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문 설교 | [주일설교(19.06.23)] / 요한복음 강해(25); ‘나는 양의 문이라'(송태근 목사) 58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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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9.06.23)] / 요한복음 강해(25); ‘나는 양의 문이라'(송태근 목사)
[고화질영상녹화](요 10:1-7)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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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그 세 번째 – 양의 문이신 예수 – 뉴스앤조이

영어 성경에는 양의 문이란 말에, gate for the sheep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양을 위한 문이지요. 양을 위한 문이라 함은, 양의 문, 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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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4/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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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문 되신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10장 1-10절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다시 한번. 맛보기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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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9/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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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0장7절-8절 “나는 양의 문이라” 2021년 3월25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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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bctl.org

Date Published: 10/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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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0) – 기멀전

양들을 돌아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 교회의 목자가 어떤 사상과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지 알고 따르면 복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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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4/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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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목사 설교] 양의 문, 선한 목자 – 리폼드뉴스

본문은 요한복음 10:7-18절의 말씀입니다. 바로 앞부분인 1-6절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문은 양의 문이며 동시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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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reformednews.co.kr

Date Published: 6/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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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I) / (김성수 목사) – 다음블로그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I) (김성수 목사) (요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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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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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문교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2문답. 설교일자: 20220731 [오후예배]. 설교목사: 김준범목사. 히브리서 9 장 11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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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sheep.org

Date Published: 3/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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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모음 –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양의 문이나 선한 목자나 의미는 같습니다. 양들은 문을 통해서만 우리에 들어갈 수 있고, 선한 목자를 만나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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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abia.net

Date Published: 1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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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파워]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10:1-10)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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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power.co.kr

Date Published: 7/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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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9.06.23)] / 요한복음 강해(25); '나는 양의 문이라'(송태근 목사)
[주일설교(19.06.23)] / 요한복음 강해(25); ‘나는 양의 문이라'(송태근 목사)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양의 문 설교

  • Author: S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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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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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새해를 맞이하여 일월에는 문을 주제로 하여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묵상한 첫 번째 문은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 사도가 옥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게 된 사건을 통해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과 걱정 근심 등 그러한 곳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벗어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여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래야 주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와 같이 거하시며 먹고 마시는 기쁨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묵상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두 가지 문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는데, 오늘은 그래서 세 번째 문입니다.

문이 많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문을 자주 사용하니까, 그런 문쯤은 이제 들고 나고 하는데 이골이 났으니까,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벌써 1절에 문이 등장하지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문이 등장하는데, 어떤 문이냐? 양의 우리, 그러니까 양을 가두어 두고 보호하는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1절부터 5절에 걸쳐 예수님이 말씀을 끝냈는데,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5절까지 기록한 다음에, 이어서 재미있는 말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절).”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이 우리 지금 듣기로는 어려운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이해가 잘되는데, 그 당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듣던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친절한 우리 예수님, 그것을 다시 설명해 주실 수밖에요….

그렇게 7절 이하에서는 1절에서 5절까지 말씀하신 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그 내용이 약간 달라집니다. 뭐가 달라졌을까요? 앞에서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목자’라 하셔서 은근히 예수님이 목자인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또한, 이것은 11절, 14절에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나는 선한 목자라…(14절).”

그런데 유독 7절 이하에서는 다른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앞에서는 예수님은 양 우리를 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오는 목자인 데 비하여, 뒤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양의 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바로 오늘 본문, 즉 10장의 키포인트라 생각합니다. 자, 이제 그 키포인트를 말씀드릴 터인데, 그전에 이것 하나 생각하고 넘어갑시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절).”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고 나오는데 드나드는 문이 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고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다른 데로, 그러니까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다.

그 말은 양을 가두어 놓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사람이 쉽게 넘어갈 정도로 낮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요. 생각해 보면 그 우리는, 그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는 양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사람이 넘어가는 데까지는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 일어나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양의 우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문을 통하여 드나들지 않는 목자 아닌 다른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양은 울타리를 넘어다닐 수 없고, 오직 문으로만 다닐 수 있다. 자, 이런 기초 지식을 가지고 그다음을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

1절에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을 언급하시고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목자다, 라고 말씀하시더니 7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 직접 밝혀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라. 양의 문이라니요? 양의 문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개념이 바로 떠오르십니까? 문이란, 우리가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어느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거쳐 가는 장치, 시설을 말하니까 양의 문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동물인 양으로 들어가는 문,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우리 흔히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문, 차의 문….병원의 문…. 그래서 우리가 흔히 그것을 말할 때엔, 집 문, 차 문, 병원 문, 이런 식으로 줄여 말하는데 양의 문이라면 무슨 뜻일까요? 물론 양의 문을 병원의 문을 병원 문이라고 줄여 말하는 것처럼, 양 문이라 줄여 말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지을 때에 양문 교회, 이런 식으로 짓습니다. 아마 전주에도 양문교회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양의 문이라 할까요? 양이 어떤 장소나 공간이 아닌데, 또 양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다, 하셨으니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데…. 그래서 우리 성경으로는 양의 문이라, 되어 있지만 다른 번역을 찾아보면 무언가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먼저 영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양의 문이란 말에, gate for the sheep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양을 위한 문이지요. 양을 위한 문이라 함은, 양의 문,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양이 들어갈 수 있게 하여 놓은 문, 양을 위하여 만들어 놓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곧 1절에 나오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강도요 절도이지만, 우리의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목자라 했는데, 바로 그 문, 목자가 드나드는 문, 그 문을 7절에서는 예수님이 그 문의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문은 목자만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양도 드나드는데, 내가 바로 그렇게 양이 드나드는 양의 문이다, 그것을 표준 새번역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따라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양이 안전한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이 드나드는 문, 그렇다면 양이 드나드는 문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 문을 통하여 양이 들어가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양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당연히 양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곳은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제 양이 양 문을 통하여 들어간 곳,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것,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바로 9절과 10절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실제적인 필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을 열고 들어가 양 우리에 들어가게 되면 먼저 생명을 얻게 되며, 두 번째로 풍성히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니다.

