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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21:15
회복을 위한 7가지 질문(0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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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나무위키:대문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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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 뉴스앤조이
말을 풀어 보자면,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는데, 아니 부탁할 일이 있는데 그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는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3/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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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의 해석의 문제 – 리폼드뉴스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처음에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에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파스 메”(ajgapa’/” me)로 물으시니까 베드로는 …
Source: www.reformednews.co.kr
Date Published: 8/9/2022
View: 5028
요한복음 강해 7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수요예배 20130410)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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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신학연구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1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19 정원진 목사 (서울제일교회).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
Source: www.ecumenian.com
Date Published: 9/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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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cjob)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성권목사 [성경본문] 요21:15-19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10/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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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당당뉴스
그것은 ‘아끼다, 사랑하다, 친하게 대하다’라는 뜻입니다. 현대 영어로는 ‘belove’입니다. 믿음은 사랑과 구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
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8/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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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도순 – 다국어 성경 Holy-Bible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
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0/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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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 Author: SamilChurch삼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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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2. 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vAZbPWHu-I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 보이셨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나타나신 기록입니다.
14절에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했습니다.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아침을 드신 다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시면서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할 때마다 한 가지씩을 당부하셨는데 첫 번째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셨고 두 번째는 “내 양을 치라” 하셨고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내용을 살펴봅시다.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6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7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세 번을 물으셨는데, 요지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이런 질문을 한 번만 하시고 지나갔으면 그냥 그러려니 할 터인데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고 그것도 매번 질문할 때마다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는 것은 그 질문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으므로 예수님이 세 번 사랑하느냐 물으심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다독거려 준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걸리는 데가 있습니다. 17절,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라는 말이 그런 해석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근심하여 라는 말 대신에 ‘베드로가 안심하여 가로되’ 라든가 ‘베드로가 희색이 만면하여’라고 해야만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마음을 다독거렸다는 해석이 맞는데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사랑이라는 말이 원어, 희랍어에서 다른 단어로 쓰인 것을 가지고 무언가 찾아내려고 시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로’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따르자면,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고 있다는 점이 걸립니다.
따라서 이런 두 가지 해석은 모두 다 흡족할 만한 해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각도로 이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부부 간의 대화를 예로 들어 봅시다.
아내가 남편에게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남편이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다시 아내가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남편이 대답합니다. 그럼 사랑하지, 사랑한다니까. 다시 아내가 세 번째로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냥 지나가는 질문이 아니라, 무언가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는 무언가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인이 세 번째 같은 질문한 것에 대하여 남편이 대답합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니까? 이때 남편은 혹시 아내가 자기 사랑을 의심할 만한 어떤 것을 느꼈을까 봐 걱정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째 하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근심하여’라는 말은 ‘고통을 느끼다, 서운하다’의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같은 말을 자꾸 물어오면 나를 믿지 못해 그런가 하며 서운해 하기도 하고 혹은 나의 행동이 부족하지는 않았는가 하며 근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베드로가 근심할 만큼 철저하게 베드로의 마음을 확인하시고자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을 집요하게 확인하는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니라 그 다음에 어떤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보다 중요한 어떤 말을 하기 위한 전 단계인 것입니다.
말을 풀어 보자면,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는데, 아니 부탁할 일이 있는데 그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확실하다면 너에게 부탁을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뜻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세 번 하셨는데, 요약하자면 ‘내 양을 먹이고 보살피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부탁을 해 가면서 그렇게 양을 먹이고 보살피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양을 맡기면서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양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목숨까지도 바치며 사랑하는 양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는데 자기를 사랑하는 자라야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양이 있는데 그 양을 누구에게 맡길까? 그렇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 양을 사랑해 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자기의 양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양을 먹이고 보살피는 그 이유와 원인은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억지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이렇게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5~16절).” 그리고 세 번째 대답인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을 먹이고 보살피려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베드로가 그 해변 가에서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실 때 얼마나 처절하고 비참한 심정으로 벌벌 떨면서 대답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내 양을 먹이고 보살피라는 부탁의 말씀을 하실 때에 얼마나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들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보살피게 된다. 그러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양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보살피지 못한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자면,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고 보살피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면 어떤 말로도 변명하지 못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또한 목회자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입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하여도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우리 교계를 돌아보면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아니, 입으로는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강해 7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수요예배 20130410)
