재혼한 사람이나 이혼한 사람과 결혼한 사람 모두 간음죄를 범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가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이혼이 허락되는 정당한 사유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들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는 형식을 지닌 누가의 말은 세 가지 점에서 독창적이다.

첫째, 이혼의 절차가 실제로 재혼할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둘째, 예수께서 간음을 재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약과 전통 율법에서는 결혼한 남자가 정혼하지 않은 여자와 성적 관계를 가져도 간음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결혼한 여자는 남편 외에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을 경우 항상 간음이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말씀에 의하면, 아내가 남편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도 동일한 의무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즉 부부의 권리에 관해서 남편과 아내를 동등한 입장에 서게 하고 있다. 어떤 쪽에서의 음행도 간음이며, 단지 아내만의 음행이 아닌 것이다.

셋째,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승인하고 있는 일부다처를 배제한다. 남편이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두 번째 아내를 맞아들인다면 그는 첫 번째 아내에게 간음을 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혼 없이 재혼하는 것은 간음일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이혼 후에 재혼을 간음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실제적인 이혼과 일부다처와 남자만의 음행을 배제하고 있다.

이혼과 관련된 마태복음 19장 3-12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은 9절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마태의 예외조항, 즉 이혼이 허락되는 정당한 사유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마태는 그 이유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31-32절은 이혼의 정당한 사유로 음행을 들고 있으며, 이혼한 사람의 재혼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누구든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면 간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더해서 마태복음 19장 3-9절에서는 오직 음행만이 이혼 사유가 된다고 말한다. 또한 음행에 의한 이혼의 경우만 제외하고 그 밖의 모든 재혼은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말한다.

예수는 가장 근본적인 정신을 상기시키면서 이혼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며, 법적인 예식도 두 당사자의 재혼 승인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결과적으로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이혼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모세율법이 남성들에게 이혼의 합법적인 길을 터준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이혼 후에 여성이 당하는 인권적인 수모와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안하셔서 인권보호의 차원에서 이혼과 재혼을 간음이라고 규정하셨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이혼의 상황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절대 윤리적 차원을 다루어야 하는 성서적 개혁신앙의 근본이 될 수 있다. 상황윤리가 보편주의의 입장이라면, 절대 윤리는 특수주의의 입장이기 때문에 개혁신앙이 중시해야 한다.

# 바울서신에 나타난 이혼(고전 7:10~16)

바울은 이혼에 관한 가르침도 그리스도적 소명과 관련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이혼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아내에 대해서는 “갈라놓다” 동사를 사용하고, 남편에 대해서는 “떠나다” 동사를 사용하는데 둘 다 ‘이혼’을 지칭하는 기술적인 용어로 양자의 의미가 결코 다르지 않다.

둘 다 ‘이혼’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 단어들은 집을 나가거나 배우자를 유기하는 행위와 방과 식탁을 따로 쓰는 행위 같은 것을 내포한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염두에 둔 바울의 사도적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 상태로 그대로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올 것이기 때문에 세상 일에 마음을 흩트리는 것보다 재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갈라설 수 있긴 하지만 갈라선 후에는 독신으로 살거나 아니면 다시 화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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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 있는 가정의 신성함을 중시하면서, 주님의 명령 곧 주님을 섬기는 일에 그리스도인의 결혼이 기여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원칙에 굳게 서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혼에 관한 소명의식이 곧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축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배우자 한 명이 비그리스도인일 경우(12~16절)와 관련해서 바울은 자신의 판단과 예수의 판단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부부 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옹호한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않으려고 할 경우 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비그리스도인 배우자와 헤어질 것을 권유한 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결혼이 부정의 근원이라고 여기기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믿지 않는 배우자의 불신적 태도에 이해 속박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먼저 주도적으로 이혼을 요구하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화평 중에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15b절 이하). 비그리스도인 배우자의 이혼 요구에 비록 거리낌없이 헤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가능한 대로 그리스도인 배우자는 상대방과 함께 평화의 길을 가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런 해석은 선교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배우자는 비그리스도인 배우자를 신성한 결혼관계 속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결혼 관계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배우자를 개종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 결혼은 종말의 빛 아래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이지만 임박한 재림 때문에 독신으로 지낼 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했다면, 부부는 간음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며 사랑과 화평으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결혼에 관해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행할 의무가 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바울은 더구나 부부가 결혼하면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몸은 남편이 또한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혼한 이후에 서로 분방하지 말고 혹시 기도할 경우가 생긴다면 아주 잠시 동안만 분방이 가능하다고 언급한다.

