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 의 난 | [토크멘터리 전쟁史] 186부 동아시아 전쟁사 이자성의 난 상위 175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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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이자성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세력을 키워나간 이자성~
위협을 느낀 숭정제는
대대적인 토벌을 지시를 하는데~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이자성의 난을 파헤쳐 본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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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자성(李自成, 1606년 9월 22일 ~ 1645년 5월 17일)은 명 말기 농민군 영수이다. 아명(兒名)은 이홍기(李鸿基). 명을 멸망하게 한 주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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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0/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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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멸망과 이자성의 난 – Sciencetimes – 사이언스타임즈

명나라의 멸망과 이자성의 난. [기후와 전쟁] 가뭄과 기근… 백성은 ‘도주’, 과중한 세금… 황실은 ‘안주’. 2010.09.27 00:00 글: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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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ciencetimes.co.kr

Date Published: 6/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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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 – 네이버 블로그

이자성의 난 – 1631년. 중국의 명(明)나라는 역참(駅站)이라 불리는 역마제도로 전역을 다스렸는데, 명말 숭정제(崇禎帝)의 통치때 경비절감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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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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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 – 리브레 위키

1627년부터 46년까지 지속된, 명나라를 멸망시킨 그러나 신 왕조 수립에는 실패하고 청에 의해 종말을 고한 명 말엽 대규모 농민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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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ibrewiki.net

Date Published: 5/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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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 이자성의 난 – 제타위키

이자성, 이자성의 난 · 1 이자성[ | ]. 명나라 말기 농민군 영수; 명 말기 농민 반란 지도자; 1644년 대순 건국, 베이징 점령하여 명나라 멸망시킴 · 2 이자성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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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zetawiki.com

Date Published: 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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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 – 구름그위에서

이자성은 반란군은 예정보다 빠른 3월 17일 북경성 밑에 도착하니 북경성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북경성에는 15만 4천 명의 군사가 있었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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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es365.tistory.com

Date Published: 8/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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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성 1:이자성의 난김용 | 민중출판사- 교보문고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단지 확인을 위한 포장 훼손은 제외)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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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obile.kyobobook.co.kr

Date Published: 4/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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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멘터리 전쟁史] 186부 동아시아 전쟁사 이자성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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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자성 의 난

  • Author: 국방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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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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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같은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의 가수 겸 연기자에 대해서는 이홍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자성(李自成, 1606년 9월 22일 ~ 1645년 5월 17일)은 명 말기 농민군 영수이다. 아명(兒名)은 이홍기(李鸿基). 명을 멸망하게 한 주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이자성의 난 [ 편집 ]

숭정제가 즉위하던 시기 명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숭정제가 즉위하고서 기근이 들고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데다가 청군도 나날이 격렬하게 침공했다. 명의 장군 원숭환이 청군을 늘 방어하여 왔으나 숭정제는 원숭환을 의심하여 죄를 물어 죽인 탓에 청군을 방어할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 시기 틈왕(闖王) 고영상을 계승한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大順, 순나라)이라 칭하였으며, 그 농민군 세력이 북경에 육박하였다. 숭정 17년인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는 신무문으로 나와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숭정제는 당시 향년 33세였다.

1644년 5월 27일 청의 도르곤은 명의 숭정제가 죽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서 북경에 진입해 천명을 선포하였다. 북경에서 섬서 상락으로 철수한 이자성의 농민군 세력은 급속히 약화했다. 1645년 이자성군은 청에 동관(潼關)마저 빼앗기자 양양을 거쳐 호북성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남명의 좌양옥(左良玉)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여 형세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좌양옥이 청군과 전투 도중 갑작스레 병사하여 기회는 무산되었다.

말년 [ 편집 ]

우창과 강서에서도 청군에 패배한 이자성군은 현재 호북 통산(通山)인 통성(通城)으로 퇴각하였다. 구궁산(九宮山)에서 명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가 있으나,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 관련 기록을 보면, 탈출이 어려워지자 자결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체가 발견되지 않아 탈출하여 호남성 상덕인 석문(石門)에 소재한 협산사(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같이 보기 [ 편집 ]

명나라의 멸망과 이자성의 난 – Sciencetimes

‘사이언스타임즈’와 ‘국방일보’가 지난해 6월 29일 MOU를 맺고 콘텐츠를 제휴하기로 했다. 이로써 사이언스타임즈의 과학·창의교육 콘텐츠가 70만 국군장병들에게 보급되고, 국방일보의 글로벌 이슈에 관한 우수 콘텐츠를 유기적으로 활용하게 됐다. 이에 사이언스타임즈는 국방일보에 연재 중인 ‘기후와 전쟁, 역사와 기상’을 연속 게재한다.

기후와 전쟁 “역사 속 가지 않았던 길들. 기회를 놓쳐서 파국을 맞았던 사례들,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이 배운다!”

레이황이 지은 책 ‘1587년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에서 던져주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주 조그마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글을 시작한다. “회의를 한다는 소식에 궁궐로 달려온 명나라 대신들은 잘못된 전갈이라는 말을 듣고 허탈해하며 돌아갔다” 너무나 사소한 듯 보이는 이 사건에서 그는 명나라의 몰락을 본다. 황제와 대신과 인민들 모두가 무력한 시스템 속에 안주하면서 서서히 멸망의 길로 다가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해에는 아무 일도 없었을까?”

16세기 말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의 위력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지구 표면의 평균기온이 3℃ 내려가면 대기 중의 수분이 20% 감소돼 심한 한재(旱災)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당시 유럽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기후가 한랭해지면서 심한 한재가 몰아닥쳤다. 거의 매년 발생한 극심한 한파와 가뭄으로 기근이 계속됐다.

