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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간호사이며 통계학자 ‘나이팅게일’ [한국간호과학회 50 …

위대한 간호사이며 통계학자 ‘나이팅게일’ [한국간호과학회 50주년 학술대회] 영국왕립통계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며 미국통계학회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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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njob.or.kr

Date Published: 6/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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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든 통계학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수학동아 – 폴리매스

나이팅게일은 영국군 보건환경에 대해 800쪽 분량의 통계보고서를 썼습니다. 그는 단순히 숫자만 나열된 자료는 한눈에 보기 어려울 거라 생각해 ‘장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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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olymath.co.kr

Date Published: 4/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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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영어: Florence Nightingale, OM, DStJ,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은 영국의 간호사, 작가, 통계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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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5/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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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코로나19 수칙, 원조는 나이팅게일?! – 이웃집과학자

책 <수학의 쓸모>에 따르면 나이팅게일은 사실 ‘열정적인 통계학자’라고 하는데요.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얻은 의료 통계를 바탕으로 그래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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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stronomer.rocks

Date Published: 3/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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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4.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epGEm1y38Jo

나이팅게일, ‘통계의 선구자’가 되다

지난해 라오스 통계청장을 비롯한 통계청 간부들에게 국가통계에 관해 강의한 적이 있다. 통계의 중요성을 설명할 때는 통계의 부실이나 이해 부족으로 정책 실패를 가져온 국내외 사례를 소개했다. 이때 한 사람이 “부실통계에 따른 실패 사례는 많이 소개하면서, 왜 성공사례는 소개하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내 대답은 “통계는 국가의 기본정보여서 나쁜 결과가 초래되면 비난받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누구나 정책이 잘된 덕분이라고 하지 통계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교통신호등이 고장 나서 교통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모두 교통신호 탓을 하지만,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교통신호등을 칭찬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통계에 따른 실패담은 많지만, 성공담은 찾기 어렵다.

나이팅게일, 사망자 병상 환경을 통계로 정리해 원인 규명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은 영국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 반대 속에서도 간호사가 되었다.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봉사에 헌신하기로 했고 곧 간호사의 길을 택했다.

유럽 여러 국가에서 간호학을 체계적으로 배워 거의 무보수로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했고, 간호사 교육기관과 여성전문병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활동으로 나이팅게일은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이미 영국에서 사회봉사활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명성을 쌓았다.

1854년 크림전쟁(Crimean War)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나폴레옹 이후 유럽국가 간에 벌어진 최초 전쟁이다. 프랑스‧영국‧오스만터키‧사르데냐 네 동맹국과 러시아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도나우강과 크림반도, 캄차카 반도에까지 이른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는데 대량살상형 근대전쟁의 시작으로 일컬어진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더 타임스》 기자가 야전병원에 입원해있는 부상병들의 참혹한 실태를 취재해 보도했다. 영국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고, 나이팅게일도 이 기사를 보고 종군을 생각하던 참에 시드니 하버드 전쟁장관이 나이팅게일에게 간호부대를 이끌고 종군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나이팅게일은 24명 수녀와 14명 직업간호사 등 38명을 이끌고 후방기지에 있는 야전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의 상태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위생이 엉망이었고 병상이 변소나 시궁창 옆에 놓여있기도 했으며, 청소는 전혀 안 돼 있었다. 전장에서 죽는 사람보다 병원에서 죽는 사람이 몇 배나 더 많은 실정이었다. 입원은 곧 죽음이라는 공포가 병사들 사이에 퍼졌다. 그런데도 이때는 세균에 관한 지식이 없어 부상병들이 병원에서 세균에 감염돼 죽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원인 모르는 죽음은 더 공포스러운 법이다.

