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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일 주일예배 초청설교
설교자 : 김지찬 목사(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설교본문 : 마태복음 18: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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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주의 사랑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어떤 개념이겠느냐? 바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 필수 과제이자 ‘도’로 삼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비유에 …
Source: kr.kingdomsalvation.org
Date Published: 5/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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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21-35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은 몇 번이라도 참고 참으면서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도무지 사람을 볼 때 용서할 것이 없는 생명 …
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6/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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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 중앙일보
명동성당 평화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죄 지은 형제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오복음 18장 21~22절 )”고 한 대목 때문입니다. 개신교 신자 …
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2/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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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 18:21-35)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 18:21-35). 노승수 목사.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 …
Source: lewisnoh.tistory.com
Date Published: 5/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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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교 – 다국어 성경 Holy-Bible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원문보기. 새번역,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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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이 돼? – 브런치
이 말은 곧 지금 그의 상황이 죽음보다도 수천 배 더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자신이 처한 이러한 상황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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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네 형제,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 개신교 “일곱 번씩 일흔 번 …
성경은 전승 번역되는 과정에서 여러 번역본이 나온다. 주교회의 설명에 따르면, 이탈리아어 성경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다. 영미권에서 널리 쓰이는 …
Source: www.chosun.com
Date Published: 3/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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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8장 21-22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 김영규 – 네이버 블로그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답하셨나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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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 캘거리순복음중앙교회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즉 무한대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은 자도 창녀와 같이 간음을 저질렀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들 …
Source: calgarychurch.org
Date Published: 2/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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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 주의 사랑 – Daum 블로그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 주의 사랑 … 이 두 구절 중 하나는 용서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사역할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3/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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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 Author: 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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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2.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SlsZqA_t1M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주의 사랑
4.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21~22)
5. 주의 사랑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이 두 구절 중 하나는 용서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사역할 내용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성육신할 때, 한 단계의 사역과 함께 그 시대에 나타내고자 하는 성품과 구체적인 사역 항목도 가지고 온다. 해당 시기에 인자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시대에 행하고자 하는 사역의 범위를 둘러싸고 이뤄지며, 그보다 넘쳐 나거나 부족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해당 시대와 관련이 있다. 사람의 방식이나 언어로 표현하든 신적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으로 어떤 위치에서 표현하든 그의 목적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방식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그의 뜻과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사람이 알고 이해하게 한다. 그래서 은혜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명하려는 바를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아울러 더 많은 경우에 그는 평범한 길 안내자의 위치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사람이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역 방식은 은혜시대 이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과 훨씬 친근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형식과 방식 면에서 훨씬 더 실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비유가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한 숫자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당시에 이렇게 비유한 의도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 그의 목적은 사람이 다른 이를 용서할 때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어떤 개념이겠느냐? 바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 필수 과제이자 ‘도’로 삼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비유에 불과했지만, 이 표현은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비유를 통해 사람은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달았으며, 이 말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을 찾고, 실행의 원칙과 기준을 얻었다. 또한, 이 비유로 사람은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조건 없이, 횟수의 제한 없이 다른 이를 용서하라는, 용서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확실한 이해를 얻었다.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그가 정말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숫자를 생각했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정해져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횟수’에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기원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왜 예수의 입에서 이러한 숫자가 나왔는지 궁금해하며, 이 숫자에 분명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숫자는 하나님이 인성으로 말씀한 비유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숨은 의미나 함의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말씀을 할 때의 위치와 배경을 사람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선포된 것이라 육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후에는 영계에서 벗어나 인성의 각도에서 사람과 대화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의 관념 속 상상이나 사람이 삶 속에서 보고 접하는 일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또는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그의 신적 성품과 마음, 그의 태도를 전했다. 그리하여 사람이 이해 가능하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과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으로 사역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행하는 사역 방식과 원칙이 대부분의 경우 인성을 통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신성으로 직접 사역해서는 얻기 힘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인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 내용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다. 방식도 훨씬 유연하고, 형식 면에서도 율법시대를 뛰어넘는다.
