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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크한 심리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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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즘(질 들뢰즈) – 네이버 블로그
기본적으로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디즘과 마조히즘 모두에서 아버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마조흐의 문학 안에서 고문자의 역할을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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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탈정신분석학적 이해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의 발생원인을 초자아의 과잉에서 찾는다. 마조히즘을 특징짓는 죄책감과 속죄욕망이란, 자아의 성적 욕망을 억압되어야 할 죄로 보는 초자아의 …
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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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스트의 유머와 정신분석학의 전복 – 철학연구회 : 논문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의 발생원인을 초자아의 과잉에서 찾는다. 마조히 즘을 특징짓는 죄책감과 속죄욕망이란, 자아의 성적 욕망을 억압되어야 할 죄로 보는 초자아의 …
Source: www.dbpia.co.kr
Date Published: 12/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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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마조히즘 : 프로이트, 들뢰즈, 라캉의 이론을 중심으로
반면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이 초자아를 중심으로 마조히즘을 설명하고자 증상을 왜곡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마조히즘의 어원인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문학으로 …
Source: s-space.snu.ac.kr
Date Published: 6/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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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증에 대한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논쟁에 대한 비판적 분석
주제분야 : 임상철학, 정신분석학, 심리철학 * 주 제 어 : 사디즘, 마조히즘, 도착증, 프로이트, 들뢰즈. * 이 논문은 2013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3/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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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스트의 유머와 정신분석학의 전복:
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탈정신분석학적 이해. 조 현 수(서울대학교) … 【요 약 문】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의 발생원인을 초자아의 과잉에서 찾는다. 마조히.
Source: www.papersearch.net
Date Published: 10/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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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학증 – 권혜경 심리치료 정신분석 클리닉
권혜경박사의 심리치료 정신분석 클리닉,피학증(Masochism): 피학증? 성적 쾌감만 생각하나? 오히려 처절한 삶의 방식일 수 있다.??비영리 복지단체에서 일하는 A씨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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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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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탈정신분석학적 이해 – KISS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의 발생원인을 초자아의 과잉에서 찾는다. 마조히 즘을 특징짓는 죄책감과 속죄욕망이란, 자아의 성적 욕망을 억압되어야 할 죄로 보는 초자아의 …
Source: kiss.kstudy.com
Date Published: 1/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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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즘 – 나무위키:대문
분석4. 여담5. 피학성애자에 해당되거나 의심되는 캐릭터6. … 뭐 굳이 성적 쾌감을 느끼지 않아도 마조히즘 또는 마조히스트라고 칭하는 듯하다.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3/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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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조히즘 정신 분석
- Author: ARGO심리_심리학 제대로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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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4.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7Prnk7Kg28k
마조히즘(질 들뢰즈)
1. 서론
들뢰즈는 머리말에서 마조흐에 대한 소개를 하며, 사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마조흐의 문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지적한다. 그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서로 대응된다는, 정신분석학에 따른 일반적인 통념에 대해서 ‘증상’과 ‘증후군’을 구별하지 못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그는 마조히즘의 증상에 대해서 “너무 간단하게 상반성의 연관관계로 파악해 버리는(국역본 16)1)” 대신, 그 증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마조히즘의 발생에 대해서 정신분석학과는 상반된 이론을 내놓는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프로이드가 제시한 마조히즘의 발생론에 대해 들뢰즈가 어떤 비판을 가하고 있는지를 확인한 뒤, 그러한 비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마조히즘의 특징적인 증상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탐구해볼 것이다.
2. 마조히즘의 발생론(etiology)
프로이드는 마조히즘이 발생하는 과정을 자신의 핵심적인 개념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 찾는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이란, 주체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삼각 구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주체는 어머니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지만 이것이 아버지에 의해 가로막혀 있는 구조이다. 이로 인해 주체는 아버지에 대해서 공격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디즘적인 충동이다. 그런데 이때, 이러한 공격성은 제대로 표출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주체에 비해 아버지의 힘이 훨씬 더 강력하므로 주체는 거세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공격성을 자신에게로 되돌린다. 여기서 주체는 죄책감을 느끼고 벌을 받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공포감을 해소하려고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마조히즘은 사디즘에서 ‘파생’된 것으로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구조적인 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매저키스트의 경험은 아들과 구강적 이미지를 가진 어머니 사이의 연대에 바탕을 두며, 새디즘은 아버지와 딸의 연대에 바탕을 두고 있다.(국역본 81-82)” 마조히즘은 사디즘과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다르며, 그 자체로 고유한 발생 원인을 가지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발생에서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의 차이이다.
기본적으로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디즘과 마조히즘 모두에서 아버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마조흐의 문학 안에서 고문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를 아버지가 어머니의 모습을 취한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일반적으로 ‘상징계’의 질서는 아버지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을 극복하고 상징적인 질서로 들어가는 것을 아버지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렇게 되면 자아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초자아에 굴복하게 된다.
그러나 명백히 어머니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현상을 아버지와 연결 지어 해석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오히려 마조히즘은 아버지를 배제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설명을 한다.2)마조흐의 소설 속 어머니들은 아버지가 가면을 쓴 어머니가 아니라, 정말로 어머니를 나타내는 것이다. 마조흐는 소설 속에서 세 가지 유형의 여성들을 등장시켜 모든 아버지의 기능을 이 세 명의 여성들에게 상징적으로 전이시키고 재분배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제외되고 그의 가치 또한 완전히 무시되어 주체는 어머니와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아와 초자아의 관계 역시 프로이드의 설명에서 역전이 일어나게 된다. 앞서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의 자아가 초자아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고 설명했으나 사실은 오히려 자아가 초자아를 밀어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마조히즘의 ‘유머’이다. 유머는 ‘법’에 대해서 마조히스트들이 사고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법은 고전적으로 선이라는 원리를 따르거나 혹은 선을 보장할 수 있다고 여겨져 왔으나, 근대로 오면서 법은 그 자체가 선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사드와 마조흐는 다른 방식으로 법을 무력화하는데, 이때 상승을 통해 법의 원리를 부정하는 사디즘과 달리, 마조히즘은 결과로의 하강을 통해 법을 조롱하게 된다. 즉, 법에 완전히 복종하는 행위를 취하나, 이것이 죄를 예방하는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되고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3)
이때 프로이드는 초자아를 아버지의 ‘법’이 주체의 일부로서 내면화된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마조히스트는 겉으로 복종하는 듯 보이지만 상대에 대해서 은연중에 경멸감을 내비치게 된다. 이러한 우회적인 공격은 ‘속죄의식’이 가지는 의미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이후 마조히즘의 증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진척시키도록 하자.
이렇게 마조히즘이 사디즘과는 구별되는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자들 역시도 다소 혼란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는 라이크(Reik)의 논의를 활용하여 이들의 논리 속에 내재된 모순을 드러내려 한다.
Reik, who maintain throughout the idea that masochism “springs from the denial that meets the sadistic instinctual impulse and develops from the sadistic, aggressive for defiant phantasy which replaces reality. It remains incomprehensible as long as one assumes its derivation directly from sadism by a facing about against the ego. … What he does is to neutralize his sadism in fantasy, substituting his dream for action; hence the primary importance of fantasy. Given this conditions, the violence that the masochist inflicts of causes to be inflicted upon himself can no longer be called sadistic, sins it is based on his particular type of suspension.(영역본 107)
라이크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그 매개로서 ‘판타지’를 끼워 넣지만, 이렇게 보면 결국 마조히스트는 사디즘적인 공격성을 주체의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포기한 것이 되고, 이렇게 되면 그 폭력의 실상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므로 더 이상 사디스트라고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도-마조히즘적 실체라는 것은 허상이다. 또한 여기서 판타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를 ‘파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들뢰즈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프로이드의 핵심 주장 중에 하나인 본능의 이원론을 활용하여 프로이드의 논의를 비판한다. 그는 “any “passage” from one combination to the other as, for example, from sadism to masochism, can only occur by a process of desexualization and resexualization.(영역본 107)”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때 “passage”는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생명본능 에너지와 죽음본능 에너지의 조합이 풀어졌다가 다시 재조합되는 과정임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본능의 이원론이란, 생명본능과 죽음본능은 각각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서, 실제 경험적인 세계에서 발현될 때에는 두 에너지가 조합을 이뤄서 드러나게 된다. 이때, 탈성화는 생명본능이 죽음본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 내에서 죽음본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재성화는 죽음본능이 차지하는 비중을 다시 생명본능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탈성화를 거쳐 재성화 되는 것이 마조히즘에서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마조히즘은 자아가 초자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적극적인 희생을 통해 더 큰 것을 얻는 과정이기 때문이다.4)여기서 희생으로 보이는 부분이 ‘탈성화’로 이는 사실 자아가 초자아를 몰아내는 과정이다. 이때, 탈성화는 동시에 재성화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재성화가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생명본능이 죽음본능으로의 질적 변화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단지 에너지가 이전에 묶여있던 방식에서 풀어져서(defusion) 재조합된 과정으로 보아야 다시 생명본능의 에너지가 득세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본능의 이원론은 프로이드의 공식 입장 중 하나임에도 프로이드가 이들 사이에서의 변형(transformation)이 가능하다고 본 것은 모순으로 자신의 이론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3. 올바른 증상학(Symptomatology
정신분석학과 들뢰즈 사이에서 마조히즘의 원인에 대한 탐구가 달라지는 것은 마조히즘의 증상들을 어떻게 파악하는지가 다르니 때문이다. 마조히즘의 특징적인 증상에는 고통과 쾌락의 열결, 죄책감과 속죄 욕망 등이 있는데, 이러한 증상들을 중심으로 마조히즘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러한 증상들의 연관관계와 의미에 대해서는 매우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 우선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앞서 말했듯, 정신분석학에서는 마조히즘을 사디즘에서 파생된 것으로 파악한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자들이 왜 이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지를 3장 <사드와 마조흐는 상호 보완관계인가?>에서 밝히고 있다. 사드의 문학과 마조흐의 문학을 보면, 사디스트는 동시에 마조히즘적인 고통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 마조히스트가 사디즘적인 공격성을 보이는 것으로 비춰질 때도 있다. 또한 사디스트가 공격하는 피해자는 마조히스트일 것으로 예상되며, 또한 마조히스트를 고문하는 여성은 사디스트일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유추한다.
