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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얼굴을 그릴 때
털 한 올, 점 한 개까지 놓치지 않았다는
조선시대 화가들.
우리네 조상님들은
정말로 뽀샵을 1도 하지 않았을까요?
오늘의 교양만두는 ‘조선시대 초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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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강동한
#한국인 #조선시대 #초상화 #역사 #교양만두
*참고 문헌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 후기 초상화』 l 이태호 l 마로니에북스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 l 이성낙 l 눌와
『얼굴을 그리다』 l 정중원 l 민음사
『한국의 초상화』l 문화재청 편 l 눌와
「초상화에 담지 못한 사대부의 삶」l 이경화 l 美術史論壇,2012, vol. l 한국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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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肖像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인(先人)들의 문헌 기록이나 찬문을 훑어보면 초상화를 일컬어 진(眞)·영(影)·상(像)·초(肖)·진영(眞影)·영자(影子)·사진(寫眞)· …
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4/21/2022
View: 4370
15집 – 조선시대 초상화Ⅰ | 한국서화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조선시대 초상화 Ⅰ(Joseon Portraits)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서화유물도록 제15집 (Korean Paintings and Calligraphy of National Museum of Korea …
Source: www.museum.go.kr
Date Published: 8/19/2022
View: 5698
조선시대 초상화,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하다 | 나라경제
초상이란 그 주인공의 정신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특히 서양 초상화와 달리 인물에 대한 설명장치 역할을 하는 보조기물이 표현되지 않는 조선시대 초상에서는 한 치의 …
Source: eiec.kdi.re.kr
Date Published: 9/16/2022
View: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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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조선 시대 초상화
- Author: 교양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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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2.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DK0-RXY4ICs
초상화(肖像畵)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발달해 온 미술 장르 중 하나로, 모범이 되는 역사적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되기 시작했다. 초상화는 넓은 의미에서 인물화의 범위에 속하지만, 특정한 인물을 대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인물의 모습을 그린 일반 인물화와는 구별된다. 따라서 초상화는 개성을 지닌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지극히 사실적인 태도로 형상화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단, 외형을 똑같이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고 대상 인물의 내면까지 표현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초상화가 성행하고 발달한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조선의 초상화는 스케일이 큰 중국 초상화보다는 손순하고, 찬찬하고 조밀한 일본 초상화보다는 절제된 형상을 통해 인물의 내면과 인격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인물의 외형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 인물의 내면까지 표현해낸다.
「초상화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초상화를 대상으로 특징 및 제작과정과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된다. 초상화의 이론과 유형을 다루는 기존의 접근법에서 벗어나 초상화의 발전 과정 속에 드러나는 초상화의 주제와 화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은 안면의 처리와 자세 및 옷 주름의 표현 등에서 잘 나타난다. 안면은 초상화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부분으로, 표현에 따라 성격이나 정신적 특성이 잘 표출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화원들은 다른 부분보다 안면 묘사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안면 묘사는 사실성에 바탕을 두었다. 그것도 너무 사실적이어서 얼굴의 약점까지도 모두 옮겨 담았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여러 작품들을 보면 노인의 검버섯, 천연두 자국 등 대상 인물이 콤플렉스로 여길만한 결점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사실적인 초상화 덕에 1980년대 이성락 박사는 ‘우리나라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이라는 논문으로 최우수 논문상을 받기도 했다. 이 일화만 보더라도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얼마나 사실적인지 잘 알 수 있다.
안면묘사기법의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던 시기는 조선후기였다. 이 시기에는 조선 초, 중기 때 황기(黃氣)나 홍기(紅氣)를 삽입하던 표현법과 달리 새로운 화법인 운염법(먹의 번지는 효과를 살려서 엷게 우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명나라 화가 증경(曾鯨)에 의하여 창시된 이 기법은 18세기 초엽부터 중국에 다녀왔던 화원들에 의해 우리나라에도 수용되기 시작했고 19세기에 이르면서 거의 모든 회화에서 이 기법이 사용되었다.
안면처리 중에서도 특히 안정(眼睛: 눈동자)의 표현은 초상화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조선후기에 나타난 안정 묘사는 각막과 동공사이에 있는 막을 동공과 각막의 외곽선 색보다 약간 옅게 채색하고 동공에 접한 각막부분은 아주 밝게 나타내고 멀어질수록 점점 어둡게 나타냈다. 또한 보는 이가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대상 인물의 시선과 마주칠 수 있도록 표현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대상을 핍진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독특한 안정표현기법 덕분이었다.
안면의 표정과 함께 인물의 동작이나 자세는 초상화의 화면전체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인물의 자세로 반신상과 전신상으로 구분되고, 전신상은 다시 입상과 좌상으로 나누어진다. 전신상을 주로 그렸던 조선전기에 비해 조선후기는 반신상을 압도적으로 많이 그렸다. 반신상은 전신상 보다 대상인물의 안면을 더욱 강조할 수 있고, 작품 제작도 훨씬 수월하다. 옷 주름은 의외로 안면 묘사와 달리 간결하게 묘사했다. 옷 주름을 간결한 단선으로 표현함으로써 대상 인물의 인품과 엄정함을 돋보이게 했으며, 때로는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음영을 묘사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지향점은 ’전신사조(傳神寫照)’였다. 전신 사조란 정신을 그려내는 것으로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안면이나 안정 묘사를 할 때에도 대상 인물의 인품을 나타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 동진의 화가인 고개지(顧愷之)도 ‘전신사조의 요점은 눈동자에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성종실록(成宗實錄)-권19』에는 “人爲父母之眞 一毫一髮不似 則非父母矣(사람이 부모의 초상화를 그림에 있어서 털 오라기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정성을 들여 정확하게 그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대상 인물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담아내는 전신 사조를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시대 초상화를 대표작을 꼽으라면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자화상(自畵像)」을 들 수 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잘생긴 한국인의 얼굴을 정밀하고도 생동감 넘치게 그려내었으며, 구성방식도 대담해 우리나라 초상화의 예술성과 형식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초상화의 제작과정
초상화를 그리는 기초 작업인 초본은 기름종이[油紙] 위에 유탄과 먹선으로 그린다. 채색은 앞에서 칠하는 전채(前彩)와 뒤에서 칠하는 배채(背彩)를 병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본(正本)을 완성한다. 조선시대에 초상화를 제작함에 있어 그 절차가 복잡하였다.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영조의 기로소에 들어감을 기념하는 그림(耆社慶會帖, 1744)』 중 「이의현(李宜顯) 초상」의 제작 과정을 추정하여 재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상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전통적으로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를 하였다. 도사(圖寫)는 살아 있는 인물을 화가가 직접 대면하여 그리는 방식으로 재빨리 스케치하듯 그려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로 숙련된 화가가 그려야 한다. 대표적인 예로 임희수의 『초상화첩[七分傳神帖]』이 있다.