이어서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말씀은 직접 신성으로 선포한 것이더냐?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인자가 인성으로 한 말씀이다. 사람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생명을 보살피듯 보살핀다’는 말을 할 수 있으며, 오직 사람만이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며, 적어도 하나님의 신성에는 이러한 언어가 없다.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신조로 삼아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라는 데 있다. 너희는 하나님이 “나는 인류를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 안에 들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대하는 방식과 태도는 그의 성품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자 발현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 일부러 무언가를 하거나 특정 방식과 도덕규범을 따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는 원래부터 이런 본질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너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할 때, 인간적인 형식으로 많은 말씀과 진리, 방식을 전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 뜻도 함께 전하여 사람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는 본질, 그리고 소유와 어떠함을 더 없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육신한 인자는 최대한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본질을 나타냈다. 인자의 인성은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과 사귀고 소통하는 데에 있어 방해물이나 장애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와 창조주를 연결하는 유일한 경로이자 다리가 되었다. 이쯤에서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의 성격과 방식 중 일부는 지금 이 단계의 사역과 유사한 부분이 아주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지금 단계의 사역에서도 많은 인간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했다. 또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말하는 것이나 인류의 지식적인 측면의 언어와 방식을 많이 이용해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하나님이 일단 성육신하고 나면 인간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신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많은 말이나 표현 방식에 있어 사람의 말이나 방식을 매개체로 사용한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한 때는 바로 네가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했을 때 성장 과정에서 인성으로 사람의 지식, 상식, 언어 혹은 표현법을 이해하고 배우며 파악하게 된다. 피조물인 인류에게서 비롯된 이러한 것들은 성육신 하나님께 갖춰져, 그가 육신에서 하나님의 성품 혹은 신성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위치에 서서 사람의 언어로 더 적절하고 현실적이며 정확하게 사역할 수 있게 되고, 이에 사람은 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사역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겠느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 하나님의 육신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장차 실제적으로 발현될 때이다. 그리고 그때는 인자가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세대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사자(使者)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던 사역을 곧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육신 가운데서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과 사역을 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음을,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곧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전 인류에게 다가올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모두 예수가 강생했을 때 일어난 많은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이 바로 마왕에게 쫓긴 것으로, 온 성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까지 전부 살해당한 일이다. 이를 보면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사람들 가운데 왔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는 사역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새 사역을 사람들 가운데 전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적어도 기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며 직분 이행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더없이 즐거웠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한 끝에 드디어 정상인의 육신을 입고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그의 새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사람의 신분으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마침내 사람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들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언어를 이용해 공급하고 인도하며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또 사람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방식으로, 나아가 사람의 시각으로 인류와 사물, 모든 것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 모든 것들은 육신 사역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같았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함에 위안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났기에, 하나님이 느낀 위안은 실로 참된 것이었다. 인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이룰 때, 하나님이 기쁨과 위안을 느낄 때, 그때가 바로 인류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때이자 구원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때가 바로 그의 새 사역이 전개되고, 그의 경륜이 앞으로 나아가는 때이며, 더욱이 그의 뜻이 완전한 성취에 가까워지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은 인류에게 행운이자 더없이 좋은 일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펼칠 때는 하나님께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이 새로운 사역과 시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실현될 때는 이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고 이루어진 때이며, 하나님이 최종 효과와 성과를 거둔 때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성과에 만족해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미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람을 보았고 확정하고 얻었으며, 그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를 만족게 할 수 있는 자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슬픔을 내려놓았으며, 즐거움을 느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새 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그가 하고자 하는 사역을 막힘없이 행하기 시작했을 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느꼈을 때, 이미 결말을 보았으며, 이 결말로 인해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하나님이 그 즐거움을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겠느냐? 상상이 되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려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손뼉을 쳐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춤을 출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노래를 불러도 되겠느냐? 그 노래는 어떤 노래여야겠느냐? 하나님은 당연히 마음속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그 노래를 사람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만물에게 들려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고,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다양한 심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리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고정된 생각을 가지거나 하나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즐거움과 심정을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즐거워해서도, 울거나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며, 그 어떤 감정도 표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근 두 차례의 교제를 통해, 너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 어느 정도 자유와 해방을 허락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중에 너희가 하나님이 슬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슬픔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최소한 하나님이 왜 즐거워하고 슬퍼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을 때, 너의 마음은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질 것이며,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그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 혹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며, 너의 생명이 된 하나님이자 너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바람이 있느냐?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마태복음) 18:21-35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서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꼭 돈이 아니라도 빚을 질 수 있고, 또 의도치 않아도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것이 사람 사이의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형제들에게 행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포스트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보시는 죄와 사람이 생각하는 죄는 엄연히 다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보실 때 “네가 누구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까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 누구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뜻하신 그 정체성을 가졌는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너는 나의 형상이냐?’, ‘너는 나의 의를 표현할 형식이냐?’, ‘너는 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이냐?’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모든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느냐 아니냐가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준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기준이 만족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논쟁할 이유나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불이 오지 않는 전구가 전구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전구가 아무리 예쁘고 설사 그것이 세계 최초의 전구라 할지라도 빛이 오지 않는다면 빛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박물관장이라면 몰라도.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체성의 자리에 없는 인생은 그가 어떤 삶을 살든지, 세상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혹은 외계인으로부터 구해진 역대 최고의 영웅이라 해도 하나님은 관심을 두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그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만들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감동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순종의 마음을 가졌는가, 아닌가 하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다. 이 사람의 존재 목적은 사람이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이다.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란 창조주가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빚은 인간이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일만 달란트 빚을 졌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만 달란트가 사람이 질 수(만들 수) 없는 채무임을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체성에 관한 빚과 그 정체성을 벗어남으로 하나님 앞에 가치 없는 죄인이 된 것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빚인 것이다. 즉 인생은 피조물이므로 창조주의 계시가 없으면 스스로 그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육신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들리게 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한 주인의 모습인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사람들의 행동에 관한 것이고, 그 판단 기준은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나라에서는 선한 것이 어떤 나라에서는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꼭 나라가 달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같은 법을 가지고 검사와 변호사가 보는 관점이 다르고, 같은 정치적 사건을 여당과 야당이 보는 것이 다르다. 다 자기가 가진 선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의 예를 들면서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물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 주라고 한 것은 한마디로 사람인 네가 사람의 죄를 심판하지 말고 다 용서하라는 것이다. 일흔 씩 일곱 번이 490번이라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정말로 멍청이다. 이는 완전히 용서하라는 것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횟수나 시간이나 상황이나 장소에 따라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용서를 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아주 쉬운 것이 또한 용서일 수 있다. 용서라는 것이 잘못한 것이라 생각한 이후에 그것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용서하고 말고 할 것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사람을 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에 대하여 늘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봤을 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그것을 용서해야할 일이 생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잘못된 것을 보거나, 특히 자신이 손해를 보면 그것을 용서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이 용서하기 힘든 것은 이미 잘못된 것이라고, 나에게 죄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런 상태가 되었다면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참거나 묻어 두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보았을 때 용서할 일, 곧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수천만 번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보는 관점이 바뀐 사람은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용서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과 같이 사람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몰라서 헤매는 연고로 짓는 모든 죄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즉 일만 달란트를 빚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주인의 몫이라는 것을 아는데 일만 달란트 빚진 것과 같이 인생이 왜 사는지를 몰라서 때로 돈에 의미를 두고 때로 권력을 좇는 사람을 볼 때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것을 감당하지 않아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 죄를 탕감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는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형상은 이미지다.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상이 없으시기에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시기 위한 어떤 형상이 필요하시기에 그 대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과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영이심을 잊으면 안 된다.