나이팅게일은 사망자에 관한 기록을 상세히 수집해 정리했다. 사망자의 병상이 있던 위치, 병상의 주위 환경, 사망자에게 제공되는 음료수의 수원 등을 꼼꼼히 정리해 이를 매우 정교한 통계표로 정리했다. 이를 통해 나이팅게일은 화장실, 시궁창 근처 등 위생 상태가 불량한 곳에 병상이 있거나 오염된 물을 마신 부상병들의 사망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망 원인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나이팅게일은 군 지휘부의 반대와 무관심 속에서도 변소나 시궁창 청소, 오염원과 병상의 격리 등에 힘을 기울였고, 부상병에게 제공되는 음료수와 음식물도 위생에 신경을 썼다. 그 결과 부상병 사망률은 현저히 낮아졌다. 한때 45%에 이르던 부상자 사망률이 5%로 낮아졌다. 이때 나이팅게일이 작성한 통계표는 아직도 남아있는데, 지금 시각으로도 매우 훌륭한 통계표로 평가되고 있다. 유럽에서도 아직 통계학의 틀이 잡히기 전이었는데, 나이팅게일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통계표를 만들고 그것을 분석해 문제의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크림전쟁에서 쌓은 나이팅게일의 활약을 보고 사람들은 그녀를 ‘크림의 천사’라고 불렀다. 어떤 이들은 ‘등불을 든 귀부인’, ‘빛의 귀부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간호사를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게 된 것은 나이팅게일이 야전병원의 위생을 위해 간호사들에게 흰옷을 입도록 한 데서 비롯됐다. 그렇지만 정작 나이팅게일 본인은 “천사란 아름다운 꽃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고뇌하는 사람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천사라고 찬양하는 여론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나이팅게일은 국민 영웅이 됐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스미스(Smith)란 가명을 사용해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귀국했다. 이후 나이팅게일은 전쟁 중 야전병원에서 수집한 여러 자료를 활용해 수많은 통계를 작성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보건 제도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때문에 나이팅게일은 영국에서 간호사보다 통계학 선구자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나이팅게일 보고서는 영국의 보건 제도뿐 아니라 전체 육군의 조직 개혁으로 연결됐다. 21세기 들어 OECD 국가 등 선진국들은 국가정책 수립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국가정책 수립에서 증거를 토대로 할 것, 즉 ‘증거 기반 정책 수립’(evidence based policy making)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나이팅게일은 실로 ‘증거 기반 정책 수립’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이런 공로로 나이팅게일은 영국왕립통계학회의 최초 여성회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미국 통계학회 명예 회원으로도 선출됐다.

나이팅게일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영국 정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나이팅게일을 영웅으로 치켜세웠기에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높아졌다. 어떤 이들은 나이팅게일을 영국의 ‘광고탑’이라고 했다. 나이팅게일 본인은 이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으며, 유명인으로서 떠받들어 지는 것을 싫어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봉사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녀는 오직 희생과 헌신에 의한 봉사가 진정된 봉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전통은 테레사 수녀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선견지명

나이팅게일이 스스로 통계를 만들어 이를 토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이끌어 냈다면 미국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기존 통계와 경제적 식견을 통해 문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적절한 해답을 제시했다. 프랭클린은 미국 독립 영웅의 한 사람이면서 과학자, 저술가로서 많은 활약을 했다.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주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식민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영국 의회에 파견돼 15년 동안 신대륙의 이익을 위해 활약했다.

중부 유럽의 패권 장악을 둘러싸고 벌어진 7년 전쟁(1756~1763)은 해외 식민지 쟁탈전과 겹치면서 주 무대인 프로이센 지방뿐 아니라 유럽은 물론 인도, 아프리카, 카리브제도, 남아메리카까지 확대된 대규모 전쟁이었다. 여러 국가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이합집산했지만, 주인공은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이 7년 전쟁에 승리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재편 교섭에 들어갔는데 칼자루는 승전국인 영국이 쥐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재배분 도마 위에 오른 지역은 캐나다와 과들루프(Guadeloupe)였다. 과들루프는 카리브해의 서인도 제도에 속한 섬으로 면적은 1,600㎢로 한반도의 1/100에도 못 미치는 작은 섬이다. 영국은 캐나다와 과들루프,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권리를 갖게 됐다.