우리를 벗어난 양은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겨우 목자의 손에 이끌려 다시 양의 우리로 돌아온 사건… 그때 돌아온 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밖을 나가서 맨 처음에는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자와 늑대의 호시탐탐 노리는 죽음의 위협에 어찌 한순간인들 편할 때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하다가 겨우 살아나와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 양의 목숨은 이제 부지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었던 목숨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양이 다시 우리에 돌아온 사건, 그것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풍성하다는 말을 다 아실 줄 믿습니다. 넉넉하고 많다는 의미이지만, 풍성하다는 말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지난번 묵상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묵상에서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였는데, 계시록 3장 17절에 의미 있는 말이 등장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들, 곤고하다 가련하다, 벌거벗었다, 가난하다, 그런 말들이 바로 풍성하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신 다음에 지난주 본문 말씀인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면서 하시는 말씀, 계시록 3장 20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들어가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저는 해석하기를 기쁨에 겨워, 그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해 잔치를 벌이는 그러한 장면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잔치를 벌일 만큼 기쁨이 충만했으며 또한 그래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니만큼 음식이 얼마나 풍성했겠습니까? 그 풍성함이 바로 오늘 본문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오늘 본문 10절 말씀, 내가 온 것은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이 비교급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급이니까 단순히 ‘풍성히’가 아니라 ‘더 풍성히’가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더, 지금까지 얻었던 것보다 더, 양들이 지금까지 우리 안에 있어서 먹고 있던 꼴 그것보다 더, 더 많이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면 생명을 얻게 되며, 꼴 또한 더 많이 더 많이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우리를 뛰쳐나갔다 다시 우리에 돌아온 양을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처럼 그리고 그 양을 애지중지 거두며 보살피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목자로서 양들에게 어떠한 것이 유익한 것인지, 어떻게 해야 양이 생명을 얻고, 어떻게 해야 풍성한 꼴을 먹일 수 있는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양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양의 문이란 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 기억하십니까? 1절을 해석하면서,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 오직 양의 문을 통해서만 우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가 양의 우리에 들어가 푸른 초장을 만끽하며 더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난번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문이라는 것은 여닫는 데 소용되는 것이지, 만일에 그것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문이 아니라, 벽에 불과한 것이다. 문이란 말 자체에 이미 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 앞에 보이는 문은 열려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이 마련해 놓으신 푸른 초장, 풍성한 꼴이 넘치는 그곳으로 들어가십시다.

지난 두 주간, 이번까지 세 번에 걸쳐서 우리 앞에 놓인 문을 보면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문을 열어 주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강조하시기 위해, 또한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우리 곳곳에 문을 마련해 놓으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문을 여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양의 문 되신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10장 1-10절

양의 문 되신 예수/ 요 10: 1-10

유대나라 하면 우리는 양들이 초원에서 뛰놀고 목자들이 양을 이끌면서 이 언덕

저 언덕을 넘어 다니는 그런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목

자와 양이 어울려 다니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성지순례를 하면서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것과 같은 그런

정경을 보고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았는데도 차가 다니는 길가가 되어서 그런지 모

르지만 그런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세상이 하도 많이 변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고 계실 당시에는 예루살렘 주변과 갈릴리 일부 지역이 목초

지로서 유명했습니다. 많은 목자들이 자기 양을 끌고 유유히 걸어다니면서 풀을 뜯

기고 물을 먹이는 그런 평화로운 모습들을 어디서든지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에 왜 저런 말씀

을 하실까 하고 그들이 의아해 했을 정도였습니다.

목자들은 하루종일 양을 먹이고 나서는 해가 기울고 어두움의 그림자가 다가오면

자기 양들을 몰고 공동 우리로 온다고 합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자기 개인 우

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자들은 여러 가정이 합해서 공동 우리를 만

들어놓고 양들을 그 우리 속에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돌담을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 만드는데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떼들을 문으로

다 들이고 나면 그 문 옆에는 문지기가 있어 밤새도록 그 양들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하나 둘 나와서 문지기의 확인을 받고 우리

안에 들어가서 자기 양을 부릅니다. 수십 혹은 수백 마리 양 가운데서 눈으로 자기

양을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자기 양들만 알아들을 수 있

는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그 목자가 자기 목자라는 것을 아는 양들은 전부 그 목

자 앞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참 멋있는 풍경입니다. 자기 양의 수가 조금 적은 경

우에는 가끔 양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목자의 소리를 듣

고 그 목자의 양들은 전부 모인다고 합니다. 이제 목자가 문을 나와서 초원을 향해

가면 그 목자의 양들만 우르르 따라 나갑니다. 그러면 또 다른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불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을 알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에다 비

유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은 막연히 짐작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기독

교의 가장 본질적인 진리가 그 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왜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다시 한번

맛보기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

왜 예수님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 하실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생

명을 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9절로 넘어가 봅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렇

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구

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10절은 그 의미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

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왔다.”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은 쉽게 말해 ‘생명

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

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

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칠 팔십 년이면 다 소진해서 없어지고 말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생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

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인 것입니다. 육

신의 생명은 왜 영적 생명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영생으로 이어지지를

못할까요?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이 진리를 간결하고 또 확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

하였느니라.” 한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사람 위에 죽음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

외가 없습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서울 장안에만 해도 하루에 463명의 어린애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매일 500여명

의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

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의 씨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태어

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

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제 아무리 죄인이 아닌 것처럼 가장해도 속이

지 못 합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있다고 해도, 성자나 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해도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 가운데서 갑자기 인물이 예뻐지고 맵시가 나는 사람을 보면

다들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아, 성형수술 받았구나.” 주저앉은 콧대가 우뚝 솟

고, 옆으로 찢어진 실눈에 쌍꺼풀이 예쁘게 드리워진 것을 보면 “성형수술 받았구

나. 어디서 받았니?”하면서 다들 부러워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참 좋은 세상인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아름답게 보이면 그것도 천국의 일면이겠지요.

그러나 이 다음에 태어날 자식이 문제입니다. 자기는 성형수술을 해서 코를 높이고

눈을 똥그랗게 만들고 광대뼈를 깎아내고 해서 아름답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식

만큼은 어쩌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아기가 배속에서

성형수술을 받고 태어날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의 원래 모양을 닮아

납작한 코나 실눈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형수술로 흉한

모습을 감추려해도 자식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배속에서 교양을 배워서 나올 리도 만무하고,

죄인이 아닌 것처럼 특별한 옷을 입고 나올 수도 없습니다. 못 속입니다. 자녀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나쁜 생각들이 그 아이들을 지배하고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

까? 그리고 그들 역시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

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단순

히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값을 하나님 앞에서 받

아야 되는 무서운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 필요

합니다. 여러분의 연세가 얼마인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

관이 없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은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못 받으면 망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천

만의 말씀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불꽃을 훔쳐

올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엡2:5).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시체가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살아납니까? 우리가 시체에게 기대할 수 유일한 것이 있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천만

에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영적 생명을 얻습니까? 천만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찾아와야 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 문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 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고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심어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우리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드디어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

듣게 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너무나 고귀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때 이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

다. 할렐루야!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 확실히 믿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오늘 귀한 말씀을

바로 여러분에게 들려주셨다고 봅니다.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나에게 오면

내가 영생을 주겠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

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데 여러분이 돌아서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 다 구원

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 주

변 서초동 일대만 해도 90 퍼센트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이 필요한데도 예수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들

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생명을 그들도 값없이 얻는

축복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

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

도밖에 없습니다. 양의 우리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

지 아니하고 담을 넘어가면 그는 강도요 절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보다 앞에 온

모든 사람은 강도요 절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오해하면 안됩니다. 구약 시대에 온 모든 선지자들을 두고 절도

와 강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눈을 뜨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귀한 형제를 유대

나라 사회에서 축출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강도요 절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자칭 ‘메시야’ 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던 사

람들을 두고 강도요 절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 우리의 문은 하나 뿐입니다. 누구든지, 심지어 목자라 해도 그 문으로 들어와

야 됩니다. 양이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문 말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담을 넘어가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니라 강도

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

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데, 세상사람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독선주의니 배타주의니 하며 기독교를 욕하고 비방합니다. 그들 생각에는 다원주의

사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따

라서 어느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좋겠

는데, 기독교는 유달리 타종교를 배척하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주장

하니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중에는 이런 독선이 싫어서 예수를 믿

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이만재 씨가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앙케트 조사한 것을 토대로 <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가 다 아는 상식적인 것들인데,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소개해 드리

겠습니다. 교회 가기 싫은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인 것 같다. 타종교, 타 종파를 존중할 줄 알아야 내 종교 내 종파도

존중받는다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말씀에서 그 이웃

은 이웃 종교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특유의 종교 이기주의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교회 안 간다.”