영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떤 모양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사람의 삶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드신 사람은 사람 스스로가 볼 때는 더럽고 연약한 이 육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육신이 보시기에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만 달란트 빚진 것과 같이 스스로 목적을 알 수 없는 정체성이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목적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그 사람이라는 형식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이 싫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자신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만 달란트를 갚지 못한 죄에 빠진 사람의 정체성인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과 의와 목적이 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인생은 그렇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인 것을 아는 것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 생명대로 살 것이고, 그 생명은 하나님과 같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하는 본성이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알도록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된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다른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수고하고 희생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 사람이 용서 거리라도 되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해서,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서 돈을 좇느라 죄를 짓고, 명예를 좇느라 죄를 짓는 세상과 사람을 정죄하고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사람인데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오히려 부족한 것이다. 수를 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잘못했다고 보지 않는데 용서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그런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일백 데나리온은 사람이 갚은 수 있고,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빚이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기준, 사람의 행위에 대한 사람의 선악간의 기준으로 심판한 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사람의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데 그것이 죄로 비칠 리가 없을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과 같이 용서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은 몇 번이라도 참고 참으면서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도무지 사람을 볼 때 용서할 것이 없는 생명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또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이려 한 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주장대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듯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진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보고서 너의 정체성이 나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형제의 죄가 용서할 거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듯 네가 그것을 지고 수용하며 사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특히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두었다고 비유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면서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영원히) 용서하듯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처럼 사랑하며 살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더.
[백성호의 현문우답]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백성호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아니, 어떻게 1면 톱 제목이 틀릴 수 있나요?” 독자에게서 메일이 몇 통 왔습니다. 명동성당 평화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죄 지은 형제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오복음 18장 21~22절 )”고 한 대목 때문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일흔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가 아니냐?”고 되묻습니다. 실제 개신교 성경에는 그렇게 표기돼 있습니다. 가톨릭 성경과 다릅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성서신학을 전공한 차동엽 신부는 “처음 성경이 그리스어로 기록될 때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았다. 대신 약속된 알파벳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가령 알파벳 문자로 ‘7·10·7’이라고 적은 셈이다. 가톨릭에선 그걸 있는 그대로 읽어서 ‘칠·십·칠(77)’로 해석하고, 개신교에서는 숫자 사이에 생략된 산술 부호가 있다고 보고 ‘7×10×7’로 본 거다. 예수님의 평소 어법에 비춰볼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 더 맞다고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횟수는 중요치 않습니다. 예수가 강조한 것은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용서, 말은 참 쉽습니다.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미운 사람을 490번이나 용서할 수 있나. 그건 성자인 예수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반박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할까요. 우리는 용서의 이유를 절반만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용서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따져보세요. 남을 미워할 때, 남에게 분노할 때 내 안에서 독기가 올라옵니다. 그 독기는 나를 먼저 취하게 합니다. 나를 먼저 망칩니다. 그래서 용서도 남을 해독하기 전에 나를 먼저 해독하는 겁니다. 그걸 정확하게 안다면 무한한 용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가족을 만났습니다. 화해와 용서, 소통을 강조했던 행보 때문일까요. 교황이 떠난 직후에 여당과 야당은 세월호특별법 재합의안을 내놓았습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는 여야의 재합의안을 거부했습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 진상조사위원회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동안 ‘세월호’를 진정성 있게 다루지 못했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은 겁니다.
정치권은 난감합니다. 기소권과 수사권은 검찰과 경찰의 몫입니다. 진상위에 그걸 준다면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안한 게 특검입니다. 이번에는 특검 추천권을 놓고 여와 야,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의 입장이 갈립니다. 앞으로 가도 ‘쿵!’, 뒤로 가도 ‘쿵!’, 옆으로 가도 ‘쿵!’ 하고 부딪힙니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요. 누군가 ‘통 큰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이 트입니다. 그 주체가 여당일 수도, 야당일 수도, 세월호 유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은 이제 슬픔과 아픔의 당사자만이 아닙니다. 그런 위로의 대상만은 아닙니다. 세월호 유가족은 이미 대한민국의 국가적 난제를 풀 해결책의 한 축에 서 있습니다. 여당은 재합의안에 대해 “간도 쓸개도 빼주는 심정으로 양보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그런 양보를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라고 한 겁니다. 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부 강경파의 협상 비난에 무릎을 꿇어선 안 됩니다. 그럼 세월호 문제를 영영 풀 수가 없을 테니까요.
