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복음 1 장 주석 | 송태근목사 마가복음 1강 \”마가복음 개요\”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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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주석 – Daum 카페

마가복음 제 1장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선언 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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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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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마가복음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투 유앙겔리우 예수 크리스투 투 데오스 개역개정,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새번역,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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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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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 옛신앙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마가복음 서론 · 1장: 전도사역을 시작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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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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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주석 강해설교] 예수님의 사역 준비(막 1:9-13)

[마가복음 1장 주석 강해설교] 예수님의 사역 준비(막 1:9-13). 면류관 2021. 10. 29. 15:22. 반응형.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 사역이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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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6 ․ 신자성경주석(마가복음). 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공관복음 문제를 해결하는 보다 적절한 방법은 요한복음 장. 절의 주님의 말씀에 있다 보혜사 곧 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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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강해1

그래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한 마가요한을 설교의 통역자로 늘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세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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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osanna91.com

Date Published: 3/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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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마가복음 내용 요약 설교 자료 주석 묵상 가이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이 한 구절이 마가복음의 전문이라 한들 어떻겠는가? 16장 모두가 오직 이 같은 시작을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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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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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헬라어 강해] 세례 요한의 음식 메뚜기와 석청(막 …

이들은 모두 다 세례 요한의 신선하고 생명력 있는 설교(즉 회개에 대한 설교)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즉각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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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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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가 복음 1 장 주석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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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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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주석

마가복음 제 1장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선언

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 고백

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간단한 구절은 아무 뜻 없이 상투적표현으로 쓴 것이 아니라 철

저한 목적 의식하에서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격으로 자신의 책의 첫 머리에 배

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론적 문구가 본서 전체와 연관되는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만 국한(局限)되는 서론구인지 분명치는 않

으나 아마도 마가는 행 1:21에 나오는 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표현

에서 착안하여 세례 요한에 관한 기사의 문두에 이 같은 문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

편 마가가 70인역(LXX)의 총 서문이라 할 수 있는 창 1:1의 ‘태초에'(* ,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아르케’)이라는 말로 본서 기록의 출

발점으로 삼은 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복음의 계시(revelation)가 시작

됨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 문구는 본서 전체

의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본서의 신적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기능을 하기

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 ,휘우 데우) –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

본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

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

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 , 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

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

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

(1:11;3:11;5:7;9:7;12:6;13:32;14:36,61;15:39). 특히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

서 언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

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p.120).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

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融合)시

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

(창 6:1-4;욥 1:6;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렘 3:19;호 1:10;11:1)를 가리

켰으나,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야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섬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

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예수 그리스도 – 본문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 ,예

수 크리스투)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

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그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

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

(無心)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

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예수아'(* ) 등의 헬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

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주석 참조).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要諦)를 밝히

며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

러준 것이다(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 ,크리스토스)란 ‘기름

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 )에서 ‘메시야’가 연

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職任)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성 및 그분의 신성(神

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주석 참조).

복음 – 여기서 먼저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

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

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

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내용이 ‘케뤼그마'(* ,’선포’)적 성격을 지

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가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복

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a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Moul,Gospel of Mark,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

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시작이라 –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고 있

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마가는 70인역(LXX)의 서론적 문구인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 )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

르케'(* )에는 관사가 없으나 영역(英譯) 성경에는 관사 ‘the'(즉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한층 부각시켜

주고 있다.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비

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

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

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

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새

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중(暗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 저자 마가는 우리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먼저 출 23:20과 말 3:1을 인용하고 난 다음에, 3절에서 비로소 70인

역(LXX)에 의해 사 40:3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마가가 모세나 말라기의 이름을 언급하

는 대신 단지 선지자 이사야만을 거론한 것은 마가의 구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세한 기술을 피하고자 하는 마가의 저작 의도에 따라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

사야의 이름만을 언급했다고 본다. 두 구절은, 2절의 사자가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임무를 말했다면, 3절의 ‘소리’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보다 강조점을

둔 것으로서, 서로 상관되며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에 대한 구약의 예언적 문구이

다. 한편 마가는 이처럼 복음서 초두에 구약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사역과 본

질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보여주

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히브리어 성경 말 3:1에서 인용되었으나, 히브리어 성경과

70인역은 ‘네 길을’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직접 개입을 강조하는 ‘내 앞에서 길을’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메시야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런 의도적 변용

(變用)은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랍비들도 말 3:1의 엘리야와 출 23:20의사자(使者)를

동일시하여 이 두 부분을 비슷한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이는 고대 근동에서 군주가 행차할 때 도중의 일반 백성들에

대한 교육, 군지 숙식을 준비하던 풍습 등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구야과 신약의 분기

점이 되시는 예수의 등장에 앞서 지금껏 진행되어 온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심령을 먼저 준비시키기 위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완벽히 예언된 구절이다. 특별

히 여기서 ‘예비하리라’는 뜻의 헬라어 ‘카타스큐아조'(* )는 ‘준

비하다’는 의미뿐 아니라 ‘돌이키다’는 뜻도 함의(含意)하고 있다. 따라서 세례 요한

의 메시야 도래를 위한 준비 사역중 사람들의 타락하고 부패한 심령을 돌이켜 오실 예

수를 영접하도록 하는 회개에의 사역에 가장 큰 비중이 주어짐을 시사한다(마 3:1-12,

주제강해 ‘세례요한의 인물 연구’ 참조).

=====1:3

본 절은 사 40:3의 70인역의 인용으로서, 70인역과 본문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70

인역의 ‘우리 하나님의’라는 말 대신 여기서는 ‘그의’라는 말이 사용된 점이다. 이는

마가의 의도적 변용일 수도 있고, 마가가 참조한 사본의 원문이 이미 그러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여기서 ‘그의’라는 말의 선행사는 ‘주'(*

, 퀴리오스)가 되는데, 이 칭호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부

르던 것이므로 본 구절은 분명 주 예수에 대한 기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광야에 – 여기서 ‘광야'(* , 에레모스)란 문자적으로 반드시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버려지고 황량한 처소라는 의미

를 지닌다. 즉 이곳은 개간되어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활용되는 곳과는 정반대의 개

념이다. 한편 마 3:1에서는 이것을 ‘유대 광야’라고 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유

대 산지와 동쪽으로 요단 저지대, 남쪽으로 사해, 북쪽으로 얍복강과 요단강이 합류되

는 지점까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광야지역은 석회질의 토양 위에 자갈과

바위가 널려 있었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복이 심한 황폐하고 메마른 불모

지대로서 여기저기 뱀들이 기어다니고 야수들이 출몰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곳 부근

에는 쿰란(Qumran) 공동체의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쿰란

공동체의 영향력이 요한에게 어떤 양상으로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금욕생활과

엄격한 자제력 등은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

례 사역이나 복음 전파 내용과 종말론적 사고 등에 관해 전반적인 , 영향력을 미쳤다

고 보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눅 3:1-20 주제 강해, ‘세례요한의 세례’ 참조). 그런데

세례요한의 활동무대는 이곳 유대 광야 지역뿐 아니라 요단강 동편 지역에까지 확장되

었던 사실이 마 3:5에서 분명히 밝혀진다(요 1:28 주석 참조). 한편 출애굽 당시(출

23:2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사자(使者)를 앞서 보내심

으로 그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받게 하셨다. 본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제 2의

출애굽 때에 다른 한 사자(즉 세례 요한)을 광야에 앞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

도를 통해 구원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파하고 예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로 신령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게 하신다. 눅 7:24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질문하셨다. 광야는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운 곳이다. 실로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참 진리되신 그

리스도를 만남으로 비로소 행복을 구가(謳歌)할 수 있을 것이다.

예비하라(* , 헤토이마사테) – 이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 ‘예

비’하는 그 행위의 긴급성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듣는 즉시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예비하라는 것이다.

첩경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유데이아스…타스 트리부스'(* …

)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말로서 고대 페르시아나 로마

에서 왕들과 그의 측근들을 위해 건설해 놓은 특별한 도로망을 의미한다. 즉 주의 첩

경을 평탄케 하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와 죄악으로 일그러지고 구부러

진 심령들이 회개함으로 그들 속에 쉽게 들어오시도록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마

3:2, 3;눅 3:8).

기록된 것과 같이 – 헬라어 원문에는 본 문장이 2절 초두에 제시되어 2, 3절에 언

급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포괄하고 있다. 문장 어순이 다른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무시하고 3절 하반부에 서술적 형태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록된’으로 번역

된 헬라어 ‘게그라프타이'(* )는 완료형 시제로서 어떤 행위가 과거

에 완성되어 그 결과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본문은 ‘기록되

어 현재도 효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약 기자들은 성경의 변

함없는 권위에 대한 자신들의 강한 신념을 내비치기 위해 구약을 이용할 경우 이러한

어법(語法)을 자주 사용한다. 한편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

게 된 것은 요한 자신만의 어떤 깨달음이나 또는 신비한 능력이 반영된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그대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는 또한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구속 사건 역시 우발적으로 일어날 것이 아니라 구약

에 이미 예언되고 기록된 대로 전개되는 것임을 암중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특히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한다(마 2:5;4:4;11:10 등).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 마가는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세례 요한의 등장과 행적만

을 말하나, 요한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란 사실을 요 1:6에서 직접적

으로 서술하고, 누가는 세례 요한의 어린 시절에 그에게 주어졌던 예언을 언급함으로

써(눅 1:76, 77) 앞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명의

신적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미 1장에서부터 마가복음은 예수시대의 배경이나 그

시대의 사실보다 시대 자체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마가 복음의 특징이

다. 이에 많은 주경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가장 단순 명료하게, 즉 주관적 가감(加減)없

이 예수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 에이스 아페신 하마

르티온) – 이 말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죄 사함에 관련된’이라고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취지에서 흠정역에서는 이것을 ‘죄 사함을 위한'(for the remission of

sin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에이스'(* )의 용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대부분이 목적격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전후 문맥상 마

10:41;12:41 등에서와 같이 그러한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에 관련된’,

‘…때문에'(because of)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세

례’자체가 죄를 사해주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

를 통해 사죄를 받기 위한 하나의 공식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회개의 세례(* , 밥티스마 메타노이아스) – 이

는 회개를 중심으로 하여 베풀어지는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회개'(*

,메타노이아)란 어원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보

다 더 깊은 의미로 사용되어 생각과 의지와 인격의 변화, 곧 전인적이고 본질적인 변

화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신중한 전환’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진실한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은 죄사함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죄

사함에 대한 예비적 단계로서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다. 즉 세례 요

한은 당시 극도로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일깨워 주고

그들의 몸의 외적 정결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

의 영혼이 깨끗함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러한 의

미에서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8절 주석 참조, 행 1:4, 5;19:2에서 각각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주제 강해를 다루기로 한다)는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의 긍휼을

얻을 단계로 진일보(進一步)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례'(* , 밥티조)는

‘물 속에 잠기다’는 의미로서 일종의 침례 예식을 뜻한다(마 3:6 주석 참조). 그런데

이 세례는 기독교에서 새롭게 창출해 낸 의식이라기 보다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 개종

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정착(定着)되어 온 것이다(G. F. Moore). 그러나 세례 요

한의 ‘회개의 세례’는 유대인들에 의해 전통적, 의식적으로 내려왔던 그 세례와는 본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죄의 고백에 관한 기본 원리에 그 근

거를 두고 있으며, 바울이 나중에 롬 6:4에서 설명한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

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일찍이 헬레니즘(Eleusinian cult), 이시스 숭배(Isis worship) 등 여러 밀의 (密意)

종교들 가운데서도 시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은 이방인이 아

닌 유대인들을 회개하고 죄를 자복함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일종의 이교도들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베풀어진 요한의 세례는 유대 민족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

행위로 그들에게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요한은 나중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그가 외친 ‘회개의 세례’에 대한 음성은 오늘날까지 살아 역사하고 있

다. 이와 같이 세례는 단순히 의식적이고 형식적인데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교

의(dogma)에 의해 세례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써 교인(church man)은 될 수 있을지

언정 진정한 신자(christian)는 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중심의 회개, 즉

세례 요한이 강조하였던 ‘회개의 세례’에 있다.

=====1:5

<요단강 세례터>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 마가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설교에 거족적

(擧族的)이고 대대적인 호응이 있었음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었지만 마태와 누가는 이들

무리들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마 3:1-12;죽 3:7-14). 즉 그들 중에는

형식과 의식을 중요시하는 오만한 바리새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되어버린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일반 민중들을 노략하고 약탈하는

군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고 착취하다가 경멸받고 증오받던 세리

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 세례 요한의 신선하고 생명력있는 설교(즉 회개에 대한

설교)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즉각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본 구

절에서 특별히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all)란 표현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가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사실

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와 같은 요한의 회개 운동은 예수 공생애 사역이전에 일

어났던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말

라기 선지자 이후 수백년 동안 진정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 요

한을 위대한 선지자 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이 대망해왔던 메시야로 생각할 수도 있었

을 것이다(눅 3:15). 특히 그가 전파했던 메시지의 내용이 메시야의 임박한 도래였다

는 점에서,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휩쓸렸을 것이 자명하다.

나아가(* , 엑세포류에토) – 원문상 미완료 시제로서 백성들

이 요한에게 ‘계속해서 나아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마가의 이같은 보고는 조금 과

장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로도 세례 요한의 선포가 전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상당한 기대와 동요(動搖)를 초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1:6

약대털을 입고…가죽띠를 띠고 – 이는 마태와 마가, 두 기자가 동시적으로 밝혀

주고 있는 부분으로서 세례 요한의 의식주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마 3:4). 한 마디로 말해 그의 의식주 생활은 단순, 소박, 그리고 청빈한 것이었

다. 여기에서 ‘입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데뒤메노스'(* ,having

been clothed with )는 아직도 그 옷을 입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말로

서 기자는 요한이 줄곧 그 약대 털옷을 입고 생활했음을 보여 준다. 성화(聖畵)를 그

리는 화가들은 종종 요한의 광야 생활을 나타내고 그림으로 요한의 옷을 약대 가죽으

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옷은 길게 축 늘어진 약대털로 짠 볼품없는 옷으로 가

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입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러한 옷에는 자연히 허리에 가죽

띠를 맬 수 밖에 없었다. 이 허리띠는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급히 달려갈 때에도 옷이

펄럭거리지않게 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특히 활동성이 요구될 때에 필요한 유대인 의상

의 필수품이었다. 한편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때

로 털옷을 입었는데 이는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신의 감정을 강력히 상징하기 위해

서였으며 심지어는 거짓 선지자까지도 자신을 참 선지자로 가장(假裝)하기 위하여 이

털옷을 입었다고 하였다(슥 13:4).그리고 아하시야 왕의 사자들이 왕에게 엘리야를 설

명할 때(왕하 1:8)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라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주된 관심인

의식주 생활에서 과감히 탈피(脫皮)하여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

르쳐 주려고 그들 자신이 청빈한 삶을 하나님 말씀의 ‘소리’가 되기에 필요 충분 조건

이 될 수 있었다.

메뚜기 – 철저히 율법에 입각한 경건주의자였던 요한은 레 11:22에서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허용하신 곤충 중의 하나인 메뚜기를 먹었다. 이 메뚜기는 고대 근동 지방에

서 사용했던 평범한 음식이었다고는 하나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연 재해로 인해

소출(所出)이 줄어든 해에 먹는 일종의 대용 식품이었으나 이 메뚜기는 특별히 봄철에

많이 생겼으며 때때로 큰 떼로 몰려다니곤 했었다(출 10장;욜 1:1-12). 오늘날에도 아

랍인들 사이에는 이것의 다리와 날개는 잘라버린 뒤에 굽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소금에

절여 두어 저장 식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은 원래 제사장의 아들로서

부요한 자였지만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가난한 자가 먹는 음식을 먹음으로 생명을

부지해 나갔다.

석청 – 어떤 주경학자는 이 석청을 그곳에서 서식하던 여러 나무들에서 채취(採取)

한 수액일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 말의 헬라어 ‘멜리'(* )는 야생의 벌꿀을

의미한다. 팔레스틴 중에서도 특히 이 광야에서의 야생의 꿀은 달기로 유명한 것이었

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세례 요한의 생활 양식은 철저한 자기 절제와 금욕을 지향

하는 나실인(Nazirite)으로 특징지어진다(민 6:8;삿 16:17 주석 참조;눅 1:15). 실로

그는 오직 회개의 세례와 임박한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육적인 욕

망을 절제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식주 생활에서의 극기의 삶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의 귀감(龜鑑)이 된다.

=====1:7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오시나니 – 마가는 여기에서 매우 장엄하고도 위엄에

찬 동사 ‘오사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케타이'(* )를 사용하고 있

는데, 이는 분명 그 당시 극도로 고조되고 있던 유대인의 메시야 대망 사상에 부합하

는 전형적인 표현 양식이다. 이런 표현 양식은 창 49:10에서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구약성경의 예언을 기반(基盤)으로 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동사 ‘에르케타이’는 3인

칭 단수 현재형으로서 그분이 지금 막 오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시각은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종말적 역사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

이다. 이처럼 마가는 이 동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위치시킴으로써 메시야 오심의 현재

성을 부각시키고 있다(하지만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어법상 문장 끝에 나와 있음).

이 ‘오실’이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설명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라는 것인데, 이는

그분의 전지 전능성에 비추어 볼 때, 요한 자신은 그분의 종의 종이 되기에도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광야에 모여든 유대 백성들 사이에

는 요한이 ‘능력 많은 자'(the mighty man)란 소문이 만연되어 있었을 것이며, 혹시

이 자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에(요 1:19, 20;3:25-36), 이러

한 그릇된 오해를 간단한 이 한 마디 말로써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

께서는 탄생에서 뿐만 아니라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 뒤에 오셨다

(눅 1:26,36). 하지만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 사이에는 무한과 유한, 영원과 순간, 그

리고 태양의 원(源) 빛과 달의 반사광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요 1:15-17).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 세례 요한은 자신과 곧 임하실 ‘능력이 많으신 이’

사이의 강한 대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들 중에서 한 가

지 실례를 사용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주인이 여행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종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먼지로 더러워진 주인의 신발끈을 풀어 신을 벗기고 물을 떠

다가 발을 씻겨 주는 것이었다. 마태는 단지 신의 끈(영어의 ‘latchet’는 오늘날의 구

두끈에 해당하는 말임)을 푸는 데만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지만(마 3:11), 마가는 이것

을 풀기 위하여서 굽히는 행위까지를 첨가하여 표현하였다. 이것은 곧 임하실 메시야

의 위대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세례 요한은 가까운 미

래에 임하실 그분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오실 메시야는 영원

전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역사속에 오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조금도 자기

비하나 미사 여구(美辭麗句)나 과장이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 충만한 한 선지자로서

절대 불변한 진리를 사실 그대로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1:8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성령으로…세례를 주시리라 – 여기에서 ‘물’과 ‘성령’

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본질상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즉 요한은 외

적이며 성례전적 측면에서 그리고 성령 세례의 예비적 단계로서 물을 통한 세례를 베

풀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적이며 본질적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영혼의 정결과 중생과

사죄의 은총을 가능케하는 구속의 완성적 측면에서 성령을 통해 각자의 심령에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다. 한편 물과 불, 이 두 단어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엔'(* )은 도구

격 조사’…로서’로 번역되지만 분명히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성령은 마치 물과

같이 세례에 대한 방편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두 경우 모두 ‘엔’을

사용한 것은 두 종류의 세례가 지니는 성례전적(聖禮典的) 의미와 그 각각의 효능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지만 세례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태는 여

기에다가 흔히 성경 문학적으로 볼 때 정화, 정결, 심판 등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불’

이란 대칭 용어를 사용함으로 성령 그 자체보다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본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마 3:11). 실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불과

같은 뜨겁고 강렬한 역사로서 믿는 자들에게는 내적인 성결과 열정을 제공하였고 불신

자들에게는 종말적으로 임할 심판을 예고하였다(행 2:3). 어쨌든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요한은 단순히 거룩한 예식의 측면에서 물을 통한 세례를 집례

(執禮)했지만 신적 권위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는 성령을 통해 각 심령에 당신의 내밀

하고도 뜨거운 불 세례를 집례하셨다(Lenski). 이 같은 성령 세례는 예수의 승천 이후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공적으로 활발히 시행되어 오고 있다. 한편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를 성령 세례와는 완전히 관계없는 단순히 물로써만의 형식적 예식으로 간주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형식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 요한의 세례는 예

수의 불 세례를 준비케 하는 예비적 단계로서, 이 역시 성령의 확실한 조명과 후원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에 따른 불 세례가 있기

전에도 성령께서는 인간 구원과 진리 전파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셨고 또 그 일에 부

름받은 사역자들의 활동에 깊이 개입하셨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또한 한 가지 사실

은 요한이 무리들에게 표현한 바 자신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에 대한 시제와 관계된 부

분이다. 요한 자신의 세례에 대해 ‘세례를 주었거니와'(* ,에밥티사)인

부정과거형으로 언급한 데 비해, 예수의 세례에 대해서는 ‘세례를 주시리라'(*

,밥티세이)인 미래형으로 언급하였다. 이말에 대해 예수께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재차 확증해 주셨

다(행 1:5). 이로써 우리는 인간 세례 요한의 단회성과 불완전성 및 한시성(限時性)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세례의 완전성과 영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예

수의 이와 같은 신령한 세례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모든 심령들에게 성령을 끊임

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요 16:7;행 2장).

=====1:9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는 어부>

그때에 – 이 말에 대한 문자대로의 번역은 ‘그 날들에’이다. 이는 분명한 시기곧

앞에서 계속 언급되어왔던 세례 요한의 회개에의 세례 사역이 박진감 넘치게 진행

되고 있던 그 기간을 지칭한다. 더욱이 이 표현은 역사상에 위대한 한 사건이

나타날 것이라는 데 주의를 끌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유대 백성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례 요한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는 배경적 설명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그 배경적인 내용보다 더 중요하고 심대한 사건이나 인물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세례

요한이 예고하고 그 권위를 더

높이고 있었던 분은 성령

으로 세례를 주실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실로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30여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사신 것을 청산

하시고 이제 곧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는 시기를 맞고 계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관해 익히 알고 계셨지만 그 즉시 오시지 않고 그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실

바로 ‘그 때’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예고해 주는 장중한 포고령이요 대서사시의 서곡

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갈릴리 나사렛 – 이곳은 예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신 후 다시

귀국하여 정착하고 유아기부터 청년기를 거치면서 계속 살아오셨던 예수의 실제적인

고향으로서(마 2:23;눅 4:16 주석 참조) 예루살렘 북방 약 120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 488m의 구릉지의 분지이다. 이곳은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과 더불어 기독교의

고향으로 여겨지는 매우 뜻깊은 곳이다(마 2:23 ; 3:13 주석 참조). 한편 마가는 ‘나

사렛’이란 지명을 첨가시킴으로써 이방인 독자들에게 그곳의 지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에 비해 누가는 이 지명을 아예 생략했으며 마태는 ‘갈리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마 3:13)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수만리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의 신

자들 곧 예수에 대해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바로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역사성을 입증

해 주기 위한 마가의 노력의 한 표현이다.

요단강에서 – 헬라어 원문에 제시된 본문의 전치사(* , 에이스)는 ‘안에서’,

‘안으로'(in, into)란 뜻으로 예수의 수세(受洗)가 요단강 안에서 베풀어졌음을 암시

한다. 특히 이 표현은 다음에 언급될 ‘세례’라는 어의(語義)와 10절의 ‘물에서 올라

오다’는 말과 조화를 이뤄 예수의 수세 방법이 침례(侵禮)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

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세 방법의 절대적 원칙을 고수하는 일은 또하나의 독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세례를 받으시고(* ,에밥티스데) – 이 단어의 원형 ‘세례를 주다’

(* ,밥티조)라는 말은 ‘물에 잠그다'(70인역-왕하 5:14; 시 68:23), ‘물

로 씻는다'(7:4;눅 11:38;딛 3:5)등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미루

어 볼 때, 이 단어는 ‘세례’혹은 ‘침례’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 세례가 그리스

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는 ‘물에 잠그다’는 침례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

고, 구약 율법의 제사 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속죄를 위한 뿌림(레 14:7;16:14,15)등

의 관점에서(민 8:7) 정결례로 볼 때는 ‘물로 씻는다’는 세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처럼 세례와 침례의 효력과 그 중요성은 거의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세례 혹은 침례라는 그 외적 형식의 절대화를 주장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식이 의도하고 있는 바 구원의 확신과

그 이후 변화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 중심을 떠난 의식만을 제기한다는 것은

사변적인 논쟁에 빠질 우려가 있다.

=====1:10

곧(* , 유뒤스) – ‘곧바로’, ‘당장에’라는 긴급성을 강조한 부사로서 이

부사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지니는 한 특징인데(약 41회). 이 단어는

마가의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박진감을 더해 준다.

물에서 올라오실새 – ‘…에서’를 뜻하는 원어 ‘아포'(* )는 ‘완전히 잠긴 물

속에서부터’라는 의미이기 보다 오히려 신체 어느 부분에 적용되는 단지 ‘물 안에서’

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말은 예수의 세례의 형식(세례, 침례)에 관심

을 둔 것이기 보다 세례 예식이 모두 종결되고 예수께서 육지로 발을 내디디시는 순간

을 강조하는 말로 볼 수 있다.

하늘이 갈라짐 – 마가의 보고에 따르면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오시는’ 장면을 본 사람이 오직 예수뿐이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 이는 마가의 초

점이 예수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지 요한에 대해 말하려 함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하늘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 ‘하늘이 갈라지다'(* ,스키조,

‘찢다’는 뜻)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기록 방식을 보여주

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매우 차분한 용어인 ‘아노이고'(*

, ‘열다’)를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하늘이 갈라진다는 것은 인류가 대우주적 전

기(轉期)를 맞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이제 인류는 절망의 하늘을 ‘찢고’ 새 소망

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 64:1의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성령이 비둘기같이…내려오심을 – 초대 교회 이단자들은 영원한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에게 인격적으로 잠시 거하기 위해 내려오신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본 사건을

그 논거로 채택하였다(요일 4:1-6, 주제 강해 ‘영지 주의’ 참조). 후에도

성서 비평가들은 예수의 영원한 신성(神性)과 더불어 예수의 역사적인 성육신(Incanat

ion)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박하기 위하여 이들의 견해를 인용하곤 하였다.그

들은 한결같이 예수 세례시에 그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가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

아 가실 때 성령께서 떠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

영원한 그리스도에게 본문에서 특별히 가시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은 대신지자로서의

권위와 직무의 전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확증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는 성령

께서 예수에게 임하신 것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의 복종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눅 3:21). 한편 본문에서 성령

은 ‘비둘기같이’ 임하셨다고 했는데(요 1:32) 이는 성령의 순결하고도 온유한 통치와

특성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사실은 공생애

시작에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 기름 부음을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

기름 부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주

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친히 이 기름 부음에 관한 사실을 주장

하셨기 때문이다(눅 4:18). 특별히 본문의 이 같은 장면은 구약 시 45:7;사 61:1 등에

서 이미 예언된 바 있는 것으로 예수께 대한 성령의 영원한 은사 부여를 보여 주고 있

다.

보시더니 –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신 후 곧 기도하셨는 데(눅 3:21) 바로 그 순간

하늘의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게 되신 것이다. 한편 이때 이 기이한 현상은 자연계에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supernatural appearance)으로서 그곳에 모인 우리들이 함께 목

격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 이는 분명 말라기 선지자 이후 단절되었던 계시의 맥을

잇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뜻한다. 랍비들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목소리의 울림’, 곧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는 구별되는 ‘소리의 딸’이라는 하급 계시가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도 계속 전해져 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본문의 ‘하늘로서의 소

리’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마 3:17 주석 참조). 한편 하늘에서

들려진 소리는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의 즉위 개념(시 2:6)과 고난받는 주의 종의 개념

(사 42:1)이 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마 3:17 주석 참조).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늘 소

리가 강조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가장 사랑받는 독생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실로 마가는 그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1:1).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계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당신의 아들됨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신다. 한편 레인(Lane,

William L.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p. 58)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언하신 말

씀의 첫 구절(“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은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영

원하고 필연적인 관계성을 보여 주며, 둘째 구절(“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은 부정과거

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역사상의 어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과거에 선택되었음

을 보여 준다”고 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 ,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나의 그 사랑하는 그 아들’ 이라고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정관사 ‘그’가 명사와 형용사에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그 어의

(語義)를 점차로 높이며 강조하는 수사법이 쓰이고 있다. 이렇듯 성부 하나님께서부터

성자 하나님에게 명명된 이 사랑은 일시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완전 무궁한 사랑, 영원

지고한 사랑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아가페토스(*

)는 사랑의 최고 형식을 지시하는 말로서(Lenski)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

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여기

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악취나는 이 세상을 아가페의 사랑으

로 사랑하시고자 도성 인신(道成人身)하신 것이다(요 1:1,14).

너를 기뻐하노라 – 이 말은 앞에서 언급된 ‘사랑하는’이란 말의 이유도 아니며 귀

결이나 결론적인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뻐하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메사’

(* )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역사적인 과거의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

기 때문이다. 영역성경의 ‘내가 그를 아주 까뻐하노라(KJV, in whom I am well pleas

ed)란 번역이나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러한 의미에서 잘못되엇다. 물론 이러한 문

법구조가 영원한 현재에 관려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과거의 시상은 요

단강변에서 성육신하신 아들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

하신 것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선포의 증거로서 예수 위에 아버지의 성령께

서 강림하신 것이다.

