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터너 작품 | 윌리엄 터너가 그림 속에 안개를 그린 이유 | 당신이 몰랐던 [윌리엄 터너] 그림 속 숨겨진 비밀 | 명화 해설 미술사 설명 빠른 답변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윌리엄 터너 작품 – 윌리엄 터너가 그림 속에 안개를 그린 이유 | 당신이 몰랐던 [윌리엄 터너] 그림 속 숨겨진 비밀 | 명화 해설 미술사 설명“?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you.maxfit.vn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you.maxfit.vn/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예술의 이유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96,102회 및 좋아요 3,080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윌리엄 터너 작품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윌리엄 터너가 그림 속에 안개를 그린 이유 | 당신이 몰랐던 [윌리엄 터너] 그림 속 숨겨진 비밀 | 명화 해설 미술사 설명 – 윌리엄 터너 작품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000 이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의 그림
테이트 브리튼을 대표하는 예술가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부터 눈보라, 그의 말년 작품까지

윌리엄 터너 작품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작품에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32), 《전함 테메레이르호(號)》(1839), 《안개 속의 해돋이》, 《비·증기·속력》, 《황금가지》 등이 있는데, 원숙한 빛의 표현이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3/29/2022

View: 1513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빛의 화가 – Daum 블로그

그는 성이나 시골의 대저택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그려주는 화가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턴브리지의 서머힐 Somer Hill,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4/3/2021

View: 6333

명화 > 위아트 명화 > 윌리엄 터너

명화작품 그림액자 인기작품 기획전. 62,000원. BEST 02. 대형작품 명화 기획전. 347,000원. 327,000원 … 윌리엄 터너 (William Turner). 62,000원.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art.or.kr

Date Published: 10/19/2021

View: 139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윌리엄 터너 작품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윌리엄 터너가 그림 속에 안개를 그린 이유 | 당신이 몰랐던 [윌리엄 터너] 그림 속 숨겨진 비밀 | 명화 해설 미술사 설명.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윌리엄 터너가 그림 속에 안개를 그린 이유 | 당신이 몰랐던 [윌리엄 터너] 그림 속 숨겨진 비밀 | 명화 해설 미술사 설명
윌리엄 터너가 그림 속에 안개를 그린 이유 | 당신이 몰랐던 [윌리엄 터너] 그림 속 숨겨진 비밀 | 명화 해설 미술사 설명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윌리엄 터너 작품

  • Author: 예술의 이유
  • Views: 조회수 96,102회
  • Likes: 좋아요 3,080개
  • Date Published: 2021. 6.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ZAglIzCYoF8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영어: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년 4월 23일 ~ 1851년 12월 19일)는 영국의 화가이다.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회화에 손을 대어 왕립 미술원에서 그림 수업을 한 뒤, 잠깐 사이에 준회원에서 27세 되던 1802년에 정회원으로 올라갔다. 여러 곳의 풍습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빛의 묘사에서 획기적인 표현을 남긴 화가이다.

후에 문학가 러스킨이 격찬하여 명성이 높아졌으며, 일생 동안 풍경화를 계속 그린 화가로서 17세기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로랭을 능가하는 것이 일생의 염원이었다. 그런만큼 중기(中期)에는 로랭의 영향이 보이나 후반에는 여기에서 벗어나 한층 더 빛의 묘사로 들어간다. 터너는 1819년부터 약 10년마다, 세 번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는데, 물과 하늘, 그리고 빛나는 남국의 태양은 터너의 꿈이요 시였다. 터너는 풍경의 일체를 빛의 묘사에 집중시켜 빛 속에 용해시켜 갔는데, 그것은 균정(均整)이 잡힌 윤곽에서 정중하게 그린, 당시로서는 대담한 창작이었다. 더욱이 그는 다시 창작을 계속하여, 《항구 앞바다의 눈보라》(1843)에서 배의 그림자까지 거칠게 불어대는 태풍 속으로 꺼지는 듯 눈보라의 심한 상태를 주제로 잡고, 과거의 회화에 전례없는 동적인 표현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에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32), 《전함 테메레이르호(號)》(1839), 《안개 속의 해돋이》, 《비·증기·속력》, 《황금가지》 등이 있는데, 원숙한 빛의 표현이 아름답다. 이상하게도 제자나 후계자가 없는 화가로서 고독한 성격이었으며, 본가 외에 체르시에 은거하면서 이름을 바꾸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이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주요 작품 [ 편집 ]