성경본문: 요한복음 21:15~25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설교말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 번의 질문이 헬라어로는 첫 번째는 아가페의 사랑을 물어보시고, 두 번째도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시고, 세 번째는, ‘필로스’ ‘필레오’라는 동사에서 나온 친구들 간의 우정의 사랑을 말하는 단어를 사용해서 물어보십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써서 물어보신 겁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또 전적으로 이타적이거나 완전히 헌신적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필로스의 사랑을 하느냐, 세 번 반복합니까? 또 단어를 바꿔가면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은 이렇게 아가페, 아가페, 필로스, 세 겹으로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면 예수님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첫 번째, ‘네가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물어보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필레오 한다고 대답합니다. 자, 이 첫 번째 사랑은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요? 주님이 이렇게 단서를 붙이십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요 21:15) 여기서 ‘이 사람들’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이것들보다’라고도 또는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네 마음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크냐, 작냐?’ 이렇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린 흔히 이렇게 생각해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더 크냐?’ 이런 뜻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 뜻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이 글을 쓴 사도요한이 섞여 있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의 사랑보다 요한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더 적다는 말입니까? 그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맡은 일은 다를 수 있지만, 베드로가 맡은 일이 수제자의 자리일 수는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도마나 사도요한이나 다른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뒤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더 크냐?’ 이렇게 물어보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씀의 전후 상황을 살펴보면, 베드로는 바닷가에 나가서 고기 잡다가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뭐라고 물어보시느냐 하면, ‘베드로야!’ 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부르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베드로의 인생에서 예수님을 빼버리면 무엇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을까요? 그 남는 인생 중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고기잡이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전 먹고살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고는 어부로서 물고기 잡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 마리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지시하시니 고기를 가득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라는 것은 고기 잡는 배, 만선을 이룬 상태, 그리고 동네에서 같이 고기 잡으면서 잔뼈가 굵은 죽마고우들, 또 예수님을 좇으면서 제자로서 함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업과 가족배경을 생각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호적상, 베드로는 요한이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호적상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제까지 너의 삶의 내용을 채웠는데, 그 너의 인생내용 전체와 나, 둘을 놓고 사랑한다면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겁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하겠다고 주저하지 않고 답합니다.
이 말은,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아가페의 사랑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가치를 무엇에 두어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동안 경력, 인맥, 배경들 가운데서 살아왔고 책임져야할 사람들도 있지만, 베드로는 그것보다는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모든 것의 우선이 예수님이 될 때, 베드로의 모든 것 자체가 예수님 중심으로 될 때,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로부터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베드로는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까지 마음이 쫓아가게 돼서 마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 안에 머물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야 제자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두 번째, 예수님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아가페오 하느냐?”입니다. 이 말은 “네가 나를 너의 인생의 목적, 주인으로 선택했으면, 이제 너의 인생 가운데 나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느냐?”
당연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말하니, 이제 예수님께서 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살면서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일어날 때도, 잠을 잘 때도, 일을 할 때도 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목적은 바로 주님때문인 것입니다.
예전에 전쟁 통에, 많은 어머니들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많은 자식들은 이 어머니의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아이들을 살리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억척스럽고 용감하게 세상과 맞서며 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낫 갈릴리 바다에서 사는 요한의 아들로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주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주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사명을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나의 양을 돌보고, 먹이고,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17절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첫 번째 아가페는 예수님 자신이 베드로의 인생에서 가장 우선이 되겠느냐를 물으시는 거고, 두 번째 아가페는 “나를 위해서 사느냐”를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세 번째로 “사랑하느냐?”라는 말의 뜻은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비해서 수평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을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첫 번째, 두 번째 질문에서 나타내었다면, 세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어디든지 가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첫 번째, 두 번째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헬라어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세 번째에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여기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은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와 함께 하겠느냐? 나와 같이 바라보겠느냐?”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기쁨을 위해, 주님을 위해 사명을 가지고 한다하더라도 혼자 뛰지 말고, 어떠한 순간에도 주되신 예수님께 묻고, 예수님의 의견을 구하고, 예수님을 의식하고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당시 물어보았던 베드로에게 또 지금 우리에게 주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며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늘 함께사는 삶을 살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진심과 열정을 아시는데도 왜 확인하려고 물어보십니까?라는 식의 대답을 우리가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진심을 알고, 그 사랑의 확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8~1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해 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계셔서 아주 좋았습니다. 또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한 자신을 용서하시고, 사랑의 관계에서 사명을 주심도 정말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하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젊어서는 베드로의 뜻대로 자유롭게 다녔으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씀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 우리가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이라도 내어 놓을 수 있는 믿음이 생기며, 그럴 때 신령한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빌립보서 3:8-9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베드로가 후에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교의 자리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뜻대로 따를려고 결심하니 남모르는 기쁨이 넘쳤기 때문입니다.(요 21:18).
오늘 우리도 주의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옛 생활이 다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속의 것을 다 끄집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 ‘나’ 라는 자존심… 이런 것들을 다 뽑아 낼 때,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게 되고 남모르는 기쁨과 행복감이 넘치게 됩니다.