지금 사람들에게 “캐나다를 가질래, 과들루프를 가질래”라고 묻는다면 아마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한반도 땅의 50배가 넘는 캐나다와 1/100도 안 되는 과들루프의 가치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당시는 달랐다. 과들루프는 온갖 산물이 수확되는 풍요로운 땅이었고, 캐나다는 눈과 얼음으로 덮인 불모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으로 많은 영국인들이 과들루프 차지를 지지했고, 정치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랭클린은 달랐다. 그는 뒤에 ‘캐나다 팸플릿’으로 알려진 「식민지에 관한 영국의 이익과 캐나다 및 과들루프」라는 보고서를 출판했는데, 그는 이 보고서에서 영국은 캐나다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를 프랭클린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메리카와 같이 경제성장이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서는 인구는 20~25년마다 2배로 늘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인구, 출생, 사망, 결혼 등에 관한 종합적인 통계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된다. 인구가 이렇게 늘어난다면 더 많은 땅이 필요하다. 그는 앞으로 영국인의 압도적 다수가 대서양의 이쪽(아메리카 대륙)에서 살게 되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고 예견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제한된 상태에서 인구의 자연증가가 이루어지면 인구밀도는 급격히 늘어난다. 이는 토지가격 상승과 임금하락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메리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1차 산업, 즉 농업이나 목축업보다는 생산성이 높은 제조업으로 방향을 돌리지 않을 수 없고, 그럴 경우 아메리카인들은 소비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생산자가 되어 영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즉 아메리카 대륙은 영국의 시장이 아니라 영국의 경쟁자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캐나다를 병합하는 것이 영국에게 명백히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영국이 과들루프 대신 캐나다를 선택한 것이 전적으로 프랭클린의 주장에 따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영국이 그런 선택을 한 데는 프랭클린의 과학적 분석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역사가들은 받아들인다.

원문: 단비뉴스 / 필자: 이재형 박사

참고

통계가 사람을 치유하다

백의 천사 또는 등불을 든 여인이라 불리며 간호사의 모범으로 알려진 나이팅게일은 사실 뛰어난 통계학자이다. 현재 전 세계의 병원은 나이팅게일이 제시한 방법으로 지어진다. 통계학자로서 의료 체계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친 군인의 사망자 수와 병균에 감염된 환자 수를 비교 분석했다. 전쟁 중 야전병원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병상의 적절한 간격을 계산했으며 위생개념의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1858년 나이팅게일은 그 공로를 인정받고 여성 최초로 영국 왕립 통계학회 회원으로 선출된다.

통계학자로서 나이팅게일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1853년 러시아와 터키는 크림반도에서 충돌했다. 1854년 영국 정부는 터키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지역에 간호사들을 파견했다. 그때 나이팅게일은 영국 간호 사단을 지휘하는 간호장교였다. 야전병원의 상황을 본 나이팅게일은 충격에 빠졌다. 그녀는 코를 움켜쥐며 군의관에게 말했다.

“아니 이게 병원인지 화장실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입니다.”

병원의 위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침대 시트에는 제때 갈지 못해 고름과 핏물이 뒤섞여 악취가 진동했다. 썼던 붕대는 버리지 않고 돌려썼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환자가 유입된 탓이다. 그 탓에 환자들은 감염증으로 쓰러졌다. 감염증으로 사망한 환자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은 종일 반복되었다. 그녀는 우선 환자들의 위생과 영양 상태를 먼저 개선하기로 했다. 개인 식기를 구매하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제공했다. 붕대는 새 걸 썼고 침대 시트는 더러워지면 바로 갈았다. 병원 바닥은 하루에 한 번씩 마루 걸레로 닦도록 지시했다.

나이팅게일은 전쟁 중에 있었던 모든 일을 빅데이터로 만들었다. 병원에서 필요한 환자복, 침대 시트 심지어 수건의 숫자까지 날짜별로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다. 그녀가 작성한 〈영국 군대에 관한 노트〉는 분량이 1,000쪽이 훌쩍 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병원에서 죽은 병사가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보다 많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1856년 봄,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빅토리아 여왕이 그녀를 파티에 초청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여태껏 기록해온 통계를 바탕으로 여왕을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숫자를 끔찍이 싫어했다. 숫자들이 잔뜩 나열된 자료를 여왕님께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숫자를 어린아이도 보기 쉬운 형태로 바꿀 방법은 없을까?’