=====1:12

성령이…몰아내신지라 – 공관 복음의 세 기자들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나갔음에 대하여 모두 기록하고 있다(마 4:1;눅 4:1). 여기서

‘광야’란 성경 문학적으로 타인과 완전히 결별된 곳, 또는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

련이 있는 지역으로 생각된다(사 13:21;마 12:43;계 18:2). 그런데 당시 예수께서 실

제로 금식하셨던 광야가 과연 어디였던가에 대해서 의견이 구구하다. 즉 혹자(Alford)

는 모세와 엘리야의 금식 장소였던 호렙산으로, 또는 외경 ‘히브리인의 복음’에서는

다볼산으로, 그리고 또 다른이는(De Wette)여리고 근처의 한 곳으로 보기도 한다. 그

중에서 이곳이 세례받으신 곳과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제일 마지막 견해를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실을 확증하기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

을 ‘콰란타니아'(Quarantania), 곧 예수의 40일 금식장소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세례와 시험 사건 사이에 깊은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특징적인

표현인 ‘유뒤스'(* , ‘즉시’)를 사용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예수의 겸손하고도

강한 인류애의 마음을, 전혀 죄가 없으신 그분이 죄인된 자로서의 세례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신 것과 사단의 시험을 한시적으로나마 인정하신 이 두 가지 연속된 사건으로써

표출시키고 있다. 한편 본서의 강한 이미지에 비해 마태와 누가는 완곡한 동사를 사용

하였다. 즉 그들은 이 시험 사건을 보고하면서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서'(was led

by the Spirit ‘성령에 인도되어서’, NIV) 광야로 나아갔음을 묘사한 것에 비해 마가

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에크발에이'(* , ‘내쫓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됨)를 사용해서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의

이 기록은 전자의 두 기록보다 더욱 역동적이며 생생한 현장감(現場感)을 나타내 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예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협박과 강압으로써가 아니라 오히

려 성령의 역동적인 이끄심에 대해 예수께서 적극적인 의지로써 호응하신 것을 나타낸

다. 또한 이것은 예수의 뜻과 성령의 뜻이 완전히 합치되어 있었으므로 장차 40일 금

식 동안 사단과 더불어 싸울때의 승리를 예상할 수 있게 해준다(마 4:1-11;눅 4:1-13)

=====1:13

사십 일을 계셔서 – 마가는 단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 계신 것에 대해 기록

하고 있으나 마태는 이 기간 동안 금식하셨음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마

4:2). 그리고 마가에 있어서는 시험의 종류도 언급되지 않고 사단을 물리치고 승리하

신 기사도 없다. 아마 그 이유는 예수의 사역 전체가 사단과의 대립으로 일관된 것이

지, 40일간의 광야 생활에서 있었던 단 몇 가지 시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마

가가 강조하기 원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마가의 복음서 전체에서 마가는 이 계속

적인 싸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이 ’40일’에

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즉 이 40일은 구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그곳에서 유한 기일이며(출 34:28), 엘리야가 호렙산을 찾아 광야를 유랑한 기간이

다(왕상 19:8). 또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의 시일도 40일

이었다(행 1:3). 위에서 언급한 모세나 엘리야의 경우 40일의 기간은 그들의 사명 수

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광야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40일’ 기

간의 전후(前後)를 한결같이 광야의 연단과 위험 속에 살아 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

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또 시험받으셨던 이 ’40일간’의 의미는 그의 공생애 시작

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생애 사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일종의 연단의 기간이

자 공적 사역의 준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시험을 받으시며 – 이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 )는 ‘시도하

다’, ‘시험하다’, ‘증거를 진술하다’라는 뜻으로서 인간을 실족케 하는 유혹

(temptation)과 인간을 더욱 성숙케하는 하나님의 연단(test)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 제시된 이 ‘시험’은 그 양자의 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실로 이 시험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집요한 유혹인 동시에, 예수

께서 시험과 고난받는 온 인류의 모범이시자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실 대제사장으로

서의 진면목을 보이시며 또한 그 같은 자격을 공적으로 선언하시기 위한 일종의 하나

님의 뜻에 따른 연단이었던 것이다(히 2:18;4:15). 이 시험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마 4:1-11;눅 4:1-13을 참조하라.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 이는 단적으로 영전(靈戰)을 치르고 계신 예수께서 모든

인간 관계를 단절하신 채 철저히 홀로되셔서 고독에 찬 역경을 감래하고 계셨음을 보

여 주고 있다. 한편 당시 유대 광야 지역에는 뱀, 이리, 표범, 여우, 멧돼지, 하이에

나 등이 이따금씩 출몰했다고 한다. 진정 예수는 내적이고 외적인 공포와 고독 그리고

사나운 야생 동물들을 대하심으로 더욱 큰 시험을 당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금식

하시고 시험받으신 장소는 첫 사람 아담이 시험받은 낙원(창 3장)과 정반대가 되는 위

험 천만스러운 현장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반역함으로 징벌과 사망을 받았던 바로 이 광야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승리를 거두셨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시기 위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다.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 모든 천사들의 주된 임무는 예수와 구원얻을 모든 자들을

섬기는데 있다(히 1:14). 이 천사들이 예수께 수종든 때에 관해서는 마 4:11에 나와있

는 대로 예수께서 마귀를 물리치신 후였다. 성경상에서는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구

체적으로 어떻게 수종들었는지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하늘로부터 전해

진 영적 위로를 전달하고 또 40일 동안 금식하시느라고 주리신 예수께 육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단의 시험을 물리쳐 이기신 그리스도께서는 유혹

의 떡(마 4:3) 대신에 천사가 공급하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셨고 그릇된 공명심(마

4:5, 6) 대신에 영광스런 영적 존재들의 보필을 받으셨으며 또 헛된 영광(마 4:8,9)

대신에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며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게 되셨던 것이다. 그리

하여 이제부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

아내시는 등 사단의 왕국을 파멸시키는 실제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으셨다. 마가복

음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여기서 일단락된다.

=====1:14

요한이 잡힌 후 – ‘잡힌’에 해당하는 ‘파라도데나이'(* )는

제 1 과거 수동형으로 ‘넘겨졌다’, ‘양도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세례 요한이 그

를 시기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헤롯의 군병들에 의해 무참히 체포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만일 마가가 어떤 역사적 순서보다 신학적인 면에 좀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

다면(사실 마가는 6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요한의 죽음을 자세히 언급한다). 여기서

의 ‘잡힌’것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가는 요한의 죽

음과 예수의 죽음에 든든한 고리를 엮어두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두 사람은 모두 불의

한 자의 손에 의해 죽음으로써 그 최후를 맞는다. 따라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막 시

작되는 것과 동시에 십자가의 짙은 피내음이 풍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의

로운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분명히 당시의 불의(不義)한 시대상을 반영해 준다. 예수

는 나중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가 바로 그라고 평

하셨다(마 11:11). 그러나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적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지 그의 위대성을 인정받고 들림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는 메시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마친 후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공히 예수의 공생야 시작은 세례 요한의 투옥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마 4:12;눅 3:19, 20). 즉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요한의 사역이

종결된 후 당신의 공적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마가는 선구자 요

한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임무를 완수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 분

명하다. 그리고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 생애에 있어서 공생애 초기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실 본서의 기자 마가의 시각은 그리스도의 전체

적 생애를 설명적으로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날까지 인간들을 위해 어떻게 사역해 오셨는가를 부각시켜 종으로서의 예수의 진면목

을 밝히려는데 집중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공생애 초기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

을 생략하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저작 의도에 따른 결과라 할 것이다(본서 서론 참

조). 한편 광야 시험과 요한의 잡힌 사건 중간에 발생한 내용에 대해서는 요

1:35-4:42를 참조하라.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 그리스도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오신 때는 세례

요한이 잡힌 사건과 관련이 있다(요 4:1-3, 43 주석 참조).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사

실과,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사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임을 알게 되셨을

때,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셨다(특히 가버나움을 중심함, 마 4:13).

예수께서는 자신이 유대지방에서 그처럼 크게 알려진다면 그것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

의 강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급기야는 그들의 증오심으로 말미암아 시기적으로 너무 이

른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즉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적절

(適切)한 죽음의 순간이 오는 즉시 자기 목숨을 버리실 준비를 갖추고 계셨지만(요

10:11,15,18;13:1) 아직 그 때(* , 호 카이로스)는 오지 않았던 것이

다. 더욱이 갈릴리 지방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우리(cage) 안으로 인도해 들여야 할 잃

은 양들이 많이 있었다(요 10:16).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내내 전파하신 메시지의 주내용

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다른 사본에는 이를 ‘천국 복음’이라 일컫기도 한다(마

4:23). 여기서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쏜'(* )은 현재 능

동태 분사형을 취하고 있어 그 행위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

표현을 통해 하나님은 복음의 원천(주어소유격)이시며 더불어 복음의 대상(목적 소유

격)이심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또 이 복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로 복음은 ‘좋은 소식’ 곧 인류가 들어볼 최고의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곧 그리스도로 인한 죄사함과 구원 및 영원한 복락을 그 주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5:17).

=====1:15

때가 찼고 –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

해준다(갈 4:4;엘 1:9). 다시 말해 본문의 ‘때'(* ,카이로스)라는 말은 단

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

)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호기(好期,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이다(R.C. Trench). 예수께서는 드디어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시

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신 것이다. 이에 대

해 슈바이쩌(Schweizer)는 말하기를 ‘그는 역사상 유래없는 특정한 구원의 때를 성취

하신 것이다’라고 묘사하였다. 특히 본문의 이 표현은 사 9:1,2의 말씀이 성취될 시간

이 이르렀음을 알리는 엄숙한 포고령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 ‘하나님의 나라'(* , 바

실레이아 투 데우)는 단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와 초월적인 주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한편 ‘하나

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과 외경에는 직접 쓰이고 있지 않으나 그 사상은 풍부하게

소개되고 있다(출 15:18 ;시 29:10 ;사 43:15). 이런 사상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하

나님의 왕권은 현재적 실재이면서(하나님은 현재 당신의 주권으로 통치하심) 더불어

종말적 완성임을 (하나님은 최후의 날 당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것

이다)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그 현

재성과 미래성의 긴장 관계가 상존함을 보게 된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초두에

그 나라가 ‘가까왔다'(15절)고 선포한 데 대해 바알세불 논쟁시에는 그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마 12:28;눅 11:20) 말씀하신 바 있다. 즉 예수의 활동으로 하나님의 지배

가 이 땅에 임하신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의 또 다른 가르침에서는 그 나라가 여전히

미래적인 것임을 보게 된다(마 8:11;20:21). 실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

이의 긴장(tension) 관계의 해소는 어느 한쪽을 거부함으로써 이뤄지지는 않는다. 사

실 그에 대한 양극단의 논리인 실현된 종말론은 그 나라의 미래성을, 철저 종말론은

그 나라의 현재성을 각각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을 동시에 함축한 개념이다( Bruce Metzger, The New Testament, p. 148 ). 어쨌든 본

절에서는 그 나라의 도래가 대단히 강조되어 있다. 즉 그 나라는 공간적으로 (예수 안

에서), 또 시간적으로(그 나라는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가까이 왔

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가까와진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Lane). 한편 마태복음에는 일반적으로 ‘천국’으로 되어 있으나(마 3:2;4:17;5:3, 10,

19, 20등) 마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한 사실에(4:11, 26, 30;9:1, 47등) 주의

할 필요가 있다. 의미상으로는 양자가 근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미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나

라에 대한 다음의 네 가지 개념들에 주목할 필여가 있다. (1)하나님의 왕권, 통치권

혹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권이라는 개념이다(마 6:10;눅 17:21).

(2) 완전한 구원, 곧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 뜻에 순종

함으로 비롯되는 모든 영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의 개념이다(눅 18:30). (3)교회, 곧 하

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로 사용될 때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거의 동일한 것이다(마 16:18, 19). (4) 구속받은 우주, 곧 모든 영광

으로 가득찬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이다. 이것은 아직 미래의 일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종적인 사역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의미한다(마 25:34). 좀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이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전파한 메시지의 내용과 동

일하다(4절;마 3:2).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의 복음은 동일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길 예비자였다. 여기서 ‘회개’와 ‘믿

음’은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자들의 올바른 삶의 자세이자 구원의 핵심적 요소

이다. 특히 이 중에서 ‘회개’는 성부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요,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성자 예수와의 긴밀한 신뢰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이 양자중 어느 하나의 결핍은 온전한 신앙 인격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한편 우

리말의 ‘회개하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있지만, 헬라어 ‘메타노에이

테'(* )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과거에 저지른 모든 악한

일에 대하여는 슬퍼하는 한편, 앞을 바라볼 것도 의미하고 있다. 즉 그것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 ‘마음과 생활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완전한 생활로의 전환’까지

를 모두 내포한 포괄적 의미이다.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고 덧붙이신 그리스도의 말

씀에서 회개의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면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즉 ‘믿으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메테'(* )는 앞에 나온 ‘메타노에이테’와 동

시적으로 작용을 하며 함께 역사한다(Lenski). 즉 진정한 회개에는 신앙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본문에 나타난 두 동사는 미완료 동사로서 계속적인 현재를 의미하며, 전자

가 계속될 때 후자로 계속됨을 나타낸다.

=====1:16

갈릴리 해변 – 갈릴리 바다는 보통의 담수호(淡水湖) 중의 하나이지만 성경에서는

흔히 바다로 불리우고 있다. 이는 다른 곳에서 ‘게네사렛 호수'(눅 5:1) 또는 ‘디베랴

바다'(요 6:1, 23;21:1)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 아름 다운 바다는 길이 약 20km, 너비

약 10km, 수면은 해발-240m정도이며, 가장 깊은 곳이 약 50m가량 된다고 한다. 이 곳

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업이 번창했다. 그

리고 이 바다 서쪽과 북쪽 해변에는 많은 읍과 어촌들이 밀집해 있었다(Josephus,

Wars. III, x).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 예수께서는 갈릴리 전도에 있어서 최초로 이 어촌을 ‘지

나가시다가'(따라 걸어 가시다가) 갈릴리 어부 출신 형제인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

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부의 직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형제

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요단강에서 이 제자들에게 예수께

서 바로 이 메시야라고 가르쳐 준 세례 요한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요 1:35-39). 특

히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개하였다(요 1:29). 따라서 그들 두 형제는 그때부터 예수를 따라다녔으며

인격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인격적 관심의 결과는 그들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

고 세우심을 받게 된다(3:13;마 10:1 등).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 먼저 여기 제시된 ‘그물'(* , 암

피블레스트론)은 예수께서 비유 중에 흔히 거론하셨던 큰 그물, 즉 ‘예인망'(*

, 사게네)이 아니라 손 그물, 즉 ‘투망'(投網)을 가리킨다. 한편 마가는 안드레

형제의 모습을 매우 생동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이 손 그물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

도중에 예수께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받은 사실을 현장감 있게 긴박감을 더하여 기술

해 주고 있다.

=====1:17

나를 따라 오너라(* , 듀테 오피소 무) – 원문에서

‘오너라'(듀테)는 말앞에 ‘이리로…’ 또는 ‘다라'(오피스)라는 부사어가 첨가되어 있

는 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가 이때까지 살아왔던 그러

한 방향으로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이리로’ 혹은 ‘이 새로운 방향으

로’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의 이러한 부르심(calling)에는 ‘…되게

하리라'(* , 포이에소)는 목적이 수반되어 있다. 즉 그분의 부르심은 허

황되고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의 위대한 주역의 역

할을 맡기시리라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예수의 부름에 응답하기만 하

면 그들은 복음 전파와 구원 사역의 위업을 맡게 될 것이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 – 주님의 부르심은 부름받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기 보다 오히

려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부르심이었다. 실로 예수께서 그들

을 부르신 것은 사람들을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해내어야 하는 긴급한 임무를 맡기시

기 위함이었으며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즉각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심판과 관련해서 ‘낚는다’는 말이 사용된 경우를 볼 수 있다(렘 16:16겔

29:4, 5;38:4;암 4:2). 한편 본문의 ‘사람’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단수형으로 나와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나 흠정역에서는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

들'(* , 안드로포이)이란 이 말은 단순히 갈릴리 주변 사람들이나 유대

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범 인류적이고 보편적인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Lenski).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 여기에서 ‘곧'(* , 유뒤스)이란 마가의 표현은 긴

급하고도 생생한 장면을 강조하는 특별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셨을 때에는 종말론적인 긴박성(緊迫性)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그

래서 그들은 과거의 모든 삶을 과감히 청산(淸算)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진

정 어부들에게 있어서 ‘그물’은 배와 더불어 그들의 생존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그들

이 이 모든 것들을 버리는 데에는 과감한 의지적 결단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한편 두

제자의 이 같은 즉각적 순종의 배후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것은 예수의 절대적 능력과 권위이다. 실로 그 분의 권위 앞에 모든 피조물은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빌 2:10).

좇으니라 – 헬라어 ‘아콜루데인'(* )은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되

고 있으며, 의미상으로는 (1)예수를 따르는 것, (2)예수의 부르심에 자원하여 순복하

는 것, (3)예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뜻한다(8:34;마 4:25;9:38 등). 이 말에 대한

문자적인 뜻을 세분하여 살펴보자면 ‘아콜루데인’은 접두어 ‘아'(* , 여기서는 ‘일

치’, ‘닮음’이란 의미)와 ‘길’이란 뜻의 ‘켈류도스'(* )의 합성어로서,

‘같은 길을 함께 가다’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즉시 하

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는 선포에 대한 증인으로서 주님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1:19

조금 더(* , 올리곤) – 이 부사는 마가의 세밀하고도 정확한 사건 묘사

기법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요한 –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 다음으로 중요한 제자들

로서 이들의 어머니는 살로메였다(마 10:2 참조). 한편 여기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이름의 서열상에 있어서 야고보가 언제나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형으로 보인

다. 후에 그는 12사도 가운데 최초로 순교하게 되는데(행 12:2), 이에 비해 요한은 모

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 교회를 파수(把守)하고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등 여러 서신들을 기록하였다. 한편 이들은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

았을 때에 즉각적으로 주님과 밀접한 관계에 들어갔으며 사도로서의 훈련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소지(素地)는 얼마든지

있었다. 즉 그들은 마 13:55;요 6:42 등의 경우처럼 그들도 “이는 나사렛에서 온 목수

의 아들이 아닌가 ? 왜 우리는 이 사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거부의 의

사를 표시할 수 있었을 더 큰 근거가 될 수 있었다(요 19:25). 실로 예수와 이종 사

촌간이었던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구심을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 있었

을 수도 있었다. 예수의 형제와 친척들은 심지어 예수를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았던

가(3:21). 이러한 불리한 가정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위엄과 능력과 사

랑의 부르심에 조금도 주저않고 따라나섰다.

그물을 깁는데 – 베도로와 안드레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던 와중에 부

름받은 것과 짝을 이루기나 하듯이 야고보와 요한은 다음 출어(出漁)를 위해 그물을

수선(修繕)하고 있던 상황에서 부름을 받는다. 실로 이것이 현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마가의 묘사 기법이다. 즉 그들은 어떤 종교적 분위기나 헌신의 순간에서가 아니라 자

신에게 맡겨진 생업에 충실하고 있을 때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한편 팔레스틴에

서는 보통 저녁 이후시간에 고기를 잡고 낮에는 그물 수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

다. 따라서 본문을 베드로 형제의 소명받음이 있은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로 보아

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Bultman).

=====1:20

곧 부르시니(* ,카이유데오스에칼레센) – 예

수께서는 마치 단거리 육상 선수의 그것처럼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긴급하게 두 제자

를 부르셨다. 실로 예수의 선교사역은 이처럼 신속하고도 민첩하게 진행되었는데, 이

는 당신께서 항상 다가올 종말에 대한 기대와 예비를 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삯군들과 함께…버려두고 – ‘삯군들’에 대한 언급은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으로

서 ‘삯군'(* ,미스디오스)이란 임금(賃金)을 받고 고용된 일꾼들을 가

리킨다. 적어도 이러한 삯군들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했

다. 따라서 세베대의 가정이 비교적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삯군들이 있었기에 야고

보와 요한은 주저함없이 그들에게 아버지 돕는 일을 맡기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은

예수의 부르심에 의해 이전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온전한 헌신의 길에 나섰음에 틀

림없다. 실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떠남의 결단이 요구

된다(창 12:1-3). 이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만날 수 있기 때문

이다(마 19:29).

=====1: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 ‘저희’라는 말이 원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들

어가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이스포류온타이'(* )가 삼인

칭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들은 예수와 예수께 선택된 처음 네

제자를 가리킨다(29절). 한편 ‘나훔의 동네’란 뜻을 지닌 ‘가버나움’은 호수가에 위치

해 있었고, 제자들이 부름받은 갈릴리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특히 이

곳은 다메섹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要地)이자 세관이 있던 곳으로서(2:14)군사, 경

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이곳은 오늘날 갈릴리 해안 서북쪽에 있는 텔 훔(Tell

Hum)으로 확인되고 있다(마 4:13 주석 참조). 그리고 예수께서 이곳을 공생애 사역의

주활동 무대로 삼으신 것 가운데 한 이유는 바로 이곳이 세리 마태를 위시한 다섯 제

자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바로

이때 안식일 예배 중 첫번째 예배가 진행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때 안식일이 되기

전 금요일에 이미 회당 안으로 들어가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회당에…가르치시매 – 예수의 공생애사역의 시초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여기 ‘회당'(Synagogue)이라는 말은 한 지방에 모인 회중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이들 회중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회당의 기원

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율법을 연구하

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회당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유

대인이 살던 곳이면 헬라 세계 어디서든지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회당은 유대교를 가

장 오랫동안 지속시켜 준 제도가 되었으며 기독교 초창기에 복음도 이 회당을 근거지

로 삼아 전파되어 나갔다(마 4:23;눅 4:16-30 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

참조). 한편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 회당에 들어가시자마자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묘사

하는 ‘에디다스켄'(* )은 미완료 동사로서 매 안식일이면 예수께서

이곳에 나오셔서 가르쳤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당시 가버나움 회당은 활짝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이곳을 초창기 복음 전파의 근거지로 삼고 계속적으

로 가르치셨다. 물론 이때 ‘회당의 자유’는 회당 지도자들이 인정하는 방문 교사들 또

는 권위 있는 선생들에게 허용되는데, 그들은 주로 그 회당에서 율법이나 선지서를 읽

으며 그 읽은 바를 풀이하고 설교하기도 했다. 한편 그때 회당에서 이루어지던 의식은

오늘날의 예배 의식과 비슷한 것으로서 기도, 찬양, 성경 봉독, 그리고 랍비(Rabbi)나

이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한 설교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 ‘놀라니’에 해당하는 ‘엑세플레쏜토'(*

)는 ‘밖으로’를 뜻하는 ‘에크'(* )와 ‘친다’를 뜻하는 ‘플레쏘'(*

)의 합성어로서, 이는 문자 그대로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차서 ‘정신이 멍

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를 의미한다. 본문의 의미는 그들이 순간적으로

놀라고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도 이렇게 표현되었다(마 7:28). 한편

청중들 편에서 볼 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토록 놀랍게 하였던가? 이에 대해 마가

는 그 ‘교훈'(* ,디다케)에 놀랐다고 보고한다. 이 ‘교훈’은 능동적 측면

에서 가르치시는 행위 또는 방법을, 수동적 측면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각각 의미하는

데, 본문은 이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 실로 목수 출신이었던 그가(6:3) 어떻게 그러한

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을까하는 것이 그들의 깊은 의문점이었으리라. 이러한 의

구심에 대해 마가는 ‘교훈’이란 말에 덧붙여 특별한 이유, 곧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

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하는 설명구를 달았다(마

7:28,29). 다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방법과 내용및 서기관들의 가르치는 방법과

내용 사이의 차이점들이다. (1)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에(요 14:6;18:37)

반해 서기관들의 설교는 대부분이 와전(訛傳)된 것이었고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사변

적(思辯的)인 것들이었다. (2)그리스도께서는 중대한 의미가 담긴 문제들, 곧 생명과

사망 그리고 영원에 관한 문제들을 제시하셨지만 서기관들은 하찮은 문제들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였다(마 23:23;눅 11:42). (3)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는 내용에는 체계가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탈무드(Talmud)경이 그렇듯이 서기관들은 자주 중언부언(重

言復言)하였다(마 6:7). (4)그리스도께서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례들을 사용

하심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셨지만 서기관들의 설교는 고류하고 형식적인

데만 얽매여 있었으므로 메마른 심령들의 갈급함을 채워줄 수 없었다. (5)그리스도께

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자요, 그들의 영원한 축복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자로서 말

씀하셨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사람에 대해 언급하셨다. 하지만 서기관들은

가장 중요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다. (6)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본 구절에

진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가 전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실행 능력

을 겸비한 탁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요 8: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곧 아

버지의 메시지요, 성경의 메시지다. 그러나 서기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그들

의 스승들의 유전에서 온 것으로서 고작 스승들의 교훈을 인용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

이었다(7:8,13;마 15:2,3). 그들은 마치 깨어진 물통에서 물을 퍼내려고 헛되이 노력

하였던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생수의 근원'(렘 2:13)이 되시어 자신으로부터

물을 공급하셨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의 기르침과 당시 종교지도자를이었

던 서기관들의 가르침의 차이는 근본적인 면에서 상이(相異)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

의 가르치심을 듣고 백성들이 놀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1:23

마침(* ,유뒤스) – 긴박감을 더해 주는 마가의 표현 기법이다. 곧 예수께

서 가르치신 교훈으로 회당 내(內)가 놀라움과 감동으로 가득차 있던 바로 ‘그 시점’

에라는 뜻이다.

더러운 귀신(* , 프뉴마티 아카다르토) – 본

서에서 이 말은 11회 나오며, 누가는 이 말에 ‘귀신’ 혹은 ‘마귀’라는 뜻을 가진 ‘다

이모니온'(* )을 부가하여 사용하고 있으나(눅 4:33;8:27;10:17등),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마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존

재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 데 있다. 이 ‘더러운 영’은 선한 의지와 도덕성

이 완전히 상실된 그야말로 악의 실체가 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의

갈릴리 사역 초두(初頭)인 바로 이 안식일에 진리전파 장소 한 가운데로 돌진해 온 자

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 악한 영, 곧 마귀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

일 3:8). 한편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첫반응은 ‘소리질러'(* , 아나크

라조)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진리 전파 사역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한 것이다(눅 4:33).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 심지어는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즉 그들은, 귀

신이란 정신병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정서적 불안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경우 혹은 정신

이상자와 간질병자의 경우로 나타나는 증세를 가정(假定)해서 칭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 구절은 귀신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명백히 규명해 주고 있다(마 4:1-11, 주

제 강해 ‘사단'(마귀)과 ‘귀신’참조). 이러한 귀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

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며 사람들에게 극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것이다(벧전 5:8).

=====1:24

나사렛 예수여 – 문자적으로 ‘나사렛 사람’ 혹은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

서, 회당에 들어왔던 귀신은 예수에 대하여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큰 소

리로 떠들어 대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으며 따라서 천한 신분을

가졌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정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術策)

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일반 사람들의 통념 속에서는 ‘나사렛’이라고 하면 경멸

의 뜻으로 인식되어졌다. 왜냐하면 그곳은 종교, 문화적으로 선민적 특권을 누리던 예

루살렘 및 유대 지경과는 동떨어진 이방의 초라한 고을이었기 때문이다(사 9:1,2). 이

런 관점에서 심지어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언급하셨던 나다나엘까지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였던 것이다(요 1:46,47).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

니까?’이다. 이 말은 귀신이 그 사로잡은 자의 성대(聲帶)와 입술을 사용하여 한 말로

서 의미상으로는 ‘당신이 왜 우리를 괴롭히려 합니까’라는 뜻이다(마 8:29). 여기에서

귀신이 말한 ‘우리’란 복수형의 칭호에 대해 (1)말하는 사람과 귀신을 함께 일컫는 이

중인격을 함의한 말로 보는 학자도 있고(Robertson), (2)이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그의 나머지 동료 귀신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W. W. Wessel). 이중 예수의 신성

을 직시하고 또 그분에 대한 두려움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더 적절할 것이다. 실로 이 귀신은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지금 자신에게 닥칠 일이 다

른 귀신들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였던 것이다. 즉 더러운 귀신은 예

수의 일을 방해하려 했으나 예수 앞에서 예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귀신은 자기

뿐 아니라 악령의 세계 전체에 닥친 파멸과 심판의 위기를 직감하고 공포와 경악에 휩

싸이고 말았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 , 호하기오스 투 데우) – 이

는 23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 , 프뉴마티 아

카다르토)과 대조되는 말로서 원래는 하나님께 구별된 일꾼들, 선지자들을 가리켰으나

본문에서는 특별히 예수의 신성과 메시야성을 가리킨다. 이와 함께 예수에 대한 귀신

들의 표현을 살펴보면 마 8:2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 막 5:7에서

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the Most High God)로 나타나는데, 이

것이 모두 귀신이 어떻게든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보겠다는 자기

방어적 측면에서 한 고백으로서 그 모두가 진실한 진술이었다는 데 주목을 끌게 한다.

이 귀신은 예수의 ‘거룩한'(* , 호 하기오스)신성을 이해했기 때문에

‘불결한'(혹은 ‘더러운)(* , 아카다르토) 본성을 갖고 있는 자신들은

그 앞에서 쫓겨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에 의해 이러

한 용어가 무의식 중에 실토(實吐)되고 만 것이다(34절 주석 참조).

=====1: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 예수께서 귀신을 상대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꾸짖는

것’이다. 이 ‘꾸짖다'(* ,에피티마오)는 말은 ‘말로써 엄하게 경고하

다’는 뜻 외에 ‘벌하다’,’책망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그 꾸짖음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 실로 귀신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타협이나 회유(懷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다.

잠잠하고…나오라 – 예수께서는 완전히 타락한 귀신에게서 자신의 메시야직에 대

한 증거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귀신과 사단은 이 거룩한 증거에 끼어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잠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모데티'(* )는 ‘피모오’

(* )의 부정 과거 2인칭 단수 명령형으로 원뜻은 ‘입에 자갈을 물리라’로서

더 이상 소리치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인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Robertson)는 ‘소에

게처럼 입에 망을 덧씌울 것이라’는 말로서 번역하여 더욱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오라’는 명령 역시 더 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

서 떠나라는 거부할 수 없는 엄한 명령인 것이다.

=====1:26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 스파락산 아우톤) – 이것

은 마치 위경련을 일으키듯이 ‘발작하며 몸부림을 치게 하고’라는 보다 강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흠정역(KJV)에서는 이 구절을 ‘그 때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상하게 하고'(And when the unclean spirit had torn him)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 4:35)와 모순될 뿐만 아니라 원문에 있

는 경련으로 보아야 할 간질병(마 17:15)에 대한 언급도 없음으로 그다지 적절하지 않

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의 의미에 보다 근접해 있다.