이 때문에 프로이드 이후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사도-마조히즘적 실체(Sado-masochistic entity)를 가정하게 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인 편견일 뿐이라는 일침을 놓는다. 모든 맥락을 제거하고 ‘고통’과 ‘공격성’이라는 양상만을 보면 둘이 유사하다고 착각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그러한 고통이나 쾌락이 체험되는 방식이 다른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마조히즘과 사디즘에서 그 둘은 어떻게 다르게 체험되는가? 우선 그 차이를 비교하기 전에 정신분석학에서 이 둘을 어떻게 연결짓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프로이드는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에서 “많은 내적 과정의 경우에 그 과정의 강도가 일정한 양적 한계를 넘는 순간 성적 흥분이 동시 발생적인 효과로 일어난다.”는 자신의 명제를 인용한다.5)여기에서 고통과 쾌감의 관계는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 고려하면, 사디즘이 쾌락을 얻기 위해서도 마조히즘적인 경험을 거쳐야만 한다. 이는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 단순히 공격적이고 지배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디즘인 공격적 사디즘에서 시작하여, 이것이 자신에게로 역전되고, 이를 통해 매저키즘적인 경험을 겪은 뒤 마지막으로 쾌락을 지향하는 사디즘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마조히즘의 쾌락은 사디즘의 쾌락과는 차이가 크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마조히즘에서의 쾌락이 ‘마지막’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조히스트는 고통 속에서 쾌락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실상과 차이가 크다. 마조히스트는 처벌에서 일차적인 기쁨만을 얻을 뿐이고, 진정한 기쁨은 처벌 이후에 온다. 다시 말하면 고통이 곧 쾌락이 아니고 고통이 쾌락의 선행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 이후에 나타나는 쾌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유머’에 대한 서술에서 일정 부분 밝혔지만, 마조히즘에서 ‘법’의 의미는 유머를 통해 우회적으로 공격받게 된다. 원래 법이 가지는 의미는 ‘죄’에 대해서 그에 적합한 ‘벌’을 내리는 것을 통해 죄를 예방하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마조히즘은 이를 열성적으로 지키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그 의미를 뒤집는다. 즉 앞서 죄에 대해서 벌을 내린다고 했으니, 이를 뒤집어 벌을 받았으니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처벌과 고통은 지금까지 금지해 왔던 악의 실행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사디즘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는데, 사디스트가 마지막에 느끼는 고통은 마조히스트가 수행하는 속죄가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느낄 정도로 충분히 극단적인 행위를 했다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즉, 마조히스트가 수행하는 쾌락은 사디스트가 느끼는 쾌락과 질적으로 다른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사디스트의 고통 역시 마조히스트의 고통과는 다르다.
이러한 고통과 쾌락의 연관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죄책감’ 혹은 ‘속죄의식’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마조히즘에서 처벌이 고통보다 먼저 오는 것에 대해서 “처벌이 불안을 해소함으로써 쾌락을 가능케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국역본 109)라고 밝힌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황에서 처벌이 불안을 해소해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때, 불안과 처벌은 ‘죄’와 연결되는데 여기서 이러한 죄가 마조히즘의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 어떻게 우회되고 패러디되는지를 밝히는 것이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도 ‘죄의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의 ‘죄의식’은 앞서 말했듯 아버지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감정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논의에 따르면 마조히즘의 죄의식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오히려 마조히스트가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아버지와 닮은 모습이며, 마조히스트는 매질을 당하며 이러한 모습을 씻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what is beaten, foresworn and sacrificed, what is ritually expiated, is the father’s likeness, the genital sexuality inherited from the father.(영역본 100)”라는 구절에서 이는 확인될 수 있다.
마조히스트의 죄책감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닮은 모습이라는 것은 그가 어머니와 맺고 있는 ‘계약관계’를 통해 도출할 수 있다. 마조히스트들은 그들의 언어에서 확인할 수 있듯 상대를 설득하여 계약을 맺도록 한다. 이때, 자신을 매질하는 것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한 존재로 설정되는데,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덜 엄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체에게 안도감을 준다는 식으로 해석이 되어왔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에 대해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어머니와의 극단적인 형태의 계약을 통해 희생자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하고 솔직해 보인다. 매저키즘에서 계약은 아버지를 배제하고 그 대신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법을 실행하고 적용시키는 역할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어머니 역시 엄하고 잔인하다. 이 문제는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같은 위협이라도 아버지에게서 유래하며 아버지의 이미지와 관련되어 경험되는 경우엔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효과를 가지지만, 어머니에게 위임되어 어머니의 이미지와 연관될 경우에는 그 효과가 역전된다.(국역본 112)
어머니의 위협이 근친상간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 주체와 어머니의 결합을 가로막는 것은 아버지이다. 이때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주체의 자연적인 탄생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인간이 태어날 때엔 아버지의 개입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아버지 없이 어머니라는 존재 하나에 의해서만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면 이러한 방해는 없어지게 된다. 즉 마조히스트는 자신에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몰아내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단성생식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고, 결국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된댜.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신 내부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죄의식을 느끼고, 이에 대한 벌을 충분히 받고자 계획하고 의도하는 것이다.
But when it is linked with the image of the mother, the castration of the son becomes the very condition of the success of incest: incest is assimilated by this displacement to a second birth which dispensed with the father’s role.(영역본 93)
이때, 마조히스트가 취하는 어머니와의 결합은 과거의 자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 때에 추구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을 가지게 된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주체의 남성적 욕망은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으로 이는 아버지의 법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법이 작용하는 이유 자체가 욕망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이러한 욕망이 없어지면 법 역시 없어지면서 역설적으로 근친상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러한 욕망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것을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해석한 것이고, 들뢰즈는 그 이면을 파고들어 이것이 자신안의 아버지의 모습(father’s likeness)에 대한 것임을 밝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조흐의 문학에서 구체적인 근거들을 찾을 수 있다. 마조흐는 작품 속에서 카인과 예수를 공통적으로 주요한 남성들로서 등장시킨다.
마조흐의 작품에서 카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폭넓은 의미를 가진다. … 그러나 이러한 사실 너머에 카인이 “땅을 개간하는 자”이며 어머니의 총애의 대상이라는 또다른 사실이 있다. 이브는 카인이 태어났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의 편인 “양치기” 아벨의 탄생에 대해서는 기쁨을 표시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총애를 받은 카인은 아버지와 다른 이들 간의 동맹관계를 끊기 위해 죄를 저지른다. 아버지의 모습을 죽이고 이브를 어머니-여신으로 만든 것이다.(국역본 115)
이 외에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탄식을 하는 것 역시, 자신의 내부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나갔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마조히스트가 아버지가 없는 ‘제 2의 탄생’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마조흐의 문학에서 여성들이 하는 역할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리암은 그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며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질을 한 후 드디어 최초의 부부관계를 가진다. “여자여,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저는 당신을 남자로 만들어드린 거예요.” 다음날 술탄의 소환을 받은 즈비는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고 회교도로 개종한다.(국역본 119)
이렇게 속죄의 과정을 통해 마조히스트는 현실을 벗어난 새로운 인간6)으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들뢰즈는 마조히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형식(form)’이라는 논의를 전개시킨다. 마조히즘의 죄의식이 가지는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죄의식이 어떠한 형태로 경험되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아버지라는 점에서 이미 죄의식 자체 속에 ‘유머’가 결합되어 있고, 그래서 처벌을 단순히 죄의식에서 발생하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정신분석학자들의 설명이 불충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이러한 형식(form)은 구체적인 경험 너머에 존재하는 초개인적(impersonal)인 것으로서 모든 마조히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앞서 언급한 ‘계약’이 이러한 형식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들뢰즈는 마조흐가 사용하는 특징적인 언어로서 ‘계약’을 들었었다.
The situation that the masochist establishes by contract, at a specific moment and for a specific period, is already fully contained timelessly and ritually in the symbolic order of masochism.(영역본 102)
즉, 계약 자체는 한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마조히스트는 역사속의 한 순간에 존재하는 개인이지만, 계약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마조히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마조히스트는 이 지점에서 관능적인(sensual) 감각을 초월하여 새로운 감성(sentimental)을 가진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4. 결론
마조흐의 문학을 제대로 살펴보면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완전히 다른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마조히즘에 초점을 맞추어 그 발생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마조히즘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통해서 쾌락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의 고통은 ‘속죄 의식’의 일부이다. 이러한 속죄는 말 그대로 ‘의식’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러한 속죄 과정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몰아내고 새로운 인간으로의 재탄생이 이루어진다. 이때의 재탄생은 어머니와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으로서 마조히즘은 탈성화를 통해 재성화에 이르는, 즉 작은 것을 버리는 것을 통해 더 큰 것을 얻는 주체의 적극적인 기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조히스트의 유머와 정신분석학의 전복: 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탈정신분석학적 이해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의 발생원인을 초자아의 과잉에서 찾는다. 마조히즘을 특징짓는 죄책감과 속죄욕망이란, 자아의 성적 욕망을 억압되어야 할 죄로 보는 초자아의 강력한 도덕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 죄에 대한 벌로서 고통(매질)이 주어지는 것을 기꺼이 원하고 감수하며, 더 나아가, 이 고통 속에서 쾌락(속죄의쾌락)을 찾는 데서 ‘고통과 쾌락의 일치’라는 마조히즘 특유의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자아란 실은, 엄마에 대한 주체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아버지의 존재가 자아 속의 일부로 내면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성적 욕망을 질책하는(공격하는) 초자아의 도덕의식이란 실은, 자아의 성적 욕망이 원래 가지고 있던 사디즘적 공격성이 그것을 억압하는 아버지의 존재에 부딪쳐 고스란히 자아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을 사디즘의방향전환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즉 주체가 가진 성적 욕망의 사디즘적 공격성이아버지의 존재에 부딪쳐 주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에 의해 마조히즘이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마조히즘의 진실은 초자아가 자아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가 초자아를 놀리고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조히즘의 발생에서 주도적인 작인(作人)의 역할을 하는 것은 초자아가 아니라 자아라는 것이다. 마조히즘의 발생에 대한 들뢰즈의 새로운 이해는, 마조히즘이란 결코 사디즘으로부터(즉 사디즘의 방향전환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디즘과는전혀 다른 원리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하나(사디즘)로부터 다른 하나(마조히즘)에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관계에 있는 것이아니라,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성립되면 다른 하나는 결코 성립할 수 없게 되는 ‘상호 배척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일반적인 통념을 뒤엎는 들뢰즈의 이러한 새로운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살펴보려 하였다.
Psychoanalysis believes that the masochism comes into being bythe transformation of the sadism. This belief can be true only whenthe super-ego plays a dominant role in the genesis of themasochism. But Deleuze argues that what contribute definitely tothe genesis of the masochism is the ego’s overpowering against thesuper-ego, which means that the masochism does not consist, aspsychoanalysis believes it, in the super-ego’s tormenting of the ego,but rather in the super-ego’s being ridiculed by the ego. By aminute argumentation in favor of the ego’s role in the genesis ofthe masochism, Deleuze tries to establish between masochism andsadism a radical difference in kind, which makes definitely impossiblethe so-called transformation of the sadism into the masochism. Sowe believe justified in calling his new interpretation of themasochism ‘overturning of the psychoanalysis’. We want to showin this paper how this deleuzean overturning of the psychoanalysisis constituted and what the masochism looks like in this new light.