‘별세의 지도자’라는 책을 쓴 이중표 목사님이 고백하기를, 자기를 괴롭히는 교인이 한 사람 있어서 하나님 앞에 새벽마다 기도하며 “내가 도저히 괴로워서 못살겠습니다. 내가 가든지 그 사람을 보내시든지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들이는데, “사랑하는 종아, 그 사람을 꼭 내 보내야 되겠느냐? 그러나 그 사람은 다른 곳에 갈 곳이 없다. 다른 교회에 가도 그 버릇은 못 고친다. 내가 너를 인정하기에 맡기니 그를 잘 보살피도록 해라”하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라면 기다리고, 참고, 죽겠습니다.” 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다가오면서 “내가 너를 위하여 면류관을 준비하고, 열 고을 다스릴 권세를 예비했다”하고 말씀하시므로 그는 넘치는 기쁨과 행복감에 감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은 세계사에 밝고 빛나는 위대한 장을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베드로 등등…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던 믿음의 선조들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므로 역사적인 위대한 장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였고, 그러한 순종의 삶속에 남모르는 기쁨과 희락이 넘쳤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세 번 물어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3중으로 3겹으로 하는 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네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내 모든 정욕과 죄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거기서 나 자신을 내려놓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행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되시어서 주님자체가 우리 삶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됩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우리의 의미가 되시기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으로 살게 되면, 사업을 하든, 장사를 하든, 아이를 키우든, 목회와 전도의 자리에 있든, 주님께서 사명을 맡기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이 어렵다 말하십니까?
예수님을 한겹으로 아니고 세 겹으로 사랑해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주 예수님께 맞추어 살아가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과 함께함이 우리에게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과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끊임없이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어느 때든지 어디서든지 고백하게 하옵소서. 이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3겹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진짜로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주님과 함께 수행해나가는 복된 삶을 살게 하여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목회와신학연구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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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9
정원진 목사 (서울제일교회)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보니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 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 두 가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를 들라면 그것은 아마도 죄를 짓지 않는 일과 용서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기에 쉽사리 부서지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어서,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해를 받는 신부님은 고해하는 신자들에게 “다시는죄 짓지 마십시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않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또 그런 자기 자신에게 크게 실망해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려고 해도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베드로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은 벌써 두 번씩이나 제자들과 만났습니다. 그 두 자리 모두에 베드로도 함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수난과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지 못한 제자들의 실패를 상기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잘못을 질책하거나 꾸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따스한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을 포용해 주셨고, 나아가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시며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던 일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하지만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따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용서했지만, 제자들은, 특히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식이나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용서 못한 베드로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며 그를 따라나섭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 말은 주님을 만나기 전의 직업, 즉 과거의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낙향해서, 이제부터는 주님의 제자이기를 포기하고, 그저 평범한 갈릴리 어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아직까지 베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주님‘만’의 부활로 그쳤지, 베드로의 부활로 이어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벌써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아직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위한 부활이라는 부활체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부활체험이 없었기에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서 확신이 되고, 믿음이 되고, 헌신이 되고, 위탁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기에, 주님께 면목이 없고, 다른 제자들에게 체면도 안서고,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 전 주님 제자 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저를 대해 주셨지만, 저에게는 그게 더 부담이 됩니다. 차라리 질책하고 꾸중하셨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텐데, 따스한 평화의 인사로 저를 감싸주시고 나아가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 못난 저에게 위임하시겠다니,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주님의 위임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사표내고, 낙향하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옛날처럼 평범한 어부로 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렇듯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패잔병의 모습으로 갈릴리 자기 고향 마을로 돌아간 것입니다. 모닥불! 빵! 기적의 생선! 고향으로 돌아온 베드로와 동료들은 고깃배에 다시 몸을 싣습니다. 3년 전, 주님을 만나 헌신짝처럼 버렸던 그 낡은 고깃배에 다시 올라탄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던 베드로, 그는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도로 생선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비록 3년을 쉬었지만, 고기잡이로 평생 잔뼈가 굵은 그였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손바닥 보듯 환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철에 따라, 또 시간에 따라 고기떼가 어디에 몰려있는지, 오랜 경험을 통해서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그런 그의 경험과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모두 허탕이었습니다. 작은 생선 한 마리조차 그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저들은 밤새도록 헛수고한 일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마지막이니 한 번만 더 던져보자는 심정으로 그물 던지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펄펄 뛰는 생선 대신, 물거품 같은 낙담과 실망만 건져 올렸을 뿐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낮에는 물고기들이 호수 바닥에서 쉬기 때문에 주로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이제 날이 점점 밝아오니 고기 잡을 가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침내 저들은 그물질을 포기하고 텅 빈 배를 저어서 호숫가로 다가갑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주님께서는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떡을 구워놓고, 또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호숫가에 서서 제자들을 기다리십니다. 