어쨌든 귀신(사단)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의 명

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귀신은 마지막 쫓겨나가는 순간까지도 그 사람에게 경

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것이 마귀의 본성인 것이다.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큰 소리'(* , 포네 메갈레)

란 어떤 크나큰 충격에 의해 강렬한 음성으로 내뱉는 비명을 가리킨다. 이는 그 사람

이 받는 고통이기 이전에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야만 하는 귀신의 최후의 일성(一聲)으

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써 그 귀신은 그 사람의 인격과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것이

다.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가운데 귀신 축출(exorcism) 기사를 첫번째로 기록하

였다. 이 이적의 기록은 마가의 복음서 기록 의도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

예수의 교훈(22절)과 이적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제시했던 것이다. 한편 교회사가 하르낙(Harnack)은 이 귀

신 축출이 A.D.3C까지 초대 교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한 개인의

치유뿐 아니라 사귀(邪鬼)로 인한 공포에 휩싸였던 한 사회를 치유하는 크나큰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진정 이것은 귀신의 왕국을 멸절하시고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

시는 예수의 권능에 찬 역사의 단면이 아닌가(9:14-29, 주제 강해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1:27

다 놀라 – 마가는 회당에서 일어난 생생한 모습을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또 하

나의 극적인 동사를 사용하였다. ‘다 놀라’,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담베데산'(*

)은 수동형이지만 능동의 뜻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매우 충

격적으로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놀란 이유는 그들 모두 이제까지 경험해

왔던 교훈 및 이적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즉 22절에서 ‘뭇 사람들이 놀란’것

은 종래의 서기관들의 틀에 박힌 고루한 가르침과는 판이한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가르

치심으로 인한 것이었고, 본 구절에서 ‘다 놀란’것은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명령에 귀

신이 즉시 쫓겨난 사실로 인한 것이었다.

서로 물어 가로되…어찜이뇨 – 차분한 어조로 ‘서로 말하여'(눅 4:36)라고 기록한

누가의 보고보다는 좀더 긴장되고 호기심이 충천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 하는 어구(語

句)이다.

새 교훈(* ,디다케 카이네) – 주님의 새로운 가르치심과 그

로 인한 뭇 사람들의 놀라움은 계속 되었다. 실로 예수의 가르침은 진부하고 장황한

랍비의 교훈과는 완전히 판이한 것이었으며, 이는 마치 새봄의 꽃내음처럼 신선하고

‘새로운'(* ,카이네) 가르치심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여기 ‘새로운'(*

,네오스) 것이 아니라 질적인 새로움을 말한 것으로 결국 예수의 ‘새 교훈’은 고루

한 가르침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창조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으로 다가왔음을 연상

케 한다. 특히 이 ‘새 교훈’은 ‘권세있는'(* ,카트 엑수시안)

교훈으로서 사람들의 심령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창을 열어 진리를 발견

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교훈이었다. 한편 보통 대부분의 독법(讀

法)에서는 ‘권위있는’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읽는다.

=====1:28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예수 사역의 탁월성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소문은 삽

시간에 가버나움을 뛰어 넘어 갈릴리 온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누가의 보고와 관련시

켜 본 장명을 연상한다면 ‘가버나움 근처의 갈릴리 도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눅

4:37 주석 참조). 한편 여기 제시된 ‘갈릴리 사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페리코론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 대해

서 ‘갈릴리’가 소유격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비단 갈릴리 지역

뿐만 아니라 고보다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William L.Lane)고 보는

이도있다(마 4:24). 이처럼 예수의 소문은 가히 폭발적일 만큼 갈릴리 전역에 퍼져나

갔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1:29

회당에서 나와 – 앞 사건과의 연속성과 예수 사역의 생동감 넘치는 지속성을 강조

한 마가의 표현 기법 중 하나이다.

시몬과 안드레의 집 – 예수와 그의 네 제자들은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

으로 직행했다(마 8:14;눅 4:38). 베드로는 이미 결혼한 사람으로(30절;고전 9:5) 그

의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가는 그 집을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라고 말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시몬의 형제 안드레도 베드로와 같은 집에 함께 기거했을

것이다. 한편 이 집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야고보와 요한뿐이었으

며 다른 사람들은 이 초청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아마도 베드로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았다. 이쨌든 이곳은 예수

의 갈릴리 사역 중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예수께서 선교 여행을 하시고 나

서 이곳으로 돌아오셨던 것이다.

=====1:30

시몬의 장모 –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서 그에게 장모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분명코 결혼했음을 지적해 주고 있는 말이다. 고전 9:5은 베드로의 부인이 그 당시 살

아있어서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동행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로마 카

톨릭 교회에서 베드로가 독신이었음을 강조함은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제들의 독신주의(celibacy)는 베드로가 독신이었

음을 가정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창 1:27) 너무 인위적인 독신주의를 고집함으로 인해 또다른 우월 의식과 비

신앙적인 편협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초대 교회 시대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

레멘트(Clement)는 베드로와 빌립이 자녀를 낳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특히 베드로가

전도할 때에는 항상 그의 아내를 대동(帶同)했다고 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내도 순교당하였는데, 그 아내가 베드로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어갔을 때 베드

로는 아내를 향해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라고 권면했다고 전한다(Clement of Alex.,

Storm. 3:6).그리고 또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의 아내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또

는 페페튜아(Perpetua)라고 전한다.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 마가는 단지 시몬의 장모가 병들어 누워있는 사실만을 언급

하지만 의사 출신이었던 누가는 그녀가 ‘중한 열병'(눅 4:38)으로 고통받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녀의 병명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습한 기후의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그 지방에서 흔히 발병하던 풍토병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웠는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이토'(* )가 과거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것

으로 보아 그 병이 장기적으로 오래 지속된 만성적 질병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하지만

그녀의 열병이 아무리 장기적이었고 또 극심했다고 할지라도 만병의 대 의사이신 예수

께서 못 고치실리가 없으셨을 것이다.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예수께서 병을 치유하실 때 취하시는 특징적

인 행동으로서(41절;5:41) 환자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인 사랑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누가는 이 장면을 ‘열병을 꾸짖으신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눅 4:39), 이는 의

사 출신인 누가가 그 열병의 원인을 사단의 활동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눅 13:16)

열병이 떠나고…수종드니라 – ‘떠나고’에 해당하는 ‘아페켄'(* )은 부

정 과거형으로서 이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즉각적으로 단번에 나은 사실을 가리키

고, ‘수종드니라’에 해당하는 ‘디에코네이'(* )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서 계속하여 수종드는 현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같은 확실한 구원의 확증을 받은

자에게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과 행위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1:32

저물어 해 질 때에 –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계명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토요일 오

후, 곧 안식일이 끝나는 시각을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운반해 와 예수께 고침받기를 원

하였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으며, 이 시간

내에서는 일체의 노동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다(렘 17:21). 특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은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의 정신은 배격(排擊)한 채 그 율법의 조목만을 지키도록

강요하였으며, 그리하여 백성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든 삶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모든 병자…데려오니 – 폭발적인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져나가자 ‘모든(각양) 많

은 병자들과 귀신들인 자들이 예수께 나아왔다. 특별히 본문의 ‘데려오니'(*

, 에페론)는 미완료 시제로서 병자들을 계속 연이어서 데려왔음을 보여 준다.

한편 마가는 누가의 경유처럼 각 환자들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다만 ‘모

든'(많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수께서 그 어떤 질병도, 또 아무리 많은 환자라

도 다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1:33

온 동네가…모였더라 – 마태와 누가는 병자들의 큰 무리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

지만(마 8:16;눅 4:40), 마가는 온 동네, 즉 가버나움 지역의 무리들에 대해 보다 구

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시간은 대충 안식일이 끝나는 일몰 직후(日沒

直後)라고 보아야 한다. 그날 아침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이적으로 고치신 사실이

소문으로 신속히 퍼져 군중들은 환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 계신 곳으로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33절은 특별히 생동감을 더해 주며, 이 동사의 시제가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수효(數爻)가 늘어가고 있음을 일러 준다. 한편 본문의 ‘문 앞’이란 베드로

의 집 문 앞을 가리키며 바로 이 문을 통과한 자들, 곧 문을 통과하여 예수를 만난 자

들은 하나같이 회복과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1:34

각색 병든 많은 사람 – 이는 예수께 나아온 병자들의 양상을 보여 주는 말로써 그

병증이 매우 다양했음을 알려주며,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왔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대별(大別)하면 귀신 축출, 질병 치유, 죽은

자를 살림, 피조계(被造界)를 당신의 의지로 다스림 등이 있으나 특히 마가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바로 귀신 축출이었다.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영적 감지력(感知力)이 뛰어난 귀

신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눅 4:41).사실 귀신들은

지적인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마 1:24), 자신의 운명(마 8:29) 그리고 구

원의 계획(약 2:19) 등을 알았으며, 그들 나름대로 잘 발달된 지적 체제를 가지고 있

었다(딤전 4:1-3). 이 사실은 이미 24절에서도 잠깐 밝힌 바 있다.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실로 귀신들도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이

다. 그런 관점에서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이 아니고

‘귀신’에게 말을 못하게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귀신의 말을 허용 혹은

묵과하셨다면 상황은 어떠했겠는가? 아마도 그들은 24절에서와 같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서슴없이 외쳐대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자신의 신적인 존

재에 대해 인지(認知)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나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포하는

것을 금지시키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악한 존재에 의해 그 신분이 밝혀지기

전에 먼저 말씀과 행동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의 메시야인가를, 즉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메시야 개념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메시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오직 구원받은 자기의 백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온 천하에 전파

되기를 원하셨다(16:15;행 1:8).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아직 당신의 존재를 공

개하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침묵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교훈과 치유 사역으로 몸이 퍽 고단하

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집에 머무시다가 ‘아직 날이 채 새기도 전에'(눅

4:42)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

엔뉘카 리안'(* )을 흠정역에서는 ‘날이 밝기 이전'(a

great while before day)이라 하였고, NIV역에서는 ‘아직 어두울 때'(while it was

still dark)로 번역하고 있다. 이때는 아마도 오늘날의 새벽 3-4시경이었을 것으로 추

측된다.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나가셨을 뿐 아니라 그

성읍에서도 나가셔서 갈릴리 가버나움 교외의 광야 지대로 추정되는 ‘한적한 곳’으로

발길을 옮기셨던 것이다. 본서에는 이곳 외에도 두 번 정도 더 같은 상황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예수는 당신의 사역 중 매우 중대한 일을 눈 앞에 두었음을 볼 수

있다. 지금 예수는 갈릴리 전역에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서 그 어떤 준비보다 하

나님 아버지와의 내밀한 교제를 통한 영적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한적한 곳에,

이른 시간에 홀로 나아오셨던 것이다.

기도하시더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토'(* )는 미

완료 시제로서 예수께서 기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열심히 기도하셨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맡은 인류 구속 사역, 그중에서

도 지금 당장 완수해야만 하는 갈릴리 사역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감

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요구하셨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기도의

모본(模本)을 통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그는 세례받으실 때

(눅 3:21), 열 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눅 6:12), 오병 이어의 이적을 베푸실 때와

그 일 후에(6:41,46),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시고자 할 때에(눅 9:18), 변화산

에 계실 때에(눅 9: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도 오라”고 하신 사랑

의 초청 직전에(마 11:25-30), 베드로가 자기를 세 번 부인하기 전 그를 위하여서(눅

22:32),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시던 날 밤에(요 17장), 겟세마네 동산에서(14:32, 35,

36, 39), 십자가 위에서(눅 23:34), 그리고 그의 부활 후(눅 24:30)에 기도하셨다. 위

의 기도의 경우들은 예수의 기도 생활이 얼마나 진지했으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실로 기도는 그분이 지니신 능력의 원천이요 또한 영적 양식이

었던 것이다.

=====1:36

뒤를 따라가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디옥산'(* )

은 단순히 추종(追從)하는 것이 아닌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샅샅이 뒤지고 성가실 정

도로 찾고 또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증거해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들의 영적 무지를 보

여주기도 한다. 즉 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

께 하는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마

가가 ‘제자들'(* , 마데타이)이란 말를 쓰지 않고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라 묘사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제자들처럼 행동치 못하고 단지 무지한 인

간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37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있었

던 무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것을 보고 흥분

을 감추지 못했으며 그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를 찾아 뵙기를 원하였

다. 이들은 아직 예수를 구주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단지 예수의 외적인

능력, 곧 병 고치는 능력에 혹(惑)하여 열광적으로 예수를 찾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신

다면 기뻐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실로 그들은 아직 온전한 메시야관을

확립하지 못한 채 정치적이고 인기에 영합(迎合)하는 그릇된 메시야관(8:27-9:1)에 집

착했음이 분명하다.

=====1:38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 이제부터 주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각 동리와 마을

들로 다니시며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수행하시고자 결단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일반

사람들과 같이 단순히 이적이나 일으켜 군중들에게 인기나 얻고 세상적인 부귀 영화나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주셨다(마 4:6-10). 그의 목적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머리 들곳조차 없을지언정(마 8:20;눅 9:58) 고난의 길을 택하시고 그 고

난을 통하여 영원한 천국 복음을 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여기서 ‘마을들'(*

, 코모폴레이스)이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규모를 갖춘 마을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면 그 당시 갈릴리

상류 지역에는 수천명을 군락(郡落)으로 하는 약 200여개의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 전한다. 예수는 이 200여개의 마을을 다 돌아다니시고자 하셨다기 보다 가버나움

근방의 여러 마을들을 돌으시며 전도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

음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지 단지 기

적이나 베풀어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 오시지는 않았다. 물론 병고침과 귀신 축출은 중

요한 일이지만(39절) 그것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을 뒷받침하는 것이어

야 했다. 실로 마가가 그의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를 기적 베푸는 자로서만 지나

치게 강조하는 이단적 기독론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면 분명히 본문의 말씀은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왔노라'(* , 엑세르

돈)는 말은 ‘…에서 나아왔다’는 뜻으로서 베드로의 집에서 기도하러 광야로 나아왔

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고(Mayer),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나아왔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Bengel). 그런데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4:43)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서는 이 땅에 거룩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에 왔노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1:39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 이는 예수의 제 1차 갈릴리 전도 여행을 요약한 말이다.

사실 마가의 ‘온 갈릴리’라는 표현은 과장이라기보다 매우 방대한 지역을 활보(闊步)

하였음을 강조하는 말로서,예수의 전도 여행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회당 – 그 역사의 시작이 포로 시대로 믿어지는 이 회당은(21절 주석 참조)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 백성들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곳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데는 매우 긴요(緊要)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The Jerusalem

Talmud)의 한 구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멸망 때(A.D.70)에 팔레스틴에는 480여개의 회

당이 산재(散在)해 있었다고 한다. 예수의 초창기 사역도 이 회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

다(눅 4:16-30,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교회’참조). 한편 예수께서 ‘여러 회

당’에서 설교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염두

에 둘 필요가 있다. 즉 현재 남아있는 회당들의 옛 터를 보면 모두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갈릴리 지방의 회당들은 남쪽을,예루살렘 남쪽의 회당들은 북쪽을,예루살렘 서

편의 회당들은 동편을 각각 향하고 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그가 어느

회당에 들어가시든지 간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동안에는 항상 자신이 장차 십자

가에 못박히신 골고다 언덕을 향하고 계셨을 것이다. 주님은 늘 예루살렘에서의 십자

가를 염두에 두시고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이다(빌 2:8).

=====1:40

먼저 본문 이하부분(40-45절)과 바로 앞 부분의 기사는 접속사 ‘카이'(* , ‘그

리고’)로 연결되었으며, 또 뒤따라 나오는 기사(2:1-3:6) 역시 ‘카이’로 연결되고 있

다. 따라서 40-45절 부분은 1:21-39과 2:1-3:6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마가복음에서 이 부분이 하나로 간주될 수 있는 단위임이 틀림없음을 보여준다. 그렇

다면 본문은 갈릴리 전도 여행 도중에 발생한 것임이 분명하다.

문둥병자 – 문둥병(혹은 나병)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질병

으로서, 그 환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박탈당한 채 그들의 공동체 밖으로

소외되었다. 한편 성경에서의 문둥병이라는 말은 문둥병(leprocy)을 비롯한 광범위한

유형의 심한 피부병을 지칭하는 병명으로 쓰였다. 이는 흔히 의학 용어로 한센씨 병

(Hansen disease)이라 일컬어지는 나병에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니라 피부와 모발의 이

상 등에도 사용되던 피부 질환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피부병이든

간에 그것이 일단 문둥병으로 단정지어지면 그 사람은 이후부터 매우 고통스러운 생활

을 해야만 한다. 율법에는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

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

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 46)고 규정하여 육체적 고통과 함께 대

사회적 고통까지 함께 받아야만 했던 무서운 질병이다.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 율법에 의하면 사회 활동이나 대인 접촉이 금지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한 문둥병자는 율법의 고리를 깨치고 예수께 나아왔다. 실로 이것이

야말로 생명의 주께 나아오는 자의 담대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께 나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손과 예의를 갖추고 (‘끓어 엎드리어’)예수께 경배했다. 이에

대해 누가는 ‘엎드려'(눅 5:12)라고 했으며, 마태는 ‘절하고'(마 8:2)라고 각각 묘사

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다. 진정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치 자신의 전

부를 예수께 드리기라도 하듯이 겸손한 몸가짐으로 경의(敬意)를 표했던 것이다(시

10:17;약 4:6).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문둥병자는 예수께서는 자기를 능히 고

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바는 예수께서 과연 자기의 치유를 원하

시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 문둥병자의 예수께 대한 신앙 지식(전지 전능하신 분으

로서 무엇이든 원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는 사실)을 가히 초월적이리만

큼 놀라왔다. 주께 모두 맡기는 것이야말로 간구자의 참된 자세일 것이다. 한편 그 문

둥병자는 예수께 ‘고침’을 바라기보다 ‘깨꿋케 됨’을 바랐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으로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둥병은 의학상의 문제이기 이전에

의식법상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레 13:1-3).

=====1:41

민망히 여기사(* , 스플랑크니조마

이;filled with compassion,NIV) – 그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 동

인(動因)이 묘사되고 있다. 이 말의 본래의 의미는 ‘간절히 열망하다’를 뜻한다. 이것

은 예수의 문둥병자를 향하신 긍휼과 사랑과 동정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곧 그가 받는 모든 고통을 목격하고 더불어 그 고통에 동참할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

유해 주고자 하시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일 것이다(히 4:15). 한편 본

문의 ‘민망히 여기사’라는 독법(讀法)을 일부 사본들에서는 ‘분하게 여기사’라는 의미

의 ‘오르기스데이스'(* )로 읽기도 한다. 이러한 변용에 대해 혹

자(W. W. Wessel)는 주께서 분을 내신다는 말을 쓰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 서기관에 의

해 ‘오르기스데이스’ 독법 대신에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독법을 취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오르기스데이스’독법을 취하게 된다해도 그 더러운 병이 마귀의 것이라

는 사실이 예수로하여금 분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는 설명으로 이에 대한 답변을 삼을

수 있다. 즉 예수의 분냄은 병자나 그가 앓고 있는 병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를 파

멸로 이끈 사단에게 겨냥한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와 사단은 또 한번의 충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관심을 기울이는 한 가지 사안이다.

그러나 비록 ‘오르기스데이스’ 독법을 취한다하더라도 그 병자에 대한 예수의 뜨거운

연민의 정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손을 내밀어 – 예수께서는 부정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는

데, 이는 모세법에 근거해 볼 때 부정을 자초(自招)하는 일이었다(레 13:45, 46). 사

실 유대인들은 문둥병 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는 경우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

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看做)할 만큼 의식법에 철저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행

위는 초월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정 예수는 인류 구속의 메시지

를 단지 입으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이시고, 인간들에게 내재해 있는 두려움과

그릇된 관념을 실현해 보이셨다. 실로 그분의 사랑의 손길은 의식법의 부정이 지닌 힘

보다 더 강하고 탁월한 것이었다. 한편 복음서의 많은 구절들에서 예수께서 병자들에

게 친히 그 손을 대시며 병을 고쳐주셨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마 8:3,

15;9:29;17:7;20:34;눅 5:13;7:14;22:51 등). 그리고 때로는 병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께 손을 대기도 하였다(3:10;5:27-31;6:56). 이처럼 어느 편에서 손을 대었든지간에

모두 병이 낳았다. 즉 분명히 그와 같은 신체적인 접촉으로 인하여 치료의 능력이 구

주에게서 나와서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전하여졌던 것이다(5:30;눅 8:46). 그

러나 이것은 결코 어떤 마술이 아니었다. 또한 그치료의 능력은 결코 주님의 손가락이

나 옷자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의지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

온 것이었다. 주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히 4:15) 그 손으

로 병자를 만지실 때 치료의 능력은 발하여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그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셨다. 이 불쌍

한 병자의 간절한 소원과 믿음은 즉시 그를 간절한 마음으로 돕고자 하시는 구주로부

터 응답을 받았다. 이처럼 신속한 응답은 주님의 의지와 능력과 사랑이 하나로 뭉쳐진

결과로 이뤄진것이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에게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

의 두 가지 응답이었다(원하시면 – 원하노니,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깨끗함을 받

으라.) 사실 예수께서는 이처럼 너무도 적절한 응답을 베푸셨을 뿐 아니라 그 문둥병

자에게 ‘더 큰 믿음과 온전한 영혼’까지 덧붙여 응답해 주신 것이다.

=====1:42

곧…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 문둥병 증세가 약간의 차도(差度)가 생긴 것도,

일시적인 회복도 아닌 영원히 그 환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 이적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한편 복음서의 각 평행구 중에 마 8:3은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눅

5:13은 ‘문둥병이 곧 떠나가니라’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곧 문둥병이…떠나가

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두 가지 면을 다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치료는 즉각

적이며 완전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장모는 앓던 열병이 완전히 회복되는데 다음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마 8:14, 15). 중풍병자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침

상를 들고 걸어 나갔다(눅 5:24, 25). 한편 손 마른 사람도 그 자리에서 즉시 회복되

었다(3:1-5).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41절)와 그 목적 하신 바의 성취(42절)는

절대적으로 일치한다.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전능성과 권위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본 이적은 표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식법을 범하신 사건이었으나 내면적으로

는 ‘생명의 성령의 승리’였던 것이다(롬 8:2).

=====1:43

엄히 경계하사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브리마오마이'(*

)는 원래 ‘말처럼 코를 푸르릉거리다’, ‘콧소리를 씩씩내며 분노를 터뜨리다’로서

매우 격분한 상태를 나타내 준다. 따라서 예수께서 경계하셨다는 말씀 속에는 성냄과

분개(憤慨)의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처

럼 분노하셨을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부하신 말씀(44절)을 그 사람이 불순종하리라

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서 예수는 ‘다시는 드

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시게 되었던 것이다(45

절). 진정예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이적 행하는 자’로

알려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곧 보내시며(* , 유뒤스 엑세발렌) – 이를 문자적으로 해

석하면 ‘지체없이 억지로 쫓아 보내시며’가 된다(12절). 이는 앞의 ‘엄히 경계하사’라

는 말과 조화를 이루어 예수의 격렬한 감정을 분명히 노출시키고 있다.

=====1:44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 예수께서는 간곡한 어조로 본 치유 이적을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기를 그 문둥병자에게 당부하셨다(3:12;마 12:16;16:20;27:9;눅

8:56).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신통력있는 자’, ‘기적을 베푸는 자’라는 명

성을 얻게 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

제로부터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던 터인지라 여차하면 능력

많으신 예수께 몰려와 그러한 능력으로 세상 권력을 장악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뻔한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문둥병자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당신

의 사역의 본질적인 목적(복음 전파와 인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분

명하다. 더욱이 그 문둥병자는 제사장앞에서 깨끗함의 선언을 얻기 전까지는 대사회적

으로 어떤 활동도 할 수 없고 또 자신의 몸이 공식적으로 완쾌되었음을 확정짓지도 못

할 것이다.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 문둥병자에서 고침받은 이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깨끗케 된 것을 보임으로 정결 의식을 행하고 그 깨끗케 됨을 제사장에 의해 공식적으

로 선포받아야 했다(레 14:1-20). 그런데 여기 정결 판정을 내리는 제사장은 예루살렘

에 거주하는 제사장 그룹에서 가장 우두머리격의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처

럼 형식적이나마 정결 선포 권한을 제사장이 가졌다고 인정하신 것은 지금껏 진행되었

던 율법 제사의 유효성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와 더불어 그 제사장으로 하여금 그

문둥병이 율법의 교훈에 따라 치유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의 사랑과

능력에 찬 역사(役事)로 이뤄진 것임을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 문둥병을 치료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모세의 명령(레 13,

14장)은 (1)제사장에게 판정을 받고(레 13:16,17), (2)산 새 두마리(two clean living

birds)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드리고(레 14:4), (3)8일후 재차 흠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를 드리는 것(레 14:10)으로 이뤄진다. 이처럼 예수는 모세의 명

한것, 즉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의 이러한 조언을 완수하고서야 비로

소 문둥병자였던 그 사람은 법적으로 회복되어 자유인이 되고 성전 예배 등이 가능한

종교적 사면을 받게 될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

니고 완전케 하실려고 오신것임이 명백하에 입증되었다(마 5:17).

저희에게 증거하라 – 모세의 명령한 것을 드리는 것은 결국 ‘증거를 위한’ 것이었

다. 즉 제사장과 사람들에게 병고친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그 명한 것을 행해야

했던 것이다. 실로 당시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종교의 책임자인 제사장의 치유 판결보

다 더욱 확정적인 판정은 없었다.

=====1:45

그러나 그 사람이…전파하여 – 예수께서 아주 엄격하게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인간의 본성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사실 인간적 측면에서 그가 지금껏 억

압받고 있던 문둥병으로부터 해방된 그 기쁨을 억제하고 끝내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솟구치는 생명에의 환희에 도취되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의

조목조목을 ‘많이'(‘크게’란 뜻), 더욱 열정적으로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 결국 이

는 예수의 복음 사역에 크나큰 장해(障害) 요인이 되고 말았다. 실로 복음의참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열정적인 감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절제, 인내의 덕 및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는…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 여기서 문둥병자가 병고침을 받은 이후의 실

수가 나타난다. 그는 예수의 침묵에의 요청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비한 체험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의 사역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즉 그는 예수로 인한 자신의 치

유 사실을 가는 곳곳마다 소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하게 되었다. 그로 인

해 예수께서는 공공연히 마을에 들어가셔서 사역의 주된 목표인 ‘말씀 전파’를 못하게

되셨던 것이다. 즉 이제 사람들은 오진 신비한 이적에 온 정신이 빼앗김으로써 예수의

전하는 메시지에는 귀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그릇된 메

시야관을 고치시기 위하여 동네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무신 것이

다. 여기서 ‘바깥 한적한 곳’이란 인적이 드문 동네 바깥이나 광야 지역 같은 곳을 말

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한동안 흥분한 그들로 하여금 냉정을 기하게 하셨으며,

수일 후에 가버나움 동리로 들어가셔서 말씀을 전파하신다(2:1). 한편 바로 그런 이유

에서 본문의 ‘다시는…들어가지 못하시고’라는 말이 지닌 의미에 의구심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해결하자면 원문이 의미하는 바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

가 있다. 즉 ‘다시는…못하다'(* , 메케티)란 그 이후 영원히 못하다는

뜻이기 보다 오히려 ‘더 이상 계속해서 못하다'(no longer), 즉 복음 전파 사역을 지

속적으로 계속하지 못하고 잠시나마 중단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욱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처럼 침묵, 은신하시고 계신때에도 사람들의 마

음 속에서는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대가 점차 넓혀지며 커져만 가고 있었다.

사방에서…나아오더라 – 여기서 ‘나아오더라'(* , 에르콘토)는 미완료 시제

로서 갈릴리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음을 암시해 준

다. 실로 생명은 강한 흡입력이 있어서 뭇 심령들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한다.

헬라어 마가복음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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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유앙겔리우 예수 크리스투 투 데오스

개역개정,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새번역,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음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또는 ‘기쁜 소식’

우리말성경,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가톨릭성경,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영어NIV,1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영어NASB,1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영어MSG,1 The good news of Jesus Christ–the Message!–begins here,

영어NRSV,1 The beginning of the good news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 αρχη του ευαγγελιου ιησου χριστου υιου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1 initium evangelii Iesu Christi Filii Dei

히브리어Modern,1 ראשית בשורת ישוע המשיח בן האלהים׃

성 경: [막1: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복음의 시작]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선언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간단한 구절은 아무 뜻 없이 상투적 표현으로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 의식하에서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격으로 자신의 책의 첫 머리에 배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론적 문구가 본서 전체와 연관되는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만 국한(局限)되는 서론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마가는 행 1:21에 나오는 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표현에서 착안하여 세례 요한에 관한 기사의 문두에 이 같은 문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편 마가가 70인역(LXX)의 총 서문이라 할 수 있는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아르케’)이라는 말로 본서 기록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복음의 계시(revelation)가 시작됨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 문구는 본서 전체의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본서의 신적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 하나님의 아들(*, 휘우 데우) –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 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 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1:11;3:11;5:7;9:7;12:6;13:32;14:36,61;15:39). 특히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 p. 120).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融合)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창 6:1-4;욥 1:6;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렘 3:19;호 1:10;11:1)를 가리켰으나,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야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섬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 예수 그리스도 – 본문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 예수 크리스투)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그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無心)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예수아'(*) 등의 헬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주석 참조).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要諦)를 밝히며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것이다(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 크리스토스)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에서 ‘메시야’가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職任)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성 및 그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주석 참조).

󰃨 복음 – 여기서 먼저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 내용이 ‘케뤼그마'(*, ‘선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가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a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Moul,Gospel of Mark,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 시작이라 –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마가는 70인역(LXX)의 서론적 문구인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에는 관사가 없으나 영역(英譯) 성경에는 관사 ‘the'(즉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한층 부각시켜 주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중(暗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호스 게그랖타이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 이두 에고 아포스텔로 톤 앙겔론 무 프로 프로소푸 수 호스 카타스큐아세이 텐 호돈 수 엠프로스덴 수

개역개정,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새번역,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예언서들에’ ㉤말 3:1 ㉥그, ‘네 얼굴 앞에’

우리말성경,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내가 네 앞에 내 심부름꾼을 보낼 것이다.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말3:1

가톨릭성경,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영어NIV,2 It is written in Isaiah the prophet: “I will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영어NASB,2 As it is written in Isaiah the prophet: “BEHOLD, I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영어MSG,2 following to the letter the scroll of the prophet Isaiah. Watch closely: I’m sending my preacher ahead of you; He’ll make the road smooth for you.

