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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1~3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나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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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원어적 의미 – Daum 블로그
피스튜오(pisteuw) 이는 ‘맡기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의 신앙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너희 길을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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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4 믿음의 원어적 의미 Top Answer Update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믿음(πίστις)에 대한 묵상 : IBP 일점일획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원어 피스티스πίστις나 영어 faith와는 …
Source: aodaithanhmai.com.vn
Date Published: 9/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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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기초적 가르침
구원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온 사람들의 오랜 믿음의 여정 후, 하나님이시면서 성육신하여 … 이 구절의 의미를 밝혀줄 원어에 따라 이 단어들의 의미를 살펴 봅시다.
Source: www.shineinternational.org
Date Published: 1/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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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πίστις)에 대한 묵상 : IBP 일점일획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원어 피스티스πίστις나 영어 faith와는 거리가 먼, … 그렇다면 흔히 “믿음”으로 번역되는 피스티스πίστις의 의미는 무엇인가?
Source: ibp.or.kr
Date Published: 7/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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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 하늘씨앗
다음에 나열된 신앙 생활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 … ( 성경 원어에서는 에크 피스티스 에이스 피스티스 (믿음의 시작과 …
Source: heavenlyseeds.net
Date Published: 10/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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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백성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주관에 의하여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
Source: www.theology.ac.kr
Date Published: 7/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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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의미 – 기존글_백업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면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세워주심으로 …
Source: www.cross91.com
Date Published: 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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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 크리스찬 투데이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능력을 믿어야 한다. “성도”란 말의 성경적 의미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자”란 뜻이 아니라 “믿는 자 …
Source: www.christiantoday.us
Date Published: 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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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 – 뉴스앤조이
예수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변화를 아우구스티누스 … 그러나 원어 순서는 그렇지 않다. dikaios가 ho de 다음에 바로 나와서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2/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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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크리스천에게 믿음을 변호하거나 믿음을 위해 논쟁 …
이러한 명백한 성경적 가르침과 예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저서들이 하나님 …
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4/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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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믿음의 원어적 의미
- Author: 다윗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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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2. 5.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B-AaOL6Lmo
한우리 성서 놀이터
피스튜오(pisteuw)
이는 ‘맡기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의 신앙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 시 37:5)고
말함으로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권고했고,
잠언서에서도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잠 16:3)로
말함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
나아가서는 삶 자체를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결단적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페포이데시스(pepoiqhsi”)
이는 영어의 confidence에 해당하는 말로 ‘확신’, ‘신념’, ‘신뢰’를 뜻합니다.
페포이데시스라는 말은 성경에서 주고 ‘확신’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며(고후 3:4; 1:15),
우리 말로는 ‘믿음’으로 번역됩니다.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며 신뢰입니다(고후 3:4).
확신은 내적 결단이요, 신뢰는 이 결단의 외적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는 언제나 내적 결단과 외적 결단의 행동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피스티스(pisti”)
이는 ‘믿음’, ‘충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음은 곧 충성과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충성을 믿음과 같은 말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2장 22절의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충성’이 피스티스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내적 결단의 결과는 자연히 신실과 충성이라는 행동적 결단으로
외부에 나타나기 때문에 아예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고후 3:4,5)
기초적 가르침
현재 지금의 단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적합한 영적인 기초들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특별히 이런 기초들을 표면적 측면이 아니라 새로운 측면, 즉 깊은 차원으로 나누겠습니다.
함께 나누게 될 기초들은: 믿음, 기도, 깨어있음 그리고 하나됨 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성육신 절기의 금식 기간에 ‘믿음’에 대해서 나누는 것은 매우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이 신성한 성육신은 반대와 대적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으로 인해 나타난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차서 이 신성한 성육신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가지 참고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구절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오랜 시간동안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사람들의 예로 시므온 장로, 선지자 안나를 말씀드렸었습니다.
시므온는 아기 예수를 팔에 앉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2:29-30)
성경은 선지자 안나가 84년[1]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육신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38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2:38)
구원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온 사람들의 오랜 믿음의 여정 후, 하나님이시면서 성육신하여 나타나신 아기 예수의 이 장면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이후로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계시하셨고 이 구원의 약속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약속은 동정녀 마리아가 그녀의 태 안에 신성한 신비를 받을 때 까지 세대와 세대를 지나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지속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신성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 앞에 놓인 이런 믿음의 장면들과 긴 믿음의 여정들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
이 세대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의 믿음의 걸음을 계속 걷기 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와서 구속을 이루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수행 할 수 있는 역할이나 책임이 지금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실제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열방을 향해 복음이 선포될 필요가 여전히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위해서 특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하기 위해 세례요한과 여러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세례요한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막1:2)
이에 기초해서 다음의 주요 포인트에 따라 믿음에 대한 메세지를나누겠습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진실된 믿음의 특징들은 무엇인가? 현 세대 믿음의 사람들과 그들의 책임
1.믿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는 다양한 믿음의 종류, 또는 믿음의 측면을 신약에서 볼수 있습니다.