이혼에 대해서 바울은 서로 갈라서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한다. 여기서 비록 바울이 가정의 창조적 질서에 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혼하지 말 것을 주님의 명령이라고 표현한 것 속에는 분명히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데려오면서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가정의 숭고한 뜻을 기리면서 창조신앙에 근거한 가정의 질서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이혼을 강력하게 금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혼을 유일하게 한 가지 조건의 경우에 허락하기도 한다. 곧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에 있어서 이혼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이혼하라고 제안한다. 오늘날 흔히 제기되는 이혼 사유 중에서 성격의 차이라든지 배우자의 부정의 문제가 여기에 결코 개입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신자끼리 만난 결혼의 이혼 문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단지 여기서 언급하는 불신 배우자와 이혼하는 것도 신앙적인 이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한 후에 신앙적인 이유로 부득이하게 이혼을 할 때에도, 주의할 사항으로 바울은 이혼을 “화평 중에” 실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7:16은 이러한 이혼의 경우에 신자가 불신 배우자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이혼의 신중함을 거듭 제안하고 있다. 곧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한 이상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그 배우자에게 복음전도의 기회가 주어진 것인 만큼 함부로 이혼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주제가 선교적 의무이다.

곧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이 하나님의 선교에 부합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결혼 유무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보수적인 율법 이해를 개혁신학이 계승할 것을 우리에게 올바르게 보여주고 있다.

# 이혼은 장려되거나 당연한 일 아냐

구약과 신약을 통해 이혼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 본 결과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항은 이혼은 결코 장려되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혼한 여자도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일도 역시 권장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약의 경우에는 성적인 범죄와 더불어 이혼은 불순종과 죄로 해석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신약의 경우에 예수께서는 더욱 급진적인 견해를 취하면서 신명기의 이혼 규례마저도 부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완악함과 시대적 변화와 더불어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상황 때문에 이혼을 허용하는 경우들이 발생하였음을 덧붙인다.

바울은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이혼 문제와 관련된 당시 교회의 정황을 종말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선교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즉,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제도이므로 부부가 간음죄를 범하지 말고 사랑과 화평 가운데서 거룩한 생활을 하되, 불신자인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는 그가 요구할 경우에 한해서 이혼을 허락하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이혼한 후에는 혼자 지내거나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데 힘쓰라고 권면한다.

구약과 신약의 메시지는 모두 근본적으로 이혼을 금하고 가정 제도를 거룩하게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성서를 근거로 한 이혼에 관한 개혁신앙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이혼을 허용한 경우는 소극적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 세상적인 이유로 이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다. 종말론적 상황에서 바울이 이혼의 사유로 유일하게 거론하고 있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신앙적인 이유로 이혼문제가 제기 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아주 소극적으로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혼하는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서 자신의 이혼을 합법화하고 있는 오늘의 종말론적 상황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너무나도 준엄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 이혼인가? 더구나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합당한 이혼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이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 바울의 교훈이다.

시대가 변천하면서 오늘날의 교회는 성도들의 이혼 문제를 등한시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초기 교회 당시의 상황과 가르침에만 의존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들 아래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적으로 이혼을 기능 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혹은 갈등 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어느 관점에서 보든지 분명한 것은 이혼이 당사자와 그의 가족, 특히 자녀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부정적인 영향 가운데 중요한 것은 정서적 문제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와 같은 종말론적 현실을 인정하고 이혼을 예방하는 차원과 이혼으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이중적인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특별히 전자와 관련하여 교회는 이혼에 관한 성서에 근거한 개혁신앙적 가르침이 올바르게 성도들에게 전달되고 인식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결혼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부름 받은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이므로 그 소명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고난받는 교회①> 한국교회 현재 고난은 ‘응보적 고난’ (tistory.com)

<고난받는 교회②>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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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

1. 결혼의 성경적 개념

우리는 교회 안팎에서 옛 가치들이 도전받고 있는 시기에 살고 있다.

크리스챤들은 혼돈 속에 있고 무엇을 믿어야할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특히 이혼과 재혼에 관한 문제들은 교회에서도 회피해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거꾸로 된 ‘새로운 도덕성(new morality)’이 나타나게 되자

교회는 더 이상 눈을 감을 수 없게 되었다.

