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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만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병원과 의사.
그런데 의학과 의료시스템이 비교적 갖춰지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의사는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고
백성들은 또 어떻게 치료를 받았을까요?
오늘의 교양 만두는 ‘조선시대 의사와 환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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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l 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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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조선 시대 활인서 연구-연혁 및 상비처방을 중심으로』 l 박훈평 l KCI
『조선시대 지방 의생 제도에 대한 고찰』 l 박훈평 l KCI
『조선시대 의학교과서 연구』 l 박훈평 l K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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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醫官) – sillokwiki

조선시대 의료·의약 등에 관한 일을 전담하여 보았던 잡직 관원. … 전문 직종으로 꼽히는 의사들이지만, 조선시대가 그들에게 부여했던 사회적 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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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h.aks.ac.kr

Date Published: 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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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학사를 빛낸 명의名醫들 | 월간문화재사랑 상세 – 문화재청

조선시대 가장 널리 활용된 두창(천연두) 치료방인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은 박진희가 저술하였다. 일찍이 왕실의 두창 치료에 의약동참으로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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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a.go.kr

Date Published: 4/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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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미 (조선 의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윤지미(尹知微, 1569년 – ?)는 조선 중기, 후기의 의사, 의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자는 미상이고, 호도 미상이다. 1606년(선조 39년) 식년의과(式年醫科)에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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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0/5/2022

View: 1172

15-16세기 조선 의학 관료의 신분 변천

의사학 제27권 제3호(통권 제60호) 2018년 12월 … 므로 특정 시기 의학에는 그 시대의 요구가 반영되어 사회적 함의(含意)가 담. 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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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edhist.or.kr

Date Published: 9/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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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의원은 갑이었을까? – MEDI:GATE NEWS

의방유취에 나와있는 조선시대 의원(한의사)의 덕목은 또 있다. … 한편 일제시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오긍선 피부과 교수는 의사가 될 졸업자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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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medigatenews.com

Date Published: 2/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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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조선 시대 의사

  • Author: 교양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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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6.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TQiYHb1Y5c

sillok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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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의료·의약 등에 관한 일을 전담하여 보았던 잡직 관원.

개설

의관(醫官)은 국가의 의료 사업을 담당하였으며, 의료 관청에 따라 진료 받는 사람들의 신분이 각각 달랐다.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왕실의 진료나 약 제조를 담당했으며 때로 왕명에 따라 대신들의 의료에도 종사하였다. 전의감(典醫監)에서는 왕실 및 조정의 신하들의 의료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이나 병졸들의 의료도 담당했으며, 혜민서(惠民署)에서는 주로 일반 서민들의 의료 활동을 맡았다. 활인서(活人署)에서는 도성 안의 전염병 환자와 빈민 및 죄수들의 진료 활동에 종사하였다. 지방의 의료는 의학생도가 파견되어 맡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의학 교육은 중앙의 경우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에서, 그리고 지방의 경우 지방 관서에서 실시하였다. 전의감 50명, 혜민서 30명을 두었으며, 지방에서는 부에 16명, 대도호부와 목에 각 14명, 도호부에 12명, 군에 10명, 현에 8명씩 의학생도를 두었다. 의학 교육은 의학교수와 훈도가 담당하였다.

의관이 되는 길에는 두 갈래, 취재(取才)와 의과 시험이 있었다. 취재는 말 그대로 실무 능력을 시험하는 것으로, 취재에 합격하면 임시직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국가가 인정하는 의관이 되기 위해서는 자격시험이라 할 수 있는 의과에 합격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종6품 주부(主簿) 이상의 고위 의료 관직은 의과 합격자만 임명될 수 있었다.

의과는 양반들이 응시했던 문과와는 달리 대과·소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로서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에만 설행되었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씩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들어 있는 해에 시행되는 정기 시험이며, 증광시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실시되었던 부정기 시험을 말한다. 의과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단계만 있고 왕 앞에서 시험 치는 전시(殿試)는 없었다.

선발 인원은 초시에서 18명, 최종 시험인 복시에서 9명을 뽑았다. 그런데 법 규정대로 9명을 선발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19세기 이전까지는 대체로 정원에 미치지 못하게 뽑았다. 이는 의학의 특성상 정원대로 반드시 뽑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술이 우수한 자들을 뽑았기 때문이다.