마조히스트의 유머와 정신분석학의 전복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의 발생원인을 초자아의 과잉에서 찾는다. 마조히 즘을 특징짓는 죄책감과 속죄욕망이란, 자아의 성적 욕망을 억압되어야 할 죄로 보는 초자아의 강력한 도덕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 죄에 대한 벌로서 고통(매질)이 주어지는 것을 기꺼이 원하고 감수하며, 더 나아가, 이 고통 속에서 쾌락(속죄의쾌락)을 찾는 데서 ‘고통과 쾌락의 일치’라는 마조히즘 특유의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자아란 실은, 엄마에 대한 주체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아버지의 존재가 자아 속의 일부로 내면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성적 욕망을 질책하는(공격하는) 초자아의 도덕의식이란 실은, 자아의 성적 욕망이 원래 가지고 있던 사디즘적 공격성이 그것을 억압하는 아버지의 존재에 부딪쳐 고스란히 자아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을 사디즘의 방향전환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즉 주체가 가진 성적 욕망의 사디즘적 공격성이 아버지의 존재에 부딪쳐 주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에 의해 마조히즘이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마조히즘의 진실은 초자아가 자아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가 초자아를 놀리고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조히즘의 발생에서 주도적인 작인(作人)의 역할을 하는 것은 초자아가 아니라 자아라는 것이다. 마조히즘의 발생에 대한 들뢰즈의 새로운 이해는, 마조히즘이란 결코 사디즘으로부터(즉 사디즘의 방향전환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디즘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하나(사디즘)로부터 다른 하나(마조히즘)에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성립되면 다른 하나는 결코 성립할 수 없게 되는 ‘상호 배척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일반적인 통념을 뒤엎는 들뢰즈의 이러한 새로운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살펴보려 하였다. #들뢰즈 #마조히스트의 유머 #마조히즘 #사디즘 #재성화 #再性化 #죽음 본능 #탈성화 #脫性化 #Death-instinct #Deleuze #Desexualisation #Masochism #Masochist`s humor #Resexualisation #Sadism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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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증에 대한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논쟁에 대한 비판적 분석
문 장 수(경북대)
[논문개요]도착증의 가장 대표적인 두 증상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다‘ 그러나 국내 철학게는 물론이고 문학계와 정신의학계에서조차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정확한 본성과 구조 그리고 원인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는 거의 없다‘
그러나 국외에서는 오래 전부터 도착증에 대한 원인과 구조를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이 분야의 선두 주자인 프로이트의 사도 마조히즘 이론과 이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들뢰즈의 이론은 오늘날 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임상-철학적 관점에서 마조히즘에 대한 양자의 정의를 분석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마조히즘은 자아에게로 선회한 사디즘이다. 즉 인간은 선천적으로 성적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본능은 공격성의 본능, 소위 죽음의 본능을 항상 동반한다. 때문에 성적 본능이 외부 대상에게로 표출될 때 공격성을 동반한다 즉 성적 본능의 실현은 자연적으로 외부 대상을 향하며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다. 이러한 성향이 지나친 경우를 사디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적 본능이 외부 대상에게로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마조히즘이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은 사디즘의 변형이라는 차원에서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그러나 들뢰즈는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그 구조, 원인, 본성 등에 있어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프로이트의 변형론을 반대하고 철저한 이원론을 강조한다. 이때 들뢰즈는 사드의 문학 작품과 마조허의 문학작품의 구조와 기법 그리고 특성틀을 토대를 자신의 이원론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필자는 한편으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착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하며, 다른 한편으로 문학작품의 기법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문들의 성격을 현실적
인 도착증 환자들의 실제적인 특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들뢰즈의 이론을 비판하고자 한다.
* 주제분야 : 임상철학, 정신분석학, 심리철학
* 주 제 어 : 사디즘, 마조히즘, 도착증, 프로이트, 들뢰즈
* 이 논문은 2013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BK21플러스 사업)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관리번호, 22B20130000007, 사업팀명; 경북대학교 철학과 임상철학 창의 인재 양성 사업팀]
1. 서론
엄상 철학, 즉 철학치료 및 철학 상담의 주요한 대상들 중의 한 부류는 도착증 환자들이다. 도착증 환자들을 보다 잘 상담하고 치유하려고 하면, 먼저 이러한 증상의 본성과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오래 전부터 국내의 철학계뿐만 아니라 정신의학계 그리고 문학계에서 프로이드, 라캉 그리고 들뢰즈 등에 대한 연구와 소개를 시작했지만, 아직도 도착증의 원인과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와는 다르게 국외에서는 도착증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하고 있는데, 특히 철학계에서는 질 들뢰즈의 마조히즘에 대한 연구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필자는 들뢰즈의 마조히즘에 대한 이론을 비판적으로 제시하변서, 도착증에 대한 새로운 연구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연구는 프로이트의 변형론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잘 알다시피, 프로이트에 따르면, 마조히즘은 외부 사람에게로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로 선회한 사디즘이다.
성적 맥락 속에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창피감을 갖게 하면서 성적 쾌감을 갖는 경향의 사람들이 사디스트이다. 반대로 성적 맥락 속에서 타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타자를 자기 자신으로 대체하면서 자신을
공격하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마조히스트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변, 사디즘이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본능에 속하고, 마조히즘은 이러한 사디즘이 자기 자신에게로 잘못 적용된 경우라는 것이다. 여기서 소위 프로이트의 사도마조히즙이라는 용어가 유래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이러한 입장을 전복시키면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전혀 다른 성향과 구조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도착증의 두 증상에 대한 프로이트적인 해명을 대대적으로 수정한다.
들뢰즈로 하여금 이러한 수정작업을 추진하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는 사드와 마조허의 작품들이다.
들뢰즈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용어의 발원지는 바로 양자의 문학 작품이기에 이들의 작품을 철저하게 분석하지 않고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프로이트학파의 도착증 이론은 정확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면서, 도착증에 대한 프로이트 학파의 입장들은 새로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에 본고에서 필자는 도착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과 이를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들뢰즈의 입장을 우선 이해의 차원에서 분석할 것이다. 사실 양자의 이론을 정합적으로 재구성하는 것도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힘든 작업이다. 왜냐하변, 프로이트의 글도 들뢰즈의 글도 그렇게 분석적이거나 경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양자의 이론이 안고 있는 형이상학적 차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탐구 동기를 부여하고자 한다.
2. 변형론과 사도마조히즘
잘 알다시피,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의 본질과 관계하여 변형론적 입장을 지지했다. 달리 말하면,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은 사디즘으로부터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본능은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대상을 향하여 공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디즘은 성본능의 공격적인 요소에 근거한다. 그런데 성본능의 이러한 공격적인 요소는 발달과정에서 자기 자신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마조히즘이다. 이러한 방향의 선회를 결정하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연의 두려움’이며, 다른 하나는 ‘죄의식’이다.
그룬베르거에 따르면 1), 전자의 조건은 전성기기에 기원하며, 후자는 초자아의 형성에 결정적인 오이디푸스적인 모텔에 근거한다.
다음 장에서 분석하겠지만, 양자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은 각각 다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입장에서는 어느 경우이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페니스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으로 어린이가 거세나 살해의 욕망을 느끼는 대상이며, 또한 처벌을 내리는 사람으로서 공격성의 선회를 통해서 분노를 풀어주어야 할 대상”2)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마조히즘이 자신에게로 선회한 사디즘이라는 프로이트의 정의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반대한다.
우선 첫째로,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의 탈성화 현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하지만, 재성화의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사디즘이든 마조히즙이든 이러한 도착증은 반드시 먼저 고통과 함께 성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는 냉담한 시기, 즉 탈성화를 겪고 그 다음에 다시 성적 쾌감을 가진다. 이를 들뢰즈는 재성화라고 한다. 그리고 들뢰즈의 입장에서는 재성화 없는 고통은 엄밀한 의미의 마조히즘이 아니다,
그러나 들뢰즈의 입장에서 볼 때, 프로이트는 탈성화 현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설명을 제공하지만, 재성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즉 프로이트는 초자아 또는 양심의 형성을 통해서 탈성화를 설명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에 본성적으로 아버지 또는 어머니를 향하는 리비도적인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초자아의 형성을 통해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할 수 있다.
초자아의 형성이란 아버지의 법을 수용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더 이상 아버지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자신을 책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설명으로 마조히즘의 가능성을 전부 다 해명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마조히즘의를 “특정지워 주는 것은 죄의식이 아니라 처벌받고자 하는 욕망이며”3), 마조히즘의 목적은 “죄의식과 그에 상응하는 불안을 해소하여 성적 만족을 가능케 하는 데 있다.”4) 이처럼,
들뢰즈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에게 가해진 공격으로부터 성적 쾌감이 동반되지 않으면 더 이상 마조히즘이 아니다.
둘째로,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에 고유한 성감성을 만족스럽게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마조히스트가 가지는 만족을 주로 도덕적 본질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즉 처벌이 죄의식을 해소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도덕적 차원의 도입만으로는 마조히스트가 가지는 육체적인 고통과 성적 쾌감 사이의 연관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사실 프로이트 자신도 고통이 쾌감이 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리비도적 공동 교감 자극”(Lbidinal sympathetic coexcitation)5) 이라는 가설을 제안한 바가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특정한 양적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나 자극(고통)은 성애적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이는 성교시 반복적인 자극인 성적 흥분을 야기하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그리고 사디스트가 타인에게 고통을 부과하면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마조히스트의 입장이 되어 고통과 쾌감 사이의 연관성을 직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사디즘보다는 마조히즘이 먼저라는 것을 함의하며, 사디즘의 쾌감은 마조히즘의 쾌감의 연장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나프로이트는 사디즘에 우선권을 주면서 마조히즘은 사디즘이 자신에게로 선회한 것이라는 입장을 보다 더 강하게 유지했다. 6)
셋째로, 마조히즘에는 투사의 문제가 있는데, 투사 문제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설명은 불충분하다. 사실 자신이 자기를 처벌하는 강박신경증자와는 달리 마조히스트는 “나는 매를 맞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 매질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프로이트에 따르띤 어머니이다.
프로이트 학파의 정통적인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마조히스트는 아버지의 금지법의 위반행위(어머니와 성적 관계, 즉 아버지의 남근을 거세하는 환상)의 결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여 자신을 아버지에게 성적 대상으로 제공한다 그러나 이는 그가 회피하고자 하는 자신의 거세 위협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주체는 거세당하는 위협을 제거하면서 사랑받을 수 있는 대안을 찾는데, 이것이 바로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버지와의 동성애적 관계가 문제이다. 이에 매질하는 자인 아버지를 다시 어머니로 대체한다. 여기서 주체는 어머니에게 비난을 돌린다. 즉 주체는 아버지를 거세하려는 자는 내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투사의 목적은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여 아버지의 페니스를 취하는 것(빗나간 마조히즘)이거나, 아니면 자신을 희생자로 생각하면서, 즉 거세되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부정하고 이로써 아버지의 남근을 거세하려는 부도덕한 맘이 없었음을 확인하는 것(도덕적 마조히즘)이다.
사실 이러한 가정은 그야말로 확인되지 않은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에 대한 들뢰즈는 비판한다. 이에 이하에서 장을 바꾸어 들뢰즈의 비판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필자는 궁극적으로 들뢰즈의 이러한 비판도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한 비판이고 따라서 새로운 종류의 형이상학적 가정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할 것이다.
1) 참조, G. Grunberger, 「마조허즘의 정신역학 이론에 대한 초안」, r프랑스 정신분석 리뷰』,1954: 그룬베르거는 마조히즘을 오이디푸스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며, 오이디푸스 모텔에서의 아버지 살해를 아버지를 거세하고자 하는 전성기기의 욕망으로 대체한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전성기기의 욕망을 마조히즘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2) 들뢰즈, 『매저키즘』, 이강훈 옮검, 인간사랑, 2007, p. 125.
3) 들뢰즈, 전게서, p. 126.