『초상화첩[七分傳神帖]』은 임희수가 1749년, 1750년에 두 해에 걸쳐 그린 초상화의 초본을 그가 요절하자 그의 아버지 임위(任僞)가 대신 묶은 화첩이다. 총 19점의 초상화와 아홉 개의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지에 그린 초본 초상화가 17점, 지본에 그린 유탄본이 1점, 비단에 그린 강세황의 초상 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화첩 속의 초상화들은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주로 감계용(국가가 공신에게 그려주는 것), 제의용, 기념용으로 제작되었으나, 이 화첩 속의 초상화들은 10대의 젊은 청년이 집에 찾아온 아버지의 지인들이나 손님들을 숨어서 그리거나 아니면 그들이 돌아간 후에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이다. 초본 형식이긴 하지만 인물의 특징을 잘 드러나며, 초상화 제작을 염두에 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정본 초상화를 위해 제작한 초본과는 성격이 달라 조선시대 초상화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초상화첩[七分傳神帖]-임순의 초상화』의 임순은 임희수의 사촌형으로 낮잠을 자다가 막 깨어나 책을 들고 창가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임희수는 정말이지 직관적 통찰력이 뛰어난 천재적인 화가였다. 시쳇말로 천재는 단명한다고 하는데 임희수 또한 18살 꽃 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추사(追寫)는 인물이 생존해 있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의 증언이나 기록에 의존하거나, 윤두서의 「심득경 초상(沈得經 肖像)」처럼 기억을 토대로 완성하는 그림이다.
「심득경 초상(沈得經 肖像)」은 동파관에 유복 차림을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으로 화면 상단에는 “定齋處士沈公眞(정재처사심공진)”이란 글자가 적혀 있다. 친구 심득경이 죽은 후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리니 심득경 가족들이 이를 보고 모두 울었다는 내용이 남태응(南泰膺)의 「청죽화사(靑竹畵史)」에 담겨있다.
옛 화가가 선왕의 어진을 그릴 때에는 가까운 종친과 대신들의 도움을 받고, 선비의 초상을 그릴 때에는 지인이나 친인척의 증언, 그리고 문집 등의 기록에 의거하여 그렸다. 추사는 화가가 보지 못하는 인물을 최대한 닮게 그려야 하기 때문에 추사는 세 가지 제작 방식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모사(模寫)는 기존의 초상화가 너무 낡아 못쓰게 되거나 영당에 초상화를 봉안하기 위해 원본을 보고 다시 옮겨 그리는 것을 말한다. 화가의 입장에서는 모사가 도사와 추사보다는 심리적인 부담이 덜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윤증 초상」은 초상화를 제작하고 이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초상화는 시작에서부터 완성하기까지 여러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초본은 훌륭한 정본을 완성하기 위해 특히 심혈을 기울여야하는 기초 작업이다. 「윤증 초상」은 다섯 점의 전신상 외에 여덟 점의 초본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두 점의 초본은 격자무늬를 그려 하나는 가로 8칸에 세로 10칸, 다른 하나는 가로 8칸에 세로 12칸으로 구획한 다음 인물을 그렸다. 이 격자문은 형상을 보고 비례에 맞추어 그리거나 축소·확대할 때 이용되던 것으로서 전자격(田字格) 또는 수방용(收放用) 구궁격법(九宮格法)이라고 한다. 이 초본은 경계가 위쪽 가로 선과 거의 나란하게 묘사되어 있어, 1788년에 이명기가 그린 윤증 신구정본과 일치한다.
「윤증 초상」의 초본에서 방안지 위에 면을 분할하여, 인물의 신체 부위를 오차 없이 그린 것처럼 조선시대의 초본 중에는 규칙적인 간격으로 반복되는 패턴 안에 신체 부위를 배열시킴으로써 인물의 비례와 균형을 해결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윤증(1629-1714)을 그린 반신상은 정면과 측면을 바라본 모습 두 가지가 있다. 윤증 측면반신상을 전신상과 비교해 보면 크기나 기법면에서 조선시대 화가 장경주가 그린 초상화와 유사해서 이 그림은 장경주가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윤증은 소론의 우두머리로 그의 제자들이 초상을 제작하였는데, 이 초상은 그 중 하나로 보인다
초본은 채색을 할 때 앞면에서 칠하는 전채와 뒷면에서 칠하는 배채가 합쳐져 생기는 효과를 미리 시험해 보기 위해 주로 유지 위에 그렸다.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일반적으로 전채와 배채(종이나 비단의 뒷면에 채색하는 기법)를 병행하였는데, 유지 초본에 그려진 채색을 바탕으로 정본(正本)에 채색을 하였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요하며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것은 그만큼 초상화 제작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인물화의 일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초상화라는 용어 자체는 근래에 성어된 용어이다.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인(先人)들의 문헌 기록이나 찬문을 훑어보면 초상화를 일컬어 진(眞)·영(影)·상(像)·초(肖)·진영(眞影)·영자(影子)·사진(寫眞)·전신(傳神)·영상(影像)·화상(畫像)·영정(影幀)·영첩자(影帖子) 등 다양하게 지칭하여 왔음을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초상화가 어느 시기에 처음 그려졌는가 하는 문제는 기록상으로 정확히 추단하기 어렵다. 또한 현재의 자료로서는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으로도 소급해 보기 어렵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초상화에 관련된 기록 및 작품이 나타난다.
