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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나무위키
오찬호가 2013년에 처음 선보인 사회학 저서이자 대표작이다. 정확한 제목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다.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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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알라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오찬호 (지은이) 개마고원 2013-12-06. 정가. 14,000원. 판매가. 12,600원 (10% 할인) + 마일리지 700원 …
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5/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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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YES24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 EPUB ]. 오찬호 저 | 개마고원 | 2014 …
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7/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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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지금 여기 3)오찬호 – 교보문고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이 책은 젊은 사회학자인 저자 오찬호가 대학교에서 강사 활동을 하며 만나온 이십대들의 …
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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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시사IN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비판이 사라진 대학 교육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차별을 찬성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다. 대학이 경영학만 떠받드는 사이 세상 …
Source: www.sisain.co.kr
Date Published: 1/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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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리뷰 – 브런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리뷰 … 나는 배웠다. 이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 모순을 없애야 한다. 사회구조가 문제다. 경쟁보다는 힘든 사람끼리 연대를 해야 …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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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독서감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저자 : 오찬호; 출판사 : 개마고원; ISBN : 9788957692233; 도서정보상세보기(새창연결). 한줄서평 : 5 건 …
Source: book.cau.ac.kr
Date Published: 10/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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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하는가? – 한겨레
갑의 못된 횡포를 ‘갑질’이라고 한다. 갑의 갑질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지는 당해본 을만이 안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진짜…
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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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book. Read reviews from world’s largest community for readers. 그동안 많은 이십대 담론은 이십대들이 겪고 있는 고통 …
Source: www.goodreads.com
Date Published: 10/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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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우리 는 차별 에 찬성 합니다
- Author: KBS지식
- Views: 조회수 10,3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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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7. 5.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CebRTRwz9w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출판사 리뷰
대한민국 이십대는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가
장면1. 어느 대학 강의실.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의 정규직 전환 요구를 놓고서 강사와 학생들이 토론을 벌인다.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한다.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다른 학생들도 이런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눈치다. 이에 힘입은 그는 계속 말한다.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수강생의 3분의 2 이상이 이 의견에 동의했다.
장면2. 지방대 출신이 취업시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다룬 영화를 보고 일단의 학생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주인공의 처지에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모임을 주관한 강사는 그들에게 지방대에 대한 차별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학생은 언제 울었냐는 듯이 “지방대는 저희 학교보다 대학서열이 낮아도 한참 낮은 곳인데, 제가 그쪽 학교의 학생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을 받는 건 말이 안 되죠!”라고 답했다. 여기에 반대하는 이는 없엇다. 이들은 모두 ‘인서울’ 대학 학생이었다.
장면3. 학교에서 가장 잘나가는 학과인 경영학과에 다니는 한 학생은 자기 학과가 다른 학과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겨우 턱걸이”해서 학교에 들어온 철학과나 사학과 학생들을 “개무시”한다. 수능을 보지 않고 들어온 수시생들을 ‘수시충’이라 비하하며 부르고, 재외국인 전형, 사회통합 전형 같은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학우들을 낮춰본다. 최근 몇몇 대학들에서는 지역균형, 기회균등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지균충’ ‘기균충’이라 부르며 무시한다고 한다.
이것이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이십대다. 이들에겐 어떤 공통점이 있다. 바로 차별의 벽을 쌓고 상대를 밀어내는 태도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 방어와 타인에 대한 공격이 동전의 양면처럼 쌍을 이룬다. 즉 이들은 현 사회의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동안 많은 이십대 담론은 이십대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 그리고 그 해결책에 대해서 논했다. 이십대들이 문제에 부딪혀 있으니, 이를 해결하여 이십대들이 ‘제대로’ 살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러 이야기들은 상시적인 불안에 내몰린 이십대들이 그 결과로 어떤 존재로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이십대들은 ‘정상적인 삶’과 ‘윤리’와 ‘공정’ 등에 대한 개념이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 예전의 ‘진보적 이십대’를 놓고 생각한다면 이들은 매우 뒤틀려 보이기까지 한다. 이십대 자체가 문제적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이십대들은 마냥 고통 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 찬성하기까지 하며 스스로도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이런 기묘한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십대 문제를 결코 풀 수 없을 것이다.