그녀는 ‘장미 그림(Rose diagram)’이라 불리는 그래프를 만들었다. 숫자를 의미 있는 형태로 바꾼다는 것은 당시로써 엄청나고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장미 그림은 1854년 4월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30도씩 회전하는 그래프이다. 30도씩 회전한 한 칸의 간격은 1개월이다. 부채꼴 반지름의 길이는 1개월간 사망한 병사의 수를 나타낸다. 하늘색으로 칠한 부채꼴의 반지름은 전쟁터에서 사망한 병사의 숫자이다. 바깥쪽 회색으로 칠한 부채꼴의 반지름은 야전병원에서 사망한 병사의 숫자이다. 흰색은 기타 요인으로 사망한 숫자이다. 오른쪽 다이어그램은 위생 개념을 도입하기 전이고 왼쪽은 그 후이다. 오른쪽 다이어그램의 회색 면적보다 왼쪽이 훨씬 작음을 한눈에 파악하기 쉽다. 나이팅게일이 위생개념을 도입한 뒤 병원 내 군인의 사망률은 42%에서 2%로 줄었다.

나이팅게일의 노력을 알아본 여왕은 병원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왕립위원회를 편성했다. 장미 그림이 설득의 도구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병원은 사람을 치유하는 곳이다. 하지만 불과 몇백 년 전만 해도 병원은 죽음의 장소였다. 청결함을 지키지 못해 고약한 악취가 나고 쥐들이 돌아다녔다. 나이팅게일이 숫자를 설득의 도구로 잘 활용했기 때문에 지금의 병원은 깨끗하게 다시 태어났다. 그녀가 발명한 장미 그림을 보면 야전병원의 위생이 열악하다는 짙은 호소력과 환자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느껴진다. 여기 야전병원에서 감염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환자들이 좀 더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이젠 숫자를 무조건 두려워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 통계학으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린 나이팅게일을 기억하며 말이다 .

로즈 다이어그램 이미지 출처 : 지상의 책. [책 미리보기]#3 나이팅게일에게 왜 통계가 중요했을까? 2019. 10. 4.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6133066&memberNo=39175103>

나이팅게일과 통계

오늘은 ‘백의의 천사’, ‘등불을 든 여인’으로 잘 알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통계에 관해서 포스팅 하겠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중요한 요소기술 중 하나가 바로 ‘빅데이터(Big Data)’입니다. 빅데이터는 수십 테라바이트 이상의 대량의 정형 또는 비정형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이며 이를 뒷받침 하는 학문이 바로 통계학입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우리에게 현대 간호학의 기틀을 마련한 ‘백의의 천사’ 즉 간호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이기도 하지만 영국 왕립통계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인 통계학자이자 사회개혁가로도 활동 했습니다.

그러면 나이팅게일이 통계학에 미친 영향과 업적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별장에서 영국의 부유한 상류층의 딸로 태어난 나이팅게일은 피렌체의 영어식 표현을 따서 플로렌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라면서 간호사가 되어 다친 이들을 돌봐주는 것을 자신 인생의 신앙적 사명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절 간호사는 요양원에서 잡일을 하는 청소부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하대 받는 직업이었다고 합니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1853년 러시아제국의 남하에 맞서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4국 연합국 간에 벌어진 크림전쟁에 군 간호사로 참전하여 영국군 야전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 나이팅게일은 전투에서 사망하는 군인보다 후방 병원에서 위생문제로 인한 전염병이나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사망하는 군인이 더 많은 영국군의 최악의 의료체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개선하고자 나이팅게일은 사망자수 등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숫자로 병원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통계 작성기준을 세워 기록체계를 통일 했으며 기준에 따라 입원자 수, 부상자 수, 사망자 수 등의 병상일지를 매일 상세히 작성하여 통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질병의 주 원인이 병원의 위생상태 때문이라는 점을 발견한 그녀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화장실과 오수구덩이를 말끔히 청소하고, 병동마다 환기구를 설치 했으며, 필요한 비품을 공급하는 등 병실 주변 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 작업을 진행 했습니다.