4) 들뢰즈, 전게서, p. 126.
5) 들뢰즈, 전게서, p. 126
6) 프로이트,「본능과 그 변화」,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 들, 2011 , p. 114-115.
3. 아버지와 어머니
들뢰즈도 상기의 프로이트적 설명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반대한다. 우선 동의하는 부분은 매질하는 자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어머니의 의미에 대해서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자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다. 후자들은 매질하는 그 어머니는 아버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특히 나쁜 어머니를 상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여기서 매질하는 어머니는 오이디콤플렉스를 야기하는 그 아버지의 대리자가 아니며, 또한 나쁜 어머니가 아닌 선한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디즘에서의 그 중요성을 고려해 볼 때, 아버지의 이미지는 어머니의 이미지로 가장한 채 그 역할을 결정하는 등 마조히즘에서도계속해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그 강조점을 도치시키고 이차적 요소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결점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쁜 어머니라는 주제가 마조히즘에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주변적 현상일 뿐이며, 주체를 매질하고 굴욕감을 주며 나아가 매춘까지 행하는 인물은 선한 어머니이다7)”
이를 위해 들뢰즈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우선 “자궁의 이미지를 가진 어머니가” 있다. 이 이미지는 창녀기능, 즉 매춘을 하는 나쁜 어머니의 이미지이다, 두 번째로 “오이디푸스 이미지로서의 어머니”가 있다. 이는 금지시키고 매질하는 초자아적 기능을 하는 어머니이다. 그런데 양자 사이에 있는 제 3 의 어머니가 있다. 이를 들뢰즈는 “구강적 이미지의 어머니”라고 명명한다, 마조히스트에게 매질을 하는 어머니는 구강적 이미지의 어머니이다
“마조히 즘에서의 두 가지 상징적 여백들은 바로 자궁의 이미지를 가진 어머니와 오이디푸스적인 어머니이다 그리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구강적 이미지의 어머니가 환상의 핵심인 것이다
마조히스트는 두 극단을 이용하여 구강적 이미지의 어머니에게 공명을 일으키도록 유도한다. 즉 구강적 이미지의 어머니가 그 두 명의 경쟁자들에게 최대한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진폭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구강적 이미지의 어머니는 자궁의 이미지 를 가진 어머니로부터 창녀기능(매춘)을 오이디푸스적인 어머니로부터 사디즘적인 기능(처벌)을 빼앗아내야 한다. 양 극단을 오가는 추의 운동 속에서 선한 어머니는 제 3 의 인물, 즉 익명의 자궁적인 이미지의 어머니와 사디스틱한 오이디푸스적인 어머니와 대면해야 한다 8)”
아버지가 환각적 형태로 복귀하는 최악의 결과로 접어들지 않는 한,제 3자는 자궁의 이미지를 가진 어머니와 오이디푸스적인 어머니를 선한 어머니로 대체함으로써 두 양 극단의 어머니들을 중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다른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처럼, 구강적 이미지의 선한 어머니에게 모든 기능들을 집중시키는 것은 아버지의 모습을 지우고 아버지의 자질과 기능을 세 명의 여성에게 분배하기 위한 것이다. 즉 이러한 세 여성의 이미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영원히 삭제하고 어머니에게 상징적 질서의 형성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는 마조히즙을 아버지의 금지법인 상징적 질서에 근거한 도덕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마조히즘에서 죄의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된 죄는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죄는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죄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 자신의 죄, 아들 속에 내재한 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마조히즘을 정의하려고 할 때, 우리는 성감적 차원에서 고통과 성적 쾌감 사이의 관계를 해명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도덕적 차원에서 죄와 처벌 사이의 관계에서 정의해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두 차원의 관계의 속성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명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들뢰즈의 입장이다. 즉 마조히즘에 고유한 고통과 쾌감 사이의 관계와 죄와 처벌 사이의 관계는 새로운 조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조명에서 가장 중요한 한 요소는 바로 법의 의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마조히스트는 법을 미리 자발적으로 너무나 잘 준수함으로써 법을 무력화하는 자이다. 반면에 사디스트는 자신을 법 그 자체로 생각하면서 아니 법보다 훨씬 상위의 이데아로 생각하면서 법이 처벌해야
할 대상을 자신이 처벌하는 자이다.
“사디즘의 경우 아버지는 법 위에 존재하며 어머니를 그의 필수적인 피해자로 삼고 자신은 고차원의 원리가 된다. 그러나 마조히즘의 경우, 법의 총체성은 상징적 영역으로부터 아버지 를 추방하논 어머니에게만 부여되고 있다 9)”
마조히스트는 법을 처벌과정으로 간주하며 스스로에게 처벌을 요구한다. 그러나 처벌이 끝나면 지금까지 법이 금지해 왔던 쾌락을 경험할 자격이 주어진 것처럼 느낀다. 말하자변, 마조히스트는 순종 속에 거만함을, 복종
속에 반란을 감추고 있다. 사디즘의 주인공들이 법을 전복시키기 때문에 마조히스트는 법에 기꺼이 복종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복종적인 태도에는 비판과 도전이 숨격져 있다. 우리는 법에 미리 복종함으
로써 법 그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자살은 법의 이러한 무력화를 가장 잘 보여줄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법이 이처럽 무력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근거가 처음부터 나약하고 부조리한 토대였기 때문이다. 법은 사실 선이라는 상위의 원리에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법은 이차적이고 대리적인 권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선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이 때문에, 법에 복종하는 것이 ‘최선’인 것으로 생각한다 즉 선은 다시 법에 의존한다. 이러한 부조리를 프로이트는 본능과 양심 사이에서 발견한 바 있다.
즉 그는 “본능의 충족을 포기하는 것이 양심의 산물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포기에서 양심이 탄생한다” 10)는 사실을 발견했다,
선이라는 이러한 추상적 원리를 제거하고 나면, 법의 근거는 주인과 노예의 수치스러운 공모이다. 약자들의 집합은 폭군의 등장을 초래한다. 즉 약자들이 대모하기 위해 집합하면, 기득권자는 법의 이름으로 폭군으로 돌변한다. 이런 의미에서 폭군은 약자들의 무리에 의존하고, 법은 폭군에 의존한다.
약자들이 없으면 폭군이 없고, 폭군이 없으면 법이 없다. 마조히스트는 이러한 순환성을 직관적으로 안다. 이에 마조히스트는 선제적으로 법에 복종하고 처벌을 수용함으로써 법 그 자체의 효력을 말소시킨다_11)
즉 마조히스트는 주인이 처벌하기 전에 미리 법적 처벌을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함으로써 주인의 권력을 무력화하고 법을 조롱한다. 이런 차원에서 프로이트적 도덕 개념으로 마조히즘을 정의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볼 때, 마조히스트는, 프로이트가 생각한 것처럼, 나약하고 무력한 자가 아니라 사디스트보다 더 잔인하고 냉담한 자이다.
7) 들뢰즈, 전게서, pp. 130-131.
8) 들뢰즈, 전게서, pp. 80-81.
9) 들뢰즈, 전게서, pp. 107-108
10) 들뢰즈, 전게서, p. 101‘
11) 들뢰즈, 전게서, p. 103.
4. 에로스와 타나토스
잘 알다시피 프로이드는 죽음본능의 개념으로 사디즘의 현상을 설명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을 죽이는 선천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프로이드의 가설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본래부터 자신을 파괴하고자하는 선천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사디즘보다는 마조히즘을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사디즘은 마조히즘의 잘못 적용된 사례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죽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동일시라는 심리적 기제로 인해 타자를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타자를 괴롭히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자신의 초기이 설명에 정면으로 모순된다.
들뢰즈는 프로이트 이론의 이런 비일관성을 자가 이론의 토대로 재활용한다. 즉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후기의 이론을 보다 강조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한다.
인간이 죽음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프로이드에겐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보였다. 프로이드로 하여금 이러한 죽음본능을 말하게 한 결정적 계기는 항상성의 원리이다.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는 자기의 본래의 자리로 뒤돌아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즉 그가 태어나기 이전의 자리로 복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즉 무생물 단계로 복귀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곳이 가장 완벽하게 안정화된 상태이기 때문이다_12) 안정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모든 물체들의 근본 법칙이듯이, 범물리학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생물체들도 안정화의 법칙으로부터 제외될 수 없다. 이에 모든 생명체들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지향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체의 , 목표는 <옛> 상태, -그곳으로부터 생명체가 과거 어느 시점에서 떨어져 나왔고 또 그곳을 향하여 그것이 지금까지 발전해 나온 길을 굽이굽이 거슬러 돌아가려고 하고 있는 그 어떤 처음의 상태에 있음이 틀림없다‘ 만약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내적인> 이유로 인해서 죽는다는 것을 하나의 예외 없는 진리로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모든 생명체의 목적은 죽음이다>라고 말하고 또한 뒤를 돌아보면서 <무생명체가 생명체보다 먼저 존재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의 특성들은 그 성격을 잘 알 수 없는 어떤 힘의 작용에 의해서 과거 어느 땐가 무생물 속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형태상 생물의 특수층에서 의식의 발달을 유도했던 것과 비슷한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때까지 무생물체였던 것 속에 야기된 긴장은 긴장 그 자체를 없애 버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첫 번째 본능, 즉 무생물 상태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생기게 된 것이다 13)”
프로이드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사는 유기체의 제 l본능이 죽음본능이 라는 증거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연적으로 죽는다. 생명체가 영원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본능 속에 이러한 죽음의 본능을 가
지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적 어도 고등 동물 사이에서는 일정한 평균 수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연히 자연적 원인에서 발생하는 죽음과 같은 것이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해 준다”1 4)
다른 한편에서 프로이드는 정신-신경적 차원에서도 죽음의 본능을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하다.
“개체의 생명 과정은 내적인 이유로 해서 화학적 긴장의 폐지, 다시 말해서, 죽음으로 향하고, 반면에 다른 개체의 살아 있는 물질과의 결합은 그러한 긴장을 고조시켜 이른바 선선한 <생명 고취적 차이>를 도출해 낸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차이와 관련하여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최적 조건이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다
정신생활 및 신경 생활 전반의 지배적인 경향은 자극에서 비롯된 내적 긴장을 줄이거나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혹은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다(이것이 바바로 로 Barbara Low의 용어를 빌리자면, 열반원칙이다. 이러한 경향은 쾌락원칙 속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죽음 본능의 존재를 믿는 가장 강력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15)”
잘 알다시피, 프로이드는 이원론자이다 그러나 그의 이원론은 초기와 후기에 서로 다른 명칭으로 나타났다. 초기에 그는 ‘자아 본능’과 ‘성적 본능’이라는 명칭으로 대별되는 이원론을 논의했다
그러나 후기에 가서 그는 ‘죽음 본능’과 ‘생명 본능’이라는 명칭으로 대별되는 이원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명칭상의 변형이 본질적인 이론을 수정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아 본능은 본질적으로 죽음 본능이며, 성적 본능은 본질적으로 생명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자아 본능은 무생물이 생명을 얻음으로써 생기고 그 무생물적 상태를 복원하려고 한다.” 16)
따라서 자아의 발생은 곧 자기의 소멸을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자아 본능은 곧 죽음 본능이다. 반면에 성적 본능에 관련된 생물학적 사실들은 불멸을 암시한다. 프로이드는 생물학적 사실들 중에서도 영생의 증거가 있다는 것을 바이스만의 연구를 통해서 확인한다.