백제의 아사태자(阿佐太子)가 그렸다는 일본 쇼토쿠태자상(聖德太子像)이나 『당서 唐書』에 보이는 ‘畫王國形(화왕국형)’의 기록 및 안악3호분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일련의 총주부부상(塚主夫婦像)이 그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초상화는 엄밀히 말한다면 유형적 인물화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특정한 개성을 구현하고자 한 작화(作畫)는 아니었다.
주 01)라고 하는, 화(畫)를 보다 본격적·전문적으로 관장하였던 기관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기관의 소속인들이 관장한 업무 중에 왕상(王像)이나 공신상 등 초상화의 제작이 있었는지는 현재 상고해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진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궁예조(弓裔條)에 보이는 ‘浮石寺新羅王像’이나 박사해(朴師海)의 『창암집 蒼巖集』에 보이는 ‘原州 敬順王影殿重修記’에 의하여 왕의 진영 제작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채서(典彩署) 라고 하는, 화(畫)를 보다 본격적·전문적으로 관장하였던 기관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기관의 소속인들이 관장한 업무 중에 왕상(王像)이나 공신상 등 초상화의 제작이 있었는지는 현재 상고해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진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궁예조(弓裔條)에 보이는 ‘浮石寺新羅王像’이나 박사해(朴師海)의 『창암집 蒼巖集』에 보이는 ‘原州 敬順王影殿重修記’에 의하여 왕의 진영 제작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 승상(僧像)의 제작 역시 활발하였음은 현재 쌍계사진감선사비명(雙磎寺眞鑑禪師碑銘)을 비롯한 각종 비문 및 『조당집 祖堂集』에 전래되는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진(眞)에 대한 시구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당시의 일반 사대부상으로는 당대 필명을 자랑하던 최치원(崔致遠)의 상이 비록 이모본이나마 도처에 봉안되어 오고 있다.
이처럼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초상화는 문헌 기록이나 현존 작품 양면에서 볼 때 모두 지극히 빈약하다. 이에 비하여 고려시대로 들어오면 왕 및 왕후의 진영의 영전(影殿) 봉안 기록이 누차 보여서 그 제작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개국(開國)·위사(衛社)·정난(靖難)·익대(翼戴)·척경(拓境)·탕구(蕩寇) 등 기타 여러 사유에 의하여 이른바 벽상공신(壁上功臣)·도형공신(圖形功臣)이라는 칭호 밑에 각종 공신도상이 그려졌다.
이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상의 제작도 활발하였음은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을 비롯한 각종 문집에 수록된 제기 및 찬문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초상화의 감상 기준은 상당하였다. 그래서 초상화는 사형(寫形)만이 아니라 사심(寫心), 즉 마음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전신(傳神)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회화사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작품에 이르면 현전본(現傳本)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단지 수 폭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초상화의 전반적인 양식적 변천이나 시대적 특징을 들추어내기는 불충분하다.
다만 고려 말기의 삼은(三隱) 영정이나 고흥군성산사(星山祠)에 전해 오는 이장경(李長庚)·이조년(李兆年)·이숭인(李崇仁) 등 명문 이씨가(李氏家)의 초상화에서 보듯이 상용 형식(像容形式)이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철상이나 이소상(泥塑像) 등 재료도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의 초상화는 숭불 사상의 영향으로 왕 및 왕비의 진영을 비롯하여 공신도상, 나아가서는 일반 사대부상들마저도 각종 사찰에 봉안되어 그 천복을 기구하여 왔다. 이러한 점은 조선 초기까지도 뿌리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어 주목된다.
초상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시되는 시기는 조선시대로, 조선시대는 국초부터 유교를 실천적 지도 이념으로 표방하였다. 그리고 보본 사상(報本思想)에 근거를 둔 가묘(家廟) 및 영당(影堂)의 설립을 국책적으로 권장하였다.
나아가 중기 이후부터는 각종 서원(書院) 및 일반 사우(祠宇)가 속속 건립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그러한 장소에 봉안될 초상화의 수요를 자극하였다. 따라서 활발한 초상화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를 담당하는 초상화사(肖像畫師)들의 기량 또한 높아갔고 이를 보는 관상자(觀賞者)의 감상안(鑑賞眼) 또한 고양되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초상화는 대상 인물의 신분에 따라 대략 여섯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어진, 즉 왕의 초상화이다. 어진 제작은 원래 왕가의 자손이 그 조상을 추모하기 위한 도상 작업으로서 이미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계속 행하여진 것이다. 하지만 점점 상징적 의미가 강조되어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진전 봉안을 통하여 국가적 결속을 다지고 조종(祖宗)이 영구히 뻗어나갈 것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가 컸다. 따라서 태조에서부터 고종·순종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도사 및 모사가 면면히 행하여져 왔다.
둘째는 공신상이다. 공신도형은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공신호(功臣號)가 책록되고 곧 입각도형(立閣圖形)의 명에 따라 행해졌다. 공신도형은 당해 공신 및 자손들에게는 치하와 함께 보상하고 여타 신민(臣民)들에게는 귀감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 군주 국가에서는 필수적인 도상 작업의 하나로 행하여져 왔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무려 28종에 달하는 공신 책록이 있었으며 거의 대부분 입각도형명이 뒤따랐다. 현재 전해 오는 조선시대의 공신상은 수십 폭에 달한다. 상용 형식면에서는 정장관복(正裝官服)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서 엄격한 테두리 내에서 작업하였다. 그러므로 경화된 느낌이 있다.