팽팽한 줄다리기를 멈추려면 누군가 한쪽에서 대범하게 줄을 놓아줘야 합니다. 거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건 ‘통 큰 마음’을 먹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그게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는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신념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꺼내는 카드가 ‘용서’니까요. 그 용서는 결국 누구를 위한 걸까요. 여당도, 야당도, 세월호 유가족도 아닙니다. 그건 대한민국 전체를 위하는 겁니다. 그 숨통을 트는 일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 18:21-35)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 18:21-35)
노승수 목사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아마도 베드로는 어제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차 개인적으로, 2차 두세 증인으로 3차 교회에 말하라는 원칙을 듣고 생각하기를 7번은 완전 수이니 그정도 용서한다고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사람의 죄를 세번까지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가르침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다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치리라는 문맥 속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치리의 본질은 다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려는 주님의 의도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주님의 의도를 더 명확히 드러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용서하라고 합니까? 70번씩 7번이라도 라고 합니다. 산술적으로는 490번이지만 이는 완전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용서한다는 것이지요. 누가 기독교를 심판의 종교라고 합니까? 그들은 복음의 참된 진리를 의도적으로 오해하는 자입니다. 단지 하나님은 자비로울 뿐 아니라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자비롭게도 모두 멸망받아 마땅하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구원얻도록 그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회심하기만 하면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참된 가르침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매우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베드로가 7번을 용서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이 동관의 비유를 들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용서받은 동관이 용서를 하지 않음으로 용서를 받지 못하는 이야기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다시 동관이 용서받지 못하는 이야기로 끝난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왜 이런 결과를 야기했을까요? 첫째는 이 동관이 주인에게서 탕감을 받고 나오지만 주인은 탕감을 했는데, 동관은 갚겠다고 하면서 나옵니다. 근데 이 액수가 천문학적 액수입니다. 1달란트가 대략 5000데나리온 정도가 됩니다. 1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니 1달란트는 대략 15년 가량을 일해서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1만 달란트이니 15만년을 쓰지 않고 모아야 되는 금액인 셈입니다. 이는 산술적으로 갚는 것이 불가능한 액수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탕감을 해줍니다. 유대인들은 실지로 죄를 빚의 개념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이렇게 탕감을 받지만 사실상 이 동관은 마음으로부터 이 탕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고작 100데나리온 빚진자의 빚은 받아 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용서의 진리는 마지막 절이 이야기 한 것처럼 중심으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은 주님 앞에 돌이킨 사람이 진정한 돌이킴이 어떤 표지를 가지는가도 보여줍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것은 미움입니다. 이 미움은 호시탐탐 정당화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적 잇슈가 되는 인물의 과실에 대해서 그렇게 공분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미움을 정당화하기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최측근이었던 괴벨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게 한 문장만 달라 어떤 사람도 죄인으로 만들 수 있다’ 사람들 마음 속에 미움을 조직화하면 우리는 곧잘 스데반을 향해서 돌을 들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는 군중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서 근절되는 원리가 무엇인가? 주님께 온전히 탕감을 받고 나오는 것입니다. 먼저 용서 받은 자가 용서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용서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는 것을 통해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전제를 가집니다. 바로 자신의 과실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향한 용서라는 점이지요. 치리라는 문맥에서 말씀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참으로 주님께 용서 받은 자입니까? 그 증거가 있습니까? 나는 참으로 형제가 용서를 구할 때 그의 과실을 용서하여줍니까? 마음에 품은 미움을 아무대서나 배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국어 성경 Holy-Bible
개역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원문보기
개역한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원문보기
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원문보기
새번역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원문보기
현대인의성경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원문보기
新共同譯 イエス は 言われた. 「あなたに 言っておく. 七回どころか 七の 七十倍までも 赦しなさい. 원문보기
NIV Jesus answered, “I tell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원문보기
KJV Jesus saith unto him, I say not unto thee,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원문보기
NASB Jesus said to him, “I do not say to you, up to seven times, but up to seventy times seven. 원문보기
新改譯 イエス は 言われた. 「七度まで, などとはわたしは 言いません. 七度を 七十倍するまでと 言います. 원문보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이 돼?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평소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시는 예수께 제자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상대를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용서를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이때 예수께서 하신 답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라”였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이다
젠장..
한 사람을 7번 용서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70번씩 7번 이라니.. 이게 말이야? 된장이야?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과연 490번 씩이나 용서할 대상을 만나기라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제자들은 속으로 이렇게 불만을 토해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평소 깊은 가르침을 펼치시는 예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답을 하실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 말에는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용서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껏 용서란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니 490번 씩이나 남을 용서할 생각에 정신부터 혼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란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숫자 또한 애당초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숫자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니 이는 처음부터 용서란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행위가 될 수 없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생각하는 용서란 과연 어떤 개념일까?
<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 >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란 말에 벙쩌하는 제자들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신 듯
곧이어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를 들어 용서의 개념을 설명하신다. 이 비유에는 10,000 달란트 빚진 자와 그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가 등장한다.
참고로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1 데나리온은 당시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10,000 달란트는 (하루 품삯을 10 만원씩만 쳐도) 약 6조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6,000 데나리온 x 10,000 X 10만 원)
비유 속에서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게 그 몸과 처와 자식을 다 팔아 빚을 갚게 하라 명한다.
그 빚진 자가 엎드려 용서를 비니 주인이 불쌍히 여겨 10,000 달란트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준다.
탕감받은 자가 이번에는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는데 그에게 빚을 갚으라 독촉한다.
그가 못 갚자 그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10,000 달란트 탕감받은 자에게 노하여 그를 꾸짖고 그 빚을 다시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는 스토리다.
그리고 말미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으로 용서에 대한 비유를 마치신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며 또한 충분히 이해되는 스토리다.
세상에나.. 자기는 6조 원 대의 빚을 탕감받았는데 겨우 자신에게 천만 원(십만 원 X100)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다니.. 이런 괘씸한 자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정의로운 주먹을 불끈 쥘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자.