The Fighting Teme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Fishermen at Sea

The Battle of Trafalgar

Rain, Steam and Speed – The Great Western Railway

The Slave Ship

Snow Storm: Hannibal and his Army Crossing the Alps

Crossing the Brook

Chichester Canal

Sunrise with Sea Monsters

Light and Colour (Goethe’s Theory) – The Morning after the Deluge – Moses Writing the Book of Genesis

The Burning of the Houses of Lords and Commons

Calais Pier

같이 보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윌리엄 터너 작품 작품세계 영화 화가

– 윌리엄 터너 작품

어느 현대 과학자는 윌리엄 터너가 살던 시대의 대기 현상에 대한 자료를 연구하기 위해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근거해 결론을 짓기도 할 정도로 대기 인상파의 선구자 윌리엄 터너의 빛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그는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하지만 그 터너를 다루는 감독은 다름 아닌 마이크 리로 사실 그의 작품세계를 마이크 리, 미스터 터너

때론 아무런 제목이나 설명 없이 작품을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랍니다. 순수하게 작품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죠. 가만히 그림과 마주해 보세요. 당신이 느끼는 윌리엄 터너 작품 감상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의 작품세계 ① 1775년 1852년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 자화상 Mallord William Turner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의 작품세계 ①

– 윌리엄 터너 작품세계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는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로서, 19세기 최고의 풍경화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오늘날에도 미술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윌리엄 터너

윌리암 터너의 작품세계.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 1851. Fingals Cave, 1832. Oil on canvas, 90.9 x 121.4 cm, Yale Center for 윌리암 터너의 작품세계

쓰고 있는 모세, 1843년 作 400억원이라는 숫자가 아니더라도, 이 두 작품 없이는 윌리엄 터너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사라진 그림의 가치는 무려 400억원, 터너작품도난사건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의 작품세계 ② 1775년 1852년 서리가 내린 아침 Frost Morning Mallord William Turner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의 작품세계 ②

– 윌리엄 터너 영화

이 영화의 힘은 세 명의 장인에게서 나온다. 실존 인물이었고 영화의 주인공인 윌리엄 터너, 그를 연기한 배우 티모시 스폴 그리고 감독 마이크 리가 매거진M 미스터 터너를 만든 세 명의 장인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그는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하나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터너가 매혹되었을 법한 영국의 넓디넓은 초원, 마이크 리, 미스터 터너

그때의 기록이 계속 떠올라서 ㅜㅜㅜ 앞으로도 이 아저씨는 나에게 윌리엄 터너가 아닌쥐로 기억 될.듯 2월 셋째주 영화의전당 윌리엄 터너 상영 시간표 화가이자 평범한 남자 윌리엄 터너의 이야기 미스터 터너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그만의 방식으로 풍경화를 그려냈던 윌리엄 터너! ​ ​ ​ ​ 영화 미스터 터너는 그런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모습과, 여러가지 숨겨진 이야기들을 터너 영화 미스터 터너시사회 다녀왔어요/ 미스터 터너는 어떤 영화?

– 윌리엄 터너 화가

이렇듯 유명한 인상파 화가들의 조상이며 풍경화의 대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로 알려진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인상파의 선구자 윌리엄 터너의 빛

예를들어 영국 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그림을 보면, 그는 시야가 아주 넓은 눈을 가진 화가이며 그의 그림은 스케일이 크다. 거대한 9폭풍 속의 예술혼윌리엄 터너

안녕하세요, 써니입니다 오늘은 영국의 인상주의 화가로 유명한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텐데요 과연 그는 어떤 그림을 그리는 영국 인상주의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드로잉입니다 ​ 세기의 드로잉 포스팅은 오랜만이죠 ​ 오늘은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 작품에서 대해서 볼께요 광진구 취미미술학원, 윌리엄 터너 광진구 취미 광진구취미미술학원, 18세기 영국화가 윌리엄 터너 드로잉

차한잔의 여유로

윌리엄 터너

터너 ,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빛과 색채, 표현주의적인 분위기로 인해 매우 폭넓고 웅장하며, 특히 바다를 표현한 작품이 뛰어나다. 1851년에 죽어 세인트폴 대성당에 묻혔다.