불안에 잠식당한 이들의 새로운 윤리
이십대 변화의 근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불안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현실에서 이십대들은 자기 몫을 챙기는 데 매우 예민해졌다. ‘자기 노력에 대한 보상’에 굉장히 집착하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길 원하는 것은 노력 없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는 ‘도둑놈 심보’다. 여기서 비정규직 고용 형태의 불합리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안 된다. 자신들은 이렇게 노력해도 취업이 안 되는데 비정규직이 바로 정규직이 된다는 사실에 이들은 박탈감을 넘어 격렬한 분노마저 느낀다. 이들에게 이 분노는 더없이 정당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십대들이 생각하기에, 지방대와 상위권대 학생은 각 대학에 가기 위해 들인 노력(곧 수능점수)이 다른데 똑같이 취급받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차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 때문에 요즘 이십대 대학생들은 과거보다도 더 학교서열에 민감하다. 단순히 학교 등급을 나눌 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도 학과에 따라서도 등급을 나누고 정시생과 수시생, 특별전형 등을 구분 짓기도 한다. 각각의 단계 차이를 과장하고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고자 한다. 저자는 이런 이십대들의 새로운 학력주의 행태를 ‘학력위계주의’라고 부른다. 명문대 대학생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자신이 명문대를 다닌다는 것을 과시하고, 하위권 대학 학생들을 멸시한다. 대학생들이 학교와 학과명을 내건 야구잠바를 입고 다니는 유행에서도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학교 수준에 따른 과시와 멸시, 우월감과 열등감의 법칙이 이십대들을 지배하고 있다.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세종대는 서경대를, 서경대는 안양대를, 안양대는 성결대를 ‘무시’한다. 행여나 후자가 전자를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전자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난리가 난다. 그렇게 4년제는 다시 2년제를, 2년제는 또 같은 기준에 근거해서 자기들 내부를 쪼개고 줄세운다. 모두가 이렇게 같은 논리를 가지고 가해자 역할을 하며, 또 그래서 당연히 피해자 신분이 되는 상황에도 매우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셈이다. ―본문 125쪽
미래가 약속되어 있지 않고, 삶이 불안정한 이들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이십대도 그렇다. 자기가 기울인 노력과 그 결과물, 즉 학력 및 여러 스펙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안달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만사를 평가한다. 노력의 결과물이 부족한 이들은 자연히 자신보다 ‘떨어지는’ 존재며, 이들이 자신보다 앞서 가는 건 정당하지 않은 일이다. 이십대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계발이 일종의 윤리 기준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십대 내면에는 새로운 윤리가 자리 잡게 되었다.
저주의 순환은 계속된다
이십대를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이 저주의 메커니즘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누구나 알 듯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 되면서,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계발 논리가 접목됐다. 이 논리는 경쟁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자신에 달려 있다는 기본 전제 아래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계발할 것을 주문한다. 이것은 흔하게는 ‘스펙 쌓기’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식이든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미래를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좋은 삶으로 여겨진다. 허나 그 시간투자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 혹 강요된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설령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시간을 엄격히 관리하는 노력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게으른 것보다는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는 게 낫다’는 도덕적 당위로 아무것도 약속되지 않는 자기희생을 포장한다.
이런 논리가 내면의 윤리가 되어 자기를 채찍질하는 것은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열심히 사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문제는 그 채찍질이 다른 사람에게도 가해진다는 점이다. 자신이 투자한 노력과 시간을 기준으로, 그보다 노력이 부족한 이들을 가혹하게 평가한다.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은 나보다 전적으로 부족한 존재이며, 당연히 ‘덜’ 대우받아야 한다. 심지어 인격적으로(게으르고 개념 없다는 등) 모욕하기까지 한다. 이는 누구든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경쟁 사회에서 비교우위를 얻기 위한 방편이자, 끝이 보이지 않는 괴로운 자기계발 과정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다른 이를 자기보다 밑으로 끌어내리고 조리돌림함으로써 안심하는 것이다. 반대로 짓밟히는 이들은 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기계발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이 거듭될수록 타인을 평가하는 시선은 더욱 편협해지고 가혹해지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의 3장에서 학력위계주의에 빠진 대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그 끔찍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위로만으론 안 된다. 현실 직시가 필요하다
저자는 2008년도에 KTX 여승무원 사태에 대한 학생들과의 논의를 계기로 연구를 시작했다. 2000장이 넘는 에세이를 검토하고 50여 명과 심층 인터뷰를 하며 변화의 양상을 세밀히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속마음까지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해서 저자는 이십대가 괴물이 되었다는 마뜩치 않은 결론에 도달한다. 과거의 청년 세대들이 공정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불공정이라 생각하고, 평등을 거부하며, 차별에 찬성하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실제로 여성이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혜에 반대하고, 부의 세습을 부끄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부러운 것으로 바라보는 이십대 이야기가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 태도는 심한 경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한 포비아(혐오)로 표출되기도 한다. 인터넷 마녀사냥의 횡행과 ‘일베’의 출현은 그 전조일지도 모른다. 이 암울한 시대에 암울하게 변해버린 이십대들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이유다.