과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100 데나라 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그토록 못된 사람이었기에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성급히 결론짓기에는 예수님의 비유는 그리 단순한 스토리는 아닌 것 같다.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 속에서
10,000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은 그 빚을 갚으라는 주인의 말에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마태복음 18:26)”라고 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10,000 달란트는 6조 원의 돈으로써 애당초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빚진 사람은 이 금액을 갚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 사람은 이번에는 자신에게 천만 원 빚진 사람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그렇다면 혹시 이 사람은 자신이 탕감받은 10,000 달란트의 빚이 과연 얼마만큼의 액수인지를 아예 가늠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도 6조 원의 돈이 과연 얼마만큼의 돈이지 체감할 수 없다. 6조 원이 아니라 그의 60분의 일인 1000억 원이라도 우리는 그 돈으로 양념치킨을 몇 마리나 주문할 수 있는지.. 떡볶이를 몇 인분이나 사 먹을 수 있는지 도무지 계산이 안된다. 어차피 체감할 수 없는 돈이라면 1000억이나 6조나 매 한 가지일 뿐이다.
그러나 100 데나리온, 즉 천만 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천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양념 치킨, 순살 치킨, 간장 마늘 치킨 중에서 어느 것을 시킬지 고민하지 않고도 매일매일 일 년 내내 사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금액이다.
만일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신이 진 빚이 과연 얼마만큼의 금액인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말은 곧 자신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자신이 빚을 탕감받은 것이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6조 원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헤어 나올 없는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뜻한다. 수 천 번 죽었다 깨나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라는 소리다. 자신의 몸을 팔고 처 자식까지 몽땅 팔아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지금 그의 상황이 죽음보다도 수천 배 더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자신이 처한 이러한 상황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 달라 그럼 빚을 갚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의 목을 조르며 빚을 갚으라 독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이유가 설명된다.
예수께서 지금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우리가 받은 용서가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깨달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다시 한번 새롭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음을 깨달았다면
이제부터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다.
모든 것이 리셋되어 갚을 돈도 없어지게 된 것처럼 자신이 독촉할 수 있는 채권도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그는 누구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감사할 뿐인 것이다.
이것이 용서의 핵심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일백 번씩 만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 말이다.
용서의 핵심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데 있다.
자신이 일만 달란트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였음을 깨닫는다면
용서는 나의 의지를 거스르는 힘든 행위가 아니라
숨 쉬듯 자연스러운 반응이 될 것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마18장 21-22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 김영규
마18장 21-22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
김영규 목사 2015.01.10.
정윤교회 [하남시] http://cafe.naver.com/jungyoonchurch/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18:21-22)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마태복음 18장의 후반부는 용서에 대한 교훈입니다. 이 부분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응답과(21-22절), 거기에 따른 비유(23-35절)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베드로의 질문과 주님의 응답을 중심으로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용서에 따르는 유익이 무엇인지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 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절)
베드로가 이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바로 앞에 언급된 내용 때문입니다. 형제가 내게 범죄 했을 경우 삼단계의 권면을 하라고 했습니다. 개인적 권면, 증인을 동참한 권면, 교회의 권면. 그리고 교회의 권면을 듣지 않는다면 출교 처분하라! 이런 내용을 들은 베드로는 범죄자에 대한 관용의 문제를 떠올렸습니다. 범죄 한 형제를 처벌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관용을 베풀어야 할까? 처벌하기 전에 용서와 관용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가? 그 질문이 바로 베드로가 한 질문입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될까요? 베드로가 질문한 핵심 단어는 “몇 번이나”(posavki”)입니다. 얼마나 자주(How often?), 얼마나 많이(How many times)? 용서의 빈도로 이해할 수도 있고, 용서의 횟수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답을 내놨습니다. 일곱 번 정도면 어떻까요? 베드로가 일곱 번이라고 한 것은 최대한의 숫자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 랍비들은 범죄자를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런 구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 아모스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반복 됩니다.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암1:3,6,9,11, 2:1,4,6) “서너 가지”라는 것은 세 가지 네 가지라는 뜻입니다. 랍비들은 하나님이 세 번까지는 관용하시고 네 번째는 처벌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랍비들의 교훈에 두 배를 곱했습니다. 세 번의 용서가 아니라 여섯 번의 용서! 거기에 한 번을 더했습니다. 일곱 번! 일곱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완전수입니다. 일곱 번의 용서는 베드로가 생각한 용서의 최대치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최대치이기도 합니다. 그런 정도의 용서를 생각한 것만도 참으로 기특한 일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답하셨나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절)
일곱 번을 일흔 번! 종전의 개역 한글판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알파벳을 숫자로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번역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영문 성경에는 “seventy seven times”(NIV)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어떤 주석가는 문자 그대로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Alford, Burce) 어떤 주석가는 490 번이 아니라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Calvin, M. Henly)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490번을 용서할 수 있다면 무한대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용서가 인간에게 과연 가능할까요? 일곱 번의 용서를 상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내게 계속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때마다 내가 과연 용서할 수 있는지 이 질문에 답변해 보세요. 처음에는 내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에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용서하시겠습니까? 용서하실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째는 사기를 쳤습니다. 허위 문서를 작성하여 내 재산을 가로챘습니다. 용서하시겠습니까? 용서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세 번째는 내가 아끼는 보석 패물을 도둑질 했습니다. 용서하시겠습니까? 용서 하신다고 칩시다. 네 번째는 내게 주먹질을 해서 이가 부러졌습니다. 용서하시겠습니까? 용서하실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섯 번째는 이간질을 하는 바람에 친한 친구를 잃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시겠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여섯 번째는 나를 함정에 빠뜨리는 바람에 내가 회사에서 쫓겨났습니다. 용서하시겠습니까? 일곱 번째는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악선전을 해서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용서하시겠습니까? “아, 그래. 나도 그렇게 용서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아니면 “이런 죽일 놈이 있나! 지옥에나 가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일곱 번의 용서,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490번의 용서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용서 덕분에 우리가 얻은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5)
본래 하나님은 엄하신 분입니다. 결코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6, 눅12:59)
* 한 푼이라도
그런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여기 “간과하심”이란 말은 구약 유월절에 나오는 “유월”(PASSOVER)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엄하신 하나님이 왜 내 죄를 간과하십니까? 예수님이 내 죄 값을 다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다 갚으셨습니다.