개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빛과 색채, 표현주의적인 분위기로 인해 매우 폭넓고 웅장하며, 특히 바다를 표현한 작품이 뛰어나다.

초기생애와 작품

그의 아버지는 이발사였으며 어머니는 1804년 정신이상으로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10세 때 미들섹스의 브렌트퍼드에 있는 삼촌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학교에 다녔다. 터너는 1789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불과 15세에 수채화 전시회를 열었다. 여름방학 동안 스케치 소재를 찾아 전국을 여행했는데, 1789년 옥스퍼드, 1791년 브리스틀, 1792년 웨일스를 여행했다. 1794년에는 〈Copper Plate Magazine〉·〈Pocket Magazine〉에 실을 판화의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1796년부터 왕립 아카데미에서 수채화뿐만 아니라 유화도 전시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유화 작품인 〈바다의 어부들 Fishermen at Sea〉은 달빛에 의한 변화를 그린 것으로 당대의 비평가에게 ‘독창적인 성향’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799년에 준회원으로는 가장 어린나이인 24세에 왕립 아카데미에 선출되었으며 1802년에는 옛 대가들의 작품에 필적하는 대형 연작을 제출하여 아카데미의 정식회원이 되었다.

화가로서는 성공했지만 1800년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와 함께 살면서 화실의 보좌 겸 총대리인으로 지냈다. 터너는 비밀스럽고 비사교적이었으며 약간 괴팍하기까지 했다. 1798년 세라 댄비라는 미망인과 사랑에 빠져 10년 정도 관계를 지속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결혼하지 않았으며 돈에 인색한 사람으로 작품 제작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작품 소재를 찾기 위해 꾸준히 여행했다. 1797년 요크셔와 레이크디스트릭트, 1798년 웨일스, 1801년 스코틀랜드, 1802년 처음으로 유럽 대륙을 방문했다.

칼레 시까지의 횡단 여행은 험난했으며 이때의 경험을 〈칼레 부두 Calais Pier〉에 생생하게 담았다.

1807년 〈Liber Studiorum〉으로 알려진 100점의 판화 연작을 출판하는 대규모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다양하고 폭넓은 자신의 작품을 영구 보존하는 것이었는데 주제의 일부는 기존의 유화와 수채화에서, 나머지는 〈Liber Studiorum〉을 위하여 특별히 고안되었다.

여러 명의 판화가를 고용했지만 작업의 모든 단계를 일일이 감독하고 자신이 직접 에칭하기도 했는데 모든 작품이 수많은 준비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 판화집은 역사적인 주제와 건축물, 산악지방, 전원, 바다경치 등 풍경화에 있어서 가능한 모든 양식의 구도를 담아 각 권에 5점씩 여러 권으로 묶어 출판되었다. 터너는 1807년 6월의 첫권 이후 71점의 판화를 출판했는데 1819년에는 흥미를 잃고 그만두었다.

중기

1800년대 후반 터너의 그림은 점점 밝아지 고 대기의 표현이 강조되었다.

〈St. Mawes at the Pilchard Season〉(1812, 테이트 미술관)이나 옥스퍼드를 그린 2점의 그림(1809~12, 전시 1812) 등 실재의 장소를 그린 그림에서도 딱딱한 지형도적 성격은 밝은 색채에 의해 완화되어 있으며 〈서리가 내린 아침 Frosty Morning〉과 같은 작품은 전적으로 빛의 효과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성이나 시골의 대저택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그려주는 화가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턴브리지의 서머힐 Somer Hill, Tunbridge〉·〈린리스고 궁전 Linlithgow Palace〉(1810, 리버풀 워커 미술관) 등이 있다.