이십대를 둘러싸고 이제껏 진행되온 담론의 양상은 다양하다. 이십대가 자신들의 어려운 사회경제적 처지를 깨닫고 정치적으로 행동하길 주문하는 쪽도 있었고, 이십대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다며 ‘이십대 포기론’을 말하는 쪽도 있었다. 이십대 스스로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흐름이 있었으며, 얼마 전까지는 이십대에 대한 위로와 격려가 붐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이십대가 사회로부터 핍박받고 있는 존재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다. 지금의 이십대는 그러한 핍박에 순응하여, 스스로도 핍박을 하는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진보적인 이십대’ 또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이십대’ 같은 가정은 이제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십대를 두고 참 안됐다며 위로만 하면 될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라고 닦달만 하면 될까? 저자는 이십대들의 현재를 냉철히 짚고 그 원인을 찾아보는 것에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제안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십대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장면1. 어느 대학 강의실.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의 정규직 전환 요구를 놓고서 강사와 학생들이 토론을 벌인다.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한다.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다른 학생들도 이런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눈치다. 이에 힘입은 그는 계속 말한다.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수강생의 3분의 2 이상이 이 의견에 동의했다.장면2. 지방대 출신이 취업시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다룬 영화를 보고 일단의 학생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주인공의 처지에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모임을 주관한 강사는 그들에게 지방대에 대한 차별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학생은 언제 울었냐는 듯이 “지방대는 저희 학교보다 대학서열이 낮아도 한참 낮은 곳인데, 제가 그쪽 학교의 학생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을 받는 건 말이 안 되죠!”라고 답했다. 여기에 반대하는 이는 없엇다. 이들은 모두 ‘인서울’ 대학 학생이었다.장면3. 학교에서 가장 잘나가는 학과인 경영학과에 다니는 한 학생은 자기 학과가 다른 학과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겨우 턱걸이”해서 학교에 들어온 철학과나 사학과 학생들을 “개무시”한다. 수능을 보지 않고 들어온 수시생들을 ‘수시충’이라 비하하며 부르고, 재외국인 전형, 사회통합 전형 같은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학우들을 낮춰본다. 최근 몇몇 대학들에서는 지역균형, 기회균등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지균충’ ‘기균충’이라 부르며 무시한다고 한다.이것이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이십대다. 이들에겐 어떤 공통점이 있다. 바로 차별의 벽을 쌓고 상대를 밀어내는 태도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 방어와 타인에 대한 공격이 동전의 양면처럼 쌍을 이룬다. 즉 이들은 현 사회의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이기도 하다.그동안 많은 이십대 담론은 이십대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 그리고 그 해결책에 대해서 논했다. 이십대들이 문제에 부딪혀 있으니, 이를 해결하여 이십대들이 ‘제대로’ 살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러 이야기들은 상시적인 불안에 내몰린 이십대들이 그 결과로 어떤 존재로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이십대들은 ‘정상적인 삶’과 ‘윤리’와 ‘공정’ 등에 대한 개념이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 예전의 ‘진보적 이십대’를 놓고 생각한다면 이들은 매우 뒤틀려 보이기까지 한다. 이십대 자체가 문제적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이십대들은 마냥 고통 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 찬성하기까지 하며 스스로도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이런 기묘한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십대 문제를 결코 풀 수 없을 것이다.이십대 변화의 근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불안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현실에서 이십대들은 자기 몫을 챙기는 데 매우 예민해졌다. ‘자기 노력에 대한 보상’에 굉장히 집착하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길 원하는 것은 노력 없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는 ‘도둑놈 심보’다. 여기서 비정규직 고용 형태의 불합리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안 된다. 자신들은 이렇게 노력해도 취업이 안 되는데 비정규직이 바로 정규직이 된다는 사실에 이들은 박탈감을 넘어 격렬한 분노마저 느낀다. 이들에게 이 분노는 더없이 정당한 것이다.마찬가지로 이십대들이 생각하기에, 지방대와 상위권대 학생은 각 대학에 가기 위해 들인 노력(곧 수능점수)이 다른데 똑같이 취급받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차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 때문에 요즘 이십대 대학생들은 과거보다도 더 학교서열에 민감하다. 단순히 학교 등급을 나눌 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도 학과에 따라서도 등급을 나누고 정시생과 수시생, 특별전형 등을 구분 짓기도 한다. 각각의 단계 차이를 과장하고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고자 한다. 저자는 이런 이십대들의 새로운 학력주의 행태를 ‘학력위계주의’라고 부른다. 명문대 대학생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자신이 명문대를 다닌다는 것을 과시하고, 하위권 대학 학생들을 멸시한다. 대학생들이 학교와 학과명을 내건 야구잠바를 입고 다니는 유행에서도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학교 수준에 따른 과시와 멸시, 우월감과 열등감의 법칙이 이십대들을 지배하고 있다.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세종대는 서경대를, 서경대는 안양대를, 안양대는 성결대를 ‘무시’한다. 행여나 후자가 전자를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전자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난리가 난다. 그렇게 4년제는 다시 2년제를, 2년제는 또 같은 기준에 근거해서 자기들 내부를 쪼개고 줄세운다. 