그러나 우리는 존경한다는 것과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한

다는 것과 진리를 혼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타종교의 지도자들도 존경합니다. 우

리는 불교 믿는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또 나름대로 각 종교에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수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하

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억지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존경하느니, 사랑하느니 하는 이런 값싼 이론 때문에 진주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돼지에게 던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 아내가 내 아내이고, 내 아내가 당신 아내이니, 기분 좋은 대로 삽

시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존경한다, 사랑한다, 관

용한다 하는 말 때문에 뒤섞어 놓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아무도 안 합니다. 진리

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

니다.

지난 성탄절에 불교 방송에서 머리를 깨끗이 깎은 스님 아나운서가 “세계의 성인

중의 하나인 예수가 탄생한 것을 축하합니다.” 하고 축하 방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흥분해 가지고 카톨릭의 어떤 얼빠진 신부는 감사의 답례를 한다고 요란을

떨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또 어떤 뉴스 앵커는 “드디어 모든 종교의 벽이 무너지

고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시발점이 시작되었습니다.”하고 흥분해서 소개를 했습니

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말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창시

자들을 보십시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은 분이 예수님 외에 누

가 있습니까? 날 위해서 피 흘려 죽었다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당당하게 인도할 권한을

가진 권한을 가진 구원자가 예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양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바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말하는 것이 바른 진리

라면 설혹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이나 미움을 받는다 해도, 심지어 순교

를 당하게 된다 해도 우리의 주장을 굽히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훌륭한 장로였

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

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솔직하게 말하라.” 이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 뜻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못된 놈, 참

람하고 건방진 놈.” 하고는 야고보를 끌어다가 저 높은 벼랑에서 집어 던졌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 할 지라도 굽혀서는 안될 진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분명

히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말만 들으면 비위가 상하는

분이 계십니까? 관용이 많고, 너그러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닙

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 손에 있는 보석은 가짜요.”라고 말하면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내 것은 진짜”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주장해도 지나친

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라고 우리가 주장한다

고 해서 속이 좁은 것도 아니고, 배타적인 것도 아닙니다. 바른 것을 말할 뿐인 것

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자

입니다.

풍성한 생명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

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꼴을 얻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 초장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로 출입하는 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더 다른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10절입니다. 10절 중간을 보십시오. “내

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

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놓고 손을 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에서 건져 주고는 “이제 당신 맘대로 하시오.”하고는 일어나지도 못하

는 사람을 그대로 눕혀 둔 채 그 자리를 떠나는 냉혹한 구조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 지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고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몸에

포도주와 기름을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이 알아서 집으로 돌

아가시오.”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내팽개치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약대에다가 그 환자를 싣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간호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공무상 부득불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어 자기

대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간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습니다. 그 사

마리아인은 곧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는 손을 털고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십

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풍성하도록 계

속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마음속에 양의 문을 드나들면서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양의 행

복한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다윗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나를 초

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2). 날마다 목자를 따라 푸

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생명이 터질 것 같이 풍성해지는 것

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말을 오해하고는 예수님께서 만사

형통케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단보다도 더 큰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그런 해석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

십시오. 예수를 믿었다고 만사 형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예

수님을 믿고 만사 형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은

절대 안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만사 형통하게 되

면 영적인 생명이 건강해 지기보다 병들어 버릴 가능성이 십중팔구로 큽니다. 그래

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사 형통하게 해 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하면 어떤 분은 이런 찬송도 있지 않느냐고 말할 지도 모릅니

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

라.”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찬송의 원래 가사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찬송가

를 작사한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라는 부인은 맹인으로 일생 동안 수천 개의

찬송시를 쓴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라고 칭송을 받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사를 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문을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잘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바꾸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번역

하는 사람이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교에서 자주 말하는 식으로 “만사

형통 하리라”하고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가사는 빨리 고쳐야 됩니다.

고쳐야 되는데 안 고치니까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예수 믿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기만을 바라는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

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세상에서 만사 형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병원에 가서 보면 오랫동안 병상에서 고

생하는 환자는 숨만 빨딱빨딱 쉬고 있습니다. 분명히 생명이 붙어 있긴 하지만 그

들에게서 생명의 활력이나 풍성함, 능력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지칠 줄 모르고 뛰는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생명은 숨

만 빨딱빨딱 하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일하고, 창조하는

모습 속에서 활화산같이 타오르는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집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엄마가 주는 대로 잘 먹고, 또 힘있게 뛰놀고 하니까

그 애가 자라면서 생명이 터질 것처럼 풍성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이런 생명입니다. 그저 숨만 발딱발딱 쉬다가 천당이나 들어갔으

면 좋겠다 하는 그런 빈약한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을

때 잠깐 기도하는 것 말고는 생명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주님

은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으면 그 생명의 풍성함을 맛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서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먹고 성령의 생수

를 맘껏 들이키며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받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숨만 빨딱빨딱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생명이 과연 풍성한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스로

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까? “주여 믿

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불안이나 두려움이 떠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의 마음에 자유함이 없습니까? 번번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게 끌려 다닙니까?

그런 대로 살고 있는데도 만족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아직 어린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이 어리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얻어야만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이 더 풍성해지면 우리는 이팔 청춘의

젊은이들과 같이 약동하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생명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 역시

매우 풍성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설혹 내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도 우리 마음에서 평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족합니다.

어느 제자 반에서 저에게 카드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제자 반을 대표해서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들 모두의 생각을 담은 것 같습니다. 그 카드에 이런 글

귀가 있어서 제가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아직도 많이 부족하

지만 이제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생겼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

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하루하루를 살게 되었답니다.

한 때 가시로 생각되었던 고통까지도 이제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영적 생명이 풍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이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아도,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는 고통

이 떠나지 않아도 그것이 그 사람을 억압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의 불을 끄지 못합

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는 늘 불안이 없습니다. 주님이 잘해 주실 것이라고 믿으니

까 마음이 평안해합니다. 절대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서 모자라는 것도 많지만 자족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명이 풍성해져서 사십대의 성인처럼 믿음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가진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몽땅 내어놓아도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

끼게 됩니다. 무엇을 얻어서가 아니라 내 것을 다 주님께 드리고도 오히려 더 기쁨

이 충만하고 평안하고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믿음의 최고 경지라고

할 것입니다.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목사님.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라고요? 옥 목사님도 그러지 못하면서 왜 그러세요?” 그

말이 옳습니다. 저의 믿음도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의 수준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습니

다.