의과에 합격하면 백패(白牌)를 수여한 뒤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계를 수여하였다. 이미 품계를 가진 자에게는 그 품계에서 1계를 더 올려 주고, 올린 품계가 응당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을 경우에는 1계를 또 올려 주었다. 참고로 양반들이 응시하던 문과의 경우 1등 합격자에게는 정7품직을 수여하였으며, 원래 관품을 가지고 있던 자에게는 4계를 더 올려 주었다.

의관들은 기본적으로 한품거관법(限品去官法)에 의해 관로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적인 승진이 보장되지 않았다. 법규상으로는 최고 정3품 당하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들은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상관에 오른 예도 존재한다.

실제로 의원들에게는 직능에 따라 당상관으로 승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주어졌다. 우선 의관은 왕의 최측근에서 보좌했기 때문에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왕이나 왕실 구성원의 병을 낫게 했을 경우 특별히 승진시켜 주는 예가 빈번하였던 것이다.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許浚)의 경우, 선조의 어의(御醫)로서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해졌으며(『선조실록』 37년 6월 25일), 1606년에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綠大夫)에 올랐다(『광해군일기』 7년 11월 13일).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예로부터 왕의 병을 고친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닌데 숭자중질(崇資重秩)이 이와 같이 심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허준의 가자(加資) 개정을 주장하였다. 의관들의 제도에 벗어나는 고품계화는 사실 빈번하게 조정의 논란을 불러왔다(『현종실록』 3년 10월 7일).

따라서 의관들의 실질적 관직은 참상관직(6품에서 종3품)에 집중되어 있었다. 의과 합격자의 약 70%는 참상관까지 승급했으며, 당상관직(정3품에서 정1품)으로 진출한 경우도 15% 가량 있었다. 그런데 그들 15%조차도 대부분 동반직이 아니라 서반직인 중추부(中樞府) 당상관직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중추부는 서반 정1품아문 문무당상관으로 맡은 직임이 없는 자를 우대하는 의미로 임명하는 예우 관서였다. 일종의 명예로 중추부 당상관직을 제수했으며, 그것도 단기적으로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의관에게는 동반 당상관직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의관들에게 급료가 지급되지 않는 명예직 품계에서는 당상관까지 승급하도록 허용한 반면, 관직이라는 실직(實職)에는 제한을 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관은 때로 지방의 수령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다른 역관, 음양관, 율관의 상급 기술관도 지방관으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의원이 제일 많았다. 그래서 『숙종실록』을 보면, 숙종 연간에는 경기도 수령 자리는 의관들이 으레 맡는 자리가 될 정도였다고 하였다(『숙종실록』 11년 7월 14일). 하지만 본인이 지방관으로 진출했다 하더라도, 그 자손들은 다시 기술직에 종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방관으로 진출했다고 해서 양반층으로 신분 상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손 대에서는 다시 기술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의관은 오늘날 대표적인 전문 직종으로 꼽히는 의사들이지만, 조선시대가 그들에게 부여했던 사회적 지위와 위상은 높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목숨을 다룬다는 직무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신분적으로는 중인층에 속하였다. 의학 전공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그들은 독특한 하나의 계층을 형성하였는데, 일정한 사회적인 차별이 그들 사이의 결속을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독자적인 하나의 계층으로서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러한 유대감은 19세기에 활발하게 편찬된 중인 족보, 특히 『의과팔세보(醫科八世譜)』, 『의팔세보(醫八世譜)』,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동류의식, 그들 사이의 혼인을 통한 신분적 유대의 강화, 그리고 의료직 등 기술직을 대물림하는 세전성(世傳性)이 의관들의 세계를 특징짓고 있다. 그들의 세전성은 “의원이 3대가 되지 않으면 그 약을 먹지 말라.”는 『조선왕조실록』의 정형화된 문구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손홍렬, 『한국 중세의 의료 제도 연구』, 수서원, 198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한국 근대 이행기 중인 연구』, 신서원, 1999.

이남희, 『조선 후기 잡과 중인 연구: 잡과 입격자와 그들의 가계 분석』, 이회문화사, 1999.