1622년부터 8년간 한파·가뭄 지속

“희종 천계 2년에서 사종 숭정 2년 사이(1622~1629), 8년간 내내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았다. 숭정 6년(1633), 서안에 가뭄과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다. 몹시 가물어 한 말의 쌀값이 1000전이나 했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섬서통지)

여기에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구하기 위해 출병했던 군사비와, 청나라와의 계속되는 싸움에도 엄청난 군비가 들어갔다. 명나라는 군사비를 염출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가혹하게 물렸다. 기근으로 세금을 도저히 낼 수 없었던 백성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기근과 함께 농사짓는 백성이 줄다 보니 기근은 더욱 심해졌고, 더 많은 농민들이 반란 집단에 가세하게 됐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반란은 1627~1628년, 섬서성 북부 지방에서 2년 동안 극심하게 발생한 한해로 시작됐다. 먹고 살 길이 없었던 백성들이 기아 폭동을 일으켰다.

기아가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정부 군사들에게도 군량이 공급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결국 정부 군사들까지 반란에 가담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반란 세력 중 가장 강했던 집단은 고영상이 이끄는 세력이었다. 이자성은 고영상의 조카사위가 되면서 그의 부장으로 반란군을 지휘했다. 1636년 고영상이 죽으면서 이자성은 반란군의 수령으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기세 등등 명나라와 맞섰지만 곧 정부군의 진압에 밀려 패퇴를 거듭했다. 이자성이 다시 힘을 되찾은 것은 한발과 폭풍으로 민심이 다시 흉흉해지면서다.

이자성 50기만 거느리고 하남 진출

1640년 9월, 이자성은 겨우 50기만을 거느리고 출진해 호북을 거쳐 하남으로 진출했다. 하남을 반란의 근거지로 삼은 것은 매우 현명했다. 당시 하남 지방은 수년 동안 한발과 폭풍 등 자연 재해로 농토가 황폐하고 곡가가 치솟아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금을 과중하게 매겼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백성들 앞에 이자성이 나타나자 농민들은 다투어 이자성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이자성은 우선 백성들의 불만을 해결해 주는 일에 진력했다. “농토를 고루 나눠 주고 세금을 거둬들이지 않는다” “말을 논밭에 놓아 농작물을 짓밟거나 쓰러뜨리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살인을 한 자는 죽인다” “부녀자를 겁탈한 자는 중형에 처한다” 짓밟히고 무시당했던 농민들은 환호했다.

또한 점령하는 곳마다 부잣집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에게 곡식과 재물을 나눠 줬다.

이자성은 남양을 함락시킨 후 개봉 공략에 나섰다. 개봉은 명나라의 상징적인 도시였다. 따라서 명나라의 병부시랑(국방차관)이 사령관이 되어 수비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몇 달을 힘을 다해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자 이자성은 수공작전을 사용하기로 한다. 여름철 장마 때 내린 비를 가둬 뒀다가 일거에 무너뜨려 개봉을 물에 잠기게 하겠다는 것이다. 황하 지역의 둑을 높이 쌓아 놓았다가 1642년 9월에 둑을 무너뜨렸다. 무너진 둑 물은 노도처럼 들이닥쳐 개봉의 북문을 무너뜨렸다. 1644년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이자성은 서안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스스로 대순왕이라 칭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승승장구하던 이자성의 반란군은 1644년 3월 19일 북경을 함락시켰다. 명나라는 16제 277년 만에 멸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1587년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해였을까? 도대체 명나라 황제는 무엇을 놓쳐 멸망의 길로 들어섰던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을 휩쓸던 한재와 기근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기근으로 민심이 명나라에서 떠난 것이 결정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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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

이자성의 난 – 1631년

중국의 명(明)나라는 역참(駅站)이라 불리는 역마제도로 전역을 다스렸는데, 명말 숭정제(崇禎帝)의 통치때 경비절감을 위해

이를 폐지하자 역참제에 기대어 살던 많은 백성들이 일을 잃고 유랑민이 되거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연안부(延安府) 미지현

(米脂縣, 현재의 陝西省)출신의 이자성(李自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천계 7년(天啓7年, 1627년), 숭정원년(崇禎元年, 1628년)에 섬서에서 발생한 큰 가뭄으로 인해 반란이 빈발하자 이자성도 여기에

참여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만주족(滿州族)의 대책에 쫓겨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이에 편승한 반란군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산서(山西)를 제압하고 북직예(北直隸, 현재의 河北省)까지 압박할 정도였다.

그 후, 관군의 반격으로 밀려나 하남(河南)으로 이동한 반란군은, 수령 고영상(高迎祥)을 필두로 그 휘하에 장헌충(張献忠)이

있었는데, 이자성은 고영상 배하의 무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때 작전회의인 형양대회(滎陽大会)에서 관군에 대해 전군이

일치해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두각을 드러내 이듬해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한 고영상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되었다.

이자성은 고영상이 이름한 침왕(闖王)이라는 칭호를 이어받아 반란군의 수괴가 되었다. 그러나 고영상의 죽음으로 인해

반란군의 기세는 약해져 이자성의 반란군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 섬서성으로 퇴각하여 다시 산 속으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이자성군을 눌렀다고 본 관군은 호광(湖廣)으로 이동하여 장헌충군을 토벌하러 이동하는 바람에 이자성군은 기사회생해

하남을 제압했다.