배가 약100m쯤 접근해 왔을 때, 주님께서는 “여보시오, 생선 좀 있습니까?”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대답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지만,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소.”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시오. 그러면 잡힐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투덜거리는 동료들을 설득하여, 베드로는 한 번 더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그물 가득 걸려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을 모닥불 주변으로 부르십니다. 싸늘한 새벽에 나뭇가지들이 타는 소리와 함께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빵이 준비되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있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모닥불! 빵! 그리고 기적의 생선! 이것들을 보면서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주님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벌어졌던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기적의 생선은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나 소명 받던 순간을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그날도 오늘처럼 밤새도록 애썼지만 베드로는 한 마리의 생선도 잡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자, 그물이 찢겨질 만큼 엄청나게 많은 생선이 잡혔었지요. 그 때 베드로는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했으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그를 첫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또 빵은 주님과 나누었던 마지막 만찬을 기억나게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바로 그날 밤, 주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시며 이렇게 당부하셨지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도 예고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닥불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가야바 집 뜰에서의 그 참담했던 순간을 기억나게 했을 것입니다. 모닥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에게 대사제의 여종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지요?” 그 때 베드로는 만약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며 “나는 정녕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딱 잡아떼었지요. 그 순간 어디선가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했던 주님의 음성이 생생히 베드로의귓전을 때렸습니다. 그 때 참담함과 서러움에 복받쳐 얼마나 눈물을 쏟았던 지요. 이렇듯 지금 감격과 후회가 뒤범벅이 되어 모닥불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랜 침묵 끝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지어준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 대신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마치 그를 난생 처음 만난 것처럼 부르십니다. 이 말이 베드로의 마음에 보통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 번 물으시는 물음에 겨우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둘러댑니다.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다 아시면서, 세 번이나 연거푸 물으시니 어찌 괴롭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첫 번째 이유는 양심의 가책이란 사슬에서 그를 해방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의 잘못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고 자학하며 낙향했지만,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벌써 두 번 씩이나 찾아와 평안을 빌었고, 지금은 고향까지 찾아와 손수 조반을 준비하여 대접하시며 베드로를 영접하십니다. 그러기에 사실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야, 네가 비록 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괴로워하지 마라. 자학하지도 마라. 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하는 표현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크신 사랑으로 우리 죄를 모두 녹여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속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용서와 속죄는 다른 것입니다. 용서는 잘못한 그 사실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속죄는 죄의 기억조차도 지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해준 것을 넘어 ‘속죄’해 주셨습니다. 기억에서조차 지워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주홍빛보다 더 붉은 우리 죄를 눈보다 더 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두 번째 이유는 그에게 사도직을 맡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를 배반한 사람에게 어떻게 교회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잘못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에게 당신 양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람을 쓸 때 자격을 따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선회개 후구원을 주장했습니다. “입으로만 회개했다고 죄인이라고 떠들지 말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라. 행실로 보여라. 먼저 자격을 갖춰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구원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선회개 후구원이라는 도식보다는 오히려 선구원 후회개라는 도식에 가깝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세리나 창녀나 죄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든지 다 와라. 너희는 죄에서 해방됐다. 구원됐다.”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회개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먼저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고, 이에 대한 자연스런 감사의 응답으로 회개가 뒤따릅니다.
복음서는 그런 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리 삭개오가 그랬고,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나는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그게 아닙니다. “너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 그 진리를 깨달아라.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이 말을 들은 베드로의 뺨에는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주님의 하늘같은 사랑에 감동되어서 말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죽도록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때까지, 이 감격의 순간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았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섬기겠느냐?” “네가 나를 예배하겠느냐?” “네가 교회에 잘 출석하겠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하느냐고 만 물으셨습니다. 왜 일까요? 그건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말에 “사랑에 눈이 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상대방의 좋은 점만 보이지 나쁜 점은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니 보기는 보아도 그 단점이 나에겐 나쁘게 보이질 않습니다. 남들은 뭐라 해도 나에겐 오히려 그 단점이 매력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합니다. 이래도 기쁘고, 저래도 기쁩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환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의 사랑이, 구원의 감격이 너무 커서 시련과 고통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라, 매일 성경을 읽어라, 십일조 생활을 해라.” 하고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합니다. 