저는 요즈음 저를 방문하는 선교사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분들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다 배울 만큼 배운 지라 이 사회의 어느 분야에 가서도 제 몫을 할만한 사람

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위 말하는 세상에서의 출세도, 자녀를 공부 잘 시켜

일류대학에 들여보내겠다는 꿈도, 자가용도 굴리며 온 가족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다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아프리카나 중동 아시아, 혹은 동남아 오지

로 가서 말라리아와 모기와 싸우면 서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며 하나님의 말씀

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아직 30대 중반밖에 안된 사람

인데도 그 얼굴에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가 있습니다. 한국에 와 가지고 안식년을

하면서 살집이 없어서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도 그들의 눈빛이나 말에 범할 수 없

는 기쁨의 광채가 서려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너무나

크게 때문에 자기 것을 다 주님 위해서 포기 한 다음에 누리게 된 마음의 평안이

요, 자유함이요, 만족이었습니다.

우리의 찡그린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주여 주옵소서. 주옵소서.” 하다가 보니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안 준다고 조르고 있으니 그 마음이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

까? 그 마음이 무슨 자유함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많이 받아먹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생수를 밤낮 없이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매일매일

받다보면 주님이 나에게 심어주신 생명이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

에는 내가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도 “할렐루야” 하고 춤추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

다. 그 사람을 누가 범하겠습니까? 그 사람을 누가 꺾어 놓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

는데도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자유 하는 사람을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습

니까?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으로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

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풍성함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좀더 멋지게 한해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

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0)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7-9)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10)

10장의 말씀은 9장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로써 하신 교훈입니다. 1절에 ‘진실로 진실로’란 귀절로 시작되는데 이 말은 대개 앞선 이야기를 부연 설명할 때 나타납니다. 바로 앞서서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의 결과로써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은 전체적으로 양과 목자의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개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양의 문이고, 둘째는 양의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와 절도 강도, 예수께 속한 양과 다른 목자에 속한 양,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와 담 넘어 들어오는 자, 선한 목자의 목적과 도적의 목적 등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 이런 비유를 하셨을까요? 눈을 뜬 맹인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게 되었는데, 오히려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참 목자를 알고 따르는 것이 인생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문으로 들어가는 자와 담 넘어 들어가는 자

첫 번째 비유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 온 자와 담 넘어 들어 온 자의 비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본문의 핵심은 지도자의 정당성 여부입니다. 정당한 경로를 통해서 온 목자와 부당하게 나타난 지도자를 비유한 것입니다.

당시에 양을 치는 사람들은 공동으로 양의 우리를 만들고 밤이 되면 각 사람의 양들을 한 우리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문지기를 세워 밤새도록 지키게 했습니다. 이런 양의 우리는 대개 동굴이나, 나무나 돌로 높은 울타리를 쳐서 만들었습니다. 대개 문은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문지기가 지키는 문을 통과 해야만 합니다. 만일 양 우리에 문을 통과하지 않고 넘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도둑놈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가리키는 바가 무엇일까요? 양의 우리는 유대 사회입니다. 문지기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입니다. 반대로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는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가 지도자로 세운 적도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를 스스로 지도자 위치를 차지했을 뿐입니다. 정당성이 없는 지도자일수록백성들을 부당하게 탄압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1-7)

그러나 실상 거짓 지도자들의 문제는 지도자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양들에게 있습니다. 거짓 지도자들이 많든지 적든지 속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양들이 속고, 약탈당하니까 문제입니다. 우리는 현명한 양들이 되어야만합니다. 정당하게 오신 예수님과 담 넘어 들어온 거짓 종교인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이시며(창3:15),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이시며(창12:3,삼하7:), 유월절 양이시며(출12:), 속죄 제물이시며(레), 성전이시며(히),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시며(민), 처녀에게서 나셨으며(사7:1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요1:),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과 안나가 증거했으며, 세례 요한과 제자들의 입으로 증거를 받으신 메시야십니다. 이 예수님과 거짓 목자를 구별치 못한다면 양은 목숨을 지킬 수 없습니다.

거짓 목자의 문제는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정당히 보내신 목자들인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 주님의 목장에 담 넘어 들어 와서, 양들 위에 군림하는 절도나 강도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구별할 줄 아는 눈이 있다면 여러분은 평생토록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눈이 어두워 담 넘어 온 자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구별치 못한다면 평생 거짓 목자의 채찍 아래서 영적으로 신음할 것입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

두 번째 비유는 양과 목자와의 관계입니다. 양과 목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3-5)

첫째로,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분별할 만 한 관계입니다. H. V. Morton이라는 분이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베들레헴 근처에서 매우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목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떼들과 함께 동굴에서 밤을 새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양들은 모두 섞여 있었고 목자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 시간이 됐습니다. 둘 중의 한 목자가 양 무리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서서 양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이름을 부르니까 댓 마리의 양이 그들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의 양들을 다 불러냈습니다.”

George Adam Smith란 사람도 서너 명의 목자가 이런 방식으로 양들을 구별해 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있습니다. 양떼들은 서로 섞여 있다가도 자기 목자가 부르면 그 음성을 알아듣고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불러냅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내셨고, 양들은 각자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모시고 교통하기 때문에 피차 모르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예수님을 모르고도 단체로 천국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맺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의 옷자락을 잡고 천국의 일원이 되려는 생각은 당장에 버려야만 합니다. 부모형제가 교회 장로 권사라고 덩달아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천국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로 천국에 들여보내는 일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개별적인 교제 관계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서로 알고 대화 할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 내가 속한 교회의 목자와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요즘은 상업주의 물량주의의 흐름에 따라서 교회도 대형화의 추세를 밟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도 사이의 횡적인 유대관계도 없고, 목자와 양 사이의 유대관계도 없는 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천국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성도를 모르고 성도가 예수님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꾼’이 아닙니다. 교인들 역시 설교의 ‘청취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마다 목회 철학이 있고, 인생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습니다. 양들을 돌아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 교회의 목자가 어떤 사상과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지 알고 따르면 복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와 좋은 훈련을 다 받고도 배반자가 돼버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설교자와 청취자의 관계에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먼저 예수님과 일대 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다른 사상가들의 음성과 구별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목자와 이름을 주고받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분별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양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둘째로, 목자는 앞서 가고 양은 뒤따라오는 관계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수만 마리의 양떼들을 개를 동원하여 뒤에서 몰고 가는 목동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그렇게 많은 양들도 없거니와, 양떼를 뒤에서 몰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양들의 이름을 외울 만큼의 양들을 내어 놓고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뒤따라갑니다. 목자가 양떼들의 길을 안내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이 가는대로 따라가지 않고 목자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해 갑니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목자보다는 양이 앞서갑니다. 간혹 잘 나가는 교회가 있어서 보면 개가 양 몰 듯이 몰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든 것이 알려지고 공개되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목회 방식, 교회 형편 등등. 교인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교회를 선택할 기회가 있습니다. 상업주의, 소비자 중심 사회에 익숙해진 교인들은 교회도 얼마든지 쇼핑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쇼핑하고, 교회도 쇼핑합니다. 좋으면 택하고 싫으면 떠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인들은 아주 똑똑합니다. 목자보다 잘난 양들이 많아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목회자는 전반적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저나 제 동역자들이나 다 모자랍니다. 두뇌도 모자라고, 지식도 모자라고, 인품도 모자라고, 능력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자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면 모자라는 목회자에게 순종하며 따를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자라고 부족한 지도자를 통해서, 모자라는 방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문제는 양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양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양을 목자 위에 세우시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원리를 바로 알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앞서가는 목자를 따라가는 교회, 그것이 양들의 축복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본문의 세 번째 비유는 주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 주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문의 개념에 대해서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