이남희, 「의사, 중인으로 살아가기」, 『조선 사회 이렇게 본다』, 지식산업사, 2009.

월간문화재사랑 상세 – 문화재청

조선의학은 크게 보아 중국의학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조선 고유의 의학 전통 속에서 나름대로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첫째, 세종의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선초부터 조선 의학은 중국과 다르다는 ‘동국東國’ 의식이 강했다. 조선 사람의 치료에는 동의東醫가 필요하다는 정신이다. 둘째, 조선 의학은 중국의 『내경』에서 천명되었듯이 예방과 양생을 중시하였다. 『내경』에는 “성인은 이미 발생한 병을 치료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병을 치유한다”고 하였다. 발병發病하기 전에 미리 조섭과 양생을 통해 예방하는 방법을 우선하였다. 양생은 단순히 신체의 단련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심신心身의 조화로운 수양을 강조하였다. 이미 15세기에 향약鄕藥 의서들을 집대성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출간은 이상과 같은 조선 의학의 독자적인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전순의全楯義가 저술한 『식료찬요食療纂要』와 같은 의서는 병든 후의 약치藥治보다는 미리 음식을 통해 조섭하는 식치食治를 강조하였다. 특히 조선 사람은 조선의 ‘식물食物’로 치료하자는 향약의 정신과 어울려 더욱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b]선진 의술로 인정받은 외과 중심의 침구 의학 [/b]16세기에 간행된 임언국의 종기 치료는 침구술과 밀접하게 결합하면서 발달해 온 조선 외과 의학의 전통이었다. 임언국의 치종 전통은 그 후 17세기 동아시아에 자랑할 만한 침구의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니, 바로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저술한 허임이 그 장본인이다. 허임의 『침구경험방』은 멀리 일본에까지 퍼져 오사카의 의원들 사이에 꽤나 인기 있는 의서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의 선진 의서들을 원했는데 『침구경험방』은 항상 그 목록에 올랐다. 허임은 조선 침구 의학의 진수로서 일본 의원들의 숭모崇慕를 받았던 것이다. [b]약물 의학의 집대성[/b]조선 의학사의 명의를 논하면서 17세기 초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한 허준을 빼놓을 수는 없다. 허준은 조선 성리학의 인간관 즉 마음의 수양을 강조하는 철학을 ‘몸’의 수련으로 확장하여 적용하였다. 허준은 ‘자연을 닮은 인간’을 강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선유교의 정치 이념과 도덕의 준수를 심신 수양의 기초로 삼았다. 양생의 철학과 실천 윤리를 하나로 통합해 제공한 셈이다. 이 점에서 그는 유의儒醫라고 불릴 만하다. 유의는 의원이지만 유학에 밝은 자이며, 유학자이지만 의학에 밝은 자를 말한다. 즉 성리학과 의학에 모두 해박한 경우이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통해 임언국과 허임으로 이어지는 외과 중심의 침구 의학 전통과는 다른 약물 의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동의보감』의 은 본초本草 지식의 총체로 당시까지 축적된 조선의 동식물과 광물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허준은 당시 서울, 경기 지역의 실학풍을 받아들여 경험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 결과 조선 본초학의 수준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신간新刊 의서 『동의보감』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는데 조선은 이를 번번히 거절하였다. 이에 일본은 『동의보감』 이라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만큼 은 『동의보감』의 핵심이었다. [b]효과 좋은 처방 선별, 경험방의 대두 [/b]17세기에는 수많은 의원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검증된 효과 좋은 처방들을 책으로 펴내고 있었다. 