이렇게 개선 작업을 진행한 후 한 달이 지나자 42%에 달하던 환자의 사망률이 2%까지 떨어지는 성과를 거두며 이를 통해 체계적인 통계와 수치를 이용해 병원의 위생상태를 개선하면 사망률을 감소 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나이팅게일은 일 년 열두 달을 원 모양의 그래프로 나누어 매달 마다 사망한 사람들의 사망원인과 사망자를 표시한 ‘로즈 다이어그램’을 만들어 도표와 차트라는 수단을 통해 정보를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데이터를 시각화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나이팅게일은 1859년 영국 왕립 통계학회의 첫 번째 여성회원이 되었고 미국 통계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초대 되기도 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크림전쟁 당시 밤마다 등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으며 이후 영국에서 조성된 ‘나이팅게일 기금’을 이용해서 1859년 세인트토머스 병원에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설립했고, 같은 해에 펴낸 ‘간호론’은 오늘날 간호학의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이러한 업적에 따라 나이팅게일의 생일인 5월 12일은 매년 ‘세계 간호사의 날’로 지정 되었고, 1893년부터 간호학도들은 간호사로서의 윤리와 간호원칙을 담은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 의식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나이팅게일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빠르고 정확하게 찾고, 해결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기반으로한 분석적 사고력을 키워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간호사에 관한 것입니다. 새에 대해서는 나이팅게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영어: Florence Nightingale, OM, DStJ,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은 영국의 간호사, 작가, 통계학자이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성인이기도 하며, 성공회에서는 8월 13일을 나이팅게일의 축일로 지키고 있다.

그녀는 크림 전쟁 동안 간호사와 매니저로 일함으로써 두각을 드러냈다.[1]

생애 [ 편집 ]

성장과정 [ 편집 ]

1820년 5월 12일 윌리엄 에드워드 나이팅게일과 프랜시스 나이팅게일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인 플로렌스는 여행가였던 부모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낳은 딸이기 때문에, 피렌체의 영어이름인 플로렌스라고 지었다. 웅진출판에서 출판한 나이팅게일 위인전에 의하면, 나이팅게일과 언니 파시노프는 라틴어, 헬라어, 지리, 영어, 작문 등에 걸쳐 부친에게 직접 교육을 받았다 지경사에서 출판한 나이팅게일 위인전에 따르면, 나이팅게일은 청소년시절에 “하느님으로부터 사회를 위해 일하라는 소명을 느꼈다”고 한다.

간호수업 [ 편집 ]

1849년 이집트 여행 도중에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참관하고, 정규 간호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인 부모와 이탈리아 여행중인 1837년에 만난 스위스의 사회주의자 시스몽디(프랑스어: Jean Charles Leonard Simond De sismondi[주 1])의 영향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타임스 신문에서 읽은 뒤 자극받아, 간호사에 대한 편견탓에 집안의 명예실추를 우려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신교 목사가 교도소 출소자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개방함으로써 운영한 독일 카이저스베르트(Düsseldorf-Kaiserswerth)의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1853년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지경사에서 출판한 나이팅게일 위인전에 따르면, 카이저스베르트의 프로테스탄트 학교는 간호사들이 깨끗하게 세탁한 제복을 입게 하는 등 규율(제도)이 있었다.

간호활동 [ 편집 ]

크림 전쟁에서의 활약 [ 편집 ]

크림 전쟁(1853년~1856년) 당시 38명의 잉글랜드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슈코더르(스쿠타리)의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이 시기의 나이팅게일은 유능한 행정가요 협상가였다. 그녀는 관료주의에 물든 군의 관리들을 설득했고, 병원에서 쓰는 물건들을 세심하게 조사했으며[주 2], 무질서한 병원에 규율을 세웠다. 환자의 사망률은 42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이론가 [ 편집 ]

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현재 킹스 칼리지 런던의 일부)를 설립하고 간호전문서적을 씀으로써 조선의 의녀처럼 천대받던 직업인 간호사를 전문직업으로 성숙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이 밖에도 많은 병원 및 간호 시설의 창립, 개선에 힘쓰고 남북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외국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에드워드 7세로부터 여성 최초로 메리트 훈장을 받았으며,[2] 국제 적십자 위원회에서는 ‘나이팅게일 상(Florence Nightingale Medal)’을 제정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표창하고 있다.