영어NRSV,2 As it is written in the prophet Isaiah, “See, I am sending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헬라어신약Stephanos,2 ως γεγραπται εν τοις προφηταις ιδου εγω αποστελλω τον αγγελον μου προ προσωπου σου ος κατασκευασει την οδον σου εμπροσθεν σου

라틴어Vulgate,2 sicut scriptum est in Esaia propheta ecce mitto angelum meum ante faciem tuam qui praeparabit viam tuam

히브리어Modern,2 ככתוב בנביאים הנני שלח מלאכי לפניך ופנה דרכך לפניך׃

성 경: [막1: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 저자 마가는 우리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먼저 출 23:20과 말 3:1을 인용하고 난 다음에, 3절에서 비로소 70인역(LXX)에 의해 사 40:3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마가가 모세나 말라기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단지 선지자 이사야만을 거론한 것은 마가의 구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아니라 상세한 기술을 피하고자 하는 마가의 저작 의도에 따라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사야의 이름만을 언급했다고 본다. 두 구절은, 2절의 사자가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의예수에 대한 임무를 말했다면, 3절의 ‘소리’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보다 강조점을둔 것으로서, 서로 상관되며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에 대한 구약의 예언적 문구이다. 한편 마가는 이처럼 복음서 초두에 구약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사역과 본질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히브리어 성경 말 3:1에서 인용되었으나, 히브리어 성경과70인역은 ‘네 길을’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직접 개입을 강조하는 ‘내 앞에서 길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메시야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런 의도적 변용(變用)은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랍비들도 말 3:1의 엘리야와 출 23:20의사자(使者)를 동일시하여 이 두 부분을 비슷한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이는 고대 근동에서 군주가 행차할 때 도중의 일반 백성들에 대한 교육, 군지 숙식을 준비하던 풍습 등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구야과 신약의 분기점이 되시는 예수의 등장에 앞서 지금껏 진행되어 온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심령을 먼저 준비시키기 위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완벽히 예언된 구절이다. 특별히 여기서 ‘예비하리라’는 뜻의 헬라어 ‘카타스큐아조'(*)는 ‘준비하다’는 의미뿐 아니라 ‘돌이키다’는 뜻도 함의(含意)하고 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메시야 도래를 위한 준비 사역중 사람들의 타락하고 부패한 심령을 돌이켜 오실 예수를 영접하도록 하는 회개에의 사역에 가장 큰 비중이 주어짐을 시사한다(마 3:1-12,주제강해 ‘세례요한의 인물 연구’ 참조).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헤토이마사테 텐 호돈 퀴리우 유데이아스 포이에이테 타스 트리부스 아우투

개역개정,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새번역,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 ㉦사 40:3(칠십인역)

우리말성경,3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가 있다. ‘주를 위해 길을 예비하라. 그분을 위해 길을 곧게 하라’” 고 기록돼 있는 대로 사40:3

가톨릭성경,3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기록된 대로,

영어NIV,3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paths for him.'”

영어NASB,3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MAKE READY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영어MSG,3 Thunder in the desert! Prepare for God’s arrival! Make the road smooth and straight!

영어NRSV,3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헬라어신약Stephanos,3 φωνη βοωντος εν τη ερημω ετοιμασατε την οδον κυριου ευθειας ποιειτε τας τριβου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3 vox clamantis in deserto parate viam Domini rectas facite semitas eius

히브리어Modern,3 קול קורא במדבר פנו דרך יהוה ישרו מסלותיו׃

성 경: [막1: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본 절은 사 40:3의 70인역의 인용으로서, 70인역과 본문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70인역의 ‘우리 하나님의’라는 말 대신 여기서는 ‘그의’라는 말이 사용된 점이다. 이는 마가의 의도적 변용일 수도 있고, 마가가 참조한 사본의 원문이 이미 그러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여기서 ‘그의’라는 말의 선행사는 ‘주'(*, 퀴리오스)가 되는데, 이 칭호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부르던 것이므로 본 구절은 분명 주 예수에 대한 기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광야에 – 여기서 ‘광야'(*, 에레모스)란 문자적으로 반드시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버려지고 황량한 처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곳은 개간되어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활용되는 곳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한편 마 3:1에서는 이것을 ‘유대 광야’라고 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유대 산지와 동쪽으로 요단 저지대, 남쪽으로 사해, 북쪽으로 얍복강과 요단강이 합류되는 지점까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광야 지역은 석회질의 토양 위에 자갈과 바위가 널려 있었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복이 심한 황폐하고 메마른 불모 지대로서 여기저기 뱀들이 기어다니고 야수들이 출몰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곳 부근에는 쿰란(Qumran) 공동체의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쿰란 공동체의 영향력이 요한에게 어떤 양상으로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금욕생활과 엄격한 자제력 등은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 사역이나 복음 전파 내용과 종말론적 사고 등에 관해 전반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눅 3:1-20 주제 강해, ‘세례요한의 세례’ 참조). 그런데 세례요한의 활동무대는 이곳 유대 광야 지역뿐 아니라 요단강 동편 지역에까지 확장되었던 사실이 마 3:5에서 분명히 밝혀진다(요 1:28 주석 참조). 한편 출애굽 당시(출23:2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사자(使者)를 앞서 보내심으로 그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받게 하셨다. 본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제 2의 출애굽 때에 다른 한 사자(즉 세례 요한)을 광야에 앞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파하고 예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로 신령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게 하신다. 눅 7:24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질문하셨다. 광야는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운 곳이다. 실로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참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비로소 행복을 구가(謳歌)할 수 있을 것이다.

󰃨 예비하라(*, 헤토이마사테) – 이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 ‘예비’하는 그 행위의 긴급성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듣는 즉시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예비하라는 것이다.

󰃨 첩경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유데이아스…타스 트리부스'(*)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말로서 고대 페르시아나 로마에서 왕들과 그의 측근들을 위해 건설해 놓은 특별한 도로망을 의미한다. 즉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와 죄악으로 일그러지고 구부러진 심령들이 회개함으로 그들 속에 쉽게 들어오시도록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마3:2, 3;눅 3:8).

󰃨 기록된 것과 같이 – 헬라어 원문에는 본 문장이 2절 초두에 제시되어 2, 3절에 언급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포괄하고 있다. 문장 어순이 다른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무시하고 3절 하반부에 서술적 형태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록된’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그라프타이'(*)는 완료형 시제로서 어떤 행위가 과거에 완성되어 그 결과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본문은 ‘기록되어 현재도 효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약 기자들은 성경의 변함없는 권위에 대한 자신들의 강한 신념을 내비치기 위해 구약을 이용할 경우 이러한어법(語法)을 자주 사용한다. 한편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게 된 것은 요한 자신만의 어떤 깨달음이나 또는 신비한 능력이 반영된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그대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는 또한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구속 사건 역시 우발적으로 일어날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예언되고 기록된 대로 전개되는 것임을 암중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특히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한다(마 2:5;4:4;11:10 등).

에게네토 요안네스 밮티존 엔 테 에레모 카이 케뤼쏜 밮티스마 메타노이아스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개역개정,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새번역,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 ㉧또는 ‘침례자’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가톨릭성경,4 침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였다.

영어NIV,4 And so John came, baptizing in the desert region and preaching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영어NASB,4 John the Baptist appeared in the wilderness preaching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영어MSG,4 John the Baptizer appeared in the wild, preaching a baptism of life-change that leads to forgiveness of sins.

영어NRSV,4 John the baptizer appeared in the wilderness, proclaiming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헬라어신약Stephanos,4 εγενετο ιωαννης βαπτιζων εν τη ερημω και κηρυσσων βαπτισμα μετανοιας εις αφεσιν αμαρτιων

라틴어Vulgate,4 fuit Iohannes in deserto baptizans et praedicans baptismum paenitentiae in remissionem peccatorum

히브리어Modern,4 ויהי יוחנן טבל במדבר וקורא טבילת התשובה לסליחת החטאים׃

성 경: [막1: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세례 요한이 이르러 – 마가는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세례 요한의 등장과 행적만을 말하나, 요한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란 사실을 요 1:6에서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누가는 세례 요한의 어린 시절에 그에게 주어졌던 예언을 언급함으로써(눅 1:76, 77) 앞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명의신적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미 1장에서부터 마가복음은 예수시대의 배경이나 그시대의 사실보다 시대 자체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마가 복음의 특징이다. 이에 많은 주경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가장 단순 명료하게, 즉 주관적 가감(加減)없이 예수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 이 말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죄 사함에 관련된’이라고 되어야 한다.바로 그런 취지에서 흠정역에서는 이것을 ‘죄 사함을 위한'(for the remission ofsin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에이스'(*)의 용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대부분이 목적격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전후 문맥상 마10:41;12:41 등에서와 같이 그러한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에 관련된’,’…때문에'(because of)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세례’ 자체가 죄를 사해주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통해 사죄를 받기 위한 하나의 공식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 회개의 세례(*, 밥티스마 메타노이아스) – 이는 회개를 중심으로 하여 베풀어지는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회개'(*, 메타노이아)란 어원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로 사용되어 생각과 의지와 인격의 변화, 곧 전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신중한 전환’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이 진실한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은 죄사함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죄사함에 대한 예비적 단계로서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당시 극도로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일깨워 주고그들의 몸의 외적 정결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깨끗함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8절 주석 참조, 행 1:4, 5;19:2에서 각각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주제 강해를 다루기로 한다)는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의 긍휼을얻을 단계로 진일보(進一步)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례'(*, 밥티조)는 ‘물 속에 잠기다’는 의미로서 일종의 침례 예식을 뜻한다(마 3:6 주석 참조). 그런데이 세례는 기독교에서 새롭게 창출해 낸 의식이라기 보다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정착(定着)되어 온 것이다(G. F. Moore). 그러나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유대인들에 의해 전통적, 의식적으로 내려왔던 그 세례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죄의 고백에 관한 기본 원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울이 나중에 롬 6:4에서 설명한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일찍이 헬레니즘(Eleusinian cult), 이시스 숭배(Isis worship) 등 여러 밀의 (密意)종교들 가운데서도 시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회개하고 죄를 자복함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일종의 이교도들로 다루고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베풀어진 요한의 세례는 유대 민족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 행위로 그들에게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요한은 나중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그가 외친 ‘회개의 세례’에 대한 음성은 오늘날까지 살아 역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례는 단순히 의식적이고 형식적인데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교의(dogma)에 의해 세례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써 교인(church man)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신자(christian)는 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중심의 회개, 즉 세례 요한이 강조하였던 ‘회개의 세례’에 있다.

카이 엨세포류에토 프로스 아우톤 파사 헤 유다이아 코라 카이 호이 히에로솔뤼미타이 판테스 카이 에밮티존토 휲 아우투 엔 토 요르다네 포타모 엨소몰로구메노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아우톤

개역개정,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새번역,5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5 유대 온 지방과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영어NIV,5 The whole Judean countryside and all the people of Jerusalem went out to him.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영어NASB,5 And all the country of Judea was going out to him, and all the people of Jerusalem; and they were being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confessing their sins.

영어MSG,5 People thronged to him from Judea and Jerusalem and, as they confessed their sins,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into a changed life.

영어NRSV,5 And people from the whole Judean countryside and all the people of Jerusalem were going out to him, and were baptized by him in the river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εξεπορευετο προς αυτον πασα η ιουδαια χωρα και οι ιεροσολυμιται και εβαπτιζοντο παντες εν τω ιορδανη ποταμω υπ αυτου εξομολογουμενοι τας αμαρτια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5 et egrediebatur ad illum omnis Iudaeae regio et Hierosolymitae universi et baptizabantur ab illo in Iordane flumine confitentes peccata sua

히브리어Modern,5 ותצא אליו כל ארץ יהודה ובני ירושלים ויטבלו כלם על ידו בנהר הירדן מתודים את חטאתם׃

성 경: [막1: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 마가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설교에 거족적(擧族的)이고 대대적인 호응이 있었음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었지만 마태와 누가는 이들 무리들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마 3:1-12;죽 3:7-14). 즉 그들 중에는 형식과 의식을 중요시하는 오만한 바리새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되어버린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일반 민중들을 노략하고 약탈하는 군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고 착취하다가 경멸받고 증오받던 세리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 세례 요한의 신선하고 생명력있는 설교(즉 회개에 대한설교)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즉각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본 구절에서 특별히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all)란 표현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와 같은 요한의 회개 운동은 예수 공생애 사역 이전에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수백년 동안 진정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 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이 대망해왔던 메시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눅 3:15). 특히 그가 전파했던 메시지의 내용이 메시야의 임박한 도래였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휩쓸렸을 것이 자명하다.

󰃨 나아가(*, 엑세포류에토) – 원문상 미완료 시제로서 백성들이 요한에게 ‘계속해서 나아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마가의 이같은 보고는 조금 과장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세례 요한의 선포가 전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나아가 상당한 기대와 동요(動搖)를 초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엔 데 요안네스 엔데뒤메노스 트리카스 카멜루 카이 조넨 데르마티넨 페리 텐 오스퓐 아우투 카이 에스디온 아크리다스 카이 멜리 아그리온

개역개정,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새번역,6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우리말성경,6 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습니다.

가톨릭성경,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영어NIV,6 John wore clothing made of camel’s hair,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e ate locusts and wild honey.

영어NASB,6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wore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diet was locusts and wild honey.

영어MSG,6 John wore a camel-hair habit, tied at the waist with a leather belt. He ate locusts and wild field honey.

영어NRSV,6 Now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e ate locusts and wild honey.

헬라어신약Stephanos,6 ην δε ιωαννης ενδεδυμενος τριχας καμηλου και ζωνην δερματινην περι την οσφυν αυτου και εσθιων ακριδας και μελι αγριον

라틴어Vulgate,6 et erat Iohannes vestitus pilis cameli et zona pellicia circa lumbos eius et lucustas et mel silvestre edebat

히브리어Modern,6 ויוחנן לבוש שער גמלים ואזור עור במתניו ואכל חגבים ודבש היער׃

성 경: [막1:6]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약대털을 입고…가죽띠를 띠고 – 이는 마태와 마가, 두 기자가 동시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부분으로서 세례 요한의 의식주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마 3:4). 한 마디로 말해 그의 의식주 생활은 단순, 소박, 그리고 청빈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입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데뒤메노스'(*,havingbeen clothed with )는 아직도 그 옷을 입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말로서 기자는 요한이 줄곧 그 약대 털옷을 입고 생활했음을 보여 준다. 성화(聖畵)를 그리는 화가들은 종종 요한의 광야 생활을 나타내고 그림으로 요한의 옷을 약대 가죽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옷은 길게 축 늘어진 약대털로 짠 볼품없는 옷으로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입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러한 옷에는 자연히 허리에 가죽띠를 맬 수 밖에 없었다. 이 허리띠는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급히 달려갈 때에도 옷이 펄럭거리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특히 활동성이 요구될 때에 필요한 유대인 의상의 필수품이었다. 한편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때로 털옷을 입었는데 이는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신의 감정을 강력히 상징하기 위해서였으며 심지어는 거짓 선지자까지도 자신을 참 선지자로 가장(假裝)하기 위하여 이 털옷을 입었다고 하였다(슥 13:4).그리고 아하시야 왕의 사자들이 왕에게 엘리야를 설명할 때(왕하 1:8)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라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주된 관심인 의식주 생활에서 과감히 탈피(脫皮)하여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고 그들 자신이 청빈한 삶을 하나님 말씀의 ‘소리’가 되기에 필요 충분 조건이 될 수 있었다.

󰃨 메뚜기 – 철저히 율법에 입각한 경건주의자였던 요한은 레 11:22에서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허용하신 곤충 중의 하나인 메뚜기를 먹었다. 이 메뚜기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사용했던 평범한 음식이었다고는 하나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연 재해로 인해 소출(所出)이 줄어든 해에 먹는 일종의 대용 식품이었으나 이 메뚜기는 특별히 봄철에 많이 생겼으며 때때로 큰 떼로 몰려다니곤 했었다(출 10장;욜 1:1-12). 오늘날에도 아랍인들 사이에는 이것의 다리와 날개는 잘라버린 뒤에 굽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소금에 절여 두어 저장 식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은 원래 제사장의 아들로서부요한 자였지만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가난한 자가 먹는 음식을 먹음으로 생명을 부지해 나갔다.

󰃨 석청 – 어떤 주경학자는 이 석청을 그곳에서 서식하던 여러 나무들에서 채취(採取)한 수액일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 말의 헬라어 ‘멜리'(*)는 야생의 벌꿀을 의미한다. 팔레스틴 중에서도 특히 이 광야에서의 야생의 꿀은 달기로 유명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세례 요한의 생활 양식은 철저한 자기 절제와 금욕을 지향하는 나실인(Nazirite)으로 특징지어진다(민 6:8;삿 16:17 주석 참조;눅 1:15). 실로 그는 오직 회개의 세례와 임박한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육적인 욕망을 절제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식주 생활에서의 극기의 삶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의 귀감(龜鑑)이 된다.

카이 에케뤼쎈 레곤 에르케타이 호 이스퀴로테로스 무 오피소 무 후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 큎사스 뤼사이 톤 히만타 톤 휘포데마톤 아우투

개역개정,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새번역,7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우리말성경,7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내 뒤에 오실 텐데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다.

가톨릭성경,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영어NIV,7 And this was his message: “After me will come one more powerful than I,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stoop down and untie.

영어NASB,7 And he was preaching, and saying, “After me One is coming who is mightier than I, and I am not fit to stoop down and untie the thong of His sandals.

영어MSG,7 As he preached he said, “The real action comes next: The star in this drama, to whom I’m a mere stagehand, will change your life.

영어NRSV,7 He proclaimed, “Th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is coming after me; I am not worthy to stoop down and untie the thong of his sandals.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εκηρυσσεν λεγων ερχεται ο ισχυροτερος μου οπισω μου ου ουκ ειμι ικανος κυψας λυσαι τον ιμαντα των υποδηματω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7 et praedicabat dicens venit fortior me post me cuius non sum dignus procumbens solvere corrigiam calciamentorum eius

히브리어Modern,7 ויקרא לאמר בוא יבא אחרי החזק ממני אשר אינני כדי לכרע ולהתיר את שרוך נעליו׃

성 경: [막1:7]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오시나니 – 마가는 여기에서 매우 장엄하고도 위엄에 찬 동사 ‘오사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케타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그 당시 극도로 고조되고 있던 유대인의 메시야 대망 사상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표현 양식이다. 이런 표현 양식은 창 49:10에서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구약성경의 예언을 기반(基盤)으로 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동사 ‘에르케타이’는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서 그분이 지금 막 오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시각은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종말적 역사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가는 이 동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위치시킴으로써 메시야 오심의 현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하지만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어법상 문장 끝에 나와 있음).이 ‘오실’이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설명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라는 것인데, 이는 그분의 전지 전능성에 비추어 볼 때, 요한 자신은 그분의 종의 종이 되기에도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광야에 모여든 유대 백성들 사이에는 요한이 ‘능력 많은 자'(the mighty man)란 소문이 만연되어 있었을 것이며, 혹시 이 자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에(요 1:19, 20;3:25-36), 이러한 그릇된 오해를 간단한 이 한 마디 말로써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탄생에서 뿐만 아니라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 뒤에 오셨다(눅 1:26,36). 하지만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 사이에는 무한과 유한, 영원과 순간, 그리고 태양의 원(原) 빛과 달의 반사광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요 1:15-17).

󰃨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 세례 요한은 자신과 곧 임하실 ‘능력이 많으신 이’ 사이의 강한 대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들 중에서 한 가지 실례를 사용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주인이 여행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종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먼지로 더러워진 주인의 신발끈을 풀어 신을 벗기고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 주는 것이었다. 마태는 단지 신의 끈(영어의 ‘latchet’는 오늘날의 구두끈에 해당하는 말임)을 푸는 데만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지만(마 3:11), 마가는 이것을 풀기 위하여서 굽히는 행위까지를 첨가하여 표현하였다. 이것은 곧 임하실 메시야의 위대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세례 요한은 가까운 미래에 임하실 그분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오실 메시야는 영원전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역사속에 오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조금도 자기 비하나 미사 여구(美辭麗句)나 과장이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 충만한 한 선지자로서 절대 불변한 진리를 사실 그대로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에고 멘 에밮티사 휘마스 엔 휘다티 아우토스 데 밮티세이 휘마스 엔 프뉴마티 하기오

개역개정,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새번역,8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영어NIV,8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영어NASB,8 “I baptized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영어MSG,8 I’m baptizing you here in the river, turning your old life in for a kingdom life. His baptism–a holy baptism by the Holy Spirit–will change you from the inside out.”

영어NRSV,8 I have baptized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γω μεν εβαπτισα υμας εν υδατι αυτος δε βαπτισει υμας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라틴어Vulgate,8 ego baptizavi vos aqua ille vero baptizabit vos Spiritu Sancto

히브리어Modern,8 אנכי טבלתי אתכם במים והוא יטבל אתכם ברוח הקדש׃

성 경: [막1:8]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성령으로…세례를 주시리라 – 여기에서 ‘물’과 ‘성령’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본질상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즉 요한은 외적이며 성례전적 측면에서 그리고 성령 세례의 예비적 단계로서 물을 통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적이며 본질적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영혼의 정결과 중생과 사죄의 은총을 가능케하는 구속의 완성적 측면에서 성령을 통해 각자의 심령에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다. 한편 물과 불, 이 두 단어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엔'(*)은 도구격 조사’…로서’로 번역되지만 분명히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성령은 마치 물과 같이 세례에 대한 방편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두 경우 모두 ‘엔’을사용한 것은 두 종류의 세례가 지니는 성례전적(聖禮典的) 의미와 그 각각의 효능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지만 세례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태는 여기에다가 흔히 성경 문학적으로 볼 때 정화, 정결, 심판 등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불’이란 대칭 용어를 사용함으로 성령 그 자체보다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본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마 3:11). 실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불과 같은 뜨겁고 강렬한 역사로서 믿는 자들에게는 내적인 성결과 열정을 제공하였고 불신자들에게는 종말적으로 임할 심판을 예고하였다(행 2:3). 어쨌든 메시야의 선구자로서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요한은 단순히 거룩한 예식의 측면에서 물을 통한 세례를 집례(執禮)했지만 신적 권위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는 성령을 통해 각 심령에 당신의 내밀하고도 뜨거운 불 세례를 집례하셨다(Lenski). 이 같은 성령 세례는 예수의 승천 이후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공적으로 활발히 시행되어 오고 있다. 한편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를 성령 세례와는 완전히 관계없는 단순히 물로써만의 형식적 예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형식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 요한의 세례는 예수의 불 세례를 준비케 하는 예비적 단계로서, 이 역시 성령의 확실한 조명과 후원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에 따른 불 세례가 있기 전에도 성령께서는 인간 구원과 진리 전파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셨고 또 그 일에 부름받은 사역자들의 활동에 깊이 개입하셨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또한 한 가지 사실은 요한이 무리들에게 표현한 바 자신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에 대한 시제와 관계된 부분이다. 요한 자신의 세례에 대해 ‘세례를 주었거니와'(*, 에밥티사)인 부정과거형으로 언급한 데 비해, 예수의 세례에 대해서는 ‘세례를 주시리라'(*, 밥티세이)인 미래형으로 언급하였다. 이말에 대해 예수께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재차 확증해 주셨다(행 1:5). 이로써 우리는 인간 세례 요한의 단회성과 불완전성 및 한시성(限時性)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세례의 완전성과 영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예수의 이와 같은 신령한 세례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모든 심령들에게 성령을 끊임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요 16:7;행 2장).

카이 에게네토 엔 에케이나이스 타이스 헤메라이스 엘덴 예수스 아포 나자렡 테스 갈릴라이아스 카이 에밮티스데 휘포 요안누 에이스 톤 요르다넨 요안네스

개역개정,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새번역,9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9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 강으로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다.

영어NIV,9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영어NASB,9 In those days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영어MSG,9 At this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영어NRSV,9 In those days Jesus came from Nazareth of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εγενετο εν εκειναις ταις ημεραις ηλθεν ιησους απο ναζαρετ της γαλιλαιας και εβαπτισθη υπο ιωαννου εις τον ιορδανην

라틴어Vulgate,9 et factum est in diebus illis venit Iesus a Nazareth Galilaeae et baptizatus est in Iordane ab Iohanne

히브리어Modern,9 ויהי בימים ההם ויבא ישוע מנצרת אשר בגליל ויטבל על ידי יוחנן בירדן׃

성 경: [막1:9]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그 때에(*, 엔 에케이나이스 타이스헤메라이스) – 이 말에 대한 문자대로의 번역은 ‘그 날들에’이다. 이는 분명한 시기곧 앞에서 계속 언급되어왔던 세례 요한의 회개에의 세례 사역이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고 있던 그 기간을 지칭한다. 더욱이 이 표현은 역사상에 위대한 한 사건이 나타날 것이라는 데 주의를 끌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유대 백성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례 요한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는 배경적 설명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배경적인 내용보다 더 중요하고 심대한 사건이나 인물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세례 요한이 예고하고 그 권위를 더 높이고 있었던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실로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30여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사신 것을 청산하시고 이제 곧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는 시기를 맞고 계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관해 익히 알고 계셨지만 그 즉시 오시지 않고 그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실 바로 ‘그 때’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예고해 주는 장중한 포고령이요 대서사시의 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이다.

󰃨 갈릴리 나사렛 – 이곳은 예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신 후 다시 귀국하여 정착하고 유아기부터 청년기를 거치면서 계속 살아오셨던 예수의 실제적인 고향으로서(마 2:23;눅 4:16 주석 참조) 예루살렘 북방 약 120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 488m의 구릉지의 분지이다. 이곳은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과 더불어 기독교의 고향으로 여겨지는 매우 뜻깊은 곳이다(마 2:23 ; 3:13 주석 참조). 한편 마가는 ‘나사렛’이란 지명을 첨가시킴으로써 이방인 독자들에게 그곳의 지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에 비해 누가는 이 지명을 아예 생략했으며 마태는 ‘갈리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마 3:13)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수만리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의 신자들 곧 예수에 대해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바로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역사성을 입증해 주기 위한 마가의 노력의 한 표현이다.

󰃨 요단강에서 – 헬라어 원문에 제시된 본문의 전치사(*, 에이스)는 ‘안에서’,’안으로'(in, into)란 뜻으로 예수의 수세(受洗)가 요단강 안에서 베풀어졌음을 암시한다. 특히 이 표현은 다음에 언급될 ‘세례’라는 어의(語義)와 10절의 ‘물에서 올라오다’는 말과 조화를 이뤄 예수의 수세 방법이 침례(侵禮)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세 방법의 절대적 원칙을 고수하는 일은 또하나의 독선이 될가능성이 있다.

󰃨 세례를 받으시고(*,에밥티스데) – 이 단어의 원형 ‘세례를 주다'(*, 밥티조)라는 말은 ‘물에 잠그다'(70인역-왕하 5:14; 시 68:23), ‘물로 씻는다'(7:4;눅 11:38;딛 3:5)등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는 ‘세례’혹은 ‘침례’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 세례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는 ‘물에 잠그다’는 침례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고, 구약 율법의 제사 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속죄를 위한 뿌림(레 14:7;16:14,15)등의 관점에서(민 8:7) 정결례로 볼 때는 ‘물로 씻는다’는 세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처럼 세례와 침례의 효력과 그 중요성은 거의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세례 혹은 침례라는 그 외적 형식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식이 의도하고 있는 바 구원의 확신과 그 이후 변화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 중심을 떠난 의식만을 제기한다는 것은 사변적인 논쟁에 빠질 우려가 있다.

카이 유데오스 아나바이논 아포 투 쉬다토스 에이덴 스키조메누스 투스 우라누스 카이 토 프뉴마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타바이논 엪 에이스 아우톤

개역개정,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새번역,10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우리말성경,10 예수께서 물에서 막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가톨릭성경,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영어NIV,10 As Jesus was coming up out of the water, he saw heaven being torn open and the Spirit descending on him like a dove.

영어NASB,10 Immediately coming up out of the water, He saw the heavens opening, and the Spirit like a dove descending upon Him;

영어MSG,10 The moment he came out of the water, he saw the sky split open and God’s Spirit, looking like a dove, come down on him.

영어NRSV,10 And just as he was coming up out of the water, he saw the heavens torn apart and the Spirit descending like a dove 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ι ευθεως αναβαινων απο του υδατος ειδεν σχιζομενους τους ουρανους και το πνευμα ωσει περιστεραν καταβαινον επ αυτον

라틴어Vulgate,10 et statim ascendens de aqua vidit apertos caelos et Spiritum tamquam columbam descendentem et manentem in ipso

히브리어Modern,10 ויהי אך עלה עלה מן המים וירא את השמים נבקעים והרוח כיונה ירדת עליו׃

성 경: [막1:10]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곧(*, 유뒤스) – ‘곧바로’, ‘당장에’라는 긴급성을 강조한 부사로서 이부사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지니는 한 특징인데(약 41회). 이 단어는마가의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박진감을 더해 준다.

󰃨 물에서 올라오실새 – ‘…에서’를 뜻하는 원어 ‘아포'(*)는 ‘완전히 잠긴 물속에서부터’라는 의미이기 보다 오히려 신체 어느 부분에 적용되는 단지 ‘물 안에서’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말은 예수의 세례의 형식(세례, 침례)에 관심을 둔 것이기 보다 세례 예식이 모두 종결되고 예수께서 육지로 발을 내디디시는 순간을 강조하는 말로 볼 수 있다.

󰃨 하늘이 갈라짐 – 마가의 보고에 따르면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장면을 본 사람이 오직 예수뿐이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 이는 마가의 초점이 예수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지 요한에 대해 말하려 함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하늘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 ‘하늘이 갈라지다'(*, 스키조, ‘찢다’는 뜻)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기록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매우 차분한 용어인 ‘아노이고'(*, ‘열다’)를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하늘이 갈라진다는 것은 인류가 대우주적 전기(轉期)를 맞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이제 인류는 절망의 하늘을 ‘찢고’ 새 소망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 64:1의’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을 반영하고있다고 본다.

󰃨 성령이 비둘기같이…내려오심을 – 초대 교회 이단자들은 영원한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에게 인격적으로 잠시 거하기 위해 내려오신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본 사건을그 논거로 채택하였다(요일 4:1-6, 주제 강해 ‘영지 주의’ 참조). 후에도 성서 비평가들은 예수의 영원한 신성(神性)과 더불어 예수의 역사적인 성육신(Incanation)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박하기 위하여 이들의 견해를 인용하곤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세례시에 그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가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실 때 성령께서 떠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영원한 그리스도에게 본문에서 특별히 가시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은 대선지자로서의 권위와 직무의 전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확증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는 성령께서 예수에게 임하신 것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복종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눅 3:21). 한편 본문에서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셨다고 했는데(요 1:32) 이는 성령의 순결하고도 온유한 통치와 특성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사실은 공생애 시작에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 기름 부음을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기름 부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친히 이 기름 부음에 관한 사실을 주장하셨기 때문이다(눅 4:18). 특별히 본문의 이 같은 장면은 구약 시 45:7;사 61:1 등에서 이미 예언된 바 있는 것으로 예수께 대한 성령의 영원한 은사 부여를 보여 주고 있다.

󰃨 보시더니 –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신 후 곧 기도하셨는 데(눅 3:21) 바로 그 순간 하늘의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게 되신 것이다. 한편 이때 이 기이한 현상은 자연계에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supernatural appearance)으로서 그곳에 모인 우리들이 함께 목격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카이 포네 에게네토 에크 톤 우라논 쉬 에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개역개정,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새번역,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 ㉭또는 ‘내 아들, 내 사랑하는 자다’

우리말성경,11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무척 기뻐한다.”