만일 교회가 결혼과 이혼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세상이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가르칠 것이다.

결혼에 관한 성경적인 원리들을 이해해야 이혼이나 재혼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데,

많은 경우 이혼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는 사람들이 결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전개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경적 자료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혼과 재혼에 관한 바른 성경적 입장을 갖기 위해서는 결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혼이란 무엇인가?

첫째, 결혼은 인간의 편리한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결혼제도를 제정하셨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폐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둘째, 결혼은 기본적인 제도이며, 인간 사회에 설립된 첫 번째 제도이다.

셋째, 결혼은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 아니다.

넷째, 결혼과 성적인 연합은 다르다.

결혼은 성적인 연합보다는 크고 포괄적인 것이다.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창 2:18에 보면,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하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결혼의 본질을 동반자 관계라는 용어로 묘사할 수 있는데,

동반자는 하나의 친밀한 연합 혹은 관계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즉 결혼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에게 동반자 관계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혼 안에서의 사랑은 배우자의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필요한 동반자 관계를 제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Adams는 이러한 이유로 결혼을 ‘동반자 관계의 언약’이라고 불렀다.

잠언 2장 17절에 젊어서 결혼한 동반자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말라기 2장 14절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의 동반자들에게 진실하지 않은 남편들을 책망하신다.

이러한 동반자들은 언약에 의해서 아내가 된 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반자 관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있는 이 두 구절은 결혼의 언약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있다.

이 언약에서 두 사람의 언약은 자녀를 낳아서 기르고 서로의 성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의 것을 언약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외로움을 없애고 독처하지 않게 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결혼 안에 있다.

결혼에는 하나님의 더욱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궁극적인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에베소서 5장 25절부터 28절까지와 베드로전서 3장 1절부터 7절까지를 보면

‘이와 같이’라는 말을 남편과 아내에게 사용하고 있다.

특히 베드로전서 3장에서 ‘이와 같이’는 그 앞부분인 2장에서 설명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그 부분은 2장 21절부터 24까지를 통해서 재해석 되어져야 한다.

2장에서 성경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속에서도 보복하거나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고

이로 인해 결국 우리를 위한 은혜로운 결과가 이루어졌다.

이 말씀 후에 결혼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에베소서 5장과 베드로전서 2,3장을 함께 놓고 볼 때 가르침의 초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고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 주님이 자신을 맡긴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외로움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한,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닮으라고 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창세기 2장을 직접 인용해서 부모를 떠나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창2장의 말씀이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32절에서 결혼을 가리켜 ‘신비’라고 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창세기 2장에서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보았다면 우리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누가복음 24장에서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리스도에 관한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예를 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이 그 한 실례이다.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한 가운데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밝히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질문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고 메시야라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실망하고 좌절했다고 하자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하시면서 제자들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꾸짖으셨다.

그런 다음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서 성경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가르치셨을 때 그들의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바울이나 다른 신약의 저자들이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의 목적을 알기 위한 출발점은 외로움이나 배우자 각각의 필요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다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떻게 결혼이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증진시켜 줄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까 보았던 창세기 2장 18절에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씀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에게 독처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이를 알기 위해 창세기 1장 27절을 살펴보자.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창조되었는데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우선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들은 이성적 존재, 의사소통의 능력,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과 같은 창조적인 능력이 있다.

또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 품성을 생각 해 보라.

그분의 선하심, 의로움, 정직성, 겸손, 자비, 희생, 인내, 동정심,

긍휼히 여기심이 있고 우리도 이러한 성품을 본받았다.

대부분의 미혼남녀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자신이 인내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희생도 잘하고 동정심도 교통체증 속에서 다른 차들을 끼어들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면 자신이 이 중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혼자 있을 때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관계성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우리가 자비와 인애를 알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잘 알게 된다.

내게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과 매일 관계를 맺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생활 속에서 정말 내게 구주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하나님 자신이 삼위일체라는 관계성 속에 거하신다.

삼위일체는 신비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세분이 한 분으로 나타나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관계성 속에 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은 모두 관계성 있는 것으로 창조하셨고

그중의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2. 이혼에 대한 성경적 이해

이제 이혼에 대해서 살펴보자.

어떤 의견들과는 반대로 이혼의 개념은 오히려 성경적이다.

성경은 이혼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무분별한 이혼은 통제하고 있다.