그 결과로 내가 얻은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았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축복의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용서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런 용서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그런 용서를 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그런 용서를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오늘 이 땅에 있는 어떤 죄인이라도 다 용서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무한대로 용서하시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용서는 받아들여야 효력이 있다
용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는 용서를 받는 자의 자세입니다. 아무리 무한대로 용서한다 해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효력이 없습니다.
성경의 문맥에서 보면, 용서는 회개를 통해서 효력이 나타납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 해도 그가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현실에서 아무 변화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형수가 사면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형 집행을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가끔 텔레비전에 깨어진 가족관계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혹은 부부 사이에, 어떤 사람의 잘못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아버지가 도박을 한다든지, 엄마가 바람을 피운다든지, 혹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온 가족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렇게 돌아선 마음을 어떻게 돌이킬까? 먼저 피해자들이 용서로 문을 열어야 합니다. 잘못으로 인한 관계 회복에서 항상 이 단계가 중요합니다. 먼저 피해자가 용서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가해자가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가해자가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치는 경우입니다. “나는 본래 나쁜 놈이야! 나는 용서를 받아들일 자격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포자기(自暴自棄)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우리의 회개이고, 영접입니다. 용서는 회개로 화답해야 구원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용서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용서의 효력을 내는 것은 바로 죄인들의 회개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바로 회개의 결과입니다. 자기 죄가 얼마나 큰 지 아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용서와 회개에 대해서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17:3-4)
범죄자에게 경고할 때, 회개해야 용서가 완성됩니다. 범죄자를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는 회개해야 용서가 성과를 거둡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3:19)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의 용서가 효력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는 날을 기대합니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가정,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능력. 그 모든 새로운 삶은 바로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최초의 복음 전파에서 회개와 천국을 가장 짤막한 문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천국은 용서 받은 죄인이 가는 곳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자신이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효력이 나타납니다. 항상 주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회개하면서 마음에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용서 한 자에게 유익이 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용서하는 자가 얻는 유익입니다.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할 때, 내게 큰 유익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할 때에, 상대가 용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용서 하세요. 그러면 용서한 내게 말할 수 없이 큰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로, 용서하는 사람은 주님께 관용을 얻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하여 정죄 당할 일이 있어도, 주님이 내가 한 용서를 참작하여 관용을 베푸십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누구의 죄를 용서해 준 것이, 주님께 기도할 때에 참고 사항이 됩니다. 23절 이하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비유에 나옵니다. 내가 누구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주님께서도 용서 없는 처분을 내리실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무수히 많은 관용의 순간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관용으로 넘어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것보다 큰 혜택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작은 잘못으로 크게 정죄 받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작은 잘못 때문에 부부관계가 깨집니다. 부모 자식 관계가 깨집니다. 작은 잘못 때문에 친구가 떠나고, 이웃과의 관계가 소원해집니다. 작은 잘못 때문에 직장에서 평판이 나빠집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맥관리에 신경 씁니다. 그러나 그 인맥관리가 뜻대로 됩니까? 잘 하려고 해도 오해하고 소문이 나빠집니다. 그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가 관용의 마음을 품고 살 때에, 하나님께서도 나를 관용하십니다. 큰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용서받은 다윗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죄가 가려지고, 정죄를 당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복을 받습니까? 하나님께 용서 받고, 남을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다윗도 실상은 상당한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을 정치적 천재라고 합니다. 다윗은 정적을 자기 손으로 제거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 사울이 죽은 후에도 다윗 왕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던 아브넬에게, 심지어는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던 아마사에게, 자신을 저주했던 시므이에게까지 그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항상 하나님의 관용이 따르고, 사람들의 관용이 따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을 가리켜 인복(人福)이라고 합니다. 인복은 저절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인복은 용서를 잘 하는 사람이 받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둘째로, 용서하는 사람은 자유를 얻습니다. 모든 매임에서 풀려납니다. 용서에는 마술과 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용서의 매직(magic)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떤 효력입니까? 바로 내 영혼을 자유롭게 만드는 효력입니다.
본문에 “용서하다”는 헬라어로 “ajfivhmi”(아피에미)입니다. 이 단어는 “내보내다, 떠나보내다, 포기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 용서라는 말을 이런 단어로 표현했을까요? 용서란 범죄 한 상대를 놓아주는 것입니다. 용서란 내 마음에서 범죄자를 떠나보내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범죄자를 물리적으로 제압한 적이 있습니다. 단번에 제압은 했지만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112신고를 하고 경찰에 넘겼습니다. 내게 죄를 저질렀다고 범죄자를 하루 종일 붙잡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한 달, 혹은 일 년을 붙잡아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집니다. 내 마음에서 범죄자를 떠나보내는 것이 곧 용서입니다. 용서는 마음에서 범죄자를 떠나보내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범죄자를 내 마음에 계속 붙잡고 있으면 내가 할 일을 못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일을 하지 못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삶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붙잡아 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다섯 명입니까? 세 명입니까? 한 사람입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붙잡아 두려면 무척 힘듭니다. 놓아 주세요. 풀어주세요. 떠나보내세요. 포기하세요. 내게 상처를 준 사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 떠나보내세요.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상처 준 사람을 붙잡고 있으면 나는 두 가지 매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첫째는 시간적 매임입니다. 과거 어느 때에 입은 상처 때문에 항상 과거에 매여 살게 됩니다. 60년대에 상처 받은 사람을 붙잡고 있으면 60년대에 매여 살게 됩니다. 80년대에 상처 받은 사람을 붙잡고 있으면 80년대에 매여 살게 됩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상처를 붙잡고 사는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에 매여 살고, 청년 때의 상처를 붙잡고 사는 사람은 청년 때에 매여 삽니다. 상처 준 사람을 떠나보내세요. 그래야 나의 삶이 과거의 시간에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옵니다. 둘째는 공간적인 매임입니다. 단 한 사람을 붙잡고 있느라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마음의 공간이 없습니다.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못합니다. 이런 매임에서 풀려나려면 붙잡고 있는 사람을 놔줘야 합니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을 떠나보내세요. 그래야 마음에 빈 공간이 생깁니다. 컴퓨터 메모리도 비워야 연산이 잘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범죄자를 마음에 가둬 놓으면 다른 삶의 공간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범죄자들을 오늘 다 내 마음에서 쫓아 내세요.