바다를 주제로 다루는 데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으며 가장 야심적인 작품은 〈수송선의 난파 Wreck of a Transport Ship〉(1810, 리스본 걸벤키언 재단)이다.

1802년 그에게서 해양화 1점을 산 에그러몬트의 백작은 그의 정식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810년 처음으로 요크셔의 판리홀에 있는 중요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월터 폭스를 방문했으며 이후 폭스가 죽은 1825년까지 거의 매년 여름 몇 주일을 그곳에서 지내고는 했다.

그는 계속 멀리 여행했는데 1811~13년에는 데번셔·콘월·서머싯을, 1815, 1816년에는 T. D. 휘터커의 〈리치먼드셔의 역사 History of Richmondshire〉의 삽화로 쓸 20점의 수채화를 위해 요크셔를 여행했다. 다음해에 유럽으로 가 주로 워털루 전쟁터를 방문했으며 후에 이를 주제로 해서 어둡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지닌 〈워털루 전쟁터 The Field of Waterloo〉(1818, 테이트 미술관)를 제작했다.

1820년대에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방 그리고 유럽을 번갈아가며 여행했다.

1821년 센 강을 주제로 섬세한 느낌과 푸른색 바탕의 수채화 연작을 제작했으며, 1825년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다음 해에는 뫼즈 강, 모젤 강, 루아르 강을 방문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디에프 항구 The Harbor of Dieppe〉·〈쾰른:정기선의 도착:저녁 Cologne:The Arrival of a Packet Boat:Evening〉·〈모틀레이크 테라스:이른 여름 아침 Mortlake Terrace:Early Summer Morning〉(뉴욕 시의 프릭 컬렉션) 등이 있다.

후기생애와 작품

그는 말년에 더욱 유명해지고 부유해졌으며 이전보다 은폐된 삶을 살았다.

왕립 아카데미의 원근법교수였지만 여러 해 동안 활동하지 않다가 1838년 교수직을 사임했다. 1839년 첼시에 작은 별장을 구입하고 신분을 숨긴 채 부스라는 가명으로 살았다. 늙은 가정부가 그를 돌보면서 그의 개인생활을 철저하게 보호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의 화랑을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다. 터너는 여행을 계속하여 생애의 마지막 15년 동안 이탈리아·스위스·독일·프랑스를 다시 둘러보았다. 관찰자들에 의하면 해외방문기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의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터너의 유품 중 약 1만 9,000점에 이르는 드로잉은 이러한 작업에 대한 열정을 입증하고 있다.

초기작품들은 건축물과 자연의 세부에 대한 정확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후기에 와서는 덩어리를 꾸밈없이 표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빛과 색채의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구도는 움직임과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더욱 유동적으로 바뀌었다. 한편 〈노럼 성과 일출 Norham Castle, Sunrise〉·〈갑과 갑 사이에 배가 있는 일출 광경 Sunrise, with a Boat Between Headlands〉(1835~45, 테이트 미술관) 등에서는 흰 바탕에 매우 엷은 채색을 입혀 단순한 색채 표시만을 보여준다. 터너는 이러한 상태의 그림을 그대로 아카데미에 보내고 전람회가 공식으로 개최되기 전에 출품 작품을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공개하여 세부 묘사를 첨가하거나 자신의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수한 문제들을 보완하면서 작품이 걸리게 될 위치와 조명 등 작품을 둘러싼 특수한 환경을 고려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너가 이러한 기회까지도 적극 이용했다는 것은 그가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었으며 때로는 동료들의 그림을 깊이 숙고했다는 것(또는 반대로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해양화인 〈Helvoetsluys〉에서는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크게 부푼 빨간 부표가 보이는데 1832년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된 〈워털루 다리의 개통 Opening of Waterloo Bridge〉에서는 빨간 부표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러한 수법은 터너가 죽을 때 그의 스튜디오에서 발견된 가볍게 손질된 많은 그림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화려한 추상화는 그가 보여준 낭만적 작품들보다 현재 훨씬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당대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고대 로마와 베네치아의 흥미 있는 주제를 환상적으로 복원한 작품들을 제외하고 후기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물 속에서 떠오르는 정령과 일몰, 그리고 달빛을 대담하게 결합시킨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 The Parting of Hero and Leander〉(1837, 런던 국립미술관)과 낡은 배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린 〈해체를 위한 마지막 정박지로 끌려가는 ‘파이팅테메레르호’, 1838 The ‘Fighting Témé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1838〉·〈비와 증기와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Rain, Steam, and Speed:the Great Western Railway〉 등이 있다.