먼저 성경이 이혼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혹은 언제든지 이혼한 모든 사람에게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말 2:16).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이혼을 똑같은 방법으로 미워하시지는 않으며

또한 이혼의 모든 국면을 미워하시지도 않는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음으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렘 3:8).

즉, 하나님은 그 자신이 부정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처럼

성경에 씌어진 규칙을 따라서 행해진 이혼은 미워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혼에 대한 균형 잡힌 성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이혼에 대하여 싫어하시는 모든 것을 싫어하는 한편,

이 죄악 된 세상에서는(하나님 자신이 보이셨던 것처럼)

이혼을 꼭 해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잘못되게 이혼을 한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그러한 이혼은 죄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때 오히려 소망이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혼은 용서될 수 없는 죄가 아니기 때문에 이혼은 용서받을 수 있다.

이러한 법률적인 이혼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혼의 기원은 인간 역사의 희미한 과거의 어느 한 부분에 위치해 있다.

그렇지만 분명 이혼은 결혼과는 달리 하나의 인간적인 제도이다.

성경적인 증거로는 이혼이 인정되었고 허용되었으며 통제되었지만,

이혼은 결혼과는 달리 하나님에 의해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이혼은 이혼을 하나의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구절들에서 처음으로 성경적인 개념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규제하는 일을 행하셨다(신 22:19, 29; 24:1-4).

또한 예수님은 오히려 이혼을 인식하시고 그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하셨다.

⑴ 하나님은 이혼이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이 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⑵ 이혼을 할 때에는 질서 있게 해야 한다.

⑶ 이혼을 하는 사람들은 이혼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은 하나님과 같아야만 한다.

우리는 이혼을 그냥 좋게 넘겨서도, 쉽게 비난해서도 안 되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도자와 직분 맡은 자들로서 성경의 원리에 따라서 성도간의 이혼을 규제해야 한다.

과거 성경의 시대에는 이혼이 어떻게 행해져 왔는가?

첫째, 서면으로 된 이혼증서가 있었다(신 24:1하; 렘 3:8).

이 이혼증서는 반드시 서면으로 행해야 하며, 분명하게 이혼사실을 기록해야만 했다.

이 증서는 이것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고소, 오해 등으로부터 보호했으며

여자의 위치를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분명히 밝혔다.

서면으로 하는 것은 법적으로 뿐 아니라 신중하고 심사숙고하도록 만들었다.

둘째, 증서는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신 24:1).

이혼을 하는 사람은 본인이 직접 증서를 상대방의 손에 쥐어주어야 한다.

셋째, 이혼당한 사람은 반드시 집에서 내어보내야 했다(신 24:1).

가정이 실제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는 행동을 정식으로 행해야 한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모습으로서 이혼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크리스챤 가운데서의 이혼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성적인 죄의 경우에는 크리스챤들에게 이혼이 허용되지만 이혼이 결코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즉 화해는 교회의 보살핌과 훈련 아래에서 믿는 자들 사이에 언제나 가능하다.

이혼은 사라지지 않을 일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대안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고,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하기 전에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화해하도록 하는

모든 적당한 노력과 도움이 있어야만 한다.

이제 이혼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이혼이란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서 동반자 관계를 제공하기로 한 언약을 거절하고 깨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의 개념은 전에 존재했던 언약적인 관계를 절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별거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항상 이혼에 의한 별거라고 언급된다.

즉 별거가 성경에는 현대의 이혼보다는 좀 덜한, 이혼의 대안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신약성경에서 고찰하는 두 가지 가능한 이혼 사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그것을 적당한 문맥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10절에서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12절에서는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서론적인 구절들은 무리를 두 가지 다른 사람들의 그룹으로,

⑴ 첫 번째 그룹과 ⑵ “그 남은 사람들”이라고 불린 두 번째 그룹으로 소개시킨다.

