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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임신과 출산
* 조선 시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출산!!
그 당시에는 아이를 가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조선 시대 임신과 출산에 관한 이야기들을 정리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듣는 교과서’에서 제공, 납품된 콘텐츠를 일부 사용하여 제작하였습니다.
*배경음 출처
Track : 귀여운 BGM 모음
Music by 브금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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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 여성의 출산율 | 나라경제

그것은 바로 출산과 영유아 사망에 대한 정보다. 조선의 합계출산율 6.9명, 출산이나 출산후유증으로 사망. 여느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의 전근대 인구에 대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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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iec.kdi.re.kr

Date Published: 1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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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탄생을 이야기하다 조선 왕실의 출산 풍속 – 문화재청

출산에 임박해서 주의할 내용들을 큼직한 궁서로 반듯하게 써 놓아 궁중의 산모들은 이를 보고 또 보면서 대비하였다. 도대체 조선왕실에서는 어떤 과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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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a.go.kr

Date Published: 9/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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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출산에 대한 인식과 실제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A Study on the Thought and Historical Fact about Birth in Joseon Dynasty – pregnancy;birth;abortion;contraception;marri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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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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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진화] 위험한 출산, 더 위험한 믿음 – 동아사이언스

경북대 박희진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 시대 양반집 여성의 합계출산율은 6.9명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 중국이나 일본의 합계출산율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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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ongascience.com

Date Published: 10/29/2021

View: 7126

조선왕실 여인들은 출산직전까지 걸어다녔다 – 차병원

최근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의 출산지침서 ‘림산예지법(臨散豫智法)’ 원본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사극을 보면 왕비나 후궁들이 출산을 위해 움직임을 자제하고 앉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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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amc.co.kr

Date Published: 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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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출산 보조제’가 있었다? – 베이비뉴스

아홉 번째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동의보감에 기록된 ‘조선시대 출산 보조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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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babynews.com

Date Published: 4/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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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세종, 관노비에 출산휴가… 아내는 130일 …

조선왕조실록 1426년 기록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경외공처(京外公處)의 비자(婢子·여종)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휴가를 주고, 이를 규정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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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teacher.chosun.com

Date Published: 5/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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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알아 두면 쓸모 있는 임신·출산 지식,『언해태산집요』

닭에게 시험해 봐도 좋다고 큰소리를 치니 황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더욱 황당한 것은 이 이야기가 조선 시대의 명의 허준이 지은 의학서 『언해태산집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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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geul.go.kr

Date Published: 11/21/2022

View: 8253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조선시대 출산휴가 – YTN 사이언스

노비들도 마음껏 누렸던 출산휴가 어떤 제도였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노비가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특히 궁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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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science.ytn.co.kr

Date Published: 3/26/2022

View: 6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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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임신을 위한 노력(조선 시대 임신과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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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조선 시대 출산

  • Author: 용클래쓰 Y-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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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1.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a3OZ1uJdBVA

왕의 탄생을 이야기하다 조선 왕실의 출산 풍속

1693년의 출산

“복통이 임박해도 놀라지 말고 가능하면 너무 일찍 힘을 주지 말 것이다. 사람을 붙들고 천천히 걷도록 하되 만일 피곤할 때는 사람에 의지하여 서 있다가 또 걷기를 반복해야 한다. 너무 허리를 구부리거나 오래도록 앉아있거나 눕거나 잠을 자면 안 된다.”

조선 왕실에서 아이를 출산할 때 사용한 지침서인 <임산주의서> 가운데 일부이다. 출산에 임박해서 주의할 내용들을 큼직한 궁서로 반듯하게 써 놓아 궁중의 산모들은 이를 보고 또 보면서 대비하였다. 도대체 조선왕실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아이를 출산하였을까? 다음은 1693년(숙종 19)의 출산 풍경을 재구성해 본 내용이다.

택일과 산실청 관리의 선발

내의원 의원이 왕실의 임신 사실을 확인하면 곧바로 분만실 즉 산실청이 설치되었다. 산실청 준비에서 택일이 가장 우선이었다. 택일은 서운관 일관日官들이 담당하였는데, 택일이 끝나면 산실청 담당 관리와 의원 및 의녀들을 선발하였다.

