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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해설사 홍옥희가 전하는 명화 속 숨은이야기
그림 읽어주는 여자 151204 – 밀레의 이삭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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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삭 줍는 여인들》(프랑스어: Des glaneuses, 영어: The Gleaners)은 장 프랑수아 밀레가 1857년에 완성한 유화이다. 《이삭 줍기》, 《이삭 줍는 사람들》로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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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7/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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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 – 나무위키:대문

장프랑수아 밀레가 1857년에 완성한 유화이다. 현재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수확이 끝난 밀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세 명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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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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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 (밀레) – 알고가자 프랑스

1857년 파리에서 가까운 ‘바르비종’ 근처의 ‘샤이 Chailly’ 평야의 풍경을 담은 것으로, 일꾼들이 추수에 열중해 있으며, 뒷 배경에는 추수된 보리들을 낫가리에 쌓고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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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lgogaza.com

Date Published: 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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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속에 담긴 의미는?

자연 친화적인 그림입니다. 일체의 가식이 없죠. 평온한 기운만 충만합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도 따뜻해져요. 그림의 주제는 농민의 삶, 농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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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3/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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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Des glaneuses), 1857

이삭 줍는 여인들 (Des glaneuses), 1857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의 위대한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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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jsksoft.tistory.com

Date Published: 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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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빈부격차 고발 논란 | 중앙일보

1 이삭 줍는 여인들(1857),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작, 캔버스에 유채, 83.8×111.8㎝, 오르세 미술관, 파리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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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9/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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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이삭 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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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삭 줍는 여인

  • Author: KTV스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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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5.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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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밀레)

Des glaneuses – Jean-François Millet

쌓여가는 보리 짚단이 다가올 추운 겨울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풍요의 상징이라면, 왜 “추수 Moisson”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이삭 줍는 여인들 Glaneuses”이라고 제목을 붙였을까????

1857년 파리에서 가까운 ‘바르비종‘ 근처의 ‘샤이 Chailly’ 평야의 풍경을 담은 것으로, 일꾼들이 추수에 열중해 있으며, 뒷 배경에는 추수된 보리들을 낫가리에 쌓고 있는 일꾼들의 모습, 앞쪽에는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여인들을 묘사하였다. 묵묵히 일하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주어진 일에 열중하고 있을뿐…. 세 여인이 땅을 향해 몸을 구부린 채 추수하는 농부들이 흘린 보리 이삭을 줍고 있는 여인들의 뒤로는 마치 땅이 지평선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 펼쳐져 있다.

이들의 왼쪽으로는 엄청난 크기의 보리 짚단들이 눈에 띈다. 수평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마을의 모습이 뒤 배경에 나타나고, 그 앞에 말을 탄 남자가 보이는데 일꾼들을 감독하고 있는 농장의 주인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지평선을 뚫고 우뚝 솟아 있다. 그런데, 앞쪽의 세 여인은 이상하게도 고독해 보인다. 농부들과 여인들간의 거리도 무척이나 멀어 보이고, 아무도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 여인들은 보리 추수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당시 사회의 가난한 소외자들을 묘사한 것이라고…

농장주가 불쌍히 여겨 추수하는 농부들이 땅바닥에 흘린 보리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 소위 보리 이삭을 줍는 여인들인 것이다. 운명처럼 짓누르는 수평선의 무게에 힘겹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소외된 자들….

‘밀레’는 세 여인을 한 무리로 묶어 구성하였는데, 저 부조를 막 벗어나는 듯한 여인들의 모습과, 마치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는 듯 느리면서도 우아한 움직임을 전체적으로 단순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여인들이 하나의 보리 이삭이라도 더 줍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굽히고 일으키는, 연속적이고도 고된 동작을 보고 있는 듯하다.

첫 번째 여인은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 팔을 뻗치고 있고, 두 번째 여인은 보리 이삭을 주워담고 있으며, 세 번째 여인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있는 장면은 결국 보리 이삭을 줍는 일련의 연속 동작을 각자 한 동작씩 연출하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듯….

‘밀레’ 뿐만아니라 ‘꾸르베 Gustave Courbet’등등이 활동하던 ‘바르비종‘의 들녘. 봄철에는 개양귀비 꽃이 절경이고, 여름에는 노란 유채꽃으로 물들고, 가을에는 ‘밀레’의 그림처럼 황금 물결이 일렁이는…..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속에 담긴 의미는?