하지만 왕명에 의하여 당시 초상화로 이름 있는 화사가 그렸으므로 질적 수준 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수준을 견지하고 있다. 게다가 공신도상은 대개 제작 연대가 확실하기 때문에 초상화의 전체적인 양식 규명에 기준이 될 수 있다.
셋째는 이런 공신도상과 함께 작화 계기에 있어 개념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유형으로서 기로도상(耆老圖像)이 있다. 조선시대의 기로도상은 대부분이 화첩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유형은 조선시대의 형식적인 최고 관부라 할 기로소 입사(入社)를 기념한 도상이다.
기(耆)주 02)·노(老)주 03)라 함은 단순히 나이 많은 늙은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귀·덕을 함께 소유한 노인들의 입사이기 때문에 치하와 함께 명예를 기리는 의미에서 작화된 것이다. 그러나 작품으로서는 거의 졸업 앨범 같은 도화여서 각별한 개성이 구현된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라 함은 단순히 나이 많은 늙은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귀·덕을 함께 소유한 노인들의 입사이기 때문에 치하와 함께 명예를 기리는 의미에서 작화된 것이다. 그러나 작품으로서는 거의 졸업 앨범 같은 도화여서 각별한 개성이 구현된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 04)에 심의(深衣) 차림의 형식이다. 정장관복본은 공신도상류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네번째는 일반 사대부상이다. 이 유형의 작화 동인(作畫動因)은 다양하다. 하지만 주로 조선시대 사회 전체가 유교적 양반 사회로서 숭현 사상(崇賢思想)이 팽배하였던 만큼 일반 사우나 서원에 봉안한 작품들이다. 이 유형은 야복본(野服本)과 정장관복본(正裝官服本) 양자로 나누어진다. 야복본은 복건이나 동파관판(東坡冠判) 에 심의(深衣) 차림의 형식이다. 정장관복본은 공신도상류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일반사대부상은 제작 기간이나 분위기상 제약이 적었던 탓인지 그 중에는 가작(佳作)도 적지 않다. 그러나 화사의 자질면에서는 수준이 고르지 못하여 작품의 질적인 기복이 심하게 나타나 있다.
다섯째는 승상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 사상이 주도하였기에 승상 제작은 전대(前代)에 비하여 뒤져 있다. 그러나 각종 조사상(祖師像)은 계속 그려져 사찰 내의 조사당이나 국사당(國師堂)에 봉안되어 왔다. 승상은 지물(指物)·취세(取勢) 등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일관된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분향 예배로 인하여 화폭에 가채나 이모가 거듭되어 원본을 찾기가 어렵다.
여섯째는 여인상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후비의 진영 제작을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중기 이후로는 유교적 통념의 가일층 경화로 인한 탓인지 여인상의 제작이 귀해져서 고려시대의 지속적인 후비 진영 제작과 대조된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이들 여러 유형의 초상화는 서로간에 시대적 추이에 따라 공통된 양식상의 변모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 특징을 표현 기법 면에서 살펴보면 전기(1392∼1550년)·중기(1550∼1700년)·후기(1700∼1910년) 등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라 함은 태조 연간에서부터 중종 연간에 이르는 동안을 이른다. 이 시기에는 많은 어진을 비롯하여 공신상이 제작되어 왔다. 각종 사묘 및 영당에도 사대부 화상들을 봉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전해 오는 이 시기의 작품은 수 폭에 불과하며, 그것도 대부분이 이모본이다.
이 시기의 화법은 현재 장말손(張末孫)·오자치(吳自治)·손소창(孫昭唱) 등의 적개공신상(敵愾功臣像)이나 김시습상(金時習像)에서 보듯이 안면을 옅은 토황빛 살색을 주조로 시채한 연후에 안면의 구성 요소, 즉 이목구비를 발췌하듯 안색보다 조금 짙은 살빛 구륵세선(鉤勒細線)으로 그려 나가는 방법이다. 따라서 전기 화법의 주도적 기능은 선(線)이었다. 옷주름 처리 역시 외곽 및 주름을 상징적인 몇 개의 선으로 요약하여 그어 나갔다. 화폭은 전체적으로 생신하고 간결한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중기는 중종 연간에서 숙종 연간에 이르는 시기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가장 다사다난한 시기로서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반정(反正)이 계속되는 불안한 시기였다. 이러한 정세는 수많은 공신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걸출한 유학자들이 나타나 난세에 절실히 요구되는 청절과 신념을 표방하였다.
중기의 어진은 전해 오는 것이 없다. 그러나 공신도상의 경우 채연(彩筵)을 깔고 좌안7분면의 자세로 앉아 있는 전형적인 상용 형식이 대두된다. 또한 일반 사대부상 역시 만만치 않아서 심의에 복건이나 동파관 차림의 유학자 풍모를 과시하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주 05)를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다. 이것은 동양 전래의 오악 사고(五岳思考)에 기조를 두고 있어 주목된다. 오악이란 안모(顔貌)의 골상(骨相) 중 높은 부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 시기의 화법은 이항복상(李恒福像)·이덕형상(李德馨像)에서 보듯이 안면은 옅은 담홍색의 살빛을 주조로 하고 전기의 선 위주의 화법을 이어 나가면서 그 위에 새로운 표현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즉, 안면이 지닌 고심세(高深勢) 를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다. 이것은 동양 전래의 오악 사고(五岳思考)에 기조를 두고 있어 주목된다. 오악이란 안모(顔貌)의 골상(骨相) 중 높은 부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중기 초상화에서는 이러한 오악의 중심 부위, 즉 골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액골(額骨)의 윗부분, 관골 부위(顴骨部位) 그리고 하부골(下部骨)에 붉은 기운을 약간 삽입함으로써 안모의 높낮이를 지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중기 초상화에는 옷주름 처리에서는 선염기(渲染氣)가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아직도 선이 주도적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후기는 숙종조 후반에서 조선 말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어진 제작과 함께 숭현 사상의 팽배로 인하여 일반 사대부상의 제작이 활발히 진행된다. 그래서 웬만한 품계의 고관이면 초상화 한두 폭쯤은 남기고 있다. 이에 반하여 비록 당쟁은 치열하였으나 전란이 없는 조정의 표면적인 평온으로 공신도상은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후기에 제작된 초상화를 보면 가히 조선시대의 초상화법을 양분한다고 생각될 만한 새로운 화법이 구사되고 있다. 그것이 이른바 운염법(暈染法)의 사용이다. 운염법이란 중국의 명나라 말 증경(曾鯨)이라는 화가에 의하여 창시된 화법으로서 우리 나라에 유입된 것이 어느 시기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략 18세기 초엽에는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면 이미 상당한 도식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 화법은 초기 수용을 보여 주는 약포영정(藥圃影幀) 남구만상(南九萬像, 보물 제487호)에서 보듯이 안면을 하나의 커다란 마당으로 보고 안면의 움푹한 부분에 붓질을 거듭함으로써 어두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도드라진 부분은 붓질이 덜 가게 함으로써 밝은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안면의 주조색은 초중기에 비하여 짙은 갈색계가 되고 역시 안면의 고심세가 나타나게 된다.