오늘은 2014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을 강해하는 중에, 오늘 말씀은 공교롭게도 용서의 주제를 주셨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마음을 청소하세요. 내 마음 가득히 채워졌던 범죄자들을 놓아 보내세요. 몇 번이나 용서하면 좋을는지 묻지 마세요. 주님이 나를 무한대로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범죄자를 무조건 용서하세요. 쫓아내세요. 포기하세요. 그래서 새해에는 진정 새 마음으로 새 출발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마18:21-2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 하였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세 번까지 용서하고, 네 번째는 용서해 주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랍비 호세벤하니나는 말하기를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는 세 번 이상 용서해 달라고 하지 말 것이요. 용서하는 자는 네 번째에는 용서해 주지 말 것이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원칙을 구약 성경 아모스서에 그 근거를 두었는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이방 도시들에게 세 번 경고 하신 후, 네 번째에는 그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셨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 랍비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고 말하고는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일흔 번의 일곱 번 즉 490번까지만 용서하고 491번째에는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참으신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용서를 상징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남을 용서하라고만 하신 말씀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나를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용서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좁은 마음으로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세 번이 아니라 일곱 번까지 저질렀는데 과연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실까? 과연 하나님이 나를 용서했을까?
이렇게 자신의 좁은 마음으로 생각하여 자신은 더 이상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 일뿐 하나님의 생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똑같은 죄를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저질러도 버~얼써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또다시 당신이 지을 일흔 번의 일곱 번의 죄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부모와 자녀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철부지 어린 자녀 때에는 자신이 잘못하면 부모님에게 손을 싹싹 빌면서 “아빠 엄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이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안그럴께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는 그 어린 자녀가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를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웃습니다. “이 녀석아, 네가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잘못을 저질러도 내가 다 용서할 텐데 너는 이번만 용서해달라고, 한번만 더 용서해달라고… 부모가 너처럼 그렇게 속이 좁은 줄 아냐?”
여러분, 부모가 자녀에게 때로는 잘못을 저지를 때 자녀는 부모의 죄를 세 번까지, 혹은 베드로처럼 일곱 번까지 용서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용서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랴 오죽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녀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여러분, 자기의 어린 자녀가 넘어지면 그 부모가 그 넘어진 자녀를 몇 번이나 일으켜줍니까? 일곱 번만 일으켜 줍니까? 아닙니다.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부모는 자기가 죽더라도 넘어진 자녀를 일으키고 죽으려고 합니다. “나는 죽어도 너는 일어나서 살아라.“고 애를 쓰며 죽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이런 부모의 마음을 모르고 ”어머님, 아버님, 내가 어렸을 때 몇 번이나 나를 일으켜 주었어요?“라고 묻는 자녀가 있다면 그대의 이름은 ‘철부지’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되어서 자기 부모가 자기를 일으켜 준 숫자를 계산 한다는 것은 바보입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의 속 좁은 질문을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이런 베드로와 같은 인간적인 속 좁은 생각을 같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 번만 용서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세 번만 축복하실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답답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속이 좁은 분으로 만드는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이 들으면 굉장히 섭섭하여 눈물을 흘릴 지경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원한 용서, 영원한 축복, 영원한 사랑을 백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의 울타리에 가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죽어서 분토가 되어도 계속해서 용서하시는 분이시요, 계속해서 사랑하시는 분이시요, 계속해서 축복하시고,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죽는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용감한 여호수아 장군이 죽는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합한 다윗 왕이 죽는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팽기지 않습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계속해서 영원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영원까지 우리를 보호하시고, 영원까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고로 시편 기자는 반복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라”(시103:17)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한 두 번의 관계가 아닙니다. 서너 번의 관계도 아닙니다. 또한 연수로 계산하여 백년 이백 년간의 관계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영원까지 지속되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요,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영원토록 신천신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듯이 장차 우리도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원토록 우리를 축복하시고,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처럼 그렇게 영원토록 남을 용서하고, 그렇게 영원토록 남을 축복하고, 그렇게 영원토록 남을 사랑하라는 교훈이 바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라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과연 남을 얼마만큼 용서하고, 얼마만큼 사랑하고, 얼마만큼 축복하고 있습니까?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의 가족관계라면 좀더 많이 용서하고, 좀더 많이 참고, 좀더 많이 사랑하겠지요. 그러나 가족 관계가 아닌 이웃과 친구 관계라면 아마 가족보다는 조금 덜 용서하고, 조금 덜 참고, 조금 덜 사랑하겠지요. 그리고 좀더 멀리 떨어진 관계라고 생각되는 직상상사나 혹은 부하직원들은 그보다 덜 용서하고, 그 보다 덜 참고, 그 보다 덜 사랑하겠지요.