내가 오늘의 나 된 것, 지금 내가 사는 것, 내가 이런 축복의 생을 누리는 것,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고, 희생하고, 가난해지고, 죽으셨기 때문인데, 그 사랑과 은총에 감사해서 응답으로 드리는 감사의 행위인 예배생활, 경건생활, 헌금생활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저들은 의무감에서 교회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자발적으로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은 그 은혜가 감사해서 울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를 살리는 사람들은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10명의 의인이 없어서 멸망했는데, 만약 교회를 위해 눈물 흘리는 열 사람만 있으면 어떤 교회도 시험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반석 위에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시고, 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신 이야기는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삼고초려(三顧草廬) 이야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삼고초려란 고사 성어는 옛날 중국 삼국 시대에, 촉한의 유비가 난양에 은거하고 있던 제갈량의 초옥으로 세번이나 찾아간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비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 제갈량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지만, 주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를 들어 당신의 도구, 당신의 사도로 쓰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견지에서 볼 때, 베드로는 지혜로운 사람도, 유력한 사람도, 가문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고, 수난의 현장에서 도망쳤고, 주님을 부인했던 비겁자였고 실패자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그를 친히 세 번씩이나 찾아와 속죄해주시고, 양떼를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재이기 때문에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곳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 양을 돌봐다오.” 비록 우리는 때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때론 주님을 배반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십니다. 때때로 우린 죄책감에 허우적대며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친히 찾아오셔서 상처 난 우리 심령을 치유해 주시고, 따스한 손 내밀어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꺼져버린 우리의 사명에 다시 불을 지펴 활활 타오르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주님보다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기에 실패했었습니다. 하지만 디베랴 바닷가에서 사랑의 주님과 다시 만나고 이제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도 베드로가 만났던 그 주님을 다시 만나 뵙고 변화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정원진 목사 (서울제일교회) [email protected]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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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설교자료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성권목사 [성경본문] 요21:15-19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6절/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17절/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다 곧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는 말씀에서(요21:14),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신 사건이나 실제적으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음으로(요20:14) 부활 후 네 번째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 나타나신 것을 말씀합니다(요20:24, 26; 21:14). 물론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을 말합니다.디베랴 바다의 일곱 제자들….부활의 주님을 친히 목도한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일곱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갈릴리 바다로 내려가 고기 잡는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눅5:5).부활의 주님이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일곱 제자들을 찾아왔습니다.밤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이른 새벽 그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왔습니다. 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낯선 사람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물을 던졌고, 그물을 배에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서야 요한이 부활의 주님임을 알았습니다.부활의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아침 식사를 마쳤습니다.부활의 주님 앞에서 식사를 마치기까지 일곱 제자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말 없는 침묵 속에 식사를 마친 후 주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도 우리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세 번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마26:35), 주님 앞에 다짐했던 그 마음이 무너지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이 똑같은 말을 세 번씩이나 묻고 있습니다. 그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베드로가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본문15절). 주님은 “희생의 사랑[아가파오(ajgapavw)]”을 하느냐 물으시고, 베드로는 “우정의 사랑[필레오(filevw)]”을 하는 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착잡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비단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모두의 문제입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귀한 사랑을 받은 우리들,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만 서면 어쩔 수 없이 작아지기만 합니다. “우정의 사랑[필레오(filevw)]”을 넘어 “희생의 사랑[아가파오(ajgapavw)]”을 이루지 못하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작아지기만 하는 우리들이지만,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아가파오(ajgapavw)] 내가 너희를 사랑한[아가파오(ajgapavw)]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아가파오(ajgapavw)]」고 했습니다(요13:34). 주님이 명하신 형제 사랑은 고사하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사랑은 어떠한지를 스스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이 시간 주님이 나에게 물으신다면 나의 대답은 어떠할까요?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고 대답할 수 있는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요? 다시 말해서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네 마음이 이러하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1.자꾸만 내가 생각나느냐는 물으심입니다.이사야 49: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어머님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합니다. 한이 없고,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크고 값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사랑 중에 어머님의 사랑보다 더한 사랑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어머님의 사랑의 특징을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특징을 「잊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잊으랴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곧 「잊으랴 애를 써도 자꾸만,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 사랑입니다.”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여인이 어찌 젖먹이를 잊을 수 있겠습니다. 미물의 짐승도 젖먹이를 돌봅니다. 때로는 자신의 몸을 던져 위험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여인입니다. 더욱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어찌 젖먹이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젖먹이를 버리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젖먹이를 결코 잊을 수는 없습니다.”