이 후기의 화법은 중기 화법이 높은 부위에 밝은 홍기(紅氣)를 준 것과는 반대로 어두운 부분에다 짙은 적갈색 기운을 주어 움푹한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 배후에 있는 기본적 사고, 즉 안면의 고심세 표현의 시도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후기 화법 또한 동양 전래의 골상법(骨相法)에 의거하고 있으니 안면의 움푹한 부분이란 골과 골의 연접 부위를 말한다.
후기 초상화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골 자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 위에 피부의 육리문(肉理文) 자체에 대한 관심이 가하여져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피부에는 보편적 결이 있는데 후기 화법에서는 이 결의 방향을 따라 붓질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 결국, 후기 초상화법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사고란 곧 인간의 보편적 안면 구조 및 육리문에 대한 해독(解讀) 위에서 개별적인 인간의 모습을 성형화(成形化)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표현 기법상의 특징은 때로는 도식화되고 때로는 간화(簡化) 내지 심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 말기까지 그 기본적 사고, 즉 골상을 덮고 있는 피부의 육리문 및 그 밑의 내적 뼈대를 화폭에 전사(傳寫)하고자 하는 노력은 줄곧 도상법(圖像法)의 근간이 되고 있다.
고래로 초상화는 터럭 한 올이라도 닮지 않으면 곧 타인이라는 취지하에 대상 인물과 가장 흡사하게 그리기 위하여 초상화사들은 화력(畫力)을 기울였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경우에도 사형(寫形)을 넘어 사심(寫心)까지 이루어야 한다는 엄격한 감식안이 작용하여 왔다. 그리하여 어진에서도 칠분모(七分貌)면 족하다 하였으니 초상화의 예술적 가치면에서의 성취도란 자못 수준이 높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수차의 전란으로 많은 수의 초상화가 산일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각도, 각지의 서원·사우 및 영당에는 후손 및 유림에 의하여 선조 및 명현에 대한 추숭의 염(念)으로서 봉안, 향사되어 오고 있다.
“조선 초상화는 세밀하고 사실적…75%에 피부병 흔적 표현”
피부과 의사 이성낙 박사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출간
윤두서 자화상.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 초상화는 흔히 신체는 물론 정신까지 표현한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 이론이 구현된 그림으로 평가된다.
과거에 그려진 초상화는 대상이 대개 왕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미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인물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피부과 전문의이자 대학교수로 일하다 명지대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성낙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는 신간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에서 조선 초상화가 실제로 매우 사실적이고 정교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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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조선 초상화 519점을 방동식 연세대 교수, 이은소 아주대 교수와 함께 분석해 노인성 흑색점, 천연두 흉터, 흑색 황달 등 20가지 피부병 흔적을 찾아냈다.
그는 보존 상태가 나빠 진단이 불가능한 회화를 제외하고 358점을 다시 조사해 전체의 74.9%인 268점에서 피부병변을 확인했다. 즉 그림 속 주인공의 피부가 깨끗한 초상화는 4점 중 1점에 불과했다.
태조 어진.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예컨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어진은 현재 1872년에 모사한 작품이 남아 있는데, 용안의 오른쪽 눈썹 위에 작은 혹이 남아 있다.
저자는 “임금과 감독관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일”이라며 “태조 어진의 진본이 14세기 말에 그려졌을 것을 고려하면 이때부터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라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 원칙이 확립됐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코가 부풀어 오른 홍진(1541∼1616) 초상, 왼쪽 이마에 흉터가 있는 이시방(1594∼1660) 초상, 피부가 까맣고 천연두 자국이 선명한 오명항(1673∼1728) 초상,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백반증을 앓은 송창명(1689∼1769) 초상 등 다양한 그림을 소개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인 중국과 일본에서는 초상화에 피부병 흔적이 남아 있는 예가 드물었다.
중국의 명대 초상화에는 피부병 흔적이 더러 표현됐으나, 천연두 흉터와 흑색 황달 같은 심한 피부병은 제한적으로 그려졌다. 또 일본에서는 도식적인 초상화가 발달해 피부가 하얗게 채색된 작품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조선 초상화의 세밀함을 파악하기 위해 국보로 지정된 1710년작 윤두서(1668∼1715) 자화상과 1500년에 제작된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자화상을 비교했다.
그는 “입 주변 세 곳에서 2㎠당 털의 개수를 세어 윤두서 자화상은 25∼28개, 뒤러 자화상은 12∼17개라는 결과를 얻었다”라며 조선 초상화의 세밀함을 강조한다.
이어 “이렇게 정확한 초상화의 바탕에는 선비정신이 있다”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담백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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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초상화 ①
초상화(肖像畵)의 개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사회적 가치를 만든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보관해 후대로 연결하는 그림의 형식’
초상화의 대상은 동, 서양이 별반 다르지 않다.