그래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의 말씀으로 다시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7-9)

앞서서 주님은 자기를 양 우리에 문으로 들어온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자기 자신이 곧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예가 많지요? 주님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이시요 동시에 진리 자체십니다. 주님은 생수를 주시는 분이시요 동시에 생수 자체시고, 영생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생명의 떡 자체십니다. 예수님은 정문으로 양 우리에 들어오신 유일하신 분이시며, 동시에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신 것은 교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문의 위치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통하는 문인가 하면 바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십니다. 주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종말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주님을 통해서이고, 현재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도 주님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보물섬’이나 ‘십오 소년 표류기’, ‘톰 소여의 모험’, ‘헉클베리핀’ 같은 모험 소설을 즐겨 읽었습니다. 내 형편이 그랬습니다. 형제자매도 없고 가족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항상 freelancer였습니다. 그런 책을 읽고 나면 항상 망상에 빠집니다. 나도 뗏목을 타고 강을 내려가다가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살면 어떨까? 거기에 혹시 실버 선장이 감춰둔 보물 상자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보물 상자가 있는 동굴로 가는 길을 어디일까?

천국이 그렇습니다. 그 천국에는 자유가 있고, 온갖 보화가 가득합니다. 생명, 건강, 먹고 입고 거하는 아름다운 거처, 가장 멋진 경치, 영원한 평화, 사랑, 신뢰,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보화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천국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은 에덴으로 들어가는 문을 폐쇄하셨습니다. 천사들을 세워서 사람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창3:24) 하나님은 인간과 단절하셨습니다. 그 막혔던 천국의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게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에 빈들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잤습니다. 그는 꿈에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이 죄악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하늘의 문이요, 축복의 문이십니다.

둘째로, 문의 유일성입니다. 9절 말씀 중에 ‘나로 말미암아’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Murray나 Bultmann같은 신학자들은 이 귀절은 예수의 문으로서의 ‘독점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 이외에 이 세상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또 다른 문이 있는가? 없습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의 문입니다. 물론 자칭 사람들이 만들어 낸 길은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바른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소위 ‘선한 사람들’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 많다. 선한 남자, 선한 여자, 정직한자, 율법의 준수자, 부모를 공경하는 자, 간음치 않고 도적질 않고 거짓 증거 하지 않는 자,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조항들을 준수하는 자 등등. 그렇다고 해도 이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은 아니요, 이방인이라 할 수밖에 없다. 정당하게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데, 소위 말하는 선행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열어 주신 문을 거절하고 각자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께 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문이 있는데도 그리로 들어가지 않고 굳이 다른 문을 찾아 헤매는 것이 바로 부패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께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능력 있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하나님의 ‘하’字도 모르고 주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스스로 찾는다거나 혹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시14:1)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는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문을 통하여 당당하게 드나드시기 바랍니다.

도적이 오는 목적과 주님이 오시는 목적

본문의 네 번째 비유는 주님의 목적과 도둑의 목적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첫째로, 도적이 오는 목적입니다. 도적은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10) 도적은 양을 정당하게 소유하지 않고 훔칩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본문에 죽인다는 말은 단순히 죽인다(kill)는 의미가 아니라, 양식을 삼기 위해서 희생시키는(to sacrifice, or to kill for food) 것을 의미합니다. 도적에게는 양을 위한 목적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이익을 챙길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양떼를 멸망시키고 맙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 앞서서 온 자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원문상에 보면 ‘they were’라고 하지 않고 ‘they are’라고 했습니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왔던 지도자들이 절도요 강도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입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이용하여 재산을 모으고 로마 정권과 적당히 결탁해서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양들의 형편은 전혀 생각지 않고 지킬 수도 없는 법을 만들어 백성들 위에 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명령만 내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요, 천국 문을 가로 막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남들도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23장) 이들은 다 참 목자 예수에 앞서서 불법으로 우리에 넘어 들어온 강도들입니다.

둘째로,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목적은 생명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9)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저는 10절의 말씀을 읽을 적마다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그런데 그 생명은 겨우 숨 쉬고 연명하는 정도의 생명이 아니라 갈수록 더 풍성해지는 생명입니다. 살아 있다고 다 생명은 아닙니다. 병상에서 인공호흡기로 연명한다면 살아 있으나마나 입니다. 힘차게 일하고 뛰는 생명력, 죄를 이기고, 악의 영들을 이기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힘차게 뛰는 생명력, 바로 그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주님은 오셨습니다.

둘째 목적은 꼴을 먹이시는 일입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무한한 꼴을 얻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꼴’이란 말은 단순한 육의 양식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크고 중요한 꼴, 우리에게 날마다 주시는 영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혼을 구하지 못하는 인간의 사상과 지식들이 많습니다. 썩는 양식입니다.(6장)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평강과 기쁨! 육신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심은 물론, 영혼에게 필요한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시23:1)

셋째 목적은 자유입니다. 주님은 진정한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9절에 있는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집니다. 이 말의 뜻은 단순한 왕래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크나큰 자유를 의미합니다. 먹고 입는 것만 풍족하다고 축복은 아닙니다. 종으로서 있는 한 행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오가면서 축복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과, 꼴과, 자유를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I)

(김성수 목사)