구원의 믿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성경에 따르면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눈을 뜨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구원에 이르게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믿음으로 걷기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walk by faith)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5:7)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에 들어온 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식하고 이해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 그리고 모든 족장들, 선지자, 거룩한 사람들처럼 믿음의 순종을 성취하고 완수하기 위해 매일 매일 믿음으로 걷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과 약속에 의지해서 믿음의 걸음을 걷는(믿고 믿음대로 사는) 것을 배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발견하실 때 이러한 목적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다 해도 그분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그분의 말씀과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는 이 믿음의 걸음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은 나중에 더 명확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믿음의 신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니”(히11:1)
이것은 매우 깊고 신비한 구절입니다.
다른 성경구절에서도 믿음은 신비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집사의 직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 [2] (mystery) 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3:9)
우리가 믿음의 진리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실제적 의미로는 믿음이 사실 ‘신비’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참고 성경 구절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니”
이 구절의 의미를 밝혀줄 원어에 따라 이 단어들의 의미를 살펴 봅시다.
특별히 이 두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A. ‘실상(substance)’ (바라는 것들의)
B. ‘증거(evidence)’ (보이지 않는 것들의)
A. 실상(Substance)
이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는 ‘실체(realisation)’, ‘확신(ascertainment), ‘확증(assurance)’ 입니다.
헬라어로는 : ‘하이포스타시스(hypostasis)’ 입니다.
떼어 사전(Thayer dictionary: 신약성서의 가장 잘 알려진 사전 중 하나)에 따르면, 하이포스타시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것을 고정시키기 위해 그 아래에 놓인 것, 건물이 세워지는 기초와 같은 것입니다. 이 의미는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어떤 것, 혹은 실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실체는 우리에게 자신감과 확신을 줍니다.
B. 증거(Evidence)
이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는 ‘증명,입증(proof)’입니다.
헬라원어로는 ‘ἔλεγχος’인데 엘-엥-크호스 라고 발음합니다.
떼어 사전에 따르면, 이 증명(proof)이라는 뜻에는 또한 ‘확신(conviction)’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 거죠?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경험될 수 있나요?
이 질문에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
믿는 자들은 믿음을 발휘해야 하는 어떤 특정한 문제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며칠,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무언가가 자신 안에 형성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실체(substance)입니다.’영적인 실체(spiritual substance)’ 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그 사람이 마음으로 느낄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영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훈련되기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믿는 자는 이 문제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먼저 확신하므로 그가 기도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자신 안에서 어떤 움직임과 신성한 에너지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이 신성한 에너지 안에는 실제로는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여 믿음의 눈으로 문제들을 보게 만드는 영적 통찰력(insight)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롬4:17) 분으로 믿었던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 로 표현한 것이죠.
이 문구를 깊이 생각해 보면, 모순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역설처럼 보입니다. ‘입증과 확증’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단어가 ‘보지 않는 것들’이라는 문구에 따라 나옵니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있을 수 있나요?
이것이 보이지 않는 차원에 있는 것을 보게하는 영적인 통찰력을 산출하는 믿음입니다.
훈련을 통해서 영적인 눈 혹은 영적인 통찰력이 강해집니다. 따라서 이 영적인 눈이 요청된 문제를 보지 못한다면 믿음(영적인 실체)이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중요한 것을 계시하시거나 혹은 실체와 통찰력, 증거와 확신으로 관 씌어진 기도를 완성해 가면서 계속 기도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가 정해진 때에 일어날 것을 알게 됩니다 – 악한 자의 대항이나 혹은 믿음의 대적의 결과로 어느 정도 지연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은 보이지 않는 영의 영역에서 이미 그것을 보았기 때무에 그 일이 확실히 일어날 것을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기억합시다.(그의 예언은 때때로 구약 성경에 대한 믿음의 예언이라고도 함):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3)
이 믿음의 신비, 이 특별한 믿음의 형태를 배운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목적들, 즉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믿음의 비전들이 이 믿음을 통하여 성취될 것입니다.
믿음의 마지막 유형: 성령님의 은사로서의 믿음
믿음의 이 마지막 유형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읽을 수 있는데 사도바울은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은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9)
이런 종류의 믿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양한 상황에서 그분의 지혜와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님의 특별한 선물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의 다음과 같은 예가 있습니다: 모카탐 산(Mokattam Mountain)이 움직임 – 콥틱 교회에서는 성탄절이 시작될 때 3일을 금식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맞는 믿음의 선물을 위해 기도하고 구합니다. 이 특별한 믿음의 선물을 통해 모카탐 산은 성자 시몬(Saint Simon, the tanner)의 기도와 믿음으로 움직였습니다. 이것은 10 세기 말 아브람함이 주교때 있었던 일입니다.