집중치료실 [ 편집 ]

크림 전쟁 당시 상태가 중한 환자를 따로 격리하여 집중 관리하는 집중치료실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술활동 [ 편집 ]

저서 《간호를 위하여》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간호법과 간호사 양성의 기초 자료가 되고 있고, 나이팅게일 선서는 세계 모든 간호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나이팅게일의 간호론》, 《나이팅게일, 간호사에게 전하는 글 : Florence Nightingale to Her Nurses》, 《나이팅게일》, 《바쁜 세상은 팔짱 낀 사람을 밀어낸다》 등을 저술하였다.

통계학자 [ 편집 ]

나이팅게일이 작성한 〈동부 지역 육군에서의 사망 원인에 관한 다이어그램〉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군의 전사자와 부상자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대부분의 사망자들이 부상 자체가 아닌 치료나 병원의 위생 상태에 의해 사망했음을 알아냈다. 그녀는 정치인이나 고위 공무원에게 병원 위생의 개선을 설득하기 위하여 데이터를 그래프 형태로 나타내었다.[3] 1858년 영국 왕립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출되었다.[4]

사망 [ 편집 ]

나이팅게일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10년부터 차츰 기력이 약해져 병석에 누워있다가 8월 13일에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이스트웰로에 매장되었으나, 묘비에는 ‘F.N. 1820년에서 1910년까지 생존’이라고 간략히 기재되었다. 이는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는 나이팅게일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Augustus Egg )가 그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초상 오거스터스 에그()가 그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초상

나이팅게일이 일한 슈코더르 병원. 나이팅게일과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헌신으로 환경이 개선되었다.

나이팅게일이 열병치료를 마치고 슈코더르에 돌아온 모습을 그린 그림. 제리 바렛.

나이팅게일 다시 읽기 [ 편집 ]

여성의 노동인권으로 읽기 [ 편집 ]

1999년 4월 영국의 공공노조[주 3]인 유니슨에서는 나이팅게일 숭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유니슨 회원들은 나이팅게일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5월 12일에 치르는 ‘국제 간호사의 날’도 다른 날을 택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간호사 웬디 윌러는 나이팅게일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들이 나이팅게일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첫째 간호사의 역할을 의사의 보조업무라고 주장함으로써 간호사의 독립성을 막고 최저임금 정도의 낮은 임금을 받도록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나이팅게일에 대한 숭상이 오히려 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노동 인권을 억압했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이팅게일이 지나치게 존경받으면서 나이팅게일과 같은 시대의 간호사들이 가려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메리 시콜 이야기 [ 편집 ]

그 예로 자메이카의 메리 시콜이 나이팅게일과 같은 시대에 활약했다. 어머니가 흑인, 아버지가 스코틀랜드 사람인 메리 시콜은 나이팅게일과 같이 일하려고 했지만 인종 차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전재산으로 군인들을 돌보았지만 영웅으로 숭배되던 나이팅게일과 달리 가난하게 살았다. 더구나 나이팅게일 이전에도 간호사들이 교육받았기 때문에 나이팅게일이 간호업무의 이론을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5]

서훈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내용주 [ 편집 ]