젖빛을 발하는 〈에우로파의 계단에서 본 베네치아 Venice from the Steps of the Europa〉(1842)는 터너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인 1847년 런던 국립미술관에 기증되었고 그곳에서 전시된 그의 첫 그림이다. 터너가 불과 물의 요소들에 열중했다는 것은 2편의 그림인 〈불타는 국회의사당 Burning of the Houses of Parliament〉과 대규모 스케치인 〈바다에서의 불 A Fire at Sea〉(테이트 미술관), 〈로켓과 푸른빛 Rockets and Blue Lights〉(1840, 매사추세츠 윌럼스타운 클라크 미술연구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터너는 1851년에 죽어 세인트폴 대성당에 묻혔다.

그는 유언을 통해 그의 그림들을 전시할 수 있도록 미술관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그것들을 기증하고 ‘쇠퇴한 미술가들’을 위한 자선단체를 설립하도록 14만 파운드에 이르는 그의 재산을 정부에 기증하고자 했다. 터너의 유산 중 그림과 데생들은 국가에 귀속되었지만, 돈은 오랜 소송 끝에 그의 먼 친척들에게 돌아갔다. 19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지프 듀빈 경이 그의 작품들을 수용하기 위해 테이트 미술관 내에 별실을 마련했다.

1928년 템스 강의 범람으로 테이트 미술관의 창고가 침수되자 그뒤 안전을 위해 그의 모든 데생과 수채화들은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터너에 대한 평가

터너는 빛과 순수한 색채를 추구함으로써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를 예고했는데, 그의 진정한 인상주의적 스케치들은 그당시에 거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모네와 피사로는 1870년 런던에서 그의 작품들을 보고 큰 흥미를 느꼈다. 1920년대에 영국의 미술평론가인 로저 프라이의 글을 통해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예찬이 절정에 이르자 터너의 명성은 일시적으로 떨어졌다.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그의 작품들이 전시된 이후 유럽의 주요도시들에서도 전시되었으며, 추상화가들은 색채를 중심으로 한 터너의 후기작품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뒤 대규모의 전시회들이 열리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미술] 윌리엄 터너 William Turner

728×90

반응형

SMALL

윌리엄 터너 William Turner

사진 출처 : 네이버

윌리엄 터너는 1775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건축가가 되기 위해 그는 1789년 건축 설계사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무렵 그의 스케치 작품들은 아버지의 가게에 진열되었습니다. 왕립 아카데미의 한 회원이 그의 스케치들을 주목했고, 터너에게 화가가 될 것을 권유했습니다. 터너는 유명한 건축가 존 손을 위한 도안가로 일하며, 웨일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지를 여행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1799년 터너는 그를 도안가로서 그리스에 데려가려는 엘긴경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 대신 영국의 기인 윌리엄 백퍼드의 초대로 그의 별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래고 1800년에 백퍼드는 그때까지 터너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유화 <이집트의 다섯 번째 고민>을 사들였습니다. 이 무렵 터너는 자신의 그림들에 제목을 달기 시작했고, 측량한 것처럼 정확한 풍경과 건축물의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미앵 평화조약으로 터너는 1802년 스위스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비드의 작업실과 나폴레옹의 노획으로 풍성해진 루브르에서 많은 그림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1803년에 터너는 왕립 아카데미의 대표로 선발되었고, 그의 회화 방식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해졌습니다.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1843년 존 러스킨의 『현대적인 화가들』이 출간되면서 잠잠해졌습니다. 터너는 이 시기에 자신의 집에 화랑을 설치했습니다. 1812년 그의 작품 <눈보라 :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는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고, 그 다음해에는 자유분방한 터너의 양식 대한 아카데미의 공격이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도 1813년에 그려진 작품 <아침 서리>로부터는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1810년대 중반 그는 다시 여행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여행의 목표는 서적 삽화와 연작을 위한 초안을 얻기 위해서였으며, 그것은 1830년대 중반 무렵 출판되었습니다. 1834년에는 <국회의사당의 화재>가 제작되었습니다. 1840년 터너는 세 번째 베네치아 여행을 하게 되고, 괴테의 『색체론』은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1년 후, 그는 <비, 증기, 속력>을 아카데미 전시회에 선보였습니다.