그렇다면 하늘나라 가족인 성도들 간에는 어떻습니까? 한 번만 용서하고, 한 번만, 참고, 한 번만 사랑합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선생인 랍비처럼 세 번까지만 용서하고, 세 번까지만 참고, 세 번까지만 사랑합니까? 아니면 베드로처럼 일곱 번까지 용서하고, 일곱 번까지 참고, 일곱 번까지 사랑합니까? 아니면 주님처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고, 참고, 사랑합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창녀를 용서했습니다. 창녀가 한 남자하고만 부정을 저지른 여자입니까? 아닙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부정을 저지른 여자가 창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녀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하신 것입니까?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즉 무한대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은 자도 창녀와 같이 간음을 저질렀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들을 얼마나 많이 용서하신 것입니까?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한두 번만 축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세 번만 기회를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성공할 때까지, 내가 축복 받을 때까지, 내가 천국에 올라갈 때까지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시어 나를 축복하시고, 나에게 기회를 주고, 결국 나를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2-5)
잠언서 24장 16절에 보면 “의인은 일곱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뜻은 여덟 번째에는 못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여덟 번째에도, 일흔 번의 일곱 번째에도 다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고로 지금 나는 넘어졌다고, 실패했다고, 버림받았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일어납니다. 내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다시 일어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일곱 번만 용서했다면 그리고 그 후에는 용서하지 않았다면 우리 중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나를 일곱 번만 치료해 주시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치료해주지 않으셨다면 이 자리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올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믿으십시오. 나는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치료해 주셨습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일으켜 주셨습니다. 고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리라.”(욥5:18-19)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고로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고로 스스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일으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고로 스스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굳건한 약속을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서로를 격려하십시오. 결론을 맺습니다.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라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1.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
2. 주의 사랑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이 두 구절 중 하나는 용서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사역할 내용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성육신할 때, 특정 단계의 사역과 함께, 그 시대에 보이고자 하는 성품, 구체적인 사역 항목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인자는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하고자 하는 사역의 범위를 중심으로, 그보다 넘쳐 나거나 부족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해당 시대와 관련이 있다. 사람의 방식이나 언어로 표현하든 신적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과 입장에서 표현하든 그에게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바로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방식과 입장을 통해 그의 뜻과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사람이 알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은혜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명하려는 바를 인간적 언어로 전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아울러 많은 경우 그는 평범한 길 안내자의 위치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사람이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역 방식은 은혜시대 전의 율법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사람과 훨씬 친근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형식과 방식상에서 훨씬 더 실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비유가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숫자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당시에 이렇게 비유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 그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는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어떤 개념일까? 바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 필수 과제이자 ‘길’로 삼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비유에 불과하지만, 이 표현은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비유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을 찾았으며, 실행의 원칙과 기준을 얻었다. 그리고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조건 없이, 횟수의 제한 없이 사람을 용서하라는, 용서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확실한 이해를 얻었다. 예수 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그가 정말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숫자를 생각했겠느냐?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정해져 있느냐?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횟수’에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기원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왜 예수의 입에서 이러한 숫자가 나왔는지 궁금해하며, 이 숫자에 분명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숫자는 하나님이 인성으로 말씀한 비유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숨은 의미나 함의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와 관련된다. 하나님이 성육신하기 전에 사람은 하나님이 한 말씀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말씀의 관점과 말씀이 나온 배경을 사람은 볼 수 없고 닿을 수도 없었다.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선포된 것이라 육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후에는 영계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사람과 대화하게 되었다. 사람의 관념적인 상상이나 삶 속에서 보고 접하는 일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그리고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그의 신적 성품과 마음, 사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전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이해 가능하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으로 사역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사역 방식과 원칙이 대부분의 경우 인성을 통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신성으로 사역해서는 얻기 힘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인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 내용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실용적이다. 방식도 유연하고, 형식상으로도 율법시대를 초월하게 되었다.
이어서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말씀은 직접 신성으로 선포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 인자가 인성으로 한 말씀이다. 사람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생명을 보살피듯 보살핀다는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 신성에는 이러한 언어가 없다.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신조로 삼아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속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나는 인류를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특정 방식으로 대하는 것은 그의 성품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 일부러 무엇을 하거나 특정 방식과 도덕 규범을 따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는 원래부터 이런 본질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할 때, 인간적인 형식으로 많은 말씀 과 진리, 방식을 전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뜻도 함께 전하여 사람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는 본질과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육신한 인자는 최대한 많이 가장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본질을 나타냈다. 인자의 인성은 결코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데에 있어 방해물과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인류와 창조주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이자 다리이다. 이쯤에서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의 성격과 방식 중 일부는 지금의 사역과 아주 많이 유사하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지금 단계의 사역에서도 많은 인간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했다. 또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말하는 것이나 인류의 지식 차원의 언어와 방식을 많이 이용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하나님이 일단 성육신하고 나서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말씀하든 신적인 입장에서 말씀하든, 많은 말이나 표현 방식은 모두 사람의 말이나 방식을 매개체로 사용한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는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성장 과정에서 인성을 통해 사람의 지식, 상식, 언어 혹은 표현법을 이해하고 배우고 파악하게 된다. 피조물인 인류에게서 비롯된 이러한 것들이 성육신 하나님께 갖춰져, 그가 하나님의 성품 혹은 신성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입장에서 사람의 언어로 더 적절하고 실제적이며 정확하게 사역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람이 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사역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으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냐? 하나님이 성육신하고, 그 육신이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장차 실제적으로 발현될 때이다. 그리고 인자가 정식으로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는 때이 기도 하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세대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던 사역을 곧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육신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과 사역을 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곧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전 인류를 향할 것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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