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어머니가 젖먹이를 잊을 수 있어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랑은 어머님의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의 사랑[아가파오(ajgapavw)]”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인간의 사랑 곧 어머님의 사랑도 “우정의 사랑[필레오(filevw)]”입니다. 바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의 차이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부활의 주님을 직접 뵙고도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옛날로 돌아간 일곱 제자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옛날로 돌아간 일곱 제자들을 다시금 찾아오셔서 아침을 준비하셔서 먹게 했습니다. 식후에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주님의 이 말씀은 「자꾸만 내가 생각나느냐?」는 말씀입니다. 「잊으랴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잊으려 애를 써도 몸부림쳐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베드로야, 네가 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하고 네 살길을 찾아가니, 나를 잊을 수 있더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갈릴리 바다의 일곱 제자들….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일까요? 평소에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그들은 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느라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시던 주님의 말씀을 잊었습니다(마26:32).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전해준 부활 소식과 함께 부활의 주님이 다시 들려주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는 말씀도 잊어버리고(마28:10)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갈릴리에서 만나자(마26:32)」….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러 만나자는 주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흩어지는 제자들, 그들은 모두다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유일하게 남쪽 유대의 가룟 사람이던 유다도 이미 죽고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다시금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통해서 일깨워주었습니다(마28:10). 그러나 제자들은 믿지 못하고 갈릴리로 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두 번씩이나 찾아오셨습니다(요20:19, 26).마태복음 28:16-17절/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드디어 열한 제자들이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서 부활의 주님을 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말씀은(마26:32) 갈릴리 바다가 아니라 갈릴리의 어느 산이었습니다. 여기의 “산”에 정관사가 붙어 있어서, 주님이 명하신 “그 산”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열한 제자들이 “그 산”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잊으랴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갈릴리 바다가 아닌 “그 산”에 가야 합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에게만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 각자에도 하시는 질문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꾸만 자꾸만 생각이 나야 하는데,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처럼 주님을 잊어버리고 돈벌이에 몰두하고 있지나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식 생각에, 부모 생각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지나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꾸만 자꾸만 주님이 생각나야 하는데 그러한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2.자꾸만 내가 보고싶으냐는 물으심입니다.아가 2:14절/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아가서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의 사랑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꾸만 자꾸만 보고싶어집니다. 그래서 모두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싶네”라고 하지요. 더욱이 보고싶은 데도 볼 수 없다니 더욱 보고싶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솔로몬 왕의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는 그 마음입니다.아가 3:2절/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사랑하는 자를..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술람미 여인의 모습입니다. 시골 농촌에서 포도원지기로 일하는 여인을 솔로몬 왕이 버리고 따나갈 것을 염려하는 술람미 여인의 꿈 이야기입니다. 자꾸만 보고싶고 만나고 싶고…. 그래서 길거리를 헤매며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욱 보고싶겠습니까….아가 6:13절/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이 부분을 솔로몬의 노래라고도, 예루살렘 여인들의 노래라고도, 솔로몬과 예루살렘 여인들의 노래라고도 합니다. 여하튼 떠나간 술람미 여인을 향하여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는 그 마음이 자꾸만 보고싶다는 것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주님의 이 물음은 옛날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자꾸만 내가 보고싶더냐」고 묻는 것입니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자꾸만 보고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산”에 가야 만날 수 있는데,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느냐는 물음입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 각자에 주님이 묻고 있습니다. 자꾸만 보고싶은 사람이 있는데, “주의 전”에 가야 만날 수 있는데, “시간이 없다고, 사정이 생겼다고, 돈벌이한다고, 놀러간다고”…. 엉뚱한 곳에 있을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정말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3.자꾸만 나와 같이 있고 싶으냐는 물음입니다.창세기 24:55절/ 리브가의 오라비와 그 어미가 가로되 소녀로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소녀로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리브가의 뜻을 따라 이삭의 아내로 시집보내며, 어머니와 오라비가 열흘 동안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키워온 딸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머나먼 가나안 땅으로 시집보내는 섭섭함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꾸만 같이 있고 싶고, 헤어지지 않고 늘 같이 있고 싶은 게 사랑입니다.사도행전 18:20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오래도록 머물며 같이 있고 싶어했습니다. 헤어지기 싫고 자꾸만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도와 목회자 사이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간청하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며 작별하고 떠났습니다(행18:21).「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좇았습니다. 목회자에게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보고싶어 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것도 사랑이요, 돌아오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훗날 에베소교회로 돌아왔습니다(행19:1). 2년 동안 머물다 또 떠납니다(행20:1). 자꾸만 보고싶고…. 그래서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어하는, 이것이 사랑입니다.사도행전/ 20:37-38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사도 바울이 로마전도를 가슴에 품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3년이나 눈물로 기도하며 가르쳤던 에베소교회 성도들, 그러나 시간에 쫓기어 에베소교회에 들리지 못하고,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작별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에 울음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헤어지기 싫고 자꾸만 같이 있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인데,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다니 그 마음에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 목회자와 성도간에 진정한 사랑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주님의 이 물음은 옛날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자꾸만 나와 같이 있고 싶더냐」고 묻는 것입니다. 