가톨릭성경,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영어NIV,11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Son, whom I love; with you I am well pleased.”

영어NASB,11 and a voice came out of the heavens: “You are My beloved Son, in You I am well-pleased.”

영어MSG,11 Along with the Spirit, a voice: “You are my Son, chosen and marked by my love, pride of my life.”

영어NRSV,11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Son, the Beloved; with you I am well pleased.”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φωνη εγενετο εκ των ουρανων συ ει ο υιος μου ο αγαπητος εν ω ευδοκησα

라틴어Vulgate,11 et vox facta est de caelis tu es Filius meus dilectus in te conplacui

히브리어Modern,11 ויהי קול מן השמים אתה בני ידידי אשר רצתה נפשי בו׃

성 경: [막1:1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 이는 분명 말라기 선지자 이후 단절되었던 계시의 맥을 잇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뜻한다. 랍비들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목소리의 울림’, 곧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는 구별되는 ‘소리의 딸’이라는 하급 계시가 말라기선지자 이후에도 계속 전해져 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본문의 ‘하늘로서의 소리’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마 3:17 주석 참조). 한편 하늘에서 들려진 소리는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의 즉위 개념(시 2:6)과 고난받는 주의 종의 개념(사 42:1)이 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마 3:17 주석 참조).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늘 소리가 강조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가장 사랑받는 독생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실로 마가는 그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바있다(1:1).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계신 것이다. 즉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당신의 아들됨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신다. 한편 레인(Lane,William L.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p. 58)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언하신 말씀의 첫 구절(“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은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영원하고 필연적인 관계성을 보여 주며, 둘째 구절(“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은 부정과거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역사상의 어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과거에 선택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 내 사랑하는 아들(*, 호 휘오스 무 호아가페토스). – 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나의 그 사랑하는 그 아들’ 이라고 되어야한다. 여기에서는 정관사 ‘그’가 명사와 형용사에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그 어의(語義)를 점차로 높이며 강조하는 수사법이 쓰이고 있다. 이렇듯 성부 하나님께서부터 성자 하나님에게 명명된 이 사랑은 일시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완전 무궁한 사랑, 영원 지고한 사랑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아가페토스(*)는 사랑의 최고 형식을 지시하는 말로서(Lenski)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악취나는 이 세상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시고자 도성 인신(道成人身)하신 것이다(요 1:1,14).

󰃨 너를 기뻐하노라 – 이 말은 앞에서 언급된 ‘사랑하는’이란 말의 이유도 아니며 귀결이나 결론적인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뻐하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메사'(*)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역사적인 과거의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역성경의 ‘내가 그를 아주 기뻐하노라(KJV, in whom I am well pleased)란 번역이나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러한 의미에서 잘못되었다. 물론 이러한 문법구조가 영원한 현재에 관려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과거의 시상은 요단강변에서 성육신하신 아들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신 것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선포의 증거로서 예수 위에 아버지의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이다.

카이 유뒤스 토 프뉴마 아우톤 에크발레이 에이스 텐 에레몬

개역개정,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새번역,12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우리말성경,12 그러고 나서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가톨릭성경,12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영어NIV,12 At once the Spirit sent him out into the desert,

영어NASB,12 Immediately the Spirit impelled Him to go out into the wilderness.

영어MSG,12 At once, this same Spirit pushed Jesus out into the wild.

영어NRSV,12 And the Spirit immediately drove him out into the wilder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ευθυς το πνευμα αυτον εκβαλλει εις την ερημον

라틴어Vulgate,12 et statim Spiritus expellit eum in desertum

히브리어Modern,12 ואחרי כן הוציאו הרוח המדברה׃

성 경: [막1:1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광야에서의 시험]

󰃨 성령이…몰아내신지라 – 공관 복음의 세 기자들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나갔음에 대하여 모두 기록하고 있다(마 4:1;눅 4:1). 여기서 ‘광야’란 성경 문학적으로 타인과 완전히 결별된 곳, 또는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생각된다(사 13:21;마 12:43;계 18:2). 그런데 당시 예수께서 실제로 금식하셨던 광야가 과연 어디였던가에 대해서 의견이 구구하다. 즉 혹자(Alford)는 모세와 엘리야의 금식 장소였던 호렙산으로, 또는 외경 ‘히브리인의 복음’에서는 다볼산으로, 그리고 또 다른이는(De Wette)여리고 근처의 한 곳으로 보기도 한다. 그중에서 이곳이 세례받으신 곳과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제일 마지막 견해를가장 타당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실을 확증하기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을 ‘콰란타니아'(Quarantania), 곧 예수의 40일 금식장소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세례와 시험 사건 사이에 깊은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특징적인 표현인 ‘유뒤스'(*, ‘즉시’)를 사용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예수의 겸손하고도 강한 인류애의 마음을, 전혀 죄가 없으신 그분이 죄인된 자로서의 세례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신 것과 사단의 시험을 한시적으로나마 인정하신 이 두 가지 연속된 사건으로써 표출시키고 있다. 한편 본서의 강한 이미지에 비해 마태와 누가는 완곡한 동사를 사용하였다. 즉 그들은 이 시험 사건을 보고하면서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서'(was ledby the Spirit ‘성령에 인도되어서’, NIV) 광야로 나아갔음을 묘사한 것에 비해 마가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에크발에이'(*, ‘내쫓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됨)를 사용해서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의 이 기록은 전자의 두 기록보다 더욱 역동적이며 생생한 현장감(現場感)을 나타내 주고있다. 물론 이것은 예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협박과 강압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역동적인 이끄심에 대해 예수께서 적극적인 의지로써 호응하신 것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예수의 뜻과 성령의 뜻이 완전히 합치되어 있었으므로 장차 40일 금식 동안 사단과 더불어 싸울때의 승리를 예상할 수 있게 해준다(마 4:1-11;눅 4:1-13)

카이 엔 에케이 엔 테 에레모 헤메라스 테싸라콘타 페이라조메노스 휘포 투 사타나 카이 엔 메타 톤 데리온 카이 호이 앙겔로이 디에코눈 아우토

개역개정,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새번역,13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우리말성경,13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는데 천사들이 예수를 시중들었습니다.

가톨릭성경,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영어NIV,13 and he was in the desert forty days, being tempted by Satan. He was with the wild animals, and angels attended him.

영어NASB,13 And He was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being tempted by Satan; and He was with the wild beasts, and the angels were ministering to Him.

영어MSG,13 For forty wilderness days and nights he was tested by Satan. Wild animals were his companions, and angels took care of him.

영어NRSV,13 He was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tempted by Satan; and he was with the wild beasts; and the angels waited 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ην εκει εν τη ερημω ημερας τεσσαρακοντα πειραζομενος υπο του σατανα και ην μετα των θηριων και οι αγγελοι διηκονουν αυτω

라틴어Vulgate,13 et erat in deserto quadraginta diebus et quadraginta noctibus et temptabatur a Satana eratque cum bestiis et angeli ministrabant illi

히브리어Modern,13 ויהי שם במדבר ארבעים יום והשטן נסהו ויהי עם החיות והמלאכים שרתוהו׃

성 경: [막1:1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광야에서의 시험]

󰃨 사십 일을 계셔서 – 마가는 단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 계신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나 마태는 이 기간 동안 금식하셨음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마4:2). 그리고 마가에 있어서는 시험의 종류도 언급되지 않고 사단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기사도 없다. 아마 그 이유는 예수의 사역 전체가 사단과의 대립으로 일관된 것이지, 40일간의 광야 생활에서 있었던 단 몇 가지 시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마가가 강조하기 원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마가의 복음서 전체에서 마가는 이 계속적인 싸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이 ’40일’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즉 이 40일은 구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때 그곳에서 유한 기일이며(출 34:28), 엘리야가 호렙산을 찾아 광야를 유랑한 기간이다(왕상 19:8). 또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의 시일도 40일이었다(행 1:3). 위에서 언급한 모세나 엘리야의 경우 40일의 기간은 그들의 사명 수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광야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40일’ 기간의 전후(前後)를 한결같이 광야의 연단과 위험 속에 살아 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또 시험받으셨던 이 ’40일간’의 의미는 그의 공생애 시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생애 사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일종의 연단의 기간이자 공적 사역의 준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시험을 받으시며 – 이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는 ‘시도하다’, ‘시험하다’, ‘증거를 진술하다’라는 뜻으로서 인간을 실족케 하는 유혹(temptation)과 인간을 더욱 성숙케하는 하나님의 연단(test)이라는 이중적 의미를갖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 제시된 이 ‘시험’은 그 양자의 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실로 이 시험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집요한 유혹인 동시에, 예수께서 시험과 고난받는 온 인류의 모범이시자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실 대제사장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이시며 또한 그 같은 자격을 공적으로 선언하시기 위한 일종의 하나님의 뜻에 따른 연단이었던 것이다(히 2:18;4:15). 이 시험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마 4:1-11;눅 4:1-13을 참조하라.

󰃨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 이는 단적으로 영전(靈戰)을 치르고 계신 예수께서 모든 인간 관계를 단절하신 채 철저히 홀로 되셔서 고독에 찬 역경을 감래하고 계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당시 유대 광야 지역에는 뱀, 이리, 표범, 여우, 멧돼지, 하이에나 등이 이따금씩 출몰했다고 한다. 진정 예수는 내적이고 외적인 공포와 고독 그리고 사나운 야생 동물들을 대하심으로 더욱 큰 시험을 당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받으신 장소는 첫 사람 아담이 시험받은 낙원(창 3장)과 정반대가 되는 위험 천만스러운 현장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함으로 징벌과 사망을 받았던 바로 이 광야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승리를 거두셨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시기 위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다.

󰃨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 모든 천사들의 주된 임무는 예수와 구원얻을 모든 자들을 섬기는데 있다(히 1:14). 이 천사들이 예수께 수종든 때에 관해서는 마 4:11에 나와있는 대로 예수께서 마귀를 물리치신 후였다. 성경상에서는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종들었는지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하늘로부터 전해진 영적 위로를 전달하고 또 40일 동안 금식하시느라고 주리신 예수께 육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단의 시험을 물리쳐 이기신 그리스도께서는 유혹의 떡(마 4:3) 대신에 천사가 공급하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셨고 그릇된 공명심(마4:5, 6) 대신에 영광스런 영적 존재들의 보필을 받으셨으며 또 헛된 영광(마 4:8,9)대신에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며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게 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사단의 왕국을 파멸시키는 실제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으셨다. 마가복음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여기서 일단락된다.

메타 데 토 파라도데나이 톤 요안넨 엘덴 호 예수스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케뤼쏜 토 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개역개정,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새번역,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우리말성경,14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영어NIV,14 After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went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영어NASB,14 Now after John had been taken into custody, Jesus came into Galilee, preaching the gospel of God,

영어MSG,14 After John was arrested, Jesus went to Galilee preaching the Message of God:

영어NRSV,14 Now after John was arrested, Jesus came 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μετα δε το παραδοθηναι τον ιωαννην ηλθεν ο ιησους εις την γαλιλαιαν κηρυσσων το ευαγγελιον της βασιλειας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14 postquam autem traditus est Iohannes venit Iesus in Galilaeam praedicans evangelium regni Dei

히브리어Modern,14 ואחרי אשר הסגר יוחנן בא ישוע הגלילה ויקרא את בשורת מלכות האלהים לאמר׃

성 경: [막1:1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사역의 시작]

󰃨 요한이 잡힌 후 – ‘잡힌’에 해당하는 ‘파라도데나이'(*)는 제 1 과거 수동형으로 ‘넘겨졌다’, ‘양도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세례 요한이 그를 시기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헤롯의 군병들에 의해 무참히 체포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만일 마가가 어떤 역사적 순서보다 신학적인 면에 좀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면(사실 마가는 6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요한의 죽음을 자세히 언급한다). 여기서의 ‘잡힌’것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가는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에 든든한 고리를 엮어두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두 사람은 모두 불의한 자의 손에 의해 죽음으로써 그 최후를 맞는다. 따라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막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십자가의 짙은 피내음이 풍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의로운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분명히 당시의 불의(不義)한 시대상을 반영해 준다. 예수는 나중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가 바로 그라고 평하셨다(마 11:11). 그러나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적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지 그의 위대성을 인정받고 들림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는 메시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마친 후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공히 예수의 공생애 시작은 세례 요한의 투옥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마 4:12;눅 3:19, 20). 즉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요한의 사역이 종결된 후 당신의 공적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마가는 선구자 요한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임무를 완수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 생애에 있어서 공생애 초기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실 본서의 기자 마가의 시각은 그리스도의 전체적 생애를 설명적으로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날까지 인간들을 위해 어떻게 사역해 오셨는가를 부각시켜 종으로서의 예수의 진면목을 밝히려는데 집중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공생애 초기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을 생략하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저작 의도에 따른 결과라 할 것이다(본서 서론 참조). 한편 광야 시험과 요한의 잡힌 사건 중간에 발생한 내용에 대해서는 요1:35-4:42를 참조하라.

󰃨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 그리스도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오신 때는 세례요한이 잡힌 사건과 관련이 있다(요 4:1-3, 43 주석 참조).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사실과,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사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임을 알게 되셨을때,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셨다(특히 가버나움을 중심함, 마 4:13). 예수께서는 자신이 유대지방에서 그처럼 크게 알려진다면 그것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강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급기야는 그들의 증오심으로 말미암아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즉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적절(適切)한 죽음의 순간이 오는 즉시 자기 목숨을 버리실 준비를 갖추고 계셨지만(요10:11,15,18;13:1) 아직 그 때(*, 호 카이로스)는 오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갈릴리 지방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우리(cage) 안으로 인도해 들여야 할 잃은 양들이 많이 있었다(요 10:16).

󰃨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내내 전파하신 메시지의 주내용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다른 사본에는 이를 ‘천국 복음’이라 일컫기도 한다(마4:23). 여기서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쏜'(*)은 현재 능동태 분사형을 취하고 있어 그 행위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 표현을 통해 하나님은 복음의 원천(주어소유격)이시며 더불어 복음의 대상(목적 소유격)이심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또 이 복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로 복음은 ‘좋은 소식’ 곧 인류가 들어볼 최고의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곧 그리스도로 인한 죄사함과 구원 및 영원한 복락을 그 주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5:17).

카이 레곤 호티 페플레로타이 호 카이로스 카이 엥기켄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메타노에이테 카이 피스튜에테 엔 토 유앙겔리오

개역개정,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새번역,15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우리말성경,15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가톨릭성경,15 이렇게 말씀하셨다.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영어NIV,15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영어NASB,15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영어MSG,15 “Time’s up! God’s kingdom is here. Change your life and believe the Message.”

영어NRSV,15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repent, and believe in the good news.”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λεγων οτι πεπληρωται ο καιρος και ηγγικεν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μετανοειτε και πιστευετε εν τω ευαγγελιω

라틴어Vulgate,15 et dicens quoniam impletum est tempus et adpropinquavit regnum Dei paenitemini et credite evangelio

히브리어Modern,15 מלאה העת והגיעה מלכות האלהים שובו והאמינו בבשורה׃

성 경: [막1:1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사역의 시작]

󰃨 때가 찼고 –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해준다(갈 4:4;엘 1:9). 다시 말해 본문의 ‘때'(*, 카이로스)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호기(好期,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이다(R.C. Trench). 예수께서는 드디어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는 말하기를 ‘그는 역사상 유래없는 특정한 구원의 때를 성취하신 것이다’라고 묘사하였다. 특히 본문의 이 표현은 사 9:1,2의 말씀이 성취될 시간이 이르렀음을 알리는 엄숙한 포고령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단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와 초월적인 주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과 외경에는 직접 쓰이고 있지 않으나 그 사상은 풍부하게 소개되고 있다(출 15:18 ;시 29:10 ;사 43:15). 이런 사상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하나님의 왕권은 현재적 실재이면서(하나님은 현재 당신의 주권으로 통치하심) 더불어 종말적 완성임을 (하나님은 최후의 날 당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것이다)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그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 관계가 상존함을 보게 된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초두에그 나라가 ‘가까왔다'(15절)고 선포한 데 대해 바알세불 논쟁시에는 그 나라가 ‘이미’임하였다고(마 12:28;눅 11:20) 말씀하신 바 있다. 즉 예수의 활동으로 하나님의 지배가 이 땅에 임하신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의 또 다른 가르침에서는 그 나라가 여전히 미래적인 것임을 보게 된다(마 8:11;20:21). 실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긴장(tension) 관계의 해소는 어느 한쪽을 거부함으로써 이뤄지지는 않는다. 사실 그에 대한 양극단의 논리인 실현된 종말론은 그 나라의 미래성을, 철저 종말론은그 나라의 현재성을 각각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함축한 개념이다( Bruce Metzger, The New Testament, p. 148 ). 어쨌든 본절에서는 그 나라의 도래가 대단히 강조되어 있다. 즉 그 나라는 공간적으로 (예수 안에서), 또 시간적으로(그 나라는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가까이 왔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가까와진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Lane). 한편 마태복음에는 일반적으로 ‘천국’으로 되어 있으나(마 3:2;4:17;5:3, 10,19, 20등) 마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한 사실에(4:11, 26, 30;9:1, 47등)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의미상으로는 양자가 근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미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음의 네 가지 개념들에 주목할 필여가 있다. (1)하나님의 왕권, 통치권혹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권이라는 개념이다(마 6:10;눅 17:21).(2) 완전한 구원, 곧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비롯되는 모든 영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의 개념이다(눅 18:30). (3)교회, 곧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로 사용될 때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거의 동일한 것이다(마 16:18, 19). (4) 구속받은 우주, 곧 모든 영광으로 가득찬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이다. 이것은 아직 미래의 일이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최종적인 사역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의미한다(마 25:34). 좀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이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전파한 메시지의 내용과 동일하다(4절;마 3:2).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의 복음은 동일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길 예비자였다. 여기서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자들의 올바른 삶의 자세이자 구원의 핵심적 요소이다. 특히 이 중에서 ‘회개’는 성부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요,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성자 예수와의 긴밀한 신뢰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이 양자중 어느 하나의 결핍은 온전한 신앙 인격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한편 우리 말의 ‘회개하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있지만, 헬라어 ‘메타노에이테'(*)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과거에 저지른 모든 악한일에 대하여는 슬퍼하는 한편, 앞을 바라볼 것도 의미하고 있다. 즉 그것은 ‘변하여새 사람이 될 것’, ‘마음과 생활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완전한 생활로의 전환’까지를 모두 내포한 포괄적 의미이다.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고 덧붙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회개의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면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즉 ‘믿으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메테'(*)는 앞에 나온 ‘메타노에이테’와 동시적으로 작용을 하며 함께 역사한다(Lenski). 즉 진정한 회개에는 신앙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본문에 나타난 두 동사는 미완료 동사로서 계속적인 현재를 의미하며, 전자가 계속될 때 후자로 계속됨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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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새번역,16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우리말성경,16 그리고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다가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는데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가톨릭성경,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영어NIV,16 As Jesus walked beside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his brother Andrew casting a net into the lake, for they were fishermen.

영어NASB,16 As He was going along by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Andrew, the brother of Simon, casting a net in the sea; for they were fishermen.

영어MSG,16 Passing along the beach of Lake Galilee, he saw Simon and his brother Andrew net-fishing. Fishing was their regular work.

영어NRSV,16 As Jesus passed along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his brother Andrew casting a net into the sea–for they were fishermen.

헬라어신약Stephanos,16 περιπατων δε παρα την θαλασσαν της γαλιλαιας ειδεν σιμωνα και ανδρεαν τον αδελφον αυτου βαλλοντας αμφιβληστρον εν τη θαλασση ησαν γαρ αλιεις

라틴어Vulgate,16 et praeteriens secus mare Galilaeae vidit Simonem et Andream fratrem eius mittentes retia in mare erant enim piscatores

히브리어Modern,16 ויהי בהתהלכו על יד ים הגליל וירא את שמעון ואת אנדרי אחי שמעון פרשים מצודה בים כי דיגים היו׃

성 경: [막1:16]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갈릴리 해변 – 갈릴리 바다는 보통의 담수호(淡水湖) 중의 하나이지만 성경에서는 흔히 바다로 불리우고 있다. 이는 다른 곳에서 ‘게네사렛 호수'(눅 5:1) 또는 ‘디베랴바다'(요 6:1, 23;21:1)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 아름 다운 바다는 길이 약 20km, 너비 약 10km, 수면은 해발-240m정도이며, 가장 깊은 곳이 약 50m가량 된다고 한다. 이 곳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업이 번창했다. 그리고 이 바다 서쪽과 북쪽 해변에는 많은 읍과 어촌들이 밀집해 있었다(Josephus,Wars. III, x).

󰃨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 예수께서는 갈릴리 전도에 있어서 최초로 이 어촌을 ‘지나가시다가'(따라 걸어 가시다가) 갈릴리 어부 출신 형제인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부의 직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형제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요단강에서 이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바로 이 메시야라고 가르쳐 준 세례 요한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요 1:35-39).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개하였다(요 1:29). 따라서 그들 두 형제는 그때부터 예수를 따라다녔으며 인격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인격적 관심의 결과는 그들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게 된다(3:13;마 10:1 등).

󰃨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 먼저 여기 제시된 ‘그물'(*, 암피블레스트론)은 예수께서 비유 중에 흔히 거론하셨던 큰 그물, 즉 ‘예인망'(*, 사게네)이 아니라 손 그물, 즉 ‘투망'(投網)을 가리킨다. 한편 마가는 안드레 형제의 모습을 매우 생동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이 손 그물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도중에 예수께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받은 사실을 현장감 있게 긴박감을 더하여 기술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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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새번역,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우리말성경,17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가톨릭성경,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영어NIV,17 “Come, follow me,” Jesus said,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영어NASB,17 And Jesus said to them,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become fishers of men.”

영어MSG,17 Jesus said to them, “Come with me. I’ll make a new kind of fisherman out of you. I’ll show you how to catch men and women instead of perch and bass.”

영어NRSV,17 And Jesus said to them,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ο ιησους δευτε οπισω μου και ποιησω υμας γενεσθαι αλιεις ανθρωπων

라틴어Vulgate,17 et dixit eis Iesus venite post me et faciam vos fieri piscatores hominum

히브리어Modern,17 ויאמר אליהם ישוע לכו אחרי ואשימכם לדיגי אנשים׃

성 경: [막1:17]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나를 따라 오너라(*, 듀테 오피소 무) – 원문에서’오너라'(듀테)는 말앞에 ‘이리로…’ 또는 ‘다라'(오피스)라는 부사어가 첨가되어 있는 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가 이때까지 살아왔던 그러한 방향으로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이리로’ 혹은 ‘이 새로운 방향으로’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의 이러한 부르심(calling)에는 ‘…되게하리라'(*, 포이에소)는 목적이 수반되어 있다. 즉 그분의 부르심은 허황되고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의 위대한 주역의 역할을 맡기시리라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예수의 부름에 응답하기만 하면 그들은 복음 전파와 구원 사역의 위업을 맡게 될 것이었다.

󰃨 사람을 낚는 어부 – 주님의 부르심은 부름받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기 보다 오히려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부르심이었다. 실로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들을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해내어야 하는 긴급한 임무를 맡기시기 위함이었으며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즉각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심판과 관련해서 ‘낚는다’는 말이 사용된 경우를 볼 수 있다(렘 16:16겔29:4, 5;38:4;암 4:2). 한편 본문의 ‘사람’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단수형으로 나와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나 흠정역에서는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안드로포이)이란 이 말은 단순히 갈릴리 주변 사람들이나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범 인류적이고 보편적인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Lenski).

카이 유데오스 아펜테스 타 디크튀아 아우톤 에콜루데산 아우토

개역개정,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새번역,18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우리말성경,18 시몬과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가톨릭성경,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영어NIV,18 At once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영어NASB,18 Immediately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영어MSG,18 They didn’t ask questions. They dropped their nets and followed.

영어NRSV,18 And immediately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ευθεως αφεντες τα δικτυα αυτων ηκολουθησαν αυτω

라틴어Vulgate,18 et protinus relictis retibus secuti sunt eum

히브리어Modern,18 ויעזבו מהר את מכמרתיהם וילכו אחריו׃

성 경: [막1:18]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곧 그물을 버려 두고 – 여기에서 ‘곧'(*, 유뒤스)이란 마가의 표현은 긴급하고도 생생한 장면을 강조하는 특별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시몬과 그형제 안드레를 부르셨을 때에는 종말론적인 긴박성(緊迫性)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모든 삶을 과감히 청산(淸算)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진정 어부들에게 있어서 ‘그물’은 배와 더불어 그들의 생존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버리는 데에는 과감한 의지적 결단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한편 두제자의 이 같은 즉각적 순종의 배후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의 절대적 능력과 권위이다. 실로 그 분의 권위 앞에 모든 피조물은 순종할수밖에 없는 것이다(빌 2:10).

󰃨 좇으니라 – 헬라어 ‘아콜루데인'(*)은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의미상으로는 (1)예수를 따르는 것, (2)예수의 부르심에 자원하여 순복하는 것, (3)예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뜻한다(8:34;마 4:25;9:38 등). 이 말에 대한 문자적인 뜻을 세분하여 살펴보자면 ‘아콜루데인’은 접두어 ‘아'(*, 여기서는 ‘일치’, ‘닮음’이란 의미)와 ‘길’이란 뜻의 ‘켈류도스'(*)의 합성어로서,’같은 길을 함께 가다’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즉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는 선포에 대한 증인으로서 주님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카이 프로바스 에케이덴 올리곤 에이덴 야코본 톤 투 제베다이우 카이 요안넨 톤 아델폰 아우투 카이 아우투스 엔 토 플로이오 카타르티존타스 타 딬튀아

개역개정,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새번역,19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말성경,19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가톨릭성경,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영어NIV,19 When he had gone a little farther, he saw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in a boat, preparing their nets.

영어NASB,19 Going on a little farther, He saw James the son of Zebedee, and John his brother, who were also in the boat mending the nets.

영어MSG,19 A dozen yards or so down the beach, he saw the brothers James and John, Zebedee’s sons. They were in the boat, mending their fishnets.

영어NRSV,19 As he went a little farther, he saw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who were in their boat mending the nets.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προβας εκειθεν ολιγον ειδεν ιακωβον τον του ζεβεδαιου και ιωαννην τον αδελφον αυτου και αυτους εν τω πλοιω καταρτιζοντας τα δικτυα

라틴어Vulgate,19 et progressus inde pusillum vidit Iacobum Zebedaei et Iohannem fratrem eius et ipsos in navi conponentes retia

히브리어Modern,19 ויהי כעברו מעט משם וירא את יעקב בן זבדי ואת יוחנן אחיו וגם המה באניה מתקנים את המכמרות׃

성 경: [막1:19]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조금 더(*, 올리곤) – 이 부사는 마가의 세밀하고도 정확한 사건 묘사 기법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요한 –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 다음으로 중요한 제자들로서 이들의 어머니는 살로메였다(마 10:2 참조). 한편 여기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이름의 서열상에 있어서 야고보가 언제나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형으로 보인다. 후에 그는 12사도 가운데 최초로 순교하게 되는데(행 12:2), 이에 비해 요한은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 교회를 파수(把守)하고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등 여러 서신들을 기록하였다. 한편 이들은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각적으로 주님과 밀접한 관계에 들어갔으며 사도로서의 훈련을 받게 된것이다. 사실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소지(素地)는 얼마든지 있었다. 즉 그들은 마 13:55;요 6:42 등의 경우처럼 그들도 “이는 나사렛에서 온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왜 우리는 이 사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거부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을 더 큰 근거가 될 수 있었다(요 19:25). 실로 예수와 이종 사촌간이었던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구심을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예수의 형제와 친척들은 심지어 예수를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았던가(3:21). 이러한 불리한 가정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위엄과 능력과 사랑의 부르심에 조금도 주저않고 따라나섰다.

󰃨 그물을 깁는데 – 베도로와 안드레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던 와중에 부름받은 것과 짝을 이루기나 하듯이 야고보와 요한은 다음 출어(出漁)를 위해 그물을 수선(修繕)하고 있던 상황에서 부름을 받는다. 실로 이것이 현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마가의 묘사 기법이다. 즉 그들은 어떤 종교적 분위기나 헌신의 순간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생업에 충실하고 있을 때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저녁 이후시간에 고기를 잡고 낮에는 그물 수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본문을 베드로 형제의 소명받음이 있은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Bultman).

카이 유데오스 에칼레센 아우투스 카이 아펜테스 톤 파테라 아우톤 제베다이온 엔 토 플로이오 메타 톤 미스도톤 아펠돈 오피소 아우투

개역개정,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새번역,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우리말성경,20 곧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아버지 세베대와 일꾼들을 배에 남겨 두고 곧바로 예수를 따랐습니다.

가톨릭성경,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영어NIV,20 Without delay he called them, and they left their father Zebedee in the boat with the hired men and followed him.

영어NASB,20 Immediately He called them; and they left their father Zebedee in the boat with the hired servants, and went away to follow Him.

영어MSG,20 Right off, he made the same offer. Immediately, they left their father Zebedee, the boat, and the hired hands, and followed.

영어NRSV,20 Immediately he called them; and they left their father Zebedee in the boat with the hired men, and follow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ευθεως εκαλεσεν αυτους και αφεντες τον πατερα αυτων ζεβεδαιον εν τω πλοιω μετα των μισθωτων απηλθον οπισω αυτου

라틴어Vulgate,20 et statim vocavit illos et relicto patre suo Zebedaeo in navi cum mercennariis secuti sunt eum

히브리어Modern,20 ויקרא מהרה אליהם ויעזבו את זבדי אביהם באניה עם השכירים וילכו אחריו׃

성 경: [막1:20]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곧 부르시니(*, 카이유데오스에칼레센) – 예수께서는 마치 단거리 육상 선수의 그것처럼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긴급하게 두 제자를 부르셨다. 실로 예수의 선교사역은 이처럼 신속하고도 민첩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당신께서 항상 다가올 종말에 대한 기대와 예비를 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 삯군들과 함께…버려두고 – ‘삯군들’에 대한 언급은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으로서 ‘삯군'(*, 미스디오스)이란 임금(賃金)을 받고 고용된 일꾼들을 가리킨다. 적어도 이러한 삯군들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따라서 세베대의 가정이 비교적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삯군들이 있었기에 야고보와 요한은 주저함없이 그들에게 아버지 돕는 일을 맡기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은예수의 부르심에 의해 이전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온전한 헌신의 길에 나섰음에 틀림없다. 실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떠남의 결단이 요구된다(창 12:1-3). 이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마 19:29).