“살아 있는 부분을 죽은 부분과 죽지 않은 부분으로 갈라놓은 일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 바로 바이스만이었다‘ 죽은 부분은 좁은 의미로의 육체, 즉 체세포인데 이것만이 자연사를 겪는다‘
반면에 생식 세포는 그것이 좋은 조건 하에서 새로운 개체로 발전하거나 다른 말로 표현해, 자신을 새로운 체세포로 감쌀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으로 볼멸이다.17)”
그런데 들뢰즈의 입장에서 볼 때, 성본능(Eros Instinct)과 자아본능(Ego Instinct) 18), 즉 생의 본능(Life Instinct)과 죽음 본능(Death Instinct) 이라는 프로이트의 이원론은 변형론, 즉 사도마조히즘 이론을 모순에 봉착하게 한다, 사실 상식적 차원에서는 자아 본능이 죽음 본능이라고 말하는 프로이트의 정의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아 보존 본능은 곧 자기를 스스로 죽이는 죽음 본능이라고 것을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자아란 곧 나르시시즘19) 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나르시시즘은 일종의 생의 의지의 포기이다. 이를 프로이트는 ‘긴장완화’(defusion)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용어 사용에서 이러한 긴장완화는 죽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긴장완화란 에로스에 의한 생의 의지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자기의 출생지로 회귀하려는 퇴행적 성향이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출생지는 무생명적인 무기물 상태이다. 프로이트는 이드가 에로스의 다른 이름이고 생명 의지를 지시한다면, 자아와 초자아는 이드의 욕구를 중단시키고 무력화는 의지로서 ‘죽음 본능’(Thanatos)의 작용 모습인 것처럼 언급한다 20) 이렇게 하여, 프로이드의
이원론은 에로스와 타나토스로 요약된다.
사실 식물이 동물보다 평균 수멍이 더 길고, 동물 중에서 의식적 활동이 발달할수록 평균 수멍이 더 짧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아나 초자아가 생명활동에 역행한다는 프로이트의 통찰력은 분명 탁월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변, 프로이트의 이러한 이원론은 사디즙이 자아에게로 선회한 것이 마조히즘이라는 사도마조히즘 이론, 즉 변형론에 모순된다.
그리고 프로이트 그 자신도 이러한 변형론을 부정하는 입장을 스스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죽음 본능, 즉 타나토스가 외부적 대상으로 향할 때 사디즘이 등장하며, 유기체 내부에 잔여물로 남아서 리비도적인 형태로 작용할 때 마조히즘이 된다.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는 본질적으로 외부 대상으로 표출되며, 이때 이러한 표출은 본질적으로 공격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성적 결합은 일종의 공격적인 행동이며 죽음 본능의 표출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 본능이 성적 에너지와 연대하여 유기체 내부에 머물게 될 때 마조히즘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적 본능이든 죽음 본능이든 이들은 각자 개별적으로 등장하거나 작동할 수 없고 반드시 두 본능의 종합에 의해서만 표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본능이 에로스의 활동에 의해 외부로 표출되면 사디즘적인 도착증이 나타나며, 그 일부분이 잔여물로 남아서 유기체 내에서 리비도적인 형태로 결합되어 머물변 마조히즘적 도착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이론 그 내부에서 더 이상 사디즘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일차적인 마조히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본능의 융합인데 21), 이러한 융합은 “긴장”과 동시에 “긴장완화”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긴장이 생명을 구성하는 원리라면, 긴장완화는 역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원리이다.
이러한 긴장의 원리를 프로이트는 쾌락원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생명 현상에 생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동일한 비율로 작동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생의 본능의 구체화된 모습인 쾌락원리뿐이다. 죽음의 본능의 작동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변, 그것은 자아의 나르시시즘에 의한 마조히즘적 현상과 초자아에 근거한 사디즘적 현상이다_ 22)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이러한 본능의 이원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각각 독립적인 심리적 도착증상으로 각자는 각자에 고유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융합에 근거한다는 것을 강조한다.23)
들뢰즈가 제공하는 두 가지의 도착 증세의 특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이전에 우선 죽음 본능이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들뢰즈의 정당화를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들뢰즈는 쾌락원리 외에 이 원리를 넘어서는 어떤 원리가 였다는 것을 해명한 연구가 프로이트의 “쾌락원리를 넘어서”라는 논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생명 현상에서 쾌락원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생명현상을 보다 더 정확히 기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쾌락원리를 보완해 줄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쾌락원리가 전체적인 것을 관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원리가 모든 것에 대한 가장 상위의 최종적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 원리의 예외는 없으나 그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나머지
들이 있으며, 그 어느 것도 그 원리에 상치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 원리의 외부에 그 원리에 일치하지 않는, 간단히 말해서 그 원리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 있다24)”
12) 참조, 프로이트,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11, p. 419: ‘열반 원칙’은 ‘죽음 본능’의 추세를 표현하고, ‘쾌락원칙’은 리비도의 요구를 표현한다,
그리고 쾌락원칙의 변형인 ‘현실원칙’은 외부 세계의 영향을 표현한다 열반원칙이란 흥분의 양을 제로 내지는 최소화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이는 영원의 잠에 빠지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런 점에서는 이는 죽음본능의 표현 이다 반면에 쾌락원칙은 리비도, 즉 생명 본능의 표현이다 따라서 비가시적인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쾌락원칙과 열반원칙이라는 상대적으로 감성적인 원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13) 프로이트, 「쾌락원칙을 넘어서」,『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11, p. 310‘
14) 프로이트, 「쾌락원칙을 넘어서」,『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11, p. 318.
15) 프로이트, 「쾌락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윤희기·박찬부 옮김,열린책들, 2011, p. 332‘
16) 프로이트, 「쾌락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윤희기·박찬부 옮김,열린책들, 2011, p. 316.
17) 프로이 트, 「쾌락원칙을 넘어서 」, r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11, p. 318
18) 참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틀, 2011,p. 51; 나르시시즘 서론, 성적 본능과 자아 본능의 구분은 다시 ‘대상을 향한 리비도’와 ‘자아에 고유한 리비도’라는 이원론을 출현시킨다 사랑의 욕망이 전자의 예라면, 배고픔은 후자의 예이다. 사랑은 주체의 쾌락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종족의 보존을 위해 주체의 소멸을 이끈다, 이런 점에서 사랑에도 이미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융합되어 있다
19) 참조, 전게서 , p. 45; 나르시시즘 서론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는 네케 (Pa띠 Nacke)가 자신의 몸을 마치 성적 대상을 대하듯 하는 사람의 태도, 말하자변 스스로 성적 만족을 느낄 때까지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쓰다듬고 에무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지칭해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20) 참조, 프로이트, 『문명속의 불만』, 김석희 옮김, 열 린책들, 1997, p. 72: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류의 전쟁은 죽음 본능에 기인한다
21) 들뢰즈, 전게서, p. 35: 들뢰즈는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두 가지 종류의 죽음 본능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소문자로 표기된 죽음 본능이며, 다른 하나는 대문자로 표기된 죽음 본능이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파괴 또는 부정의 의미라며, 후자는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죽음으로 우리가 결코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반물질과 같은 개념으로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들의 존재가 반물질에 의존해 있듯이, 모든 생명체들은 이것에서 왔고 다시 이것에로 간다 들뢰즈는 이러한 대문자로서의 죽음 본능이 프로이트의 타나토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타나토스는 에로스의 결합을 통해서만 현전화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겐 언제나 에로스의 원라인 쾌락원칙만이 생명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저변에 침묵으로 존재하는 이 죽음의 본능은 결국에는 쾌락 원칙율 지배하고 일체의 것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여기서 모든 생명체의 자연사가 설명된다.
22) 여기서 자아의 나르시시즘과 초자아의 사디즘적 공격성은 파괴적이고 부정적이지만 반대로 양자는 자긍심과 승화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상기해야 한다
23) 참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11,p. 420;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프로이트 자신 마조히즘을 ‘성감 발생적 마조히즘’, ‘여성적 마조히즘’ 그라고 ‘도덕적 마조히즘’으로 삼분한 적이 있다. 이러한 태도 변화를 통해, 마조히즘은 자아에로 선회한 사디즘이라는 프로이트의 초기 입장은 부정된다.
24) 들뢰즈, 전게서, p. 135.
쾌락원리의 배경은 에로스인 것이 분명하다. 즉 에로스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쾌락원리이다. 그렇다면, 타나토스의 실현을 볼 수 있는 경험적 사실은 무엇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그것은 ‘반복’이다 사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모두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그 자체적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양자는 반드시 융합하여 드러날 뿐이다. 즉 우리는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들이 융합하여 함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정신생활의 원리로서의 쾌감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결합과정인 것이다‘ 에로스는 그러므로 자극을 결합시키는 역동적 과정과 세포들을 결합시키는 생물학적 과정이라는 두 가지 결합과정의 측면 뒤에서 쾌락원리의 근거로 출현한다. 쾌락원리를 구성하는 에로스의 결합행위는 단세포 생물의 경우조차 필수적인 반복을 – 자극의 반복, 생명의 순간의 반복,필연적인 합체 – 그 특정으로 한다_ 25)”
들뢰즈가 주장하는 이러한 반복은 생명의 탄생과 생명의 발달 그리고 성장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파괴와 죽음의 원리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형이상학적인 두 가지의 비가시적인 원리이라면, 이러한 원리와 생명활동의 구체적 원리인 쾌락원리 사이를 매개해 줄 매개 원리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원리 가 필요한 바, 이를 들뢰즈는 ‘반복’이라고 한다.
그런데 반복에는 동일한 것 같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로 인해 우리는 생을 위한 노력을 부단히 수행함에도 점진적으로 미세하게 죽어가고 있다_ 26)
반복은 순간을 결합시키며 “동시성”을 구성한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러한 형태의 반복에서 분리될 수 없는 또 다른 유형의 반복을 상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자극의 순간 이전의 상태, 자극이 무감각한 사물의 무반응 상태를 교란시키기 이전의 상태, 생명이 무생물을 무가각의 잠에서 깨워내기 이전의 상태를 반복하는 그러한 반복인 것이다. 들뢰즈의 입장에서 볼 때, 한편으로 자극을 결합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그 자극을 제거하고자 하는 반복의 이 이중적 작업이 없다변, 자극이 생산적 결합과 함께 또 그로 인한 파괴적 배출이 가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로스를 넘어서자마자 우리는 곧 타나토스를 만난다.
“근거를 넘어서자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심연을, 연결시키는 반복을 지나자 지우고 파괴하는 반복을 만나는 것이다.”27)
결국 들뢰즈는 프로이트에서 단순한 이원론만 강조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는 이원론 뒤에 리듬과 진폭이라는 시간적인 반복을 강조하는 일원론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반복은 시간적 종합을 의미한다. 현실적 관점에서 볼 때, 과거는 현재를 따르며 현재는 미래를 쫓아가므로 서로 간에 질적인 차이가 있지만, 초월적인 관점에서 보자변 과거, 현재, 미래는 시간 속에서 동시에 구성된다. 결국 경험적 관점에서는 이원론적 가정을 지지해야 하지만,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는 다시 반복 일원론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24) 들뢰즈, 전게서, p. 135.