대부분 왕이나 귀족, 공을 세운 장군, 혁명가, 사상가 따위로 사회적 역할이 큰 사람이다.
초상화는 당대 철학에 따른 사회적 가치가 투영되어 있다.
전쟁의 시대에는 장군이나 전쟁영웅의 초상화가 그려진다.
종교의 나라에서는 선지자나 종교지도자의 초상이, 자본주의에서는 부자의 초상화를 그린다.
공동체가 발전한 곳에서는 공공성을 가진 사람의 초상을 그리고, 개인주의가 발전하면 아무나 초상화를 그린다.
초상화를 분석하여 시대의 현상과 흐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엄격히 통제되었다.
법률이 아니라 성리학이라는 철학적 관점에 따른 문화적 제약이었다.
초상화에 문화적 제약을 가한 것은 사회적 영향력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자체로 주술성과 숭배성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사회적 활동의 정점에 있는 사람의 얼굴과 결합하면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
초상화 속의 사람을 숭배하거나 신격화할 수 있기에 늘 경계했다.
태조 이성계 초상/1872년 제작.도화서에 보관하고 있는 화본(畫本)을 바탕으로 새롭게 제작한 그림이다. 얼굴, 의복의 선묘와 채색이 간결하다. 태조 이성계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는 오른쪽 상단의 글자와 왕실의 보관이다. 조선 중기까지 전형적인 초상화 방식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왕의 초상화(어진)은 국가나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공적인 사업으로 그려졌다.
어진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와 화원이 결합하여 공식적으로 제작하였다.
왕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화원이 아니라 명망 있는 학자에게 감독을 맡긴 것은 지극히 의도적이다.
감독은 그림에 조예가 있으면서 성리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화원의 실력을 믿지 못하거나 간섭할 목적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겨야 하는 철학적 내용을 채워주기 위함이다.
아무튼 이렇게 그려진 어진은 보관했다가 왕이 죽으면 종묘에 두었다.
당연히 왕의 초상화는 숭배나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왕의 초상을 국가행사에 동원하거나 백성들에게 보이는 일은 없었다.
공신의 초상화는 그야말로 정치, 문화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룬 관료나 선비들을 그린다.
공신 초상화는 사당에 두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다.
열녀나 의녀의 초상화도 마찬가지이다.
공신 초상화나 의녀 초상화를 받은 가문은 사회적 평판을 높였다.
철종 어진/도화서/비단에 채색/202*93/1861년 도사 조선/국립고궁박물관.한국전쟁을 피해 부산에 보관하던 어진들은 알 수 없는 화재에 의해 모두 불타 소실됐다.철종 어진은 왼쪽 부분의 1/3 정도가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왼쪽 상단에 “予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여삼십일세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이라고 적혀 있어 이 어진이 철종 12년(1861년)에 도사(圖寫)된 것임을 알 수 있다.규장각에서 펴낸 『어진도사사실』(御眞圖寫事實)에 의하면, 이한철(李漢喆)과 조중묵(趙重黙)이 주관화사를 맡았고, 김하종(金夏鍾), 박기준(朴基駿), 이형록(李亨祿), 백영배(白英培), 백은배(白殷培), 유숙(劉淑) 등이 도왔다고 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조선시대에는 초상화보다 성명(姓名)문화가 훨씬 발전했다.
한 사람에게 아명(兒名), 본명, 자(字), 호(號), 관명 따위처럼 다양한 이름을 지어 불렀고, 제사를 지낼 때도 초상화가 아니라 이름이 새겨진 위패를 놓았다.
초상화는 엄격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그리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형식을 갖추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작품의 격과 표현된 인물의 가치가 달라진다.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자세는 몇 가지로 고정되어 있고 표현기법도 일정한 형식을 따른다.
형식이 없거나 전통화법을 따르지 않는 초상화는 그냥 인물화가 된다.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미학적 이론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전신(傳神, Transmitting the spirit)이다.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준말로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전통적 초상화론이다.
이는 외형 묘사보다 인격과 내면세계의 표현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이론적 바탕이 된다.
또 하나는 일호일발(一毫一髮), ‘터럭 하나라도 또 같아야 한다’는 사실성이다.
얼굴의 잡티, 눈썹, 수염의 터럭 하나까지도 꼼꼼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조선후기의 초상화론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떠올리면 쉽다.
미술은 철학을 반영한다.
따라서 철학의 바탕을 두지 않는 미술적 논쟁은 불가능하다.
전신사조와 일호일발은 화론이지만 그 내면에는 철학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기논쟁(理氣論爭), 호락논쟁(湖洛論爭)처럼 인간의 본성과 감정, 내면과 드러남, 내용과 형식, 심성과 물성 따위에 대한 철학 문제가 투영되어 있다.
서직수 초상/이명기. 김홍도/비단에 채색/148.8*72/1796/조선/보물 제 1487호/국립중앙박물관.그림 상단에 있는 자찬문 내용이다.‘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렸다. 두 사람은 그림으로 이름난 이들이건만 한 조각 정신은 그려내지 못하였구나. 아깝다! 내 어찌 임하에서 도를 닦지 않고 명산잡기에 심력을 낭비하였던가! 그 평생을 대강 논의해볼 때 속되지 않았음만은 귀하다고 하겠다.병진년 하일 십우헌 예순 두 살 늙은이가 자신을 평하다.’ [자료사진 – 심규섭]
내면을 담기 위해 외형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초상화 자체가 허술해진다.
또한 인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다.
이를 초상화라는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표현하려면 반드시 구체적 형상이 있어야 한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와 이명기가 공동창작한 <서직수 초상>을 두고 서직수 본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최고의 기량을 가진 화가들이라도 내면과 인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말이고, 조금 다르게 말하면 그림으로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전신사조를 따르는 사람들은 초상화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림 속의 인물은 실제와 비슷하면 된다. 나머지는 그림 속에 글을 넣거나 공신첩, 책을 묶어 보완했다.