그 곳에서 거인(挙人, 향시를 통과한 과거합격자)이던 이엄(李嚴)과 만나, 균전(均田, 토지 균등분배)과 면량(免糧, 세금면제)의

기치를 이엄으로부터 제안받아 이 두 구호와 엄정한 군율로 인해 농민의 지지를 받은 후 삽시간에 수십만의 대군으로 팽창했다.

(이엄은 청나라 시기에 창작된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또, 우금성(牛金星)등, 지식인들을 진영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는데, 기세가 오른 이자성군은 숭정 14년(1641년)에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만력제(萬歷帝)의 제 3 왕자였던 복왕(福王), 주상순(朱常洵)을 처형했다. 복왕은 만력제에게 총애받아

사치를 즐겼는데, 이로 인해 많은 세금을 거더들여 낭비했기에 민중들의 분노를 샀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개봉(開封)을 함락하고 숭정 16년(1643년)에 양양(襄陽)에서 대원수(大元帥), 이어서 신순왕(新順王)이라 칭한 이자성은

6부 등의 국가로서 제도를 정비한 후 다시 서안(西安)을 함락시켰다. 이듬해인 숭정 17년(1644년)에 서안으로 입성한 이자성은

국호를 순(順, 혹은 大順이라고도 함)이라 칭하고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정한 후 현지에서 순왕(順王)이 되었다.

2월에 이자성군은 북경(北京)을 목표로 북벌을 개시하여, 3월에 북경을 함락시켜 숭정제를 자결로 몰아넣은 다음,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에 입성했을 때 백성들은 물론 관군까지 숭정제를 버리고 대열을 갖추어 환영했다고 한다.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다시 황제가 되기 위해 모든 수단과 의식의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입성 후 이자성군은 살인귀로 유명한 장헌충의 군대가 합류하면서 엄정했던 군율도 무너지기 시작해, 약탈, 강간, 살인이

횡행하였다. 이 때 동북지방에서 만주족인 청(淸)에 대한 전선 기지였던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에

투항했다.

그 후 이자성군은 도르곤과 오삼계가 이끄는 청군과 격돌하면서 대패해 북경을 버리고 달아났다. 입성한지 40일간의 짧은 천하였다.

다시 이엄과 우금성이 획책으로 이엄을 살해하고 청군에 투항하면서 이자성은 서안, 통성(通城, 현재의 湖北省)으로 달아났다가

영창 2년(1645년)에 구궁산(九宮山)에서 현지 농민들에게 맞아죽었다.

하지만 이자성이 승려로 변장해 강희(康熙) 13년(1674년)까지 살아남았다는 전설도 있다. 한편 살아남은 이자성군의 잔당은

남명(南明)에 들어가 청나라에 저항을 계속했지만 강희 3년(1664년)에 모두 토벌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시 숭정제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숭정제의 원수를 갚고 오랑캐(만주족)로부터 한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청대에 이자성은 반역자로 취급되어,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역적의 수괴라는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1944년에 역사가인 궈모루(郭沫若, 곽말약)에 의해 이자성을 기의군(起義軍)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도 처음엔 역적설로 취급했지만 궈모루의 주장에 동감해 이자성을 농민반란 지도자로서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이자성의 재평가와 순조(順朝)의 연구가 진행되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북경에서는 이자성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 후 황제로 즉위한 다음, 교자(餃子)를 매일

즐겨먹었다. 경단 교(餃)라는 문자는 교(交)와 이어져 끝을 만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사직이 영원하기를

빌었기에 춘절밖에 교자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이자성은 이 금기를 깨고 매일 교자를 먹었기에 자신의 순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출처 : 고단샤 <소설 이자성>

이자성의 난

1627년부터 46년까지 지속된, 명나라를 멸망시킨 그러나 신 왕조 수립에는 실패하고 청에 의해 종말을 고한 명 말엽 대규모 농민반란.

1 배경 [ 편집 ]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100여년 가까이 누적된 명 제국의 사회질서 붕괴와 변혁, 이에 따른 혼란, 그리고 계속되는 암군의 등장으로 인한 통치체제 약화라고 할 수 있다.

명 제국의 기본적 농촌사회질서는 이갑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 본인부터가 농민 출신으로, 농민반란을 통해 원을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었기에 이상적인 농촌공동체 형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갑제 역시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만 부역과 조세의 의무가 부과되었기에 농민들은 이갑제 체제에서 이탈, 즉 호적을 올리지 않고 유랑을 시작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세부담이 과중해지고 다시 유랑민이 늘어나고 이러한 악순환의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더군다나 명 제국 최대의 치욕인 토목의 변, 그리고 북로남왜로 대표되는 이민족의 침략 등에 맞서기 위해 명 제국의 군사비는 급증하기 시작했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올려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명 말기에 이르면 상인과 지주층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에 의한 부의 축적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자영농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이탈하는 유민들의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1505년 정덕제의 즉위를 시작으로 그 이름도 찬란한 명나라 4대 암군의 기나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정덕제는 아바타 놀이 말고는 특별히 암군이라 부를 소지가 없었지만 가정제 치하 45년은 도교 신봉에 빠져 국고를 열심히 축내고 도교를 추종하는 권신이 조정을 좌우하면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로남왜가 본격화되었고 농촌 유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황제가 이 모양 이 꼴이고 조정도 권신이 좌우하니 대책같은 걸 세울리가 없었다.