1845년 터너는 작품 활동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진술에 몰두했고, 1851년 그가 죽기 얼마 전에 런던에서 열린 첫 번째 국제 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런던에서 사망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터너는 윤곽이나 형태를 거의 완전히 용해시켰습니다. 그의 색채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추상화의 경계를 넘어서지는 않습니다. <비, 증기, 속력>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등장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철도’라는 현상과 그것이 포함돼 있는 산업 시대를 묘사한 중요하고도 유일한 작품이었습니다.

※ 추상미술

추상미술 또는 비구상 미술은 양식의 흐름이라기보다는 20세기에 널리 퍼진 하나의 미술 현상이다. 최초의 추상미술은 칸딘스키가 1910년에 이론적인 연구 결과로 이루어냈다. 추상미술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엄격한 기하학적인 방향(*구성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체험에서 출발하는 방향(*추상표현주의)이다.

※ 인상주의(Impressionism)

‘인상, 느낌’을 뜻하는 프랑스어 ‘impression’에서 유래. 모네의 1872년 작품 <인상-해돋이>의 제목을 따서 명명되었던 1870년대의 프랑스 미술과 그 이후의 회화 양식.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와 바르비종 화파의 풍경화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을 즉흥적이고 현상적인 형태로 포착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인상주의의 특징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인 플레네르(Plein-air)와 밝은 색채 사용이다. 그리고 벨라스케스와 터너의 지식을 전제로 하여 물체의 윤곽을 용해시키는 회화 방식도 종종 사용되었다. 영국과 독일에서도 인상주의가 수용되었다. 독특한 형색의 점묘 주의 역시 인상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구성주의(Constructinism)

1914년경 러시아에서 시작된, 회화·조형예술·건축 분야에 걸친 추상적인 예술 운동. 말레비치가 창시한 쉬프레마티슴이 이론적인 기초가 되었으며, 내용이나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미술’을 목표로 했다. 여기에서는 ‘순수한’ 기하 형태인 정사각형, 직사각형, 원 그리고 ‘순수한’ 직선이 사용된다. 구성주의는 바우하우스와 데 슈틸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 화단에서 풀록에 의해 시작된 미술 사조. 추상표현주의의 뿌리는 특히, 이성의 지배를 거부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는 초현실주의에 있다. 유럽에서 이와 나란히 전개되었던 현상은 앵포르멜과 타시즘이다.

728×90

반응형

LIST

보이는 자연 아닌 느끼는 자연 그리다

글씨키우기 글씨줄이기 프린트 top

facebook twitter kakao story naver band share

전과 영화 로 우리 곁에 온 윌리엄 터너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년)가 뒤늦게 우리 곁에 찾아왔다. 그의 작품을 포함한 <노르망디>전이 열리고 있고 그의 삶을 다룬 영화 <미스터 터너>가 곧 개봉된다. 터너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에게 영향을 미친 영국 인상파 화가다. 그를 알려면 오늘의 영국을 봐야 한다. 우리가 ‘문화융성’을 기치로 문화복지와 창조적 산업으로서의 문화에 집중하는 것처럼 영국은 1997년 음악·미술·패션 등 예술 분야를 선도하는 분야를 창조 산업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이를 적극 지원해 영국의 이미지로 사용하고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 사업을 전개했다. 그들은 단순히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 산업의 비즈니스 효율성을 키워주는 핵심 산업으로 위상을 높여 명실공히 문화 콘텐츠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태양을 태운 사나이 터너, 인상파의 비조