이 두 서론적인 구절들은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불필요한 고민을 하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첫 번째 그룹은 신적으로 명령을 받는 것이고

두 번째 그룹은 단지 바울의 독실한 충고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말에 대한 일반적인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영감을 받지 않은 성경말씀, 잘못된 성경말씀, 권위가 없는 성경말씀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바울은 서론적인 구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첫째, 10절과 11절에서 바울은 사실상 “나는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성도간의 이혼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그 가르침대로 그가 말씀하신 이혼에 대한 원리를 정확하게 되풀이 한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그러나 12-16절에서 그는 사실상 “지금 나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는

생기지 않아서 말씀하지 않으셨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문제는 복음이 이방인들 가운데로 전파된 지금 일어났고,

나는 이것에 대하여 말을 하겠다

(내가 이 편지에서 이와 비슷한 많은 다른 문제들에 대하여 말한 것처럼 영감을 받은 동일한 방법으로).”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부가적인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혼에 대한 가르침에 교훈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 나온 두 그룹을 분리하는 목적이다.

그렇다면 두 그룹은 누구인가?

고린도전서 7장 10절과 11절, 12-16절을 얼른 보면 예수님은 믿는 자들 간의 이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셨다.

10절과 11절에서는 바울이 이혼을 심사숙고하는 두 사람에게 말한다.

그러나 12-16절에서 바울은 결혼한 후 불신자들과의 이혼을 심사숙고하는 크리스챤들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이 문제는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다루어지는 문제였다.

바울은 두 그룹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이 같지 않다는 것을 제시한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이러한 동일한 그룹을 포함하는 상황들은

이들이 서로 다르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삶의 범주에서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관계는 두 믿는 자들 간의 관계보다는 다르게 취급해왔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이 점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첫 번째 그룹인 ‘믿는 자들과 결혼한 믿는 자들’에게 바울은 무엇을 말하는가?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0-11)

이 구절에서 기본적인 이중의 명령은 크리스챤 아내나 크리스챤 남편은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결혼한 크리스챤들에 대한 동일한 기본적인 진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바울이 ‘만일 갈릴지라도’라는 말을 한 것은 갈리는 것에 대하여 허락하지 않지만,

죄악된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혼이 행해지는 것을 인식하므로

그는 더욱 첨가된 죄로부터 오는 더욱 크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하여 경고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 이혼한 아내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는 것은 화해의 가능성을 허용하게 함이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화해를 배제하는 것이다.

바울이 좇는 것은 화해이다.

바울은 두 믿는 자들이 보다 새롭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결혼으로 돌이키기를 원한다.

모든 믿는 자들은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화해뿐만 아니라

미래에 아름다운 결혼을 가져올 수 있는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두 번째 그룹인 ‘불평등하게 멍에를 진자들‘에게 바울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은 믿는 자에게 그의 구원받지 못한 배우자와 이혼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는 대신에 다른 것을 명령한다.

그(혹은 그녀)는 결혼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는 배우자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믿는 자가 막을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후에도 믿지 않는 자가 결혼을 유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혼은 용납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믿지 않는 자가 결혼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경우에 바울은 “갈리게 하라”(15절)고 말한다.

믿지 않는 자가 결혼을 지속하려는 동의가 없으며(12, 13절),

그 반대로 결혼을 끝내려는 요구가 있을 때는 크리스챤이 갈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챤의 결혼이 결론이 없는 채로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혼의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화평을 원하신다.

결혼이 존재하거나 않거나 해야 한다.

하나님은 중간 상태의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문제는 화평을 얻기 위해서 어느 쪽으로든지 결말을 지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별거라는 견해는 이 원리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다.

별거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확실성이 없게 만들고 또한 진정한 평화에 대한 역효과를 나타낸다.

크리스챤들조차 종종 그래도 이혼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별거를 한다.

그러나 별거는 성경에 대한 인간적인 대용품이기 때문에,

‘이혼보다는 별거’라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별거는 이익보다는 더 많은 해를 끼치게 된다.

모든 이혼들은 어떤 형태의 죄로부터 기인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혼이 죄악된 것은 아니다.

성경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결혼을 지속시키려고 모든 노력을 했을 때에만 이혼을 합법화한다.

그러나 만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견고하게 결혼생활을 반대한다면

믿는 자는 이혼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아도 된다(고전 7:15).

이 이혼은 모든 노력이 실패했을 때 마지못해서 승낙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혼의 결과는 믿는 자를 모든 결혼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며,

믿지 않는 전배우자와 다시 재혼해야 하는 모든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믿는 자들 간의 단 한가지의 이혼의 이유로 음행을 승인하셨다는 점이다.

음행은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모든 성적인 죄를 포함한다.

그러나 음행이라는 단어에 혼돈이 있다는 것은 숙고할만하다.