카이 에이스포류온타이 에이스 카페르나운 카이 유데오스 토이스 삽바신 에이셀돈 에이스 텐 쉬나고겐 에디다스켄

개역개정,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새번역,21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우리말성경,21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곧 안식일이 돼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1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영어NIV,21 They went to Capernaum, and when the Sabbath came, Jesus went into the synagogue and began to teach.

영어NASB,21 They went into Capernaum; and immediately on the Sabbath He entered the synagogue and began to teach.

영어MSG,21 Then they entered Capernaum. When the Sabbath arrived, Jesus lost no time in getting to the meeting place. He spent the day there teaching.

영어NRSV,21 They went to Capernaum; and when the sabbath came, he entered the synagogue and taught.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εισπορευονται εις καπερναουμ και ευθεως τοις σαββασιν εισελθων εις την συναγωγην εδιδασκεν

라틴어Vulgate,21 et ingrediuntur Capharnaum et statim sabbatis ingressus synagogam docebat eos

히브리어Modern,21 ויבאו אל כפר נחום וימהר לבוא בשבת לבית הכנסת וילמד׃

성 경: [막1:2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 ‘저희’라는 말이 원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들어가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이스포류온타이'(*)가 삼인칭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들은 예수와 예수께 선택된 처음 네제자를 가리킨다(29절). 한편 ‘나훔의 동네’란 뜻을 지닌 ‘가버나움’은 호수가에 위치해 있었고, 제자들이 부름받은 갈릴리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특히 이곳은 다메섹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要地)이자 세관이 있던 곳으로서(2:14) 군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이곳은 오늘날 갈릴리 해안 서북쪽에 있는 텔 훔(TellHum)으로 확인되고 있다(마 4:13 주석 참조). 그리고 예수께서 이곳을 공생애 사역의 주활동 무대로 삼으신 것 가운데 한 이유는 바로 이곳이 세리 마태를 위시한 다섯 제자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 안식일에 –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바로이때 안식일 예배 중 첫번째 예배가 진행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때 안식일이 되기전 금요일에 이미 회당 안으로 들어가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 회당에…가르치시매 – 예수의 공생애사역의 시초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여기 ‘회당'(Synagogue)이라는 말은 한 지방에 모인 회중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이들 회중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회당의 기원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율법을 연구하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회당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유대인이 살던 곳이면 헬라 세계 어디서든지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회당은 유대교를 가장 오랫동안 지속시켜 준 제도가 되었으며 기독교 초창기에 복음도 이 회당을 근거지로 삼아 전파되어 나갔다(마 4:23;눅 4:16-30 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참조). 한편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 회당에 들어가시자마자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묘사하는 ‘에디다스켄'(*)은 미완료 동사로서 매 안식일이면 예수께서이곳에 나오셔서 가르쳤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당시 가버나움 회당은 활짝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이곳을 초창기 복음 전파의 근거지로 삼고 계속적으로 가르치셨다. 물론 이때 ‘회당의 자유’는 회당 지도자들이 인정하는 방문 교사들 또는 권위 있는 선생들에게 허용되는데, 그들은 주로 그 회당에서 율법이나 선지서를 읽으며 그 읽은 바를 풀이하고 설교하기도 했다. 한편 그때 회당에서 이루어지던 의식은 오늘날의 예배 의식과 비슷한 것으로서 기도, 찬양, 성경 봉독, 그리고 랍비(Rabbi)나 이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한 설교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카이 엨세플레쏜토 에피 테 디다케 아우투 엔 가르 디다스콘 아우투스 호스 엨수시안 에콘 카이 우크 호스 호이 그람마테이스

개역개정,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새번역,2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22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 예수께서는 권위 있는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영어NIV,22 The people were amazed at his teaching, because he taught them as one who had authority, not as the teachers of the law.

영어NASB,22 They were amazed at His teaching; for He was teaching them as one having authority, and not as the scribes.

영어MSG,22 They were surprised at his teaching–so forthright, so confident–not quibbling and quoting like the religion scholars.

영어NRSV,22 They were astounded at his teaching, for he taught them as one having authority, and not as the scribes.

헬라어신약Stephanos,22 και εξεπλησσοντο επι τη διδαχη αυτου ην γαρ διδασκων αυτους ως εξουσιαν εχων και ουχ ως οι γραμματεις

라틴어Vulgate,22 et stupebant super doctrina eius erat enim docens eos quasi potestatem habens et non sicut scribae

히브리어Modern,22 וישתוממו על תורתו כי היה מלמדם כבעל גבורה ולא כספרים׃

성 경: [막1:2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 ‘놀라니’에 해당하는 ‘엑세플레쏜토'(*)는 ‘밖으로’를 뜻하는 ‘에크'(*)와 ‘친다’를 뜻하는 ‘플레쏘'(*)의 합성어로서, 이는 문자 그대로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를 의미한다. 본문의 의미는 그들이 순간적으로 놀라고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도 이렇게 표현되었다(마 7:28). 한편 청중들 편에서 볼 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토록 놀랍게 하였던가? 이에 대해 마가는 그 ‘교훈'(*, 디다케)에 놀랐다고 보고한다. 이 ‘교훈’은 능동적 측면에서 가르치시는 행위 또는 방법을, 수동적 측면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각각 의미하는데, 본문은 이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 실로 목수 출신이었던 그가(6:3) 어떻게 그러한 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을까하는 것이 그들의 깊은 의문점이었으리라.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마가는 ‘교훈’이란 말에 덧붙여 특별한 이유, 곧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하는 설명구를 달았다(마7:28,29). 다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방법과 내용및 서기관들의 가르치는 방법과 내용 사이의 차이점들이다. (1)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에(요 14:6;18:37) 반해 서기관들의 설교는 대부분이 와전(訛傳)된 것이었고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사변적(思辯的)인 것들이었다. (2)그리스도께서는 중대한 의미가 담긴 문제들, 곧 생명과 사망 그리고 영원에 관한 문제들을 제시하셨지만 서기관들은 하찮은 문제들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였다(마 23:23;눅 11:42). (3)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는 내용에는 체계가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탈무드(Talmud)경이 그렇듯이 서기관들은 자주 중언부언(重言復言)하였다(마 6:7). (4)그리스도께서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례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셨지만 서기관들의 설교는 고류하고 형식적인데만 얽매여 있었으므로 메마른 심령들의 갈급함을 채워줄 수 없었다. (5)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자요, 그들의 영원한 축복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자로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사람에 대해 언급하셨다. 하지만 서기관들은 가장 중요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다. (6)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본 구절에 진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가 전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실행 능력을 겸비한 탁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요 8: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곧 아버지의 메시지요, 성경의 메시지다. 그러나 서기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그들의 스승들의 유전에서 온 것으로서 고작 스승들의 교훈을 인용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었다(7:8,13;마 15:2,3). 그들은 마치 깨어진 물통에서 물을 퍼내려고 헛되이 노력하였던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생수의 근원'(렘 2:13)이 되시어 자신으로부터 물을 공급하셨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의 기르침과 당시 종교지도자를이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의 차이는 근본적인 면에서 상이(相異)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듣고 백성들이 놀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카이 엔 엔 테 쉬나고게 아우톤 안드로포스 엔 프튜마티 아카다르토 카이 아네크랔센

개역개정,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새번역,23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 ㉡그, ‘더러운’

우리말성경,23 바로 그때, 회당 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한 명이 울부짖었습니다.

가톨릭성경,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영어NIV,23 Just then a man in their synagogue who was possessed by an evil spirit cried out,

영어NASB,23 Just then there was a man in their synagogue with an unclean spirit; and he cried out,

영어MSG,23 Suddenly, while still in the meeting place, he was interrupted by a man who was deeply disturbed and yelling out,

영어NRSV,23 Just then there was in their synagogue a man with an unclean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ην εν τη συναγωγη αυτων ανθρωπος εν πνευματι ακαθαρτω και ανεκραξεν

라틴어Vulgate,23 et erat in synagoga eorum homo in spiritu inmundo et exclamavit

히브리어Modern,23 ואיש היה בבית כנסתם אשר רוח טמאה בו ויצעק לאמר׃

성 경: [막1:2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마침(*, 유뒤스) – 긴박감을 더해 주는 마가의 표현 기법이다. 곧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으로 회당 내(內)가 놀라움과 감동으로 가득차 있던 바로 ‘그 시점’에라는 뜻이다.

󰃨 더러운 귀신(*, 프뉴마티 아카다르토) – 본서에서 이 말은 11회 나오며, 누가는 이 말에 ‘귀신’ 혹은 ‘마귀’라는 뜻을 가진 ‘다이모니온'(*)을 부가하여 사용하고 있으나(눅 4:33;8:27;10:17등),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마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존재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 데 있다. 이 ‘더러운 영’은 선한 의지와 도덕성이 완전히 상실된 그야말로 악의 실체가 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의갈릴리 사역 초두(初頭)인 바로 이 안식일에 진리 전파 장소 한 가운데로 돌진해 온 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악한 영, 곧 마귀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일 3:8). 한편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첫반응은 ‘소리질러'(*, 아나크라조)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진리 전파 사역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눅 4:33).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 심지어는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즉 그들은, 귀신이란 정신병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정서적 불안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경우 혹은 정신이상자와 간질병자의 경우로 나타나는 증세를 가정(假定)해서 칭한 이름이라고 한다.그러나 본 구절은 귀신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명백히 규명해 주고 있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마귀)과 ‘귀신’참조). 이러한 귀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며 사람들에게 극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것이다(벧전 5:8).

레곤 에아 티 헤민 카이 소이 예수 나자레네 엘데스 아폴레사이 헤마스 오이다 세 티스 에이 호 하기오스 투 데우

개역개정,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새번역,24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우리말성경,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가톨릭성경,24 말하였다. “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영어NIV,24 “What do you want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the Holy One of God!”

영어NASB,24 saying, “What business do we have with each other,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 the Holy One of God!”

영어MSG,24 “What business do you have here with us, Jesus? Nazarene! I know what you’re up to! You’re the Holy One of God, and you’ve come to destroy us!”

영어NRSV,24 and he cried out, “What have you to do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 the Holy One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4 λεγων εα τι ημιν και σοι ιησου ναζαρηνε ηλθες απολεσαι ημας οιδα σε τις ει ο αγιος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24 dicens quid nobis et tibi Iesu Nazarene venisti perdere nos scio qui sis Sanctus Dei

히브리어Modern,24 אהה מה לנו ולך ישוע הנצרי באת להאבידנו ידעתי מי אתה קדוש האלהים׃

성 경: [막1:2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나사렛 예수여 – 문자적으로 ‘나사렛 사람’ 혹은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서, 회당에 들어왔던 귀신은 예수에 대하여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큰 소리로 떠들어 대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으며 따라서 천한 신분을 가졌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정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術策)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일반 사람들의 통념 속에서는 ‘나사렛’이라고 하면 경멸의 뜻으로 인식되어졌다. 왜냐하면 그곳은 종교, 문화적으로 선민적 특권을 누리던 예루살렘 및 유대 지경과는 동떨어진 이방의 초라한 고을이었기 때문이다(사 9:1,2). 이런 관점에서 심지어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언급하셨던 나다나엘까지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였던 것이다(요 1:46,47).

󰃨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이 말은 귀신이 그 사로잡은 자의 성대(聲帶)와 입술을 사용하여 한 말로서 의미상으로는 ‘당신이 왜 우리를 괴롭히려 합니까’라는 뜻이다(마 8:29). 여기에서 귀신이 말한 ‘우리’란 복수형의 칭호에 대해 (1)말하는 사람과 귀신을 함께 일컫는 이중 인격을 함의한 말로 보는 학자도 있고(Robertson), (2)이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그의 나머지 동료 귀신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W. W. Wessel). 이중 예수의 신성을 직시하고 또 그분에 대한 두려움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더 적절할 것이다. 실로 이 귀신은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지금 자신에게 닥칠 일이 다른 귀신들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였던 것이다. 즉 더러운 귀신은 예수의 일을 방해하려 했으나 예수 앞에서 예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귀신은 자기뿐 아니라 악령의 세계 전체에 닥친 파멸과 심판의 위기를 직감하고 공포와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다.

󰃨 하나님의 거룩한 자(*, 호하기오스 투 데우) – 이는 23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 프뉴마티 아카다르토)과 대조되는 말로서 원래는 하나님께 구별된 일꾼들, 선지자들을 가리켰으나 본문에서는 특별히 예수의 신성과 메시야성을 가리킨다. 이와 함께 예수에 대한 귀신들의 표현을 살펴보면 마 8:2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the Most High God)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모두 귀신이 어떻게든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보겠다는 자기방어적 측면에서 한 고백으로서 그 모두가 진실한 진술이었다는 데 주목을 끌게 한다. 이 귀신은 예수의 ‘거룩한'(*, 호 하기오스) 신성을 이해했기 때문에 ‘불결한'(혹은 ‘더러운)(*, 아카다르토) 본성을 갖고 있는 자신들은 그 앞에서 쫓겨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에 의해 이러한 용어가 무의식 중에 실토(實吐)되고 만 것이다(34절 주석 참조).

카이 에페티메센 아우토 호 예수스 레곤 피모데티 카이 엨셀데 엨스 아우투

개역개정,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새번역,2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우리말성경,25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

가톨릭성경,25 예수님께서 그에게 “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영어NIV,25 “Be quiet!” said Jesus sternly. “Come out of him!”

영어NASB,25 And Jesus rebuked him, saying, “Be quiet, and come out of him!”

영어MSG,25 Jesus shut him up: “Quiet! Get out of him!”

영어NRSV,25 But Jesus rebuked him, saying, “Be silent, and come out of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5 και επετιμησεν αυτω ο ιησους λεγων φιμωθητι και εξελθε εξ αυτου

라틴어Vulgate,25 et comminatus est ei Iesus dicens obmutesce et exi de homine

히브리어Modern,25 ויגער בו ישוע לאמר האלם וצא ממנו׃

성 경: [막1:2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 예수께서 귀신을 상대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꾸짖는 것’이다. 이 ‘꾸짖다'(*, 에피티마오)는 말은 ‘말로써 엄하게 경고하다’는 뜻 외에 ‘벌하다’,’책망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그 꾸짖음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 실로 귀신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타협이나 회유(懷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다.

󰃨 잠잠하고…나오라 – 예수께서는 완전히 타락한 귀신에게서 자신의 메시야직에 대한 증거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귀신과 사단은 이 거룩한 증거에 끼어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잠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모데티'(*)는 ‘피모오'(*)의 부정 과거 2인칭 단수 명령형으로 원뜻은 ‘입에 자갈을 물리라’로서 더 이상 소리치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인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Robertson)는 ‘소에게처럼 입에 망을 덧씌울 것이라’는 말로서 번역하여 더욱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오라’는 명령 역시 더 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는 거부할 수 없는 엄한 명령인 것이다.

카이 스파랔산 아우톤 토 프뉴마 토 아카다르톤 카이 크랔산 포네 메갈레 엨셀덴 엨스 아우투

개역개정,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새번역,26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우리말성경,26 그러자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키더니 비명을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가톨릭성경,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영어NIV,26 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violently and came out of him with a shriek.

영어NASB,26 Throwing him into convulsions, the unclean spirit cried out with a loud voice and came out of him.

영어MSG,26 The afflicting spirit threw the man into spasms, protesting loudly–and got out.

영어NRSV,26 And the unclean spirit, convulsing him and crying with a loud voice, came out of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σπαραξαν αυτον το πνευμα το ακαθαρτον και κραξαν φωνη μεγαλη εξηλθεν εξ αυτου

라틴어Vulgate,26 et discerpens eum spiritus inmundus et exclamans voce magna exivit ab eo

히브리어Modern,26 ויסחבהו רוח הטמאה ויצעק בקול גדול ויצא ממנו׃

성 경: [막1:26]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스파락산 아우톤) – 이것은 마치 위경련을 일으키듯이 ‘발작하며 몸부림을 치게 하고’라는 보다 강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흠정역(KJV)에서는 이 구절을 ‘그 때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상하게 하고'(And when the unclean spirit had torn him)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 4:35)와 모순될 뿐만 아니라 원문에 있는 경련으로 보아야 할 간질병(마 17:15)에 대한 언급도 없음으로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의 의미에 보다 근접해 있다.어쨌든 귀신(사단)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귀신은 마지막 쫓겨나가는 순간까지도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것이 마귀의 본성인 것이다.

󰃨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큰 소리'(*, 포네 메갈레)란 어떤 크나큰 충격에 의해 강렬한 음성으로 내뱉는 비명을 가리킨다. 이는 그 사람이 받는 고통이기 이전에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야만 하는 귀신의 최후의 일성(一聲)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써 그 귀신은 그 사람의 인격과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것이다.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가운데 귀신 축출(exorcism) 기사를 첫번째로 기록하였다. 이 이적의 기록은 마가의 복음서 기록 의도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 예수의 교훈(22절)과 이적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제시했던 것이다. 한편 교회사가 하르낙(Harnack)은 이 귀신 축출이 A.D.3C까지 초대 교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한 개인의 치유뿐 아니라 사귀(邪鬼)로 인한 공포에 휩싸였던 한 사회를 치유하는 크나큰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진정 이것은 귀신의 왕국을 멸절하시고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예수의 권능에 찬 역사의 단면이 아닌가(9:14-29, 주제 강해 ‘귀신들림과 축사’참조).

카이 에담베데산 하판테스 호스테 쉬제테인 프로스 헤아우투스 레곤타스 티 에스틴 투토 디다케 카이네 캍 엨수시안 카이 토이스 프튜마시 토이스 아카다르토이스 에피타쎄이 카이 휘파쿠우신 아우토

개역개정,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새번역,27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우리말성경,27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놀란 나머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로군. 저가 더러운 귀신에게 명령까지 하고 귀신도 그에게 복종하니 말이야.”

가톨릭성경,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영어NIV,27 The people were all so amazed that they asked each other, “What is this? A new teaching–and with authority! He even gives orders to evil spirits and they obey him.”

영어NASB,27 They were all amazed, so that they debated among themselves, saying, “What is this? A new teaching with authority! He commands even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obey Him.”

영어MSG,27 Everyone there was incredulous, buzzing with curiosity. “What’s going on here? A new teaching that does what it says? He shuts up defiling, demonic spirits and sends them packing!”

영어NRSV,27 They were all amazed, and they kept on asking one another, “What is this? A new teaching–with authority! He commands even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obey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εθαμβηθησαν παντες ωστε συζητειν προς αυτους λεγοντας τι εστιν τουτο τις η διδαχη η καινη αυτη οτι κατ εξουσιαν και τοις πνευμασιν τοις ακαθαρτοις επιτασσει και υπακουουσιν αυτω

라틴어Vulgate,27 et mirati sunt omnes ita ut conquirerent inter se dicentes quidnam est hoc quae doctrina haec nova quia in potestate et spiritibus inmundis imperat et oboediunt ei

히브리어Modern,27 ויבהלו כלם וישאלו איש את רעהו לאמר מה זאת מה היא התורה החדשה אשר אף לרוחות הטמאה בגבורה הוא מצוה והנה שמעות לו׃

성 경: [막1:27]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다 놀라 – 마가는 회당에서 일어난 생생한 모습을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또 하나의 극적인 동사를 사용하였다. ‘다 놀라’,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담베데산'(*)은 수동형이지만 능동의 뜻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매우 충격적으로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놀란 이유는 그들 모두 이제까지 경험해 왔던 교훈 및 이적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즉 22절에서 ‘뭇 사람들이 놀란’것은 종래의 서기관들의 틀에 박힌 고루한 가르침과는 판이한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가르치심으로 인한 것이었고, 본 구절에서 ‘다 놀란’것은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명령에 귀신이 즉시 쫓겨난 사실로 인한 것이었다.

󰃨 서로 물어 가로되…어찜이뇨 – 차분한 어조로 ‘서로 말하여'(눅 4:36)라고 기록한 누가의 보고보다는 좀더 긴장되고 호기심이 충천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 하는 어구(語句)이다.

󰃨 새 교훈(*, 디다케 카이네) – 주님의 새로운 가르치심과 그로 인한 뭇 사람들의 놀라움은 계속 되었다. 실로 예수의 가르침은 진부하고 장황한 랍비의 교훈과는 완전히 판이한 것이었으며, 이는 마치 새봄의 꽃내음처럼 신선하고 ‘새로운'(*, 카이네) 가르치심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여기 ‘새로운'(*, 네오스) 것이 아니라 질적인 새로움을 말한 것으로 결국 예수의 ‘새 교훈’은 고루한 가르침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창조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으로 다가왔음을 연상케 한다. 특히 이 ‘새 교훈’은 ‘권세있는'(*, 카트 엑수시안) 교훈으로서 사람들의 심령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창을 열어 진리를 발견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교훈이었다. 한편 보통 대부분의 독법(讀法)에서는 ‘권위있는’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읽는다.

엑셀덴 데 헤 아코에 아우투 유뒤스 에이스 홀렌 텐 페리코론 테스 갈릴라이아스

개역개정,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새번역,28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우리말성경,28 그래서 예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온 지역으로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가톨릭성경,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영어NIV,28 News about him spread quickly over the whole region of Galilee.

영어NASB,28 Immediately the news about Him spread everywhere into all the surrounding district of Galilee.

영어MSG,28 News of this traveled fast and was soon all over Galilee.

영어NRSV,28 At once his fame began to spread throughout the surrounding region of Galilee.

헬라어신약Stephanos,28 εξηλθεν δε η ακοη αυτου ευθυς εις ολην την περιχωρον της γαλιλαιας

라틴어Vulgate,28 et processit rumor eius statim in omnem regionem Galilaeae

히브리어Modern,28 ויצא שמעו מהר בכל מקמות ארץ הגליל׃

성 경: [막1:28]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예수 사역의 탁월성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가버나움을 뛰어 넘어 갈릴리 온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누가의 보고와 관련시켜 본 장명을 연상한다면 ‘가버나움 근처의 갈릴리 도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눅 4:37 주석 참조). 한편 여기 제시된 ‘갈릴리 사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페리코론 테스 갈릴라이아스'(*)에 대해서 ‘갈릴리’가 소유격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비단 갈릴리 지역뿐만 아니라 고보다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William L.Lane)고 보는 이도 있다(마 4:24). 이처럼 예수의 소문은 가히 폭발적일 만큼 갈릴리 전역에 퍼져나갔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카이 유뒤스 에크 테스 쉬나고게스 엨셀돈테스 엘돈 에이스 텐 오이키안 시모노스 카이 안드레우 메타 야코부 카이 요안누

개역개정,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새번역,2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는’

우리말성경,2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톨릭성경,2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영어NIV,29 As soon as they left the synagogue, they went with James and John to the home of Simon and Andrew.

영어NASB,29 And immediately after they came out of the synagogue, they came into the house of Simon and Andrew, with James and John.

영어MSG,29 Directly on leaving the meeting place, they came to Simon and Andrew’s house, accompanied by James and John.

영어NRSV,29 As soon as they left the synagogue, they entered the house of Simon and Andrew, with James and John.

헬라어신약Stephanos,29 και ευθεως εκ της συναγωγης εξελθοντες ηλθον εις την οικιαν σιμωνος και ανδρεου μετα ιακωβου και ιωαννου

라틴어Vulgate,29 et protinus egredientes de synagoga venerunt in domum Simonis et Andreae cum Iacobo et Iohanne

히브리어Modern,29 ויהי אחרי צאתם מבית הכנסת ויבאו ביתה שמעון ואנדרי המה ויעקב ויוחנן עמם׃

성 경: [막1:29]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심]

󰃨 회당에서 나와 – 앞 사건과의 연속성과 예수 사역의 생동감 넘치는 지속성을 강조한 마가의 표현 기법 중 하나이다.

󰃨 시몬과 안드레의 집 – 예수와 그의 네 제자들은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직행했다(마 8:14;눅 4:38). 베드로는 이미 결혼한 사람으로(30절;고전 9:5) 그의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가는 그 집을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시몬의 형제 안드레도 베드로와 같은 집에 함께 기거했을 것이다. 한편 이 집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야고보와 요한뿐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이 초청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아마도 베드로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았다. 이쨌든 이곳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 중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예수께서 선교 여행을 하시고 나서 이곳으로 돌아오셨던 것이다.

헤 데 펜데라 시모노스 카테케이토 퓌레쑤사 카이 유데오스 레구신 아우토 페리 아우테스

개역개정,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새번역,30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우리말성경,30 이때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즉시 이 사실을 예수께 말씀 드렸습니다.

가톨릭성경,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영어NIV,30 Simon’s mother-in-law was in bed with a fever, and they told Jesus about her.

영어NASB,30 Now Simon’s mother-in-law was lying sick with a fever; and immediately they spoke to Jesus about her.

영어MSG,30 Simon’s mother-in-law was sick in bed, burning up with fever. They told Jesus.

영어NRSV,30 Now Simon’s mother-in-law was in bed with a fever, and they told him about her at once.

헬라어신약Stephanos,30 η δε πενθερα σιμωνος κατεκειτο πυρεσσουσα και ευθεως λεγουσιν αυτω περι αυτης

라틴어Vulgate,30 decumbebat autem socrus Simonis febricitans et statim dicunt ei de illa

히브리어Modern,30 וחמות שמעון שכבה אחוזת הקדחת וימהרו לדבר אליו עליה׃

성 경: [막1:30]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심]

󰃨 시몬의 장모 –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서 그에게 장모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분명코 결혼했음을 지적해 주고 있는 말이다. 고전 9:5은 베드로의 부인이 그 당시 살아있어서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동행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베드로가 독신이었음을 강조함은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인정할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제들의 독신주의(celibacy)는 베드로가 독신이었음을 가정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도 어긋날 뿐만아니라(창 1:27) 너무 인위적인 독신주의를 고집함으로 인해 또다른 우월 의식과 비신앙적인 편협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초대 교회 시대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베드로와 빌립이 자녀를 낳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특히 베드로가 전도할 때에는 항상 그의 아내를 대동(帶同)했다고 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마찬가지로그의 아내도 순교당하였는데, 그 아내가 베드로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어갔을 때 베드로는 아내를 향해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라고 권면했다고 전한다(Clement of Alex.,Storm. 3:6). 그리고 또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의 아내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 또는 페페튜아(Perpetua)라고 전한다.

󰃨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 마가는 단지 시몬의 장모가 병들어 누워있는 사실만을 언급하지만 의사 출신이었던 누가는 그녀가 ‘중한 열병'(눅 4:38)으로 고통받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녀의 병명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습한 기후의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그 지방에서 흔히 발병하던 풍토병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웠는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이토'(*)가 과거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 병이 장기적으로 오래 지속된 만성적 질병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하지만 그녀의 열병이 아무리 장기적이었고 또 극심했다고 할지라도 만병의 대 의사이신 예수께서 못 고치실리가 없으셨을 것이다.

카이 프로셀돈 에게이렌 아우텐 크라테사스 테스 케이로스 아우테스 카이 아페켄 아우텐 호 퓌레토스 유데오스 카이 디에코네이 아우토이스

개역개정,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새번역,31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우리말성경,31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손을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 시몬 장모의 열이 떨어졌습니다. 곧바로 그 여인은 그들을 시중들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성경,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영어NIV,31 So he went to her, took her hand and helped her up. The fever left her and she began to wait on them.

영어NASB,31 And He came to her and raised her up, taking her by the hand, and the fever left her, and she waited on them.

영어MSG,31 He went to her, took her hand, and raised her up. No sooner had the fever left than she was up fixing dinner for them.

영어NRSV,31 He came and took her by the hand and lifted her up. Then the fever left her, and she began to serve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31 και προσελθων ηγειρεν αυτην κρατησας της χειρος αυτης και αφηκεν αυτην ο πυρετος ευθεως και διηκονει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31 et accedens elevavit eam adprehensa manu eius et continuo dimisit eam febris et ministrabat eis

히브리어Modern,31 ויגש ויאחז בידה ויקימה ותרף ממנה הקדחת פתאם ותשרת אותם׃

성 경: [막1:3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심]

󰃨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예수께서 병을 치유하실 때 취하시는 특징적인 행동으로서(41절;5:41) 환자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인 사랑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누가는 이 장면을 ‘열병을 꾸짖으신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눅 4:39), 이는 의사 출신인 누가가 그 열병의 원인을 사단의 활동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눅 13:16)

󰃨 열병이 떠나고…수종드니라 – ‘떠나고’에 해당하는 ‘아페켄'(*)은 부정 과거형으로서 이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즉각적으로 단번에 나은 사실을 가리키고, ‘수종드니라’에 해당하는 ‘디에코네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계속하여 수종드는 현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같은 확실한 구원의 확증을 받은 자에게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과 행위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옾시아스 데 게노메네스 호테 에뒤 호 헬리오스 에페론 프로스 아우톤 판타스 투스 카코스 에콘타스 카이 투스 다이모니조메누스

개역개정,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새번역,32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우리말성경,32 그날 저녁 해진 후에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전부 예수께로 데려왔습니다.

가톨릭성경,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영어NIV,32 That evening after sunset the people brought to Jesus all the sick and demon-possessed.

영어NASB,32 When evening came, after the sun had set, they began bringing to Him all who were ill and those who were demon-possessed.

영어MSG,32 That evening, after the sun was down, they brought sick and evil-afflicted people to him,

영어NRSV,32 That evening, at sundown, they brought to him all who were sick or possessed with demons.

헬라어신약Stephanos,32 οψιας δε γενομενης οτε εδυ ο ηλιος εφερον προς αυτον παντας τους κακως εχοντας και τους δαιμονιζομενους

라틴어Vulgate,32 vespere autem facto cum occidisset sol adferebant ad eum omnes male habentes et daemonia habentes

히브리어Modern,32 ויהי בערב כבוא השמש ויביאו אליו את כל החולים ואת אחוזי השדים׃

성 경: [막1:3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를 고치심]

󰃨 저물어 해 질 때에 –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계명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토요일 오후, 곧 안식일이 끝나는 시각을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운반해 와 예수께 고침받기를 원하였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으며, 이 시간내에서는 일체의 노동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다(렘 17:21). 특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의 정신은 배격(排擊)한 채 그 율법의 조목만을 지키도록 강요하였으며, 그리하여 백성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든 삶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수 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신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 모든 병자…데려오니 – 폭발적인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져나가자 ‘모든(각양)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인 자들이 예수께 나아왔다. 특별히 본문의 ‘데려오니'(*, 에페론)는 미완료 시제로서 병자들을 계속 연이어서 데려왔음을 보여 준다. 한편 마가는 누가의 경유처럼 각 환자들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다만 ‘모든'(많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수께서 그 어떤 질병도, 또 아무리 많은 환자라도 다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카이 헤 폴리스 홀레 에피쉬네그메네 엔 프로스 텐 뒤란

개역개정,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새번역,33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우리말성경,33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가톨릭성경,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영어NIV,33 The whole town gathered at the door,

영어NASB,33 And the whole city had gathered at the door.