모두가 이렇게 같은 논리를 가지고 가해자 역할을 하며, 또 그래서 당연히 피해자 신분이 되는 상황에도 매우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셈이다. ―본문 125쪽미래가 약속되어 있지 않고, 삶이 불안정한 이들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이십대도 그렇다. 자기가 기울인 노력과 그 결과물, 즉 학력 및 여러 스펙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안달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만사를 평가한다. 노력의 결과물이 부족한 이들은 자연히 자신보다 ‘떨어지는’ 존재며, 이들이 자신보다 앞서 가는 건 정당하지 않은 일이다. 이십대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계발이 일종의 윤리 기준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십대 내면에는 새로운 윤리가 자리 잡게 되었다.이십대를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이 저주의 메커니즘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누구나 알 듯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 되면서,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계발 논리가 접목됐다. 이 논리는 경쟁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자신에 달려 있다는 기본 전제 아래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계발할 것을 주문한다. 이것은 흔하게는 ‘스펙 쌓기’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식이든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미래를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좋은 삶으로 여겨진다. 허나 그 시간투자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 혹 강요된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설령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시간을 엄격히 관리하는 노력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게으른 것보다는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는 게 낫다’는 도덕적 당위로 아무것도 약속되지 않는 자기희생을 포장한다.이런 논리가 내면의 윤리가 되어 자기를 채찍질하는 것은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열심히 사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문제는 그 채찍질이 다른 사람에게도 가해진다는 점이다. 자신이 투자한 노력과 시간을 기준으로, 그보다 노력이 부족한 이들을 가혹하게 평가한다.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은 나보다 전적으로 부족한 존재이며, 당연히 ‘덜’ 대우받아야 한다. 심지어 인격적으로(게으르고 개념 없다는 등) 모욕하기까지 한다. 이는 누구든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경쟁 사회에서 비교우위를 얻기 위한 방편이자, 끝이 보이지 않는 괴로운 자기계발 과정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다른 이를 자기보다 밑으로 끌어내리고 조리돌림함으로써 안심하는 것이다. 반대로 짓밟히는 이들은 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기계발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이 거듭될수록 타인을 평가하는 시선은 더욱 편협해지고 가혹해지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의 3장에서 학력위계주의에 빠진 대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그 끔찍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저자는 2008년도에 KTX 여승무원 사태에 대한 학생들과의 논의를 계기로 연구를 시작했다. 2000장이 넘는 에세이를 검토하고 50여 명과 심층 인터뷰를 하며 변화의 양상을 세밀히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속마음까지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해서 저자는 이십대가 괴물이 되었다는 마뜩치 않은 결론에 도달한다. 과거의 청년 세대들이 공정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불공정이라 생각하고, 평등을 거부하며, 차별에 찬성하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실제로 여성이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혜에 반대하고, 부의 세습을 부끄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부러운 것으로 바라보는 이십대 이야기가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 태도는 심한 경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한 포비아(혐오)로 표출되기도 한다. 인터넷 마녀사냥의 횡행과 ‘일베’의 출현은 그 전조일지도 모른다. 이 암울한 시대에 암울하게 변해버린 이십대들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이유다.이십대를 둘러싸고 이제껏 진행되온 담론의 양상은 다양하다. 이십대가 자신들의 어려운 사회경제적 처지를 깨닫고 정치적으로 행동하길 주문하는 쪽도 있었고, 이십대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다며 ‘이십대 포기론’을 말하는 쪽도 있었다. 이십대 스스로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흐름이 있었으며, 얼마 전까지는 이십대에 대한 위로와 격려가 붐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이십대가 사회로부터 핍박받고 있는 존재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다. 지금의 이십대는 그러한 핍박에 순응하여, 스스로도 핍박을 하는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진보적인 이십대’ 또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이십대’ 같은 가정은 이제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그렇다면 지금의 이십대를 두고 참 안됐다며 위로만 하면 될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라고 닦달만 하면 될까? 저자는 이십대들의 현재를 냉철히 짚고 그 원인을 찾아보는 것에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제안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십대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닫기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어쩌다 보니 〈진격의 대학교〉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잇달아 썼는데, 한 가지는 확실히 해야 할 것 같다. 책이 사회적 반향은 일으켰을지 몰라도 부는 따라오지 않았다(웃음). 읽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책이어서인가 보다. 이 책들은 ‘대한민국 멘토들이 가장 싫어하는 책’ ‘대한민국 CEO들이 결코 권하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업 합숙면접에서 내 책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라는 조별 토론 주제가 주어졌다는 얘기를 제자에게 들은 일도 있다. 왜 세상은 이런 얘기를 드러내는 걸 싫어할까? 그 이면에 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기에?