미국 법에서 음행은 미혼자들이 저지르는 성적인 죄를 뜻하지만 간음은 기혼자들의 성적 죄를 뜻한다.

그렇지만 이 구별이 성경으로까지 연결되면 안 된다.

이것은 성경적 구별이 아니다.

간음은 항상 성적인 죄보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결혼의 언약이 언제든지 고려되는 개념이다.

성적으로 부당하다는 개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결혼생활 안에 끌어들임으로 해서

결혼언약을 깨뜨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님은 음행을 이혼서류를 전달할 수 있는 근거로 보시는데, 그것은 간음뿐만 아니라

근친상간, 짐승과 성교하는 것, 남성의 동성연애 그리고 여성의 동성연애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단지 간음만을 말한다면 그 초점을 너무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성경이 이혼을 허용하는 이유로 음행을 말하고는 있지만,

남편이나 아내가 범죄한 배우자의 회개를 근거로 해서 용서를 하는 것도 분명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성경적인 상담자는 이러한 대부분의 사례들을 취급할 때 죄를 범한 배우자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마지막으로는 부부가 화해를 하도록 격려할 것이다.

만일 죄를 지은 배우자가 회개를 한다면 그 배우자는 반드시 용서해야만 한다.

여기서의 ‘용서’는 이 문제를 다시는 문제 삼지 않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믿는 자는 용서한 후에 이혼을 요청하면 안 된다.

그리고 용서는 용서받은 사람과의 새로운 관계로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음행을 범했을 때의 이혼은 음행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만으로 제한해야만 한다.

그러나 죄짓지 않은 배우자가 용서하기를 원하고 결혼생활을 계속하기를 원하지만,

죄를 범한 자가 회개를 하지 않거나 죄를 계속 범하기 때문에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이러한 경우의 사례들에서는 화해와 권징의 역동성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득이하게 권징이 실시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부부간의 갈등이 미해결의 문제로 남지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를 생각해보자.

창세기, 신명기,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이혼의 가르침은 적극적으로 이혼을 알리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창세기 2장, 신명기 24장 1-4절, 마태복음 5장 31-32절, 19장 3-9절,

마가복음 10장 2-12절과 누가복음 16장 18절에서 우리는 이혼에 관한 가르침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명기의 구절은 바리새인들에 인하여 소개되었고 예수님께서 그 구절들을 인용하셨다.

예수님이 듣는 사람들에게 결혼의 근본원리, 목적과 목표를 생각하게 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을 통해 토론하셨다.

그리고 이혼은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들의 배우자들에게

무정하고 완강한 태도를 보인 결과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개되었다.

즉 하나님이나 모세조차도 오직 허용하고 규제했을 뿐이며,

하나님이나 모세에 의해서 소개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문제를 적절한 상황에 맞추어 전개하시기 위해서 창세기의 그 구절을 인용하신 것뿐이었다.

3. 재혼에 대한 성경적 이해

신명기 24장 1-4절에 나오는 이혼의 모습은 첫째, 이혼을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합법적인 절차로 인정하고 그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둘째, 음행 이외의 이유의 경우에는 이혼을 제정하거나 허용조차도 하지 않는다.

셋째, 쉽게 이혼하는 것을 격려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요점은 이혼이나 재혼이 한번 행해지고 나면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급한 행동을 막으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명기 24장 1-4절은 비성경적 혹은 불법적인 근거에서 주어진 이혼을 말하는데,

그러한 이혼은 합법적이지만 죄악된 것이다.

이 구절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신명기 24장 4절에서 아내는 두 번째 결혼 때문에

“더럽혀”졌기 때문에 첫 남편과 재혼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녀의 첫 남편으로부터의 이혼은 법적으로는 합법적일지 몰라도 성경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혼이 적절하고 죄 없는 것이었다면 그 이혼으로써 그녀는 두 번째 남편과 죄 없이 재혼하도록 자유롭게 되었다.

그녀는 첫 남편과 계속해서 결혼생활을 하거나 화해를 해야 하는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이 그녀를 “더럽혔다”.

우리는 만일 그녀가 두 번째 남편과 이혼으로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남편의 죽음으로 헤어졌을 경우에도(3절), 그녀가 더러워졌기 때문에

다시 재혼을 못한 것으로 보아서 그녀는 두 번째 이혼으로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두 번째 결혼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오직 두 번째 남자와 성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더러워 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결혼서약을 깨뜨린 것 때문에 더러워졌다.