못내 헤어지기 섭섭하고, 자꾸만 같이 있고 싶은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자꾸만 함께 하고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산”에 가야 만나 함께 할 수 있는데,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느냐는 물음입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 각자에 주님이 묻고 있습니다. 못내 헤어지기 섭섭하고, 자꾸만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주의 전”에 가야 함께 할 수 있는데, “시간이 없다고, 사정이 생겼다고, 돈벌이한다고, 놀러간다고”…. 엉뚱한 곳에 있을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정말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4.자꾸만 내게 아낌없이 주고 싶으냐는 물음입니다.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우리 성도들 모두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까울 게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습니다.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어가려고 할 때 어미 닭이 독수리와 싸웁니다. 병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내어놓습니다.요한복음 13: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주님이 우리 성도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했습니다. 이는 변함 없는 사랑입니다.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곧 영원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끝없이, 변함 없이, 영원히 사랑하시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놓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아낌없이 주고 싶고, 변함 없이 주고 싶고, 끝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로마서 16:3-4절/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사도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이 동역자의 사랑입니다. 아무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복음을 위해 충성할 수 없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고전16:19). 자신들의 집을 교회로 내어놓고 믿음의 형제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동역자로 불려졌고 또한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역자의 사랑입니까…. 오늘날에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나의 동역자」라고 불림을 받지 못하지만, 그들 부부 못지 않게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이들이 진정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주님의 이 물음은 옛날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자꾸만 내게 아낌없이 주고 싶으냐」고 묻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옛날로 돌아가 바다의 고기를 낚으니,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른 나에게 줄 고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 각자에 주님이 묻고 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고 묻습니다. 내가 주께 무엇을 드리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니 자꾸만 아낌없이 주고 싶은 게 사랑인데, 주님께 아낌없이 주고 싶은 생각이나 있는지…. 정말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잊으려 애를 써도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함께 같이 있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더 나아가 자꾸만 아낌없이 주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자라가고 성숙해져 갑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부활의 주님을 친히 목도한 기쁨도 잠시 뿐, 옛 모습으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일곱 제자들, “그 산”에서 만나자고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만선의 기쁨은커녕 그래 가지고서는 먹고살기도 힘든 한숨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오신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나서는 기쁨이 없습니다. 즐거움도 없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자꾸만 자꾸만 내가 생각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꾸만 자꾸만 내가 보고싶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꾸만 자꾸만 나와 같이 있고 싶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꾸만 자꾸만 내게 아낌없이 주고싶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고 하십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처럼 우리 성도들은 말을 돌리지 맙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처럼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 떠넘기지 맙시다. 자꾸만 주님이 생각이 납니다. 자꾸만 주님이 보고 싶습니다. 자꾸만 주님과 함께 같이 있고 싶습니다. 자꾸만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고 싶습니다. 이 목숨까지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보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당당하게 주님께 “사랑합니다!”고 사랑을 고백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홈 > 영성 > 김기석 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당당뉴스 | [email protected] 입력 : 2021년 04월 11일 (일) 12:42:37
최종편집 : 2021년 04월 11일 (일) 12:48:17 [조회수 : 179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9
(2021/04/11, 부활 후 제1주)
음성으로 듣기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쳐라.”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자기와 대면하는 시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의 4차 대유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감염의 매개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당분간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였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을 고대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허탈한 결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시민 사회의 상식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혼돈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성전 정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체포, 십자가 처형, 그리고 빈 무덤에 이르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이 제자들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려던 꿈은 아침 안개처럼 흩어지고, 공허와 두려움과 환멸만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침묵 속으로 침잠하게 만든 것은 자기들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대한 슬픈 자각이었을 겁니다. 예수와 함께라면 죽음의 자리조차 마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고난의 현장에서 달아났던 자기들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떠올랐을 겁니다. 오그라지고 멍이 든 자기들의 마음을 바라본다는 것처럼 참담한 노릇이 또 있을까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마음은 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당신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라는 여종의 물음에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던 그 시간이 자꾸 떠올라 그는 회오와 더불어 자기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베드로가 장막처럼 드리워졌던 침묵을 깨며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하자, 다른 제자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라고 응답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며 주님을 따라갔던 그가 고기를 잡는 옛 삶으로의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슬픈 전락입니다. 하지만 배를 띄우고 그물을 내려 보았지만 그들은 그 밤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드리운 허망함을 보여주듯 그물은 비어 있었습니다. 빈 그물은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5c)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자신의 경험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그 때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순간입니다.