2. 두번째: 진실된 믿음의 특징들
가장 중요한 믿음의 특징들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명확하고 직접적인 성경적 진리를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지속적인 믿음의 행함이 너무나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영적인 걸음들은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시대를 이해하고 분별하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현재 우리의 때에 나타나는 믿음에 종류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결한 믿음
거짓된 믿음
믿음의 거부
순결한 믿음은 평강의 왕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삶의 경험 위에 세워집니다. 잠시 후에 이 순결한 믿음의 본질적인 중요한 특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거짓된 믿음은 세상의 영과 섞인 믿음입니다.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서 지속적인 조화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과 혼의 욕망과 욕정 그리고 믿는 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영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조화는 잘못된 것이며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6:14)
믿음의 거부는 한 사람이 믿음과 관련된 모든 것들, 심지어 인격이신 하나님, 그분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시작은 잘했지만 나중에 그들의 등을 돌리고 믿음을 완전히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순결한 믿음의 중요한 특징들 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역동적인 믿음
믿음의 시험들
믿음의 대적들
믿음의 담대함
역동적인 믿음
진실하고 살아있는 믿음은 역동적입니다. 많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 즉 피상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정적으로 변했버렸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런 정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영적 삶은 줄어들기 시작하고 멈추게 되며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를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살아있는 교제는 영적인 자극과 지속적인 새로움으로 가득합니다. – 어떤 불확실한 상황이 그 사람을 둘러 싼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동안에도 시편기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63:1-2)
이 역동적인 믿음은 두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앞을 향해 그리고 위를 향해 움직이게 합니다. 그 사람이 창조된 목적을 수행하고 완성하게 하기 위해서 그가 앞으로 전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날들의 중요함을 깨닫숩니다. 또한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기 위해 그 사람을 위를 향해 움직이게 합니다.
믿음의 시험들
이것은 역동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경험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정적인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역동적인 믿음은 테스트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험에는 이유들과 열매들이 있습니다.
원수는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믿는 자가 나아가는 모든 믿음의 새로운 단계 마다 대항해서 강렬하게 고소과 비난을 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믿음의 단계는 항상 새로운 기름 부음, 새로운 권위, 그리고 하나님과 천사들과의 교통의 새로운 차원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을 위해 이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 시험 가운데 굳게 서 있을때 원수의 고소와 정죄는 무효가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시험하는 동안 우리를 강하게 붙드십니다. 반면에, 시험 후에는 믿음이 승인됩니다. 믿음이 굳건해지고 그 일하심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하심이란 제가 위에서 언급한 기름부음, 권위, 교제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시험의 성경적 예들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아브라함의 시험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1-2)
우리 모두는 이 이야기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22:16-18)
시험에서 걸려 넘어져 다른 결과를 보인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들어가기를 원하신 약속의 땅을 정찰하라고 사람들을 보냈을 때 일입니다. 그들이 돌아 왔을 때,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였고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걸려서 회중이 불평하고 두려워하게 한 나쁜 보고를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고 약속의 땅에 들어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민수기 13 장과 14 장에서 읽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훈들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진리들의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책인 욥기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사밧의 이야기처럼, 때때로 하나님은 그분의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 테스트들을 허락하십니다.
사방에서 적들이 그에게 왔을때,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역대하20:12)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찾았고 여호사밧은 이렇게 말하며 주목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의 주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설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엄청난 전리품들을 취했습니다.(역대하20:20-30)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히스기아 왕의 시대에 앗시리아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들 때의 일에 대해서도 읽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그들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며 말했습니다: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이사야37:3). 이 말은 영적인 연약함과 준비가 부족한 상태를 내비치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했을 때, 주님은 그분의 천사를 보내어 하루만에 앗시라아 진영에 있는 185,000명을 전멸시키셨고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둘러싼 포위를 무너트리셨습니다.(참고:이사야 37:36-37)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시험은 인정, 정죄 혹은 영적 깨어남을 위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믿음의 대적들
이것은 참되고 순결한 믿음의 특징들 중 또 다른 측면입니다.
믿음의 비전과 관련된 대립들은 거의 불가피합니다. 원수는 믿음의 역사와 그 성취를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원수의 계획에 있어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기도를 회복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축하려는 일과 관련해 느헤미야가 직면했던 일들에 대해 읽습니다. 그가 일을 시작하자 마자 대적하는 일들도 시작되었습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모양이 있었습니다: 조롱, 겁먹게 함, 그리고 방해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느헤미야는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느6:3). 그리고 그들이 그를 두렵게해서 도망가게 만들려고 했을 때도 느헤미야는 말했습니다: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느6:11)
그는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한 손으로는 건축을 하고 한 손에는 무기를 들라고 독려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모든 일에는 영적인 전쟁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느4:17)
동시에 그는 끊임없는 기도하면 주님을 계속 신뢰했습니다.: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느6:9b)
그는 또한 ‘새벽부터 정오까지(느8: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도록 모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이 대적을 스가랴서 4 장의 말씀에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귀환했을 때에 믿음의 대적의 큰 그림을 봅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을 붙들었을때 위대한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 스가랴가 다음과 같이 말했음을 우리는 증언할 수 있습니다:
“큰 산아(대적하는 산)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오실 메시야)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를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4:7)
믿음의 저자가 인내와 그분 앞에 놓인 기쁨을 통해 승리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 ( 대적 ) 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12:2-3)
믿음의 담대함
이것은 지금 시대에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믿음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의 말로 우리를 상기시켜 십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 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3:12)
다음 사항들을 준수하면 이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태: 회개하는 겸손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원수를 이기셨습니다.
참고 인내함으로 고통을 감내함.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12:1)”
믿음 없는 말들을 피하고 실패감이나 좌절감에 빠지는 것을 피할 것 .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3. 세번째: 현 세대 믿음의 사람들과 그들의 책임
평범한 믿는 자에게 기대되는 믿음의 걸음과 자신의 세대를 향한 책임을 깨닫고 그 일원이 되기를 소망하는 믿는 사람에게 기대되는 믿음의 걸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과 의도의 진실성을 보시고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령님의 훈련을 통해 그 사람은 준비되고 믿음의 횃불을 들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기름부음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 시대의 역사의 얼굴을 바꿉니다.