여기에는 간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명기 24장에서 잘못된 일은 두 남자가 한 아내를 차례로 가졌다는 태도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여호와께서 신명기 24장에서 혐오스럽고 더렵혀짐으로 이어진다고 부른 것은 결혼의 연속보다 더 깊은 것이다.

신명기 24장의 아내는 두 번째 남편과의 성적 관계 때문에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죄악된 이혼(합법적이지만)으로 인해서 일어난 두 번째 결혼과 성적 관계로 인해서 더렵혀진 것이다.

첫 번째 이혼은 천박한 이유였기 때문에 죄악된 것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결혼도 죄악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재결합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죄악 된 이혼은 첫 결혼의 언약을 정말로 깨뜨렸다.

간음은 항상 결혼 언약을 깨뜨려서 제 3자를 상황 속으로 개입시키므로,

둘만이 서로를 위해서 하기로 한 언약에서 제 3자에게 권리나 특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간음은 결혼 언약이 아직 영향이 있을 때 일어난다.

그러므로 언약은 깨어졌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이혼한 상태로 그대로 있을 권한이 없다.

그들에겐 재결합을 통한 재혼으로 다시 화해할 수 있는 소망이 있다.

그것이 핵심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화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지 않아야 하며

또 다른 간음을 하지 않기 위해서도 재혼을 하지 않아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할 수 있다면,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할 수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재혼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재혼을 허락하시는가, 반대하시는가? 격려하시는가, 묵인하시는가?

성경에는 배우자가 죽은 후에 재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대하는 것이 없다.

다음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자.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 7:3하)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 7:39)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 5:14)

바울은 과부들이 재혼하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유혹, 불명예, 참견 그리고 교회가 과부들을 돕기 위해서

불필요한 짐을 지는 것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현실적인 이유들과 하나님의 이름의 증거를 위해서,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교회에게 주었다.

즉 재혼 그 자체에 대해서 잘못된 점을 찾는다거나 문제점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재혼이 권고된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바울은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가진 과부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재혼을 명령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8,9)

분명하게 재혼의 개념은 신약의 교회에서 매우 좋게 받아들여졌다.

그것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의혹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서 볼 때 바울이 교회가 재혼한 사람을

장로나 집사로 임명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바울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보기 드문 구문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는데,

그는 한 사람이 몇 번 결혼했는지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몇 명의 아내를 가졌는지에 대해서 염려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구절은 엄격히 말해서 오직 하나의 해석만을 허용한다.

장래의 장로나 집사는 결혼생활을 비롯한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다처주의자이어서는 안 된다.

즉 이 구절은 어떤 한 주어진 시간에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한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했으나 그것이 절대로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일부다처주의자인 개종자가 그의 아내들을 버리기 전에

그리스도의 지체로 들어오게 허락되었지만 직분자가 될 수는 없었다.

직분자의 생활은 반드시 모범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일부일처제로서의 결혼의 모범을 교회에서 지키기를 원하셨다.

일부다처제는 그 당시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과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맥락에서 재혼한 사람들을 직분자로 임명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재혼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은 첫째, 일반적으로 재혼은 허락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격려되었고 명령되기도 했다.

신약시대에서 재혼은 좋게 보아졌다.

둘째, 이혼 후의 재혼은 허락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정확히 그의 배우자로부터 놓인 경우에는 죄가 없다고 분명히 선언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경우에 이혼 후에 재혼 할 수 있는가?

먼저 간단한 원리는 적절하게(성경적인 규정에 따라서) 이혼한 모든 사람들은 재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복잡한 원리는 바르지 않게 이혼한 사람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의 배우자에게 아직도 화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

또는 적절하게 이혼했으나 다른 의무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 의무들을 이행해야 하며

그때야 비로소 결혼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개종자들과 회개한 기독교인들의 과거의 문제가 이혼과 재혼에 관한 토론에서 자주 거론된다.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결코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살인, 아주 속된 음란 등을 용서하시는 것이 분명하므로, 교회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용서는 개종 후에 범죄한 회개한 믿는 자의 경우일지라도 정결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위로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들과의 완전한 친교에 대한 회복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후 2:7,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보다 더욱 크신 분이시다.

또한 우리의 간음과 이혼의 죄보다도 더욱 크신 분이시다.

즉 죄는 가증스럽지만, 은혜는 가장 가증스러운 죄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롬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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