영어MSG,33 the whole city lined up at his door!

영어NRSV,33 And the whole city was gathered around the door.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η πολις ολη επισυνηγμενη ην προς την θυραν

라틴어Vulgate,33 et erat omnis civitas congregata ad ianuam

히브리어Modern,33 וכל העיר נאספו יחדו פתח הבית׃

성 경: [막1:3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를 고치심]

󰃨 온 동네가…모였더라 – 마태와 누가는 병자들의 큰 무리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지만(마 8:16;눅 4:40), 마가는 온 동네, 즉 가버나움 지역의 무리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시간은 대충 안식일이 끝나는 일몰 직후(日沒直後)라고 보아야 한다. 그날 아침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이적으로 고치신 사실이 소문으로 신속히 퍼져 군중들은 환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 계신 곳으로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33절은 특별히 생동감을 더해 주며, 이 동사의 시제가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수효(數爻)가 늘어가고 있음을 일러 준다. 한편 본문의 ‘문 앞’이란 베드로의 집 문 앞을 가리키며 바로 이 문을 통과한 자들, 곧 문을 통과하여 예수를 만난 자들은 하나같이 회복과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카이 에데라퓨센 폴루스 카코스 에콘타스 포이킬라이스 노소이스 카이 다이모니아 폴라 엨세발렌 카이 우크 에피엔 랄레인 타 다이모니아 호티 에데이산 아우톤

개역개정,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새번역,34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4 예수께서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귀신들도 내쫓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예수가 누구신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가톨릭성경,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NIV,34 and Jesus healed many who had various diseases. He also drove out many demons, but he would not let the demons speak because they knew who he was.

영어NASB,34 And He healed many who were ill with various diseases, and cast out many demons; and He was not permitting the demons to speak, because they knew who He was.

영어MSG,34 He cured their sick bodies and tormented spirits. Because the demons knew his true identity, he didn’t let them say a word.

영어NRSV,34 And he cured m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cast out many demons; and he would not permit the demons to speak, because they knew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4 και εθεραπευσεν πολλους κακως εχοντας ποικιλαις νοσοις και δαιμονια πολλα εξεβαλεν και ουκ ηφιεν λαλειν τα δαιμονια οτι ηδεισα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34 et curavit multos qui vexabantur variis languoribus et daemonia multa eiciebat et non sinebat loqui ea quoniam sciebant eum

히브리어Modern,34 וירפא רבים אשר היו חולים חליים שונים ויגרש שדים הרבה ולא נתן את השדים לדבר כי ידעהו׃

성 경: [막1:3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를 고치심]

󰃨 각색 병든 많은 사람 – 이는 예수께 나아온 병자들의 양상을 보여 주는 말로써 그 병증이 매우 다양했음을 알려주며,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대별(大別)하면 귀신 축출, 질병 치유, 죽은 자를 살림, 피조계(被造界)를 당신의 의지로 다스림 등이 있으나 특히 마가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바로 귀신 축출이었다.

󰃨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영적 감지력(感知力)이 뛰어난 귀신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눅 4:41). 사실 귀신들은지적인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마 1:24), 자신의 운명(마 8:29) 그리고 구원의 계획(약 2:19) 등을 알았으며, 그들 나름대로 잘 발달된 지적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딤전 4:1-3). 이 사실은 이미 24절에서도 잠깐 밝힌 바 있다.

󰃨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실로 귀신들도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이다. 그런 관점에서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이 아니고 ‘귀신’에게 말을 못하게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귀신의 말을 허용 혹은 묵과하셨다면 상황은 어떠했겠는가? 아마도 그들은 24절에서와 같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서슴없이 외쳐대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자신의 신적인 존재에 대해 인지(認知)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나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포하는 것을 금지시키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악한 존재에 의해 그 신분이 밝혀지기전에 먼저 말씀과 행동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의 메시야인가를, 즉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메시야 개념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메시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오직 구원받은 자기의 백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온 천하에 전파되기를 원하셨다(16:15;행 1:8).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아직 당신의 존재를 공개하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침묵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카이 프로이 엔뉘콘 리안 아나스타스 엨셀덴 카이 아펠덴 에이스 에레몬 토폰 카케이 프로세위케토

개역개정,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새번역,35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우리말성경,35 매우 이른 새벽 아직 어둑어둑할 때 예수께서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영어NIV,35 Very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Jesus got up, left the house and went off to a solitary place, where he prayed.

영어NASB,35 In the early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Jesus got up, left the house, and went away to a secluded place, and was praying there.

영어MSG,35 While it was still night, way before dawn, he got up and went out to a secluded spot and prayed.

영어NRSV,35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very dark, he got up and went out to a deserted place, and there he prayed.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πρωι εννυχον λιαν αναστας εξηλθεν και απηλθεν εις ερημον τοπον κακει προσηυχετο

라틴어Vulgate,35 et diluculo valde surgens egressus abiit in desertum locum ibique orabat

히브리어Modern,35 וישכם ממחרת בעוד לילה ויצא וילך אל מקום חרבה ויתפלל שם׃

성 경: [막1:3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새벽 오히려 미명에 –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교훈과 치유 사역으로 몸이 퍽 고단하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집에 머무시다가 ‘아직 날이 채 새기도 전에'(눅4:42)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엔뉘카 리안'(*)을 흠정역에서는 ‘날이 밝기 이전'(agreat while before day)이라 하였고, NIV역에서는 ‘아직 어두울 때'(while it wasstill dark)로 번역하고 있다. 이때는 아마도 오늘날의 새벽 3-4시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나가셨을 뿐 아니라 그 성읍에서도 나가셔서 갈릴리 가버나움 교외의 광야 지대로 추정되는 ‘한적한 곳’으로 발길을 옮기셨던 것이다. 본서에는 이곳 외에도 두 번 정도 더 같은 상황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예수는 당신의 사역 중 매우 중대한 일을 눈 앞에 두었음을 볼 수있다. 지금 예수는 갈릴리 전역에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서 그 어떤 준비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내밀한 교제를 통한 영적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한적한 곳에, 이른 시간에 홀로 나아오셨던 것이다.

󰃨 기도하시더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토'(*)는 미완료 시제로서 예수께서 기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열심히 기도하셨음을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맡은 인류 구속 사역, 그중에서도 지금 당장 완수해야만 하는 갈릴리 사역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요구하셨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기도의 모본(模本)을 통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그는 세례 받으실 때(눅 3:21), 열 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눅 6:12), 오병 이어의 이적을 베푸실 때와그 일 후에(6:41,46),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시고자 할 때에(눅 9:18), 변화산에 계실 때에(눅 9: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도 오라”고 하신 사랑의 초청 직전에(마 11:25-30), 베드로가 자기를 세 번 부인하기 전 그를 위하여서(눅22:32),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시던 날 밤에(요 17장), 겟세마네 동산에서(14:32, 35,36, 39), 십자가 위에서(눅 23:34), 그리고 그의 부활 후(눅 24:30)에 기도하셨다. 위의 기도의 경우들은 예수의 기도 생활이 얼마나 진지했으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실로 기도는 그분이 지니신 능력의 원천이요 또한 영적 양식이었던 것이다.

카이 카테디옼산 아우톤 호 시몬 카이 호이 멭 아우투

개역개정,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새번역,36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우리말성경,36 시몬과 그 일행들이 예수를 찾아 나섰습니다.

가톨릭성경,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영어NIV,36 Simon and his companions went to look for him,

영어NASB,36 Simon and his companions searched for Him;

영어MSG,36 Simon and those with him went looking for him.

영어NRSV,36 And Simon and his companions hunted for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6 και κατεδιωξαν αυτον ο σιμων και οι μετ αυτου

라틴어Vulgate,36 et persecutus est eum Simon et qui cum illo erant

히브리어Modern,36 וירדפו אחריו שמעון והאנשים אשר אתו׃

성 경: [막1:36]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뒤를 따라가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디옥산'(*)은 단순히 추종(追從)하는 것이 아닌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샅샅이 뒤지고 성가실 정도로 찾고 또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증거해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들의 영적 무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즉 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마가가 ‘제자들'(*, 마데타이)이란 말를 쓰지 않고 ‘시몬과 및 그와 함께있는 자들’이라 묘사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제자들처럼 행동치 못하고 단지 무지한 인간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이 휴론테스 아우톤 레구신 아우토 호티 판테스 제투신 세

개역개정,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새번역,37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우리말성경,37 그들이 마침내 예수를 만나자 소리쳐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가톨릭성경,37 그분을 만나자, “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37 and when they found him, they exclaimed: “Everyone is looking for you!”

영어NASB,37 they found Him, and said to Him, “Everyone is looking for You.”

영어MSG,37 They found him and said, “Everybody’s looking for you.”

영어NRSV,37 When they found him, they said to him, “Everyone is searching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37 και ευροντες αυτον λεγουσιν αυτω οτι παντες ζητουσιν σε

라틴어Vulgate,37 et cum invenissent eum dixerunt ei quia omnes quaerunt te

히브리어Modern,37 וימצאהו ויאמרו אליו הנה כלם מבקשים אותך׃

성 경: [막1:37]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있었던 무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것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며 그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를 찾아 뵙기를 원하였다. 이들은 아직 예수를 구주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단지 예수의 외적인 능력, 곧 병 고치는 능력에 혹(惑)하여 열광적으로 예수를 찾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기뻐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실로 그들은 아직 온전한 메시야관을확립하지 못한 채 정치적이고 인기에 영합(迎合)하는 그릇된 메시야관(8:27-9:1)에 집착했음이 분명하다.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아고멘 에이스 타스 에코메나스 코모폴레이스 히나 카케이 케륔소 에이스 투토 가르 엨셀레뤼다

개역개정,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새번역,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우리말성경,3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가까운 이웃 마을들에 가서도 말씀을 전파하도록 하자. 내가 이 일을 하러 왔다.”

가톨릭성경,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영어NIV,38 Jesus replied, “Let us go somewhere else–to the nearby villages–so I can preach there also. That is why I have come.”

영어NASB,38 He said to them, “Let us go somewhere else to the towns nearby, so that I may preach there also; for that is what I came for.”

영어MSG,38 Jesus said, “Let’s go to the rest of the villages so I can preach there also. This is why I’ve come.”

영어NRSV,38 He answered, “Let us go on to the neighboring towns, so that I may proclaim the message there also; for that is what I came out to do.”

헬라어신약Stephanos,38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αγωμεν εις τας εχομενας κωμοπολεις ινα κακει κηρυξω εις τουτο γαρ εξεληλυθα

라틴어Vulgate,38 et ait illis eamus in proximos vicos et civitates ut et ibi praedicem ad hoc enim veni

히브리어Modern,38 ויאמר אליהם נעברה מזה אל ערי הפרזות הקרבות ואקרא גם שם כי בעבור זאת יצאתי׃

성 경: [막1:38]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 이제부터 주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각 동리와 마을들로 다니시며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수행하시고자 결단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일반 사람들과 같이 단순히 이적이나 일으켜 군중들에게 인기나 얻고 세상적인 부귀 영화나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주셨다(마 4:6-10). 그의 목적은, 비록 이세상에서는 머리 들곳조차 없을지언정(마 8:20;눅 9:58) 고난의 길을 택하시고 그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천국 복음을 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여기서 ‘마을들'(*, 코모폴레이스)이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규모를 갖춘 마을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면 그 당시 갈릴리 상류 지역에는 수천명을 군락(郡落)으로 하는 약 200여개의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예수는 이 200여개의 마을을 다 돌아다니시고자 하셨다기 보다 가버나움 근방의 여러 마을들을 돌으시며 전도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지 단지 기적이나 베풀어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 오시지는 않았다. 물론 병고침과 귀신 축출은 중요한 일이지만(39절) 그것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야 했다. 실로 마가가 그의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를 기적 베푸는 자로서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단적 기독론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면 분명히 본문의 말씀은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왔노라'(*, 엑세르돈)는 말은 ‘…에서 나아왔다’는 뜻으로서 베드로의 집에서 기도하러 광야로 나아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고(Mayer),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나아왔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Bengel). 그런데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4:43)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땅에 거룩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에 왔노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카이 엔 케뤼쏜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아우톤 에이스 홀렌 텐 갈릴라이안 카이 타 다이모니아 에크발론

개역개정,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새번역,39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우리말성경,39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가톨릭성경,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영어NIV,39 So he traveled throughout Galilee, pr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driving out demons.

영어NASB,39 And He went into their synagogues throughout all Galilee, preaching and casting out the demons.

영어MSG,39 He went to their meeting places all through Galilee, preaching and throwing out the demons.

영어NRSV,39 And he went throughout Galilee, proclaiming the message in their synagogues and casting out demons.

헬라어신약Stephanos,39 και ην κηρυσσων εν ταις συναγωγαις αυτων εις ολην την γαλιλαιαν και τα δαιμονια εκβαλλων

라틴어Vulgate,39 et erat praedicans in synagogis eorum et omni Galilaea et daemonia eiciens

히브리어Modern,39 ויהי קרא בבתי כנסיותיהם בכל הגליל ויגרש את השדים׃

성 경: [막1:39]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 이는 예수의 제 1차 갈릴리 전도 여행을 요약한 말이다. 사실 마가의 ‘온 갈릴리’라는 표현은 과장이라기보다 매우 방대한 지역을 활보(闊步)하였음을 강조하는 말로서, 예수의 전도 여행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여러 회당 – 그 역사의 시작이 포로 시대로 믿어지는 이 회당은(21절 주석 참조)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 백성들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곳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데는 매우 긴요(緊要)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The Jerusalem Talmud)의 한 구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멸망 때(A.D.70)에 팔레스틴에는 480여개의 회당이 산재(散在)해 있었다고 한다. 예수의 초창기 사역도 이 회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눅 4:16-30,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교회’참조). 한편 예수께서 ‘여러 회당’에서 설교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현재 남아있는 회당들의 옛 터를 보면 모두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갈릴리 지방의 회당들은 남쪽을, 예루살렘 남쪽의 회당들은 북쪽을, 예루살렘 서편의 회당들은 동편을 각각 향하고 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그가 어느 회당에 들어가시든지 간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동안에는 항상 자신이 장차 십자가에 못박히신 골고다 언덕을 향하고 계셨을 것이다. 주님은 늘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시고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이다(빌 2:8).

카이 에르케타이 프로스 아우톤 레프로스 파라칼론 아우톤 아우톤 카이 레곤 아우토 호티 에안 델레스 뒤나사이 메 카다리사이

개역개정,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새번역,40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말성경,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가톨릭성경,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영어NIV,40 A man with leprosy came to him and begged him on his knees, “If you are willing, you can make me clean.”

영어NASB,40 And a leper came to Jesus, beseeching Him and falling on his knees before Him, and saying, “If You are willing, You can make me clean.”

영어MSG,40 A leper came to him, begging on his knees, “If you want to, you can cleanse me.”

영어NRSV,40 A leper came to him begging him, and kneeling he said to him, “If you choose, you can make me clean.”

헬라어신약Stephanos,40 και ερχεται προς αυτον λεπρος παρακαλων αυτον και γονυπετων αυτον και λεγων αυτω οτι εαν θελης δυνασαι με καθαρισαι

라틴어Vulgate,40 et venit ad eum leprosus deprecans eum et genu flexo dixit si vis potes me mundare

히브리어Modern,40 ויבוא אליו איש מצרע ויתחנן אליו ויכרע על ברכיו ויאמר לו אם תרצה תוכל לטהרני׃

성 경: [막1:40]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먼저 본문 이하부분(40-45절)과 바로 앞 부분의 기사는 접속사 ‘카이'(*, ‘그리고’)로 연결되었으며, 또 뒤따라 나오는 기사(2:1-3:6) 역시 ‘카이’로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40-45절 부분은 1:21-39과 2:1-3:6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마가복음에서 이 부분이 하나로 간주될 수 있는 단위임이 틀림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본문은 갈릴리 전도 여행 도중에 발생한 것임이 분명하다.

󰃨 문둥병자 – 문둥병(혹은 나병)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질병으로서, 그 환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박탈당한 채 그들의 공동체 밖으로 소외되었다. 한편 성경에서의 문둥병이라는 말은 문둥병(leprocy)을 비롯한 광범위한 유형의 심한 피부병을 지칭하는 병명으로 쓰였다. 이는 흔히 의학 용어로 한센씨 병(Hansen disease)이라 일컬어지는 나병에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니라 피부와 모발의 이상 등에도 사용되던 피부 질환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피부병이든간에 그것이 일단 문둥병으로 단정지어지면 그 사람은 이후부터 매우 고통스러운 생활을 해야만 한다. 율법에는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 46)고 규정하여 육체적 고통과 함께 대사회적 고통까지 함께 받아야만 했던 무서운 질병이다.

󰃨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 율법에 의하면 사회 활동이나 대인 접촉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문둥병자는 율법의 고리를 깨치고 예수께 나아왔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주께 나아오는 자의 담대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께 나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손과 예의를 갖추고 (‘끓어 엎드리어’) 예수께 경배했다. 이에 대해 누가는 ‘엎드려'(눅 5:12)라고 했으며, 마태는 ‘절하고'(마 8:2)라고 각각 묘사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다. 진정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치 자신의 전부를 예수께 드리기라도 하듯이 겸손한 몸가짐으로 경의(敬意)를 표했던 것이다(시10:17;약 4:6).

󰃨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문둥병자는 예수께서는 자기를 능히 고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바는 예수께서 과연 자기의 치유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 문둥병자의 예수께 대한 신앙 지식(전지 전능하신 분으로서 무엇이든 원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는 사실)을 가히 초월적이리만큼 놀라왔다. 주께 모두 맡기는 것이야말로 간구자의 참된 자세일 것이다. 한편 그 문둥병자는 예수께 ‘고침’을 바라기보다 ‘깨꿋케됨’을 바랐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으로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둥병은 의학상의 문제이기 이전에 의식법상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레 13:1-3).

호 데 예수스 스플랑크니스데이스 엨테이나스 텐 케이라 헾사토 아우투 카이 레게이 아우토 델로 카다리스데티

개역개정,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새번역,41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우리말성경,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한다. 자, 깨끗이 나아라!”

가톨릭성경,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영어NIV,41 Fill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the man. “I am willing,” he said. “Be clean!”

영어NASB,41 Moved with compassion,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him, and said to him, “I am willing; be cleansed.”

영어MSG,41 Deeply moved, Jesus put out his hand, touched him, and said, “I want to. Be clean.”

영어NRSV,41 Moved with pity,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him, and said to him, “I do choose. Be made clean!”

헬라어신약Stephanos,41 ο δε ιησους σπλαγχνισθεις εκτεινας την χειρα ηψατο αυτου και λεγει αυτω θελω καθαρισθητι

라틴어Vulgate,41 Iesus autem misertus eius extendit manum suam et tangens eum ait illi volo mundare

히브리어Modern,41 וירחם עליו וישלח את ידו ויגע בו ויאמר רצה אנכי טהר׃

성 경: [막1:4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민망히 여기사(*, 스플랑크니조마이;filled with compassion,NIV) – 그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 동인(動因)이 묘사되고 있다. 이 말의 본래의 의미는 ‘간절히 열망하다’를 뜻한다. 이것은 예수의 문둥병자를 향하신 긍휼과 사랑과 동정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곧 그가 받는 모든 고통을 목격하고 더불어 그 고통에 동참할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일 것이다(히 4:15). 한편 본문의 ‘민망히 여기사’라는 독법(讀法)을 일부 사본들에서는 ‘분하게 여기사’라는 의미의 ‘오르기스데이스'(*)로 읽기도 한다. 이러한 변용에 대해 혹자(W. W. Wessel)는 주께서 분을 내신다는 말을 쓰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 서기관에 의해 ‘오르기스데이스’ 독법 대신에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독법을 취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오르기스데이스’ 독법을 취하게 된다해도 그 더러운 병이 마귀의 것이라는 사실이 예수로하여금 분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는 설명으로 이에 대한 답변을 삼을수 있다. 즉 예수의 분냄은 병자나 그가 앓고 있는 병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를 파멸로 이끈 사단에게 겨냥한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와 사단은 또 한번의 충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관심을 기울이는 한 가지 사안이다. 그러나 비록 ‘오르기스데이스’ 독법을 취한다하더라도 그 병자에 대한 예수의 뜨거운 연민의 정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 손을 내밀어 – 예수께서는 부정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는데, 이는 모세법에 근거해 볼 때 부정을 자초(自招)하는 일이었다(레 13:45, 46). 사실 유대인들은 문둥병 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는 경우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看做)할 만큼 의식법에 철저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행위는 초월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정 예수는 인류 구속의 메시지를 단지 입으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이시고, 인간들에게 내재해 있는 두려움과 그릇된 관념을 실현해 보이셨다. 실로 그분의 사랑의 손길은 의식법의 부정이 지닌 힘보다 더 강하고 탁월한 것이었다. 한편 복음서의 많은 구절들에서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친히 그 손을 대시며 병을 고쳐주셨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마 8:3,15;9:29;17:7;20:34;눅 5:13;7:14;22:51 등). 그리고 때로는 병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손을 대기도 하였다(3:10;5:27-31;6:56). 이처럼 어느 편에서 손을 대었든지간에 모두 병이 낳았다. 즉 분명히 그와 같은 신체적인 접촉으로 인하여 치료의 능력이 구주에게서 나와서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전하여졌던 것이다(5:30;눅 8:46).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어떤 마술이 아니었다. 또한 그 치료의 능력은 결코 주님의 손가락이나 옷자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의지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히 4:15) 그 손으로 병자를 만지실 때 치료의 능력은 발하여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그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셨다. 이 불쌍한 병자의 간절한 소원과 믿음은 즉시 그를 간절한 마음으로 돕고자 하시는 구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이처럼 신속한 응답은 주님의 의지와 능력과 사랑이 하나로 뭉쳐진 결과로 이뤄진것이었다.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에게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응답이었다(원하시면 – 원하노니,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깨끗함을 받으라.) 사실 예수께서는 이처럼 너무도 적절한 응답을 베푸셨을 뿐 아니라 그 문둥병자에게 ‘더 큰 믿음과 온전한 영혼’까지 덧붙여 응답해 주신 것이다.

카이 에이폰토스 아우투 유데오스 아펠덴 앞 아우투 헤 레프라 카이 에카다리스데

개역개정,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새번역,42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 ㉣나병을 포함한 각종 악성 피부병

우리말성경,42 그러자 나병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가톨릭성경,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영어NIV,42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cured.

영어NASB,42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cleansed.

영어MSG,42 Then and there the leprosy was gone, his skin smooth and healthy.

영어NRSV,42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made clean.

헬라어신약Stephanos,42 και ειποντος αυτου ευθεως απηλθεν απ αυτου η λεπρα και εκαθαρισθη

라틴어Vulgate,42 et cum dixisset statim discessit ab eo lepra et mundatus est

히브리어Modern,42 עודנו מדבר והצרעת סרה ממנו ויטהר׃

성 경: [막1:4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곧…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 문둥병 증세가 약간의 차도(差度)가 생긴 것도, 일시적인 회복도 아닌 영원히 그 환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 이적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한편 복음서의 각 평행구 중에 마 8:3은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눅5:13은 ‘문둥병이 곧 떠나가니라’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곧 문둥병이…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두 가지 면을 다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치료는 즉각적이며 완전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장모는 앓던 열병이 완전히 회복되는데 다음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마 8:14, 15). 중풍병자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침상를 들고 걸어 나갔다(눅 5:24, 25). 한편 손 마른 사람도 그 자리에서 즉시 회복되었다(3:1-5).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41절)와 그 목적 하신 바의 성취(42절)는 절대적으로 일치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전능성과 권위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본 이적은 표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식법을 범하신 사건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생명의 성령의 승리’였던 것이다(롬 8:2).

카이 엠브리메사메노스 아우토 유데오스 엨세발렌 아우톤

개역개정,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새번역,43 예수께서 단단히 이르시고, 곧 그를 보내셨다.

우리말성경,43 예수께서는 곧바로 그를 보내시며 단단히 당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영어NIV,43 Jesus sent him away at once with a strong warning:

영어NASB,43 And He sternly warned him and immediately sent him away,

영어MSG,43 Jesus dismissed him with strict orders:

영어NRSV,43 After sternly warning him he sent him away at once,

헬라어신약Stephanos,43 και εμβριμησαμενος αυτω ευθεως εξεβαλε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43 et comminatus ei statim eiecit illum

히브리어Modern,43 ויגער בו וימהר להוציאו החוצה׃

성 경: [막1:4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엄히 경계하사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브리마오마이'(*)는 원래 ‘말처럼 코를 푸르릉거리다’, ‘콧소리를 씩씩내며 분노를 터뜨리다’로서 매우 격분한 상태를 나타내 준다. 따라서 예수께서 경계하셨다는 말씀 속에는 성냄과분개(憤慨)의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처럼 분노하셨을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부하신 말씀(44절)을 그 사람이 불순종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서 예수는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시게 되었던 것이다(45절). 진정 예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이적 행하는 자’로 알려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 곧 보내시며(*, 유뒤스 엑세발렌)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지체없이 억지로 쫓아 보내시며’가 된다(12절). 이는 앞의 ‘엄히 경계하사’라는 말과 조화를 이루어 예수의 격렬한 감정을 분명히 노출시키고 있다.

카이 레게이 아우토 호라 메데니 메덴 에이페스 알라 휘파게 세아우톤 데잌손 토 히에레이 카이 프로세넹케 페리 투 카다리스무 수 하 프로세탘센 모위세스 에이스 마르튀리온 아우토이스

개역개정,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새번역,44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

우리말성경,44 “이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다만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이 나은 것에 대해 모세가 명령한 대로 예물을 드려 사람들에게 증거를 삼아라.”

가톨릭성경,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영어NIV,44 “See that you don’t tell this to anyone. But go, show yourself to the priest and offer the sacrifices that Moses commanded for your cleansing, as a testimony to them.”

영어NASB,44 and He said to him, “See that you say nothing t

[마가복음 1장 주석 강해설교] 예수님의 사역 준비(막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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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사역을 하시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동안 계시면서 사탄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모든 시험을 이겨내신 예수님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 준비(막 1:9-13)

우리는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심과 광야의 시험에 대하여 간단히 요약되었음을 볼 수 있다. 마태는 이 기사를 3장과 4장에서 길에 언급하고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심은 오랫동안 나사렛에서 이름 없이 지내신 후 처음으로 대중 가운데 보이신 등장이었다. 이 세상에는 멸시의 먼지 속에 묻혀서 드러나지 못하였거나 겸허의 베일 속에 싸여서 드러나지 않은 숨은 보배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불원 간에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1.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나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겸허하게 하나님을 모시고 계신가를 보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하나님은……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오직 흠 없고 없는”(벧전 1:19)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사 53:3) “우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고” 자기를 거룩하게 하였으니(요 17:19)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를 거룩하고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자”(롬 6:3).

2.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에 순응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화롭게 그를 당신의 아들로 인정하였는가를 보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요한의 세례를 받아 하나님을 의롭다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눅 7:29, 30),

(1) 예수께서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다. 하늘로부터 그를 주로 인정하였다. 그 앞에 기쁨과 영광의 빛이 임하였다. 그리고 그의 맡은 임무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였다. 마태는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마 3:16)라고 표현하였고, 마가는 “하늘이 갈라짐과 ……내려오심을 보시더니”(He saw them opened)(10절)라고 표현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당하실 고통을 분명히 내다보셨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내다보셨던 것이다.

(2) 예수께서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었다(10절).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고 역사 하심을 느낄 때 하늘이 우리에게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음에 주의하자. 우리 안에 행하시는 그의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선한 뜻과 우리를 위한 당신의 준비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요단 강에 불이 켜졌다”고 하였다. “큰 빛이 그 주위를 비추었다”라고 보는 것이 고대의 전설이다. 그 이유는 성령에게 빛과 열을 동반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3) 예수께서 들으신 하늘의 음성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의도에서 들려졌으므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11절)고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에게 아래의 사실들을 알게 하신다.

①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신 그러한 낮고 천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조금도 다름없이 그를 사랑하신다. 비록 그처럼 자기를 겸허하게 하고 명성을 떨치지 않았다 해도 “그는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하나님은 알게 하신 것이다.

②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지금 자랑스럽게 그리고 친절하게 착수한 그 임무 때문에 그를 더욱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인간 사이의 장벽이 되는 모든 문제들의 중재자로서 그리스도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기뻐하실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시험. 성령에게 임하셔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시었다”(12절). 사도 바울은 그가 부름을 받았을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갈 1:17)고 말하고,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하였다. 세상으로부터 잠시 물러남은 하나님과 더욱 자유스럽게 교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어느 적당한 시기에 이런 좋은 기회를 마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머물러 계시던 광야의 상황을 살펴보고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13절)라 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보셔서 그가 들짐승에게 해를 받지 않도록 지켜 주셨다는 한 가지 실례가 될 수 있으며, 그 사실은 또한 그가 시장하실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채워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는 때를 따라 공급해 주시는 은혜의 표징이다.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지낸 그 사실은 또 그리스도께서 함께 살아야 할 그들, 즉 광야의 들짐승보다 더 나은 점이 없고 오히려 못한 그 당시 사람들의 잔인성에 대한 암시가 될 수도 있다. 끝으로 그 광야에서 되어진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그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하던 악령들은 매우 바빴다. “예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13절). 내부적인 침투가 아니라 외부적인 유혹이었다. 염려는 흔히 유혹자에게 이익을 준다. 그러므로 혼자보다 둘이서 같이 있는 게 좋다. 그리스도 자신이 시험을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단지 시험을 받는 것이 죄는 아니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어디로 가서 구조를 받아야 되는가를 직접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2. 그 광야에서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분주하였다. 천사들은 예수를 수종들었다(13절). 그리스도께서 필요하신 것을 공급해 주었으며 충성스럽게 그를 받들어 섬겼다.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보살피는 천사들의 임무를 생각해 보라. 우리를 향해 도전해 악령들의 간교에 대하여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천사들보다도 더욱 친근감을 주고 친히 우리 심령 속에 들어와 내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을 모신 자는 “하나님께서부터 난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을 악령이 해할 수 없으며 성령께서 악령들의 세력을 멸하신다.