가정제 사후 5년간의 짧은 시간이 지나고 명나라 암군중에서도 톱을 달리는 만력제 치하 48년이 시작되면서 명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첫 10년은 장거정의 개혁으로 명이 중흥하나 했지만 장거정이 죽자마자 만력제가 신나게 장거정파를 숙청하면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후 30여년에 걸친 기나긴 업무거부, 즉 파업을 단행하였고 이 시기에 만력 3정으로 대표되는 대외전쟁과 만력제 무덤 공사로 막대한 재정까지 축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1620년대까지 명은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다. 명 중후반기 이후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인, 지주층의 성장으로 늘어나는 재정부담을 어떻게든 막아주고 있었고, 과거를 통해 유입되는 인재들과 이들이 기반이 된 관료층은 어떻게든 제국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남왜의 걱정은 사라졌고, 명은 모든 전력을 후금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 위기만 넘긴다면, 어떻게든 명 제국은 되살아날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620년대 중반부터 동북아시아 모든 국가들을 휩쓴 대기근이 닥쳐왔다. 국가별로 시기와 규모는 다르지만 25년~30년에 걸쳐 명, 몽골, 후금, 조선, 일본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기근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화북지방의 기근이 극심했는데 1627년 섬서성 일대의 대기근이 결정타였다. 이때의 기근은 유랑민들과 빈농들에게 결정타였고 이들은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 봉기한다. 농민반란으로 건국된 명 제국이 농민반란으로 몰락이 시작되었다.

2 전개 [ 편집 ]

2.1 전반기 [ 편집 ]

1627년 섬서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반란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급료와 식량을 받지 못해 탈영한 군인, 급료를 받지 못하고 실직자가 된 빈민과 전직 관리 등이 대거 가담했다. 이 봉기와 군세가 조직화된 것은 1628년의 일로, 왕가윤(王嘉胤)이 봉기하며 군세를 조직했고, 유력한 지도자 없이 도적떼에 불과했던 각지의 반군들이 왕가윤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1631년 왕가윤이 진압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지만, 이미 반란군에는 유능한 부장급 지도자들이 다수 있었고,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고영상(李自成)이 왕가윤의 뒤를 이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1633년까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며 섬서, 산서 두 성을 차지한 고영상의 군대는 정부군의 진압작전에 한때 전멸 위기에 처했으나 같은 해 겨울에 황하의 결빙을 틈타 산동, 하남으로 탈출하고 반란의 규모를 크게 불렸다. 이후 고영상은 틈왕을 자처하였고, 이를 위협적으로 본 숭정제는 대대적인 토벌을 지시했다.

당시 반란군 토벌의 중책을 맡은 인물은 홍승주(洪承疇)로, 태자태보와 병부상서를 겸임하며 하남, 산서, 섬서, 호광, 사천의 군사전권을 맡을 정도로 숭정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리고 이 절대적 권한을 가진 홍승주는 대군을 이끌고 1635년 위남 전투에서 고영상의 군대를 말 그대로 영혼까지 털어버렸다. 위남 전투의 패배로 고영상의 군세는 거의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고, 이듬해인 1636년 섬서순무 손정전(孫傳庭)에 의해 지도자 고영상이 체포, 북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이 무렵 남은 반란군은 수십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고 말 그대로 반란은 끝난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부장급 지도자 중 장헌충(張献忠)과 나여재(羅汝才)는 투항했고, 이자성(李自成)만이 투항을 거부하여 틈왕을 자처하였으나 이자성마저 1638년 동관 전투에서 홍승주와 손정전이 이끄는 진압군에게 참패하여 부하 17명만을 데리고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사실상 반란의 명맥이 끊긴 상황에서, 이자성을 구원한 것은 숭정제와 숭정제를 압박한 청이었다. 같은 해 9월, 청의 군대가 금주를 포위했고 숭정제는 반란도 진압되었겠다, 자신이 가장 믿고 신임하는 최고의 에이스 홍승주를 전격적으로 계료총독이라는 대청전쟁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639년 출병시켰다.

그러나 이자성은 아직 살아 있었고, 항복한 장헌충과 나여재도 후일을 기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명이 전력을 모아 청과의 전쟁에 임하는 동안, 이들 농민반란 지도자들은 하남으로 이동하여 세를 모으고 재궐기한다.

이자성 등 반란군 지도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이점은, 명의 근본적인 사회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 데다 기근까지 계속되어 정부에 불만이 많는 유민들이 하늘처럼 많다는 것이었다. 투항했거나 도망친 부하들이 다시 이자성 주위로 결집하고 새로운 유민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이자성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났다.

여기에 이암(李岩), 우금성(牛金星), 송헌책(宋獻策)과 같은 지식인 집단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단순한 농민반란군 수준이었던 이자성군은 본격화된 반군조직이자 명을 대신한 새로운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석권한 하남성을 중심으로 부정부패한 관료들을 처벌하고 관아의 재물과 곡식을 백성들에 나누어주면서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으로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 장헌충과 나여재의 군대도 화남 지방으로 진출한다.

1641년은 명나라에게 있어 실로 치욕스러운 해였다. 2월 장헌충군은 대치하던 양사창군의 포위망을 뚫고 호북성 최대의 요충인 양양을 함락하고 양왕 주익명을 참살하였다. 양왕 주익명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병부상서 양사창은 이후 홧병으로 숨진다. 직후 나여재는 장헌충과의 불화로 이탈하여 이자성에 합류하지만 결국 이자성에게 죽는다. 이로서 장헌충은 호북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같은 해 이자성은 낙양을 함락한 뒤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준 후 복왕 주상순을 삶아 죽였다.(…) 명 황실에 속한 왕 두 명이 반란군에 잡혀 끔살당한 것이다. 그걸로 부족해 양대 반란세력이 중원 한복판을 차지하며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642년 이자성은 격전 끝에 개봉을 함락시켰고, 1643년에는 좌량옥(左良玉)을 격퇴하고 동관에서 손정전을 전사시키며 1638년 동관 전투 패배를 설욕했으며 상양을 점령하여 양경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상양왕이라 자칭하였다. 같은 해 무창을 함락한 장헌충도 스스로를 대서왕이라 칭하였으며 이후로 이자성군은 순, 장헌충군은 서라는 국호를 쓰며 사실상의 국가체계를 갖추게 된다.