문화여행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속에 담긴 의미는? 정책주간지 공감 ・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공유하기 신고하기 ​ 농부의 마음, 노동의 신성함, 삶의 존귀함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이 그림.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이에요. 또 다른 걸작 ‘만종’과 함께 그의 명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한 “농촌 풍경의 고전인 작품”이죠. 밀레가 농부의 삶을 캔버스에 담은 이유는 무엇일지, 박인권 문화칼럼니스트의 글 을 통해 함께 알아봐요! 자연 친화적인 그림입니다. 일체의 가식이 없죠. 평온한 기운만 충만합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도 따뜻해져요. 그림의 주제는 농민의 삶, 농촌의 일상적인 풍경 인데요. 농민의 하루는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그들의 일과는 땅에서 시작해서 땅에서 끝나죠. 온몸은 땀과 먼지 범벅, 힘들고 고단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평하지 않아요. 일용할 양식의 원천인 땅은 그들의 모든 것입니다. 비록 땅의 주인은 아니지만 땅이 없으면 그들도 없어요. 묵묵히 하루하루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뿐 입니다. ​ 그들이 씨 뿌리고 밭을 일구고 추수하는 모습에 우리는 숙연해지는데요. 부지런한 그들의 몸놀림은 대지를 향한 경의의 상징 이죠. 갈라지고 거칠어진 그들의 손마디에는 생명의 모태, 대지의 숭고함이 화석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결코 비루하지 않은 농부의 삶, 그곳에 서려 있는 것은 비장미 예요. ​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 그는 농민이 흘린 땀과 노동의 가치를 그림으로 일깨웠습니다. 밀레는 그림 속 농민에게 날것 그대로의 옷을 입혔는데요. 진솔하고 성실하고 때 묻지 않은 농부들의 실제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어요.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농부의 일상, 농촌의 풍경인데 그림을 보는 우리는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밀레 그림 속 농부들은 우리에게 경건하고 숭고한 삶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 이죠. 밀레가 위대한 화가인 이유입니다. 자연주의 지향한 대표 그림 궁금합니다. 밀레는 어째서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 없는 농부의 일상 속에 고귀한 가치 를 담아냈을까요? 밀레는 농부의 아들 입니다. 농촌에서 태어났고 농촌에서 자랐죠. 농사도 지어봤습니다. 농민을 사랑했고 농촌을 좋아했어요. 20대 초반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습니다. 루브르박물관의 대가들 작품은 그에게 훌륭한 미술 선생이었어요. ​ 그러나 그는 천생 농부의 아들 이었습니다. 밀레가 추구한 그림은 주요 고객인 도시 부르주아들에게 인기가 없었는데요. 제도권 미술의 등용문인 살롱전에서도 거푸 퇴짜를 맞았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민들이 좋아하는 싸구려 그림을 그렸죠. 대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낄 즈음 콜레라 감염병이 급습했습니다. 35세 때였는데요. 밀레는 지체 없이 파리 근교 시골 마을 바르비종에 정착 했어요. 4년 전 만난 동거녀 카트린과 함께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농사도 지었어요. 바르비종 생활은 죽을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밀레는 농부의 마음, 노동의 신성함, 삶의 존귀함 세 가지를 모두 다 알았는데요. 그리고 그림을 통해 그것을 모두 실천했어요. ​ 가난했지만 바르비종 생활은 행복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렸죠. 