내가 책 두 권을 집필하게 된 강력한 동기가 있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꾸물꾸물 발전해왔다. 그런데 지난 정권부터 국정원 댓글 조작, 민간인 사찰처럼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듯한 객관적 증거가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이를 가지고 학생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민주주의가 명백히 훼손됐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심장을 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어느 날 체중계에 올랐더니 몸무게가 5㎏ 늘어났다? 그랬다면 이렇게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돼” 하면서 다음 날부터 운동을 시작하고, 다이어트 식단 짜고 난리가 났겠지. 여덟 살짜리 우리 딸도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면 메뉴판 옆에 표시된 칼로리부터 계산한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가 훼손된 게 살찐 것보다 백배는 중요한 사건 아닌가. 그런데 외모까지 경쟁력인 사회에 노출돼 있다 보니 사람들의 감정 촉수가 그 방향으로만 뻗어 있는 것이다.
내가 그날 만난 대학생들이 특별했던 것일까? 그 뒤 몇 년간 다른 대학생들을 만나며 경험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사회학자는 본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아이들의 유전자가 달라졌을 리 없지 않나. 그보다는 어떤 시대적 변화가, 어떤 사회적 환경이 젊은 친구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게 사회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사회가 병이 들면 개인도 병이 들게 마련이다”(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라고 했다. 그러니 병든 개인보다는 사회에 초점을 맞춰 이 사회가 왜 병들었는지 원인을 알아내고, 어떻게 하면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 궁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들은 왜 차별에 찬성하게 된 것일까? 나는 그 첫 번째 원인을 능력주의에서 찾는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경쟁시켜 줄을 세운 다음 이에 걸맞은 보상을 해주는(‘성과에 따른 차등적 보상’) 능력주의 모델에 기반해 발전해왔다. 누군가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자기개발을 하면 그 자신도 성공하고 사회 전반도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자본주의를 작동시켜왔다. 그런 만큼 비정규직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은 이 같은 능력주의에 위배된다. 사실일까? 능력주의를 한 사회에 적용할 때는 전제가 있다. 기회·과정·결과가 공정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이 주는 면죄부
한국 사회에서 기회의 공정성이 깨졌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누군가 이 자리에서 “강남 3구 출신의 서울대 진학률이 더 높답니다”라고 말해봐야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과정의 공정성도 마찬가지다. 심판이 언제나 공정한 룰을 바탕으로 평가를 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결과의 공정성은 가장 많이 오해받는 개념 중 하나다. 이로 인해 무임승차론이 대두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보상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경쟁에 패배한 선수라 해도 생활이 가능한 개런티는 지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경쟁에서 뒤처졌다 해도 인간으로서 삶의 존엄성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오늘날 비정규직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가 얼마를 버니까 언제 결혼하고 애를 낳고 집은 언제 사겠다는 기획을 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당장 2년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인생이 시궁창이다. 최저임금도 너무 낮고 오르는 속도 또한 느리기 짝이 없다. 이를 문제 삼으면 “그래도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잖아?” 하는 사람들이 있다. 2015년을 살아가면서 때로 영화 보고 ‘치맥’하고, 1년에 한두 번 여행 가는 게 굉장한 사치인가?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유달리 악질적이다. 자본주의라고 다 같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복지로 대변되는 사회안전망을 통해 누구든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게끔 결과의 공정성을 보완하는 나라들도 있다. 그런데 한국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신자유주의를 활짝 받아들인 뒤 개인의 경쟁력만 문제 삼았다. 자기개발에 힘쓰는 사람은 살아남고, 능력 없는 사람은 해고당해도 마땅하다는 식이었다.