운명의 1644년, 이자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1644년 초 서안을 함락한 이자성은 서안을 수도로 삼는 대순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칭제하여 황제가 되었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다. 이에 맞선 명 왕조에서는 조정 신료들이 남경 천도를 강력히 주장할 정도로 자체적인 방위력이 없는 실정이었는데, 명의 마지막 남은 군사력은 모두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지휘를 받으며 청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숭정제는 남경 천도를 거부했는데 이자성군이 북경에 육박한 상황에서 안전한 천도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북경을 포기할 경우 당시 명의 유일하다시피한 군사력인 산해관의 오삼계군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점이 작용했다. 이 시점에서 명 왕조의 유일한 살길은 청이 내부문제로 철군하고, 그 틈을 타 오삼계군이 북경으로 돌아와 이자성군을 격파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1644년 4월 23일, 외성수비를 맡은 태감 조화순(曹化淳)이 투항했고, 이틀 뒤인 4월 25일 자금성이 함락되었으며 숭정제는 자결하고 명나라는 멸망했다. 그러나 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3 난의 종결 (1644~ 난의 종결 (1644~ 1646년 [ 편집 ]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군은 승리감에 도취된 나머지 그동안 엄격했던 규율이 일시에 무너졌고 신나게 약탈을 시작했다. 이는 북경 시민들 및 지식인, 관료 및 신사층들을 적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자성은 숭정제의 내탕금을 빼앗아 부하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자금성을 함락하고 보니 내탕금이 없어서(…) 약탈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다 이자성군의 책사 역할을 했던 이암과 우금성간의 갈등까지 일어났다.

한편, 이자성은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을 멸망시키긴 했지만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자성은 최우선적으로 오삼계를 회유하여 산해관에서 청과 대치하는 현 상황을 유지코자 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이자성의 회유를 거부하고 역으로 청에게 투항한다.

이자성은 청군이 오삼계군에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를 하겠다는 의지로 출병하여 일편석에서 격전을 벌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으나, 접전의 와중에 청군이 등장하여 대규모 돌격을 감행하자 전세가 크게 기울고 참패하고 만다.

이후 이자성은 청-오삼계 연합군으로부터 북경을 지켜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북경을 포기하고 후퇴, 화북 각지에서 남하하는 청군과 맞서 싸웠으나 여러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사실상 재기불능에 빠졌고, 1645년 6월에 최후를 맞이한다.

한편, 이자성과 행동을 달리했던 장헌충은 촉 지방으로 후퇴하여 역시 결사항전하였으나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배, 멸망당한다.

3 평가 [ 편집 ]

3.1 명 [ 편집 ]

명 제국이 이자성의 난에서 끝내 패배한 이유는 내부적인 사회모순은 둘째 치더라도 외부의 강대한 적(청)을 맞서싸우며 동시에 내부의 적까지 상대해야 했다는 치명적인 전략적 불리함에 있었다. 당장 오삼계군이 자유롭게 이자성군 진압에 나섰다면 이자성군은 영혼까지 털렸을 것이다. 그 전에, 홍승주를 중간에 소환하지만 않았어도 이자성은 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명의 유능한 장수들이 하나둘 전열에서 이탈한 것도 컸다. 홍승주는 대청전쟁을 위해 차출되었다가 포로로 잡힌 후 청에 귀순했고, 양사창은 후반기 반란군 토벌의 최고책임자이자 최고의 전략가였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사망하였다. 양사창 사후 반군 진압에 나선 장수 중 가장 뛰어났고 사실상의 최고지휘권을 갖고 있던 손정전은 숭정제와 조정의 무리한 출병요구에 불리한 상황에서 억지로 출병했다 패하여 전사했다.

3.2 이자성군 [ 편집 ]

이자성이 명 왕조를 뒤엎은 이후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펼칠 마스터 플랜이나 비전이 전무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이는 사실 가혹한 평가다. 이자성은 명 왕조를 멸망시키고 채 1달도 안 되어 북경에서 쫓겨났다.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고 민심수습책을 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 설령 청이 아니었더라도 이자성은 강남의 남명 정권과 계속 전쟁을 펼쳤어야 했다.물론 실제 역사에서 남명이 하는 짓 보면 이자성이 남명까지 순식간에 정복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자성군에도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닌데 특히 지휘권이 일원화되지 않아 이자성의 순과 장헌충의 서라는 양대 세력이 공존하였다는 건 심각했다. 이는 이자성과 장헌충이 사실상 독립된 세력을 갖게 되면서 벌어진 일인데 때문에 두 세력은 청과 오삼계군의 공세에 개별적으로 저항하다가 각개격파당했다.