절친 테오도르 루소(1812~1867)와 카미유 코로(1796~1875), 프랑수아 도비니(1817~1878) 등 마을 주민이자 동료 화가들의 존재도 큰 힘이 됐는데요. 바르비종 근처에 퐁텐블로 숲이 있어 ‘퐁텐블로파’로도 불려요. ​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숲과 자연을 주제로 한 사실적인 풍경화 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밀레의 관심은 오직 농민의 삶, 농촌의 풍경 이었어요. ​ ‘농부화가’ 밀레의 꿈은 1857년 그의 나이 43세 때 마침내 결실을 맺습니다. 노을빛 아래 드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추수 후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세 명의 아낙네 모습을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 을 통해서인데요. 자연주의를 지향한 대표 그림이죠. 또 다른 걸작 ‘만종’ (1857~1859)과 함께 밀레의 명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한 농촌 풍경의 고전인 작품입니다. 그는 1875년 1월 20일 지병이던 결핵이 악화돼 사망했어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파리 18구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일하는 삶의 고귀함 몸소 실천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캔버스에 채색, 84×111cm, 1857,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제목처럼 세 명의 아낙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어요. 지극히 평범한 가을 들녘의 농촌 정경인데 왠지 그림 전반에서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화면 중앙에 과도한 비율로 그려진 세 아낙들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하잘것없는 농사꾼의 아내들, 그럼에도 이 그림의 주인공임을 금방 눈치채게끔 장엄하게 묘사됐어요. ​ 그림 제목에서 시사하듯 아낙들은 왼쪽에서부터 이삭 줍는 행위를 연속적인 움직임 으로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삭을 찾고 이삭을 줍고 막 주운 이삭 다발을 앞치마를 묶어 만든 주머니에 넣기 위해 허리를 반쯤 편 모습이 그렇습니다. 허리를 90도 이상으로 깊게 숙인 모습은 이삭줍기가 육체적 피로를 동반하는 힘들고 고된 막노동임을 실감 나게 하죠. 아낙들의 손을 보면 솥뚜껑처럼 투박하고 거친 모습이 울퉁불퉁한 대지 를 닮았습니다. 손의 색깔과 땅의 색깔도 한 몸인 듯 흡사해요. 허리를 굽힌 아낙들 아래로 그림자가 선명하고 전경(前景)도 빛에 가려져 있는 게 고단한 삶의 현장임을 증언 합니다. ​ 그런데 풍년의 증거인 산더미 같은 볏단 더미를 뒤로하고 흙 속에 숨은 낟알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부릅뜨고 땅을 헤지고 있는 아낙들 모습은 결코 비루하다거나 애처롭지 않습니다. 그들의 처지, 그들의 행위에 깃든 생계형 간절함은 그들의 몸짓과 자태가 빚어내는 종교적인 엄숙함과 소박하고 작지만 아름다운 울림 앞에서 꼬리를 내려요. 가진 것은 없지만 노동의 가치와 노동하는 삶의 고귀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아낙들의 진솔하고 성실한 자세 때문일 것입니다. 그림의 3분의 2 이상을 황금빛 대지가 차지하는 것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상징하는 절묘한 구도적 장치 예요. ​ 정직한 땅에서 존엄성을 잃지 않고 정직하게 땀 흘리며 농사짓는 농부의 일상 을 일체의 감상적 표현 없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한 그림입니다. 농부를 주제로 한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실주의 그림 의 대명사로 길이 남은 이유예요. ​ ⓒ박인권 문화칼럼니스트 공감 누리집 원문 기사 보기 ​ 인쇄