우리는 우리의 날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목적들을 분별해야할 너무나 큰 필요가 있습니다. 가까운 것과 먼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시는 어떤 시간 이후에 오게 될 목적들 뿐만 아니라 즉각적인 목적들도 있습니다.
가까운, 혹은 즉각적인 목적들은 우리 세대와 그 안에 있는 악한 자의 계획, 영혼들의 상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 및 나라들의 상태를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먼 목적들, 혹은 우리가 준비해야 할 길인 주님의 재림과 관려된 하나님께서 아시는 어떤 시간 후의 아직 오지 않은 목적들 입니다 –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첫 초림 전에 했던 것 처럼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한편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역하는 지를 먼저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고후6:1). 주님 한 분만이 그런 상황들에서 일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다른 한편으로, 목적들을 알고 구체화한 후에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해야 할 방법들을 배워야합니다.
가장 중요한 방법들은 :
중보기도 :
중보기도는 책임을 가지고 마음에 짐을 지고 규칙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희생 :
희생은 물러서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악한 자의 대적과 고통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을 신뢰함에 확고부동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혼의 사랑과 그들을 섬기려는 소망에서도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4:5)
살아있는 모범 :
복음대로 살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선포하는 모델들과 모범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삶이 가능한 이유는 소망하고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초 위에 완전히 세워졌기 때문이며 절대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성경에서 읽습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6)
예언적 기름부으심이 있는 가르침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지고, 이해되어 지고, 혼에 뿌리 내려지게 해서 그들을 구원합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 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1:21)
맞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혼에 심어지고 뿌리내릴 때 묶임과 사단으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들은 어떨가요 ?
믿음의 사람들이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해 나누었으니 이제는 그들의 몇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몇가지 특징들
믿음의 사람의 마음 :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 된 마음입니다. 다른 것에 사로 잡히지 않은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분의 뜻 외에 다른 어떤 문제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찾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의 구별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순종하는 것에 기초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7-39)
하나님의 사람의 믿음
그는 주님을 완전하게 신뢰함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이 예배하고, 자신의 친구가 되신,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실 주님을 알기 때문에 그는 주님에 대한 완전히 신뢰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 (시138:8)
뿐만 아니라 약속을 분별하고 마음으로 약속을 붙잡는 방법도 아는 믿음입니다.
또한 시간을 분별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을 보는 법도 압니다.
그분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눅12:56)
따라서 믿음의 사람이 시간을 분별하고 사람들의 상태를 알때 그는 그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고 섬길지를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주인처럼 인내하고 유혹받습니다 .
그는 도전 가운데서도 겸손하게 인내하며 오래 참는 법을 배웁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처럼 굴욕, 멸시 또는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의 고난과 그분의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는 것임을 압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10)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겸손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내해야는지 알기 위해 때때로 그들의 고통 또는 그들의 죄 까지도 동참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회개로 이끌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위대한 구원을 발견하도록 이끕니다.
여기에는 매우 특별한 분별력과 인도하심이 요구됩니다.
이에 해당하는 몇가지 성격적 예들이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
그는 백성의 가증과 죄악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유대 법에 따르면 더럽혀진 빵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는 또한 실제로 고통스러운 육체적 제한 가운데 있도록, 심지어 그의 백성들의 상황 때문에 굶주림과 갈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에스겔서 4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그는 자신의 아내가 간음을 행했을때 큰 고통을 경험했고 아내를 용서하고 회복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상처받은 마음의 사랑의 신비를 배웠고 이 상처받은 사랑의 신비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몇 예들이 있습니다 :
사도들은 모두 복음을 위해 죽음의 지경까지 고통을 감내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음의 메세지를 그들의 시대에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에 직면했던 성인들의 삶에는 다른 예들을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적 성인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가 아리아 이단으로 부터 믿음을 보존하고 보호하는데 열심이였던 것 같이 그들에게 전해진 믿음을 보존했습니다.
자신들의 시대와 장소에서 역사의 얼굴을 바꾼 수없이 많은 동방의 성인들과 서방의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 거룩한 믿음의 횃불을 든 믿음의 사람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면, 지금:
우리는 우리 세대를 위해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선택하고 받아들입니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2:17b)”라고 주님에 대해 기록된것 처럼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삼키는 진정한 거룩한 열심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신뢰를 받고 보냄받기 위해 인내하고 있습니까?
이것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으로 남아 있으며, 말로가 아닌 확신으로 우리의 대답과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다음의 구절들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데전1:5)
+ 아 멘 +
[1] 원문은 그녀가 남편과 7년을 산후에 84년 동안 과부로 지냈다고 기록함She was of a great age, and had lived with a husband seven years from her virginity; and this woman was a widow of about eighty-four years, who did not depart from the temple, but served God with fastings and prayers night and day.(Luke2:36~37 NJKV)
[2] 헬라원어의 의미는 비밀이 아니라 신비입니다.