(이자성의 난)

명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명의 천계 7년(1627)으로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에 출병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킨 해부터였다. 명나라는 청나라와 계속되는 싸움으로 막대한 군비를 감당해야 했고 세금을 과중하게 징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중한 세금으로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백성들은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반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도망친 백성들은 반란군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으며 백성들이 도망치면 농촌은 더욱 황폐해졌고 기근이 따르기 마련이고 이 기근은 더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반란 집단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반란이 일어난 곳은 기근이 가장 심하였던 하남과 섬서 지방으로 섬서 지방에서 동원된 군대에게 군량을 공급하지 못하자 폭정이 심해지고 마침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들 반란군은 처음 왕가윤의 지도 아래 고영상, 장헌충, 마수례, 나여제 등의 간부들이 이끌었다. 반란군의 세력이 날로 거세지자 명나라 조정은 홍승주를 총사령관으로 임명, 대군을 동원하여 토벌에 임하여 3~4만 여명에 불과하던 반란군은 힘없이 패배하여 반란군의 수령 왕가윤이 부총병 조문조에게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왕가윤이 죽자 그의 부장 고영상이 다시 반란군의 무리를 집결시켜 날이 갈 수록 그 형세가 확대되었다.

숭정 8년(1635)에 명조정은 홍승주를 병부상서 겸 토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각지의 반란군을 하남 지역으로 몰아 넣어 일망타진 할 계획을 세웠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반란군은 하남의 형양에서 모여 대책을 논의 한 결과 하북으로 공격하자는 파와 반대하는 파 간에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한 젊은 장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 “적의 공격을 기다리지 말고 10만 반란군을 네 갈래로 나누어 정부군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 놓았다. 힘찬 그 젊은 장령의 말에 모두가 용기를 내어 구체적인 작전을 협의하게 되었다. 일부는 사천.호북 방향, 일부는 섬서 방향, 일부는 북쪽의 황하 방향, 일부는 기동부대로 편성하여 각지의 반란군을 원활하게 지원하도록 합의하였다. 역사상 분산된 반란군이 연합하여 통일된 작전을 구사하기는 유사이래 처음이었다. 이 젊은 장령이 바로 명왕조를 타도한 이자성이었다.

형양의 작전회의가 끝난 후 고영상.장충헌의 연합군은 질풍같이 동쪽으로 진군하여 10일이 못되어 안휘성의 봉양성을 함락하였다. 이 곳은 명태조 주원장의 고향으로 명나라 조상 묘가 있는 곳으로 조상 묘가 불탔다는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소리 내어 통곡하고 그 화풀이로 봉양의 순무 양일붕을 처형하였다.

이자성(1606~1645)은 연안의 미지현 출신으로 본명은 이홍기였다. 그는 역부(驛夫) 출신의 실업자로 고영상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있었다. 숭정 2년(1629) 감숙.섬서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 지방 관리들을 죽이고 대음해 4월 고영상의 휘하로 들어 갔다. 고영상의 휘하에 들어간 이자성은 형양 회의 때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반란군의 연합작전이 있은 다음해에 이르러 반란군의 형세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고영상이 섬서 순무 손전정에게 잡혀 북경에서 주살되었다. 이자성은 고영상의 자리를 승계하여 사천으로 들어가 총병 후양주를 죽이고 각지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이자성도 그 후 고전을 면치 못하였는데, 사천의 자동 싸움에서 대패하여 겨우 18기로 정부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적도 있었다. 또 동관 남원 전투에서도 겨우 7기만 대리고 도망쳐 섬서 남쪽의 상락산 속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이에 북경에서는 이자성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숭정 11년 섬서.하북.광동.호북.광서 지방의 반란군도 대부분 진압되어 반란의 불길이 가물가물 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한숨 돌릴 겨를도 없었는데, 바로 동북방의 후금군의 침공이었다. 숭정제는 동북 지방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하남.섬서 지방의 정부군을 뽑아 북경 동북방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숭정 12년 정부군이 북상하자 호북에서 장헌충.마수례가 반란을 일으켰다. 숭정 13년에는 이자성이 사천 파서산.어복산에서 50기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호북을 거쳐 하남으로 나왔다. 호북 지방은 기근이 극심하여 이자성이 나타나자 농민들이 기뻐하며 대거 몰려 들어 한 달도 안되어 반란군이 수만으로 불어 났다. 이 가운데 이암.우금성 같은 지식인들도 함류하여 ‘균전면량’과 군기를 엄정히 하도록 조언 하는 등 군기를 엄정히 하고 수탈받은 농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 작전이 주효하여 이자성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부잣집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과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처럼 이자성은 지식인과 중소 지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안정된 세력을 구축하기 이르렀고 숭정 14(1641)년에는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낙양은 역사상 여러 왕조의 수도로 당시에는 만력제가 가장 사랑하던 정비 소생 복왕 주상순이 살고 있었다. 이자성이 낙양을 함락하자 복왕은 성 밖으로 도망가 영은사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다.

복왕은 막대한 토지를 가진 대지주로 횡포와 탐학이 심하여 백성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이자성은 반란군이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에 복왕의 살과 사슴고기를 섞어 요리를 만들어 안주로 먹었다고 한다. 복왕은 주살되었고 사람들은 이 술을 복록주라 불렀다.

이자성은 복왕의 창고를 열어 수십 만석의 쌀과 금은보화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자, 백성들은 “만세! 만세!”를 외치며 이자성을 황제처럼 환호하였다. 이처럼 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재물을 나누어 주어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자성이 낙양을 함락한 그 시기 거의 때를 같이 하여 호북.사천에서는 장충헌이 병부상서 양사창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사창이 장헌충을 공격하자 형세가 불리한 장헌충은 공격을 피해 사천으로 들어 갔다. 양사창은 장헌충을 추격하여 사천으로 들어가 사천 순무 소첩춘, 참군 요대형과 합세하여 앞뒤에서 장헌충을 포위하여 공격하자 한밤중 정부군이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몰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와 하루 3백리를 달려 호북의 양양에 도착하였다. 장헌충은 조용히 잠들어 있는 성문을 열고 양사창의 사령부를 점령한 후 힘 안들이고 양양을 점령하였다. 장헌충은 양왕 주익명을 생포하여 그를 죽였다.