이른바 경험방의 시대였다. 두 차례 호란으로 부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은 비운의 학자 신만申曼은 자신이 수집한 다양한 처방들을 모아 『주촌신방舟村新方』이라는 경험방을 저술하였다. 시골의 백성들을 위해 향산鄕産의 약재만을 사용했다는 서문은 조선 초의 향약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주촌신방』에는 특별히 학질과 두창 치료에 좋은 처방들이 상당 수 기재되어 있다. 조선시대 가장 널리 활용된 두창(천연두) 치료방인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은 박진희가 저술하였다. 일찍이 왕실의 두창 치료에 의약동참으로 참가하는 등 세상에 의술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현종 임금이 직접 나서 『두창경험방』 간행을 독려할 정도였다. 두창 감염 시 주의할 음식과 함께 발열을 동반하는 감염 초기부터 시작하여 발진 단계, 부풀어 오르는 단계, 진물이 터지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에 발진이 수렴되어 꺼져 들어가는 단계로 구분한 처치법은 이후 조선 두창학痘瘡學의 표준이 되었다. 이밖에도 이석간李碩幹, 채득기蔡得己, 박렴朴濂, 허임許任과 같은 당대 명의들의 처방을 모은 『삼의일험방』, 『사의경험방』 등이 다수 간행되었다. [b]간편함과 실용성을 강조한 조선 의학의 확산[/b]17세기는 『동의보감』이라는 조선의학의 젖줄이 탄생하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방들이 축적되고 있었다. 이는 이후 조선후기 의학 발달의 튼실한 자양분이 되었다. 수많은 향의鄕醫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우리는 유이태라는 거창 출신의 의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유이태는 후일 허준의 스승으로 오해될 만한 수많은 일화를 남겼을 정도였다. 조선후기는 의학 지식과 의서의 보급으로 의원들이 늘어나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의술의 대중화가 가속화 되었던 시기였다. 동시에 양적으로 늘어난 의원들 간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소아과, 부인과, 두창과 등 일종의 전문화 양상도 나타나고 있었다. 18세기 조선 의학의 실용적인 면모는 강명길의 『제중신편濟衆新編』에 잘 나타난다. 전형적인 중인 집안 출신의 강명길은 의과 합격 후 내의원에 근무하면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조는 『동의보감』의 장점을 이어받으면서도 단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의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강명길은 『동의보감』의 번잡함을 덜어내는 한편 새로운 경험방을 보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제중신편』으로 『동의보감』의 실용화가 진전되자, 간편함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점점 가속화되었다. 치료의 이론적 근거는 간데없고 단지 처방과 약재를 나열하여 사전처럼 만든 간편 의서들이 속속 출간되었다. 『의방활투醫方活套』, 『의종손익醫宗損益』, 『방약합편方藥合編』 등이 그것으로, 황도연은 이들 책을 만든 대표적인 의원이었다.한편, 다산 정약용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진정한 의학자였다. 정약용은 미신에 가까운 의학론은 비판하고, 필요하다면 중국이나 서양의 선진 의학을 받아들였다. 당시까지 간행된 중국의 홍역 의서들을 모두 검토한 후 가장 좋은 치료법을 선택했다. 심지어 두창의 독을 인체에 심는 종두법도 시행하였다. 정약용의 『마과회통麻科會通』에는 당시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고개를 저었던 인두법이 소개되어 있다. 기왕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뛰어넘는 실학자 정약용이야말로 조선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진정한 조선의 명의였다. ▶글·사진_ 김 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사진_ 허준박물관