[작품 해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Des glaneuses),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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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 (Des glaneuses), 1857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의 위대한 화가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1875)가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림도 없을 것이다. 밀레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걸작인 이 작품은 1857년에 그려졌으며 1854년 세로로 긴 캔버스에 그렸던 첫 번째 버전을 다시 각색하여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인들이 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추수 이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 농촌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을 그린 19세기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품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그림은 목가적이지도 평화롭지도 않은, 당시 파리 외곽 바르비종 마을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린 ‘사실주의’ 그림이다. 일이 주는 즐거움도 일을 마친 풍요로움도 없는 두툼한 손이 놓치지 않으려는 것은 한 톨의 이삭이다. 땅에 떨어진 낟알조차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주울 수 있는 가난한 삶. 수확 철 농촌에서 늘 볼 수 있었던 땅 없는 이들의 이삭줍기. 반면 풍성한 수확과 말을 탄 지주는 저 멀리 뿌옇게 작게 그려져 있다. 한마디로 곤궁에 처한 유럽과 아메리카의 노동자 계급 (working class)에 대한, 그러니까 근대 민중들의 삶을 그린 상징이자 기념이었다.

추수 이후에 남겨진 것들을 줍는 것은 사회에서도 가장 최하급의 일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밀레는 이 작품에서 이 여인들을 마치 영웅과도 같은 구도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의 뒤로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밭은 드넓고 장대한 하늘아래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 세 명의 여인들의 모습은 이렇게 밝게 빛을 받은 밭과 달리 그림자가 많이 들어가 배경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이후 프랑스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표면화된다. 우파의 언론들은 이 여인들을 ‘혁명의 허수아비’라며 밀레를 사회주의자로 몰았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계층 간의 갈등을 부추겨 사회에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다!” “아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진짜 사회주의자다!” 하지만 정작 그림을 그린 밀레는 정치에 무관하고 사회주의자들을 싫어했다. 그는 농촌에서 자라 농촌 풍경밖에 모르고 살았다. 일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힘닿는 데까지 표현한 것뿐이다.

밀레가 보고 느낀 대로 그린 그림에는 사람들의 표정이 없다. 그는 말했다. “나는 농부들이 기쁘게 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기쁨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오.” 어떤 화가도 그리지 않았고 그리려고 하지 않았던, 그저 묵묵히 낟알을 줍는 데 몰두하고 있는 표정없는 여인네들. 그 자신 가난을 처절하게 경험했던 밀레는 인간을 결코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땅의 노동에 바쳐진 인간을 그린 이 그림은 감동적이다. 밀레의 눈에 비친 19세기 프랑스 농부들의 담담한 진실이 이 그림의 위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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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빈부격차 고발 논란

1 이삭 줍는 여인들(1857),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작, 캔버스에 유채, 83.8×111.8㎝, 오르세 미술관, 파리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이삭 줍는 여인들(사진 1)’을 보면 정답고 반가운 느낌이 들 사람도 있겠고 너무 많이 봐오던 그림이라 따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가게 벽이나 과자 포장지 등등을 장식하고 있을 이 그림은 농민생활에 애정과 경의를 담아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농촌 그림의 대명사로 각인돼 있다. 그런데 이 차분한 그림이 1857년 처음 발표됐을 때, 선동적이고 불온한 그림이라는 비난을 들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지?

문소영 기자의 명화로 보는 경제사 한 장면<9> : 노동자의 현실을 바라본 사실주의 화가들

일단 이삭 줍기라는 테마 자체가 당시에는 심상치 않게 받아들여졌다. 먼 옛날 구약성서 시대부터 추수가 끝난 뒤에 이삭을 줍고 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농지가 없어서 주운 이삭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최하층 빈민이었다. 추수 때 땅에 떨어진 이삭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고대부터 전해지는 일종의 자선이었다.

그러니 밀레의 그림 속 여인들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밭에서 품을 팔고 품삯으로만은 모자라 이삭을 줍는 가난한 아낙네들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과 손은 고된 노동으로 검붉게 그을렸고 거칠고 투박하다. 맨 왼쪽에 있는 여인은 이삭을 쥔 팔을 등에 댄 걸로 보아 허리가 아픈 모양이다. 하루 종일 넓은 밭을 헤매며 고개를 숙여 이삭을 찾고 허리를 굽혀 주워야 하니 온몸이 뻐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결코 비천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 그들은 그저 묵묵히 이삭을 주우며 자신과 가족을 위한 노동을 한다. 이러한 모습은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 속에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농민들과도 다르고 17∼18세기의 목가적 풍경화 속에 미화되어 나타난 유쾌한 농민들과도 다르다. 이런 면에서 밀레가 사실주의(Realism) 화가로 불리곤 하는 것이다.

2 봉기(1860년께), 오노레 도미에(1808~1879) 작, 캔버스에 유채, 87.6×113㎝, 필립스 컬렉션, 워싱턴 DC 3 가르강튀아(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를 풍자한 그림), 오노레 도미에 (1808~1879) 작, 석판화

당시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농민생활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밀레의 그림을 불편하게 여겼다. 게다가 이삭 줍는 여인들 너머 저 멀리에 추수한 곡식이 황금빛을 내며 풍요롭게 쌓여 있고 그것을 분주히 나르는 일꾼들과 그들을 감독하는 말 탄 지주가 보이는 것이 비평가들을 불안하게 했다. 이 조용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대조야말로 빈부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밀레는 자기 자신이 밝혔듯이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농민의 고된 생활을 현실 그대로, 그러나 어떤 참담한 심정이나 울분 대신, 온화한 서정과 일종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담아서 묘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는 이 작품에서 시적인 아름다움과 평화를 느낀다. 이것이 밀레가 사실주의 화가이면서도 낭만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는 우리의 통념과 달리 반드시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부르주아 평론가들은 10년 전 도시노동자와 농민이 전면에 나선 2월 혁명과 그 뒤로도 계속된 시위와 봉기에 덴 탓인지, 아니면 찔리는 것이라도 있었는지, 밀레의 농민 그림들에 민감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단정했다.