(요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선한 목자와 양의 비유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이 10장은 9장과 긴밀한 연결이 되어 있는 장입니다. 아니 9장의 연속으로 봐야 옳습니다. 간단하게 이 부분으로 이어지는 문맥을 훑어봄으로 해서 오늘 본문의 이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을 배경으로 한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영생은 이 땅의 떡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설명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디베랴 바다로 몰아넣으시고는 약속의 땅은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을 의지하여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저주의 물 위를 걸으시는 유일하신 분,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어가는 곳임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6장이 끝나고 7장으로 넘어와서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여 유대인들의 율법준수와 절기지킴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기대를 생수와 빛을 소재로 하여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고 커다란 촛불을 밝히는 예식을 행한다고 했지요? 주님은 그들의 종교행위에 등장하는 물과 빛을 예로 들어서 자신이 바로 율법과 성전 제사의 원형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은 7장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즉 내가 물이니 엉뚱하게 제단에다 물 갖다 붓는 수고 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자신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 있는 율법을 무시하고 은혜를 이야기하는 예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참 생수이신 주님의 정체와 그 생수가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게 되는지를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을 합니다. 그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민수기 5장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에피소드라 했지요? 간음한 여인의 죄를 밝히기 위해 물을 티끌과 섞어 여인에게 마시우게 하는 민수기 5장의 그 이야기는 바로 생수이신 주님이 저주받은 티끌과 연합이 되어 자신이 티끌이 되시고 그들에게 생명의 물을 주는 십자가 복음이 그 속에 힌트 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나 택한 자들만이 그 티끌 섞인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티끌 섞인 물을 먹고 육신이 붓고 떨어져 나가 버리는 간음한 여인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생수이신 주님이 죄로 인해 저주 속에 던져진 흙과 이겨져서 죄인들에게 제시가 됩니다. 역시 은혜지요? 그런데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는 죄인들은 그 은혜의 복음을 피해 다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나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오갈 곳이 없는 사형수인 간음한 여인은 그 은혜의 생수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8장 초두에 삽입이 되어 있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율법과 은혜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전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오직 은혜로만 너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하시는데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들이대며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고 선언하십니다. 그 선언은 자신들의 종교 행위로 빛을 밝히려 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님의 일갈이었습니다. 그러자 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주님을 죽이려 했고 주님은 그들을 피해 숨어서 성전을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9장으로 넘어와서 주님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죄인들의 대표로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던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여 하나님의 구원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 어떤 노력이나 시도를 해본 적이 전혀 없는 한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과 선택에 의해, 오직 은혜로만 눈을 뜨게 되는 구원의 서정이 9장 전체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은 소경을 찾아가 힐문하고는 그를 출교시켜 버립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강화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9장의 눈뜬 소경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과, 율법을 들어 그를 출교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의 정당함과 기득권을 옹호하려 했던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을 등장인물로 하여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 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부분인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설정하신 드라마의 등장인물과 무대세트를 정리해 보면 양과 목자, 그리고 문지기와 절도와 강도, 그리고 양의 우리와 양의 문 등이 있습니다. 그 등장인물과 무대 세트가 어떤 것을 비유하고 있는지부터 확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양의 우리부터 볼까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은 목축을 하는 지역에 사나운 들짐승들이 출몰하였기 때문에 동네마다 공동 양 우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양 우리는 마을 공동 소유로 삼았다고 합니다. 높이가 10에서 12피트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 3미터가 넘는 꽤 높은 우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양의 우리를 지어놓고 한 면으로 양이 들어가고 나가는 문을 만들었는데 그 양의 문에서는 목자나 문지기가 스스로 문이 되어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양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항상 목자나 문지기를 밟고 나가야 하는 형국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안의 양은 목자나 문지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밖으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공동 양 우리에는 온 마을의 양들을 다 넣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집 저 집의 양들이 서로 섞여서 밤을 지새우다가 아침에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부르면 그 목자의 양들이 정확하게 목자를 따라 나간다고 합니다. 참 신통한 능력이지요? 양은 아주 연약한 동물입니다. 양들은 시력이 나빠서 자기 앞의 양들도 제대로 보지 못해 자주 길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죄인들을 각기 제 길로 다니며 길을 잃는 양에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사 53:6)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게다가 양은 공격무기도 없어서 파리 하나도 쫓지 못하고 파리가 콧구멍에 알을 낳아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연약한 짐승입니다. 그리고 양은 자기를 지켜주는 목자가 없으면 무서워서 눕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듬직한 목자가 곁에 있을 때만 푸른 초장에 눕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신비한 능력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청력입니다. 실제로 동물학자들이 실험을 해보았는데 남의 목소리 흉내를 훌륭하게 내는 사람에게 목자의 옷을 입히고 주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어 양들을 불러보았더니 양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더랍니다. 그만큼 양은 주인의 음성에 민감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양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방황하는 연약하고 무력한 죄인이었던 성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양들을 부르는 목자의 정체도 알게 되었습니다. 목자는 누구지요? 당연히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목자는 이미 구약에서 반복하여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민 27:15-17) “15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가로되 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목자를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일은 여호수아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십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목자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바꾸면 예수가 된다는 것은 다 아시지요? 이 구절들과 오늘 본문 9절을 비교해 보세요.

(요 10:9)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양을 치는 목자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지금 주인의 음성에 반응하여 양 우리 밖으로 나오는 주인의 양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른 양들과 섞여서 사는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혹자들은 그 양 우리가 천국이라고도 하고 교회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양 우리는 절도와 강도가 담을 넘어 들어갈 수 있는 양 우리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이나 하나님의 교회는 아닙니다. 그럼 어디일까요? 출교된 소경이 어디에 섞여서 살고 있었지요? 오늘날로 따지면 이 세상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을 9장과 연결되는 문맥 속에서 보기로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소경이 들어가 있다가 나온 곳이 어디입니까? 소경이 바리새인들에게 출교를 당했습니다. 어디서 출교를 당한 것입니까? 유대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이 목자의 부름을 받아 나온 양 우리는 바로 유대교, 혹은 유대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율법을 말하는 것이요, 율법은 곧 죄악 된 세상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 속에 섞여 살던 양들이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알아듣고 그 우리에서 하나씩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구속사입니다. 9장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주님의 말을 알아듣고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가 주님의 명령대로 눈에 붙은 진흙을 씻어낸 사건을 기억해 보세요. 앞이 보이지도 않는 그가 어떻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목소리를 분별하여 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서 나와야 하는 주님의 양이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을 형상화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눈을 뜨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소경인가?’하면서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 10:26-27)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이제 양 우리와 양, 그리고 목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졌지요?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에 본 본문 9절에는 그 양들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율법으로 상징되는 세상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살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번 나온 양은 다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홍해가 한번 닫히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완전한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갇혀서 꼼짝 달싹 못하게 죄에게 구속되어 있던 자들이 이제 자유자가 되어 자유로이 들며 나는 자들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부름을 받은 양들이 우리에 꼭 갇혀있는 다른 양들과는 달리 들며 나며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유대주의, 즉 율법에 갇혀 있을 때에는 그들이 다른 이방인들과의 높은 담을 절대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그곳에서 불러내셔서 이제 자유롭게 교통하는 하나님 안에서의 형제자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유대주의에 속박되지 않고 들며 나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 3장에 보면 열 개의 문이 나오는데 그 중에 오직 양문에 대해서만 자물쇠와 빗장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이 요한복음 10장은 벌써 느헤미야서에서부터 예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의 우리를 나오는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지요.