1693년의 경우에도 9월 3일 산실청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고, 산실청 담당 의원으로 최성임·정유각·이홍장·김여기·유심·정두준 등 10여명의 내의들의 이름이 올랐다. 이 가운데 최성임과 정두준이 유능하다는 평을 받아 낙점을 받았다. 주방에서 일할 주방관과 서무를 담당할 서기관, 이밖에 출산 실무를 맡을 의녀 취엽과 인향이가 각각 선발되어 산실청 준비를 도왔다.

1693년 산실청은 창경궁 양화당 동쪽의 정일재精一齋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의관들의 숙직 처소가 마련되었다. 산실 배설에는 무수한 물품들이 사용되었는데, 먼저 방위를 적은 글자와 산실에 붙이는 부적들이다. 그리고 임산부가 손에 쥐고 힘을 줄 수 있도록 사슴가죽으로 만든 고삐와 이를 벽에 고정할 수 있도록 큰 못이 필요하였다. 이밖에 분만 시 바닥에 깔 자리를 위해 짚과 가마니, 양모로 짠 자리, 기름종이, 백마 가죽 등이 진상되었다. 특별한 물건도 있었는데 해마海馬와 석연자(石燕子: 오래된 연꽃 열매) 1쌍이 그것으로, 산모가 손에 쥐고 출산하면 수월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믿었던 부적들이다.

산실청의 부적들

산실의 부적을 설치하기 위해서 우선 범철관이 지남철을 꺼내 방위를 정한다. 다음 북쪽 벽 위에 먼저 산도産圖를 붙이고, 안전하고 빠른 출산을 위해 최생부催生符를 그 아래에 붙였다. 최생부 아래에는 차지법借地法을 붙였다. 차지법은 말 그대로 땅을 빌린다는 뜻이다. 이상은 모두 붉은 색 주사로 쓰여졌다. 부적 설치가 완료된 후에는 산실의 길방에 못(가막쇠)을 박고 누런 사슴 가죽으로 만든 고삐를 부착하였다. 부적과 고삐를 매단 후 이제 방바닥의 자리를 준비할 차례이다. 먼저 방 안에 짚을 펴 평평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빈 가마니를 펴고, 그 위에 초석草席을 펴고 다음에 양털로 짠 자리羊毛氈을 펼쳤다. 그 위에 기름 장판지油芚를 펴고 마지막에 백마 가죽을 깔았다. 기름먹인 종이는 출산시 오로 등 다양한 분비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백마 가죽은 귀가 온전히 달린 가죽을 준비했다. 백마는 양기의 상징이며 흰색 또한 상서로운 색이었으므로 출산의 안전과 신속함을 위해 흰 색의 말가죽을 깔고 그 위에서 출산하였다. 산실자리가 모두 준비되면 수의首醫가 방 밖으로 나가서 북향하고 무릎을 꿇은 후 차지법을 세 차례 독송한다.

약물 준비와 출산당일

분만 예정일이 속한 월 초에는 분만시 필요한 약물을 내의원에 요구하여 준비하였다. 1693년 10월에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불수산佛手散 5첩이 준비되었다. 이 약물은 출산 당일 먹기도 하고 혹은 출산 전후에 미리 먹는 경우도 많았다. 불수산은 일종의 유산 방지 및 출산 촉진을 위해 먹는 약물로 순산을 유도하는 약물이었다. 다음 나삼羅蔘을 곱게 가루내어 체에 거른 인삼 가루를 준비하였다. 원기가 쇠진하여 힘이 부칠 때 자주 달여 마심으로써 힘을 북돋웠다. 분만 후 영아兒를 위한 약물도 준비하였다. 먼저 황련감초탕과 밀주사蜜朱砂다. 밀주사는 꿀을 치대어 호도크기로 만들고 여기에 주사를 섞어 작은 사기그릇에 담은 것이다. 이상은 모두 아이가 태어난 후 입 안을 닦아내기 위한 약물들이었다. 태아가 입안의 오물을 삼키면 후일 두창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으므로 이를 잘 닦아 준 것이다.