윤지미 (조선 의사)

윤지미(尹知微, 1569년 – ?)는 조선 중기, 후기의 의사, 의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자는 미상이고, 호도 미상이다. 1606년(선조 39년) 식년의과(式年醫科)에 2등(二等) 아원(亞元)으로 급제, 의서인출감교관(醫書印出監校官)이 되었으며, 이희헌 등과 함께 의서의 감교관으로 참여, 이후 의서 발행, 인쇄를 감독하였다.

내의원 재직 중, 왕명으로 허준이 동의보감 편찬을 할 때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의서들을 다시 재간행, 복원 혹은 유사 문헌을 정리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의서인출감교관이 되어 허준이 《벽역신방》, 《신찬벽온방 (新纂辟瘟方)》, 《찬도방론맥결집성 (纂圖方論脈訣集成)》, 《의림촬요 (醫林撮要)》 등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의서를 편찬, 정리할 때, 감교관으로 참여하였다. 서자였지만 첩이었던 어머니 억춘의 신분은 평민인 양첩이었으므로, 천민 신분은 아니었다.

증조할머니가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 당의 손녀라 그의 대에까지 선원록에 실렸고 생모의 신분, 생모 이름 및 배다른 누나들의 이름도 실명으로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생애 [ 편집 ]

출생과 가계 [ 편집 ]

1569년(선조 3)에 태어났는데 생일, 출생지에 대한 기록은 모두 미상이다. 고조부는 현감 증 의정부영의정 윤이손(尹李孫)이고, 증조부는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으로 의정부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영평군(鈴平君) 윤개(尹漑)이며, 할아버지는 생원으로 증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된 윤비(尹棐)이며, 아버지는 통정대부 윤담휴(尹覃休)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평민으로 양녀 억춘(億春)이며 성씨는 미상이다.

일설에는 그의 어머니는 병조판서를 지낸 대구김씨 김수달(金壽達)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성씨없는 양녀가 그의 생모로 나타난 선원록 기록과 달리 의과방목에는 대구김씨 김수달이 외조부로 나타난다.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윤승례(尹承禮)의 8대손으로, 조선 세종때에 경기도관찰사와 우참찬, 좌참찬을 지내고 좌익공신 2등에 추록된 공간공(恭簡公) 윤형(尹炯)은 그의 종6대조이며 윤형의 동생 윤희가 그의 6대조이다. 또한 8대조 윤승례의 아들이 정정공 윤번으로, 그의 종7대조 윤번이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의 친정아버지이다. 8대조 윤승례의 형제인 윤승순은 그의 종8대조인데, 종8대조 윤승순은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부마 윤사로, 성종비 정현왕후와 그 친정아버지 윤호, 윤탕로, 윤필상 등의 선조가 된다.

그의 증조모 전주이씨가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의 딸로,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 이당의 손녀였기 때문에 선원록 등에도 그의 이름이 실리게 되었다.

7대조 윤규(尹珪), 종6대조 윤형, 증조부 윤개, 아버지 윤담휴가 모두 문과 급제자였고, 친삼촌 윤담무 역시 문과 급제자였으며, 할머니 광주이씨의 친정아버지 이성언 역시 문과 급제자였다. 친할아버지 윤비는 생원시에 입격했다. 그의 친삼촌 윤담무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였고 사촌 윤지경은 충청도 관찰사와 예조참의를 역임했다. 아버지 윤담휴는 통례원통례를 지내고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서자였다.

관료 생활 [ 편집 ]

그의 어머니 억춘은 평민출신 양첩이었기에, 그는 서자였으나 신분상 천민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음서로 관직에 올라 내의원(內醫院)에서 근무하던 중 1606년(선조 39년) 식년의과(式年醫科)에 2등(二等) 아원(亞元)으로 급제, 의서인출감교관(醫書印出監校官)이 되어 통훈대부 행내의원 부봉사로 이희헌(李希憲) 등과 함께 의서의 감교관으로 의서 발행, 인쇄를 감독하였다. 1612년(광해군 4) 행내의원직장(內醫院直長), 행내의원부봉사, 부참군(副參軍), 직장 등을 거쳐 뒤에 내의원정(內醫院正)을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윤11월 중국 육조(六朝)시대의 고양생(高陽生)이 편한 의서 《찬도맥결 (纂圖脈訣)》의 내용을 허준이 왕명으로 수정발췌, 교정한 《찬도방론맥결집성 권1, 3 (纂圖方論脈訣集成 卷一, 三)》를 발간할 때, 통훈대부 행내의원직장으로 행내의원첨정 이희헌과 함께 감교관(監校官)이 되어 발행을 감독하였다.

1613년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의 중간본을 훈련도감 활자로 재간행할 때, 감교관으로 이희헌(李希憲)와 함께 인쇄, 재간행을 감독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허준이 왕명을 받고 다시 《신찬벽온방 (新纂辟瘟方)》을 편찬할 때 행내의원직장으로 감교관이 되어, 행내의원직장 이희헌과 함께 감교관으로 참여했다. 그해 12월 허준의 《벽역신방 (辟疫神方)》을 내의원(內醫院)에서 닥종이에 훈련도감 활자(訓鍊都監 活字)로 간행할 때 역시 행내의원부봉사로, 행내의원직장 이희헌과 함께 감교관으로 참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11월 행내의원 직장으로 있을 때 어의 허준(許浚)이 16년간 쓴 동의보감을 편찬, 발간할 때 이희헌 등과 함께 감교관(監校官)이 되어 동의보감 발행을 감독하였다.