∙새로운 만남
동틀 무렵에 그들은 한 음성과 만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아득한 메아리 같은 음성이었을 겁니다. “못 잡았습니다.“ 허탈감이 담긴 소리였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력에 이끌리듯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에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하시던 제자는 즉시 자기들에게 말을 건네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아차립니다. 그 제자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고, 다른 제자들은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배를 해안으로 접근시켰습니다. 뭍에 올랐을 때 그들은 숯불 위에 생선과 빵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르십니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베드로가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리자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떠올릴 때마다 감동합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는 말은 단순하게 그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속에 내포된 의미가 참 다양합니다. 표현된 말보다 그 속에 감춰진 말이 더 크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는 말 속에 감춰진 말은 무엇일까요? ‘힘들지?‘, ‘너무 죄책감에 시달릴 것 없다’, ‘너희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나는 너희를 여전히 신뢰한다’. 가없는 사랑입니다. 그들의 못난 행위에 대한 판단이나 비평은 일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아픔과 허탈감 그리고 부끄러움까지도 감싸안으실 뿐입니다. 시편 시인도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을 꾸짖지 않으시고,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103:13-14)
이날 제자들이 경험한 것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을 ‘받아들여짐의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처럼 감동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주님의 식탁에서 제외되는 이들은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 사이
아침을 먹은 뒤에 주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으로 지칭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반석처럼 우뚝 선 베드로가 아니라, 여전히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흔들리고 있는 시몬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친밀함으로의 초대입니다. 이제는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 혹은 격隔을 넘어서라는 요청입니다. 시몬은 이제 계속 배워야 할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주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영어로 믿는다는 뜻의 단어 ‘believe‘는 고전 영어 ‘be loef‘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끼다, 사랑하다, 친하게 대하다‘라는 뜻입니다. 현대 영어로는 ‘belove‘입니다. 믿음은 사랑과 구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이 하신 어떤 말씀이 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라틴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의 단어 ‘credo‘는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바친다’는 뜻입니다(Marcus J. Borg, Speaking Christian, Harper One, p.118-120). 사랑은 자기를 내어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계명을 떠올려 보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막12:30)
주님은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떤 이들은 사랑하냐고 묻을 때 사용된 헬라어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차이를 들어 그 질문 속에 매우 심오한 뜻이 담긴 것처럼 설명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질문은 같은 질문의 반복입니다. 반복되는 질문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을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처럼 단호하게 자기 확신에 근거하여 대답하지 못합니다. 과도한 자기 확신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 대답은 대답인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이 머뭇거림이야말로 신앙이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자기 확신에 차서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독교인들을 보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요?
∙새로운 위임
주님은 시몬의 대답을 듣고는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하고 부탁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한다는 말과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 떼’라는 말은 에스겔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면서도 양 떼는 먹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겔34:4)
주님은 일찍이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양 떼를 먹이는 것, 그래서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풍성히 누리도록 하는 것이 시몬 베드로에게 위임된 사명입니다. 베드로가 그럴 수 있을까요? 주님의 사랑에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자라야 연약함에 휩싸인 사람을 도울 수 있음을, 넘어짐의 쓰라림을 아는 자라야 속절없이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음을,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해 본 사람이라야 방황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음을, 자기에게 깊이 실망해 본 사람이라야 자괴감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짐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음을.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차례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더 나아가 오늘의 교회에 위임해 주신 주님의 ‘어린 양 떼’는 누구입니까? 시대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를 세운 로제 수사는 자기 시대의 가장 곤고한 이들 곁에 머물기 위해 마음 썼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는 ‘독일군 포로들’을 보살폈고,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전쟁 고아들을 보살폈고, 유럽으로 난민들이 유입될 때에는 ‘난민들’을 받아들여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님의 위임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미얀마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라고 명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대당하는 어린이들과 여성, 이주 노동자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세월호 참사 7주년이 다가오도록 거리를 떠날 수 없는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가설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어린 양 떼’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걸작품인 창조 세계입니다.
인간의 탐욕스런 경제활동으로 인해 피조물들의 신음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문제는 지금 지구촌에 속한 모든 이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습니다. 얼마 전 보도에서 보았습니다만 프랑스 하원은 ‘기후에 관한 시민 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화국은 생물 다양성과 환경 보전을 보장하고, 기후 변화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문구를 헌법 제1조에 삽입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앞으로 상원 통과와 국민투표까지 거쳐야 하지만,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조치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보살펴야 할 ‘어린 양 떼’가 정말 많습니다.
주님은 자칫하면 부끄러운 기억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아무런 창조적인 활동도 할 수 없었을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새로운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 소명은 고통과 아픔을 통과한 것이기에 더욱 소중합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그 사랑이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깨어나게 합니다. 신앙생활은 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골방에서 나와 ‘주님의 어린 양 떼’ 곁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자기 생의 무게에 짓눌려 그 아름다운 일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소명을 받아들인 시몬 베드로의 삶이 철저히 바뀔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를 이끌 것입니다. 그는 다만 신뢰하며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부활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리고 명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이 말씀에 삶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당당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99 의견나누기 ( 0 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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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성경 Holy-Bible
John 13:38
Jesus answered, “Will you lay down your life for Me? Truly, truly, I say to you, a rooster will not crow until you deny Me three times. [번역비교]
John 21:17
He said to him the third time,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Peter was grieved because He said to him the third time, “Do you love Me?” And he said to Him, “Lord, You know all things; You know that I love You ” Jesus said to him, “Tend My sheep. [번역비교]
John 18:27
Peter then denied it again, and immediately a rooster crowed. [번역비교]
John 12:29
So the crowd of people who stood by and heard it were saying that it had thundered; others were saying, “An angel has spoken to Him.” [번역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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