1693년(숙종19년) 10월 6일 3경에 산모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대기하던 의녀 취엽과 인향 그리고 산실청에 선발된 의원들이 모두 모였다. 사경쯤에 의관 최성임·정두준 등은 ‘의녀들이 전하는 산모의 증세를 들어보니 밤새 계속하여 복통의 증후가 있었는데, 지금은 잠시 멈추었으니 불수산을 미리 몇 첩 달여 먹이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날이 밝기 전, 산모의 증세를 살피던 의녀들이 복통의 증세가 점점 잦아지고 흰 이슬이 비친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침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산실에는 남자 의관들이 출입할 수가 없었으므로 의녀가 분만 과정을 총괄하고 의관들은 밖에서 대기하면서 상황을 왕에게 전달하였다.

출산 후 의관들은 해당 산모의 건강상태, 식사 및 약물 진상 그리고 아기씨의 젖먹는 일과 대소변 상태를 보고하였다. 1693년 10월 6일 아침 분만이 끝나자 보고가 이어졌다. 의녀는 산모의 건강상태에 대해 보고하고 밥과 미역국을 진상하였다고 알려왔다. 산모는 건강상의 이상이 없었으며, 분만 후 밥과 미역국을 자주 먹었고, 아기씨도 편안하게 주무신 후 깨어나 눈동자를 굴리며 젖을 조금 먹었다. 이하 보고가 계속되었다. 분만 후 이틀 후에는 태아의 목욕 길시를 정하였다. 산모와 아기는 분만 후 3일째 목욕하는 것이 상례였다. 당시 날씨가 추워 감기에 걸릴까 염려되자, 수건으로 간단히 문지르는 방법으로 아기씨의 목욕을 진행하였다. 아기씨 목욕물은 내의원에서 준비하였다. 물은 복숭아 오얏, 복숭아, 매화뿌리를 다린 물에 호두껍질 1부를 함께 끓여 낸 후 돼지쓸개즙을 섞은 것이었다. 이상의 약재를 넣어 만든 약물에 어린 아기를 목욕시키면 아기의 피부가 튼튼해지고 종기 혹은 두창 등 백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왕으로서의 성품을 교육받다

태어난 왕실의 아기씨들은 부모 대신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왕실의 교육은 환경을 중시했는데, 왕자의 유모를 선발하는 데에 가장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어린 시절 가장 가까이에서 영향을 주는 인물이 유모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국왕이 탄생하면 덕성의 함양을 통해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하는 방법들을 고민했다. 규제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기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육이었다. 먼저 기록은 왕의 살아생전 모든 행동과 말을 철저하게 기록해둠으로써 후대에 엄정한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이다. 교육은 국왕은 신하를 스승으로 삼아 평생토록 교육을 받아야 하고, 냉정하게 현실 정치의 문제점까지 지적함으로써 국왕을 규제하는 방법을 말한다. 왕실에서는 왕자의 스승이나 동료를 선발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왕자에게 모범을 보일만한 인물을 선발함으로써 학문과 덕망을 겸비하기 위함이었다. 왕자는 이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 배우면서 좋은 인품과 덕성을 기를 수가 있었다. 국왕의 덕성은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의 출산과 보호 그리고 교육은 이렇듯 매우 세심하게 진행되었다. 아이를 낳을 산모에 대한 사랑, 그리고 태어날 아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야말로 왕실 문화의 원천이었으며 백성을 위하는 덕망 있는 왕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글·사진 | 김 호 경인교대교수

사진·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에 ’출산 보조제‘가 있었다?

[역사 속 육아 이야기⑨] 왕실 기록에도 나오는 순산 돕는 약 이야기

【베이비뉴스 이중삼 기자】

교과서에 있는 딱딱한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책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역사 속 숨겨진 육아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하는 카드뉴스 ‘역사 속 육아 이야기’ 시리즈. 아홉 번째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동의보감에 기록된 ‘조선시대 출산 보조제‘ 이야기입니다.

[알림] 시각장애인 웹접근성 보장을 위한 대체텍스트입니다.

1. 조선시대에 ’출산 보조제‘가 있었다?

2. 조선시대는 지금처럼 분만 유도제나 제왕절개 수술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원만한 출산을 위해 출산 보조제 역할을 한 ‘이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일까.