↑ 시스몬디는 1818-1819년 영국의 공장지대와 농촌에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사회주의 이론을 주장했다. 시스몽디는 소득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하며, 소득이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대안은 자신의 토지가 있는 자영농민, 기술이 있고 소규모의 상품을 생산하는 자영업자 중심의 사회였는데, 맑스는 이를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비판했다. 자본주의 의 불평등을 비판했다는 점에서는 사회주의 이지만, 노동자 중심의 사회가 아닌 소부르주아중심의 사회를 주장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자본주의는 대자본가가 소자본가들을 몰락시킴으로써 소득불평등이 발생하는 사회구조인데, 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맑스의 비판이었다.《공산주의 선언》/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원전/박찬종 씀/아이세움 p.143-145 ↑ 여성문학가 신지식이 쓴 그림위인전기 나이팅게일(계몽사)이 나이팅게일이 뛰어난 설득가이자 행정가였음을 말하고 있다. 나이팅게일은 병원에 있는 물건들의 수를 조사했고, 부족한 물건은 군의 관리들을 설득해서 보급을 받도록 했다. ↑ 운수업, 공공노조는 의료 우체국 을 비롯한 우편 사업처럼 공공기관 에서 일하는 노동자 들의 산업별 노동조합 또는 산별노동조합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가 공공노조이다. ↑ Order of Saint John )은 세인트존 훈장()은 대영제국 훈장 과 달리 2등급 이상을 받더라도 기사 칭호(Sir / Dame)는 붙지 않는다(Knights and Dames receive the accolade from the grand prior when they are touched on the shoulder with a sword and are given their robes and insignia. However, post-nominal letters of the order are not used outside the organisation itself, and a Knight and Dame may not use the prefix Sir or Dame).

참조주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종 코로나19 수칙, 원조는 나이팅게일?!

코로나 19 예방 행동수칙 원조는 나이팅게일?! 출처: AdobeStock

‘간호사’란 단어를 들으면 바로 소환되는 사람이 있죠. 나이팅게일인데요. 약 200년 전에 태어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9세기 부상당한 군인들을 돌보고 간호사를 훈련시켰습니다. 그녀는 수 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그녀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맞서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도 이미 그녀가 먼저 발표했습니다.

손 씻기의 중요성

나이팅게일은 60대까지 세균과 같은 특정한 미생물 때문에 많은 질병이 발생한다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1880년대 이미 손 씻기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간호노트(Notes on Nursing)에는 “모든 간호사들은 낮 동안 손을 매우 자주 씻도록 주의해야 한다. 얼굴까지 자주 씻으면 더욱 더 좋다”고 적혀 있습니다.

본래 이러한 위생 관행의 중요성을 최초로 권고한 건 1840년대 헝가리 의사 이그나스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였습니다. 평소 국제 의료 연구와 개발에 대한 나이팅 게일의 관심은 이를 공중 보건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죠. 나이팅게일이 손 씻기와 기타 위생 관행을 시행한 건 크림전쟁(1853~1856)동안 영국 육군병원에 있을 때였습니다.

크림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들 돌보는 나이팅게일. 출처: Wikimedia Commons

당시 크림반도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은 비좁고 더러운 배에 실려 500km쯤 떨어진 터키의 스쿠타리 막사병원으로 옮겨졌는데요. 군인들이 누운 얇은 매트 위에는 피와 악취, 오물로 뒤범벅 돼있었다고 합니다. 쥐도 우글거렸죠. 콜레라와 이질이 만연했고 하수구에는 오물이 가득했으며 화장실의 배설물은 병원 마당에 뿌려져 있었습니다. 의료 물품과 깨끗한 옷, 건강한 음식, 마취제인 클로로포름이 부족해 많은 사지절단술이 클로로포름 없이 행해졌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에 나이팅게일은 물품 공급을 위한 행정가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한지 두 달만에 모든 환자에게 침대와 깨끗한 매트리스가 제공됐고 환자들의 옷도 일주일에 2번 갈아입었습니다. 덕분에 사망률이 크게 감소했다고 하는데요. 1855년 겨울에는 입원 환자의 무려 52%가 사망했습니다. 그해 봄인 3월에는 20%로 사망률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감소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사실 통계학자?!