생애 후반 [ 편집 ]

1617년(광해군 10)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 공빈 김씨를 왕비로 추존하기 위한 면복을 청하는 관복주청사를 명나라에 파견할 때, 질문의관이라는 임시직에 임명되어 광해군의 명으로 의관 최순립(崔順立), 안방정(安邦正) 등과 함께 사신의 수행원으로 선정되었다. 주청사를 따라 명나라 연경에 도착, 명나라의 왕응린(王應水+潾)과 의술에 관련된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기회를 얻었다. 뒤에 왕응린은 그 내용의 일부를 자신의 저서 왕응린잡집(王應水+潾雜集) 에 수록하였다. 그 뒤 일본에서 이를 복사, 일본에서 발행하여 1716년 답조선의문(答朝鮮醫門) 1권을 발행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귀국 후 1618년 3월 27일 이유간(李惟侃)이 병이 들자 최순립(崔順立)과 함께 왕명으로 파견되어 최순립은 그의 진맥을 보았고, 윤지미가 진료를 하였다.[1] 4월 2일에는 이유간의 형의 집에 온 지역 사는 윤 병마절도사의 처가 풍증이 있는 것을 진료를 청하여 최순립을 대동하여 방문, 진료 후 하룻밤 유숙한 뒤에 내의원으로 출근했다가 오는 길에 중탕(中湯)을 지어서 윤병사 처에게 갖다주었다.[2]

이후의 행적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사후 [ 편집 ]

묘소의 위치는 실전되어 미상이다.

1720년(경종 1)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 막부의 의원들과 문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답조선의문 (答朝鮮醫門)》의 존재가 조선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통신사의 수행원들이 입수한 책의 필사본이 조선에도 전해졌다. 2000년대 이후 《왕응린잡집 (王應水+潾雜集)》이 한국에도 소개되면서 그가 사신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가서, 질문을 한 것이 일부 알려졌다.

가족 관계 [ 편집 ]

그는 서자였지만 증조모 전주이씨가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의 딸로,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 이당의 손녀라서 선원록에 실렸고, 이복누나들과 이복여동생들, 그리고 생모인 양인 억춘의 성명이 모두 선원록에 수록되어 이름이 전해진 것이다.

할아버지 : 윤비(尹棐, 1522년 ~ 1585년)

할머니 :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성언(李誠彦)의 딸 삼촌 : 윤담무(尹覃茂, 1555년 ~ 1597년)

아버지 : 윤담휴(尹覃休, 1544년 ~ 1584년)

어머니(적모) : 평창이씨, 이희명(李希明)의 딸 이복 누나 : 윤온순(尹溫順, 1562년 ~ ?) 이복 매형 : 윤효전(尹孝全) 이복 누나 : 윤정순(尹貞順, 1564년 ~ ?) 이복 매형 : 정효공(丁好恭) 이복 동생 : 윤지청(尹知淸, 1567년 ~ ?) 이복 여동생 : 윤공순(尹恭順, 1568년 ~ ?) 이복 매제 : 민간(閔榦) 이복 동생 : 윤지양(尹知養) 이복 동생 : 윤지백(尹知白, 1579년 ~ ?)

이복 여동생 : 윤종순(尹從順, 1571년 ~ ?) 이복 매제 : 이보(李莆) 이복 여동생 : 윤영순(尹盈順, 1583년 ~ ?) 이복 매제 : 민유청(閔惟淸)

어머니 : 억춘(億春), 윤담휴의 첩

부인 : 청주한씨, 전의감정 한승로(韓承老)의 딸 자녀 없음

관련 항목 [ 편집 ]

각주 [ 편집 ]

↑ 우곡일기(愚谷日記), 戊午日課편 3월 ↑ 우곡일기(愚谷日記), 戊午日課편 4월

참고 문헌 [ 편집 ]

동의보감, 신찬벽온방, 찬도맥결집성,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관련 서적 [ 편집 ]

김남일,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들녘, 2011)

한희숙, 《의녀(키워드 한국문화 11): 팔방미인 조선 여의사》 (문학동네, 2012)

허준, 《동의보감. 1: 내경편》 (동의과학연구소 옮김, 휴머니스트, 2002)

MEDI:GATE NEWS : 조선시대 의원은 갑이었을까?