[신약 성경 주석 강해 마태복음] 동방 박사들의 탐문(마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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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마가복음 내용 요약 설교 자료 주석 묵상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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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은 족보를 통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안내한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에 대한 헌정사로 시작하여, ‘차례대로 써 보내는’ 글을 우리에게 제공할 요량임을 알려 준다. 이 두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배경 자료들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게 해 준다.

세상을 품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목차

요한복음은 매우 부드럽게 시작한다. 운율이 느껴지는 요한복음의 글은 작은 속삭임으로 시작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렁찬 목소리로 선언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목자나 천사나 아기의 모습을 다루느라 뜸을 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발코니에서 깊은 수영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한 덩이 얼음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막 1:1) 곧장 이야기한다. 이 놀랍도록 복된 소식의 영향은 이내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간다. 5절에 이르면 신약성경에서 가장 야성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례 요한과 대면하여 세례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회개(돌아서서 마음의 변화를 가지는 행위)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요한의 시작 메시지와 그 속에 나타난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통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세례를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마가복음 1:2-3에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놀라운 도래(到來)가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도래를 계획하신 것이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수세기 동안 이 새로운 현실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셨음을 상기시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 개역개정 성경)

이 선언은 그저 하나의 뉴스 속보가 아니다.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깨어 움직이기를 요청하고 있다.

성 마태

본문 속으로

예수님의 도래와 함께 세상 속으로, 또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통치는 결정적이면서도 극적인 것이다. 갑작스레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그분이 우리 마음과 삶 속에 들어온 날과 그 순 간까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든 없든 혹은 중생한 이후부터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든 안 계 시든 간에,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는 결정들에 영향을 미친다. 그분의 삶을 이해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쓰시고자 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역동적인 기록, 세밀한 묘사

마가복음은 전체 줄거리를 서둘러 끝내려는 듯 숨 가쁘게 이어진다. 마가복음에는 곧 ‘즉시’, ‘그리고’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꽤 여러 인물이 매우 빈번하게 본문을 들락거린다. ‘길에 계시는 예수님과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여러 지역에 발을 디딘다. 현대인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저마다 이 일에서 저 일로,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다니며 분주하게 살고 있다. 너무 바쁜 나머지 개별적인 일이나 장소나 사람이 우리 삶에서, 심지어는 우리를 초월하여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전체 이야기에서 어떻게 기여하는지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를 통해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내용이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할지라도 더욱 주목해서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얻기 위하여, 길을 따르는 와중에도 매 지점마다 잠깐 쉬어 가는 것은 필요하다.

마가는 이곳저곳의 세부 사항들을 놀라울 정도로 상세히 말해 준다. 우리가 모든 것, 심지어는 가장 작은 것 하나까지도 눈여겨보게 하기 위해서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을 수선하는 동안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던진다(1:16-20). 예수님은 광풍 중에 배에서 주무시며 고물에서 쉬고 계셨다(4:38).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아팠다(5:25). 배불리 먹은 5천 명의 사람들은 풀밭에 100명씩, 50명씩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6:39-40).

마가는 또한 감정의 세밀한 면까지도 묘사한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기도 하시며, 강하게 경고하기도 하시고, 분노 가운데 돌아보기도 하신다. 또한 탄식하기도 하신다. 긍휼과 분노와 사랑과 비통함을 느끼기도 하신다. 어떤 경우에는 한숨을 짓기도 하신다. 이렇게 감정의 세밀한 면까지 묘사해 주므로 믿음은 삶의 실제적인 사건들에서 형성되며, 또한 믿음으로 살다 보면 우리나 하나님에게 온갖 종류의 감정과 반응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러므로 초월해 계시지만 성육신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때,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마가복음의 기록자는 누구인가?

마가복음은 4 복음서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된다. 정확한 기록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60년대와 70년대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또 다른 초기 자료들을 사용했겠지만, 기본 구조는 마가복음으로부터 차용한 듯하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이 다른 자료를 ‘Q’ 자료라고 부른다. 이 자료에는 예수님의 어록과 교훈이 마가복음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마가복음과 함께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공관복음'(synoptic Gospels)이라고 부르는데, 세 복음서 사이에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다.

‘마가'(Mark)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어떤 학자들은 마가가 베드로를 알고 있었으며, 그가 목격자였던 베드로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를 ‘순서대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정확하게 기술했다고 생각한다. 유세비우스(Eusebius)가 기록한 4세기의 한 문서는 2 세기부터 마가가 베드로의 ‘해석자’로 언급돼 왔다는 파피아스(Papias)의 말을 인용한다. 신약의 여러 서신서에는 마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나오지만, 개개인의 ‘마가’가 동일한 인물인지, 또 마가복음의 저자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마가를 유대인 신자라고 주장한다. 그가 헬라어 본문에서 유대 관습을 설명하고 히브리어를 번역한 부분을 증거로 들고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유대 관습을 설명하는 마가의 말이 어색하다면서 오히려 동일한 증거로부터 마가는 이방인 신자라고 결론을 내린다. 마가가 이토록 익명의 존재가 된 이유는 자신의 관심이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가복음 저자의 신원을 결론 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복음서가 의도한 첫 번째 청중이 누구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아마도 마가는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 이 복음서를 쓴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마가가 베드로가 죽기 직전이거나 직후쯤에 네로 황제 통치 하에서 박해받는 로마 신자들을 위해 썼다고도 믿는다. 더러는 팔레스타인이나 수리아 지역에 사는 이방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초대교회들은 대부분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저자’와 ‘청중’의 신분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마가가 복음서(Gospel)라는 문학 장르 안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했을 때 ‘새로운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류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내용 엿보기

마가복음의 구조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가복음을 구조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모두 16장인데, 8장까지는 대체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분에서 예수님은 널리 여행을 하신다.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악한 귀신들을 쫓아 내시며,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시고, 반대에 직면하신다. 동시에 예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할 때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 알려 준다.

그다음 마가복음 8:27에서 예수님이 질문하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대중의 의견을 전한다.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 각자가 스스로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을 던지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

먼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뒤따라 나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메시아가 되고자 하시며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나라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계시다. 이 시점을 전환점으로 해서 이야기의 전개는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겨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간다.

9장부터는 줄곧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게 된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8:31; 9:31; 10:33-34) 제자들에게 ‘인자’인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막 8:34)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메시아 직과 그들의 제자도 사이의 완벽하면서도 불편한 관계를 주의 깊게 연결 지으셨다. 세 번의 수난 예고 뒤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질문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직과 그들의 제자도 사이의 완벽하고도 불편한 관계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소경을 고친 두 편의 기사 사이에 세 편의 수난 기사를 배치함으로써, 제자들의 몽매함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벳세다에서 소경을 고치신(8:22-26) 후에 여리고 변두리에서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신다(10:46-52). 이 마지막 기사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소개되는 유일한 이야기이자 마지막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을 크게 구분했을 때, 다음과 같이 적절한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1:1 – 8:26 능력과 권세로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며, 이적을 행하심

8:27 – 29 전환점

8:30 – 16:20 수난-참된 메시아직과 참된 제자도

마가복음의 독특한 기록법

마가복음은 이중 강조법을 채택하는데,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다. 마가복음을 읽어 가다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며, 때로는 권세자들과 격돌하신다. 또한 율법을 사랑보다 우위에 두는 관습과 관행에 도전하시고 그것을 전복시키신다. 세상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부정한 자’, ‘버림받은 자’, ‘죄인’이라고 명명하고 무가치하다고 평가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거부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제자도와 하나님 나라 안으로 포함시키심으로써 환대하고 사랑을 넓히시고 확장해 가신다. 예수님은 이 모든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확립해 가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 권세자들의 손에 수난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능력과 권세로 메시아의 편견 없는 은혜와 자비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랑에 합당하게 반응하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을 계속 압제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을 했다. 그러나 죽음은 하나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십 자가에 못 박히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끝이 아니었듯이 이 이야기의 끝도 아니다.

마가복음에서 두 번째 강조하는 것은 ‘제자들’이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는 신실함의 모델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신실함을 추구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많은 점에서 예수님을 오해했다. 그리고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뭇사람의 끝이 되고,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가장 큰 자는 누구며 또한 그들이 ‘영광 중에’ 보좌 우편에 앉을 수 있겠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잠을 잤다. 복음서 끝부분에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넘겼고,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는 모두 도망쳤다.

이러한 제자들의 연약한 모습에서 위로를 얻을지도 모른다. 만약 예수님의 삶과 신실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제자도의 유일한 표준이라면 우리는 매번 부족할 뿐이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시지만, 우리는 그분처럼 온전하지 못하다. 우리는 마가가 대담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해가 둔하고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제자들과도 같다. 우리는 이해가 더디고, 의심하며,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를 두려워한다. 고난과 수치보다 영광을 더 좋아한다.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할 때 잠을 잔다. 때때로 배반하고, 부인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신다. 그분은 우리를 앞서 가시고 우리는 그분을 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나아가도록 재촉하셔서, 갈릴리 뿐 아니라 그분이 세상에 나타나시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라도 그분을 만나도록 하실 것이다.

갑작스러운 종결?

마가복음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마지막도 갑작스레 끝난다. 대체로 학자들은 마가복음 16:8인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가 원래 마가복음 끝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처럼 갑작스럽게 여인들의 침묵으로 끝을 맺는 것이 매우 불편하고 불완전하게 보여서 이후에 두 종결부가 첨가된 것 같다. 첨가된 두 종결부의 문체나 어조가 마가복음의 다른 부분과 얼마나 다른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첨가된 구절들이 원래 사본에서 잃어버린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마가는 ‘복된 소식’을 결코 이렇게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종결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이 한 구절이 마가복음의 전문이라 한들 어떻겠는가? 16장 모두가 오직 이 같은 시작을 의미한다고 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불완전한 종결은 실수가 아닐 것이다. 마가복음은 우리가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완성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 역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는 것이다. ‘돌이켜’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우리 자신이 용서받고 사랑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치유와 온전함을 위하여 일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제한하는 율법주의를 타파할 때, 비로소 이 이야기의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포괄적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아무도 부정하거나 버려진 사람 또는 죄인으로 취급당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 모두가 제자도 속으로 그리고 도래한 하나님의 다스림 속으로 환대를 받게 될 때, 복음서는 우리 가운데 계속되는 것이다.

나가면서

마가복음은 우리의 영성 개발을 위해 바쳐진 책이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초청하며,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이 복음서는 우리의 영성 개발을 위해 손쉽고 논리 정연한 결론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안에서 우리 역시 빈 무덤과 대면하면서 우리가 어디로 가며, 무엇을 말하며,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면서 영성 개발의 여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 킴벌리 클레이튼 리저(Kimberly Clayton Richter)

마가복음 연대기

BC 37년 : 헤롯의 유대 왕 즉위

BC 5년 : 세례 요한의 출생

BC 4년 : 예수의 탄생, 헤롯의 유아 학살, 헤롯 왕의 사망

AD 8년 : 어린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AD 12년 : 디베료 가이사의 로마 황제 즉위

AD 26년 : 세례 요한의 사역 시작, 본디오 빌라도의 유대 총독 부임

AD 27년 : 예수의 공생애 시작

AD 30년 : 예 수의 수난과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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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헬라어 강해] 세례 요한의 음식 메뚜기와 석청(막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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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가복음 1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세례 요한의 음식 메뚜기와 석청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능력과 심령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복음을 전파했던 사역자입니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은 세례 요한에 비하면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편하게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좋은 옷에 좋은 자동차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열심히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복음을 전하여 주님을 믿는 백성들이 많아지게 해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음식 메뚜기와 석청(막 1:1-8)

1절은 아르케 투 유앙겔리우 이에수 크리스투 휘우 투 데우입니다.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선언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간단한 구절은 아무 뜻 없이 상투적 표현으로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의식 하에서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 격으로 자신의 책의 첫머리에 배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론적 문구가 본서 전체와 연관되는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만 국한(局限)되는 서론 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마가는 행 1:21에 나오는 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표현에서 착안하여 세례 요한에 관한 기사의 문두에 이 같은 문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편 마가가 70인 역(LXX)의 총서문이라 할 수 있는 창 1:1의 ‘태초에'(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아르케’)이라는 말로 본서 기록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한 복음의 계시(revelation)가 시작됨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 문구는 본서 전체의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본서의 신적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휘우 데우) –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 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 특히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 p.120).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融合)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창 6:1-4; 욥 1:6;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 렘 3:19; 호 1:10; 11:1)를 가리켰으나,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아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성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아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예수 그리스도 – 본문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예수 크리스투)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그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無心)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예수아’ 등의 헬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要諦)를 밝히며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것이다(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크리스토스)란 ‘기름 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에서 ‘메시아’가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職任)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아성 및 그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복음 – 여기서 먼저 ‘복음'(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내용이 ‘케뤼그마'(‘선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가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a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Moul, Gospel of Mark, 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시작이라 –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마가는 70인 역(LXX)의 서론적 문구인 창 1:1의 ‘태초에'(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에는 관사가 없으나 영역(英譯) 성경에는 관사 ‘the'(즉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한층 부각시켜 주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중(暗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절은 호스 게르랖타이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 이두 에고 아포스텔로 톤 앙겔론 무 프로 프로소푸 수 호스 카타스큐아세이 텐 호돈 수 엠프로스덴 수입니다.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 저자 마가는 우리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먼저 출 23:20과 말 3:1을 인용하고 난 다음에, 3절에서 비로소 70인 역(LXX)에 의해 사 40:3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마가가 모세나 말라기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단지 선지자 이사야만을 거론한 것은 마가의 구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세한 기술을 피하고자 하는 마가의 저작 의도에 따라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사야의 이름만을 언급했다고 본다.

두 구절은, 2절의 사자가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임무를 말했다면, 3절의 ‘소리’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보다 강조점을 둔 것으로서, 서로 상관되며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에 대한 구약의 예언적 문구이다.

한편 마가는 이처럼 복음서 초두에 구약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사역과 본질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히브리어 성경 말 3:1에서 인용되었으나, 히브리어 성경과 70인 역은 ‘네 길을’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직접 개입을 강조하는 ‘내 앞에서 길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메시아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런 의도적 변용(變用)은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랍비들도 말 3:1의 엘리야와 출 23:20의 사자(使者)를 동일시하여 이 두 부분을 비슷한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이는 고대 근동에서 군주가 행차할 때 도중의 일반 백성들에 대한 교육, 군사 숙식을 준비하던 풍습 등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분기점이 되시는 예수의 등장에 앞서 지금껏 진행되어 온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심령을 먼저 준비시키기 위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완벽히 예언된 구절이다.

특별히 여기서 ‘예비하리라’라는 뜻의 헬라어 ‘카타스큐아조’는 ‘준비하다’는 의미뿐 아니라 ‘돌이키다’는 뜻도 함의(含意)하고 있다. 문법은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이사야 선지자자 예언했던 사실이 세례 요한을 통해서 직접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미래 시제는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 시점으로 보면 세례 요한이 나온 것은 미래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메시아 도래를 위한 준비 사역 중 사람들의 타락하고 부패한 심령을 돌이켜 오실 예수를 영접하도록 하는 회개에의 사역에 가장 큰 비중이 주어짐을 시사한다(마 3:1-12).

3절은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헤포이마사테 텐 호돈 퀴리우 유데이아스 포이에이테 타스 트리부스 아우투입니다.

막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1:3

본 절은 사 40:3의 70인 역의 인용으로서, 70인 역과 본문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70인 역의 ‘우리 하나님의’라는 말 대신 여기서는 ‘그의’라는 말이 사용된 점이다. 이는 마가의 의도적 변용일 수도 있고, 마가가 참조한 사본의 원문이 이미 그러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여기서 ‘그의’라는 말의 선행사는 ‘주'(퀴리오스)가 되는데, 이 칭호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부르던 것이므로 본 구절은 분명 주 예수에 대한 기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광야에 – 여기서 ‘광야'(에레모스)란 문자적으로 반드시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버려지고 황량한 처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곳은 개간되어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활용되는 곳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한편 마 3:1에서는 이것을 ‘유대 광야’라고 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유대 산지와 동쪽으로 요단 저지대, 남쪽으로 사해, 북쪽으로 얍복강과 요단강이 합류되는 지점까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광야 지역은 석회질의 토양 위에 자갈과 바위가 널려 있었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복이 심한 황폐하고 메마른 불모 지대로서 여기저기 뱀들이 기어 다니고 야수들이 출몰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곳 부근에는 쿰란(Qumran) 공동체의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쿰란 공동체의 영향력이 요한에게 어떤 양상으로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금욕생활과 엄격한 자제력 등은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 사역이나 복음 전파 내용과 종말론적 사고 등에 관해 전반적인 , 영향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눅 3:1-20). 그런데 세례 요한의 활동무대는 이곳 유대 광야 지역뿐 아니라 요단강 동편 지역에까지 확장되었던 사실이 마 3:5에서 분명히 밝혀진다.

한편 출애굽 당시(출 23:2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사자(使者)를 앞서 보내심으로 그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받게 하셨다.

본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제2의 출애굽 때에 다른 한 사자(즉 세례 요한)를 광야에 앞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파하고 예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로 신령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게 하신다.

눅 7:24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질문하셨다. 광야는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운 곳이다. 실로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참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비로소 행복을 구가(謳歌)할 수 있을 것이다.

예비하라(헤토이마사테) – 이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 ‘예비’하는 그 행위의 긴급성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듣는 즉시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예비하라는 것이다.

첩경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유데이아스…타스 트리부스’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말로서 고대 페르시아나 로마에서 왕들과 그의 측근들을 위해 건설해 놓은 특별한 도로망을 의미한다.

즉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와 죄악으로 일그러지고 구부러진 심령들이 회개함으로 그들 속에 쉽게 들어오시도록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마 3:2, 3; 눅 3:8).

기록된 것과 같이 – 헬라어 원문에는 본 문장이 2절 초두에 제시되어 2, 3절에 언급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포괄하고 있다. 문장 어순이 다른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무시하고 3절 하반부에 서술적 형태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록된’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그라프타이’는 완료형 시제로서 어떤 행위가 과거에 완성되어 그 결과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본문은 ‘기록되어 현재도 효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약 기자들은 성경의 변함없는 권위에 대한 자신들의 강한 신념을 내비치기 위해 구약을 이용할 경우 이러한 어법(語法)을 자주 사용한다. 한편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게 된 것은 요한 자신만의 어떤 깨달음이나 또는 신비한 능력이 반영된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그대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는 또한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구속 사건 역시 우발적으로 일어날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예언되고 기록된 대로 전개되는 것임을 암중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특히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한다(마 2:5; 4:4; 11:10 등).

4절은 에게네토 이오안네스 밥티존 엔 테 에레모 카이 케륏손 밥티스마 메타노이아스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입니다.

막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 마가는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세례 요한의 등장과 행적만을 말하나, 요한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란 사실을 요 1:6에서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누가는 세례 요한의 어린 시절에 그에게 주어졌던 예언을 언급함으로써(눅 1:76, 77) 앞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명의 신적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미 1장에서부터 마가복음은 예수 시대의 배경이나 그 시대의 사실보다 시대 자체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특징이다. 이에 많은 주경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가장 단순 명료하게, 즉 주관적 가감(加減) 없이 예수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 이 말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죄 사함에 관련된’이라고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취지에서 흠정역에서는 이것을 ‘죄 사함을 위한'(for the remission of sin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에이스’의 용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대부분이 목적격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전후 문맥상 마 10:41; 12:41 등에서와 같이 그러한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에 관련된’, ‘…때문에'(because of)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세례’자체가 죄를 사해주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통해 사죄를 받기 위한 하나의 공식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회개의 세례(밥티스마 메타노이아스) – 이는 회개를 중심으로 하여 베풀어지는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회개'(메타노이아)란 어원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로 사용되어 생각과 의지와 인격의 변화, 곧 전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신중한 전환’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진실한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은 죄사함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죄사함에 대한 예비적 단계로서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당시 극도로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일깨워 주고 그들의 몸의 외적 정결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깨끗함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는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의 긍휼을 얻을 단계로 진일보(進一步)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례'(밥티조)는 ‘물속에 잠기다’라는 의미로서 일종의 침례 예식을 뜻한다. 그런데 이 세례는 기독교에서 새롭게 창출해 낸 의식이라기보다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정착(定着)되어 온 것이다(G. F. Moore).

그러나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유대인들에 의해 전통적, 의식적으로 내려왔던 그 세례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죄의 고백에 관한 기본 원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울이 나중에 롬 6:4에서 설명한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일찍이 헬레니즘(Eleusinian cult), 이시스 숭배(Isis worship) 등 여러 밀의 (密意) 종교들 가운데서도 시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회개하고 죄를 자복함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일종의 이교도들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베풀어진 요한의 세례는 유대 민족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 행위로 그들에게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요한은 나중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그가 외친 ‘회개의 세례’에 대한 음성은 오늘날까지 살아 역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례는 단순히 의식적이고 형식적인데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교의(dogma)에 의해 세례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써 교인(church man)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신자(christian)는 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중심의 회개, 즉 세례 요한이 강조하였던 ‘회개의 세례’에 있다.

5절은 카이 엑세포류에토 프로스 아우톤 파사 헤 이우다이아 코라 카이 호이 이에로솔뤼미타이 카이 에바프티존토 판테스 엔 토 이오르다네 포타모 휘프 아우투 엑소몰로구메노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아우톤입니다.

막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 마가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설교에 거족적(擧族的)이고 대대적인 호응이 있었음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었지만 마태와 누가는 이들 무리들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마 3:1-12; 눅 3:7-14). 즉 그들 중에는 형식과 의식을 중요시하는 오만한 바리새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되어버린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일반 민중들을 노략하고 약탈하는 군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고 착취하다가 경멸받고 증오받던 세리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 세례 요한의 신선하고 생명력 있는 설교(즉 회개에 대한 설교)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즉각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본 구절에서 특별히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all)란 표현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가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와 같은 요한의 회개 운동은 예수 공생애 사역 이전에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수백 년 동안 진정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 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이 대망해왔던 메시아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눅 3:15). 특히 그가 전파했던 메시지의 내용이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였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휩쓸렸을 것이 자명하다.

나아가(엑세포류에토) – 원문상 미완료 시제로서 백성들이 요한에게 ‘계속해서 나아갔다’라는 의미가 된다. 물론 마가의 이 같은 보고는 조금 과장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로도 세례 요한의 선포가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상당한 기대와 동요(動搖)를 초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세례를 받더라 – 요한은 죄를 자복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다. 밥티조라는 동사는 직설법 미완료 수동태 복수 3인칭을 사용한다. 직설법은 그 당시 많은 사람이 실제로 요단강에 나와 죄를 자복하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다. 미완료는 매일같이 요단강에서 나와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다. 수동태는 세례 요한에 의해서 죄를 자복하는 자들이 세례를 받았다. 우리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함께 받아야 한다.

6절은 엔 데 이오안네스 엔데뒤메노스 트리카스 카멜루 카이 조넨 데르마티넨 페리 오스퓐 아우투 카이 에스디온 아크리다스 카이 멜리 아그리온입니다.

막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1:6

약대 털을 입고… 가죽띠를 띠고 – 이는 마태와 마가, 두 기자가 동시적으로 밝혀 주고 있는 부분으로서 세례 요한의 의식주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마 3:4). 한 마디로 말해 그의 의식주 생활은 단순, 소박, 그리고 청빈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입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데뒤메노스'(having been clothed with )는 아직도 그 옷을 입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말로서 기자는 요한이 줄곧 그 약대 털옷을 입고 생활했음을 보여 준다.

성화(聖畵)를 그리는 화가들은 종종 요한의 광야 생활을 나타내고 그림으로 요한의 옷을 약대 가죽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옷은 길게 축 늘어진 약대 털로 짠 볼품없는 옷으로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입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러한 옷에는 자연히 허리에 가죽띠를 맬 수밖에 없었다. 이 허리띠는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급히 달려갈 때에도 옷이 펄럭거리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특히 활동성이 요구될 때에 필요한 유대인 의상의 필수품이었다.

한편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때로 털옷을 입었는데 이는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신의 감정을 강력히 상징하기 위해서였으며 심지어는 거짓 선지자까지도 자신을 참 선지자로 가장(假裝) 하기 위하여 이 털옷을 입었다고 하였다(슥 13:4).

그리고 아하시야 왕의 사자들이 왕에게 엘리야를 설명할 때(왕하 1:8)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라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주된 관심인 의식주 생활에서 과감히 탈피(脫皮)하여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고 그들 자신이 청빈한 삶을 하나님 말씀의 ‘소리’가 되기에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있었다.

메뚜기 – 철저히 율법에 입각한 경건주의자였던 요한은 레 11:22에서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허용하신 곤충 중의 하나인 메뚜기를 먹었다. 이 메뚜기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사용했던 평범한 음식이었다고는 하나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소출(所出)이 줄어든 해에 먹는 일종의 대용 식품이었으나 이 메뚜기는 특별히 봄철에 많이 생겼으며 때때로 큰 떼로 몰려다니곤 했었다(출 10장; 욜 1:1-12).

오늘날에도 아랍인들 사이에는 이것의 다리와 날개는 잘라버린 뒤에 굽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소금에 절여 두어 저장 식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은 원래 제사장의 아들로서 부요한 자였지만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가난한 자가 먹는 음식을 먹음으로 생명을 부지해 나갔다.

석청 – 어떤 주경 학자는 이 석청을 그곳에서 서식하던 여러 나무들에서 채취(採取) 한 수액일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 말의 헬라어 ‘멜리’는 야생의 벌꿀을 의미한다. 팔레스틴 중에서도 특히 이 광야에서의 야생의 꿀은 달기로 유명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세례 요한의 생활양식은 철저한 자기 절제와 금욕을 지향하는 나실인(Nazirite)으로 특징지어진다. 실로 그는 오직 회개의 세례와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육적인 욕망을 절제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식주 생활에서의 극기의 삶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의 귀감(龜鑑)이 된다.

7절은 카이 에케륏센 레곤 에르케타이 호 이스퀴로테로스 무 오피소 무 후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 퀴프사스 뤼사이 톤 히만타 톤 휘포데마톤 아우투입니다.

막 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7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오시나니 – 마가는 여기에서 매우 장엄하고도 위엄에 찬 동사 ‘오시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케타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그 당시 극도로 고조되고 있던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 사상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표현 양식이다.

이런 표현 양식은 창 49:10에서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구약성경의 예언을 기반(基盤)으로 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동사 ‘에르케타이’는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서 그분이 지금 막 오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시각은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종말적 역사관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가는 이 동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위치시킴으로써 메시아 오심의 현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하지만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어법상 문장 끝에 나와 있음).

이 ‘오실’이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설명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라는 것인데, 이는 그분의 전지 전능성에 비추어 볼 때, 요한 자신은 그분의 종의 종이 되기에도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광야에 모여든 유대 백성들 사이에는 요한이 ‘능력 많은 자'(the mighty man)란 소문이 만연되어 있었을 것이며, 혹시 이 자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에(요 1:19, 20; 3:25-36), 이러한 그릇된 오해를 간단한 이 한마디 말로써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탄생에서 뿐만 아니라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 뒤에 오셨다(눅 1:26,36). 하지만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 사이에는 무한과 유한, 영원과 순간, 그리고 태양의 원(源) 빛과 달의 반사광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요 1:15-17).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 세례 요한은 자신과 곧 임하실 ‘능력이 많으신 이’ 사이의 강한 대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들 중에서 한 가지 실례를 사용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주인이 여행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종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먼지로 더러워진 주인의 신발끈을 풀어 신을 벗기고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 주는 것이었다.

마태는 단지 신의 끈(영어의 ‘latchet’는 오늘날의 구두끈에 해당하는 말임)을 푸는 데만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지만(마 3:11), 마가는 이것을 풀기 위하여서 굽히는 행위까지를 첨가하여 표현하였다. 이것은 곧 임하실 메시아의 위대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세례 요한은 가까운 미래에 임하실 그분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오실 메시아는 영원 전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역사 속에 오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조금도 자기 비하나 미사여구(美辭麗句)나 과장이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 충만한 한 선지자로서 절대 불변한 진리를 사실 그대로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8절은 에고 멘 에바프티사 휘마스 엔 휘다티 아우토스 데 밥피세이 휘마스 엔 프뉴마티 하기오입니다.

막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8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 여기에서 ‘물’과 ‘성령’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본질 상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즉 요한은 외적이며 성례전적 측면에서 그리고 성령 세례의 예비적 단계로서 물을 통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적이며 본질적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영혼의 정결과 중생과 사죄의 은총을 가능케하는 구속의 완성적 측면에서 성령을 통해 각자의 심령에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다.

한편 물과 불, 이 두 단어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엔’은 도구 격 조사’…로서’로 번역되지만 분명히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성령은 마치 물과 같이 세례에 대한 방편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두 경우 모두 ‘엔’을 사용한 것은 두 종류의 세례가 지니는 성례전적(聖禮典的) 의미와 그 각각의 효능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지만 세례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태는 여기에다가 흔히 성경 문학적으로 볼 때 정화, 정결, 심판 등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불’이란 대칭 용어를 사용함으로 성령 그 자체보다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본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마 3:11).

실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불과 같은 뜨겁고 강렬한 역사로서 믿는 자들에게는 내적인 성결과 열정을 제공하였고 불신자들에게는 종말적으로 임할 심판을 예고하였다(행 2:3). 어쨌든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요한은 단순히 거룩한 예식의 측면에서 물을 통한 세례를 집례(執禮)했지만 신적 권위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는 성령을 통해 각 심령에 당신의 내밀하고도 뜨거운 불 세례를 집례 하셨다(Lenski).

이 같은 성령 세례는 예수의 승천 이후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공적으로 활발히 시행되어 오고 있다. 한편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를 성령 세례와는 완전히 관계없는 단순히 물로서 만의 형식적 예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형식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 요한의 세례는 예수의 불 세례를 준비케 하는 예비적 단계로서, 이 역시 성령의 확실한 조명과 후원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에 따른 불 세례가 있기 전에도 성령께서는 인간 구원과 진리 전파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셨고 또 그 일에 부름 받은 사역자들의 활동에 깊이 개입하셨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또한 한 가지 사실은 요한이 무리들에게 표현한 바 자신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에 대한 시제와 관계된 부분이다.

요한 자신의 세례에 대해 ‘세례를 주었거니와'(에밥티사)인 부정과거형으로 언급한 데 비해, 예수의 세례에 대해서는 ‘세례를 주시리라'(밥티세이)인 미래형으로 언급하였다. 이 말에 대해 예수께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재차 확증해 주셨다(행 1:5).

이로써 우리는 인간 세례 요한의 단회성과 불완전성 및 한시성(限時性)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세례의 완전성과 영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예수의 이와 같은 신령한 세례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모든 심령들에게 성령을 끊임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요 16:7; 행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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