양사창은 양양이 함락되고 복왕과 양왕이 모두 반란군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죄책감을 누를 길 없어 자살하고 말았다. 양사창의 후임으로 임명된 정계익은 장충헌 토벌 작전에 고심하고 있었다. 장헌충은 정계예익의 부하 좌옥량과 신양 전투에서 패배하자 다시 사천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같은해 11월 이자성은 남양을 함락시키고 당왕 주율막을 주살하였다.

이자성은 계속해서 개봉을 공격하였으나 병부시랑 손전정이 원군을 거느리고 선방하여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숭정 15년 (1642)에 겨우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자성은 황하의 둑을 터 개봉을 물에 잠기게 하여 북문을 깨뜨리고 함락하였는데, 정부군은 식량이 없어 땡감까지 먹을 정도였다고 하여 이 전투를 ‘시원(枾園)의 전투’라고도 한다.

개봉 함락 두 달 후 여녕을 함락하였는데, 총병 호대위는 전사하고 총독 양문악은 체포되어 주살되었다. 숭정 16년(1643) 정월 이자성은 승천을 함락하고 양양을 양경이라 하여 궁권를 짓게 하고 우금성 등에 명하여 정부기구를 구성토록 하였다. 겨울에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동관.서안을 공격하고 감숙.섬서로 진출하였다.

숭정 17년(1644) 정원 초하루날 아침 이자성은 서안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나라 이름을 대순, 연호를 영창이라 하였다. 서안을 서경으로 삼아 장안이라 부르고 스스로 대순왕이 되었다. 조상에게 제사도 올리고 존호를 추증하는 한편 공신들에게 봉작도 내렸다. 즉위식 후 이자성은 다음 공격 대상을 북경과 남경을 놓고 고심하다가 정부군의 방위력을 무시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결국 관중을 선택하였다.

이자성은 곧바로 동정군을 일으켜 2월에는 친히 보병 40만,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용문에서 황하를 건너 분주를 공략하고 산서 최대 도시인 태원을 함락하였다. 태원 함락은 북경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자성군이 태원에 이어 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총병 주우길이 대주를 선방하였고 이자성은 군량이 떨어지자 영무로 후퇴하여 공격하였으나 여기서도 주우길이 끝까지 버티었으나 시가전을 벌인 끝에 영무를 점령하였다. 주우길은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반란군에게 주살되었다.

이자성은 승승장구하던 반란군이 주우길에게 예상 밖으로 고전하자 예기가 꺽여 대동.양화.선부.거용 등 정부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공격하는데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이자성은 일단 후퇴하여 재기를 도모할 예정이었으나 그때 뜻밖에도 반가운 소식이 날아 들었다. 대동 총병 강양과 선부 총병 왕승윤으로부터 항복하겠다는 서신이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에 용기를 얻은 이자성은 대동과 선부를 접수하고 정부군을 흡수하여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만약 정부군의 항복이 없었다면 이자성은 반란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나라가 망하려면 장수들의 마음도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다가 망해가는 나라에 자신의 목숨을 버릴 이유가 없단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이자성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을 것이다.

3월 15일 숭정제 집무실에 이자성으로부터 통첩이 날아들었다.

“18일 유주에 이를 것임.”

유주란 북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이자성이 3일 후에 북경을 유린하겠다는 협박장이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3일밖에 없었다.

숭정제는 16일 중신회의를 열고 민심의 안정과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회의 중 또 한 장의 봉서가 날아 들었다. 이를 본 숭정제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봉서를 본 대신들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봉서의 내용은 북경 근교의 창평이 지난 12일 반란군 수중에 들어가 능묘의 향전이 모두 불타버렸다는 소식이었다. 반란군은 이미 북경 근처 40킬로미터 지점까지 육박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자성은 반란군은 예정보다 빠른 3월 17일 북경성 밑에 도착하니 북경성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북경성에는 15만 4천 명의 군사가 있었으나 대부분 노약자. 환자들이 대부분이고 전투다운 전투를 벌일 군대가 아니었다. 병력도 부족하여 성벽에 배치할 숫자도 모자랐다. 숭정젱는 환관 수천 명을 보내 독전토록 하였으나 포악한 환관들이 채찍을 휘두르는 등 난폭하게 다루자 병사들의 반발도 게세졌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병사들은 사기가 심하게 저하된 상태로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도 못하였고 반란군을 정탐하기 위해 보낸 척후병 병사들은 반란군에 투항하여 반란군에 가담하여 버렸다. 사자로 파견한 환관들도 반란군에 투항 한 뒤 순정제 퇴위를 요구하며 반란군에 앞장서서 진군하였다.

3월 18일 반란군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숭정제에게 가장 신임을 받던 조화순이 창의문을 열어젖히고 반란군을 맞아들였다. 이자성에게 항복한 환관 두훈이 조화순을 설득하여 성문을 열게 한 것이다. 창의문이 열리자 반란군이 노도처럼 성 안으로 몰려 들었다. 명왕조의 운명도 이제 풍전등화와 같았다. 장수들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커녕 군사를 동원할 자금도 부족하여 내금고를 열지도 않았던 숭정제였다. 나라가 망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재물을 지키려는 숭정제를 포함한 대신들이 결국 멸망을 초래한 결과였다. 총사령관 왕영길은 산해관 밖 관외 4성을 포기하더라도 최정예 부대로 하여금 북경을 방어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삼계는 왕영길의 주장에 따라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오삼계가 풍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북경성이 반란군에게 함락한 이후였기에 더 이상 진군을 할 수가 없었다.