2.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의미
구약의 경우
구약에서 ‘믿음’으로 사용된 된 단어가 히브리어로 ‘아만'(aman)이란 동사이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아멘’이란 말이 나온 것 기억하는가? 아멘이 바로 이 단어에서 나왔다.
‘아만’은 본래 뜻이 ‘굳게 하다, 흔들리지 않게 견고하게 하다’는 뜻이다.
영어로 confirm이란 말로 주로 번역된다. 그래서 이 ‘confirm’ ’굳게 한다’는 동사, 우리말로는 그것을 사역형동사라고 한다. 사역형, 뭘 ‘누구한테 맡겨서 그렇게 하게 한다’는 이 단어를 ‘아만’이라는 사역형동사로 바꾸어 놓으면 그것을 거의 대부분이 우리말에 ‘믿는다’ 라는 말로 번역을 했다.
최초로 구약에 ‘아만’의 사역형 동사가 처음 나오는 곳이 창세기 15장 6절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하신 저 유명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성경 절인데 거기 그런 표현이 실제로 사용되었다. 이 ‘아만’이란 동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믿는다’라고 번역했을 때, 그 뜻은 자기스스로가 설수 없기 때문에, 굳게 설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서있어야 하는데 자꾸 넘어지기 때문에, 누구의 손에 맡겨서 결과적으로 그 손이 와서 ‘굳게 세워준다. 견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자기 스스로 굳게 서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맡겨서 굳게 서게 한다’ 는 그 뜻이 ‘믿는다’라는 것이다. 이 ‘아만’이란 동사에서 능동형 소위 기본형으로 쓰는 단어로는 ‘믿는다’라고 번역된 말이 없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연구하는 이 내용을 잘 이해하셔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말로는 ‘내가 믿는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히브리말에는 그런 말이 없다. ‘내가 스스로 혹은 내 힘으로 무엇을 믿는다’ 그런 개념이 없다.
다시 복습한다. ‘아만’은 ‘맡겨서 굳게 한다, 견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견고하게 한다, 굳게 선다’ 그런 말이 아만이란 동사에 쓰인 일이 없다.
그러니깐 우리가 ‘믿는다’라는 말을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한 말이다. 정말로 중요한 얘기이다. 이것을 모르면 진리에서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은 여기서부터 샘의 근원이 달라지면서 딴 샘이 나온다. 딴 샘이 생기는 것이며 전혀 다른 물이 나오는 다른 샘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
역대하 20장 20절에 이 단어가 사용된 예를 함께 찾아보겠다.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신뢰하라’는 말씀을 주목하라. 이 말은 ‘아만’이라는 동사에 사역형동사이다. 그 다음을 보자.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여기 ‘견고히 서리라’는 말이 ‘아만’의 수동형 동사이다. 시키는 것은 사역형이다. ‘빨간 물속에 옷을 집어 넣었더니 그 빨간 물이 옷을 빨갛게 만들어서 옷이 빨갛게 되어 진다’는 이 예문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수동형 동사이다.
다시 이 말씀을 잘 보자. 똑같은 ‘아만’이란 동사인데 앞에 것은 사역형 동사이고 뒤에 것은 수동형 동사이다. ‘견고히 서리라’ 이 말은 자기가 견고하게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맡겨서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해주셔서, 내가 견고하게 서게 되어 진다는 수동형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 혼자는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다. 자꾸 넘어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그러면 결과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내가 견고하게 서 지는 것이다. 그것이 이 ‘아만’이란 동사의 두 가지 모습이다.
그런 예들이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 하나만 더 보자. 이사야 7장 9절 끝에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그리고 끝에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여기서 ‘믿지 아니하면’은 ‘아만’의 사역형 동사이다.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에서 ‘서다’ ‘정확하게 굳게 세워진다’ 그것은 아만의 수동형 동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면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세워주심으로 세워진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니까 자기 혼자는 넘어진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견고하게 세워진다.
사단의 거짓진리를 조심하라
‘믿음’에 대해서 개념정리를 잘 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가 6천년동안 우리인간에게 뭐라고 말했는가하면 ‘네가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이룩하라. 신앙이든지 무엇이든지’다 그렇게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아주 익숙해 있다. 우리가 늘 하는 이야기 있지않은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말이 어떤 면에선 진리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혀 진리가 아니고 진리의 반대이다. 이 개념이 서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상을 마귀가 계속 주입시켜 왔다. 실제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얻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이 땅에서 사다리를 놓아가지고 하늘 끝까지 사람이 올라가서 우주의 중심까지에 닿는 것이 가능한가? 영원히 해도 불가능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다리를 내려가지고 땅에 닿게 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야곱의 사닥다리를 기억하는가?
사닥다리를 누가 내리는가? 하나님께서 사닥다리를 내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다리를 놓아 가지고 달나라까지 가겠는가? 태양 끝까지 가겠는가? 우주의 끝을 어떻게 가겠는가? 그것은 불가능 하다.
그래서 사단은 끊임없이 안 되는 일을 시킨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게 하는 것이 사단이 하는 방법이다.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게 하고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사단의 술책이다.
신약의 경우
신약성경에는 ‘믿음’을 ‘피스튜오'(pisteuo)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가 번역된 것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데 번역된 것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먼저 요한복음 2장 23절 24절에 “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23절의 ‘믿었으나’ 는 헬라어로 ‘피스튜오’라는 동사이다.