3. 조선시대 대표적인 출산 보조제는 ‘달생산(達生散)’과 ‘불수산(佛手散)’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출산 보조제의 내용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자세히 기록돼 있다.

4. 먼저 달생산은 동의보감에서 “해산달에 먹으면 쉽게 해산할 뿐 아니라 나중에 병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5. “산달에 20여 첩을 먹으면 쉽게 아이를 낳고 병이 없다. 대복피(술로 씻은 것) 2돈, 감초(구운 것) 1.5돈, 당귀·백출·백작약 각 1돈, 인삼·진피·자소엽·지각·사인(간 것) 각 5푼. 이 약들을 썰어 1첩으로 해 푸른 파 잎 5장을 넣고 물에 달여 먹는다.” -동의보감 잡병편 권10

6. 다음으로 불수산은 ‘부처님 손처럼 부드럽게 아기를 낳도록 도와준다’ 뜻을 가지고 있는 약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임신부가 산달에 이것을 쉽게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7. “임신부가 산달에 이것을 먹으면 태가 작아져 쉽게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저절로 난산의 우려가 없게 된다. 당귀 6돈, 천궁 4돈. 이 약들을 썰어 1첩으로 해 물에 달이되, 다 끓을 무렵에 술 약간을 넣고 다시 달여 따뜻할 때 먹는다. 여기에 익모초 3돈을 더하면 더욱 묘한 효과가 있다.” -동의보감 잡병편 권10-

8. 고종실록에서도 불수산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9. “태도 과연 순산하였고 음식도 잘 들고 있다. 이번에 불수산(佛手散)을 한 첩도 쓰지 않았는데 순산하였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대신과 제조들이 여러 날 입직(入直)한 터라 기쁜 마음이 다른 사람들보다 곱절 더하리라 생각된다.” -고종실록

10. 이외에도 달생산과 불수산은 승정원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달생산은 45회, 불수산은 13회나 언급됐는데, 역시나 두 약이 출산 보조제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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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세종, 관노비에 출산휴가… 아내는 130일, 남편은 30일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세종, 관노비에 출산휴가… 아내는 130일, 남편은 30일 조선시대 출산휴가

최근 통계청에서 올 들어 5월까지 태어난 아기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6%(1만1100명) 줄었다고 발표했어요. 이에 따라 올해 합계 출산율이 0.89~0.90명에 그칠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평균 (1.68명)을 크게 밑도는 수치입니다. 합계출산율은 여자 1명이 임신을 할 수 있는 기간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말해요.

정부는 출산휴가 기간을 늘리는 등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어요.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이런 출산 장려책을 내놓은 임금이 있었답니다.

◇백성이 많아야 나라가 부강

농업 중심 사회에서는 백성 숫자가 곧 국력이었어요. 사람이 많아야 농사도 짓고, 나라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최근 통계청에서 올 들어 5월까지 태어난 아기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6%(1만1100명) 줄었다고 발표했어요. 이에 따라 올해 합계 출산율이 0.89~0.90명에 그칠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평균 (1.68명)을 크게 밑도는 수치입니다. 합계출산율은 여자 1명이 임신을 할 수 있는 기간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말해요.정부는 출산휴가 기간을 늘리는 등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어요.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이런 출산 장려책을 내놓은 임금이 있었답니다.농업 중심 사회에서는 백성 숫자가 곧 국력이었어요. 사람이 많아야 농사도 짓고, 나라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 /그림=안병현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조선 통치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 정책을 ‘조선경국전’이라는 책으로 엮어 왕에게 바쳤죠. 여기서 정도전은 백성, 즉 인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니,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인 것이다. (중략) 과거 중국 주나라에서는 백성의 수를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은 절하면서 받았으니, 이것은 그 하늘을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정조 임금은 실제로 정도전이 말한대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전국의 인구수를 조사한 내용을 받을 때, 예를 갖춰 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를 ‘헌민수(獻民數·백성의 수를 바친다)’라고 합니다.