이를테면, 태조 이성계의 초상이 실제 이성계와 닮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종묘와 같은 왕실기관에 보존하고 뜻을 기리면 이성계의 초상화가 되는 것이다.
실제 이런 방식으로 많은 의녀나 공신들의 초상이 그려졌다.
계월향 초상/작자 미상/비단에 채색/105*70/1815년 조선/국립민속박물관.
지방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는 의녀 초상이다. 임진왜란 때 살았던 계월향의 초상을 19세기 초반에 그렸다. 당연히 얼굴과 모습은 상상의 산물이다. 계월향의 행적을 그림에 써 넣었다. 왼손으로 잡고 있는 것은 김경문 장군의 옷소매를 표현한 것이다. 얼굴을 보면 눈썹이 이상하다. 잘못 그린 것인지, 신격화하려는 무교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자료사진 – 심규섭]
일호일발(一毫一髮)론에 따른 초상화는 꼼꼼한 묘사, 유려한 채색을 통해 강력한 대중성과 숭배성을 이끌어낸다.
사람은 인격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난다고 여긴다.
이를 깊게 관찰하여 세밀한 필치로 표현한다. 부족한 부분은 의복이나 책이나 칼, 장신구 같은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장치를 추가해 보완한다.
하지만 형태를 자세히 묘사하고 실재감이 들도록 채색하면, 인물의 인격보다는 시각적 화려함에 끌리기 마련이다.
흔히 참새를 사실적으로 그리면, “와, 정말 사진과 똑같아요. 이걸 어떻게 그렸어요?”라는 반응을 보이고, 정작 참새의 담긴 의미에는 관심이 없다.
또한 풍류를 상징하는 거문고를 꼼꼼한 묘사와 유려한 채색으로 그리면, 풍류보다는 거문고의 종류와 가격에 관심이 돌려질 가능성이 있다.
더욱 큰 문제는, 금박이 들어간 화려한 옷, 고급 장신구 따위의 표현으로 나쁜 놈도 훌륭한 인격자로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흥선대원군 초상의 일부분이다. 이하응의 초상은 화본을 바탕으로 여러 점 그려졌다. 이 초상은 장식상에 여러 기물을 그렸다. 그림 속의 기물은 인물의 사회적 위치, 사상, 취향 따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아무튼 이 둘은 인격과 내면의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면에서는 똑같다.
하지만 인격을 드러내는 방법(묘사의 정도나 채색법)에는 차이를 드러낸다.
문제는 어느 정도로 묘사하고 채색해야 하는 지를 규범으로 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서양과 달리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해 논쟁이 많은 것은 성리학 때문이다.
성리학은 ‘사회적 인간에 대한 학문’으로 사람이 주인공이다.
따라서 사람을 그리는 초상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천연두부터 털 한 올까지 섬세함 속에 인간의 정신을 그리다
유교를 근본으로 한 조선, 초상화의 전성시대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걸작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에서부터 공신상(功臣像), 사대부상, 기로도상(耆老圖像: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이 형식적인 최고 관부라 할 기로소에 입사한 것을 기념한 도상), 여인상, 고승(高僧)의 진영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어진일 경우 군복을 입은 군복본, 면류관에 구장복을 입은 면복본, 복건에 학창의를 입은 복건본, 갓에 도포를 입은 입제본 등 다양한 형식이 그려졌다. 공신상과 사대부상은 관복조복본과 유복본 등이 좌상이나 입상의 형식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초상화가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조선왕조가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삼아 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사당과 영당, 서원에 모실 초상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초상화는 단순히 추모하는 대상의 이미지라는 차원을 넘어 조상이나 스승 그 자체였다. 제사의 참석자들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때 조금이라도 닮지 않으면 제사 지내는 대상이 딴사람이므로 온편(穩便)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실제 인물과 똑같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원칙은 중국의 정이(程頤,1033~1107)가 초상화를 논하면서 “터럭 하나라도 흡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毛一髮不相似 便非其人)”라고 했던 가르침을 초상화가들이 그대로 적용하면서 실물과 아주 비슷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초상화가 중요했던 만큼 초상화를 잘 그리는 화가의 명성은 높았고 특히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어진화사는 모든 화가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영광의 자리였다.
인물의 병변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낸 초상
대상을 거짓 없이 그려야 한다는 원칙은 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어진은 개국시조답게 왕실의 정통성을 보여줄 수 있도록 서울의 문소전을 비롯하여 경주,개성, 평양, 전주, 영흥 등 여섯 곳에 진전을 두고 어진을 봉안하였다. 현재는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1872년의 이모본(移模本) <태조어진>(그림1)만이 전해질 뿐이다. 용상에 앉아 있는 얼굴은 근엄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이 군주로서의 위엄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렇게 근엄한 왕의 어진을 그리면서 그의 이마에 난 반점까지도 빼놓지 않고 그려 넣었다. 즉 오른쪽 눈썹 위 이마에 지름 0.7~0.8cm의 비정상적인 피부병변인 작은 혹을 표현했다.(이하 피부질환에 대한 내용은 이성낙,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변에 대한 연 구> 참조). 왕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예외 없이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다는 원칙을 적용한 사례이다.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야할 어진이 이 정도로 사실적인데 사대부나 공신의 초상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사실은 <오명항초상>(그림2)과 <신임초상>(그림3)의 세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여 분무공신에 봉해진 오명항(吳命恒, 1673~1729)의 초상화를 보면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두창(痘瘡)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얼굴색이 정상인보다 훨씬 더 어두운데 이것은 간암 말기 증상인 흑달(黑疸)로 추정된다. 공조판서였던 신임(申銋, 1639~1725) 초상에는 얼굴 곳곳에 검버섯이 눈에 띄고 눈자위가 붉게 충혈되어 있다. 허리띠에는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들만 할 수 있는 붉은색 허리띠를 둘렀는데 이렇게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을 그리면서 굳이 얼굴의 약점일 수 있는 검버섯까지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현재 우리가 사진을 찍으면 얼굴의 잡티나 흉터를 포토샵으로 깨끗이 보정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 실명(失明)과 사시(斜視), 크고 작은 흉터와 노인성 흑자(黑子), 천연두 자국은 물론 다모증(多毛症)과 무모증(無毛症), 흑색황달(黑色黃疸)이나 피부홍반 루푸스 등 희귀난치 피부병에 속하는 질환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공신상이나 기로도상은 주로 고위관직에 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린 초상화이다. 그들의 초상화에서 이런 ‘외모 장애’라고 할 수 있는 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외모에 대해 편견을 두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높은 지위에 오른 남성들의 전유물
조선시대 초상화는 전신사조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시대적으로 그 변화과정을 읽을 수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태조어진>이나 <윤두서의 자화상>처럼 정면관을 그린 초상화도 있으나 대부분의 공신도상은 좌안(左顔)이나 우안(右顔)으로 그려졌다. 조선초기의 <신숙주초상>(그림5)은 녹포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으로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슴은 거의 팔각형처럼 넓고 얼굴은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으로 사모가 높고 양쪽 뿔이 좁고 길다. 단령은 목에 바짝 붙을 정도로 올라가 있고 붉은색 안감이 드러난 옆트임은 각지게 표현되어 있다. 족좌대에 올린 발은 11자처럼 가지런하며 의자에는 방석을 묶은 끈이 보인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오명항초상>(그림6)은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공수자세를 취한 전신교의좌상이라는 점에서 <신숙주초상>과 공통된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사모는 매우 높고 양쪽 뿔이 넓고 짧으며 단령은 아래로 내려온 점에서 조선 후기의 특징이 드러난다.