24절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거기 ‘의탁지’라는 단어도 역시 피스튜오라는 동사이다. 23절에는 ‘믿었다’라고 번역했고, 24절로 와서 ‘의탁’즉 ‘맡기다’란 말로 번역했다. 본래 ‘믿는다’는 말이 가진 의미가 바로 ‘맡긴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굳은 믿음
좀 더 확실하게 번역한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16장 11절에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 기록 되어 있는데 여기 ‘맡기겠느냐’ 이 단어가 ‘피스튜오’이다. 여기는 아주 정확하게 우리말로 ‘맡긴다’라고 번역 되었다. 그러니까 이 ‘믿는다’는 동사의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는 ‘맡긴다’이다. 자기 스스로 설수 없기 때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피스튜오’가 수동태로 쓰인 한 예를 찾아보면,
로마서 3장 1절-2절에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 ‘맡았다’는 말이
‘피스티오’의 수동태로 되어있다. 우리말로는 ‘맡았음’이라고 되어있다. 마치 유대인들이 성경을 자기들이 떠 맡았다, 끌어 앉았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맡겨졌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맡겨졌다’가 본래 뜻이다.
그래서 ‘피스튜오’라는 동사나 ‘아만’이란 동사가 구약이나 신약에 공히 ‘맡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게 성경의 원래 뜻이다. 여기서 약간의 말의 형태가 변형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바뀐 일이 없다.
정리하면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셨다 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믿는다’ 라고 표현 할 때는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그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적으로 머리로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생각과 존재를 거기다가 ‘맡긴다’가 본래 뜻이다. ‘믿음’의 주체는 근원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해주시도록 나를 ‘맡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스스로 ‘믿는다(굳게선다)’ 이런 말은 아예 없다. 이게 중요한 진리이다.
‘믿음’ 곧 맡기는 것에 대한 실생활에서의 예
어떤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에게 결혼을 앞둔 딸이 있었다. 그 딸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어떤 청년과 결혼을 목표로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남자 청년이 사위 감으로 영 못 마땅했다. 그래서 딸에게 교제를 중단할 것을 종용했는데 그 딸의 입장은 어머니와 전연 달랐다. 너무나 그 남자 청년이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에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며 계속 교제를 했다. 시간이 흘러도 중단하기는커녕 계속하니까 어머니는 딸의 장래가 불안했고 그만큼 딸을 압박했다. 딸도 양보할 수가 없다보니 모녀 사이가 갈등관계로 변해 갔다. 드디어는 어머니도 딸도 양보할 수 없는 상태까지 되자 감정싸움이 심각하게 되어 이 어머니가 이럴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연락을 했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 ‘그 남자 청년과 딸이 결혼하면 행복할 것인지, 불행할 것인지 하나님보다 어머니가 더 잘 알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니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보다 미래를 더 잘 알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딸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습니까?’ ‘딸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불가능 하다’고 했다. 그러면 더 이상 그 교제를 참견하지 마시고 그 결혼문제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보라고 조언했다.
하나님께 어떻게 맡기는지 가르쳐달라고 해서 기도로 맡기라고 하며 기도할 내용 ‘아버지 저는 그들의 이후의 미래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대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사이좋던 딸과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제 생각을 버리고, 제가 그들을 헤어지게 하려고 했던 생각과 노력을 버리고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하신 약속의 말씀 속에 들어가서 그 약속의 말씀 속에 계신 아버지 발 앞에 저의 이 염려와 문제를 내려놓고 아버지께 맡기겠사오니 그 교제가 아버지의 뜻이면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아버지 뜻이 아니면 헤어지게 해 주옵소서! 저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이 문제를 맡아 주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시간표대로, 아버지의 방법대로 해결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 보라고 했다.
1주일 뒤에 다시 연락이 왔는데, 그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불안하고 그 남자 청년을 보면 웬지 밉고, 보기 싫고, 딸에게는 계속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 되느냐고 질문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한 그러한 상태는 아직은 맡기지 않은 증거이고, 맡겨지면 하나님이 견고케 하시므로 마음에 평강을 주신다고 하면서
예레미야 29장 13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는 말씀대로 전심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할 뿐 아니라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믿고 맡길 수 있도록, 견고히 서도록, 믿음 달라고 다시 기도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
다시 1주일 정도 지났는데 연락이 와서는 ‘이제는 마음에 평강이 있고, 딸에게도 잔소리가 나오지 않고 그 남자 청년을 봐도 미운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그런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견고케 해 주신 상태인 믿음 곧 맡기는 것이라고 말해주며 이제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문제를 처리하시는지 그때까지 기다려 보시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마귀는 어떤 문제든 염려든 죄든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게 방해 할 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맡긴 일에 대해서 반드시 시험을 하되 그 문제의 해결이 지체될 때 또 다시 염려하게 하여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시험을 한다고 조언했고 그리하여 맡기는 것 곧 믿음을 견고케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이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너무나 중요한 일 이었으므로 이 어머니는 주의하고 계속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고
약 3개월 이후에 연락이 왔는데 딸이 그 남자 청년과 헤어졌다고 하며 너무 기뻐하고 감격해 했다.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너무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
‘믿음’은 마음으로나 생각에서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제로 행동으로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맡겨서 하나님이 견고케 해 주셔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우리가 맡기게 되고 더욱 믿음을 받고 더욱 더 많이 맡기게 되어 “믿음에서 믿음으로”성장하는 것이다.