(출 33:7-9)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 막이라 이름 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 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 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 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 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 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하나님의 성막이 진 밖에 지어지고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들은 항상 진에서 나와 회 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 모세가 있습니다. 이 그림과 오늘 본문의 그림을 잘 비교해 보세요. 그대로 겹쳐지고 있지요? 그러니까 양 우리에서 목자가 양을 불러내는 것은 자기 양들을 구원해 내기 위한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양 우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는 누구일까요? 문지기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목자가 오면 그 목자를 보증하고 양들에게 그 목자를 소개시켜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잘 데리고 가라고요. 신약에서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요 1:31)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그러나 그 세례요한은 어떤 다른 분의 역할을 모형으로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의 역할을 보여준 사람이지요? 성령하나님입니다. 성령하나님은 구속사 안에서의 그 직책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임장을 보증하셨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양들에게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문지기는 성령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도요 강도는 누구이겠습니까? 여기서 절도라고 번역이 된 ‘클레프테스’는 자격도 없는 자가 어떤 일을 몰래 혹은 함부로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강도라고 번역이 된 ’레스테스‘는 폭력을 사용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절도와 강도는 자격도 없는 자가 자기가 자격 없음을 숨기고 어떤 일을 함부로 행하며 심지어 폭력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일을 합리화 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절도와 강도처럼 자기들이 차지할 자리도 아니고 그러한 권리도 없으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들에게 정당하게 속하지도 않은 권위를 행사하며, 그들도 타당한 근거를 전혀 내세울 수없는 그런 복종과 순종을 불법적으로 요구하고 거기에 불응할 경우 폭력까지 동원하여 쫓아내고 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9장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소경을 엉터리 교리와 신학으로 가르치려 하다가 듣지 않으니까 무력을 사용하여 유대교 밖으로 쫓아내버린(출교)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눅 11:52)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 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마 23:13)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게 바로 절도와 강도의 정체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숭앙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한 인본주의 적 가르침을 던지는 자들은 모두 절도요 강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양의 문은 누구입니까? 그 문은 양들이 유대교의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다른 말로 양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행 4:11-12)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입니다. 양들이 10피트가 넘는 담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양은 반드시 문을 통해 나와야 하는데 그들이 통과하여 목자의 품에 안겨야 하는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은혜’인 것이고요. 본문 9절을 보면 정확하게 나옵니다.

(요 10:9)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요 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배운 노아의 방주에 문이 몇 개 있었습니까? 하나지요? 출애굽 광야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던 하나님의 장막에는 문이 몇 개 있었나요?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여 그 분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 하나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에서도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이라고 정확한 단서를 달아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이 방법이 되고 통로가 되셔서 우리 밖으로 나오시는 것이 맞지 않나요? 그리고 절도와 강도도 담을 넘어 굳이 유대교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분명 양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서만 구원이 임합니다. 그러나 절도와 강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유대교와 유대주의에 들어갔었음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유대교는 원래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될 수 있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늘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을 하고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교에 율법은 온전히 지키는 분으로, 문을 통해 들어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도와 강도들인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도 없으면서,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율법과 절기와 제사를 완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고 우기며 유대교에 머물렀다는 말입니다. 그게 담을 넘어 들어간 절도와 강도의 정체인 것입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은 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끝까지 율법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과 은혜의 긴장 속에서 오늘 본문 속에 담긴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을 몇 가지만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양들은 어떻게 구별되어 존재하게 되는가 부터 보지요.

(행 18:9-11)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를 훼방 하고 괴롭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 중에는 이미 내가 택해 놓은 내 백성들이 많이 있으니까 잠잠하지 말고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양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세상에 심어 놓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아직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받지도 않은 상태인데 하나님은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양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셔서 양 우리인, 율법이 다스리는 이 세상 속에 섞어 넣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대언 자 들을 보내어 그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무런 계획이 없이 이 땅을 창조하셨을 리는 없겠지요? 무엇이든지 계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실행이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애초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은 언제 정하셨을까요? 창세전입니다.(엡 1:4) 그래서 개혁신학은 종말이 창조와 구원을 앞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은 세상의 끝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목표지점입니다. 그 하나님의 목표지점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이 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 계획 속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당신의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영원 속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원 속에서 전지전능하신 분에 의해 세워진 계획은 곧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종말이, 즉 계획이 창조를 앞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롬 8:29-30)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을 하나님께서 언제 정하셨다고 합니까? 미리 정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미리 정함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라고 하지요? 알매니언 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서 예지 예정설을 주장하지만 여기서의 안다는 말은 언약 속에서의 앎을 말하는 것이라 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만 알았나니’(암3:2)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앎은 단순히 지적인 앎이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서의 앎이라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언약 속에서 택했으므로 나는 너희를 주인공으로 이 역사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따라서 그 하나님의 아심은 하나님의 언약, 즉 계획 속에서의 앎이므로 그 계획 속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라는 공식이 성립이 됩니다. 그렇지요?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택해진 것이니까요.

(호 11:1) “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잘 보시면 미리 아신 자들을 불러내셨다는 말과 사랑하여 불러내셨다는 말이 이렇게 어우러지지요? 따라서 그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미래에 누가 예수를 믿을 것이고 누가 예수를 안 믿을 것을 아셔서 예수를 믿을 자들을 미리 선택하셨다는 예지 예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 즉 작정 속에서 미리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정하시고 그들을 부르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 속에서의 앎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언약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간단하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크게 첫 언약, 즉 구약과 새 언약으로 구분을 합니다. 첫 언약은 간단히 표현하면 ‘율법을 지켜라 안 지키면 죽이고 지키면 복을 주겠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열심히 지켰고 제사를 목숨 걸고 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첫 언약에 속한 제사나 율법으로는 절대 사람의 속까지 속죄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히 10:1-4)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것은 창세전에 하늘에서 있었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들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복음, 노아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다윗의 언약 등등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언약은 전부 영원 속에서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언약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 원형의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과 모세 등의 당신의 백성들과 언약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언약이 무엇이기에 그 언약을 근거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렇게 살아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되며, 영원한 왕국이 건설되고, 그 왕위가 끊어지지 않는 참된 왕이 출현하게 된다고 하는 것인가?