자기개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권장하는 자기개발은 다르다. 지금 취업하기 힘든 대학생들은 과연 자기개발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어학원에 다니겠다니까 아버지가 무슨 초등학생이 영어학원이냐며 펄쩍 뛰셨던 게 생각난다. 그것이 1990년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초등학교 1학년이 영어학원에 안 다닌다고 하면 “어쩌려고?” 되물으면서 그 부모를 탓하는 세상이 됐다. 이렇게 일찍부터 영어를 배우고, 스펙 쌓기 3종 세트(학벌·학점·토익 점수)가 9종 세트(학벌·학점·토익 점수·어학연수·자격증·봉사활동·인턴·수상 경력·성형수술)로 확장됐는데도 취업의 바늘구멍은 왜 더 좁아지기만 하는가? 이런 현상에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은 어른 자격이 없다.
2004년 한 재벌 기업인이 “대학이 학문의 장이라는 헛소리는 이미 옛이야기다. 이제는 ‘직업교육소’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대학은 급속도로 변했다. 대표적인 예로 전국의 일반 4년제 대학 189곳 중 경영학 계열 학과 수가 686개다. 글로벌경영학과, 디지털기술경영학과, 지식경영학과 등 이름도 다양하다. 2014년 현재 4년제 대학 재학생 중 경영학 전공자는 9.8%에 이른다. 10%에 육박하는 엄청난 숫자가 경영학이라는 단일 전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학 또한 모든 가치판단을 경영학적으로 하게 됐다. 비용 절감과 이윤 증가라는 잣대에 맞지 않는 학과는 없애도 무방하다. ‘이미지 메이킹’ ‘비즈니스 예절’ 과목을 개설해 웃는 법이나 나비넥타이 매는 법 같은 것은 개설하면서 철학·역사 과목은 뒷전이다. 포스코관·삼성학술정보관·SK경영관 등등 기업이 지어준 건물을 대학이 운영한다. 효율성으로 보자면 탁월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본의 논리를 받아들일수록 대학은 자연히 자기검열에 들어간다. 심지어 누가 기업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당신 때문에 기업이 건물 안 지어주면 책임질 거냐” 하고 윽박지른다. 그러고 보면 기득권 세력은 완벽한 승리를 거둔 셈이다. 말 안 듣는 놈이 있으면 어디론가 끌고 가서 두들겨 패서 길들여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저 대학에 보내놓는 것만으로 균질화·획일화된 사고방식을 개인 스스로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권하는 능력주의나 자기개발을 개인은 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조차 그래서는 안 된다. “대학은 시장의 편협한 명령에 항복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공적 기관”이라고 제니퍼 워시번은 말한다(〈대학주식회사〉). 대학이 경영학만 떠받들고 인문학은 찬밥 대접을 받게 됐다고 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어떤 세상이 도래했는지 우리 스스로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대학이 자본의 논리를 충실히 받아들였건만 청년들의 삶은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스펙 쌓기 9종 세트는 곧 10종 세트가 될 판이다.
대학이 어찌되든 나랑은 상관없는 문제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여덟 살짜리 딸아이가 역사책만 파고드는 걸 보면 당장 나부터 그 책들을 불질러버리고 싶어진다(웃음). 역사 공부라는 게 대학, 나아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부모로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당장 내 아이가 읽는 책이 달라지고, 사교육 시장이 달라진다. 나와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가 병들면 개인도 병이 든다.
대안이 뭐냐고? 대안이 없어도 비판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비판적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일단 “한번 사는 인생, 인간답게 살자”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얼마 전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에 “우주가 내게 준 것은 서로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던데, 바로 그것이다. 이타심, 그리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것이다. 예수가 죽은 것도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반기를 들었기 때문 아닌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냐” 하는 태도도 버릴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나쁘게 변해왔다. “편향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에 흔들릴 필요도 없다. 우리 사회 자체의 균형추가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만큼 기존 가치에 의문을 품는 것이 결코 편향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대안이 뭔데?” “스타벅스 커피 마시면서 자본주의는 왜 비판해?” 따위 말에 주눅 들지도 말자. 대안이 없어도 비판할 수 있다. 내 몸은 현실에 순응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이 잘못돼 있기에 화가 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안이 없더라도, 언행이 다소 불일치하더라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끊임없이 비판하다 보면 그것 자체가 정치를 압박하고 법적·제도적 개선을 이끌어내는 수단이 된다. 부당함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면 대안이 마련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 자신도 누군가를 차별하는 데 찬성하며 일그러진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온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며 공부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 노력할 일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리뷰
나는 배웠다. 이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 모순을 없애야 한다. 사회구조가 문제다. 경쟁보다는 힘든 사람끼리 연대를 해야 한다. 나는 대학교때 이런 종류의 사회학책에 경도되었고 심각하게 공감했으며 나 혼자 살겠다고 취업준비에 열 올리는 학우들을 경멸했다. 결국 나도 취업준비를 했지만.