동의,인정,아멘,믿음,구약,신약,사닥다리,구원,불가능,결혼문제,인정,약속의 말씀
성경구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
믿음은 무엇이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그것은 행함을 배제하는가. 대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한 개인의 법정주의적 신분 변화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한 개인이 법정에서 어떻게 의롭다 하는 신분을 획득하는가 문제로 본다. 예수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변화를 아우구스티누스는 imparted righteousness(의를 나눠 줌)으로, 루터는 imputed righteousness(의롭다고 간주함)으로 불렀다. 두 경우 모두 개인의 의로움을 한순간에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로 본 것이다. 과연 바울이 이러한 개념의 개인의 의를 강조했을까.
New International Version 1984년판에서 위와 같은 개인적 의를 강조하기 위해 로마서 3장 22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한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의 신실함”으로 이 땅에 나타났고 그 의는 모든 신자의 동참으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기치는 “오직 믿음으로”였다. 그는 야고보서를 싫어하였다. 그 이유는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을 읽으며 개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하는 진리를 찾았다고 한다.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하여 (혹은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 나타났다. 이는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살 것이라 함과 같다.”(필자 번역)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살 것”이라는 말은 하박국 2장 4절에서 왔으며 히브리어 텍스트에서는 “그의 믿음으로”(의로운 자의 믿음) 살 것이라 했지만, 바울은 그냥 “믿음”이라고 했고, 소위 70인역(헬라어 번역서)에서는 “나의 믿음으로”(하나님의 믿음) 살 것이라 했다.
이러한 번역의 차이와, 바울이 왜 그냥 믿음으로만 했는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다만, 위의 어떤 텍스트이든 “믿음”은 “삶”을 수식하고 있다. 즉, 의롭다고 하는 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냥 믿음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하박국 부분을 다르게 번역하며 “믿음으로 의로운 자는 살 것이다”로 하였다. 이 번역은 매우 어색하고 문맥상 맞지 않다.
로마서 1장 17절의 헬라어는 이렇다. ho de dikaios ek pisteos zesetai. 이 헬라어의 번역은 “의로은 자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가 자연스럽다. 루터의 번역이 맞으려면 헬라어 어순이 달라야 한다. 즉, ho de ek pisteos dikaios zesetai으로 되어야 한다. 만약 이 이 어순으로 되었다면 즉, ek pisteos가 ho de 다음에 나오면, 루터의 번역이 맞다. 그러나 원어 순서는 그렇지 않다. dikaios가 ho de 다음에 바로 나와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연스런 번역은 믿음이 삶을 수식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며, 오늘날 대부분 영어 성서에서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도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며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지식을 받아들인다거나, 한순간의 고백을 지칭하지 않는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고, 신뢰했기에 한평생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의 신뢰를 지켜 나갔다. 그가 결코 순탄한 삶을 살지 않았고, 때로는 용감하였으며 때로는 약하고 비겁한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단순한 지식이나 일회적인 사건에 있지 않다. 바울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믿음에 연결하며 의롭다고 하는 자는 믿음에 의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믿음은 신뢰이며 충성이다.
바울에게서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뜻대로 사는 것이며, 또한 그분의 뜻을 이 땅에 펼친 그의 아들 예수의 신실함에 동참하는 것이다. 믿음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충성하다”)나 형용사(“신실하다”)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른다고 할 때, 그 근거는 무엇인가. 구약에서 단연히 하나님은 의롭다(히브리어: tsadiq, tsedaka). 의롭다는 말은 그분의 성품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행한 옳은 일이다. 절망의 인간에게 희망을 주며, 불의의 사회에 공의와 정의를 세우며, 억울한 자를 풀어 주며, 억압당하고 굶주린 자에게 해방을 주며, 현세의 고난에 떠는 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그런 행위이다. 구약 선지자들은 이러한 일에 헌신을 하고 하늘의 뜻을 전달하고 지도자를 꾸짖고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하였다.
구약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가 그분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 땅에 실현하였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며, 그것이 로마서 3장 22절에 나온다. 여기에 그 유명한 pistis christou 구절이 나타난다. 이것을 “예수의 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예수를 믿음”보다 더 타당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의”의 실현을 위하여 온몸과 마음을 바친 것이며 죽기까지 그 뜻에 따랐다. 즉, 죽음을 불사하는 그의 신실한 삶, 곧 행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나게 만든 것이다.
번역상 “예수를 믿음”도 틀린 것이 아니지만 바울이 어떤 의미를 더 강조하였을 것인가는 우리가 생각하고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의 신실함보다는 우리의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뚜렷하다(필자가 아는 한, 영어 성경의 Common English Bible을 제외하고).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그분의 신실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수를 주술적 대상으로만 여기고 그분의 삶의 실체와 목적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더 강력한 “신”으로 모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 신자의 믿음 혹은 충성은 어디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로마서 3장 22절의 끝부분에 신자의 믿음이 나온다. 로마서 3장 22절을 필자가 번역하면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나타난바 이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다.”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난다고 하고 있다. 이러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는 바울은 왜 더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문구를 쓸 수 있는데 굳이 오해할 만한 pistis christou(소유격, genitive case)를 썼을까 하는 것이다. 즉, pistis en christo라는 표현을 쓰면 누가 봐도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이해한다. En은 전치사로 영어의 “in”과 같다. 둘째로 바울이 pistis christou를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의도했다면 굳이 마지막 부분,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불필요한 반복이다.