25) 들뢰즈, 전게서, p. 137‘
26) 참조, Deleuze, G., Difference et Reptition, PUF., 1968.
27) 들뢰즈, 전게서, p. 138.
5. 자아와 초자아
다른 한편으로 들리즈는 자아와 초자아는 타나토스의 등장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계기가 에로스의 완전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자아가 죽음 본능의 그림자인 것은 그에게 고유한 나르시시즘의 이상화 때문이다. 자살은 나르시시즘의 극단적 모습이다.
이러한 이상화는 자아의 상상력에 의존한다. 죽음본능이 실현되고 있는 또 다른 측면은 초자아의 작동이다.
도덕적 의식, 양심, 법의식 등은 자주 예술적 승화28)를 이끈다. 법적인 금지들은 성적 에너지의 활발한 운동을 억제하변서 생명적인 대사 운동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승화와 같은 환상은 탈성화와 생명의 촉진을 동시에 보장할 수도 있다 탈성화만을 강조하면, 자아와 초자아는 에로스의 상실과 타나토스의 승리를 지시하지만, 이러한 나르시시즘과 승화는 다른 한편으로 재성화를 위한 필수적인 동기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즉 자아와 초자아의 등장은 타나토스의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에로스의 부재가 아니라, 보다 더 강한 에로스의 복귀를 위한 일종의 수축을 의미한다,
왜냐하변, 성스러운 종교적인 엄숙함 뒤에 에로틱한 욕망의 충동이 충천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본능의 긴장완화는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긴장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긴장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이상적으로 조합되어 쾌락원리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긴장완화는 이러한 이상적인 조합이 구성되지 못하고, 순수한 형태의 타나토스 또는 순수한 형태의 에로스가 출현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런 차원에서 긴장완화는 쾌락원칙의 작용에 두 가지 영향을 미친다.
한편에서는 자아의 기능장애를 유발하여 신경증을 발생시키며, 다른 한편으로 초자아에 영향을 미쳐 승화를 유발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긴장완화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이상적인 조합과 작용을 방해하지만 이것때문에 쾌락원칙이 무용화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쾌락원칙은 현실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쾌락의 포기에 의해서도 전복되지 않으며 승화에 의한 정선적인 확장에 의해서도 전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타나토스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29)”
결국 들뢰즈의 최종 결론은 프로이트의 변형론은 더 이상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변형론을 수용하는 한, 마조히즘과 사디즘에 고유한 탈성화와 재성화의 과정을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도착증에 고유한 본능들 간의 조합과 긴장완화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들뢰즈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각각 고유한 탈성화와 재성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적절한 조합인 긴장과 그러한 조합의 붕괴인 긴장완화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_30)
들뢰즈가 구분하는 마조히즘과 사디즘의 최종적인 차이는 초자아에 대한 자아의 승리와 반대로 자아에 대한 초자아의 승리로 환원된다 즉 초자아가 자아를 제압하고 그를 추방하고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 사디즘이라면, 반대로 자아가 초자아의 위력을 무력화하고 희롱하고 풍자하는데서 마조히즘이 구성된다.
먼저 사디즘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디스트에게 강력하고 압도적인 지배자의 원리는 본능에 관련된 초자아이다, 31) 즉 사디스트는 자신을 초자아와 동일시한다. 초자아와 동일시되어버린 사디스트는 자신의 자아를 외
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사실 우선 초자아에게 도덕적 본성을 부여하는 것은 자아이다. 즉 자아가 없었다면, 초자아는 구성될 수 없다. 자아에 의해 생명을 갖기 시작한 초자아는 이제부터 서로 간에 대결구도에 놓인다.
이때, 모성적 요소(어머니)는 자아와 초자아 사이의 긴밀한 내적 상호작용을 갖도록 양자를 조절한다 그러나 초자아가 지나치게 광폭한 힘을 갖게되변, 초자아는 어머니의 이미지와 함께 자아까지 몰아내고 추방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디스트의 최종적인 희생자는 어머니와 자아이다. 사디스트의 자아는 오직 외부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사디스트의 희생자들은 바로 자신의 자아이다.
“그러므로 사디스트는 끔찍할 정도로 순수한 자아로 환원되어 잔인성을 최대로 발휘하며, 초자아의 힘이 외부로 향함과 동시에 성적 의미를 온전히 회복한다. 사디스트의 희생자가 자신의 자아라는 사실은 사디즘의 명백한 역설, 즉 유사마조히스트의 존재를 설명해 준다 32)”
들뢰즈의 관점에서 볼 때, 마조히스트는 초자아에 대한 자아의 완벽한 승리를 의미한다. 마조히즘적인 자아가 초자아에 의해 매질을 당하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그처럼 매질을 당하고 있는 연약한 자아는 사실 불굴의 저항과 무시와 풍자를 숨기고 었다. 마조히스트가 자신이 허약한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은 상대자로 하여금 이상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마조히스트에게 결여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초자아이지 자아는 아니다.
매질하는 여성이 자신의 초자아가 되도록 자신을 여성에게 투사할 때, 마조히스트는 단지 초자아의 우스광스러운 본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결국은 자아의 승리를 위하여 그러한 투사를 이용하는 것이다 33)
그러나 여기서의 초자아는 사디즘에 있어서 자아의 처지처럼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으로 판결의 능력을 계속 유지한다 그러나 초자아는 적극적인 부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인34)에 의해서 죽은 초자아이다. 들뢰즈가 사용하는 부인의 의미는 부정의 의미와 다르다. 부정이 문제의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파괴 또는 거부를 의미한다면, 부인은 문제의 대상에 대한 판단을 중단하고 일체의 믿음을 정지시키면서 사고의 중립화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중립화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영역으로의 초월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즉 자신의 환상 속에 정지되어 있는 이상을 계속 안전하게 유지시키기 위해 세계에 대한 일체의 판단을 정지시키는 것을 부인이라고 한다.
28) 참조, 프로이트, 「나르시시즘 서론」,『정신분석학의 큰본 개념 』, 윤희가·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11, p. 75: 초자아의 승화가 본능(에로스 또는 타나토스, 또는 이드)과 관련된다면, 자아의 이상화는 외부의 특정 대상에게 과도하게 가치부여 하는데서 성립한다. 자아 이상의 형성은 자아의 요구를 극대화하고 따라서 억압의 가장 강력한 요인이 되지만 승화는 억압과는 무관하게 그런 자아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하나의 방편이자 탈출구이다. 달리 말하면, 음악, 미술, 시와 같은 예술적 행위는 이드의 욕망에 반하는 행동이지만 억압의 해소를 준다. 즉 예술은 연간을 통물로 전락하지 않게 하면서도 억압을 해소시킨다. 그러나 그 뒤에 보다 더 강한 재성화가 동반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29) 들뢰즈, 전게서, p. 141.
30) 들뢰즈, 전게서, p. 132-133.
31) 참조, 프로이트, 「마조허즘의 경제적 문제 」,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가·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11, p. 430: 양심과 도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과 탈성화를 통해서 생겨난다 여기서 탈성화란 에로스의 억압을 의미하며 , 결과적으로 타나토스의 활성화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초자아의 승화는 본능에 연관되어 있다. 이에반해 자아의 이상화는 외적 대상에 대한 과대평가에 근거한다- 나르시시 즘은 자기 몸에 대한 과대평가이다‘ 이러한 과대평가의 병적 증상이 과대망상증이다. 과대망상증이라는 용어는 편집증이라는 용어와 교환적이다. 따라서 상상력에 의존하는 자아 관념의 자기 확장은 승화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달될 수도 있지만, 자칫 신경증과 도착증뿐만 아니라, 심하면 망상증과 같은 정신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32) 들뢰즈, 전게서, p. 149.
33) 들뢰즈, 전게서, p. 148.
34) 참조, 대니 노버스, 『라깡과 프로이드의 임상정신 분석 』, 김종주 옮김, 하나의학사,2002, p. 90: 프로이트는 「물신주의」(Fetishism, 1927) 이란 논문에서 남자 아이가 어떻게 절편음란증 환자로 발전해 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부인’ (Verleugnung, disavowal) 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에 엄마가 남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경향을 가지는데, 이는 엄마가 거세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아이의 심적인 경향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에 엄마에게 남근이 없다면, 이는 아버지에 의해 거세된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자기자신에게도 이러한 거세가 도래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이에 아이는 어머니에게 남근이 없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어머니의 남근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모종의 물건에 집착한다- 이것이 물신주의이다 모든 남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물신주의 변태성을 소유하고 있다
6. 결론: 기여와 한계
지금까지 필자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입장과 이러한 프로이트의 입장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을 간략하게 고찰했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선행하는 고찰을 토대로 도착증에 대한 양자의 이론의 기여와 한계를 간략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필자는 도착증에 대한 들뢰즈의 이론을 비판하는데 집중할 것이다. 왜냐하면,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변형론을 비판하지만, 들뢰즈의 이론적 개념들과 가정은 프로이트로부터 차용해서 사용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서로 다른 논리에 근거하는 이원론은 사실 프로이트에게서도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차이는 다음과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사디즘이 사변적이고 논증적이라면, 마조히즘은 변증법적이고 상상적이다.
둘째로, 사디즘이 부정적인 것과 부정을 통한 양적 되풀이로 작용한다면, 마조히즘은 부인과 정지를 통한 질적 긴장감으로 작용한다.
셋째로, 사디스트에게도 특유의 마조히스트적 성향이 있듯이, 마조히스트에게도 특유의 사디스트적 성향이있다. 그러나 양자는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넷째로, 사디즘은 어머니를 부정하고 아버지를 학대한다면, 마조히즘은 어머니를 부인하고 아버지를 폐기한다 즉 마조히즘에서는 아버지가 완전히 폐기되어 사라진다면 사디즘에서는 아버지가 작용하지만 처음의 아버지보다 더 상위의 아버지를 구성하변서 처음의 아버지는 무시하고 학대된다. 반면에 어머니는 사디즘에 있어서 완전히 무시되지만 마조히즘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존립한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법 집형이 아니라 법의 무력화를 위한 아버지의 대변자이다. 즉 그녀는 조롱받고 무시당하는 아버지일 뿐이다.
다섯째로, 물신과 환상의 기능이 양자에서 사로 다르다.
여섯째로, 사디즘은 제도와 형식을 중시한다면, 마조히즘은 당사자 사이의 자유의지에 의한 계약을 선호한다 또한 후자가 미학적인 태도를 선호한다변, 전자는 미학적인 태도에 적대적이다.
일곱째로, 사디즘에는 초자아와 동일화 과정이 일차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마조히즘에는 자아와 이상화 과정에 우선권이 주어진다 이 때문에 양자는서로 다른 탈성화와 재성화 과정을 갖는다.