더 정치적인 사실주의 화가들은 따로 있었다. 그 대표적인 화가 중 하나가 오노레 도미에(1808 ~1879)였는데, 그는 시사만화가로 출발했으니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도미에는 오늘로 치면 만평에 해당하는 풍자적인 석판화를 무려 4000여 점 시사잡지에 기고했는데, 지금 보아도 재미있고 촌철살인인 것들이 많다. 그의 작품들에는 탐욕스러운 정치가들, 비싼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폼 잡고 싶어하는 소시민, 옆에 선 남성을 튕겨낼 정도로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부르주아 여성 등 다양한 인물군상이 풍자의 대상으로 등장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도미에가 1830년대에 즐겨 그린 것은 당시의 국왕 루이 필리프였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대로 루이 필리프는 부르주아지가 주축이 된 1830년 7월 혁명을 통해 왕위에 오른 입헌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점점 쌓여가는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계층의 갈등, 또 보수파와 진보파의 갈등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것도 사정을 악화시켰다. 불경기 때문에 임금은 더욱 낮아졌고 임금 인상과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게 되었다. 그 와중에 왕은 더 보수적으로 변했다.

도미에의 1832년 풍자화(사진3)를 보면 루이 필리프가 옛 소설에 나오는 거인왕 가르강튀아로 묘사돼 있는데, 소시민과 노동자 계층에게서 짜낸 먹을거리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다. 도미에는 이 그림 때문에 감옥까지 갔다 왔다. 사실 루이 필리프는 스스로가 혁명으로 왕위에 옹립된 만큼 처음에는 언론 출판의 자유에 우호적인 정책을 폈고 자신에 대한 풍자에도 관대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미에의 풍자화만큼은 그를 격분케 했다는데, 그를 너무 뚱뚱하게 묘사한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도미에를 고발했고, 도미에는 6개월 징역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도미에는 끄떡없이 신랄한 시사만화를 계속해서 그렸다.

마침내 1848년 2월에 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루이 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보통선거 제도가 도입돼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남성도 선거권을 가지게 됐다(여성 선거권은 그 뒤로도 100년이나 걸렸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때부터 여성들이 적극 혁명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로니컬하게도 다른 서구 국가들보다도 더 늦게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도미에는 물론 이 혁명을 기뻐했다. 그가 1860년께에 2월 혁명 당시를 회상하며 그린 그림 ‘봉기(사진2)’를 보면 지난 글에 소개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달리 이제 부르주아지가 아닌 노동자 계층이 혁명의 중심 주체로 서있음을 볼 수 있다. 불끈 쥔 오른손을 위로 쳐든 흰 셔츠의 사나이는 호전적이고 폭력적이라기보다 그와 동료의 힘든 처지를 절박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 계층을 향한 도미에의 깊은 애정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노동자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분노한 데에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노동이 국부 측면에서 갖는 중요성은 증가한 반면 정작 노동자들의 처지는 그와 심각하게 괴리돼 열악하다는 데 있었다.

부에 있어서 노동의 가치를 논한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것을 정립한 사람은 근대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였다. 그는 부의 원천이 중상주의자가 주장하는 대로 금·은 화폐의 축적도 아니고 중농주의자가 주장하는 대로 농지인 것도 아니라 노동이라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고전학파 경제학의 완성자라 불리는 데이비드 리카도가 노동가치설을 세웠고 카를 마르크스가 이 이론에 기초하되 상당한 변형을 가해 마르크스 경제학의 토대로 삼았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주의,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공언한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등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

영자신문 중앙데일리 문화팀장. 경제학 석사로 일상 속에서 명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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