로마서 3장 22절에서 바울의 핵심 포인트는 세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우리 개인의 의가 아니라)가 나타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나타났다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동일하게 실현될 것이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필자가 쓴 책에서 밝힌 바 있다(A Theological Introduction to Paul’s Letter; 한국어 번역: <바울의 삼중 신학>).
그러면 믿음과 의와는 어떤 관계가 있나. 즉,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는 “우리는 이제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가 아니라 pistis christou(예수의 신실함 혹은 예수를 믿음)로 의롭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 다시 pistis christou가 나타나는데, 대부분 예수를 믿음(faith in Christ)으로 번역하나 예수의 신실함(Jesus’ faithfulness)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며 의롭다는 개념을 앞에서 본 법정주의적 신분의 변화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데 훨씬 더 좋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헬라어 동사 dikaioo에서 왔으며 이것은 관계적 용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선다는 뜻이며 의를 따라 사는 삶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적 믿음에 동참함으로 가능하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행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신실함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3장 26절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신실함을 공유하는 자를 의롭다 할 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번역이다. 여기서도 pistis christou가 나타난다. 이를 예수의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
이 글을 맺으며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지식이나 단순히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충성이며, 동시에 예수의 신실함을 따르는 그의 종, 바로 그리스도 같은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의가 온 땅에 충만하게 함이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곧 행함이며 야고보서와 다르지 않다. 야고보 교회에서 바울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말하길, 믿음만 있으면 되지 행함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야고보 저자는 분명히 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애초부터 그런 믿음은 없다. 바울의 설교를 듣거나 그의 편지를 읽고 오해한 자들이 그가 말하는 믿음(pistis)을 잘못 해석하여 행함을 분리한 것이다.
바울은 결코 믿음/행함의 이분법을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로마서 3장 31절에서 반문한다. 믿음이 율법을 폐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답한다. 믿음은 아브라함 때부터 있었으며, 그 이후 항상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이었다. 율법은 믿음으로 해석되고 행해져야 하며, 모든 행동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충성을 말한다.
한국교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믿음”과 “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이를 통하여 한국 사회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길 희망해 본다. 바울의 관심은 어떻게 한 개인이 의롭게 되는가가 아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가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올바르게 유지하느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사는 삶이며, 이는 정의와 사랑의 관계이다.
김영석 / 버지니아유니언대학교 신약학 교수
성경은 크리스천에게 믿음을 변호하거나 믿음을 위해 논쟁하라고 말씀하나요?
질문
성경은 크리스천에게 믿음을 변호하거나 믿음을 위해 논쟁하라고 말씀하나요?
답변
변증론 (크리스천 믿음에 대한 답변)을 촉구하는 대표적인 구절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해]”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베드로전서 3:15입니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믿는 것을 왜 믿는지, 그 이유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킬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5). 바울은 자신이 전한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사실, 믿음을 지키는 것은 바울의 일상적 활동이었습니다 (빌립보서 1:7). 바울은 같은 구절에서 (16절) 변증을 자신의 임무 중 하나로 언급합니다. 바울은 또한 디도서 1:9에서 변증을 교회 지도력의 필요조건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도였던 유다는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3절)라고 썼습니다.사도들은 이러한 개념들을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바로 주님으로부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당신께서 제공하신 증거로 인해 우리가 당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 자체로서 변증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2:23, 10:25, 10:38, 14:29). 사실 전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기 원하시는 것을 확증하는 거룩한 기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출애굽기 4:1-8, 열왕기상 18:36-39, 사도행전 2:22-43, 히브리서 2:3-4, 고린도후서 12:12). 사람들은 당연히 증거 없이 무언가를 믿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성적으로 살 것을 기대하실 때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노먼 가이슬러 (Norman Geisler)가 말하듯, “이것은 믿음을 위한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뛰어오르기 보다, 증거에 비추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기 원하십니다”.이러한 명백한 성경적 가르침과 예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저서들이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누군가 이에 대답하는 즉시, 그는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이성이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진술은 그 자체로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인” 진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 당신을 설득하여 기독교로 들어오게 할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설득하여 벗어나게 할 수도 있다”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직접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하거나 거부해야 하는 기준 (부활)을 제시하지 않았던가요? 부정적인 대답이 경건함으로 오인된 것일 뿐입니다.언급된 어떤 의견도 성령의 영향을 받지 않은 변증 그 자체가 누군가를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거짓 딜레마를 만듭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령 vs. 논리” 대결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성령이 반드시 누군가를 믿음의 단계까지 인도하셔야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성취하는가는 논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 사람들에게 시험을 사용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감정적 경험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성을 통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그 어떤 수단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최대한 더 많은 장소에서 변증을 사용하도록 허락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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