사회는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입사 후 오로지 경쟁 논리만 있는 회사와 대학교때 체득한 나의 생각은 충돌이 일어났다. 처음엔 회사를 부정했지만 나도 점점 경쟁논리에 물들어갔다. 경쟁인 필수고 동료는 협력해야 할 대상이기보다는 적에 가깝다. 나는 사회학 책을 멀리하게 되고 자기계발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사회학 책을 읽던 시간을 아까워했다. 신자유주의의 각자도생 논리를 삼키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고, 내가 남을 도와주지 않을테다. 그래야 내가 살아남는다.
이십대 괴물이 되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문제 의식은 이십대가 괴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일찍 ‘각자도생’논리를 삼켜버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울과 수도권 소재의 여러대학에 출강을 나가는 시간강사다. 전공은 사회학이다. KTX 여승무원들의 철도 공사 정규직 전환요구 문제를 수업 시간에 화두로 던졌다. 2004년도 채용 당시 정규직 전환을 보장받고 들어왔다는 여승무원측과, 그런 적이 없고 노동자들이 분명히 계약직임을 알고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사측의 입장이 충돌하는 문제였다.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한 내용이라 이쪽으로 내용이 흘러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저자. 그러나
“날로 정규직되려고 하면 안되잖아요!”
“처우 개선과 정규직 전환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긐ㅁ 대학생들이 왜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정규직이 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며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것 같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학생들의 답변이 날라왔다. 앞으로 노동자가 될 예비 노동자가 KTX 여승무원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줄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날로 정규직을 먹으면 안된다는 공정성이라는 칼을 가지고 온것이다.
이 책의 출간은 2013년. 2020년에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때도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 이런 포인트였다. 딱히 자격이 없어보이는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면 어쩌나 하는 주장이 반대측의 논리였던것 같다. 로또 취업이라는 헤드라인까지 나올 정도였다.
‘로또 취업’에 배 아픈 게 아니다…청년들은 공정함의 정상화를 원했다 [김현주의 일상 톡톡]
저자가 문제 의식을 가진 2010년도의 초반쯤의 사회 분위기는 심화되면 더 심화 되었지 거꾸로 가진 않은것 같다. 88만원 세대의 논의가 나온지도 십몇년이 흘렀지만 사회적으로 크게 바뀐게 없어보인다. 좋은 일자리는 없고 취업은 안되고 비정규직 일자리만 있는 현실.
좋은 일자리는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 걸까? 노오력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 자기계발을 열나게 해서. 이게 바로 20대가 생각하는 공정의 핵심이다.
p.33 즉, 문제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자기계발의 논리가 사실은 평생 ‘극복만 주문’받는 개인을 만들어버린다. 이십대는 불안하니까 자기계발 담론을 받아들여 위기를 넘어서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불안한 상태는 계속 유지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도돌이표처럼 갇혀버리는 것이다. 모두가 이 자기 계발의 수행에 동참하면 그 어마어마한 참여자들 덕택에 성공하는 ‘하나의’ 사례는 또 발견 될 것이ㄱ, 이는 ‘가능성’의 객관적 증거로 활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희박한 성공의 가능성이 표면화될 때,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수천수만의 사례는 ‘노력부족’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 처분된다. 이렇게 좌절하는 자아가 많아질수록 자기계발서 시장은 더 커진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노골적으로 말해 자기계발서를 읽었다는 건 ‘낚였다!’의 다른 말인 것이다.
내 눈으로 봤을 때,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은 자기학대에 가깝고, 자아 분열에 가까워 보이다. 좋은 일자리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이상한 스펙들이 늘어난다. 진심으로 그 이상한 스펙들을 쌓고 싶은 20대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상한 스펙을 토닥이는 다른 내가 있어 자아 분열이고,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데 거기에 또 채찍질을 가한다. 그래서 자기 학대다.