이제 비판적 관점으로 돌아가 보자.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서 볼 수 없는 인간에 고유한 이러한 도착증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이 점에 있어,들뢰즈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프로이트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점에 대해서 반대한다. 모든 생명체가 탄생 순간부터 죽음의 본능을 지참하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형이상학적 전제이지 경험적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생명의 정의 자체에 모순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곧 죽음이라는 주장은 언어적 분석적 진리도 아니고 대상적 경험적 진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그러나 이는 생명체 자신의 본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환경의 영향이다. 즉 생명체의 죽음은 그 자체의 본능이 아니라, 그가 처한 환경의 영향에 의한 한계일 뿐이다.
모든 생명이 결국은 죽는다고 해서 생명 속에 죽음 본능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는 가셜은 전혀 과학적인 주
장이 아니다. 그리고 클라인이 주장하듯이 35), 인간이 선천적으로 죽음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정신분석가의 노력은 불가능한 일을 수행하려는 자이다. 모든 사람은 선천적으로 죽음을 추구하는데 죽지
않고 잘 사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조히즘의 성향인 냉담성과 사디즘의 성향인 잔인성의 근원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지참되어져 있는 죽음 본능에 근거한다는 주장은 문자 그대로 형이상학적이다.
들뢰즈가 우리가 지금까지 참고한 저서의 서론부에서 언급하듯이 36), 냉담성은 사실 잔인성의 변형이다 즉 냉담성과 잔인성은 한 동전의 양 측면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두 성향은 인간성의 고유한 특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성은 어디서 유래되었으며,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필자는 동물성과 신성의 충돌에서 구성된 변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유기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동물처럼 살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의 실재는 동물이지만, 우리는 신처럼, 천사처럼 살아야 한다. 그런데 신과 천사를 구성한 자는 누구인가?
라캉이 강조하듯이, 그것은 바로 언어이고 말이다. 인간은 언어와 상징을 구성하면서, 스스로 거세된 동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억압은 반드시 복수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기본 전제가 아니었던가? 도착증이란 동물이었던 인간이 천사로 살아야 한다는 저 위대한 정언명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너무나 단순한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프로이트의 변형론을 비판하고 대신에 그의 이원론을 정당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들뢰즈의 이론은 프로이트와 좀 다른 일종의 새로운 형이상학일 뿐이다_37)
두 번째의 결정적인 비판점은 사드와 마조허의 작품의 기법들을 그대로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에 적용하려는 들뢰즈의 시도이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도착증적 성향을 현실적인 도착증 환자들의 성향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얼마만큼 허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특히 순수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상상력을 통하여 구성한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의 원인과 구조에 대한 이러한 가설들이 실제적 도착증 환자들의 병인에 얼마만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들뢰즈는 작품의 묘사 기법적 차원에서 사드와 마조허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차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사드의 작품 활동 목적과 마조허의 작품 활동 목적은 다 같이 결국은 우리에게 완전히 은폐되어 있는 죽음의 본능을 이해하고 파악하여 기술하려는 데 있다. 사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죽음 본능은 형이상학적 가설일 뿐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경험적 소여가 아니다. 이에 우리는 오직 문학적 작중 인물들의 말, 특히 명령이나 묘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러한 원초적 본능을 이해할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폭력의 근원을 해명하려는 사드와 마조허는 묘사들과 작중인물들의 말을 통하여 프로이드의 죽음본능의 가설에 대한 일종의 논증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사드의 표현들은 우주론적 부정을 논증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론적 부정의 원리는 칸트가 말하는 순수이성의 이념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부정해도 근본적인 수순 부정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표현들은 사변적이고 분석적인 논증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증 과정은 외설적인 표현들과 함께 진행된다. 이에 반해 마조허의 작품 안에 있는 명령들과 묘사도 이러한 초월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과정은 신화적이고 변증법적인 질서 안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마조허의 작품에서의 표현들은 우주적 부인에 근거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부인은 주체의 적극적인 행동이 아니라 일종의 반동적인 행동으로 순수 상상력의 이상에 의한 우주적인 정지에 근거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조허의 글은 신화적이고 변증법적이고 상상적인 방법으로 죽음의 본능을 찾고 묘사한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경험하는 자연은 부분적인 자연이라는 점에서 이차적인 자연이듯이, 도착증 환자가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은 이차적이고 부분적인 부정이고 부인이다.
즉 도착증자는 절대적인 부정, 순수 부정, 이데아적 부정을 욕망하지만, 그가 실제로 수행하는 부정은 부분적이고 이차적인 부정일뿐이다. 여기서 도착증 증상의 무한 반복이 초래된다. 이런 사실의 발견은 분명들뢰즈의 천재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드와 사디스트를 동일한 성향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듯이, 사드의 작품의 표현 기법이 바로 사디스트의 성향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조허와 마조히스트를 동일시할 수 없듯이, 마조허
의 작품의 표현 기법들이 그대로 마조히스트의 성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작품을 작가로부터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사드의 작품의 표현법들은 사드 자신의 성향이고, 그런 점에서 사드는 사디스트들 중의 모범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조허의 작품의 특성들을 그대로 마조히스트의 성격적 특성으로 간주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문학 작품일 뿐이다
사드와 마조허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향이 바로 두 작가의 성향이라고 주장하고, 나아가서 이러한 성향들이 현실적인 도착증 환자들 일반의 실제적인 성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 주장이 아니며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들뢰즈 저서의 문학적 가치 및 철학적 상상력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로, 인간의 공격적 성향은 선천적인 생득적 본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성격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Theodore Reik, Karen Horney, Eric Form 같은 정신분석학자는 이러한
본능이론에 근거하여 사디즘을 성적 차원의 리비도 이론에 접목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프로이트의 방향을 반대한다. 특히, 프롬은 『인간의 공격성 에 대한 해부』(The Anatomy of Human Destructiveness)38) 안에서 공격적 행동은 일종의 성격적 특성일 뿐이며, 따라서 사람들 중에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사디스트적인 성향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논증한다. 즉 모든 사람이 다 사디스트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처럼 본능을 강조하변, 모든 사람이 마조히스트이듯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사디스트이어야 한다. 성격학자들에 따르면, 사디스트는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좌절시키고, 착취하거나 모욕감을 갖게 함으로써 만족감을 갖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따르면, 성적 공격은 공격성 일반의 한 종류일 뿐이다.
공격성에는 성적 공격뿐만 아니라, 신체적 공격과 정신적 공격도 있다 이러한 공격성의 본질은 타자를 절대적으로 제압하고자 하는 열정이다.
그러나 필자는 프롬의 후천적 성격이론에 의한 인간 공격성의 해명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반면에 필자는 인간은 타자를 공격하고자 하는 유전인자를 선천적으로 갖고 있다는 생물학적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천적 공격 본능은 프로이트가 가정한 죽음 본능과는 다른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 본능은 모든 생물체의 형이상학적 조건이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공격본능은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구성된 후천적 본능이다, 그것은 동물 일반의 공격성 이론에 근거한 진화론적 구성
주의 이론이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동물은 진화론적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살해하고 싶은 욕구 내지는 충동을 본능적으로 구성해 왔다 그러나 생존의 현실 원칙은 동족끼리의 협력을 필연적으로 요구했다. 혼자서 천적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협력하여 방어할 때 보다 유리하다‘
그러나 모든 종들은 생존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먹이를 다 같이 공평하게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동일한 종 내에서도 생존을 위한 먹이 전투는 불가피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공동의 적을 만나면, 함께 협력하여 전투를 하지만, 먹이감을 발견하면 동일한 종족 내에서도 심지어는 한 가족 내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사디즘은 본질적이며 일차적이다. 즉 사디즘은 일부 사람들의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본능이다 즉 사디즘은, 프로이드가 생각했듯이, 죽음본능의 적용이 아니라,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모든 유기체의 생존전략이다. 이러한 입장을 가장 잘 논증한 사람은 콘라트 로렌즈39)이다
이에 인간 공격성의 근원을 보다 심층적으로 탐색하기 위해서 프로이트(정신분석학적 입장), 프롬(사회 심리학적 입장) 그리고 로렌즈즈(생물학적 진화론의 입장) 세 사람을 비교하는 연구40)가 필요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도착증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여 정의하려는 일체의 환원주의는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Siompoulos와 Goldsmith41)가 잘 논증하듯이, 사디즘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고 마조히즘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를 무시하고 하나의 원리로 모든 도착증을 설명하려는 환원주의는 언제나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다. 융이 전이의 본성을 해명하려면 연금술사의 연금술에 의존하여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듯이 42), 라캉학파의 한 대표자인 브루스 펑크43)가 아무리 선명하게 구분하려고 노력했다손 치더라도, 도착증적인 전이와 신경증적인 전이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분명한 기준은 없다.
마찬가지로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사디즘의 원리와 마조히즘의 원리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분명한 기준은 아직까지 마련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5) 줄리아 크리스테바,『정산병, 모친살해, 그리고 창조성 ; 멜라니 클라인』, 박선영 옮김, 아난케 , 2006, pp. 162-172.
36) 들뢰즈, 전게서, p. 13.
37) 참조, 조현수, 「마조히스트의 유머와 정신분석학의 전복; 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탈정신분석적 이해」, 『철학연구』 제 103 집 , 2013, pp. 159-160: 조현수는 들뢰즈의 철학을 참된 원인론으로 규정하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에 따르면, 사태 자체에로라는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 즉 선입견에 의한 왜곡 없이 증상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드러내는 것은 증상론(symptomatologie) 이라고 명명하며, 이는 예술의 소관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이러한 증상들이 발생하는 원인과 과정의 해명을 통해, 이 증상들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숨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은 ‘원인론'(eci이ogie)고 명명하며, 이는 철학의 소관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차원에서, 마조히즘에 대한 틀뢰즈의 새로운 개념은 마조허의 예술이 수행한 증상론의 도움을 받아 정신분석학의 개념이 낡고 ‘거짓된 원인론’임을 폭로하는 ‘참된 원인론’이라고 주장한다.
38) 에리히 프롬, 『인간은 파괴적 동물인가』, 진덕규 역, 전명, 1978. pp. 35-40‘
39) 참조, Konrad Lorenz, on Aggression, 1966.
40) 펼자는 이를 다음의 연구 과제로 삼고자 한다
41) 참조, Siompo띠os, V., and Goldsmith, J., Sadism Revisited, Ameri,ιin journal of Psycho/,때,v. 30(1ssue 4), 1976, 631-640
42) 참조, 칼 구스타프 융,「 인격과 전이 」,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솔, 2007, p, 353.
43) 참조, 브루스 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민음새 2002, pp. 208-212; 문장수,
「인간 범주에 대한 라캉의 구조적 정의에 대한 비판」,『철학논총』, 2013, Volume 71, p. 57.
참고문헌
노버스, 『라깡과 프로이드의 임상정신 분석 』, 김종주 옮김, 하나의학사, 2002
들뢰즈, 『매저키즘』, 이강훈 옮김, 인간사랑, 2007.
문장수, 「인간 범주에 대한 라캉의 구조적 정의에 대한 비판」, 『철학논총』, 2013,Volume 71, pp. 47 – 74
융,「언격과 전이」, 한국융연구원 C.G,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솔, 2007
조현수, 「마조히스트의 유머와 정신분석학의 전복; 마조히 즘에 대한 들뢰즈의 탈정신분석적 이해」, 『철학연구』 제 103 집, 2013. 157-188.
크리스테바, 『정신병, 모친살해, 그리고 창조성 멜라니 클라인』, 박선영 옮김, 아난케, 2006.