“훌륭한 의사는 병을 치료할 때 반드시 정신을 안정하고, 의지를 든든히 할 것이고, 어떠한 욕심이나 바라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세종 때 발간한 동양 최대의 의학사전인 ‘의방유취(醫方類聚)’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의료윤리연구회는 2일 카이스트 신동원(인문사회과학부) 교수(위 사진)를 초청해 ‘한국 의료윤리의 역사적 고찰’을 주제로 강좌를 열었다.

신 교수에 따르면 ‘의방유취’는 ‘병이 나서 고쳐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직위의 높고 낮은 것, 돈 있고 없는 것, 어른과 아이, 잘 생겼거나 못생긴 것, 원한이 있는 자와 벗, 자기 민족과 다른 민족, 똑똑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가리지 말고 다 자기의 살붙이처럼 똑같이 대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방유취’에 나와있는 조선시대 의원(한의사)의 덕목은 또 있다.

‘환자의 집에 가서는 아름다운 비단과 천에 눈을 팔지 말 것이며, 좌우를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환자가 한시도 참을 수 없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의사로서 태연하게 오락을 즐기며 오만하게 있을 수는 없다’

‘의사 노릇을 옳게 하려면 말을 많이 해서도 안되고, 함부로 웃어서도 안되고, 농담을 지껄이거나 시끄럽게 해서도 안된다. 시비에 간여해서도 안되고, 인물평 하기를 즐겨서도 안된다. 다른 의사를 비난해서도 안되며, 오직 자신의 덕에 긍지를 가져야 한다’

신동원 교수는 “당시 의원들이 바르게 행동했다면 의료윤리라는 게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환기시켰다.

즉 ‘의방유취’를 다시 해석하면 의원이라는 자들이 심할 정도로 고위직과 돈을 쫒고, 환자의 집에 가서는 아름다운 비단에 눈을 팔고,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오락을 즐겼다는 것이 된다.

심지어 말을 많이 하고, 시끄럽고, 다른 의사를 비난하기를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의학연구에도 몰두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의원들의 이런 행태를 실랄하게 비판했겠느냐는 게 신 교수의 설명.

조선시대 의원들 역시 환자들 앞에서는 ‘갑’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세조는 의원을 △사기꾼 △살인자 △용렬한 자 △양심있는 자 △덕을 베푸는 자 △인격이 높은 자 등 6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면서 의원 대부분을 사기꾼, 살인자로 분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의학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불리는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를 제정한 것도 이런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한다.

‘의원정심규제’란 의원이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규칙을 의미하며 이석형 대사헌이 제정했다.

1456년 이석형이 전라감사로 부임해 민정을 살피던 중 ‘장덕’ 이라는 의원이 환자를 소홀히 대하고, 교만하고, 권력자만 쫒고, 약값도 비싸게 받아 원성이 높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의 피해가 막심하고, 소요사태까지 벌어지자 민폐사실을 조사해 장덕 의원의 죄상을 가려 처리한 후 의자(醫者)들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의원정심규제’를 제정해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의원정심규제에 따르면 의원(醫員)은 환자의 조건이나 빈부고하를 차별하지 말고 진료에 정성과 최선을 다해야 하며, 의술(醫術)은 인술이니 은혜로 베풀 것이며 축재의 상술로 삼지 말 것이며, 의도(醫道)는 정직하게 진료하고 병의 원인 등 환자의 부끄러운 것을 발설하지 말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조선 후기 관리였던 의원들이 녹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근무외 시간을 이용해 고위직, 부자들을 진료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의료윤리연구회 한 회원은 “그 때나 지금이나 저수가로 묶어놓고 비급여로 수입을 보존하도록 하긴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한편 일제시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오긍선 피부과 교수는 의사가 될 졸업자에게 3가지를 당부했다.

△돈버는 의사가 되지 말고, 병 고치는 의사가 되라 △졸업하고 바로 개업할 생각 말고, 고명한 선배 밑에서 몇 년 더 의술을 연마하라 △도시 중심으로 모이지 말고, 지방으로 시골로 가라.

신동원 교수는 “바람직한 의사 상은 역사에 따라, 사회 체제에 따라 변해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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