자기계발의 특징
2장에서 이런 자기계발의 특징을 이야기한다. 첫째, 자기계발이란 취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둘째, 결과가 보장되지 않지만 대안이 없어서 계속한다. 셋째, ‘자기계발에 열심이지 않은 게으른자’와의 비교에서 자신이 현재에 대한 위안과 만족을 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20대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을까?
자기계발 시대 20대의 특징
3장에서는 자기계발 시대가 만들어 내고 있는 이십대의 고유한 특징을 든다. 첫째,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기. 둘째, 편견의 확대 재생산. 셋째, 주어진 기존의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다. 이러한 특징의 원인으로는 IMF의 추억, 경영학과의 사회학, before – after 의 덫을 그 예로 든다. 각자 도생의 시작은 IMF 관리였고, 이후 부흥하는 경영학과 그에 반해 축소되는 인문 사회학이 이십대를 괴물로 만든 원인이다.
결국엔 사회구조가 문제다. 자기 학대와 자아 분열을 멈추기 위해서는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 그 자체를 치유해야 한다. 열심히 사는건 좋다. 하지만, 죽을만큼 열심히 해야 인간 대접을 받는 사회구조라면 문제가 있다.
p.187 우리 사회의 자기계발 열풍은 개인의 절박한 상황을 방치하는 사회시스템 때문에 가능했다. 사회가 개인의 삶을 좀 더 잘 보호해줬더라면 굳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의 늪에 빠져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는 더욱 원자화 될것이고, 사회 연대는 커녕 각자 살기 더 바뻐질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꼬투리 잡아서 멸시한다. 그게 이 사회의 모습이 되어버린것 같다.
p.233 모두가 누군가를 멸시하고 누군가에게 멸시 받는다. 그래서 ‘보란듯이 갚아주겠다’는 자기계발에 몰입한다. 그러나 이건 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순환고리에 갇힌다. 고생하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본인이 쌓은 기반을 지키려고 시간관리라는 차별화 도구로써 학력을 위계화시키는 생존전략에 매달리지만, 이것으로 악전 고투의 현실을 탈출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이십대의 자기긍정은 결국 ‘덫’이요 ‘늪’일 뿐이다. 실패하면 끝장인 세상에서 이십대들은 그렇게 차갑게 변한다.
[강준만 칼럼] 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하는가?
갑의 못된 횡포를 ‘갑질’이라고 한다. 갑의 갑질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지는 당해본 을만이 안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진짜 비극은 갑의 갑질에 있다기보다는 갑질을 당한 을이 자신보다 약한 병에게 갑질과 다를 바 없는 을질을 한다는 데에 있다. 병은 또 자신보다 약한 정에게 갑질·을질과 다를 바 없는 병질을 한다.
이런 먹이사슬 관계를 온몸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이들이 놀랍게도 아직 갑을관계의 본격적인 현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학생들이다. 미리 연습을 하려는 걸까?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가 출간한 은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을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다. 대학생들과의 자유로운 대화에 근거한 애정 어린 고발인지라 분노보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오 박사는 대학의 수능점수 배치표 순위가 대학생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전국의 200개 대학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대학 간 서열을 따지는 건 단지 재미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인정투쟁이자 생존투쟁이다. 서열이 한두개 차이 나는 대학을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서열이 앞선다는 대학의 학생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흥분한다. 이런 현실에 대해 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대학생들의 이런 정신상태는 우리 사회에서 갑을관계와 비정규직 차별이 사라지기는커녕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 박사 말마따나, 오늘날 이십대는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편한 시절을 살았던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죄스러울 따름이다.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은 미국에서 벌어진 ‘능력주의’(meritocracy)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늘날 미국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정당화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바로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하는 능력주의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 학력과 학벌의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전의 귀족주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이런 한국형 ‘세습 자본주의’를 바꾸는 것이 제1의 개혁의제가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수능점수 몇점이나 정규직·비정규직의 능력 차이는 사소한 것임에도 우리는 그런 차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에 따른 차별에 찬성하는 것을 정당한 능력주의라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평등주의가 강한 사회라곤 하지만, 평등주의는 위를 향해서만 발휘될 뿐이다. 밑을 향해선 차별주의를 외치는 이중적 평등주의를 진정한 평등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이중적 평등주의는 우리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의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 체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50년 전 시인 김수영이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물었듯이, 이제 우리도 스스로 물어야 할 때다. 우리가 사소한 차이에만 집착하고 그 차이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에 분개하는 동안 세상은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건 아닐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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