영국의 문화적 이미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영국은 보수의 상징이었다. 이런 보수적인 이미지의 영국이 일탈과 도발을 일삼는 뮤지컬과 영화, 소설 그리고 현대미술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들은 196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비틀즈 이후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문화, 소비되는 문화를 창조했다. 사실 문학사나 미술사를 살펴보면 영국은 역사와 세계사적 지위에 비해 유명한 예술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① 터너 ② 터너 (1812) ③ 영화 의 한 장면 ⓒ 정준모·진진 제공

하지만 터너가 영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다. 터너는 인상파 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화가다. 그는 빛을 그리고자 했던 인상파 화가에게 슬쩍 답안지를 보여준 사람으로,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인상파의 인기가 더해질수록 그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이발사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누이를 잃고 이에 상심한 어머니마저 정신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말년에 독신인 아들을 위해 집사처럼 집안을 돌봤고 물감을 준비하거나 캔버스 밑칠을 하는 조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4세에 로열아카데미에 입학한 터너는 전통적이며 아카데믹한 미술 수업을 받았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면서 일찍이 작가로서의 성공을 약속받았다. 5년 후인 32세에 예술적 업적을 인정받아 왕립 아카데미 원근법 교수가 됐다. 당시는 이상적이고 영웅적인 주제에 종속된 풍경화가 주종을 이루던 시기로 터너는 이러한 전통과 연결선상에 있는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1600~1682년)의 풍경화에 경도됐다. 하지만 터너는 곧 로랭의 정적인 세계에서 동적이며 현란한 색채를 지닌 화풍으로 옮겨갔다.

영화 <미스터 터너>(2014년)의 감독 마이크 리는 작가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졌던 1820년부터 터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인생 후반부를 영화에 담았다. 고집스럽게 본능적으로 자신의 회화를 고집했던 터너 역의 티모시 스폴은 2014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폴 제슨이 그의 아버지 역을, 그리고 터너의 추종자이자 하녀인 한나 역의 도로시 앳킨슨은 묘한 백치미와 섬뜩할 만큼의 표정 연기로 영화의 긴장감을, 때로는 실소를 낳게 하는 광폭 연기를 펼친다. 실제로 한나는 터너가 죽은 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터너의 연인이었던 과부 소피아(마리온 베일리)는 화가로서의 터너의 삶을 내조한다. 그리고 터너가 변화한 화풍으로 인해 ‘환상’ ‘신비’ ‘수수께끼’ 등의 비난을 감내해야 했을 때 유일하게 그를 방어해준 미술평론가, 예술 후원자, 수채화가, 저명한 사회사상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존 러스킨 역은 조슈아 맥과이어가 맡았다. 러스킨은 작가의 주요 역할은 ‘자연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궁지에 몰린 터너를 변호해줬다.

터너는 그림을 위해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그의 작품은 보수적인 아카데미즘으로부터 변화를 시도하는데 그 바탕은 단순히 그의 상상력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충실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인위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화면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어떤 역동적인 힘 또는 세력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긴장감을 보여준다. 그는 더 이상 서사적인 서술에 매달리기보다는 ‘상황’ 그 자체와 자연 현상의 ‘전달’에 집중한다.

“내가 눈보라를 그린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장면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는 그의 말에서 보듯 그는 보이는 자연이 아니라 느끼는 자연을 그리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미술학도에게 남긴 그의 이 조언은 그의 미술세계를 여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화면에 전개된 빛과 색채의 운동과 거기에서 발산하는 강한 에너지에 더 비중을 두었다. 그에게 자연은 역동적이며 유기적이다. 그래서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강한 빛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억이나 지식을 통해 그려내는 사실주의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대로 그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작열하는 빛으로 인해 아무것도 없는 빛으로 가득 찬 흰색 그림을 그렸다.