조선시대에는 뛰어난 초상화가 많이 제작되었지만 여인의 초상화는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강세황이 그린 <복천오부인86세초상>과 채용신이 그린 여인초상화 등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특별한 사례에 불과하다. 왕후나 공주, 사대부가의 여인상들은 아예 그려지지 않았다. 남녀유별이 각별했던 시대에 단지 초상화를 그린다는 명목으로 지체 높은 여인의 얼굴을 감히 외간남자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인의 초상화는 그나마 몇 점이라도 남아 있는데 반해 어린아이의 초상화는 전무하다. 조선시대에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는 불효자라고 했다. 그런 불효자의 초상화를 사당에 올려놓고 향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높은 지위에 오른 남자들만으로 국한된다. 화폭에는 1인만 그린 것이 원칙이었고 배경은 거의 생략되며 분위기는 엄숙하고 경건하다. 비록 조선시대 초상화가 형식과 대상이 매우 국한되어 있지만 인물의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그려낼 수 있었던 점은 괄목할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글‧조정육(미술평론가)
조선시대 초상화, 피부질환까지 또렷이
피부과 의사 이성낙 박사 논문
519점 분석 결과 20여가지 확인
정밀화풍 추구 탓…중·일엔 없어
조선시대 초상화 500여점을 조사한 결과 대상 인물 가운데 14.06%가 천연두를 앓은 것으로 조사됐다. 조선시대에 천연두가 창궐한 사실이 문헌에 나오기는 하지만 초상화를 통해 그 증거를 찾아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피부과 의사인 이성낙 박사는 최근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낸 박사학위 논문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 연구’에서 조선시대의 초상화 519점을 분석한 결과 20여가지 피부병변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천연두 자국이 발견된 초상화는 모두 73점으로 14.06%를 차지해 검은 점인 멜라닌세포모반(21.77%), 검버섯인 노인성 흑자(16.37%)에 이어 세번째로 많다. 이런 사실은 조선시대에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한 사실이 초상화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영조 50년(1774년)에 만들어진 이 주목된다. 여기에는 당시 무과 특별승진시험에 합격한 18명의 초상화가 합철돼 있어 일종의 표본집단 구실을 하는데, 이 가운데 김상옥, 유진하, 전광훈 3명, 16.67%가 천연두 병변을 보인다.
이는 조선시대 평균 14.06%보다 2.61%포인트가 높은 수치다. 천연두는 고열과 발진을 동반하는 전염병으로 치사율이 95%에 이르며 병에 걸렸다가 살아남더라도 얼굴이 얽어 ‘흉측한’ 인상을 준다. 한국에서는 1879년에 예방백신을 놓기 시작해 현재는 공식적으로 박멸된 것으로 본다.
천연두에 관한 첫 자료는 “선덕왕 6년(785년)에 왕이 갑자기 진이 돋는 병에 걸려서 13일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다. 중국에서는 317년에 천연두 기록이 처음 나오는데, 4세기께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는 50여차례 천연두가 언급돼 있을 만큼 조선시대에도 천연두가 흔하고 무서운 질병으로 인식됐다.
천연두 반흔을 가진 초상화의 대상자들은 ‘외모’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초상화로 그려질 정도라면 정3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이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은 오명항(1673~1728). 그는 얼굴 전면이 천연두 자국으로 뒤덮여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외모 장애자’로 취급될 정도다. 하지만 그는 최종 벼슬이 우의정일 정도로 출세했다. 이성낙 박사는 천연두 자국이 당시에는 흠이 되지 않았다면서 이는 당시 선비사회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밝혔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남은 사람 중에는 김정희, 이서구, 김한철, 김육, 서유구 등 유명인사들도 포함돼 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 중국, 일본 3국에서 천연두가 유행했는데도, 조선의 초상화에서만 천연두 자국이 발견된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도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얽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공식 초상화에는 천연두 자국이 없다. 지은이는 간경변을 앓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화 얼굴이 희게 그려진 것으로 미루어 일본도 천연두 자국 등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았다고 본다. 초상화 그리는 원칙이 달랐다는 얘기다.
지은이는 “조선 초상화를 분석한 결과 얼굴에서 병변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하게 그려졌다”며 “이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의 초상화는 한 가닥의 털,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된다는 정자의 초상화론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종업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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