책 <수학의 쓸모>

책 <수학의 쓸모>에 따르면 나이팅게일은 사실 ‘열정적인 통계학자’라고 하는데요.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얻은 의료 통계를 바탕으로 그래프를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데이터의 시각화’에 능했다고 하는데요. 이 그래프는 의사소통 능력이 좋지 않았던 대중들이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덕분에 군 병원에서 만연하는 불미스러운 상황에 국가가 주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녀가 만든 ‘맨드라미 다이어그램’은 일련의 쐐기에 색을 칠해 시간에 따른 사망률의 변화를 보여주는데요. 질병에 따른 사망률의 증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이팅게일의 분석 덕분에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는데요. 군인들이 오로지 병 때문에 사망한 비율이 무려 60%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1665년 런던 대역병 기간에 발생한 런던 시민들의 사망률보다 높았다고 하는데요.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수치가 적탄을 단 한발도 맞지 않은 군인들의 수치였다는 겁니다. 이에 나이팅게일은 “나쁜 음식과 나쁜 공기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마구잡이로 죽을 수 있는지에 관한 근대 역사상 가장 정교한 실험”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이팅게일이 1858년 만든 맨드라미 다이어그램. 오른쪽 그래프에서 부채꼴 모양의 쐐기 12개의 맨 바깥쪽 칸은 1854년 4월~1855년 3월까지 ‘예방 가능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전염병’에 따른 크림전쟁의 월별 사망자 수를 나타낸다. 점선은 왼쪽 그래프로 이어지는데 이 그래프는 다음해인 1855년 4월~1856년 3월까지 데이터를 보여준다. 각 그래프에서 쐐기 안쪽 두 칸은 전투 중 입은 부상에 따른 사망자수(검은색)와 다른 원인으로 생긴 사망자수(연한 회색)을 나타낸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나이팅게일의 권고 덕분에 긴 통로들과 비좁은 방들로 이뤄진 병원은 감염의 온상으로 인식됐습니다. 이후 조명과 환기시설을 완비하고 질병의 확산을 감시하기 위해 별도의 병동들로 구성된 파빌리온(Pavilion) 형태가 병원의 표준이 됐다고 합니다. 이 ‘나이팅게일 병동’은 20세기까지 계속 인기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1859년 나이팅게일은 업적을 인정받아 영국의 왕립통계학회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런던 통계학회에 입학한 최초의 여성이었습니다.

파빌리온(Pavilion)형태. 출처: Wikimedia Commons

의료시스템에 출발은 나이팅게일로부터

이밖에도 나이팅게일은 오늘날의 의료서비스 시스템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회복률과 입원 기간, 또는 질병별 사망률 등과 같은 기본적인 의료 통계조차 수집되지 않았었다고 하는데요. 병원마다 질병 분류 체계 역시 제각각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나이팅게일은 데이터에 관한 이러한 관심 부족이 공중보건의 응급사태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나이팅게일은 표준 의료양식을 만들었고 통계학자들로부터 승인을 받아 런던 대형 병원들이 이 양식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인구조사 활동에 질병과 주거 품질에 관한 데이터 수집도 포함돼야 한다고 정부에 강력히 권고했는데요. 그녀 역시 많은 공중보건 전문가들처럼 집을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중요한 장소로 여겼습니다. 집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염병에 걸려 고생하는 곳인데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한발 코로나19 발생에서 약 75~80%의 전염은 가족 집단에서 이뤄졌다고 합니다.

국민 행동수칙을 준수합시다!! 출처: AdobeStock

나이팅게일의 구상들은 오늘날 국제 질병분류 체계를 만들 때 뚜렷한 모델이 됐고 이 체계는 모든 현대 전염병학과 의료 데이터 과학을 위한 초석이 됐다고 합니다. 덕분에 요즘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긴급한 상황에서도 정부와 의료진이 침착하게 잘 대처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수학의 쓸모>

나이팅게일표 의료 서비스 데이터의 위력은 결국 ‘수학과 데이터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관해 말해줍니다. 책의 제목에 ‘수학’이 들어갔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책은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AI 시대에 수학의 역할에 대해 말해줍니다. ‘자동차는 어떻게 스스로 운전할까?’, ‘페이스북은 내가 올린 친구의 얼굴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에 대한 답을 하려면 수학의 개념이 필요하니까 말이죠. 이 책은 특히나 편집자가 저자에게 특별히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다고 하는데요. “수학 기호 하나에 3,000명의 독자가 떨어져나가고 그리스 문자 하나에 5,000명의 독자가 떨어져 나갑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니 수학에 문외한이더라도 겁먹지 마세요. 미래를 움직이고 있는 진짜 아이디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닉 폴슨,제임스 스콧, 수학의 쓸모(2020), 더퀘스트

The Conversation, “Florence Nightingale: a pioneer of hand washing and hygiene for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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