터너는 자연에서 보이는 현상보다는 스스로가 느끼는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성질에 집중했다. 그는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우주적 질서가 자신의 마음에 형성된 표현 욕구를 화면에서 조형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자연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이런 정서는 그의 미완성 시집 <덧없는 희망>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화면은 아는 것, 본 것 등 인위적인 것보다는 스스로 체득한 자연을 묵묵히 자신의 질서를 통해 대자연의 숭고함과 거기에서 드러나는 힘의 조화들로 채워진다.

터너는 로랭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모네에게 영향을 끼쳤다. ① 클로드 로랭 (1642) 유화 105X152cm ② 모네 (1872) 캔버스에 유채 48×63cm 마르모탕 미술관 풍경화가에서 휘몰아치는 구름, 바람의 세계로

이런 그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고전주의와 자연주의, 낭만주의를 넘어 1870년 보불전쟁 때 영국으로 몸을 피했던 모네·피사로 등 프랑스 인상파 좌장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터너는 여행을 통해 자연을 몸으로 겪은 ‘장소의 특수성’을 중시했다. 자연의 위대한 힘과 특질에 몰두하면서 이탈리아, 프랑스, 스코틀랜드는 물론 플랑드르 지방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그리하여 느끼는 자연을 빛과 색을 통해 보이는 대로 그리는 새로운 사실주의를 실천한다.

그는 수많은 곳을 직접 여행하고 스케치를 하면서, 60년 이상 쉬지 않고 노예처럼 그림만 그렸다. 항상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한 채 혼자 작업하고 작품을 잘 팔지도 않았다. 사생활도 잘 알려지지 않아 죽은 후에야 그에게 숨겨놓은 여자와 딸 둘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미술관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스케치 1만9000점과 스케치북 200여 권을 기증해 현재 테이트 브리튼에 11개의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그런 점 때문에 영화는 아쉬움이 많다. 터너의 관점이나 미학보다는 데카당스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자연에 대한 그의 탐구와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돌아오는 돛대에 스스로 묶여 그가 매혹됐던 폭풍우 치는 바다의 대기와 하늘을 현장에서 직접 관찰했지만 영화 속의 그 장면은 예술가의 열정보다는 객기와 허세로 보이게 만들었다. 영화 속 터너가 괴짜에다 독선적이며 괴팍하고 산만한 사람으로 그려져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리고 있는 점은 아쉽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키워드에 대한 정보 윌리엄 터너 작품

다음은 Bing에서 윌리엄 터너 작품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윌리엄 터너가 그림 속에 안개를 그린 이유 | 당신이 몰랐던 [윌리엄 터너] 그림 속 숨겨진 비밀 | 명화 해설 미술사 설명

  • 예술의 이유
  • 예술가
  • 미술
  • 예술
  • 작품
  • 현대미술
  • Art
  • Paintings
  • 널위한문화예술
  • 예술가의 이유
  • 명화의 비밀
  • 스크랩
  • 윌리엄 터너
  • 그림
  • 전함 테메레르
  • 터너 상
  • Turner
  • fog
  • 영국
  • 테이트
  • TATE
  • TATE Britain
  • England
  • English
  • 인상주의
  • 인상파
  • 클로드 모네
  • Monet
  • oseph Mallord William Turner
  • J. M. W. Turner
  • Turner Prize
  • 데미안 허스트
  • art history
  • 미술관
  • 미술사
  • 서양미술사

윌리엄 #터너가 #그림 #속에 #안개를 #그린 #이유 #| #당신이 #몰랐던 #[윌리엄 #터너] #그림 #속 #숨겨진 #비밀 #| #명화 #해설 #미술사 #설명


YouTube에서 윌리엄 터너 작품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윌리엄 터너가 그림 속에 안개를 그린 이유 | 당신이 몰랐던 [윌리엄 터너] 그림 속 숨겨진 비밀 | 명화 해설 미술사 설명 | 윌리엄 터너 작품,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