◇아이 낳은 여종에게 휴가 100일

조선왕조실록 1426년 기록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경외공처(京外公處)의 비자(婢子·여종)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휴가를 주고, 이를 규정으로 삼아라.” 즉 전국 관청에 소속된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출산휴가를 주라는 말이죠. 또 1430년 기록을 보면, 임금이 “옛적에 관가의 노비에 대하여 아이를 낳을 때는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 이후에 다시 일을 하도록 했는데, 아이 낳을 날이 다가와 일을 하다 지쳐 집에 가던 길에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출산 한 달 전부터 일을 쉬도록 법을 만들라”고 합니다. 아이를 낳기 한 달 전부터 쉬도록 하라는 거지요.

이런 정책을 펼친 임금님이 누구냐고요?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여염집 규수는 산달에 맞춰 형편껏 쉬면 되었겠지만 노비들은 그게 여의치 않았겠죠. 세종대왕은 이들도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쉴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친 겁니다.

◇관비의 남편에게도 30일 출산휴가를

세종대왕은 4년 뒤 더 놀랄 만한 출산 정책을 발표합니다. “여종은 출산일 앞으로 한 달, 뒤로 100일을 쉬도록 하였으나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않아 산모를 도울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남자 종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일하도록 하라.”

즉 출산을 한 관비(관가에 속한 여종)의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줘서 산모를 돕도록 한 거예요. 오늘날의 배우자 출산휴가와 비슷한 제도죠. 우리나라는 오는 10월부터 배우자가 아이를 낳으면 10일간 유급 휴가를 가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는데, 조선시대가 되레 기간이 길었습니다.

물론 세종대왕의 출산 장려책은 관가에 속한 여종, 즉 일부 하층민에게만 적용됐다는 한계가 있어요. 그렇지만 600년 전에 벌써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도움이 절실한 계층을 대상으로 과감한 출산 정책을 시행했다는 건 역시 놀랍죠. [‘셋 이상 쌍둥이’엔 쌀·콩 하사] 요즘은 ‘다둥이’라고 해서 아이를 여럿 낳으면 나라에서 현금, 세제 혜택 등을 줍니다. 조선시대에는 자녀가 많다고 나라가 지원을 해주지는 않았어요. 다만 ‘세 쌍둥이 이상’을 낳으면 도움을 줬습니다. 왕실의 재정 상태나 임금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셋 이상의 쌍둥이를 낳으면 아들 딸 구분 없이 쌀과 콩 10석을 임금이 하사했습니다. 세종 때 종 9품 관리가 녹봉으로 1년에 받는 쌀과 콩이 10석이었다고 하니 거의 1년치 양식을 내려준 셈입니다. ‘인조실록’에는 세 쌍둥이 가족에게 필요한 물건을 줬다는 기록도 있어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조선시대 출산휴가

여성 한명이 평생동안 낳을 수 있는 평균자녀수를 의미하는 수치 합계출산율.

지난해 우리나라에 합계출산율은 세계 217위로 저출산 문제는 심각한 수준인데요.

때문에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들이 매해 쏟아져 나오고 상황!

그중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은 아이를 낳는 부부에게 꼭 필요한 제도인데요

하지만 바쁜 현대사회에서 육아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갖기 힘든 것이 현실!

그런데 조선시대 궁궐에서도 출산휴가를 주었다고 하는데요.

노비들도 마음껏 누렸던 출산휴가 어떤 제도였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노비가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특히 궁궐이나 관아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관비들도 많았는데요

비록 노비였지만 이들은 필요하면 휴가를 얻을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 관비가 아이를 낳게 되면 고작 7일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던게 전부였는데요.

산모에게 7일의 휴가는 충분치 않았기에 세종은 이 휴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기로 합니다.

세종은 7일이었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는데요.

여기에 출산전 휴가 30일을 더해 무려 130일 가까운 출산휴가를 보장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관비의 남편에게도 한 달의 휴가를 주었는데요.

이정도면 오늘날에도 쉽게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조치가 아닐수 없습니다

특히 세종은, 남편에게 충분한 휴가를 주지 않는 것은 부부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노비의 출산까지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았던 성군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수많은 출산장려책들 속에서도 여전히 아이를 갖는 일이 부담스러운 현대사회.

출산을 그 어떤 일보다도 귀중하게 여겼던 선조들의 지혜를 다시금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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