(히 9:15-22)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유언’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디아데케’는 ‘언약, 약속’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15절에서는 ‘언약’이라고도 번역을 했고 ‘약속’이라고도 번역을 했지요? 그러니까 그 ‘유언’이라는 단어 대신에 ‘언약’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고 다시 읽어보세요. 창세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약속은 그 약속의 당사자인 성자 예수가 죽어야만 효력이 발생하는 그런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당사자가 살아 있으면 그 언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창세전에 죽기로 작정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벧전 1:18-20)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 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0절의 ‘알다’라는 단어는 언약 속에서의 앎을 가리키는 단어라 했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이미 창세전에 미리 준비가 되었던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님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과 약속하시기를 당신의 죽음으로 하나님 백성들을 구속하시기로 굳게 언약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실체가 가시적이며 물리적으로 말세에 골고다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것을 아는 것을 복음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하고 추악하고 무력한 자들이었는데 그렇게 무력한 자들을 위해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성자 하나님의 피를 통해 구원을 하시겠다는 약속에 의해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요, 언약 안에서 우리의 참 목자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본문 바로 아래에 ‘양들이 나를 알고 내가 양들을 아는 것이 아버지가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0:14-15)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제 이 구절이 이해가 가시지요? 하나님이 예수를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아나요? 지식적으로는 아니지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언약 안에서 그 언약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를 언약 속에서 아시는 것처럼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세상 밖으로 빠져 나온 하나님의 양들은 언약 속에서 주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오직 은혜인, 우리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언약이 창세전에 영원 속에서 삼위 하나님 사이에 있었고 그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이 목자를 안다, 성도가 예수님을 안다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히 9:15) 시간이 많이 간 관계로 다음 주에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부르심’과 ‘부르심에 응한 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등에 관해 계속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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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부활절 넷째 주일, 2014년 5월11일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우리는 왜 교회에 다닐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왜 믿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불행해지는 일은 없으며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편하고 재미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 고독이 두려워서, 또는 죽어 천당에 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요소들입니다. 핵심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전체 운명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왜 옳은지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합니다. 즉 진리논쟁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우격다짐으로 우리가 옳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우기면 신앙이 아니라 광신에 떨어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진리논쟁을 벌였고, 그런 진리논쟁의 과정에서 출현한 게 신약성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3독서로 읽은 요 10:1-10절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10절까지이지만 그 내용은 18절까지 이어집니다. 전반부인 1-1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셨고, 후반부인 11-18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문이나 선한 목자나 의미는 같습니다. 양들은 문을 통해서만 우리에 들어갈 수 있고, 선한 목자를 만나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고 생명의 인도자라는 겁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양을 도적질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넘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양을 지키는 게 아니라 도적질하려는 삯군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누굴까요? 이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설교 본문에 앞서 나오는 요 9장은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을 고친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합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사건을 두고 논란이 이어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과 그의 부모를 불러다가 달래기도 하고 협박을 가하기도 하면서 예수님의 범법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안식일 법을 수호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발끈해서 ‘우리도 맹인인가?’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어서 오늘 설교 본문인 ‘양의 문’과 이어서 ‘선한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요 10:19절 이하에서 또다시 논란이 벌어집니다. 예수가 귀신에 들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면 분명하게 대답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리스도다.’하고 직접 대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발언은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전도관의 박태선과 통일교의 문선명을 우리가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주변에 선포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해보라고 하며, 돌을 들어 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이비 그리스도를 도둑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본문 10절은 그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이 하는 일은 도둑질과 살해와 멸망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대상을 파괴합니다. 문제는 이게 겉으로 확연하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도둑이 표시를 내면 도둑도 아닙니다. 작은 도둑은 표시가 나지만 큰 도둑은 아주 은밀해서 웬만하면 눈치를 챌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율법은 대단히 합리적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전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베풀 수 있는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그들은 확 드러날 정도로 틀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행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고친 날이 안식일이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을 매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도 장애 치유를 좋은 것으로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날에 장애를 고쳤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굳이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한 겁니다. 바리새인들도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를 깊이 생각했을 겁니다. 장애를 고친 게 좋은 일이니 안식일 문제는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예외를 허락하면 또 그런 일이 반복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일벌백계로 처리하는 게 옳은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이런 판단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태를 아주 엄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태도를 도둑놈의 그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규정으로 예수라는 존재와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합리성이 있더라도 근본이 잘못되었다면 결국 생명을 파괴합니다. 당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맙니다.

세월호 여객선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대한민국은 지금 총체적인 난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객들을 선실에 남아 있게 하고 자신들만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의 행동은 불가사의입니다. 사고 직후 적극적으로 인명 구조에 나서지 못하고 며칠을 허송함으로써 삼백 여명의 실종자들 중에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해경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질의 종합세트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세월호와 다를 게 없습니다. 입만 열면 경제발전, 경쟁력 제고, 수출, 한류 등을 외칠 뿐이지 생명 존중, 생태 윤리, 정의와 평화, 노동해방, 남북화해, 전인교육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입니다. 교회의 모든 에너지를 교회 성장에만 투입한 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국교회도 역시 비슷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돌로 치려한 바리새인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세련된 복장과 언어구사 능력을 지닌 도둑입니다. 도둑은 은밀하게 도둑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양들이 구원받고 꼴을 얻으려면 이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이라는 사실은 요한복음 곳곳에 나옵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비롯해서 모든 신약성서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둑은 양을 훔치지만 예수님은 양에게 풍성한 꼴을 줍니다. 삯꾼은 위험이 처했을 때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도둑과 삯꾼이 어떻다는 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배고픈 거보다는 배부른 게 좋습니다. 아픈 거보다는 건강한 게 좋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으면 나름으로 만족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즉 도둑질을 통해서라도 그런 조건들을 획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습니다. 이 시대가 그걸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아무도 거기서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다음은 무엇인가요? 그 모든 것의 마지막은 무엇인가요? 죽음입니다. 죽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게 우리의 실존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인생이 뭔지를 아는 척하면서 고상한 인생론을 펼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생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하려는 하는 것뿐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생명에 대한 성경의 설명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생명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은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걸 단순히 공자 왈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즉 인생을 자기의 소유로 여깁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정로도, 또는 넘치거나 모자라는 정도로 진행될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걸 생명이라고, 즉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 설명이 너무 막연하다,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거는 좋은데, 그 다음에 우리의 삶에 무슨 일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라고 요구할 분들도 있겠지요. 설명한다고 해도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소유에서만 삶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존재라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에 마음이 꽉 묶여 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립니다. 수능시험에만 영혼을 맡긴 입시생에게는 바람이 흔들리거나 햇살이 반사되는 참나무 잎을 보라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디에 우리의 영혼을 맡기고 있는지를, 그리고 영혼의 소리를 들을 귀가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풍성하게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 저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노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노력과 업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물을 받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힘이 들어가면 갈수록 이 생명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삶, 생명, 인생에 대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이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쉬운 예로 우리가 세상에 어떻게 왔는지를 생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결합되어 배아가 되고, 그것이 자라서 태아가 되고, 때가 되어 어머니의 몸에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 우리 자신의 노력과 의도가 개입되어 있을까요? 이 위대한 생명 사건은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삶도 사실은 다 주어진 것입니다.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더 근원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이런 생명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해서 더 근원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을 근원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전의 생명은 근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죽음 이전의 생명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음 이전의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생명과 비밀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 이전인 지금 여기서의 삶에 종말의 궁극적인 생명이 숨어 있습니다. 마치 화려한 꽃이 씨앗 안에 숨겨 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화려한 꽃과 같은 생명이 기다려지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 근원적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하고 인식했습니다. 이 생명은 곧 부활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방식으로 채워도 다 채워지지 않는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행하시는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워진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부활생명을 요한복음의 다른 말로 바꾸면 영생입니다(요 11:25,26). 그것을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풍성하게 받는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풍성하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의 조건들은 늘 부족합니다. 돈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합니다. 친구와 가족이 우리를 실제로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런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외로워도, 병들어도 하나님의 생명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런 풍성한 생명을 알고 계신가요? 경험하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의 문입니다. 선한 목자이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이 엄청나게 놀랍고 새로운, 그래서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풍성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받았습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10:1-10) :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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