프로이트, 『문명속의 불만』, 김석회 옮김, 열린책들, 1997.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큰본 개념』, 윤희기·박찬부 옮검, 열린책틀, 2011.
프롬, 『인간은 파괴적 동물인가』, 진덕규 역, 전명, 1978.
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02.
-일부 생략 –
마조히스트의 유머와 정신분석학의 전복 : 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탈정신분석학적 이해
초록보기 밀린다팡하(Milindapanha)에서는 “붓다의 사리 공양에 관련된 사건들”의 약점을 지적한다. 딜레마 이론들은 서로 상충되는 요구가 있을 때 그것이 과연 해결 되어야 할 문제인가 혹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밀린다(Milinda)왕과 나가세나(Nagasena)가 대론을 시작할 때, 양자 사이에 정해진 대등한 입장에 따라 진리를 탐구하는 기본적 태도는 대론에서 일관되게 보이고 있고 인도와 그리스를 대표하는 두 사람에 의한 수준 높은 대론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비불교도들이 질문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이런 딜레마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상충되는 요구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먼저 구분하고 그에 따라 상이한 대응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불교도들에게 부족하다. 붓다의 열반은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으로 해석될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면서도 그 상황들은 사리 공양 및 숭배에 집중시킨다. 사리 공양의 의미는 미래 지향성과 함께 부인할 수 없는 심오 한 종교적 영감을 지녔다. 이런 의미 있는 주제들에서 “붓다의 사리 공양의 재정의”를 통한 대론들을 양도논법을 통해 알아본다. 이것은 사리 숭배의 역사적 의의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초록보기 안셀무스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 1권 16-18장에서 타락한 천사의 집합을 신실한 인간집합과 교체하므로, 공정한 비례적 할당에 의한 천국성원의 충원가능성을 논의하였다. 안셀무스의 천국성원구성논의는 완전수로 좌로도 우로도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고, 내려오는 만큼 올라가고 올라가는 만큼 내려오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 같다. 천사×육체=합리적존재×정신과 (천사/인간 )가 바로 그러한 산술적 추론식인데, 안셀무스는 (Φ ∧ Ψ¬) ∨ (¬Φ ∧ Ψ)) ⊇ Ψ *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합리적 존재자는 천사들 보다 같거나 많다’는 명제 논리적 해석을 갖는다. 본고는 헨리, 월튼, 우켈만, 킹 등이 다룬 방법론에 따라, 적절한 언어철학적 지시방법 과 인식논리학의 접근방법으로, 천사와 인간의 천국성원의 완전한 비례에서 논의되지 않은 ‘자만에 빠진 인간’을 포함한 ‘다른 천사’들의 천국성원 진입가능성을 위한 적극적 논의를 제시하였다. θ 집합체계와 Ψ 집합체계에서 어떤 것을 참이 되게끔 행하고,참이 되지 않게끔 행하도록 하는 두 종류 욕망을 에이전트에게 제공하였을 때, θ 체계에서 p ∧ ¬p를 하거나 p ∧ ¬p를 하지 않거나 한다면, p→q로 가는 Φ체계에 관련된 Ψ*체계에서 q*를 얻으므로, ‘다른 천사들’의 천국진입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초록보기 라이프니츠와 칸트에게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란 신앙과 관련된 주요 문제가 인간 이성으로 이해는 불가능할지라도 그것을 사유하는 것이 모순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프니츠와 칸트는 통속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 및 신에게서 충족이유율과 어긋나는 듯이 보이는 은총과 이성의 조화문제를 은총개념을 수정함으로써 해결한다. 즉 이들이 의미하는 은총이란 통속적인 개념처럼 무조건적인 신의 은총이 아니라 도덕법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갖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은총은 자유의지뿐만 아니라 충족이 유율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의 문제는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입장이 다르다. 라이프니츠는 기적과 이성의 조화문제를 법칙을 상위의 법칙과 자연법칙에 해당 하는 하위의 법칙으로 구별함으로써 해결한다. 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칙에 따르지 않고서는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기적이라고 보이는 것도 신의 입장에서는 상위의 법칙에 따르는 행위이며 단지 통상적인 의지결정의 결과인 하위의 법칙인 자연법칙과 관련해서만 기적이다. 칸트는 기적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현상계에서 기적을 인정하는 것은 그의 인식론과 어긋난다. 이것은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의해 흄의 경험론과 같이 현상계의 자연법칙의 원리를 인간의 오성에 의해 구성하는 것으로 설명할 뿐 신의 행위와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초록보기 신비주의는 현대철학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본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서 현대철학의 대표적 조류인 현상학과 신비주의와의 상관성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신비주의는 동서양의 대표적 종교 대다수에서 나타나고 전통적으로 독일철학을 중심으로 철학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서양현대철학에서 신비주의적인 전통은 외관상 그 명맥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적 체험을 중시여기는 현상학은 신비주의적 전통의 계승자로 여길만한 주된 특징들이 존재한다. 특히 후설의 현상학은 그의 순수의식론, 절대자론, 이성의 목적론, 사랑의 공동체 이론 등에서 전통적인 신비주의와의 강한 친화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현상학과 신비주의와의 친화성은 그러나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본성에 대한 양자의 공통된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신비주의는 유한자인 인간의 무한자인 절대자를 향한 자연스러운 열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런 한에서 현상학 또한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학은 단지 신비주의적요소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비주의가 지니는 지나친 폐쇄성과 비합리적 경향을 상호주관적인 보편적인 세계에 대한 논의를 통해 나름대로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 서 신비주의적 전통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록보기 이 논문의 목적은 9, 11 테러와 같은 전지구적 폭력사태에 대한 하버마스의 소통이론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데 있다. 하버마스는 테러리즘과 근본주의를 근대화의 병적인 속도에서 나온 외상의 결과로 규정하면서도,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하여 폭력, 테러, 근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하였다. 9·11 테러에 대한 하버마스의 견해는 현상적으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중적이고 모호한 두 가지 주장으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로 9·11 테러는 현실적인 목표와 정치적 내용이 없는 실패한 사건이며, 따라서 부시가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하여 ‘전쟁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규범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중대한 실수’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 사건은 적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 상태, 즉 ‘위험의 불확실성’이 극도로 증대된 상태에서 벌어진 점에서 ‘테러리즘의 본질’에 도달한 사건이고, 따라서 느슨하지만 미국이 반테러연합을 구성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조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9·11 테러가 성공한 사건이었고, 계몽적 이성으로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데 실패했다고 시인하지 않았다. 만일 전지구적 테러와 그 주된 동인이되는 근본주의가 왜곡된 ‘의사소통의 악순환’과 ‘상호불신의 악순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와 같은 시스템을 파괴하려는 전지구적 폭력과 테러는 정당화 주장을펼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전지구적 폭력으로서의 테러가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에 대한 반작용이라면, 하버마스가 전지구적 폭력을 ‘의사소통적 병리학’이라고 이해한 사실은 비판적으로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전지구적인 폭력역시 그 고유한 정치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서구의 국가권력 시스템과 화해할 길을 찾아야 한다. 지구적 폭력과 테러의 존재 사실에서 결국 서구 중심의 국가권력체제 속에 의사소통의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버마스는 칸트적인 의미에서 세계시민주의에 근거한, 즉 계몽주의 적 이념의 가치를 확고하게 인정하는 ‘보편적 공동체’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이상적인 합의조차도 칼 슈미트에게는 단지 동지 세력들의 이익주장에 불과하다. 결국 하버마스가 전지구적 폭력의 행사 주체에 관계없이 결단코 그것이 정당화되어서 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천명하지 못한 것은 그의 한계이며, 이로써 하버마스의 계몽은 여전히 ‘미완의 기획’이고, 따라서 그 기획은 단지 ‘영원한 미완’으로 머물러 있다.
초록보기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의 발생원인을 초자아의 과잉에서 찾는다. 마조히 즘을 특징짓는 죄책감과 속죄욕망이란, 자아의 성적 욕망을 억압되어야 할 죄로 보는 초자아의 강력한 도덕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 죄에 대한 벌로서 고통(매질)이 주어지는 것을 기꺼이 원하고 감수하며, 더 나아가, 이 고통 속에서 쾌락(속죄의쾌락)을 찾는 데서 ‘고통과 쾌락의 일치’라는 마조히즘 특유의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자아란 실은, 엄마에 대한 주체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아버지의 존재가 자아 속의 일부로 내면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성적 욕망을 질책하는(공격하는) 초자아의 도덕의식이란 실은, 자아의 성적 욕망이 원래 가지고 있던 사디즘적 공격성이 그것을 억압하는 아버지의 존재에 부딪쳐 고스란히 자아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마조히즘을 사디즘의 방향전환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즉 주체가 가진 성적 욕망의 사디즘적 공격성이 아버지의 존재에 부딪쳐 주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에 의해 마조히즘이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마조히즘의 진실은 초자아가 자아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가 초자아를 놀리고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조히즘의 발생에서 주도적인 작인(作人)의 역할을 하는 것은 초자아가 아니라 자아라는 것이다. 마조히즘의 발생에 대한 들뢰즈의 새로운 이해는, 마조히즘이란 결코 사디즘으로부터(즉 사디즘의 방향전환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디즘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하나(사디즘)로부터 다른 하나(마조히즘)에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성립되면 다른 하나는 결코 성립할 수 없게 되는 ‘상호 배척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일반적인 통념을 뒤엎는 들뢰즈의 이러한 새로운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살펴보려 하였다.
초록보기 기억이 현대인에게 핵심적인 관심사임을 지적한 아스만의 말대로, 우리 는 치유하기 위해, 책임지기 위해 혹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변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억에 호소한다. 기억은 어떻게 작동하고, 우리는 기억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기억에 대한 현대의 인상적인 사유로 우리는 들뢰즈와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을 떠올려볼 수 있다. 들뢰즈는 현재의 생산 조건으로서의 순수 기억을, 라캉은 기표의 연쇄로서의 기억을 말하는 것으로 우선 대별해볼 수가 있는데, 이는 실재와 상징적 인 것이라는 두 사유의 대립을 드러내며, 상징적인 것이 기표 특히 팔루스라는 기표와 오이디푸스라는 구조에 연결되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들뢰즈는 라캉의 정신분석이 모든 기억을 팔루스와 오이디푸스로 환원시킨다고 비판하고, 정신분석 진영에서는 들뢰즈의 기억이 상징적 분절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주의적 실재로 귀환한 것이 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는 들뢰즈의 기억에 대한 작업을 더듬어가면서 들뢰즈가 프로이트와 라캉을 사유의 동반자로 삼아 자신의 이론을 정립해 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의 없는 기표는 잠재적인 것과 공명하고, 비동등으로서의 무의식은 시간의 세 가지 종합에 비등하다. 프로이트의 환상에 대한 발견은 들뢰즈에게 기원의 해체, 사실주의의 극복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기로 여겨지고, 죽음 충동 역시 현재적 반복의 비인격적 조건으로 흡수된다. 반복의 한 국면인 전이 상황에 대한 들뢰즈의 양가적인 태도는 두 진영의 동반과 분리가 어느 지점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지점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두 진영의 첨예한 대립이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 기억에 대해 종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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