성안으로 들어간 이자성의 반란군은 다른 성문을 열어젖히고 반란군을 맞아 들였다. 북경에는 외성과 내성이 있었고 내성 안에 황제가 거처하는 자금성이 있었다. 반란군은 외성과 내성을 돌파하여 자금성에 육박하였다.

반란군이 성내에 진입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환관 왕승은을 데리고 자금성을 나와 만수산에 올라가 멀리 북경 시내를 바라보니 북경 내성 9개 성문 밖 여러 곳에서 반란군의 횟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우렁찬 함성 소리가 북경 하늘에 메아리쳤다.

숭정제는 이미 명의 운명이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자금성으로 돌아가 술을 가져오라하여 연거푸 마셔댔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하였으나 명나라 황통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황태자와 영왕.정왕을 평민 복장으로 변장시켜 각각 그들의 외가인 주씨와 전씨 집으로 피난시켰다. 세 황자들은 모두 나이가 어린 상태였다.

세 아들을 궁 밖으로 피난시킨 숭정제는 황후와 후비들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황후 주씨는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고 후비 가운데 자결하는 자도 많았다. 그리고 숭정제는 딸인 황녀들을 살려두면 반군들에게 능욕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장평공주가 있는 수령궁으로 가서

“너는 무슨 죄로 짐의 딸로 태어나 꽃다운 나이에 이 같은 비운을 맞게 되었단 말인가! ” 라고 탄식하면서 장평공주의 왼팔을 칼로 내리쳤다. 그리고 겨우 여섯 살 난 소인공주가 있는 소인전으로 들어가 딸을 칼로 찔렀다.

어린 소인공주는 그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으나 장평공주는 왼팔에 상처를 입고 유혈이 낭자한 채 숨을 헐떨거렸다. 시녀들이 그녀를 부축하여 도망갈 것을 권하였으나 그녀는,

“부황께서 나에게 죽음을 내리셨으니 내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또 도적들이 들어오면 반드시 나를 찿을 것이니 나는 숨을 곳이 없다.” 고 말하였으나 시녀들이 억지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후에 그녀는 청왕조가 중국을 통일한 다음 그녀는 신분을 밝히고 불문에 귀의하겠다고 청원하였으나 청왕조는 그녀를 용서하여 결혼할 것을 권하여 결국 주세현이라는 청년과 결혼하여 평범한 일생을 누렸다고 한다.

악몽같은 18일이 지나고 19일 아침이 되자 숭정제는 친히 경종을 울려 중신들을 불렀으나 중신들의 모습은 비치지 않았다. 환관들과 시녀들도 대부분 도망치고 남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숭정제는 환관 왕승은을 대리고 다시 만수산으로 올라갔다. 만수산에는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으로 세운 수황정이 있었는데, 숭정제는 그곳을 자신이 죽을 장소로 선택했다. 숭정제는 왕승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무에 목을 메었다. 명나라가 마지막 멸망하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반란군이 나중에 발견하였을 때 숭정제는 소복차림에 왼발은 맨발, 오른발에는 붉은 신을 신었다. 관은 벗겨지고 긴 머리는 얼굴을 가린 채 죽어 있었다. 그의 흰 옷깃에는 다음과 같은 유조가 씌어 있었다.

” 짐이 제위에 오른지 17년, 위로는 하늘에 죄를 짓고, 반역의 무리에게 땅을 잃은 것이 세 차례였다. 이제 도적이 창궐하여 궁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모두 중신들이 짐을 그릇쳤기 때문이다. 짐이 죽어서 지하에 들어간 들 선제를 뵐 면목이 없다. 그래서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도적들은 짐의 시신을 갈기갈기 찟어도 좋고 문관들을 모두 죽여도 좋지만 다만 능침만은 허물지 말라. 또 우리 백성들 한 사람도 상하지 말라.”

이 유서를 보면 숭정제는 끝까지 망국의 책임을 중신들에게 돌리고 있다.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수황정에서 숭정제는 34세의 졺은 나이로 죽었다. 주문장이 명을 세운지 16대 277년 만에 역사의 막을 내렸다.

도적이 도적을 낳고 또 다른 도적이 도적을 낳아 역사는 반복되어 굴러왔다. 권력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기 마련이고 권력에 등승한 인간의 이기심은 탐욕과 부패를 낳고 결국에는 백성들에 대한 수탈로 이어지고 이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불만을 표출하게 된다. 이러한 불만이 표출되어 성공하면 창업이 되고 실패하면 반역을 도모한 역적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이자성도 명나라를 직접 멸망시키는 성공적인 반란을 도모하여 새로운 나라의 창업에 꿈이 부풀어 올라 있었으나 시기적으로 천운이 따르지 못했다. 이자성은 단지 45일간 제위에 있었을 뿐 청나라의 침공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오삼계의 50만 대군이 산해관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이며 반란군이 오삼계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은 청나라에 투항하게 만든 잘못이 있었다. 반란군은 청군과 오삼계군을 막아내지 못함에 결국 이자성은 북경을 쫒겨나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미 역사의 운명은 청으로 기울고 있었다.

열하성 1:이자성의 난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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